서문. 

원래의 나는 책을 2번씩 잘 읽지 않는다. 그저 한번 읽고 이후에는 필요할 때 꺼내서 다시 읽는 정도.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별 다른 철학이 있는건 아니다. 그저 다양한 책에 계속 흥미가 가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에 읽을 책이 눈에 보인다. 그러다보면 예전에 봤던 책은 우선 순위에서 미뤄지기 마련이더라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내가 수업하는 학교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다시 봤다.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분명히 봤던 책이고 심지어 이 블로그에 리뷰도 남겼었다. 리뷰 링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서서 책을 훑어보는데, 왠지 글을 읽지 않은 느낌? 기묘한 느낌이 들어서 빌려왔다. 개정증보판이기도 했고. 


다시 책을 읽는데, 참 좋았다. 2010년의 내가 어떤 지점에서 반응했었는지도 알겠거니와, 지금의 내가 어디서 글을 멈추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리해 보고 싶었다. 지금 나만의 정리로. 사실 정리한 지는 거의 한달이나 되어가지만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올린다. 이번 필사는 10개의 개념 중심으로 옮겨적어 보았다. 책의 내용과 조금씩 다르게 편집되었기에, 전체 맥락과 흐름을 알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책을 읽기를.







1. 리더란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주변을 살펴보라. 어떤 그룹이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썰을 푸는’ 인간이다. 상황을 언어화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말과 이야기로 세상을 보는 눈을 홀라당 뒤집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혁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은 늘 새로운 말, 낯선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했다. 

+ 리더십은 삶에 대한 통찰에 달려있다. 
구술 능력이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다. 삶에 인간,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의 표현이다.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이 있어야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므로 글쓰기 훈련 전에 이 능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그러면 발성과 몸짓, 호흡 등 보디랭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하게 되고, 소통의 중요성을 절로 터득하게 된다. 이런 구술 능력은 리더십과 연결된다. 리더십의 대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 능력이다. 주제를 이끌어내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2. 공부란
질문은 세상천지에 널려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가 끝나는 것이라면,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력은 언제,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독서와 공부는 서로 다른 것인가?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무엇인가? 등등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 공부란 네트워킹이다.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어짊을 북돋운다."


3. 학교란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 /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공부에 때가 있다고?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은, 아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학습하는 과정 아닌가. 아이들의 눈이 그토록 맑은 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 들어가면서 갓난아이의 이 경이에 찬 호기심은 학교식으로 재편되어 버린다. 더 이상 삶과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낄 수도, 느낄 필요도 없다. 대신 잘게 쪼개진 학년별 단위 학습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4. 함께 공부하는 것이란
한 사회가 공동체적 리듬을 가지려면, 노인은 청년과 함께 섞여야 하고 어린이와 청년은 노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집합적 기운의 분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단연코 공부밖에 없다. 공부할 때 노인과 청년은 권위와 위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 공부엔 다 때가 있다! 숨을 쉬고 있는 때,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이다. 

4. 독서란
요즘 대학생들의 독서력은 실로 심각하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토론 수업이나 자기주도 학습도 세계와 대상을 학습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헌데, 대체 독서를 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눈을 기를 수 있단 말인가?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다. 

독서란 이것이다. 기억하라. “위로 성현과 짝할 수 있고, 아래로 뭇 백성을 깨우칠 수 있으며, 그윽하게는 귀신과 통할 수 있고, 밝게는 왕도와 패도의 방략을 터득하여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것” 

5. 자유란
카프카가 말했듯이,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 가량, 지금 10들은 게임과 포르노에 전면 노출되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치명적 중독성에 있다. 거기에 한번 붙들리면 헤어나기가 힘들다는 것. 그게 바로 억압이다. 그렇다면 그때 자유란 ‘그 억압에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는가’ ‘그에 맞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법이다. 

6. 고전이란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시간이다. 고전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지만 늘 우리에게 도래할 시간에 대해 예고해 준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고전! 

+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이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읽으면 안 된다.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그런 책으로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반드시 내 몸과 운명을 바꿔 줄 책을 읽어야 한다. 일단 나보다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7. 코뮌이란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건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감을 의미했다.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고뮌이란 기성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다. 

8. 글쓰기란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심급,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지식인에게 있어 글이란 자신의 삶의 특이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현방식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신체적 조성을 바꿀 수 없다면, 담론을 생산할 수도, 코뮌의 리더도 될 수 없다. 내가 공부한 과정은 이렇다. 선배들은 한 마디를 던졌다. “기존 연구와 다른 주장은 뭐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자신의 눈으로 자료를 보라.’ ‘너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설정하라.’ 즉, 차이를 구성하라는 것. 정말 뚫어지게 자료를 보고 또 보았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낱말을 수정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파지를 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곤 했다. 참으로 미미한 차이였다. 하지만 “호리의 차이가 천리의 어긋남을 빚는다”고 하지 않던가. 대상이건 방법론이건 지식인이라면 일단 자신이 던진 물음과 ‘온몸으로’ 마주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화살-되기’ 그러다 보면, 문득 알게 된다. 내가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료가 내 신체를 통해 스스로 웅성거린다는 것을. 세상 가득히 앎의 흐름이 있고, 나는 단지 그 흐름 속을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 하나의 논리로 관통할 것 - 이 두 가지가 내가 석사과정 내내 갈고 닦은 글쓰기의 초석이었다.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 줄 것이다.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제를 바꾸면 된다. “생긴대로 쓰고, 쓰는 만큼 살아간다.”

9. 스승이란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렵다. 배움의 열기가 사라진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10.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소외와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고, 삶을 조직하고, 천하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주자가 말했듯이,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일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야말로 가장 억압적이면서 가장 소외된 계급에 해당한다. 이 억압과 소외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을 배움터로 바꾸고, 지식의 향연을 구가하는 학습망을 조직할 것. 즉, 청춘의 패기와 열정을 모아 지식의 노예가 아닌 지식을 통해 자유를 누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스스로가 ‘호모 쿵푸스’임을 자각해야 하리라. 

"교육의 목표는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콩도르세


이 책의 결론,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나만의 결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짜 공부란, 목적없는 것이라고.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건 '삶을 잘 살기 위한 것'이라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 라거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읽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일이지 공부는 아니다. 공부는 존재의 놀이가 아닐까. 그렇게 함께 놀면서 배우는 벗들과 이를 촉발시키는 스승이 있다면 진정한 삶의 절반 정도는 채워진 것이 아닐까. 심마니스쿨이 원하는 모습도 결국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공부의달인호모쿵푸스인문학인생역전프로젝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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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맨 앞에 나와있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많은 이들이 지금의 시대를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내내 '공부의 달인, 즉 호모 쿵푸스' 만이 이 인문학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호모 쿵푸스'란 무엇인가?
공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의 달인'을 말한다.
마치 쿵푸를 하듯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꿔 나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것이 그의 존재론이며,
"공부해서 남 주자", 이것이 그의 실천론이다.

자, 이쯤이면 호모 쿵푸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나에게 울림이 되었던 말을 (편집을 조금 가해서) 옮겨 놓았다. 함께 공부의 달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



- 학교'코뮌'의 차이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에서만 작동한다. 고로 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그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선생을 만나 어떤 학문을 터득하겠다는 발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학교의 위상, 그 학과의 사회 진출 비율, 그게 선택의 유일한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학벌이 높아질수록 공부와 삶 사이의 소외와 간극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발심이 공부의 출발이자 원동력이었던 셈.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주는 자이다. 그리고 도반이란 그 길을 함께 가는 벗들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었다. 초학자뿐 아니라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면 스승과 친구, 제자 사시의 경계를 서로 넘나들게 된다. 그리하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제자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지기가 되는 '코뮌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과 도반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연령대별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을 하는' 학교제도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오랬동안 학교를 다녀도 평생을 좌우할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대학원생들에게 공부는 참고 견뎌야 하는 지겨운 노동이고, 학과는 스트레스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사제관계도, 우정의 연대도 없는 곳, 거기에서 즐거운 지식의 생성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 공부는 네트워킹!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유포하는 교수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교수들이 대학 안에서 능동적인 학습망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먼저,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시작하면 된다. 소규모일지라도 사제 간에 '즐거운 공부'의 장을 만들어가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합적 관계망을 만들면 그게 곧 '앎의 코뮌'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적 열정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한 일상적 노력도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식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 글쓰기운명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문체는 말투와 동선, 삶의 패턴과 나란히 간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실제로 고전의 시대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그런데 몸이든, 문체든 혼자 힘으론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변이시켜줄 연기조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밑천이 없을 때,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등등. 또 상호 신뢰가 두텁다 해도 가혹한 비판을 견뎌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체력과 끈기, 오기와 집요함이었다. 길 위에 있는 한, 나는 수 많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은 또 나를 아주 낯설고 경이로운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글쓰기가 신체를 단련시켜주고, 나아가 운명까지 바꿔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돈!돈!을 외치며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삶의 낙이라곤 연애밖에 없는 듯하다.

중략..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치명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예컨데 '주역'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상생상극이 필요하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죽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쳐주듯이 아이에게도 적당한 극을 줘야'한다. '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명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 감염촉발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구조적 양태가 싫다면, 먼저 교수들이 열정적으로 배우면 된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 Sitemap 2011.08.17 14:00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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