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일주일에 걸쳐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고 있다. 아니, 만나고 있다. 내가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올해 초에 박찬국 교수가 쓴 <초인수업>을 하나 읽었을 뿐, 그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철학책 역시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 VS 철학>을 비롯한 철학사 중심으로 봤을 뿐,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책은 역시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접했다. 물론 그 어렵다는 에티카를 바로 읽은 것은 아니다. 먼저 이수영 선생님이 쓴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을 만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읽기의 짜릿함’. 그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느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에티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책 중에 가장 완벽한 책이다”라고 찬탄했다. 매우 논리정연하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훔치는 그런 매혹적인 책이었다. 읽으면서도 읽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운, 그런 책이었다. 에티카를 덮을 때쯤, 다시 니체가 떠올랐다. 니체는 <에티카>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나에게 선구자가 있었다네. 그것도 얼마나 놀라운 선구자인가! 나는 스피노자를 거의 모르고 있었지. … 그의 전체적인 경향 - 즉 인식을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만드는 것 - 이 나와 같을 뿐 아니라,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네. … 그는 의지와 자유, 목적론, 도덕적 명법, 비이기적인 것, 그리고 악 등을 부인했어. 설령 차이가 많다고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주로 시대와 문화, 그리고 학문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야. 한 마디로 산마루에 올라 혼자라는 느낌이 이제 적어도 둘이라는 느낌이 되었네."

그들은 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마주했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그는 <에티카>로 스피노자의 저벅저벅한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도 그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었다. 나도 그 옆에서 발걸음을 따라 걷고 싶었다. 니체는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공감했던 것인지, 내가 공감했던 것과 무엇이 비슷한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니체로 넘어가는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 스피노자는 뒤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를 더 탐색하고 싶었다. 그가 주는 즐거움은 너무 크기에, 한번에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니체와 괴테, 들뢰즈를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많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방향, 현재로썬 ‘그들의 철학'을 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니체를 만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강의 준비와 강의 시간을 빼곤 나머지 시간에 나는 니체를 만나고 있다. 우선 이진우 교수가 쓴 기행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를 읽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이문회우에서 주최하는 김동국 선생님의 특강<신의 죽음, 예수의 죽음>도 찾아 들었다. 20차시 정도의 정기 수업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엊그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조금 읽었고 발췌독했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봤던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를 한번 더 복습했다. 암튼 이 정도 니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중간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 마주했던 책과 강의에 나의 의견은 많이 빚지고 있고, 아직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설하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먹기만 해서 변비에 걸렸으니까.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은 너무 많이 하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그들은 대식증과 이따금씩 생기는 복통을 동시에 갖고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야위어간다.” 아마, 올해 들어서 니체에 자연스래 관심이 가게 된 것도 배설에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어떤 두려움도 없이 표현하는 것. 나에게 잠재된 창조적 자아를 깨우는 것. 그 시작은 니체에의 탐구다.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니체로 넘어가기로 하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철학책을 읽는가?
내가 책을 읽은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나는 그저 충동적으로 책을 읽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읽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치지어린 애송이 독서가에 불과했다. 일년에 몇권을 읽었느니 그런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서야 나는 내가 왜 책을 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보는 이유는 결국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답을 한다. 왜냐면 삶은 결국 반응이고, 그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가진 세계관, 고정된 인식의 틀>이라고. 나의 세계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아들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의 경험이 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의미부여가 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삶은 크게 일어난 일과 해석으로 나뉜다. 우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흔히 접하는 예로 컵에 물이 반정도 차 있을 때 누군가는 ‘반밖에 남지 않았네’ 라고 해석하고, 누군가는 ‘반이나 남았네’라고 해석한다는 것. 그 해석을 통해 우린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삶이 펼쳐진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월요일 아침, 바쁜 출근 길에서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매우 기분이 더럽다.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라 회사에 가기 싫은데 말이다. 성격이 급한 누군가는 욱해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을 가정하자. 극단적인 예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 똑같은 욕을 들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월요일 아침과 같은 반응일까? 아닐 것이다. 그저 허허 웃고 지나갈 것이다. 무엇이 바뀐 것인가? 상황에 바뀐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훨씬 더 너그러워진 인식 속에선 그 정도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해석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내가 가진 관점, 세계관, 인식의 틀’이며, 그 세계관을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책은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선 ‘내가 가진 세계관’을 잘 정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로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그들이 가진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이란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결코 교과서로는 습득되지 않는다. 인식이란 것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방법들이 지금으로썬 독서 토론이나 디자인씽킹, 프로젝트 학습이다. 다양한 생각과 체험을 통해 삶에 유익한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앞으론 철학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싶기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도 하고. 암튼, 나는 철학자들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던지는 자들이다.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해석 체계를 버리고, 내가 던져주는 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써 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철학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읽기의 혁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읽고 나면, 새로운 눈을 갖게 되고, 한번 눈을 뜬 자는 다시 감을 수 없다.

철학자들도 다른 철학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경험한다. 탐구하고, 숙고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눈을 발견한다. 1865년 10월 어느날,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노력은 내 자신에게 맞는 삶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행복하게 은둔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읽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상상해보라. 어느 날 나는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내겐 전혀 낯선 이 책을 집어 들고는 몇 쪽을 넘겨보았다. 나는 어떤 마귀가 ‘이 책을 들고 집에 사라’고 나의 귀에 속삭였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책을 좀처럼 서둘러 사지 않는 나의 습관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집에 와서 막 획득한 보물을 갖고 소파의 귀퉁이에 몸을 던지고는 저 에너지 넘치고 암울한 수호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읽기의 혁명성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한권 소개한다. 일본의 니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 굉장히 재미있지 않은가?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하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은 무엇인가?
니체는 이런 사람이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한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된 사람. 34세에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맥을 방황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을 개척한 사람.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었던 사람. 이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의 짧은 약력이다. 나는 니체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짧게나마 내가 느낀 니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에게 니체는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의 삶은 예민 그 자체였다. 강신주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상처에 둔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아파했다. 수 많은 여성들 그리고 트라우마 속에서 자랐고, 평생 아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인생의 절반을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 어릴 적 너무 많은 책을 보고, 눈이 나빠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쨌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니체의 위대한 면이 나온다. 그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한다.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위버멘쉬, 초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쓰고, 생각하고, 또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언제나 아파했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 아픈 것들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아마 그들로부터 자신의 맨살을 봤던게 아닐까? 그가 죽기 얼마 전, 마차에서 매 맞는 말을 부둥켜 앉고 오열한 장면은 그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러한 니체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 나는 ‘힘에의 의지’를 꼽는다.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엔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얼마 전에 다시 보았는데, 이진경 선생님이 쓴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도 권력에의 의지라고 나오더라. 이진우 교수도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한다.) 이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와도 비슷한 개념인데,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모습으로 있고자 한다는 것. 즉,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심지어 약자도 권력을 추구한다. 그들은 강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삼는다. 모든 생명은 그러하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힘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언제 강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책을 볼 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받을 때, 가족들과 함께 연결된 느낌을 가질 때. 그럴 때 강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 활동을 반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힘에의 의지’다. 내가 매월 심톡을 개최하는 것도 단순하다. 그 활동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나의 기쁨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권력 욕구도 없는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혹시 주말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기를 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권력을 추구하는 자다. 왜냐면, 누구에세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자유롭게 쓰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자 권력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말을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얼마나 주말을 간절히 바라는가? 그렇기에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자명하게 들린다. 



니체 전집 / 책세상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가?
이 시점에서, 니체가 기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설명 된다. 니체가 보는 기독교의 논리는 이러하다. “지금 고생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목사였다. 그리고 니체 역시 그에 순응하면서 자랐지만, 결국 맹목적 믿음에 저항한다. “네가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믿어라. 네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한다면, 탐구해라.” 마음의 평화는 니체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의 내세가 현세의 ‘힘에의 의지’를 거스른다고 보았다. 이처럼 니체는 ‘믿음’이란 개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그리스도교는 오직 예수 한명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제들의 종교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의 말에 나 역시 일견 동의한다. 어쩌면 기독교의 숨겨진 메시지는 그의 말대로 ‘사랑’이 아니라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재작년에 로마의 카타콤을 들린 적이 있다. 그곳은 어둡고, 답답하고, 음침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간 수 많은 초기 기독교도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에게 분명 ‘사랑’이 남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곳은 ‘복수심’이 자라기 좋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지내지만, 내세에선, 하늘나라에선 ‘두고보자’는 복수심.”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부폐한 한국 교회나 사이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목도한다. 길거리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물론, 참다운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니다. 참다운 종교는 언제나 죄와 벌이 아닌, 현재를 이야기 하니까.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보상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죄>, 즉 신과 인간 사이를 멀게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 -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네 안에’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예수를 치켜세워 ‘신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어버렸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았던 대로, 그가 가르친 대로 죽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뜻에 맞게 살았고, 행동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그걸로 이미 완전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힘에 의지’에 따라 살았다. 그 완전한 존재를 불완전하게 만들고 의지한게 어쩌면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재단이 아닐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니체는 목 놓아 외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그래야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사람들이 다시 ‘힘에의 의지’를 되찾지 않을까? 내세를 위해 지금을 무기력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해서.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니체의 이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게 한다.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소멸. 뒤를 이어 찾아온 허무주의의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신이 죽은 시대다. 종교적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내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돈’을 이야기한다. 벤야민이 얘기했듯, 자본주의라는 ‘세속화(secularization)’된 종교가 우리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린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앞서 말했던 기독교가 ‘내세’를 이야기한다면,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둘 다 본질은 같다. 종교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못 살게 하고, 자본주의는 퇴직 이후를 걱정하게 하느라 지금을 못 살게 한다. 그래서 이 ‘의미의 소멸’ 앞에서 우린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허무주의가 문 앞에서 서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로마 카타콤 내묘실



이러한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앞서 논리를 정리해보자. 니체는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그와 반대되는, 되려 힘을 억압하는 논리를 폈으며, 니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안전한 믿음을 부수고, 불안한 진리를 찾아서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신은, 진리는 없다는 것. 이러한 불안한 의미의 소멸이 가져오는 허무주의 앞에서 니체는 어떤 대안을 내놓았을까? 그는 기나 긴 사유 끝에 ‘영원회귀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그건 1881년 8월, 그에게 찾아온 번뜩임이었다. 질파플라나 호수가 가져온 선물.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련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 즉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적 정식은 1881년 8월의 것이다. 그것을 종이 한 장에 휘갈겨 쓰고,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지면”이라고 서명했다. 그날 나는 질파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주글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지금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고 소리친다. 그저 지금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는 지금 강해지고 있는가? 너의 '힘에의 의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래서 강신주 선생님을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정오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묻는다. 그는 진리를 부정한게 아니라, 진리의 자명성을 부정한다. 그는 오로지 회의하고 순간에 산다.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나는 지금 이 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열렬히 맞이할 수 있는가?" 나에겐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딱 5분만 있다가’ 아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아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어떤 일이든 그 순간 해 버린다. 성격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언제나 느릿느릿. 해야 할 일도 ‘딱 5분만 있다가’ 한다. 그런데 막상 ‘5분 있다가’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순간 순간에 살지 못한다. 시간의 찰나성을 언제나 간과하는 것이다. 나에게 마치 영원한 시간이 허락될 것 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곤 언제나 후회한다. 지금의 이 삶을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무엇을 고쳐 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내 자세를 고쳐잡게 만는다. 나에게 힘을 뺏는 것들을 멈춘다. 나는 또 한번 다짐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무분별한 욕망에 선을 긋고, 진정으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그렇게 자유로울 때 나는 이 삶을 다시 영원히 반복하고픈 욕망에 빠진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삶의 예술가
우리의 삶, 모든 생성과 죽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은 ‘목표’를 쫓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할 수 있을까?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단이다. 하지만, 만약 목표가 없다면 무엇인가? 니체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최종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문을 뒤집어 보자. 삶은 어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목표다. 이 답에서 나는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당신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는가? 그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굴리지만 그 바위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신의 노여움으로 영원히 돌을 굴리는 형벌에 처했지만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멈춘다는 것은 신께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신에게 반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거창한 목표 따윈 없다. 그저 내 앞에 놓여진 돌을 굴릴 뿐이다. 순수하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롭다는 것은 양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처럼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상의 지루함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형벌과도 같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감내한다. 인생을 살만하다고 느끼기 위해선, 일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일상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형벌이다. 최대한 피하고 싶은, 굴리기 싫은 돌이 되버린다. 내가 그런 편이다. 일상은 내 삶에서 어느 새 뒤처지기 마련이더라. 나에게 권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등 우리에게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이 일상을 이제 목적으로 바라보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 마치 처음 설거지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경이감이 어느새 익숙함이 되어버리지 않게 스스로를 경계하자.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허용된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그렇게 살자.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하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니체가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제 드디어, 니체의 초인, 위버멘쉬가 등장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이제 니체는 쉴세 없이 몰아친다. 위버멘쉬에겐 사람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들은 별이다. 니체는 이렇게 통탄한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빡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 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 그 자가 인간 말종(말세인)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경멸할 수도 없다. 어떤 일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 그 역동성. 이제야 그의 ‘정오의 사상’이 환히 빛을 발한다. 


낙타와 어린아이


당신은 어떤 혼돈을 품고 있는가?
이제 마지막 장이다. 니체는 이제 인간말종(말세인)에서 초인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한번 따라가보자.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엇은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 짐깨나 지는 정신는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첫번째, 그 시작은 낙타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현실에 안주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안에서 낙타를 본다. ‘5분만 있다가’라고 말하는,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합리화하는, 타협하는, 수동적인, 그런 낙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낙타가 산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낙타는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섬겨온 신, 그리고 주인을 죽인다. 낙타가 ‘해야한다’를 의미한다면, 사자는 ‘하고싶다’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 사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자에게서 주체성, 혁명을 본다. 나도 내 안에 사자를 들여다 본다. 전공을 거스르는, 양심에 따르는, 주위 사람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사자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사자도 산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사자는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 그리고 진지하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망각이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다. 그는 어떤 ‘목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한 ‘자기원인!’ 그 어떤 목적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순간’에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도 내 안에 어린아이를 본다. 하지만 아직 잠들어 있다. 가끔 깨어나서 뭐라고 하지만, 금세 잠에 빠진다. 

'니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제 이 질문은 헛되다. 되물어보자.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을 장착해보자. '나는 니체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가?' 우린 별자리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별자리에 그려진 수 많은 그림은 이제 지워졌다. 스스로 별자리를 그리고, 이름 붙여야 하는 시대를 우린 건너고 있다. 그 어떤 정해진 답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말했듯, 오로지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의미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즉,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기억하자. 세상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 말. 그 말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 이제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두번째 목소리는 바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말 조차 허무하다는 말이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제 그 텅빈 하늘에서 당신는 어떤 별을 탄생시킬 것인가? 당신의 혼돈은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  


세상에는 참 법칙이 많다.
열역학 1, 2법칙 처럼 과학적으로 정의된 법칙이 있는 반면에, 파레토(20:80)법칙처럼 결과적(귀납적)으로 정의되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너무나 많이 통용되기 때문에 법칙이라는 말을 쓰는 법칙도 있다. 

내가 예전에 '깨진 유리창의 법칙' '복잡계 개론' '디테일의 힘'이라는 책을 거의 연속적으로 읽었을 때 일어났던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법칙이 나에게는 상당히(?) 의미있게 다가왔는데, 왜냐하면 어렵풋 하게 생각되었던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라는 가정이 실제로 누군가에 의해서 법칙처럼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통계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아니다.)

하인리히 법칙 (세상을 움직이는 100가지 법칙 중에서)
세상 모든 것은 징후를 앞세우며 다가온다. 몇 가지 잠재적인 징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연처럼 겹쳐질 때,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번의 작은 사고가 지나가고 잠재적인 사고는 더 많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통계적인 법칙으로 정립한 사람은 하버드 윌리엄 하인리히였다. 그는 보험감독관으로 일 하면서 크고 작은 산업재해를 보며 그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꺼라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그에 의하면 한 번의 대형사고, 이를테면 산업재해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그 이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인한 부상이 29건 발생했으며, 부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300건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에 발표된 이 논문은 하인리히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그후 하인리히 법칙은 타이와 피어슨에 의해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 교통 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도 이와 근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 하인리히 법칙을 숫자로 표현하면 300:29:1 의 법칙이 된다. 즉, 사소한 것이 큰 사건와 연결되어 있고, 절대로 큰 사건은 징후나 조짐없이 갑자기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분이 전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법칙을 잘 활용하기 위한 예로는 큰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서 등산객들의 담배를 철저히 금지시킨다던지,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서 사소한 교통법규를 강화하는 등의 방법이 쓰여진다.

이런 하인리히의 법칙과 비슷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법칙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다. 이 실험 또한 '일단 금이 간 유리창은 전체가 쉽게 망가진다'는 이야기가 주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 (세상을 움직이는 100가지 법칙 중에서)
미국 스텐퍼드 대학의 심리학과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흥미 있는 실험을 했다. 낙후된 골목에 상태가 비슷한 자동차 두 대를 세우고 한 대는 보닛을 조금 열어둔 상태로, 다른 한 대는 보닛을 열고 유리창도 조금 깨진 상태로 방치했다.

그리고서 1주일 후에 보았더니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는 배터리와 타이어를 빼가고 사방에 낙서를 하고 돌을 던져 거의 고철상태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유리창이 조금 깨진 것 밖에 차이가 없는 데도 그런 차이가 났다. 여기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나온다. 일단 금이 간 유리창은 전체가 쉽게 망가진다는 이야기다.


"전체가 곧 부분이고, 부분이 곧 전체다."라는 말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전에 본 '홀로그램 우주'(미국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저서)라는 책에서는 우주의 구조가 홀로그램과 같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홀로그램이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프랙탈(fractal)이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자기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말한다.

홀로그램우주
카테고리 과학 > 청소년 교양과학
지은이 마이클 탤보트 (정신세계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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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프랙탈은 불교의 몇 가지 개념과도 비슷하다.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 에서 참고)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은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철학이다. 프랙탈은 부분이 곧 전체임을 나타낸다. 나무의 예에서 봤듯이, 하나의 줄기는 전체의 나무 줄기의 한 부분이지만, 그 모양과 형태는 유사하다. 프랙탈에서 부분은 전체의 모습을 하고있고, 전체는 부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일즉다 다즉일의 개념과 일치한다.

혼자 집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보게된 책이 '복잡계 개론'이다. 이 책은 2009년에 처음 복잡계를 알게 되었을 때 본 책이었는데, 나에게는 복잡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고마운 책이다. 개론이기 때문에 잘 정리된 복잡계 관련 개념이 많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지만, 특히 이 책의 111페이지를 보면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란 성질이 나온다. 간단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초기 조건의 민감성 (복잡계 개론 중에서)
혼돈을 구체적으로 처음 인식한 인물은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였다. 다음은 1908년에 그가 한 대중강연의 일부이다. 이 강연에는 오늘날 널리 확립된 혼돈의 본질인 '초기조건에의 민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원인이 결국에 놓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결과는 우연이야"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설령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안다고 하더라도 태초의 상태를 전부 알수는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현상을 예측했고, 현상은 법칙을 따른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초기조건의 아주 작은 차이가 최종현상에서는 아주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초기상태의 작은 오류는 최종상태에서 어마어마한 오류를 낳습니다. 예측은 불가능해지고, 우리는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


다시 정리하면, "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차이가 최종현상에서는 아주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삶을 사는 태도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사소한 일은 '대충' 하려는 사람
2. 어떤 일도 '디테일'하게 하려는 사람

대충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이 된다. 자전거를 몰고 싶은 사람은 대충 배워도 금방 탈 수 있다. 처음에는 훨씬 더 빨리 타고, 또 멀리 간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싶은 사람의 경우 대충 배워서는 큰일 날 수 있다. 하물며 전투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대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초음속으로 하늘을 날면서, 전투기 조종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전투기 조종사'에게는 '대충'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가고 싶은가? 삶에서 어느 정도까지 나아가고 싶은가?"
이처럼 "삶에서 스스로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지금 하는 행동을 '대충'할지, '디테일'하게 할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에게 가장 빠져있던 부분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개념 혹은 법칙들과 맥락이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디테일의 힘'에서 인상깊었던 문장들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디테일의힘
카테고리 자기계발 > 비즈니스능력계발 > 비즈니스소양
지은이 왕중추 (올림,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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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 (디테일의 힘-왕중추- 중에서)
p.77 디테일한 부분은 어딘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보라가 바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주지만, 바다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p.79 GE의 잭 웰치는 기업관리의 대가로서 '세계 관리자들의 관리자'로 불린다. 예컨데 그는 직접 간단한 편지를 써서 중간관리자, 심지어는 말단사원들에게 건네기도 하고, 1000명이 넘는 관리직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가 하면 GE의 고위 경영진 채용전형에 지원한 500여 명의 지원자들을 일일이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작고 디테일한 부분들이 쌓이고 쌓여 이른바 '잭 웰치식 관리'가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했다. "관리의 절반은 과학이고 나머지 절반은 예술이다"

p.90 디테일한 부분을 세심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도요타처럼 되지 못했을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디테일과 함께 존재한다. 동종업계 간 승부는 바로 이 디테일에서 판가름난다."

p.123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면 매일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태를 추구할 것이고, 머지않아 주변 사람들까지도 그 열정에 감화될 것이다." - 샘 월튼

p.181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높은 산이 아니라 신발 안에 있는 작은 모래 한 알이다."

p.221  어떤 디테일도 놓치지 말라  -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지막으로 떠오른 말이 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디테일 속에 신이 있다.'

정말 멋진 말이다.

  1. 이종희 2011.09.04 12:42

    너무나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집 불 날뻔하다가 하인리히법칙을 알게 되었고 님의 블러그까지 방문하게 되었네요. 공감이 많아서 댓글 남깁니다. 아쉬운건 이글을
    제 블러그에 퍼 가고 싶은데...복사가 안되어서 아쉽네요.

    • 네 감사합니다 ^^ 집에 불이 날 뻔 했다니 큰일날 뻔 하셨군요~ 다행입니다. ㅎㅎㅎ 그리고 글 퍼가는 기능이 없나요? 저도 잘 몰라서요~ 어떻게 퍼가는지 저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는 말한다.
"두 사람이 업무에 대해 항상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불필요한 사람이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갈등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는 더 깊어지고,
조직의 창조적 생산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갈등을 지배할 것인가? 갈등에 지배당할 것인가?

오늘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보다가 나온 말입니다.
참 멋지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톰 피터스라는 사람을 안 좋아하기가 힘든거 같습니다. ㅋㅋ
갈등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


왜 이런 뜻을 가졌나, 하고 보면 갈등의 어원이 그 힌트가 됩니다.
갈등칡나무 갈葛 + 등나무 등藤 이렇게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둘 다 회전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데요,
재미있게도 칡나무와 등나무의 회전 방향이 서로 정 반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심으면 서로 꼬이고 얽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즉, 진짜 의미로서의 갈등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을 때는 발생조차 하지 않습니다.
같은 방향(목표)을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회전 방향(의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갈등인거죠..
갈등이 없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겠지만, 또한 순조롭게 망할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충분한 가설과 실험, 검증없이 그냥 되는 일은 원래 없으니까요..

이 처럼 '갈등'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극적인 스토리는 언제나 갈등 속에서만 태어나니까요~ 마치 질서는 언제나 혼돈 속에서만 양태되는 것 처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갈등이 발생했을 때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그래서 '누가 잘못했냐'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석합니다. 아직도 '다름'과 '틀림'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

사실 삶을 살다보면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이 효과적이었냐?, 무엇이 효과적이지 않았냐?'를 분별하고
가능한 빨리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갈등의 원인을 처벌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그 문제의 원인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이구요..
(시스템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우리는 그 진짜 본질을 알기에는 너무나 많은 착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들이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인데,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거의 '사람'으로 한정짓고 해석하니까요..)

단순해 보이는 '갈등'에 대한 것도 이렇게 쓰다보니 참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우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구나.. 하는 것을 요즘에서야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언어에 거의 종속되어 있고,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의 사고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강유원 교수님'몸으로 하는 공부'손영기 한의사'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 몇 가지를 끝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으로하는공부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강유원 (여름언덕,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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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한의학어떻게공부할것인가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손영기 (북라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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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깨닫기 이전에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와 인식을 철저히 지배한다.
생각이 깊을수록 언어력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쓰임이 없을수록 사고력이 증진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만든 언어의 틀 속에서만 사고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숙은 언어의 학습 과정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1. 호련 2011.05.22 22:47 신고

    ^_^ 저도 톰 피터스 좋아요. ㅎㅎ

  2. 난봉 2011.06.30 14:22

    좋은글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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