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겨울에는 인문학을 읽어야 하니까 :)” 

INSIGHT
“길버트나 윌러스 둘 중 누가 그들 사이에 놓인 간극을 메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월러스가 취한 니체적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한 행동 주체이다. … 이와 반대로 길버트는 루터의 후기 견해를 따른다. 길버트에 따르면, 우리는 신의 신성한 의지를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일 뿐이다. … 이 둘 사이에 또 어떤 것이 있을까?” (p.104)

“계몽주의에서는 독립을 위해 애쓰는 모든 삶의 방식이 칭송을 받는다. 자율적 존재로서 스스로 만든 법만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자기 충족성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천국의 기쁨을 물리친다는 것은 곧 죄의 본질에 다름 아니었다.” (p.227)

기독교가 길을 잃은 것은 그 기본적 방향성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방향 전환 때문이라는 비판이 이 속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가 자신만이 참된 신앙이라 고집할수록, 그리고 전체적이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진리라고 주장할수록, 그것은 더욱 고립에 빠질 것이고 공동체 정신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초월적이고 신성한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여기 지상에 이미 주어져 있는 공동체적 행동과 다양한 선들은 포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설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구분하는 기예는 어떻게 계발할 수 있을까?” “광적인 지도자의 전체주의적인 선동에 휩쓸려본 경험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의 위험하고 황폐한 결과를 경험할 때만, 따를 만한 지도자와 배척해야 할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p.372-373)

REVIEW (라기 보단 정리). 
고대 그리스는 ‘만신전’이 존재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하나의 원리는 없었다. 그저 각기의 탁월함을 추구했을 뿐.
중세에 들어서, 우주적 위계 질서가 잡힌다. 그리고 모든 의미는 신에게서 나온다. 다른 어떤 가치도 신 앞에선 무가치하다. 
데카르트는 의미의 재설정자다. 모든 행위의 주체는 ‘자아’가 된다. 호메로스가 말했던 ‘경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답은 무엇일까? 

모비딕의 다신주의, 이는 다양한 의미와 진리로 구성되는 세계다.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 그것을 이 책은 제안한다. 




안녕하세요? :)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 범인은 누구인가? 
'서울 성동경찰서는 6일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해)로 최모(35)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4월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언제까지 직업 없이 집에 있을 거냐,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는 어머니 황모(53)씨 말에 격분해 발로 마구 차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최씨는 평소 취업 문제 등으로 어머니와 자주 다퉜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어머니가 쓰러지자 119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으며, 황씨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최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취업과 관련해 스트레스를 주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어머니를 숨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어느 날 보았던 뉴스 기사입니다. 존속살인라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죠. 저 역시 크게 놀랐는데요. 범인은 누가봐도 최모씨입니다. 정황도, 증거도, 범인의 자백까지. 모든 상황이 명백하죠. 하지만 한번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요?"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폭력은 크게 2가지로 표현됩니다.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이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뉩니다.) 무엇보다 폭력이란 말로 인해 우리가 떠올리는 상투적 관념에서 한 걸을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번 천천히 볼까요. 첫 번째, 주관적 폭력입니다.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며, 누구나 손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특히 어릴 적에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한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러한 물리적 폭력이 결코 용인 되어선 안 됩니다만, 그 때문에 사건의 심층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장교는 <게르니카>를 보고, 그림에 드러난 모더니즘적 ‘카오스’에 충격을 받아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요?” 피카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폭력이란 무엇인가, P.37-38)

2. 구조적 폭력이라는 ‘기만' 
두 번째는 객관적 폭력입니다. 특히 이번에 저는 언어 폭력으로 대변되는 상징적 폭력 보다도, 구조적 폭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간략히 상징적 폭력은 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따돌림, 인터넷을 통한 악성 댓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들어가면 개념이 다소 복잡해서 제외합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인데요. 여기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거나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린 쉽게 그것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에 굉장히 비판적이고,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유명한데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라고요.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52) 그는 이처럼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완화책을 마치 해결책처럼 제시하는 것을 ‘기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이를 대의를 위해 내놓은 카네기 같은 사람을 대표적인 ‘기만적 사례'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겐 어떻게 보이나요?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이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구조적 폭력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 기업과 국가들. 겉으론 약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은 행동들 말이죠.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 외에도 지젝은 다양한 ‘폭력’에 대한 사유를 끌어냅니다. 문화적 폭력부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신적 폭력까지. 이 책을 보고 나면 무엇보다, 폭력을 보는 관점이 조금은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IS'의 테러와 폭력이 단순히 광인의 미친 짓, 세계에서 없어져야 할 암적 존재들로 끝났다면.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과 구조는 뭘까?'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용답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에 모든 ‘초점’을 빼앗기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말로 IS가 한창 말썽일 때 그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공부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맥락을 이해합니다. (물론 이해는 하되, 용납을 하진 않습니다.) 그들과 서구 세력간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어서 왜 이렇게 꼬였는지 말이죠. 사실,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군 전쟁, 2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석유임을 간략히 밝힙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나중에 따로 대화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엄마를 살해한 아들. 이 비극적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는 주관적 폭력을 행사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한 그의 어머니도 ‘상징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다들 공감 하시리라 믿지만, 언어를 통한 폭력은 결코 신체를 통한 그것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가해자 이지만, 어쩌면 무언가의 희생자인지도 모릅니다. ‘취업’이라는 구조적 난제, 그리고 사회적 폭력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국가는, 기업은, 그리고 우리들은 이 거대한 책임에서 과연 면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짜 범인은 청년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현대 사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오늘은 10월 29일입니다. "박근혜 하야하라"는 수 많은 시민들에 의해 외쳐졌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 앞에서 우린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소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폭력일까요? 일부 과격해진 시민이 폭력을 저지른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자들이 웃으며 그런 것일까요?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2005년 파리 교외에서 일어났던 약탈과 같은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기만 하면 여전히 급진적 사회 변혁을 믿고 있는 소수의 좌파들에게 묻는다. “이런 짓을 한 건 당신을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게 이거요?” 그러면 우리는 피카소처럼 대답해 줘야 한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이건 당신네들 정치가 가져온 결과잖소!” 

우리나라에선 19세가 넘으면 성인으로 대우 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상,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과 구조적 폭력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젝은 “저항하라!" 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번 사건을 유심히 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웃으며, 손 한번 쓰지 않고 폭력을 저지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는 지는 모른채 말이죠. 그리므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4. 상실의 시대를 견디는 법 
아직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남았습니다. 앞서 ‘저항하라’고 했지만, 지젝은 아이러니 하게도, "행동하라!, 혹은 참여하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이외인데요. 지젝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서둘러 행동하지 말고, 더 공부하고 공부해서 진짜 혁명을 이루라고 말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면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 변화’를 일구어 내라고 촉구합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요. 

이는 저에게 마치 조광조가 아닌 퇴계 이황과 안창호가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 어떠한 변화도 급작스럽게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는 결국 급진적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궁극적 변화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3일 천하'란 말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1979년에, 그리고 1987년에 경험했던 일이죠. 하지만 이황과 안창호는 달랐습니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올곧은 학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서원창설운동’을 벌립니다. 그로 인해 사사한 인재만 300여명에 이릅니다.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도 ‘흥사단’을 조직하며 후임들을 양성해 나갑니다. ‘테러’와 같은 급작스런 방식과 다소 대조적이지만 더 근본적입니다. 

"그대는 바둑 두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판 전체를 망치지 않던가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묘년에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한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대단한 명성을 얻고 나서는 대번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노라고 자부했지요. 임금님도 그가 명성이 높은 것을 좋게 생각하시어, 그를 두텁게 신임하셨고요. 그러니 이것이 바둑으로 치면 수를 잘못 두어 일을 망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황의 '도산에 사는 즐거움’ 중에서) 
 
지젝의 조언은 저에게 ‘균형을 갖추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지나치게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차갑게 외면하지도 않는 것. 그 균형 속에서 ‘대안’을 찾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열심히 공부하던 이는 이제 행동해야 하며, 뜨겁게 행동하던 이는 공부해야 합니다. 뜨거워지고 다시 차가워지면서 우리 모두 단단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회'는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허망하고 비참한 그런 상실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지만,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들풀은, 쓰러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1. 우린 언제 생각을 시작하는가?
정답 : 고통을 겪을 때

내가 믿고 따르는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때 우린 상처를 받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문제를 설정하고,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의 수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직접적으로 느끼는 나의 고통과 함께 (지금 당장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고통!) 진리 찾기는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사유를 산출해야 한다. 오로지 크나큰 고통, 우리를 장작으로 태우는 것 같은 길고도 느린 고통만이, 우리 철학자들을 궁극적인 심연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 니체

‘한번, 책을 읽어볼까?’라는 인위적인 결심 속에서 진짜 진리에 대한 사유는 시작되기 어렵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실제적 문제 속에서 ‘자기 주제’를 갖고 탐구하고 책을 볼 때, 진짜 공부는 시작된다. 

2. 위기의 시대에 생각은 시작되었다. 
인류는 어떻게 지식을 축적시켜 왔을까? 그건 바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절실함 때문에 사유를 진행시켰을까? 당시 유럽사회는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순간, 사유는 시작한다. 

후설도 마찬가지다. 상대주의에 빠진 유럽 학문의 풍토. 이러한 시대에 ‘보편적인 믿음과 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후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하이데거 또한 ‘허무주의’라는 위기 앞에서 사유했다. 

3. 치료로서 인문학. 
이처럼 인문학의 사유는 애초에 ‘상처’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치료’는 인문학의 인위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문학의 ‘돌아보는 것’은 곧 ‘비판'을 말하고 비판(Critique)의 어원은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의미한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 사태를 직면하고, 치료하는 것. 그것이 비판으로서의 ‘인문학’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이 상처를 만든 잘못된 사태를 고쳐나가려는 실천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치유이자,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만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이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위기의 심연에서 우리는 우리를 치료할 수 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삶의 뼈아픈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고통 속 문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치료의 끝은 무엇일까? 그것은 완쾌가 아니다. 치료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이 이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지, 그 판단 좌표를 제공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힘을 가진다. 그것이 생각의 힘, 인문학의 힘이다. 


이 글은 브런치 매거진에 동시에 연재되었습니다. 좀 더 제대로 보시고 싶은 분들은 링크를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옮겨 왔더니 이상해서 글만 올립니다. :)  










지금부터 쓰는 이 글은 내가 꼭 쓰고 싶었던 주제다. 첫 구상을 2013년에 했으니,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3년 정도 하게 되면, 최초에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지 까먹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반성한다. 그저 쓰면 되는 것을 미뤘던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보태고 싶다.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이 글의 모티브는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란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책은 하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야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사실 마야 제국은 그리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마야제국의 인구가 1,500만 명을 상회했으며 인구 밀도는 오늘날의 시카고와 같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내부 시스템도 잘 갖춰진 하나의 국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기 750년부터 850년 사이에 돌연 자취를 감춘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 문명 붕괴의 진정한 원인

레베카 코스타의 결론은 이것이다. 마야인들이 직면했던 문제의 복잡함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는 것. 그렇게 가속화된 만성적 문제가 오랜 시간 번영한 마야 문명을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이다. "어떤 사회가 더 이상 문제의 해결책을 ‘사고’할 수 없게 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인식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사회가 일단 이 인식 한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종국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해당 문명을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바로 붕괴의 진정한 원인이다.” (p.35) 저자에 따르면 사회가 이렇게 위기에 처하기 위해선 몇 번의 징후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정체 상태다. 더 크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지만, 기존에 해결하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미친 짓’이 연상된다. 이것은 미친 짓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은 어떤가?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동 아닌가? 기존에 해보지 않은 행동 그 자체가 너무 두렵고 무서운 까닭에, 우린 ‘익숙한 것’만 반복하면서 자신을 위안한다. 마치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새로운 시도를 겁내면서, 자신에게 익숙한 토익과 스팩에 매달리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해 왔던 행동이 공부이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징후는 이것이다. "상황이 더욱 절망적으로 악화되면 두 번째 징후가 나타난다. 즉,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다. … 몸은 점점 지치고 그에 따라 두려움이 고개를 들지만 어떤 데이터, 정보, 사실로도 우리의 믿음을 꺽지는 못한다.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p.40) 믿음이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 이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며,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을 습득할 수 없을 때 사실 대신 믿음을 택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고, 이 책 <지금 경계선에서>에서는 '입증되지 않은 관념'을 뜻한다. 그리고 지식은 믿음과 반대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로, 지식은 어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은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믿음이 이러한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사람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 믿음을 흔들려는 모든 이는 바로 적이 된다. 맹목적 믿음은 언제나 그런 외부와의 갈등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어떤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십자군과 나치 그리고 IS에서 그 공통점을 확인한다.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어. 

사실, 어느 정도의 믿음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하루의 시작에서 끝까지,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아마 인간은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린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 ‘믿기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있고,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면 차가 멈출 거라고 ‘믿기 때문에’ 무사히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도 있다. 그건 바로, 믿음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그렇다고 여기면 되기에 믿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믿음보다 획득하기 훨씬 어렵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식을 얻는 데는 추상, 탐구, 학습, 추론, 분석, 종합, 의사결정, 판단과 같은 복잡한 인식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모방, 응용, 해석, 검토 등도 필요하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하면 지식 습득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p.42) 단순한 결론이지만, 당시 책을 읽던 나에겐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을 탐구하는 쪽보단 믿음을 따르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구나. 물길로 치면, 저항(바위나 나무)이 적은 쪽으로 더 많은 물이 흐르는 법이고, 개념으로 말하자면 ‘확증편향’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 쉬운 말로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자명한 사실. 왜? 그게 쉬우니까. 




2) 우리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수 있을까? 

마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비에 의존해서 물을 공급받는 상태였고, 그것이 꽤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수량이 지속해서 감소세를 보였음에도 마야 시민들은 그 상황을 직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를 회피한 결과, 그들은 거대한 ‘의식과 재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파국을 맞이한다. 마크 스티븐슨 기자는 “고고학자들, 인간제물의 증거를 발굴하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제물이 된 사람들은 심장이 도려내어지거나, 목이 잘리거나, 온몸에 화살이 맞거나, 돌에 맞거나, 무거운 것에 눌려 으스러지거나, 피부가 벗겨지거나, 산채로 묻히거나, 신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던져지면서 죽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아이들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45) 이렇게 마야인들은 이성과 믿음 사이의 균형을 잃고, 입증되지 않은 맹목적 의식에서 모든 답을 구하고자 했다. 마야 제국이 멸망한 외부적 원인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부적 원인은 단순하다. ‘이성과 믿음’, 그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문명도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일방적으로 휩쓸리는 법은 없다. 모든 건 함께 이루어지는 법이다.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소장이나 하버드대학 교수인 야니어 바얌은 그의 저서 ‘메이크 싱즈 워크’를 통해 복잡성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림짐작으로 볼 때, 유기체가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유기체의 복잡성이 환경(모든 규모의 환경)의 복잡성과 대등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2016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디에 와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당연히 살아남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불행하게도 세계의 석학들은 그렇게 진단하지 않는다. 이미 그 경고는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인터뷰를 모아서 편집한 책 <문명, 그 길을 묻다>에는 제레미 다이아몬드 (총,균,쇠 / 지금까지의 세계 저자)의 확신에 찬 의견이 담겨있다. 그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 ‘1000년 이내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인자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스티븐 호킹은 틀렸어요.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1000년의 시간이 남이 있지 않아요. 단지 50년 뿐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새존을 위한 문제를 풀든지, 아니면 완전히 망치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 이 별을 망쳐놓고 다른 별을 찾겠다고요? 이것은 답이 아닙니다. … 지금 우리별을 망가뜨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p.21)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자원은 50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곤 “그 어떤 결정일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 가장 마지막에 남이 있을 그 아이를 생각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p.48)고 말했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분명 경계에 서 있다.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그저 주저앉고 말 것이냐? 지금은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다. 눈과 귀를 열어야 할 시간이다. 호흡해야 할 시간이다. 멈춤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마지막 물고기를 잡고서야 돈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는 인디언 속담을 기억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 모두가 말이다.




3) 믿음과 지식의 균형, 그 시작은 무엇일까?

혹시, 위에서 언급 된 담론이 너무 커 보이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나의 삶으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실은, 한 문명의 흥망성쇠와 한 인간의 삶은 닮았다. 여기서 돌이켜봐야 할 것은 우리네 삶이다. 다시 말해,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인생의 암흑기’를. 어린 시절 이리저리 읽었던 독서는 차치하고,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시기는 바로 ‘입대 이후’다. 많은 남자들에게 군대는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다. 나에게도 그랬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낯섬과 여유’가 아닐까. 일상에서 떨어진 낯선 공간과 2년이란 시간이 주는 여유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운이 좋게도, 난 책상 앞에서 근무하는 보직을 맡았다. 책을 접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병과 일병 때, 나는 마음대로 책을 읽었다. 어쩌면 가장 자유롭게 생각하고, 책을 읽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독서량에 스스로 뿌듯했고, 목표도 세우고, 일기도 썼다. 문명으로 비유하자면, 고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철학의 특징은 ‘하나의 사상’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레토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세상의 근본 물질'에 대해서 탐구했고,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성찰했다. 정해진 것이 없었기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기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줄줄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고대 이후, 중세가 찾아온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된 시대. 그리고 중세 시대에 들어서, 앞서 말한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건 우연히, 어쩌면 필연적으로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상병이 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타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었고, 이어서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과 ‘지구별 여행자’를 읽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영적인 어떤 것’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구나! 그리고 그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난, 전역 이후론 뭔 뜻인지도 모른 채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뉴에이지 계열의 ‘람타’ 그리고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경허 선사의 일대기) 그런 책들을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보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와 생각에 내 모든 일상에 가득 찼다. 그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깨달음’이었다. 나는 깨닫고 싶었다. 하나의 진리를 꿰뚫고 싶었다. 실은, 깨달음이란 방편으로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보는 편이 무방 하리라. 

나는 2005년에서 2008년을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정의한다. 굳이 문명으로 표현하자면, ‘중세 시대’다. 물론, 전적으로 어두운 것은 아니다. 즐거운 경험도 많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에니어그램’이나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운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분명 “치우쳐 있었다"는 것이다. 내 안의 다양한 자아가 꽃 피어나도록 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자아만 활발히 작동한 시기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의 종류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뉴에이지 책, 종교 경전, 그리고 깨달음에 관한 책만 읽었었다. 게다가 그 권수도 많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믿음과 지식’의 균형을 찾고자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까? 사실 거기엔 ‘하나의 믿음에 경도되어 자신의 삶을 망친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깨달음을 쫓아 자신의 삶을 버리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고, 위험해 보였다. 내 삶을 위해 시작한 공부가 어느새 '삶을 배신하기 위해’ 쓰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언어다. "니체는 당시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기술하면서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고 보았다. …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27)

시간이 지나, 2009년에 이르러서 난 전공을 포기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지만, 아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1년의 100권을 목표로 책을 읽었고, 빌려보지 않고 모두 구입했다. 스터디를 하고, 수업을 듣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균형’을 찾아갔던 것 같다. 아직 멀었지만, 균형 감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다시 질문하자.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 질문을 품고 함께 공부하러 가자”고. 그렇게 질문을 품는 것이 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맹목론자도, 어느 곳에도 답은 없다고 확신하는 불가지론자도 나는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오로지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말하고 생각하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나 혼자 할 수는 없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그들을 빌려 사유하고, 소개하고, 연결짓고 싶다. 한 달에 1번, 기쁘게 쓰고 싶다. 이제 시작이다. 즐겁게 봐 주시길. :) 

“독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나의 목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올해 읽은 책 리뷰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손을 놓으려고 하면 다시 잡게 되는 목표다. 아무리 명색이 블로그인데 독서 리뷰까지 미뤄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하지만 하지 못할 핑계는 많이 생각난다. 바쁘단 핑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핑계, 독서 축제 해야 한다는 핑계, 아직 못한 일이 많다는 핑계.. 모든 핑계를 넘어서서 지금 당장 블로그 리뷰를 쓰자. 그래야 나의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 서두르자! 

5월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불안_알랭 드 보통
생태요괴전_우석훈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남자의 물건_김정운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6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2015년 5월 
25.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올해 인생학교 책을 꽤 봤다. 아주 양질의, 권할 만한 책이란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 정리가 잘 되어있다. 좋은 책이다. 아래의 글이 이 책의 지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삶의 고수는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 몸과 머리, 공부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중 뭐가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탁월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게 완성할 뿐, 그것이 일인지 놀이인지는 타인의 판단에 맡긴다. 그 자신은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다."

나 역시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살기로 마음 먹은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사람, 자신만의 천직을 찾으려는 사람,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분명 초서까지 마쳤는데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구나. 오늘 중으로 올려야겠다. 
 

26. 불안_알랭 드 보통
2015년 가장 많이 본 작가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 나에겐 알랭 드 보통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 이 사람의 책을 읽지 않았지?”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비슷한 작가다. 인생학교를 왜 만들었는지도 공감이 가고, 또 그가 기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기에. 불안이란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불안에 대해서 예전에 TED강의가 있었다. 나도 한번 포스팅 한적이 있고. 


그 내용을 면밀하게 담은 책이다. 각박한 현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워낙 에티카를 재미있게 읽어서 순위는 밀렸지만, 그래도 5월 최고의 책 중의 하나다. 


27. 생태요괴전_우석훈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팟케스트 <나는 딴따라다>에서 우석훈과 선대인씨가 말하는 걸 인상깊게 들었었다. 공감도 많이 했고.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 씨의 책이라기에, 또 가볍게 읽고 싶었던 책이 필요했기에 빌려 봤다. 솔직히 약간 짜맞춘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신자본주의로 인한 부작용들을 요괴로 설정하고,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아이디어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주제는 흥미로웠다.

나는 희안한 습관이 하나 있다. 좋은 책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빌려본 책은 가급적 초서를 하는 편이다. 왜냐면, 앞으로 그 책을 볼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초서를 했다. 초서 말미에 내가 이런 글을 적었더라. 옮겨본다.  

"그냥 내 생각. 교육도 마찬가지. 대학이나 외국의 유명한 프로그램 다 좋다. 하지만 그것에 의존한다면 결국 생태계는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생산자는 따로 존재하고, 우린 교육을 소비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희망은 로컬이다. 우리가 만든 교육을 우리가 소비하는 것.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보는 것. 조금 어설퍼도, 조금 낯설어도, 조금 불편해도 그래도 이용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꼭 필요한 자세라고 본다. 모두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고, 또 듣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이 학교가 되는 것 말이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노예다. 우리를 왕으로 떠받드려는 사람들일 수록, 기업일 수록 경계하라. 그렇게 왕이라는 기분에 취할 수록 나는 더욱 더 그들에게 예속된다. 노예가 된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내고, 그들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지배한다. 고객이라는 말에는 너는 그저 나에게 돈이나 내고 기분이나 좋아해라. 라는 말이 들어있다. 그러니 깨어있자. 우리 모두"
 

28.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충분히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물론 No다. 하지만, 에티카에 감명받고 마음이 움직이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100% Yes!라고 외친다. 올해 나에게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해도 이 책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흠뻑 빠졌던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다. 올해 5월의 책으로 선정했다. 

나는 지나친 고전 만능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전을 일단 읽기 시작해라. 이해를 못해도 그냥 읽어내려가라. 그래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천재 그거 해봐야 뭐 좋을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이다. 내가 몰랐던 것을 인식하고,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힘이 독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티카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언저리를 살펴본 느낌이고, 그것만으로도 올해는 만족스럽다. 고전에 너무 목맬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읽을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읽게 되니 말이다. 

이 책을 필두로,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일단 니체를 좀 더 읽었고, 들뢰즈에 대한 책도 몇권 샀다. 철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삶에 대한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싶단 생각은 아주 커졌다. 스피노자가 꿈꾼 세상.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나도 그것을 함께 꿈꾼다. 나와 함께 할 사람들도 어서 이 책을 읽어보시길! 


29.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강점 혁명에 이어서 읽은 책. 뭘뭘 하라! 라는 식의 책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강점 카드를 적기엔 좋은 책이었다. 강점 혁명과 셋트로 보면 괜찮을 책이나, 한권만 권한다면 역시 강점 혁명이다. 링크는 여기


30. 남자의 물건_김정운
이 책은 다행히도! 블로그에 올렸었다. 김정운 교수님의 책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재미가 있다.
그분 삶을 존경하기도 하고. 링크는 여기로


31.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이 책은 누군가의 페북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려서 찾았다가, 한참을 보고 다시 꼽아 두었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글쓰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이 있다면 글을 써야겠구나! 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 이 책도 옮겨적었었다. 글을 쓰며 그래도 이때는 내가 꽤 부지런했었다는 사실을 재 확인한다. 링크는 여기로




2015년 6월 
32.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했던 책이다. 꽤 길게 써 보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여기로 링크
이 당시 나는 스피노자에서 자연스럽게 니체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고, 일단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책을 골랐다. 알고보니 이진우 교수님은 한국니체학회 회장이시더라. 니체가 있었던 지역을 방문하면서 적은 에세이다. 내가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니체의 삶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사실 일반 분들께 니체 입문서로는 이후에 읽었던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더 권하고 싶다. 


33.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자 상상 속 멘토, 피터 드러커 옹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다. 하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개인적으론 드러커옹의 책으론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2009년에 경영에 대해서 한참 관심이 많았을 때가 있었는데 요즘엔 인문학 책들을 더 읽다보니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이 책은 길게 리뷰했었다. 링크는 여기 
 

34.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이 책은 핸드북이다.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한 책. 짦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다. 


35.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올해 6월의 책!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을 한번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찰스 핸디의 선택이 역시 옳았음을 재확인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 독립적 프리에이전트를 꿈꾸는 사람들, 1인 기업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책 역시 이미 블로그에 써 두었었다. 링크는 여기로. 


36.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책. 작가수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 요즘은 결론이 명쾌한 책이 좋다.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고. 결론은 이것이다. 글을 쓰는 자가 작가다.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일단 써라. 쓰다 보면 된다. 핑계 만들지 말라. 


37.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나는 지금까지 에니어그렘을 위주로 공부해왔다. 그러다 보니, MBTI는 비교적 소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와우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첫 시작이 이 책이다. 아주 쉬운 책이고, 누구나 MBTI를 배울 수 있게 써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에니어그램과 같은 이유이다. 
이 책의 잘못은 아니고, 절대 기질이나 성격은 책을 통해서는 온전히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배웠다. 처음에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고 생각한 MBTI를 온전히 이해한건 10월이 넘어서니까. 책으론 한계가 있다. 


38.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아. 이 책도 강렬하다. 이번 달에 읽은 책 중에서 3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 그가 말하는 어조도 특이하고,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다. 앞서 작가수업과 딜리셔스 샌드위치가 읽고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이라면, 이 책을 되려 읽고 나면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아니, 사실은 책이 아니다. 위대한 인간의 정신을 미친듯 읽고 싶어진다. 니체가 그랬고, 사사키가 그랬듯.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어디러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명령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따르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의 정보를, 즉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명령은 자기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확실한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지도 없이 이국의 숲을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시달리게 합니다. …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있는 이유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 김현 

인문학 강의를 들을 때 봤던 글인데, 최근 책 <싸우는 인문학>을 보다가 다시 접했다. 이 글은 나에게 꽤나 큰 울림을 주었다. 문학과 인문학의 유용적 무용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 글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비평가에 의해서 무용한 것이 되려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윗 글에서도 특히 나는 이 두 가지 글자에 꽃혀버렸다. ‘억 to the 압'. 사전적 의미로 '억압’이란,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의 주제가 ‘친밀함’이었다면, 요즘은 이 억압이란 개념이 나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요근래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펼쳐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이 글을 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무엇에 억압 당하고 있을까? 질문을 한번 품어보자. 

앞서 나온 사례를 통해 억압을 한번 들여다보자.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 필요한 말이라, 차라리 지금은 유용함은 무용함을 억압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들은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들은 노래부르는 베짱이를 억압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느냐고, 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베짱이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무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억누른다. 그렇게 베짱이는 ‘유용함’으로 억압당한다. 이러한 예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다. 대학생들은 이제 1학년 부터 ‘유용한’ 스팩을 쌓느라 ‘무용한’ 다양한 경험들을 뒷전으로 미룬지 오래고, 고등학생들은 ‘유용한’ 국영수 공부를 하느라 ‘무용한’ 미술 및 음악, 체육 활동을 억압당하고 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다를까?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유용함의 바다’이고 우린 그곳에서 사는 ‘물고기'다. 유용해 보이지 않는 활동을 무시하다 못해 조소하고 심지어는 타박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렇게 우리네 물고기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유용함의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에 억압 당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억압하는지도 모른채. 

신문 기사의 폭력성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생각해보자, '핵심은 곁가지를 억압한다.’고. 신문 기사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자의 역할은 사건의 주제가 되는 헤드 라인을 가급적 ‘간결하게’ 다듬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곁가지들은 필연적으로 잘려나가게 된다. ‘핵심만 논하는 것’ 그것은 바쁜 우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필연적 일상이 되었다. 즉, 핵심과 본론이 곧 미덕이 된 사회다. 언듯보면, 이것은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억압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 제목을 보자.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 아마 대부분은 시선을 0.1초 정도 머물다가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기사로 쓱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실은 이 기사의 사건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지 보이는가? 알랭 드 보통의 <푸르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오는 예시인데, 참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곁가지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품고 있지만, ‘사건의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모두 잘려나간다. 그와 동시에 비극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사라진다. 결국 우린 삶의 본질 중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랭 드 보통의 책 48쪽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주의깊게 읽어보자. “이른바 신문을 읽는다고 불리는 혐오스럽고도 관능적인 행위.”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 덕분에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벌어진 모든 불운과 격변,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가와 배우의 냉정함 등등은, 심지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일종의 아침 대접으로 변모되며, 아울러 우리는 카페오레 몇 모금을 마시도록 권유받는 것이다.” ...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5만 명의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잊고, 신문을 한편에 던져버리고, 일사의 지루함에 대한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나는 이것이 매일 아침 뉴스로부터 우리가 받는 ‘억압’이라 생각한다. 글자수 40자 제한의 트위터나 페북도 실은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억압받는 삶의 풍부한 곁가지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성실함은 당연한 미덕인가
우리기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실함과 게으름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성실함은 게으름을 억압한다. 며칠 전 페북에서 웃긴 자료를 보았다. 한 남자가 말한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각자 생각해보라. 그리곤 남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ㅋㅋ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한다. 알아 봤더니 이 남자는 러셀 포스터, 수면 주기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경학자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보시라. ‘수면’에 대한 좋은 강연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해당 발언은 16:45초 쯤에 있다. (링크는 여기 http://on.ted.com/Foster) 나 역시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성실한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으른 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말 그대로 '게으른 사람들'로 본다. 딱 한번 필터를 쒸울 뿐이지만 그 타격은 크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그렇게 ‘반대편 사람에 의해서’ 손 쉽게 억압받는다.  




이 비슷한 맥락에서 ‘목표’는 ‘방황’을 억압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 부터 우린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몇번이나 듣는다. 넌 꿈이 뭐니? 넌 나중에 하고 싶은게 뭐니? 올해 목표는 뭐니?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나에게 관심있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던지는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만들어낸 어릴 적 나의 꿈은 ‘과학자’다. 그러면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ㅋㅋㅋ 이처럼 '꿈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꿈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억압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나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며, 왜 목표를 적지 않냐고. 왜. 왜. 도대체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나 역시 이러한 오류를 많이 저질렀다. 아니,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 중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던 나의 당시 꿈은 ‘20대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멘토링을 해주겠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미친 생각임에 틀림없지만, 그 당시 나에겐 하나의 ‘비전’ 이었다. 그리곤 외치고 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그 말이 ‘방황 혹은 목표 없음’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겐 얼마나 억압적이었을까. 평생 죄를 갚으며 살기에도 모자란 죄를 지었다.

모든 구분은, 그 자체로 억압이 된다.
그렇다. 어쩌면 모든 구분은 억압일지도 모르겠다. 선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점이 되며, 그와 동시에 악을 억압한다. 전문가는 스스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기준이 된다. 그리곤 자연스래 비전문가를 억압한다. 이게 어떤 장면인지 연상되지 않으면 상상해보라.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그 주제에 관해서’ 함께 존중 받으며 활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상상되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아직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한 편이다. 전문가는 그 존재로서 비전문가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연스래 발언권을 뺏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까닭은 위의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명히 기준 짓는 사람일수록, 그 기준으로부터 타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되려 어려운 법이기에. (게다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돈을 많이 쓰면 썼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최근 철학자 들뢰즈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이런 개념이 있더라. 들뢰즈는 '분리'를 '층화'라 칭했다. 그는 말한다. 층화된 사회일수록 고착화된 사회라고. 계층끼리 대화가 안 되는 그런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반면 탈층화된 사회는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관계를 맺어가며 훨씬 더 역동적 삶을 창출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and (그리고)’의 관계를 맺는 것을 꿈꾼다. 사물들이 하나의 중심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새로운 ‘and 그리고’ 그리고 ‘between 사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이 형식의 사유를 들뢰즈는 ‘리좀’이라고 불렀다. 리좀이란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통해 자유롭게 관계 맺으면서, 장 전체을 만들어가는 사고를 말한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데 난 너무 즐거웠다. 그래. 내가 원하는 사회가 바로 이러한 ‘탈층화 된’ 사회임에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전문가란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사회. 물론 꿈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동문회나 향우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로써 자연스러워 진다. 사실 어릴 적 부터 그런 집단에 대한 이상한 반감이 있었는데, 그 반감의 이유를 이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억압에 대한 마지막 성찰, 깨달음.

정리해보자. ‘분리'은 억압을 만들고, 억압은 '인간 소외'를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린 분리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로 부터 소외된다. 관계는 그렇게 단절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는 파편처럼 살아간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끼리. 선함은 선함끼리. 유용함은 유용함끼리.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준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 반대편의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그 이유로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의 생동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시키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성 및 깨달음’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20대 중반부터 이 ‘영성 및 깨달음’이란 테마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나는 강렬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출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젠 정반대의 물음을 던진다. ‘깨달음’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품고 산책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깨달음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하다. Oneness, 즉 개체가 분리를 넘어 하나됨을 인식하는 것, 깨달음은 이 상태를 말한다. 이는 평화로운, 비이원적인 상태를 의미하며 자아(에고)로 부터 자유로워진, 언어를 넘어선 영역을 가리킨다. 나의 미천한 지식이 이 모든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으론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레 무엇을 억압할까? 나는 보았다. ‘깨달음’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수 많은 구분이 생겨나는 모습을. 영성이나 의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선을 긋는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앞서 말한 ‘탈층화’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비판하려는 것은 ‘깨달음의 추구’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일련의 ‘무의식적 억압’이다. 우리를 둘러싼 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수 많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했고, 억압했고, 무시했던 적이 있고 말이다. 이러한 예시가 아디야 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집단에서 매우 흔히 일어난다. 나는 옳다. 깨어났으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깨어났으니까. 에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꿰뚫기가 가장 힘든 에고는 바로 실재를 잠시라도 보았던 에고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남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깊숙이 미혹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지나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디야 샨티의 말처럼 우리에겐 결국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 새로운 눈을 갖는 훈련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과 대면하는 것이다. ‘옳다고 주장하고, 구분하고, 억압하는’ 내 모습과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이다.  

결론, 자명한 것을 의심해보자는 것 
깨달음이란, 결국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알아차림이다. 무엇에 대한 알아차림일까? ‘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도입, '유용함과 무용함'에 대한 분리를 너무도 지혜롭게 정리한 글이기에 빌린다. 이 지혜로운 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모든 분리는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앞서 말한, 무용함과 유용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분리해서 읽을 수는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분리하려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결론을 쉽게 풀어보자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것, 자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일수록 그것은 되려 상대를 강하게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들 옳다고 느껴지는 개념 마저도, 예를 들어 ‘깊이 있는 삶’ ‘친밀한 관계’ 심지어 ‘타인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삶’ 마저도, 억압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게 억압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특히 가까운 아내와 가족들)에게 내 가치를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그 축적된 억압들은 내가 앞으로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나의 업이다. 나는 이러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무엇을 억압하는가. 아니, 당신은 무엇을 자명하다고 믿는가.  




내가 읽은 10개의 장면 & 내가 만든 10개의 질문 

1.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concept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 개념, 임신, 그것은 세계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이며, 창조에는 잉태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품고 있는가? 


2. 
저에게는 니체의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또는 보답 없는 것을, 무명을, 음지를 말이지요. 

: 나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누구의 말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가? 


3.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 저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 때문에 입에 붙어 거의 원문 그대로 술술 나옵니다.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 한창 이런 때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읽은 것은. ...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몇 번을 읽어도 그런 것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혁명을 낳는가?   


5.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성서의 일부분을 일부러 여백이 많은 종이에 베껴 쓰게 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메모를 해가며 되풀이해서 읽기까지 했습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습니다. ...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6.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루터는 가톨릭교외에서 파견된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 논쟁을 벌입니다. ... 루터는 “얀 후스가 옳다” “교회도 잘못을 저지른다.”라는 치명적인 말을 해버립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면 말이지요. 그리하여 루터는 대이단임을 선고받습니다. ...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대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살아가는가? 양심인가? 권력인가? 또 다른 무엇인가? 


7.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권 중 한권입니다. 즉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그들은 승부에 져서 훗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걸까요? ...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0.1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 고전이란 무엇인가? 고전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8. 
아주 옛날부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도사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는 공부하여 출세하려는, 귀족계급보다는 하층계급 사람들이 말이지요.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군자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만의 아름다운 상식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귀족이면 무학이고 난폭해도 된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고귀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의 고귀함은 핏줄만이 보증합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가 되어도 로베르토 미셀스라는 독일 귀족이 “학문이야말로 혁명의 선구이자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바로 말 그대로 입니다. 이 말에 여실히 드러난 대로, 책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늘 혁명의 힘이 거처하는 곳이었습니다. 

: 혁명을 꿈꾸는 자는 누구이며, 거부하는 자는 누구인가? 혁명의 힘은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가?


9.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 표현은 왜 하는가? 표현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무엇을 읽어야 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10.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 니체가 말한 ‘번혁을 초래한 인간’은 누구인가? 당신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의 한 줄 요약
읽어라. 미쳐라. 그리고 혁명하라.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일주일에 걸쳐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고 있다. 아니, 만나고 있다. 내가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올해 초에 박찬국 교수가 쓴 <초인수업>을 하나 읽었을 뿐, 그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철학책 역시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 VS 철학>을 비롯한 철학사 중심으로 봤을 뿐,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책은 역시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접했다. 물론 그 어렵다는 에티카를 바로 읽은 것은 아니다. 먼저 이수영 선생님이 쓴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을 만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읽기의 짜릿함’. 그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느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에티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책 중에 가장 완벽한 책이다”라고 찬탄했다. 매우 논리정연하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훔치는 그런 매혹적인 책이었다. 읽으면서도 읽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운, 그런 책이었다. 에티카를 덮을 때쯤, 다시 니체가 떠올랐다. 니체는 <에티카>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나에게 선구자가 있었다네. 그것도 얼마나 놀라운 선구자인가! 나는 스피노자를 거의 모르고 있었지. … 그의 전체적인 경향 - 즉 인식을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만드는 것 - 이 나와 같을 뿐 아니라,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네. … 그는 의지와 자유, 목적론, 도덕적 명법, 비이기적인 것, 그리고 악 등을 부인했어. 설령 차이가 많다고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주로 시대와 문화, 그리고 학문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야. 한 마디로 산마루에 올라 혼자라는 느낌이 이제 적어도 둘이라는 느낌이 되었네."

그들은 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마주했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그는 <에티카>로 스피노자의 저벅저벅한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도 그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었다. 나도 그 옆에서 발걸음을 따라 걷고 싶었다. 니체는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공감했던 것인지, 내가 공감했던 것과 무엇이 비슷한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니체로 넘어가는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 스피노자는 뒤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를 더 탐색하고 싶었다. 그가 주는 즐거움은 너무 크기에, 한번에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니체와 괴테, 들뢰즈를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많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방향, 현재로썬 ‘그들의 철학'을 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니체를 만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강의 준비와 강의 시간을 빼곤 나머지 시간에 나는 니체를 만나고 있다. 우선 이진우 교수가 쓴 기행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를 읽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이문회우에서 주최하는 김동국 선생님의 특강<신의 죽음, 예수의 죽음>도 찾아 들었다. 20차시 정도의 정기 수업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엊그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조금 읽었고 발췌독했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봤던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를 한번 더 복습했다. 암튼 이 정도 니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중간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 마주했던 책과 강의에 나의 의견은 많이 빚지고 있고, 아직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설하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먹기만 해서 변비에 걸렸으니까.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은 너무 많이 하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그들은 대식증과 이따금씩 생기는 복통을 동시에 갖고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야위어간다.” 아마, 올해 들어서 니체에 자연스래 관심이 가게 된 것도 배설에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어떤 두려움도 없이 표현하는 것. 나에게 잠재된 창조적 자아를 깨우는 것. 그 시작은 니체에의 탐구다.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니체로 넘어가기로 하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철학책을 읽는가?
내가 책을 읽은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나는 그저 충동적으로 책을 읽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읽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치지어린 애송이 독서가에 불과했다. 일년에 몇권을 읽었느니 그런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서야 나는 내가 왜 책을 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보는 이유는 결국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답을 한다. 왜냐면 삶은 결국 반응이고, 그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가진 세계관, 고정된 인식의 틀>이라고. 나의 세계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아들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의 경험이 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의미부여가 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삶은 크게 일어난 일과 해석으로 나뉜다. 우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흔히 접하는 예로 컵에 물이 반정도 차 있을 때 누군가는 ‘반밖에 남지 않았네’ 라고 해석하고, 누군가는 ‘반이나 남았네’라고 해석한다는 것. 그 해석을 통해 우린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삶이 펼쳐진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월요일 아침, 바쁜 출근 길에서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매우 기분이 더럽다.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라 회사에 가기 싫은데 말이다. 성격이 급한 누군가는 욱해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을 가정하자. 극단적인 예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 똑같은 욕을 들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월요일 아침과 같은 반응일까? 아닐 것이다. 그저 허허 웃고 지나갈 것이다. 무엇이 바뀐 것인가? 상황에 바뀐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훨씬 더 너그러워진 인식 속에선 그 정도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해석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내가 가진 관점, 세계관, 인식의 틀’이며, 그 세계관을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책은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선 ‘내가 가진 세계관’을 잘 정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로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그들이 가진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이란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결코 교과서로는 습득되지 않는다. 인식이란 것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방법들이 지금으로썬 독서 토론이나 디자인씽킹, 프로젝트 학습이다. 다양한 생각과 체험을 통해 삶에 유익한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앞으론 철학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싶기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도 하고. 암튼, 나는 철학자들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던지는 자들이다.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해석 체계를 버리고, 내가 던져주는 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써 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철학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읽기의 혁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읽고 나면, 새로운 눈을 갖게 되고, 한번 눈을 뜬 자는 다시 감을 수 없다.

철학자들도 다른 철학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경험한다. 탐구하고, 숙고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눈을 발견한다. 1865년 10월 어느날,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노력은 내 자신에게 맞는 삶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행복하게 은둔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읽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상상해보라. 어느 날 나는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내겐 전혀 낯선 이 책을 집어 들고는 몇 쪽을 넘겨보았다. 나는 어떤 마귀가 ‘이 책을 들고 집에 사라’고 나의 귀에 속삭였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책을 좀처럼 서둘러 사지 않는 나의 습관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집에 와서 막 획득한 보물을 갖고 소파의 귀퉁이에 몸을 던지고는 저 에너지 넘치고 암울한 수호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읽기의 혁명성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한권 소개한다. 일본의 니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 굉장히 재미있지 않은가?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하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은 무엇인가?
니체는 이런 사람이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한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된 사람. 34세에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맥을 방황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을 개척한 사람.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었던 사람. 이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의 짧은 약력이다. 나는 니체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짧게나마 내가 느낀 니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에게 니체는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의 삶은 예민 그 자체였다. 강신주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상처에 둔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아파했다. 수 많은 여성들 그리고 트라우마 속에서 자랐고, 평생 아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인생의 절반을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 어릴 적 너무 많은 책을 보고, 눈이 나빠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쨌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니체의 위대한 면이 나온다. 그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한다.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위버멘쉬, 초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쓰고, 생각하고, 또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언제나 아파했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 아픈 것들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아마 그들로부터 자신의 맨살을 봤던게 아닐까? 그가 죽기 얼마 전, 마차에서 매 맞는 말을 부둥켜 앉고 오열한 장면은 그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러한 니체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 나는 ‘힘에의 의지’를 꼽는다.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엔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얼마 전에 다시 보았는데, 이진경 선생님이 쓴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도 권력에의 의지라고 나오더라. 이진우 교수도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한다.) 이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와도 비슷한 개념인데,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모습으로 있고자 한다는 것. 즉,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심지어 약자도 권력을 추구한다. 그들은 강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삼는다. 모든 생명은 그러하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힘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언제 강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책을 볼 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받을 때, 가족들과 함께 연결된 느낌을 가질 때. 그럴 때 강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 활동을 반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힘에의 의지’다. 내가 매월 심톡을 개최하는 것도 단순하다. 그 활동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나의 기쁨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권력 욕구도 없는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혹시 주말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기를 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권력을 추구하는 자다. 왜냐면, 누구에세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자유롭게 쓰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자 권력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말을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얼마나 주말을 간절히 바라는가? 그렇기에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자명하게 들린다. 



니체 전집 / 책세상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가?
이 시점에서, 니체가 기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설명 된다. 니체가 보는 기독교의 논리는 이러하다. “지금 고생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목사였다. 그리고 니체 역시 그에 순응하면서 자랐지만, 결국 맹목적 믿음에 저항한다. “네가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믿어라. 네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한다면, 탐구해라.” 마음의 평화는 니체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의 내세가 현세의 ‘힘에의 의지’를 거스른다고 보았다. 이처럼 니체는 ‘믿음’이란 개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그리스도교는 오직 예수 한명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제들의 종교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의 말에 나 역시 일견 동의한다. 어쩌면 기독교의 숨겨진 메시지는 그의 말대로 ‘사랑’이 아니라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재작년에 로마의 카타콤을 들린 적이 있다. 그곳은 어둡고, 답답하고, 음침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간 수 많은 초기 기독교도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에게 분명 ‘사랑’이 남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곳은 ‘복수심’이 자라기 좋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지내지만, 내세에선, 하늘나라에선 ‘두고보자’는 복수심.”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부폐한 한국 교회나 사이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목도한다. 길거리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물론, 참다운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니다. 참다운 종교는 언제나 죄와 벌이 아닌, 현재를 이야기 하니까.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보상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죄>, 즉 신과 인간 사이를 멀게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 -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네 안에’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예수를 치켜세워 ‘신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어버렸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았던 대로, 그가 가르친 대로 죽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뜻에 맞게 살았고, 행동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그걸로 이미 완전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힘에 의지’에 따라 살았다. 그 완전한 존재를 불완전하게 만들고 의지한게 어쩌면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재단이 아닐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니체는 목 놓아 외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그래야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사람들이 다시 ‘힘에의 의지’를 되찾지 않을까? 내세를 위해 지금을 무기력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해서.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니체의 이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게 한다.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소멸. 뒤를 이어 찾아온 허무주의의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신이 죽은 시대다. 종교적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내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돈’을 이야기한다. 벤야민이 얘기했듯, 자본주의라는 ‘세속화(secularization)’된 종교가 우리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린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앞서 말했던 기독교가 ‘내세’를 이야기한다면,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둘 다 본질은 같다. 종교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못 살게 하고, 자본주의는 퇴직 이후를 걱정하게 하느라 지금을 못 살게 한다. 그래서 이 ‘의미의 소멸’ 앞에서 우린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허무주의가 문 앞에서 서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로마 카타콤 내묘실



이러한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앞서 논리를 정리해보자. 니체는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그와 반대되는, 되려 힘을 억압하는 논리를 폈으며, 니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안전한 믿음을 부수고, 불안한 진리를 찾아서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신은, 진리는 없다는 것. 이러한 불안한 의미의 소멸이 가져오는 허무주의 앞에서 니체는 어떤 대안을 내놓았을까? 그는 기나 긴 사유 끝에 ‘영원회귀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그건 1881년 8월, 그에게 찾아온 번뜩임이었다. 질파플라나 호수가 가져온 선물.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련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 즉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적 정식은 1881년 8월의 것이다. 그것을 종이 한 장에 휘갈겨 쓰고,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지면”이라고 서명했다. 그날 나는 질파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주글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지금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고 소리친다. 그저 지금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는 지금 강해지고 있는가? 너의 '힘에의 의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래서 강신주 선생님을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정오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묻는다. 그는 진리를 부정한게 아니라, 진리의 자명성을 부정한다. 그는 오로지 회의하고 순간에 산다.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나는 지금 이 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열렬히 맞이할 수 있는가?" 나에겐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딱 5분만 있다가’ 아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아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어떤 일이든 그 순간 해 버린다. 성격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언제나 느릿느릿. 해야 할 일도 ‘딱 5분만 있다가’ 한다. 그런데 막상 ‘5분 있다가’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순간 순간에 살지 못한다. 시간의 찰나성을 언제나 간과하는 것이다. 나에게 마치 영원한 시간이 허락될 것 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곤 언제나 후회한다. 지금의 이 삶을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무엇을 고쳐 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내 자세를 고쳐잡게 만는다. 나에게 힘을 뺏는 것들을 멈춘다. 나는 또 한번 다짐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무분별한 욕망에 선을 긋고, 진정으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그렇게 자유로울 때 나는 이 삶을 다시 영원히 반복하고픈 욕망에 빠진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삶의 예술가
우리의 삶, 모든 생성과 죽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은 ‘목표’를 쫓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할 수 있을까?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단이다. 하지만, 만약 목표가 없다면 무엇인가? 니체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최종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문을 뒤집어 보자. 삶은 어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목표다. 이 답에서 나는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당신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는가? 그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굴리지만 그 바위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신의 노여움으로 영원히 돌을 굴리는 형벌에 처했지만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멈춘다는 것은 신께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신에게 반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거창한 목표 따윈 없다. 그저 내 앞에 놓여진 돌을 굴릴 뿐이다. 순수하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롭다는 것은 양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처럼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상의 지루함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형벌과도 같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감내한다. 인생을 살만하다고 느끼기 위해선, 일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일상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형벌이다. 최대한 피하고 싶은, 굴리기 싫은 돌이 되버린다. 내가 그런 편이다. 일상은 내 삶에서 어느 새 뒤처지기 마련이더라. 나에게 권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등 우리에게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이 일상을 이제 목적으로 바라보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 마치 처음 설거지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경이감이 어느새 익숙함이 되어버리지 않게 스스로를 경계하자.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허용된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그렇게 살자.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하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니체가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제 드디어, 니체의 초인, 위버멘쉬가 등장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이제 니체는 쉴세 없이 몰아친다. 위버멘쉬에겐 사람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들은 별이다. 니체는 이렇게 통탄한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빡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 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 그 자가 인간 말종(말세인)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경멸할 수도 없다. 어떤 일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 그 역동성. 이제야 그의 ‘정오의 사상’이 환히 빛을 발한다. 


낙타와 어린아이


당신은 어떤 혼돈을 품고 있는가?
이제 마지막 장이다. 니체는 이제 인간말종(말세인)에서 초인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한번 따라가보자.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엇은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 짐깨나 지는 정신는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첫번째, 그 시작은 낙타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현실에 안주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안에서 낙타를 본다. ‘5분만 있다가’라고 말하는,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합리화하는, 타협하는, 수동적인, 그런 낙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낙타가 산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낙타는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섬겨온 신, 그리고 주인을 죽인다. 낙타가 ‘해야한다’를 의미한다면, 사자는 ‘하고싶다’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 사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자에게서 주체성, 혁명을 본다. 나도 내 안에 사자를 들여다 본다. 전공을 거스르는, 양심에 따르는, 주위 사람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사자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사자도 산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사자는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 그리고 진지하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망각이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다. 그는 어떤 ‘목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한 ‘자기원인!’ 그 어떤 목적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순간’에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도 내 안에 어린아이를 본다. 하지만 아직 잠들어 있다. 가끔 깨어나서 뭐라고 하지만, 금세 잠에 빠진다. 

'니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제 이 질문은 헛되다. 되물어보자.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을 장착해보자. '나는 니체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가?' 우린 별자리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별자리에 그려진 수 많은 그림은 이제 지워졌다. 스스로 별자리를 그리고, 이름 붙여야 하는 시대를 우린 건너고 있다. 그 어떤 정해진 답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말했듯, 오로지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의미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즉,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기억하자. 세상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 말. 그 말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 이제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두번째 목소리는 바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말 조차 허무하다는 말이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제 그 텅빈 하늘에서 당신는 어떤 별을 탄생시킬 것인가? 당신의 혼돈은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  


도입. 
메르스가 한창이다. 다들 걱정이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로 걱정이 없는 편이다.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지만 만약 걸리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각종 찌라시들과 기사들은 우리를 걱정과 염려에 중독되게 만든다. 이런 시기일 수록 우린 ‘염려’의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강의가 있어서 옮겨적어 보았다. 강의는 강신주가 했지만 편집자는 나다. 강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내 위주로 편집하게 되었다. 소제목도 그냥 지어봤다. 사실 그게 더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다시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즐겁다. 다들 재미있게 보시길. 



제목 : 우리는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다.
강사 : 강신주

1.
우리 사회는 지금 철학자를 부른다.

요즘 바쁘다. 사실 철학자가 세상에 나와선 안 된다. 철학책을 본다는 것은 고민한다는 뜻이기에. 다시 말해 살기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되려 10년 전에는 사람들이 날 찾지 않았다. 생계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니 나를 찾는 것이다. 1997년 IMF를 경험하면서 우린 바닥을 알았다. 그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린 불안한 것이다. 이 고민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사실 큰 구조적 문제이다. 다만 철학자들의 주어는 ‘나’이다. '나는 어디에 직면해있는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인문학자들이다. 그 관점에서 살펴보자.

2.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권하다.
 
우리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제도에 산다. 우리의 표와 재벌의 표 그리고 국회의원의 표가 같아지는 순간은 선거날 단 한번이다. 나머지 날엔 실질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지배한다. 월급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들이 왜 월급을 줄까? 쓰라고.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돈을 안 쓰는 것이다. 돈을 다 쓰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일해야 한다. 다람쥐의 삶과 다를바 없다. 그런 쳇바퀴 중에 좋은 쳇바퀴가 대기업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좋은 쳇바퀴에 들어가라고 한다. 

3.
우리는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소비의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온 돈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가들은 우리를 소비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보드리야르는 책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다. 소비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붙어있는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우린 옷이 있다. 하지만 또 구입한다. 소비에 중독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소비를 통해 잠시 행복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각종 영화, 드라마, 광고를 비롯한 미디어들은 소비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란 착각을 선사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심리학은 대부분 소비자 심리학으로 발달한다. 소비자를 연구해서 사게하기 위해. 요지는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필요를 구입하지 않는다. 

4. 
욕망의 집합체, 자본주의의 교육장 백화점.

자본주의의 첫번째 이미지는 욕망이다.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교육장이다. 만약, 백화점에 부자들만 오게 하면 나중에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오지 않게 된다. 서로를 통해 부자들은 우월감을 느끼고, 빈자들은 욕망을 느낀다. 돈을 벌겠다는 욕망, 나도 저곳에 속하겠다는 욕망. 방송국도 마찬가지다. 광고는 시청률과 연결되어 있고,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낚기 위해서 방송을 만든다. 실은 방송이 아니라 광고가 본질이다.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 광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자본, 광고와 결부되지 않을 때 진짜 가치있는 것이 출현한다. 

5. 
욕망과 염려를 파는 사회

경기가 좋을 때 자본주의는 ‘욕망’의 이미지를 만들고, 안 좋을 때 자본주의는 두 번째 이미지를 만든다. 염려의 이미지. 그래서 우린 연금도 들고 보험도 든다. 우린 아이들에게도 염려한다. "너 이렇게 살면 나중에 이렇게 이렇게 된다." 병원은 염려를 가장 잘 파는 곳이다. 진단을 하고,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간다. 우리의 염려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린 생수를 사 먹는다. 물은 누가 오염시켰나? 수 많은 공장들이. 그 공장이 다시 물을 팔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는 모든 것을 판다. 특히 지금의 우리 사회는 욕망보단 염려를 판다.

6. 
종교, 자본주의 그리고 인문학

인문학과 종교는 다르다. 종교는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가까운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문학자들은 현재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내 아이와 남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은 종교와 자본을 비판한다. 현재를 못 살도록 하기 때문에. 상상해보자. 만약, 당신의 아이가 1년 뒤에 죽는다고. 그럼 학원 보낼 것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의 미래만 걱정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관계는 사라진다. 미래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꽃을 볼 수 있을까? 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염려의 이미지는 치명적이다. 나와 주위 사람들을 제촉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7.
미래에 대한 염려를 줄이는 법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다’라고. 왜냐면 자본은 미래를 팔기 때문이다. 우린 전문가들에 의해 걱정이 증폭된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괜찮을까? 아프지 않을까?" 하면서 그 사이에 병이 든다. 이 사회가 우리의 스트레스를 조장한다. 어떻게 해야 미래에 대한 염려를 줄일 수 있을까? 일단, 집에 있으면 안 된다. 밖에 나가서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야 한다. 다만, 염려를 가중시키는 친구는 만나면 안 된다. 순간에 머물게 도와주는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순간을 살기 위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8.
부처, 있는 그대로 사는 자
 
내일을 걱정하거나 10년 뒤를 걱정하고 있을 때 우린 현재를 살지 못한다. 당신도 아주 즐거웠던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진여 여여 타타타)' 사는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나의 세계에 집중하면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한다. 자유로운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하면 사랑이 끝날 것을 걱정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인가? 그냥 살다가 꽃이 지듯이 죽으면 된다. 

9
돈은 좋은 관계를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동안 무엇이 사라질까? 관계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에 집중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힘을 잃는다. 우리는 보통 염려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험을 들고, 돈을 모은다. 만약, 그 돈으로 아이과 좋은 관계를 쌓는데 쓴다면 어땠을까? 나중에 아파서 누웠을 때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여러분 옆에 있을 것이다. 우린 내 미래가 두렵기 때문에 내 미래에 집중하느라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현재에 머물러야 관계가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똑바로 서야 한다. 

10.
아이를 미래가 아닌, 현재에 머물게 하라. 

어떤 어머니가 서울역에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꼴난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자기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과연 앞으로 엄마 걱정을 할까?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공포를 주입하는 순간, 염려는 되물림된다. 그 아이는 대학을 가든 어디를 가든 불안해한다. 아이를 잘 가르치는 엄마는 아이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 제대로 가르치는 엄마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학원 가지 말고, 나를 봐’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해야 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친구나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를 잡게 하라. 

11.
미래를 두려워하는 만큼 삶은 낭비된다.
 
영원한 현재. 여러분은 얼마나 현재를 잡고 있는가? 어제가 또렷히 기억나는가? 기억나지 않는 다면, 당신은 헛산 것이다. 현재가 차곡차곡 쌓이면 눈감을 때 웃을 수 있다. 미래는 공포가 아니다. 절대로. 한국처럼 공포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없다. 행복하고 싶으면 현재에 머물고, 불행하고 싶으면 미래에 머물라.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내 앞에 있는 풍경과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문화 예술이 위축되어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들 미래에 가있기 때문이다. 카르페디엠. 현재를 잡아라. 자기계발은 미래가 두려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통해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 저자들이다. 나머지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인문학적 통찰들은 그곳에서 현재에 머물게 돕는다. 우린 싸워야 한다. 싸우지 못하면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아무리 미래를 요구해도, 우린 반드시 현재를 붙잡아야 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만큼 삶은 낭비된다. 


강의 리뷰.

1. 
강의를 듣고 느낀 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다소 뜬금없지만 ‘경청’이다. 나는 지금까지 강신주 작가의 강의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들었다. 인문학 강의가 워낙 붐이 일다보니 유투브에 ‘강신주’만 입력해도 엄청나게 다양한 강의가 뜬다.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아침마당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경청의 힘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2013년 봄 쯤에 한번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모임이었는데, 대부분 40-50대 아주머니들이었다.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리고 그 경험은 내 인생의 손꼽히는 행복했던 강의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느꼈다. "아, 강의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강의를 듣고 참여하는 분들이 만드는 거구나." 라는 것을. 지식도 경험도 일천한 나였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 하나 하나 귀를 기울여주고, 뭔가를 받아적기까지 하시고, 또 중간 중간 ‘아’ 하는 감탄사까지. 정말 완벽한 경청이었고, 나도 그 분위기에 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의 120%를 발휘할 수 있었다. 중간에 이런 생각까지 했다. “지금 이 말을 누가 하는거지?” 

좋은 강의는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침마당의 특강을 본다. 거기는 정말 ‘숙련된 조교(아닌 아주머니)’들이 계신다. 무슨 말만 해도 ‘아~’ ‘오~’ ‘꺄르르’ 별 말 하지 않아도 엄청난 리액션이 쏟아진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당에서 좋은 강의를 많이 건진다. 강사들도 공중파 방송이기에 아무래도 준비도 많이 할 것이고, 시간도 딱 1시간이다. 그리 길지 않아서 좋다. 사족이 길었지만, 이것이 내가 이번 방송을 본 이유다. 

2. 
내용에서의 느낀 점은 이렇다. 결론은 ‘현재를 살아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주 탁월했다. 유려하게 말과 글을 만들어내는 분이란 생각을 다시금 했다. 그 논리도 심플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산다. 경기가 좋을 때는 욕망을, 경기가 나쁠 때는 염려를 파는 시대. 욕망도 염려도 결국 시선이 현재가 아닌 미래로 가게 하는 것이다. 미래로 가는 순간, 일상의 중요성, 관계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자. 진리는 언제나 쉽다. 하지만 실천하긴 어렵다. 이번에 메르스 때문에 우리 사회는 또 걱정과 염려가 확장되고 있다. 물론 나도 걱정한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는지도 안다. 그것과 관련해서 종사하는 분들은 정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증폭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해석’들이다. 이미 많은 어머니들이 걱정을 시작했다. 나도 이제 130일 된 아가를 키우는 아빠다. 걱정은 된다. 그리고 적당한 걱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언제나 우리를 해친다. 한 독물학자가 말했다. “독이나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현실적으로 대처할 것은 대처하되, 그 더 이상의 확대해석은 금물이다. 이러한 염려에 대응해서 무언가는 또 나올 것이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듯한 각종 상품과 서비스들. 이것만 구매하면 당신의 염려는 사라질 수 있다는 착각들. 거기에 속아선 안 될 것이다. 우린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한다.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해줄 수는 없다. 배에 힘을 탁 줘야 한다. 만약 내일 내가 메르스에 걸린다면, 그건 걸린 것이다. 내가 최선의 대처를 했음에도 걸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그건 그때 생각해도 된다. 그러니 시선을 돌리자. 미래에 대한 걱정, 염려와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순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 <인생수업>의 이 말을 기억하자. 

"죽음을 앞군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괴테와의 대화 _요한 페터 에커만



#대작을 쓰지 말라 

그는 내가 이번 여름에 시를 쓰지 않았는지 물으면서 말을 꺼냈다. 나는 시를 몇 편 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도록 하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재능과 탁월한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작 앞에서는 고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네. …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현재는 언제나 현재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네. 시인의 마음속에 날마다 솟아오르는 사상이나 느낌은 그 모두가 표현되기를 원하고 또 표현되어야 하네. 그러나 보다 큰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모든 사상을 등지고 생활 자체의 안락함까지 잃어 버리는 걸세. … 시인이 날마다 현재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신선한 기분으로 다룬다면 무언가 좋은 걸 만들 수 있고, 때로는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모든 걸 잃지는 않는다네. ...

언젠가 목표로 데려갈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하는 걸세. … 당분간은 작은 작품들만 만들어야 하네. 그리고 자네에게 날마다 주어지는 것을 모두 곧바로 받아들이도록 하게. …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 (이하 중략)"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 그의 말의 진실성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이제 괴테의 말을 통해서 몇 년이나 더 현명해지고 진보한 듯한 느낌이며, 진정한 대가를 만날 때의 행복을 마음속 깊이 깨닫는다. 그 이로움은 산술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p.56-62

#나의생각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라." 괴테의 그 말은 젊은 에커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젊을 때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일면적인데, 대작은 다면성을 요구하고 있지. 그러니 실패할 수 밖에.” 대작을 쓰지 말하야 하는 것에 대한 이렇게 완벽한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왜 글을 쓸 때 주저하는지, 그 이유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면적으로 쓰고 싶은 게다.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어느 정도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게다. 나에겐 빌어먹을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조금 있다. 하지만 인정하진 못했다. 지금의 일천한 실력으론 아직까진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이제 인정한다.   

나는 괴테를 잘 모른다. 고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를 쓴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그 책이 괴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에티카는 괴테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파우스트는 범신론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는 스피노자를 이렇게 칭했다.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본격적으론 이번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잠깐 조사를 해 보았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왜 늙은 괴테가 젊은 에커만에게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라고 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괴테 역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좌우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작은 공국 바이마르의 국정을 10년 동안 (원치 않게) 맡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써먹을 수는 없다.” 

그 이후 괴테는 도망치듯 떠나고, 오랜 친구들과도 멀어진다. 이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전환점을 만들고, 실러를 비롯한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얻는다. 괴테의 진짜 삶은 환갑부터 시작된다. 환갑을 맞이한 1809년부터 사망 때 까지 20년간 그의 창작력을 절정에 달한다. 소설 <파우스트>를 비롯한 기행문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시집 <서동시집>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또 이해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괴테의 말은 분명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자, 그렇다면 에커만과 괴테는 뒤로 하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에게 내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긴 글을 쓰지 말자. 짧게, 일상을 기록하자. 그저 내 생각을 담은 글 하나만이라도 꾸준히 쓰자. 한 가지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쓰도록 노력하자. 다면적 관점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자. 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어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지는 말자. 그저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하자. 그 의지를 표현하자. 삶과 말 그리고 글이 일치되도록 하자.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 말한다. 오늘 현재를 표현하자.  


  1. 창실 2015.07.28 00:15 신고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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