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동안 3배가 늘어난 몸무게
지난 5월 1일은 재원이 백일이었다. 내가 참으로 무지하다. 돌을 챙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기 백일을 챙기는지는 몰랐다. 내가 잘 몰랐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아내도 내가 이런 줄 몰랐을 것이다. 쪽 팔려서 밝히지 않았으니까. 나는 보통 애인을 사귀거나 할 때나 백일을 챙기는 걸로만 알았다. 이렇게 무지몽매한 나를 데리고 사는 아내가 조금 안타깝지만, 쨌든 백일은 잘 치뤘다. 내가 백일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 똑같은 모습이라 다들 놀란다. 유전자 깡패라는 얘기도 들었다. ㅋㅋ 지금 재원이는 꽤 몸이 커졌다. 태어날 때 2.3kg이었던 몸무게가 단 100일 사이에 3배가 들었다. 지금은 7.5kg정도가 되었다. 사실 나는 예전에도 생명과 인체에 대한 경외심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까이서 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는 어마어마하게 놀라고 감탄하고 있다. 그렇게 재원이는 '먹고자고 먹고자고' 하는 사이에 팔과 다리가 쑥쑥 자랐다. 이젠 안을 때도 꽤나 무거워서 허리를 조심해야 한다. 잘못 들다가는 삐긋하기 쉽상이다. 아기가 자라는 것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엄마의 변화다. 난 정말 신기했다. 아기가 출산하는 순간부터 엄마의 몸은 육아에 맞춰서 재탄생한다는 것이 말이다. 출산 전 커다랗게 부풀어 있던 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슴에선 아가에게 공급할 모유가 나오며, 가냘픈 아가씨는 사라지고 아이를 보듬은 강인한 엄마가 출현한다는 것. 그렇게 몸의 시스템이 180도 바뀌는 것이 신기해서 눈으로 보면서도 놀랐고, 아내와도 함께 몇번이나 새삼 감탄했었다. 생명의 신비는 지식으로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재원이 최초의 놀이는 거울 놀이
요즘 재원이가 빠진 놀이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거울 보기’다. 물론 아직 스스로 기어가서 거울을 보진 못 한다. 방법은 이렇다. 아내나 내가 아가를 안고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활짝 웃는다. 그럼 재원이는 거울을 보다가 우리를 보는 건지, 자기 자신을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캬르르 웃는다. 아기의 웃음은 정말 글이나 그림,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암튼 엄청나게 귀엽게 웃는다. 종종 좀 웃다가 부끄럽다는 듯 아내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돌리기도 한다. 그것도 무지 귀엽다. 다시 거울을 보여주면 또 활짝 웃고 고개를 돌리기를 반복한다. 나는 이걸 재원이가 처음으로 논다고 믿는다. 놀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놀이에서의 핵심은 바로 ‘반응’일 것이다. 상대가 숨었을 때 나는 찾는다. 상대가 도망가면 나는 잡는다. 놀이에는 언제나 상대와 내가 벌이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그 상호작용을 아가와 함께 배우는 듯 하다. 우리가 웃으면 재원이는 따라서 웃고, 그렇게 웃는 자신을 보면서 또 웃는다. 비슷한 시기에 부쩍 발달한 것이 ‘옹알이’다. 요즘은 뭔가 말을 하고 싶다는 듯 ‘옹알옹알’ 거린다. 아기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옹알이를 그냥 우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서 관찰하는 부모들은 아이가 우는 것인지, 옹알이 하는 것인지 확실히 구분한다. 분명한 것은 옹알이 할 때는 혀나 입을 요리조리 바꿔간다는 것이다. 그걸 보는게 참 재미있다. 함께 맞장구를 쳐주면서 놀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이러다가 ‘엄마!’라고 분명히 외치면 얼마나 신기할까. 존재에 대한 반응이 존재를 완성시킨다는 그런 느낌이다. 

마더 쇼크 그리고 파더 쇼크
EBS 다큐는 꽤 유익하면서 재미있다. 예능이나 드라마에 비해,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 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나름 다큐 매니아로서 몇 가지 다큐는 꼭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중 하나의 시리즈가 ‘마더 쇼크’ 그리고 ‘파더 쇼크’다. 원래 마더 쇼크가 먼저 나왔는데, 그 인기에 힘입어서 다음 시리즈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 파더쇼크에서 한 개념이 나에게 꽤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안정애착>과 <불안정애착>이다. 자신의 자녀와 갓난 아기 때부터 놀아주고, 안아 준 아빠는 <안정애착>이 형성된다. 아이는 한 공간에 아빠와 단 둘이 있어도 불안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쁜 일 때문에 잘 놀아주지도, 안아주지도 못한 아빠는 <불안정애착>이 형성된다. 아기들은 그러한 아빠와 있을 때 정서적으로 불안해하고 훨씬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렇게 아빠와의 부정적 애착관계는 청소년 비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되어 진다. 이것이 비단 청소년 시기의 문제 뿐이겠는가? 인생 전반에 걸쳐서 태어나서 3년, 길게는 7년 간의 경험은 그 만큼 결정적이다. 나 역시 아내에게 육아를 거의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가급적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아이와 많이 놀어주려고, 안아주려고 한다. 육아는 아웃소싱 되어선 안 되기에. 




아이들은 그들이 배울 준비가 됐을 때 배운다.
혁신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정말 보석같은 책이다. 강추하는 책. 그 책에는 대략 이런 단락이 나온다. "아이들은 우리가 가르칠 준비가 됐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배울 준비가 됐을 때 배운다. 아이들이 배울 준비가 됐을 때 부모가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아웃소싱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 아이들 곁에 있게 되었다. 당신의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선순위와 가치를 얻는다면, 그들은 누구의 아이인가? 핵심은 이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 시작하는 순간,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아이들이 개발하게 도와줄 소중한 기회를 점점 더 잃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 시작하는 순간, 우린 소중한 가치를 전해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선 분명, 결정이 필요하다. 다들 바쁘다는 거 안다. 하지만 결정해야 한다. 나는 내 가치관이 꼭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민하자는 것이다. 더 나은 부모의 역할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일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일이 되기 위해서. 나의 선택은 ‘균형’이다. 일을 놓치진 않으려 하지만 최대한의 시간은 아이의 곁에 있으려고 한다. 지난 백일이 그러했고, 앞으로의 몇년도 그러할 것이다. 외부적 활동에 목마른 것도 사실이나, 지금의 나는 아이와의 교감에 더 목말라 있으니 말이다. 아이가 반짝거리는 순간에 함께 하고 싶고, 그렇게 연결되고 싶다. 



아내는 좋은 부모가 되기를 고민한다.

지난 주였나, 이런 일이 있었다. 오전에 아내와 나는 잠깐 약간의 말다툼을 벌렸다. 사실 어떤 문제 때문에 그랬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원래 남녀간의 다툼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시작하기 마련이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툼이 끝나고, 그날 저녁에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를 옆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은데 잘 안 돼. 그게 고민이야.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그때 느꼈다. '아, 아내가 스스로 변하려고 하는구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 변화하려는 의지는 분명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아이 때문이었다. 아내는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선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짧은 생각을 전했다. “중요한 건, 화를 내거나 안 내는 거 아닌거 같아. 일단 화를 내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해보여. 화를 억지로 참는 것이 되려 더 안 좋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화 났을 때, 각자가 먼저 화 났다고 말했음 좋겠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말할 수 있으면 그 화의 절반은 다뤄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도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렇다. 서로의 감정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수준만 가도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I-message>나 <비폭력 대화>가 그러한 맥락을 담고 있다. 나도 아내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어갔다. 일단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말하는 연습까지 하자고. 자신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상대의 감정도 들을 수 있고, 나중에 아이가 커서도 서로의 감정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기에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자마자 너무 공감했던 표현이다. 사실 아이를 키우기 전에 이미 우린 이런 마음을 먹었을 때가 있었다. 떠올려보라. 기억나는가? 그건 바로 지금의 배우자(혹은 애인)를 처음 만났을 때다. 즉,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린 사랑에 빠질 때 좀 더 성숙해진다. 그 전에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뿐 이었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타자’를 ‘나’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두게 한다. 그건 인생에서 몇 번 일어나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다. 타자를 위해 무언가를 고민하고, 그를 위해 나를 변화시키는 것. 그 놀라운 경험은 오직 ‘사랑’만이 가능캐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 우리는 기존의 사랑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이건 정말 삶에서 이미 연습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올 뿐이며,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그렇게 아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면서 우린 앞서 연애 때 했던 맹세를 다시 꺼내든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나말고 다른 존재를 더 우선 순위에 둔 적이 없었기에, 이 경험은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삶이며, 후회를 동반하지 않는 선택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이성적인 판단보단 비이성적인 선택을 했을 때 우린 좀 더 ‘삶을 진하고 깊게’ 맛보게 된다. 나에게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이 바로 그럴 때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한다. 

사랑하자. 더 사랑하자. 
나는 삶을 깊이 사는, 그리고 더 나아지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알고 보니, 아내가 아이를 옆에 두고 다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에는 내가 전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예전에 아내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내가 그랬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내 앞에서 거의 안 싸우셨던 거 같아. 나는 싸운 걸 본 적이 없거든. 나 없을 때 조금 다투시거나 그랬겠지.” 나는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아내에겐 그 말이 꽃혔나 보다. 그래서 노력하려고 했나보다. 나도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보여준 몇 가지 면들을 높이 산다. 참고로,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어릴 때만 해도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다. 어떤 일에도 끝까지 믿어주시는 것도 너무나 대단해 보인다. 그런 부모님의 훈육법을 잘 추리고, 익혀서 우리도 재원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자고 서로 다짐했다. 

이처럼,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 우린 변화하고자 한다. 주위의 좋은 사례를 듣고, 그걸 우리의 삶에서 적용시키고자 한다. 어쩌면 부모가 된다는 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한번 더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가 보는 좋은 동화책을 함께 읽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고민 하면서 우리가 한 차례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육아, 그 자체를 애찬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사랑이다. 오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보는데 사랑에 대한 정의 하나가 와 닿았다. “사랑이란 하나의 추상명사이며 흐릿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히고 화면이 먹통이 되는 순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하게 견고한 부분은 바로 사랑임이 드러난다.” 나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통해 흐릿했던 사랑을 분명하게 세긴다. 그러니 우리 사랑하자. 부모라면 더욱 사랑하자. 그게 우리의 삶이니.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04.20 11:36

    좋은 글이에요~ ^^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내가 되려고하는 마음가짐, 저도 용기와 성장의 단계라고 생각해요. 잘 읽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