짦은 리뷰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그저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중 이런 멋진 문장을 만났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었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목적을 가지지 말라고? 누군가는 이 말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영어단어가 바로 For (~을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재미를 위해서, 혹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노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미있을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이 아닌 과정 추구.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반작용도 만만찮다. 모든 것엔 음과 양이 있듯) 독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과를 위해선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목적을 가진 독서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가까운 활동이지, 순수한 독서활동이라 할 수는 없다. 삶에는 일도 필요하지만, 순수 독서도 필요하기에.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글을 읽는다고 모두 독서를 하는 건 아니란 것이다. 


다음 부분도 의미있는 문장이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의 경우에도, 충분히 윤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 윤리성은 내 안의 타자, 즉 양심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아무리 종교를 가지고 있고, 열심히 믿는다 하더라도 타자성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면 윤리는 얻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종교적이면서 집단 이기주의적인 희안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타자'를 인식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성찰 그리고 독서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홀로 찬찬히 읽어 나가는 독서 활동과 성찰 활동은 그것을 가능캐 한다.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만 해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것들에 공감하고 반응하기 시작하기에.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문장을 꼽아보자.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모든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이렇게 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한번 읽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고. 나의 경우에도 중요한 책은 3번 정도 읽는다. 처음에 줄을 치면서 읽고, 두 번째는 인상 깊은 문장을 옮겨적으면서 다시 읽는다. 그때 놀라는 일도 많다. 이런 문장이 있었어? 라고. 마지막은 내가 옮겨적은 문장을 다시 읽으며 느낀 점을 적거나 리뷰를 적는다. 그렇게 3번은 읽어야 조금은 책이 나에게 들어온다는 걸 느낀다. 내가 읽는 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갈 수록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진짜 독서의 참맛이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책 조금 많이 읽는다고 우쭐했던 내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 



가슴에 남는 글귀 

p.28
프랑스의 교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자신의 독서론 ‘소설처럼’에서 ‘책을 읽다’라는 동사가 ‘꿈꾸다’ ‘사랑하다’와 함께 명령어로 바꿀 수 없는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사랑하라’ ‘꿈꾸라’하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것이 명령자의 뜻대로 실행될 수 없듯이, 읽기 싫은 사람에게 ‘읽어라’하고 명령해보았자 그저 읽는 척하거나 이내 수면제 대용으로 활용해버릴 뿐이다. 그래서 페나크는 책 읽기를 보다 친근한 일로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독자의 10가지 권리를 제창하고 있다. 

첫째, 읽지 않을 권리. (나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장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하든 읽고 싶지 않을 때는 안 읽는다.)
둘째, 건너뛰어서 읽을 권리. (새로 발간된 전공 서적을 읽을 때 내가 잘 쓰는 수법이다.)
셋째,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다.)
넷째, 연거푸 읽을 권리 (내가 좋아하는 로크카의 시집은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이제는 거의 다 외운다.)
다섯째, 손에 집히는 대로 읽을 권리 (이현세의 만화를 읽다가 갑자기 막스 베버를 읽은들 어떠랴.)
여섯째, 작중 인물과 자신을 혼동할 권리.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 햄릿이 되고 또 가끔 홍길동이 되기도 한다.)
일곱째, 읽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권리. (침대에서 읽고, 기차간에서 읽고, 수영장에서도 읽는다.) 
여덟째,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읽을 권리 (내 특기다)
아홉째, 소리 내어 읽을 권리. (흥이 겹거나 감동했을 때는 저절로 소리가 난다.)
열 번째,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책 읽기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즐거움을 혼자만의 비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p.50-51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거냐?” 이 질문은 ‘효용’이라는 관점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질문이다. 물론 책 읽기는 실용적 동기를 가진 사람에게도 쓸모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 무언인가를 배워서 응용하기 위해 책을 찾는 사람들이 독서 인구의 가장 큰 축을 이룬다. 이 책 읽기는 ‘공부’로서의 책 읽기이므로 누구에게도 박해받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궁극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또는 아내에게 핀잔 받는 책 읽기야말로 책 읽는 자에게 지고의 쾌락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4만 권이 넘는 자신의 책을 밀라노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는 말한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그가 권하는 ‘목적 없는 독서’야말로 문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다. 이런 책 읽기는 시험에도 취업에도 농사일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되면 어떤가? 그 무엇보다도 책 읽기는 쾌락으로 충만해 있지 않은가. ...

...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는 진정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을까?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나중에 세상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지는 사람이 된다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깨달아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많이 한 사람일수로 목적 있는 책 읽기만 주로 한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고 더 따뜻한 것을 나는 보았다. 


p.60
책을 읽을 때는 사람이 주인이다. 읽으려는 의도와 읽는 속도, 그만두는 행위를 사람이 스스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매체는 사람보다 더 힘이 세고, 사람보다 더 빨라서 사람을 종종 압도한다. 물론 편하기는 하다. 영상의 속도에 감정을 맞춰두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일을 남의 의도에 내맡기기 쉽다. 책 읽는 일이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스스로 책을 고르고, 책장을 연다. 또 스스로 활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 때로 앞장으로 되돌아가려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또는 읽다가 팍 덮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린다. 이 모두 사람이 스스로 하는 일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일보다 귀찮고 힘이 드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래서 그만큼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p.64-7
어떻게 하면 이 ‘끔찍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서간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는 그 해답의 작은 단서가 비친다. 로마교구의 마르티니 추기경이 던진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코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사람은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 육체의 확장인 다른 사람의 말, 사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량학살, 식인 풍습, 타자의 육체에 대한 모욕을 인정하는 문화가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 것일까요? 그 문화들은 ‘타자’의 개념을 단지 부족 공동체에만 국한시키고, ‘야만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병사들조차 이교도들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를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들을 타자에게서도 존중해야 할 필요성, 이것은 바로 천년에 걸친 인류 성장의 결실입니다."
/ 움베르트 에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 

…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상은 나치 학살자들이 ‘타자’의 범위를 자기 민족으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생긴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영상미디어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전쟁과 살인의 물화를 거부하는 일, 미디어 이벤트가 된 전쟁과 테러의 와중에도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는 일,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읽는 일이다.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만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특별한 혜택이다. ... 책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인간 유형을 만나게 해준다. 우리는 책 속에서 허락도 약속도 없이 여러 유형의 인간들과 마음대로 만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책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선에 우리를 세워준다. 


p.85
종이책은 ‘무한 에너지’를 가진 매체다. 충전시키지 않아도 되고, 콘센트에 꽂지 않아도 볼 수 있다. ... 또 책은 개인매체다. 혼자서 사용하고, 혼자서 통제하고, 혼자서 즐기는 매체다. ... 책은 내용에 제한이 없다. 즉 어떤 콘텐츠도 다 담을 수 있다. 이런 콘텐츠의 ‘다양성’이 매체로서 책이 가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의 하나다. 


p.88

이 모든 장점을 다 합쳐도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책만이 가진, 책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책이 ‘사람이 주인인 매체’라는 데 있다. 즉, 책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통제해야만 하는 매체다. 책을 읽는 일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행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행위와는 달리 ‘읽는 의지’가 필요하다.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려는 인간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만큼 쉽지 않다. ... 책 읽기가 고통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책이 독자에게 자신을 해독할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을 온전히 읽으려면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문장 전후의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 그러나 책 읽기에 따라오는 이런 고통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모든 쾌락은 고통의 시간 뒤에 온다. ... 깊은 쾌락일수록 깊은 고통을 요구한다. 


p.94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위정자가 독재자였고, 누가 민주적인 통치자였는지 한 칼에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손쉬운 독재자 판별법이 있다. 책을 불태운 자가 바로 독재자다. 네로, 진시황,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불사르는 자가 빼앗고 없애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상력, 꿈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또한 ‘남과 다른 생각’이며, 남의 말이나 남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다. 그렇다. 책을 읽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 귀찮고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더욱, 인간으로 태어난 지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책 읽기는 때로 어렵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  


p.122
다시 읽기를 주창하는 사람 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씨가 있다. 그는 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오래전에 갔던 산사를 다시 찾아가는 일과 같다. 전에는 안 보이던 빛바랜 단청이며 뒤뜰의 부도탑이 어느덧 눈에 들어온다. 몇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왜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같은 절을 여러 번 방문하면, 무엇보다도 절집 전체의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뒷산과 대웅전 처마 끝이 맞닿은 풍광이 가슴에 천천히 안겨오게 된다. 책도 이와 같다. 오래 사귄 책은 오래된 절과도 같다.


p.134
내용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책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추억만 읽으면 된다. 가끔 어딘가에서 책을 읽었던 그 행위 자체가 한 권의 책이 된다. 프루스트는 말했다. “자신이 읽은 책에는 그 책을 읽은 밤의 달빛이 섞여 있다.” 


p.146
그렇다고 고전이 필요없다는 건 아니다. 고전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큰 울림을 남긴 책이다. 사람들이 되풀이해서 읽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그 내용과 명성이 오랜 시간 전해지면서 비로소 전설이 된 책이 고전이다. 그러나 책 읽는 사람 각자에게 의미 있는 ‘고전’이 있을 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고전’은 없다. 저명한 학자나 권위자가 정한 고전 목록에 체크를 해가면서 한 권 한 권 억지로 읽는, 마치 방학 숙제와 같은 책 읽기에서 좀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p.164-6
아무도 내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책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매달리는가?”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을 바라보듯이, 책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책 읽기보다 더 즐거운 일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 오래도록 책을 읽고 있는 까닭도 책 읽기가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정치학자인 최장집 선생이 자신의 일과가 “전공 책을 읽는 시간과 비전공 책을 읽는 시간으로 나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 얼마 전 일본 문학의 두 거장인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의 ‘필담’을 읽다가 거기에 나오는 쓰지 구니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있다. 다음의 문장 중에서 ‘문학’이라는 말을 ‘책’으로 바꾸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될 듯싶다. 

“문학이란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놀아야 한다’고 해서 ‘놀이’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하나의 ‘놀이’와 같습니다.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어떤 ‘놀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관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행복’ 그 자체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무관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마냥 즐거운가. 그렇지만은 않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하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동시에 경험한다. 책을 읽는 자는 완전한 단독자로서 세계와 맞닥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읽는 일은 구원인 동시에 좌절이다.  


  1. 조아하자 2015.11.30 21:29 신고

    책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 맞는말인듯... 책을 포함해서 문화유산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라는 말도 맞는거같아요... 최근에는 IS가 문화유산을 불태워서 말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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