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책 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이 카테고리는 '소소한 칼럼'이라는 이름의 '글방'입니다. 
제가 그리고 저희가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적고 의견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부담없이 봐주세요 :)

이번 글은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란 주제로 조금씩 끄적거린 내용인데요, 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었습니다. 호흡이 긴 글이니, 중간에 지루해질 수 있단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재미있게 적고 싶어도 저란 사람이 그게 참 안 되네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어느 날 하와이의 전통 치유법에 대한 책, <호오포노포노, 평화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읽던 중 <삼나무 이야기>라는 이야기라는 짧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글이 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단 느낌이 들어서 옮겨적었습니다. 우선 다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짧습니다. 


"삼나무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사과나무와 오렌지 나무, 아름다운 장미들이 
함께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사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했지만, 한 그루의 나무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 불쌍한 나무에게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과나무가 말했다.
"네가 필요한 것은 집중이다. 진정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아름다운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야"

장미 덤불이 주장했다. 
"그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어. 장미를 피우는 게 더 쉽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를 봐!"

절망한 나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두 시도해보았지만 다른 나무들처럼 될 수 없었다. 
매 순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깊은 좌절뿐이었다.

하루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알려진 올빼미 한 마리가 정원으로 날아왔다. 
올빼미는 나무가 절망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야. 지구 위에 있는 많은 인간들과 같은 문제일 뿐이지. 
내가 해결 방법을 알려줄게.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려고 네 인생을 희생하지 마. 
너 자신이 되는 거야. 너 자신을 알면 돼. 그러기 위해서는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렇게 말하고 올빼미는 사라졌다.
 
"내면의 목소리? 나 자신이 되라고? 나 자신을 알라고?" 
절망한 나무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는 귀를 닫고 가슴을 열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넌 사과는 결코 만들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사과나무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넌 봄에 꽃을 피우지도 못할 거야. 왜냐하면 장미 나무도 아니기 때문이야. 
너는 삼나무야. 너의 운명은 크고 당당하게 자라나는 거야. 
너는 새들에게 쉴 곳을 주고 여행자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시골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너에게는 임무가 있어! 그 임무를 따르면 돼!'
 
나무는 그렇게 스스로 강한 확신을 얻었고, 곧이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는 곧 공간을 채우고 모든 이들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정원은 그제서야 비로소 완전히 행복해졌다.

 
다 읽어 보셨나요?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린 자연스래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삼나무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춰 버리는가. 
얼마나 많은 장미 덤불들이 가시만 돋아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 치여 '자기 자신'과 분리된 삶을 살고,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가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나와서 나와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만, 우린 마치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나의 재능을 억압하고, 아니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듭니다. 그래서 분리된 삶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참고로 앞으로의 내용은 파커.J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 나오는 글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맡은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득을 얻으려 한다. 
갈등, 도전,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숨기고 정체성을 감춘다. 
꼭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한다.

이러한 분리됨은 혼자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산됩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건성건성' 가르치면 그것은 곧 학생들의 문제가 됩니다. 
정치인들이 단지 '혀'로만 말하면 그것은 곧 시민들의 문제가 됩니다. 문제는 확대되고, 다시 반복됩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이 싫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현실이.. 그래서 전 온전함이란 단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온전함이란, 완벽함을 뜻하는게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원래의 조건에 일치하고, 손상되지 않고, 섞인 것이 없는 진정한 상태'의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선함보다 온전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선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존 미들턴 머리(John Middleton Murry)


우리는 왜 이렇게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믿으며 우리는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다고 교육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면과 갑옷을 벗고' 살아가는 게 더 안전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학생들과 공유하는 교사가 벽 뒤에서 정보와 지식을 날려보내는 교사보다 더 효과적이고,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리더가 인사고과표로 이끄는 관리자보다 직원들을 더 열심히 일하게 하죠.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깨어있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부인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인하면 할 수록 우리는 술, 약물, 일, 쇼핑, 대중매체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평생동안 거짓된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습니다. 

질문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깨어있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홀로됨은 자아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냥 두면 자아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커뮤니티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직적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이 선택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결코 서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면의 두려움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홀로됨과 커뮤니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려면 '이해'가 필요합니다.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뜻하며, '커뮤니티'는 반드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음을 뜻합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이 공간은 어떤 공간일까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선 기대와 욕구를 채우지 않고, 각자의 능력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채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고치고자 하는 충동을 자제하고 흔들림 없이 서로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속도와 깊이로 서로 배워야 할 것을 배우도록 지원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꿈꾸는 학교의 모습도 이런 모습입니다. <홀로 함께하기>란 단어가 그려지나요?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는 교육의 핵심은 온전함을 되찾는 것, 그리하여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깨끗한 거울' 즉,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곡된 나의 모습만 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공간엔 지시와 판단은 없습니다. 기다림과 질문, 깊은 신뢰가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꿈꾸며, 사람들과 함께 이뤄가고자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를 위한 교육과 교실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이 글을 쓴 것이 작년 4월이다. 꽤 옛날에 썼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 정답이겠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꼭 그 시간의 양에 비례하진 않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읽어보았다. 뭐 지금도 이 생각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나는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을 회복하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대한 나름의 논리가 담긴 글이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뭐?"라는 자연스런 질문이 떠오르는 글이란 느낌이고 말이다. 하하하. 이어서 2탄도 옮겨본다. 


안녕하세요? 책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최근 세월호 사건 때문에 많은 분들이 큰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고 계신데요. 저 역시 한 명의 어른으로서 크나큰 책임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일진 모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저말고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이 쉽게 잊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번 달에는 이런 저런 사건들과 소소한 가정사 때문에 글 쓰는게 조금 늦어졌는데요, 그나마 4월 마지막 날이나마 올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쓴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1)'에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의 핵심은 온전함을 되찾는 것, 그리하여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깨끗한 거울' 즉,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혼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왜곡된 나의 모습만 볼 뿐이며,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이 공간엔 지시와 판단은 없다. 기다림과 질문, 깊은 신뢰가 존재할 뿐이며, 이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배우고 가르친다.  
저희는 이러한 공간의 모습을 언제나 상상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이뤄가고자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를 위한 교육자와 교실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교육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그건 바로 '온전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교육은 온전한 어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온전한 어른이란, 아마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줄 알며, 학생들과 깊이 공감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일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인군자나 니체가 말한 '초인'과 같은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해지려는 분투보다는 겸손을 향한 여정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꼭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

 

개인적으로 저는 2년 전에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 인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아이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지만, 인정하고 나니 제가 할 일은 분명해 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르치지 않고 배움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온전한 교육의 시작은 '가르침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배움은 배우는 사람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게 아니라, 배울 준비가 되었을 때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게다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우린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학생들에겐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건 바로 '경험의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 아마 아이들은 즐거운 경험, 몰입하는 경험, 이야기는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운이 좋다면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나의 '의문 혹은 질문'을 가지고 가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도 재미있었다! 근데 음.. 아까 그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궁금한데?"

 

자기만의 경험을 하고, 질문을 가졌을 때 학생들은 이제 '배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배울 준비가 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위의 모든 관계'입니다. 주위에 있는 책, 인터넷, 사람 심지어 길가에 핀 꽃을 통해서도 배우기 시작합니다. 모든 장소는 배움의 공간이 됩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그 마음을 잃지 않도록 옆에서 견지하고, 관계하며, 가끔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 됩니다. 물론 스스로도 이미 하나의 질문을 품고 살고 있어야 하지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교육의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이 일어나기 위해선 어떤 교실의 모습이 필요할까요? 그건 아마 이러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바로 스웨덴의 '교실없는 학교, 비트라'입니다. 딱딱한 교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멋지지 않나요? 

이러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 깊이 '공감'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며, 진실된 '나눔'을 통해 서로를 성장시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기분 좋은 상상은 '이러한 교실에선 어떤 수업이 경험되어져야 할까?' 입니다. 

이러한 공간에서 우린 또 국어, 영어, 수학을 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 학생들의 공감, 표현, 나눔 능력을 일깨워줄 수 있는 수업 커리큘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과 수업은 주제별 학습을 통해 흥미에 따라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메인 수업 3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철학 수업 : 철학은 당연한 것에 대해서 '의심할 때'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아마 그래서 철학 수업은 깊이 있는 독서, 글쓰기 그리고 토론을 통해 생각을 표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나누고, 친구의 나눔을 통해 자신을 보고, 나아가 자기인식능력과 공감 능력까지 기르게 됩니다. 이러한 철학 수업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이나 유대인들의 떠드는 도서관 '예시바'와 같은 모습을 닮아야 할 겁니다.


Q.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 독서, 토론, 글쓰기, 코칭 등

 

2. 예술, 디자인 수업 : 진정한 예술은 '100% 자기 표현'을 가능하게 하며, 진정한 디자인은 '100% 인간 중심'으로 설계됩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편이나 불만에 깊이 공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시간도 또한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힘이 예술과 디자인 교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또 자신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우리 모두가 꼭 누려야 할 권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술, 디자인 수업은 영국의 서머힐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Q.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A. 예술(춤, 노래, 그림, 연극), 디자인 씽킹 등


3. (게임을 활용한) 프로젝트 수업 : 게임은 지금까지 개발된 가장 효과적인 '몰입 환경'입니다. 게임에는 스토리가 있고,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는 이 '매직 서클' 속에서 주인공이 되며, 유능해지는 경험(Level Up)을 합니다. 게다가 레벨에 맞는 퀘스트로 인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요. 이 교실에선 이처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며, 현실 세계를 탐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 학생들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닌 함께 협업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어려운 퀘스트도 쉽게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프로젝트 수업은 독일의 헬레네 랑에와 같은 사례를 참고하고 싶습니다.  


Q.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탐험하고 싶은가? A. 프로젝트 수업, 게임, 소셜 디자인, 사회적 기업가정신 등 


지금까지 사람, 장소, 그리고 커리큘럼에 대해서 간단히 적어 보았습니다. 혹시 이러한 학교가 머릿 속에 그려지시나요? :) 아직은 터무니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저희는 이러한 신념을 갖고 조금씩 조금씩 현실화시켜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국, 이 학교에선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그걸 한 단어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결국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더욱 진실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것이며, 나아가 기꺼이 창조하고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학교를 <심마니스쿨>은 지향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념을 함께 공유하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견을 주시고,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작은 행동이 큰 기적을 낳는다고 합니다. 작은 행동이지만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교육시킬 수 있다. 지혜로운 글을 읽고 사색하면서..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한 발짝 물러나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과정에서.. 

타인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면서, 시간을 들여 마음을 정화시키고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양심을 훈련시킬 수 있다." 

 

스티븐 코비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정상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이다. 오늘 아침에 한 서울시 광고를 봤다. 서울시 새로운 별명을 지어주세요. 그러면서 한 예시로 <파괴의 군주, 비글>이 나와있었다. 강아지를 키운 적은 없지만 비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재미있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상인 비글은 어떤 존재인가? 다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고뭉치. 말썽쟁이. 악마견. 파괴자. 등등 실제로 집안을 다 부숴버린다. 주인 입장에선 난감하다. 태도를 바꿔야 할 강아지다.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비글은 정상이다. 비글을 그저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할 뿐이다. 다만 자신이 있어야 할 적합한 곳이 놓여진 것이 아니다. 비글에게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 비글을 검색해 봤더니 이렇게 나온다. '비글은 사냥에 아주 적합한 견종으로 그들은 단호하고 날카로운 사냥꾼이다.' 그렇다. 비글에겐 아파트가 자신의 적합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공간만 충분히 확보된다면 비글은 파괴의 군주란 오명을 벗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어서 떠오른 이야기다. 영국에서 한 여자아이가 너무 산만했다고 한다. 병원에 대려가면 다들 ADHD라고, 문제가 있다고만 했다. 특수학교에 보내거나 약으로 처방해야 한다고. 부모는 낙심했다. 지친 부모는 마지막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이 아이는 타고난 댄서입니다.'


그렇다. 그 아이가 놓여야 할 곳은 교실이 아니었다. 춤을 추는 곳이었다. 아이는 너무도 춤을 추고 싶어 몸이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는 댄스 전문 학교로 보내어졌고 그녀는 영국왕립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되고 이후 <오페라의 유령>을 디렉트한 세계 발레계의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선과 악의 기준은 선이라고. 선과 악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렇기에 선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폭력의 기준이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마찬가지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도 정상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비정상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 그것은 폭력이다. 그건 마치 자신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상과 비정상의 딱지를 붙이는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정말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해야 나는 더욱 나답게, 더 적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맞지 않은 공간에서 우리와 맞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우리와 맞지 않은 목표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비글이라면 사냥을 하러 가라. 당신이 댄서라면 춤을 추라.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서 누구와 함께 머물러야 하는가!


와우 스토리 연구소 팀장, 연지원 작가의 책 <어떻게 자기답게 사는가>에 대한 초서 및 끄적거림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와우 스토리 연구소 내부에서 공유되는 책이라는 점 미리 말씀 드립니다. 나중에 출간될 수도 있겠지요 :) 검은 색은 책이고, 파란 색은 제 생각입니다. 독서 축제, 시작합니다. 

프롤로그
- 천직을 자기 업으로 삼은 이들은 자기 재능과 직업을 연결한 이들이다. 그들은 만족과 경제적 안정을 모두 얻는다. 경제적 수입이 많이 않더라도 자기 일에 대한 만족도가 크다. 이들은 근면과 학습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상위 10%의 세계에 속할 수 있을까? 일하는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 천직은 일 처리의 수준이 아닌 자기이해로 이르는 영역이니까. p.2
+ 돈을 위해 일하는 것, 경력을 위해 일하는 것, 인생을 위해 일하는 것. 일하는 행위는 같지만 동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 동기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어떤가? 나는 이런 지표에 좀 예민하다. 다시 말해, 천직이 아닐 경우 많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좀 더 나다운 일을 찾기 위해 요 몇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해왔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일하는 수준으로 천직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3년 전에 내가 했던 일은 영업이고 기획이었다. 그 일을 나보다 훨씬 더 잘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천직인가? 그렇지 않다. 그냥 그 일을 잘 했던 것 뿐이다. 나 역시 그 일을 몇년 동안 더 해서 마스터했다면 어땠을까? 만족이 있었겠지만 그리 크지 않았으리란 추측이다. 지금의 삶은 내가 꿈꿔온 모습 중에선 가장 닮아 있다. 수입이 많이 않아서 오는 스트레스 이외에 일 자체만으로 오는 스트레스는 거의 없기에. 

- 천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대답을 찾은 사람들의 세계다. (…) 개인화를 위한 노력, 다시 말해 자기이해에 이르는 물음을 붙들고 하나둘 대답을 발견하면서 천직에 가까워진다.  p.2
+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위의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이렇다. ‘나는 어떤 일에서 의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일을 더 잘 하고 좋아하는가?’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을 거듭하다 보니, 지식을 쌓고, 그것들을 체계화해서 전달하고, 또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것. 나는 그런 걸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미래는 정해두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40대의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이 천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것이 더 기대된다. 뭘 하면서 살고 있을까?

- 모든 인위적인 것은 단명하나, 자연스러운 것은 오래 간다.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에 비해 자연의 생명력은 영속적이다. 오래가면 성취가 되고, 의미 있는 역사가 된다. 오래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자연스러움의 인간적 용어, 즉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p.3
+ 왜 자기답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이 아닐까. 모든 인위적인 것은 단명하나, 자연스러운 것은 오래 가기에, 그렇기에 우린 더 자기다워져야 한다. 그렇게 자신과 마찰이 적어져야 오래할 수 있고, 의미를 남길 수 있다. 어쩌면 후대에 훌륭한 유산을 남기는 사람도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오래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사람. 

-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가 뭔지 느끼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수업에 들어갔어요. 저희 아이들이 보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쉽게 알더라고요. (…)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문데, 우리 아이들에게 제일 쉬운 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는 거더라고요. 영어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다 부족하지만 그런 면에서 만족하죠.” p.7
+ 내가 좋아하는 서머힐학교! 나는 미래에 이런 학교를 만들고 싶다. 꼭 하드웨어적인 학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교 문화, 정신, 커리큘럼, 소프트웨어,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 재원이가 커서 ‘아빠는 우리나라 교육이랑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뭐했어?’라는 질문을 던질 때 부끄럽게 않게 말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 앞으로 7년 남았다. 아이들을 스스로 더 자기답게 만드는 법을 개발하자. 그 시작은 내가 더 자기다워져야겠지. 

- 학교는 우리에게 공부를 권한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학습을 방해하는 것이 학교다.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꿈을 실현하라고 말하는 세상도 실상은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p.8
+ 이 글을 읽고 떠오른 책은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 그 책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교가 공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병원이 건강의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화도 그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과 실체를 혼돈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학교는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내가 대학원을 고민하다가 가지 않은 것도 그 신화에 저항하고 싶어서다. 무슨 공부를 하기 위해 석사, 박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그래야 지식인 인것처럼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아이고 의미없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 잘 못하면 이런 사회에서 ‘신화와 환상’만 쫓으며 달려가다가 ‘실재’를 만나서 곤두박칠 칠 수 있다. 삶은 그런 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진짜 만이 진짜를 구원할 수 있다. 

- 젊은이들의 자기철학도 희소해져간다. 젊은이들만 탓할 순 없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를 사는 대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고민하느라 자기 인생을 사유할 시간을 놓친다. 취업 준비를 하지, 자기철학의 얼개를 짜지는 않는다.  p.8
+ 내가 요즘 드는 생각은, 메트릭스는 사회에 대한 정말 완벽한 비유라는 것.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지금 사회의 모습은 가장 편한 상태이지 않을까?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사람들은 힘겹게 일어나 겨우 출근하고, 지하철에선 모두 고개를 쳐박고 웹툰을 보면서 실실대거나 자고, 저녁이 있는 삶은 커녕 주말도 없어서 노예처럼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 눈치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기 바쁜 사회. 다시 말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회란 이런 모습 아닐까. 젊은이들에게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니 쓸데없는 짓, 딴짓을 하지 않고, 딴짓을 안 하니 뭐가 좋고 뭐나 나쁜지 구분하지도 못하고. 부모님이나 친구들 의견 거스르기도 어려우니 ‘일단 직진’하고. 그렇게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산다. 무엇이 문제인지 가끔 주위를 둘러보지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을 애써 외면하고. 그들과 멀어진다. 네오는 이런 사회에서 ‘진실에의 갈망’으로 시온으로 들어오고, ‘사랑의 힘’으로 메트릭스를 넘어서고, ‘행동’으로 자신이 누구임을 자각하는데, 그 첫번째 시작은 ‘해킹’이라는 딴짓거리 다시 말해 호기심이었다. 그 최소한의 여유가 세상을 바꾼다고 나는 믿는다. 제발 대학생들에게 학비 좀 받지 말자. 이 빌어먹을 정부야. (쓰면서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교 학비를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 때문에 어떤 혜택을 받았기에. 그래서 전공을 바꿀 때 ‘미안함’이 솔직히 덜 했다. 만약 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으로 4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내가 이렇게 쉽게 전공을 포기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아, 그랬구나. 그런 부담감이 사람을 질식시키는구나. 갑자기 진심 감사하다. 부모님께)

- 김중혁은 자신만의 시간에 “소설을 썼으며, 온갖 발명품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때로는 직접 곡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시간이 많았지만, 그만큼 바빴다.” 여러분의 바쁨은 무엇을 위한 바쁨인가? 사회화에 여념이 없는 바쁨이 아니라, 자기철학을 세우는 데에 도움을 주는 바쁨이기를 바란다.  p.9
+ 그래, 이런 사람이 네오가 된다. 

1. 자신만의 길을 가라
- 확신과 회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다시 자기 길을 가면 된다. 나는 강연을 진행하면서 자기 길을 모르겠다고 답답해하는 사람들, 직관적인 선택을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 확신하지만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자기다움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말자. 자기다워질수록 인생살이가 자연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자기다움의 여정은 자기신뢰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길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결국엔 나만의 길을 찾아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p.21
+ 길에 대한 확신이 아닌, 나에 대한 확신. 그것이 정확한 답이다. 나는 교차점에 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명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전공을 때려쳤을 때, 수입이 훨씬 적어짐에도 이직을 결정할 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결정할 때 등등. (다 돈과 연관되어 있구나) 그 당시 내가 하는 한 가지 생각이 바로 ‘에라이 굶어죽지는 않겠지’였다. 정말이다. 특히 2013년, 회사를 나오고 아무 일이 없을 때 결혼을 준비했다. 경제적으론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대출을 받기도 했으니. 그 과정에서도 나는 그랬다. ‘굶어죽진 않겠지? 설마?’ 결과는 어땠을까? 결혼식으로 온 나름의 수입마저 모두 생활비로 쓰긴 했고, 약간의 대출이 있긴 했지만 굶어죽진 않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좀 나아졌다. 올해는 어떤가? 2015년 3월은 보릿고개다. 힘든 건 사실이다. 돈이 회전이 안 되기도 하고. 사실 결혼하고 생활고에서 자유로워진 적은 없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하다. 조금 씩 더 나아지고 있기에. 그리고 결국은 버텨왔기에. 뭐 일단은 버텨보자. 굶어죽지는 않겠지. 

- 20대는 원대한 이상을 추구하고 도전 정신이 살아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하다. 한 마디로 현실인식이 약하다. 반면, 중년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삶의 한계를 인식하고 페풀 줄 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원대한 이상이다. 너무 소박하게만 꿈을 꾸는 것이다.  p.26
+ 나이가 들어갈 수록 원대한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 분명히 보인다. 특히 아이가 생기고 가정을 꾸려가면서 경제적 부분에서 일정 조급함이 생기더라. 그리고 내 가정도 제대로 일구지 못하면서 꿈은 무슨.. 이란 생각도 생기더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정을 일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꿈을 일구는 것이 그 뒤의 순서가 아니라는 것. 그 둘은 각각의 다른 게임이다. 두 개의 목표를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격하면 되는 것이다. 둘 다 나에겐 중요하기에. 어떤 목표가 어떤 목표의 제약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엔 아직 젊다. 

- 집착은 일관성을 오해하여 빚어진 결과다. 집착은 의미 없는 일관성이다. (..) 일관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자신이 내뱉은 모든 말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실수와 실패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관성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진정한 성장이다. 
+ 무엇이든, 그 ‘양’이 중요하다.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외없이. 일관성이란 그 좋은 성품도 마찬가지. 지나치면 외골수가 된다. 변함없어서 좋다는 평가와 넌 맨날 똑같니라는 평가는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할 것이다. ‘원칙’은 목숨처럼 지키되, ‘응용’은 자유롭게. 그것이 정답일듯. 

- 인생살이에는 이성이 필요할 때가 많지만, 자기여행자가 인생길을 선택할 순간에는 이성을 내려놓고 직관을 따라야 한다. 이 순간 만큼은 이성이 자기여행자들의 적이 된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라. 논리적인 사유를 거치지 않은 직관이 종종 머리를 싸맨 분석보다 현명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음을 신뢰하라. (…) 당신이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직관으로 대답하고, 어떻게 그곳에 다다를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이성으로 답하면 된다. p.35
+ 그렇다. 직관에 관한 가장 훌륭한 분석이다. 역쉬 팀장님. 내가 왜 이렇게 말 하냐면, 예전에 직관을 너무 맹신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직관을 언급한 것을 올바른 맥락이었다. 현대 사회의 그 갑갑한 삶을 사는 사람들. 몸이나 가슴이 아닌 오로지 머리로만, 이성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반인들에겐 ‘직관을 듣고, 따라라’라는 메시지는 얼마나 의미 있는가. 하지만 나는 곧 그 메시지의 위험성도 함께 보게 되었다. ‘직관’이 ‘직관’이라고 스스로 말 하는가? 라는 질문. 직관 역시 언어이다. 언어는 나의 언어 기반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것 또한 나의 한계를 넘어서긴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임을 어떻게 아는가? 그 구분이 가능한가? 물론 대략 느낀을 그럴 수 있으나, 그렇기에 조심해야 한다. 나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서 직관 역시 익숙해지면 이성과 다를 바 없이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일 수도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직관’은 ‘책임’이 모호하다. 누군가에게 조언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냥 직관이 떠올랐어’ 그 말이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작을 수도 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직관에게는 책임을 돌릴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 피해를 본 사람이 따져도 그는 ‘내가 말한게 아니라 직관이 그런거야’라고 한다면? 답이 없다. 그러므로 직관 이후에는 면밀한 분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직관의 책임마저도 오롯히 자기 자신이 가져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직관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너무 쉬이 조언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지나치면 ‘직관이 옮다’ 가 아니라 '내가 옳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내는 직관에 스스로 익숙해지고 주위에서도 받아들여질 때 사이비교주가 되는 것이지. 모. 


- 나에게 있어 자기다움의 상징, 네오 - 


2. 몰입과 성찰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동기와 성격’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  p.40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요즘엔 더욱 그렇다. 나의 주의를 빨아들이는 빨판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여자들의 경우에 뷰티나 먹거리, 페션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고, 남자들의 경우 게임, 스포츠, 자동자 그런 것들이 있다. 적당히 추구하는 것은 삶의 윤활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의 속성은 끝도 없다는 것. 특히 게임은 하면 할 수록 재미있다. 내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아도 그것을 하고 있다. 이미 중독되었기에. 나도 몇번이나 빠졌었기에 잘 안다. 그래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프로게이머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걸 구분하긴 어렵다. 기차를 중간에 멈추는 것처럼 '충격적 사건' 정도가 아니면 종착역에 내려서야 ‘아, 여기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너무 늦는다. 

- 내가 정의하는 천직이란 무엇일까? 나는 천직을 이렇게 정의한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일하면서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높은 성과와 공헌을 이룰 수 있는 일’ 천직이란 ‘하늘이 내려 준 일’이라고 기억하되, 그것은 개인의 자기실현과 타인으로의 공헌을 모두 이룰 수 있도록 내려 준 것임을 명심하자.  p.43
+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자연스런 모습으로 일하면서도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은 일. 나아가 주위에서 사회와 후손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엄청난 권력과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부럽지 않지만, 자연스런 모습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이건희 회장은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이희석 팀장님은 좀 부럽다.ㅋㅋ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고 있는 일(현업)에 몰입하다가 하고 싶은 일(천직의 가능성이 있는 일)이 생기면 힘차게 도전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 choice를 통해 얻은 체험들이 selection 감각을 키워준다. (…) 그러므로 지금 당장 천직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 발견을 위한 실험을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젊은 날의 직업 선택은 selection이 아니라 choice여야 한다는 말이다. p.45
+ 하고 있는 일에서 하고 싶은 일로 뛰어들기. 맞다. 내가 아이들 교육으로 뛰어든 일이 아마 이걸 말한 것이리라. 나는 2010년-11년에 기업 교육 시장에서 영업 및 기획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이런 교육으로 진정으로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 질문. 나는 조금씩 회의가 들었다. 물론 성인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다 흘러내리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훌쩍 커있는 것처럼 성인 교육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뭐든 아까워 하는 나는 그 흘러내리는 물이 아까웠다. 특히 CEO들 모아놓고 몇 천만원 하는 특강이나 교육을 볼 때면 더 그랬다. 저런다고 저 사장이나 회장이 바뀔까?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그 물이 좀 더 어린 시절로 내려갈 수 있다면, 특히 아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말이 길어지지만, 나는 회사를 옮겼고 아이들 교육을 직접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고생길은 새롭게 열렸고, 또 다른 의미의 질문이 시작되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교육은 연령대가 중요하다는 것. 동물에는 모두 결정적 시점이 있다. 오리는 1시간, 고양이는 4주, 원숭이는 1년, 그리고 인간의 결정적 시점은 태어나서 딱 10년이라고 한다. 그렇담 당연히 CEO교육에 들어갈 돈이 육아와 보육에 사용된다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란 생각도 한다. 흘러흘러 왔다. 지금 나는 아이들과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고, 육아는 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다. 내 입장에선 기업 교육과 육아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모르지, 앞으로 10년 뒤에는 내가 육아 쪽으로 방향을 더 틀지도. 나의 질문은 바뀌지 않았지만. 

-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라. 그러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니체  p.50
+ 나에겐 회계나 그런 숫자 가지고 노는 일들이 그렇다. 공대를 나왔음에도 전혀 늘지 않았고, 오히려 고등학교에 비하면 퇴보하고 있다. 나름 수능 때 수학 2개 틀렸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수능은 참 썩었다. 내가 수학을 좀 잘 한다는 이유로 공대를 가다니. 어쨌든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의 질이 높아지겠지만, 그 일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회계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나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ㅎㅎ

- 많은 이들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 여기는 반면, 여가는 자신이 선택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롭고 가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험 결과, 일과 여가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과 그들의 실제 생활은 상당히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여가를 보내는 시간보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보냈다. 직장에서는 자신이 유능하다고 느끼고 자신감을 체험하지만, 집에 와서는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p.53
+ 생각해보면, 칙센트마하이의 ‘몰입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과업의 난이도와 나의 능력의 적절한 간격을 유지할 때 우린 자기효능감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레벨 1인 전사가 레벨 2의 스마일을 죽이러 갈 때 재미있고, 흥분이 된다. 하지만 레벨 100의 전사가 스마일을 죽이라고 하면? 당근 재미없고 의미도 없다. 집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도전 과제가 없는 곳은 효능감을 경험할 수도 없기에. 우린 우리가 레벨업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찾아서 나보다 레벨이 높은 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 경험치를 얻고 운이 좋다면 아이템도 얻는다. 

-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좋다. 멀티테스킹의 본질은 동시에 두세 가지 업무를 해내는 것(multi)이 아니라, 매우 빠르게 일을 바꾸는 것(switch)이다.  p.55
+ 일을 하고, 마무리 짓고, 잠깐 쉬기.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 그것이 성과를 높이는 방법이다. 얼마 전부터 뽀모도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계속 쓰고 싶은 좋은 방법이더라. 하나의 일을 마무리할 때 까지 다른 것은 하지 않는 것.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꺼도 90%는 가능하다. 

- 여가 시간 중 집중하고 정신을 쏟으며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거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은 여가 시간을 미리 계획하여 멋진 일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p.57
+ 반성이 되는 지점이다. 나는 거의 여가를 따로 계획하지 않는다. 나에겐 그저 책보는 것이 여가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럼에도 누군가가 기획한 여가에 참여하면 그렇게 즐겁더라.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가 아직 익숙치 못한 영역이란 뜻이다. 참고로, 작년 말에 연말 파티를 기획하고 진행한 적이 있는데 꽤나 성취감이 컸다. 즐거웠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나에게도 삶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올해는 어렵지만 내년쯤? 가족의 여가를 위한 멋진 계획을 실천해보자. 여행 떠나기!

- 몰입을 완성하는 것은 성찰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이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사고 훈련을 말한다. 몰입과 성찰의 반복은 자신을 발견하는 최적의 과정이다.  p.57
+ 삶을 깊이 사는 법.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중요한 일은 몰입해서 성과를 만들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관리한다. 몰입해서 이룬 성과는 성찰한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집중했다면 그것 또한 성찰한다. 다음에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다시 중요한 일에 몰입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면 어찌 삶을 가볍게 살 수 있을까? 


3. 점진적으로 준비하여 과정을 즐겨라. 
- 출가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충동적 출가, 우발적 출가, 그리고 점진적 출가가 그것이다. (…) 충동적 출가의 본질은 불화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 우발적 출가는 강한 끌림으로 시작된다. (…) 끌림은 들여다볼만한 감정이지만, 결정하기에는 불충분한 요소다. (…) 홧김에 관두지는 말자, 준비 없는 결정은 후회나 힘겨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일시적인 끌림에 흔들리지 말자. 성찰 없이는 자기발견의 여정이 길어진다. 인생이라는 학교는 우리가 충분히 배울 때까지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여행가는 점진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 p.62
+ 나는 충동적 출가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우발적 출가는 종종 한다. 확실히 그 선택은 단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이루지는 않더라. 후회할 일을 많이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나에게 우발적 출가는 분명히 필요한 과정이었다. 왜냐면, 강한 끌림에 내가 손을 뻗지 않았다면 내 삶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거기에.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야 그나마 나는 긴장감을 가지고 삶을 대할 수 있었다. 현명한 사람은 점진적 출가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 지금의 나는 그렇겠지만 20대의 나는 그런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그러한 끌림에 반응해서 조금씩 손을 뻗어준, 그때의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또한 순간적, 우발적 선택에 의한 실패도 경험해 봐야, 아, 이렇게 선택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배우지 않나 싶다.  

- 하루 24시간을 현업, 일상, 미래라는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누어 경영하는 것을 ‘포트폴리오 하루경영’이라 부르자. (…) 포트폴리오 하루 경영의 목표는 위험을 줄이고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24시간을 분산 투자하여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현업에 몰입하기, 일상을 관리하기, 미래를 준비하기)  p.65
+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기. 캬.

-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 그러니 계속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해영 p.66
+ 이런 탁월한 비유가! 우리 아가가 떠오르면서 자연스래 공감하게 되는 비유였다. 아가를 돌보듯 일상을 관리하라. 평온한듯 보이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일상이다. 캬. 

- “당신이 대기업의 CEO라면 현재와 관련된 사업에 본부장을 두고, 미래와 관련된 사업에도 본부장을 두라.” 켄 블랜차드  p.67
+ 나는 이 미래 본부장과 현재 본부장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미래 본부장의 역할은 ‘공부’도 있지만 ‘장기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있을 텐데, 언제나 현재 본부장에게 밀린다. 닥친 일을 해나가는 것도 아직 벅차서 그런가. 현재 본부장이 좀 더 유능해져야 할 듯하고, 미래 본부장은 좀 더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듯 하다. 가장 중요한 건 과거(습관) 본부장이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걔만 다물어도 둘이 생산성을 더 늘릴 수 있다. 총 책임자인 내가 매 순간 깨어있어야 그들이 말을 잘 들을텐데. 

- 현업을 해야 할 시간에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 근무시간을 적당히 보내고 해야 할 일에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모를 수 있지만, 자신은 안다. 의무에 불성실한 태도는 우리 영혼을 잠식시킨다. (…) 자부심이 약해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작고 사소한 일상의 일들에서 자기 영혼을 속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p.69
+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게 나에게 즉각 영향이 온다. 나는 그 경우가 심하다. 지난 2학기가 그랬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분명 일은 잘 진행되었지만 나는 삶의 만족도를 잃어버렸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 2학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 “안내 데스크 직에 종사를 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여섯시에 칼 퇴근하고 쉬는 시간도 있어 글쓰기 좋은 조건이에요. 쉬는 시간에 틈틈이, 퇴근 후에는 근처 카페에 들러 글을 씁니다. 직장에 다니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글쓰기에 도움이 되고요.” 이것이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모습이다.  p.72
+ 짱인데? 탁월하다. 안경수리공 대철학자 스피노자가 생각난다. 

- 포트폴리오 하루경영은 결국 실천의 문제다. <필살기>에서 구본형 선생님 실천을 멋지게 표현했다. “전략은 온갖 치장으로 늘 요란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실천은 늘 간단하고 명료하다. Just do it! 이게 전부다. 그러나 늘 어렵다. 매일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다가 그만두기 때문이다. (..) 실천은 간단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필사적으로 실행하라. 매일의 힘을 빌리지 못하면 누구도 꿈을 이룰 수 없다.” (…) 하루하루가 모일 때 그것은 성과가 되고 의미가 된다. 멀찌감치 떨어진 하루하루라면 에너지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버리지만, 촘촘히 붙은 하루라면 탄력이 붙고 힘이 모아진다. 그래서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하다.  p.73
+ 매일의 힘은 복리와 같다. 복리는 지속성에 그 비밀이 있다. 예전에 봤었는데, 복리로 인해 예상되는 결과에서 한 두번이라도 빠지면 최종 수익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무슨 말이냐면, 매일 매일 하다가 한 두번이라도 안 하면 최종 지점에서 성과는 극명하게 다르다는 뜻이다. 멋진 말이기도, 두려운 말이기도 하다. 

- 대가들은 반드시 자신만의 구별된 시간을 가졌다. 대가들이게도 조용한 시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시간을 가졌기에 대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대가들이 개인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공간을 가졌다.  p.76
+ 요즘 나에게 많이 없어진 것. 개인 공간. 

4. 두려움에 맞서 시행착오를 경영하라. 
- 타석에 서야 홈런을 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석에 서기를 꺼린다. 홈런을 친다는 보장이 있다면 누구나 타석에 쉽게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 타석에 서지 않으면 홈런을 치지 못하긴 하지만, 실패할 일도 없어진다.  p.82
+ 가능성 앞에 서는 것이 생각보다 무섭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나 수업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뭔가 말하기를 주저하진 않지만, 조금의 의구심만 있어도 나는 나를 알리지 않는다. 특히 이런 일을 하려면 다양한 사람들도 찾아가고, 교육 행사도 같이 열고, 적극적으로 포스팅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영 그러지 않는다. 아마 절반은 내가 가진 ‘약간은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일 것이고, 절반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듯. 지난 번 김제동의 강의에서 말한 것을 잊지말자. 나에겐 고백할 권리가 있고, 그녀에겐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고백하라. 고백하면 당신의 고민은 그녀의 것이 되지만, 하지 않으면 당신의 고민은 오롯이 당신의 것이기에. 

- 현명한 자기여행자들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까?”하고 묻지 않는다. (..) 그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배울 수 있을까?”하고 묻는다. 배울 수 있다면 실패도 마다하지 않는다. 140개 이상의 특허를 지닌 찰스 케터링의 말을 기억하자.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시도하고 실패하고 나서 다시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p.84
+ <어떻게 하면 빨리 배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핵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학습했던 방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내 경험상, 빨리 배우는 방법은 무언가 시도하고 망하는 것이다. 작게 망할 수록 더 현명하게 배우고, 크게 망하면 많이 배우긴 하지만 좀 슬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더 현명하게 배우는 법을 체득하고 있단 뜻이니라. 그리고 빨리 배우는 2번째 방법은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 쌓일 때 내면에 가득차는 자신감은 대단하다. 그 자신감이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한다. 작년에는 ‘심톡’을 꾸준히 매월마다 개최하고, 연말에 ‘심파티’를 개최하면서 그 경험을 했고, 올해는 심톡과 와우 프로젝트가 나의 지속성의 실험소가 될 듯 하다. 

-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은 좀 더 활용하기 쉬운 개념으로 시행착오를 “어떠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수정해 나감으로써 점차 최적의 방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쏜다이크는 시행착오의 반복을 연습이라고 하였으며, 시행착오를 학습의 기본과정이라고 말했다.  p.93
+ 시행착오를 공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듯 하다. ‘시행착오 = 실천 + 성찰’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시행착오 + 체득 = 인생의 성공’ 무언가를 실천하고, 그 과정을 성찰함으로써 최적의 방법을 찾고. 그러한 ‘시행착오 프로세스'를 몸으로 체득하게 되면 그게 바로 인생의 성공이 아닐까. 어떤 위기나 고난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사람일테니. 

- 우리가 도전한 모든 일든은 세 개의 바구니에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성공의 바구니다. 어떤 일에 도전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일들을 담는 바구니다.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의 바구니다. 힘차게 도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일들을 담는 바구니다. 좋지 않은 결과라도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결과까지 얻어냈다면 여기에 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실패의 바구니다. 생각은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담긴 바구니다. 여러분은 어떤 바구니가 채워져 있는가?  p.94
+ 생각은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나에게도 많다. 요즘에야 조금 나아지고 있다지만, 그 ‘미룸’의 뿌리는 워낙 깊어서. 올해를 기점으로 좀 더 자주 시도하고, 부딪치는 모습을 갖고 싶다. 그래도 대략 1년 전에 비해  글쓰기가 주저하지 않아진 모습은 내가 스스로 칭찬하는 부분이다. 그냥 주절주절 하는 재미가 들었다고 할까? 독서축제를 하면서도 나름의 주절거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하핫.



5. 완벽을 찾지 말고 현재를 잡아라. 
- 인생은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으로의 여정이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자기실현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우리를 이 모든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더 완벽한 것을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온전해지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보다 온전해지도록 도와주자. p.102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온전함’이다. 20대에 나는 ‘자유’를 골랐었는데 조금 달라졌다. 온전해지는 것, 자기다워 지는 것, 그리고 자기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 것. 그게 가장 신나고 재미있고 나를 자유롭게 한다. 

- 영감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계적인 글쓰기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도 완벽주의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완성한 원고를 반복해서 검토하느라 탈고를 무한정 미뤘던 것이다 (…) 그러다가 2011년 1월, 내게 감당 못할 불행이 닥쳤다.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통째로 유실한 것이다.  p.103
+ 아이고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나도 몇 달 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 노트북을 교채하는 과정에서 모든 데이터를 옮기는데 하나의 폴더만 옮겨지지 않았다. 헌데, 하필이면 그 폴더에 내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결과들, 개인 기록들, 스터디 강의안들이 다 들어있었지 뭐야. 모든 자료가 날라간 것은 아니기에 감할 못할 불행은 아니지만, 꽤나 상심이 컸다. 검색했을 때 나오던 자료들이 이젠 나오지 않을 때 그 상심이란.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하나 배운 것은 있다. 그건 바로, ‘과거에 공부했던 흔적’에 더 이상 기대지 말라는 것. 그건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였다. 나는 예전에 내가 공부했던 모습들에 기대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공부했네’라면서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던 것. 공부는 끝이 없고, 내가 배워야 할 것들도 끝이 없는데 고작 몇년 공부했던 자료에 의지하고 있었다니.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삶이 나에게 앞으로 더 가열차게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이런 일을 벌였구나. 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그렇게라고 생각해야 위로가 되기도 했고. ㅎㅎ 하지만 팀장님 수준의 사건은 단기간 회복이 어려울 듯 하다. 조만간 백업해야 겠다.ㅜㅠ

- 나에게 완벽은, 탁월함을 한껏 추구하다가 하늘의 운이 닿아 만들어지는 경지다. 분명 완벽은 아주 좋은 것이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완벽과 완벽주의의 관계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다. (…) 권위는 남을 따르게 하는 인격적이고 자연스러운 힘이다. 막스 베버는 권력은 강제로 얻을 수 있지만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했다. 권위는 좋은 것이지만, 권위주의자가 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없는 사람이 나이, 신분, 성별 등으로 권위를 억지로 취하려 하는 태도다.  p.105
+  권위를 가지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고, 권위주의를 가지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건, 본질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그걸 가지기 위한 노력은 하기 싫을 때 ‘~척’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권위를 가지기 위해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그런 신뢰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연스래 권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달콤한 결과만을 원한다.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는 그것! 그래서 다른 이상한 것들을 들고 나온다. 나이, 신분, 성별, 회사, 돈 등. 그렇게 ‘-척’하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시간이 지나서 부작용을 낳으면서 몰락한다. 

- 완벽주의가 근면, 높은 기준, 시간 엄수, 청결, 단정함, 도덕성에 도움을 주는가 하면 우유부단함, 미루기, 강박 행동,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에 빠진 이들은 자신과 동일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p.107
+ 아까 말했던 부작용들이다. 나도 가지고 있는 것들, 특히 미루기나 우유부단함은 참 만성적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결과를 내는 편도 아닌데 쓸데 없이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 완벽주의에 관한 선도적인 두 학자, 고든 플렛과 폴 휴잇은 “해로운 완벽주의 - 적당주의 - 건강한 완벽주의”라는 3가지의 스펙트럼으로 완벽주의의 성숙도를 설명했다.  p.110
+ 완벽주의도 결국 정반합이구나. 중용이란 개념은 언제나 옳다. 

- 완벽주의가 발동하여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셀프 스타터의 전원을 키면 된다. 그것은 다음의 한 문장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지금 곧 시작하라!”  p.115
+ 책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에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문장이다."작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는 별개이다. 몽상가는 꿈을 꾸고 작가는 글을 쓴다. 글쓰기를 꿈꾸는 것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쓰기를 생각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멋진 스토리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흥분하거나, 머릿속으로 책을 몇 권씩 구상하거나, 글쓰기에 대한 무수한 책을 읽는 것, 그 어떤 것도 글쓰기 행위가 아니다.” 요즘 내가 하는 실험은 일기다. 다만 몇 문장으로 구성된 글이지만 매일 쓰는 힘을 경험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끄적끄적 거린다. ㅎㅎ 

- 2002년 2월, 나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책 집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대하는 저자로서의 모든 자격을 갖춘 후에 글을 쓰려면 나는 평생 책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썼던 원고들은 출간할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수년 후 내가 다니던 회사의 웹진의 초고가 되어 주었다.  p.115
+ 이제 나도 책을 쓰기 시작할까? 구상하고 있는 내용은 있는데 말이다. 허긴, 생각으로 책을 썼다면 벌써 전집은 만들었겠지. 책을 써볼까? 라는 질문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지금 책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이다. 지금 책을 쓸 것인가? 네. 아마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결과물도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책을 쓰지 않으면 책은 써지지 않는다. 완벽주의의 덫을 뿌리치고, 지금 책을 쓴다. 깔끔한 질문이다. "지금 쓸 것이냐?" 

에필로그
- 아리스토텔리스에 따르면 최고의 용기는 “희망과는 무관”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헤라클레스보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물러서지 않는 헥토르의 모습이 진정한 용기에 가깝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넵! 



목표설정와 자기다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가 바로 '목표설정'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변화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보는 매체가 '책-자기계발 서적'이고, 그 수 많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변화하고 싶으면 우선 목표를 설정하라'이기 때문이다.

드림 리스트, 비전 보드, SMART목표 달성법, Works,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등 너무나 많은 책이 이 이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 목표를 성취했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목표를 정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 쌓여서 실제로 아무리 좋은 책을 봐도 작심삼일에 그치는 경우를 나를 포함해서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싶은가?'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위의 두 질문의 차이점을 구분하겠는가? 위의 질문을 다시 고쳐서 쓸 수 있다면, 이런 식의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더욱 충만함을 느낄까?'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더욱 인정받고 사랑받을 것인가?'

여기서 슬슬 드러나있지 않던 상관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방정식의 출현이다.
'나는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기분이 충만하다' 이 생각을 신뢰하는 사람은 최초에 제시했던 2가지 질문을 구분하지 못한다. 타인의 사랑과 인정으로부터 나의 존재가치를 찾는 사람은, 나의 내면에 질문을 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왜냐면, 그 순간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질문을 해보자.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싶은가?'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전자의 질문은 당신의 가슴으로, 내면으로 향하고 있고, 후자의 질문은 당신의 머리로, 외부로 향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표설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나를 아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 내가 무엇을 하면 남보다 좀 더 잘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면 돈을 안 벌어도 행복한지, 내가 무엇을 할 때 자기다운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때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인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헌데 이것이 쉽지 많은 않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나의 자유가 완벽하게 제한'되는 상황에 왔을 때, 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정말 나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그러면서 그 상황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를 찾고자 했고,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했을 때,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그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구나 하는 통찰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절박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배 부른'상태에서는 나의 진실된 내면을 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삶의 결정이 외부의 영향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렇게 외부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안전함을 쫓아왔던 나의 삶을 자각했을 때야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해야겠다는 깊은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 '무한한 자유'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면 그와 함께 수반되는 '엄청난 책임감'이 나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자유는 사실 '방종'이라는 말에 가깝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다 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은 방종이다. 하지만 진짜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면서 그것에 대한 100% 온전한 책임기꺼이 지려는 태도 그 자체이다.

'자기다움'을 알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깊이 인식할 때, 내 삶의 기준이 세워진다.
내 삶의 기준을 아는 사람만이 방종이 아닌 자유를 맛보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스스로 느끼기에 아직 그러한 말을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지르고 보는거다!
온전하게 ^^


오리진이되라운명을바꾸는창조의기술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영전략 > 경영전략일반
지은이 강신장 (쌤앤파커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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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길에 들고 나가서, 들어오는 길에 다 본 책, '오리진이 되라'
그 말은, 제가 무슨 속독법을 쓴 것도 아니고, 업무 시간에 책을 본 것도 아니니,
그 만큼 읽기가 쉽고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단 뜻입니다. ^^

헌데, 이 '오리진'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말도 아니고, 원래 부터 있던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각자의 창조성' '자기다움' '나다움'이란 말도 많이 쓰는데, 이 '오리진'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서, 이렇게 책으로 '포지셔닝' 했다는 사실이 저는 너무 놀라웠어요.ㅎㅎ
항상 좋은 아이디어는 그것이 우리 앞을 지나나고 나서 "아! 나는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네요.

'오리진'의 주제는 첫 표지에 있습니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라"
세상이 너무 빨라져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벤치마킹의 시대가 아니라 퓨처마킹의 시대인 것이죠. 지금 최고의 것을 제 아무리 완벽하게 베껴봤자, 그것은 이미 뒤쳐진 것이 되버리고 마는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읽는 능력이 필요하겠죠?
그렇다면 그 미래,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 자 그 세상을 한번 들여다 볼까요!

High Love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수 있다. 즉, 새로운 영감을 얻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원천이 바로 그것이다.  Love와 High Love의 차이점은 '애절함'의 차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들 내면에 있는 고민은 무엇일까?


High Pain & Joy
'아픔'은 섬세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아픔을 피하기 위해 급급하지만, '선수'들은 아픔을 찾기위해 노력한다. 진심으로, 고통을 이해하고 파고 들어가, 속 시원하고 즐거운 해결을 하는 것이다.

High Time& Place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라.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새로운 공간은? 내가 선사하고픈 시간은?"
모든 것이 너무나 고도화 된 결과, 지금까지의 성공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최고를 베끼던 '따라하기' 방식을 버리고 '오리진'이 되어 미래에도 통할 '놀라움'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조금 아름다우면 3-4년 가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우면 100년은 간다)

High Mix
오토코마에 두부 '결국 두부에도 남다른 세계관을 넣어야 한다'
"진정한 오토코마에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융합의 재료는 어떤 것이 있는가?"
High Concept
어떻해야 사람들이 열광할까? 컨셉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아사히야마 동물원처럼, 동물이 아닌 동물의 능력을 보여주고, 전시하는 것!
컨셉은 '화두'이며, 좋은 화두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다른 이들이 팔지 않는) 어떤 고객가치를 파는 장수인가?"
High Touch
"하이터치는 공감을 끌어내는 능력이다, 예상치 않은 것을 찾아내어, 특별한 방식으로, 내가 먼저 주는 것!"

High Soul
소울의 높이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것은 우리의 관점을 껍데기가 아닌 근원과 본질로 이끌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나는 하이소울의 소유자다. 그들의 생각, 신념의 높이가 높다.
"미칠 정도로 멋진 제품을 창조하라. 아니면 우주를 감동시켜라" - 스티브 잡스
High Study
선생님 (Fact)이 아니라 뱀장수 (Study)처럼 말하라.
내가 이 세상에 선사하고 싶은 것은? 그 간절한 이유가 있다면?


High Slow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아줄 단어는 슬로우다.
우리도 각자의 혼탁해진 영혼과 사회 시스템의 문제들을 치료 할 라마단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느림을 통해 만나는 성찰 속에는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있고, 진정한 '오리진'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
High Action
"우리는 모두 빛나도록 창조되었다" - 리차드 브랜슨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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