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 범인은 누구인가? 
'서울 성동경찰서는 6일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해)로 최모(35)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4월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언제까지 직업 없이 집에 있을 거냐,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는 어머니 황모(53)씨 말에 격분해 발로 마구 차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최씨는 평소 취업 문제 등으로 어머니와 자주 다퉜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어머니가 쓰러지자 119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으며, 황씨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최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취업과 관련해 스트레스를 주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어머니를 숨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어느 날 보았던 뉴스 기사입니다. 존속살인라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죠. 저 역시 크게 놀랐는데요. 범인은 누가봐도 최모씨입니다. 정황도, 증거도, 범인의 자백까지. 모든 상황이 명백하죠. 하지만 한번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요?"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폭력은 크게 2가지로 표현됩니다.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이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뉩니다.) 무엇보다 폭력이란 말로 인해 우리가 떠올리는 상투적 관념에서 한 걸을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번 천천히 볼까요. 첫 번째, 주관적 폭력입니다.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며, 누구나 손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특히 어릴 적에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한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러한 물리적 폭력이 결코 용인 되어선 안 됩니다만, 그 때문에 사건의 심층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장교는 <게르니카>를 보고, 그림에 드러난 모더니즘적 ‘카오스’에 충격을 받아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요?” 피카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폭력이란 무엇인가, P.37-38)

2. 구조적 폭력이라는 ‘기만' 
두 번째는 객관적 폭력입니다. 특히 이번에 저는 언어 폭력으로 대변되는 상징적 폭력 보다도, 구조적 폭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간략히 상징적 폭력은 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따돌림, 인터넷을 통한 악성 댓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들어가면 개념이 다소 복잡해서 제외합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인데요. 여기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거나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린 쉽게 그것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에 굉장히 비판적이고,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유명한데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라고요.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52) 그는 이처럼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완화책을 마치 해결책처럼 제시하는 것을 ‘기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이를 대의를 위해 내놓은 카네기 같은 사람을 대표적인 ‘기만적 사례'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겐 어떻게 보이나요?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이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구조적 폭력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 기업과 국가들. 겉으론 약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은 행동들 말이죠.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 외에도 지젝은 다양한 ‘폭력’에 대한 사유를 끌어냅니다. 문화적 폭력부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신적 폭력까지. 이 책을 보고 나면 무엇보다, 폭력을 보는 관점이 조금은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IS'의 테러와 폭력이 단순히 광인의 미친 짓, 세계에서 없어져야 할 암적 존재들로 끝났다면.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과 구조는 뭘까?'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용답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에 모든 ‘초점’을 빼앗기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말로 IS가 한창 말썽일 때 그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공부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맥락을 이해합니다. (물론 이해는 하되, 용납을 하진 않습니다.) 그들과 서구 세력간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어서 왜 이렇게 꼬였는지 말이죠. 사실,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군 전쟁, 2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석유임을 간략히 밝힙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나중에 따로 대화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엄마를 살해한 아들. 이 비극적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는 주관적 폭력을 행사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한 그의 어머니도 ‘상징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다들 공감 하시리라 믿지만, 언어를 통한 폭력은 결코 신체를 통한 그것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가해자 이지만, 어쩌면 무언가의 희생자인지도 모릅니다. ‘취업’이라는 구조적 난제, 그리고 사회적 폭력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국가는, 기업은, 그리고 우리들은 이 거대한 책임에서 과연 면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짜 범인은 청년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현대 사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오늘은 10월 29일입니다. "박근혜 하야하라"는 수 많은 시민들에 의해 외쳐졌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 앞에서 우린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소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폭력일까요? 일부 과격해진 시민이 폭력을 저지른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자들이 웃으며 그런 것일까요?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2005년 파리 교외에서 일어났던 약탈과 같은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기만 하면 여전히 급진적 사회 변혁을 믿고 있는 소수의 좌파들에게 묻는다. “이런 짓을 한 건 당신을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게 이거요?” 그러면 우리는 피카소처럼 대답해 줘야 한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이건 당신네들 정치가 가져온 결과잖소!” 

우리나라에선 19세가 넘으면 성인으로 대우 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상,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과 구조적 폭력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젝은 “저항하라!" 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번 사건을 유심히 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웃으며, 손 한번 쓰지 않고 폭력을 저지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는 지는 모른채 말이죠. 그리므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4. 상실의 시대를 견디는 법 
아직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남았습니다. 앞서 ‘저항하라’고 했지만, 지젝은 아이러니 하게도, "행동하라!, 혹은 참여하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이외인데요. 지젝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서둘러 행동하지 말고, 더 공부하고 공부해서 진짜 혁명을 이루라고 말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면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 변화’를 일구어 내라고 촉구합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요. 

이는 저에게 마치 조광조가 아닌 퇴계 이황과 안창호가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 어떠한 변화도 급작스럽게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는 결국 급진적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궁극적 변화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3일 천하'란 말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1979년에, 그리고 1987년에 경험했던 일이죠. 하지만 이황과 안창호는 달랐습니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올곧은 학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서원창설운동’을 벌립니다. 그로 인해 사사한 인재만 300여명에 이릅니다.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도 ‘흥사단’을 조직하며 후임들을 양성해 나갑니다. ‘테러’와 같은 급작스런 방식과 다소 대조적이지만 더 근본적입니다. 

"그대는 바둑 두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판 전체를 망치지 않던가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묘년에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한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대단한 명성을 얻고 나서는 대번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노라고 자부했지요. 임금님도 그가 명성이 높은 것을 좋게 생각하시어, 그를 두텁게 신임하셨고요. 그러니 이것이 바둑으로 치면 수를 잘못 두어 일을 망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황의 '도산에 사는 즐거움’ 중에서) 
 
지젝의 조언은 저에게 ‘균형을 갖추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지나치게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차갑게 외면하지도 않는 것. 그 균형 속에서 ‘대안’을 찾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열심히 공부하던 이는 이제 행동해야 하며, 뜨겁게 행동하던 이는 공부해야 합니다. 뜨거워지고 다시 차가워지면서 우리 모두 단단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회'는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허망하고 비참한 그런 상실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지만,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들풀은, 쓰러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1. 우린 언제 생각을 시작하는가?
정답 : 고통을 겪을 때

내가 믿고 따르는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때 우린 상처를 받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문제를 설정하고,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의 수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직접적으로 느끼는 나의 고통과 함께 (지금 당장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고통!) 진리 찾기는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사유를 산출해야 한다. 오로지 크나큰 고통, 우리를 장작으로 태우는 것 같은 길고도 느린 고통만이, 우리 철학자들을 궁극적인 심연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 니체

‘한번, 책을 읽어볼까?’라는 인위적인 결심 속에서 진짜 진리에 대한 사유는 시작되기 어렵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실제적 문제 속에서 ‘자기 주제’를 갖고 탐구하고 책을 볼 때, 진짜 공부는 시작된다. 

2. 위기의 시대에 생각은 시작되었다. 
인류는 어떻게 지식을 축적시켜 왔을까? 그건 바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절실함 때문에 사유를 진행시켰을까? 당시 유럽사회는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순간, 사유는 시작한다. 

후설도 마찬가지다. 상대주의에 빠진 유럽 학문의 풍토. 이러한 시대에 ‘보편적인 믿음과 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후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하이데거 또한 ‘허무주의’라는 위기 앞에서 사유했다. 

3. 치료로서 인문학. 
이처럼 인문학의 사유는 애초에 ‘상처’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치료’는 인문학의 인위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문학의 ‘돌아보는 것’은 곧 ‘비판'을 말하고 비판(Critique)의 어원은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의미한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 사태를 직면하고, 치료하는 것. 그것이 비판으로서의 ‘인문학’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이 상처를 만든 잘못된 사태를 고쳐나가려는 실천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치유이자,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만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이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위기의 심연에서 우리는 우리를 치료할 수 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삶의 뼈아픈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고통 속 문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치료의 끝은 무엇일까? 그것은 완쾌가 아니다. 치료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이 이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지, 그 판단 좌표를 제공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힘을 가진다. 그것이 생각의 힘, 인문학의 힘이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한번 만나는 것으로 왠지 아쉽다. 시간을 두고, 또 만나고 싶어진다. 책도 마찬가지다. 한번 읽고 나서, 뭔가 아쉬운 그런 책들이 있다. 나에겐 희망의 인문학이 그런 책이다. 나에게 '성찰과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소중한 책이다. 오늘 아침, 작년 1월에 읽었던 '희망의 인문학'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잠시 옮겨보았다.


"오늘날의 24번 구역과 내 아버지가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의 24번 구역 사이에 드러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빈곤으로 고통받느냐 하는 것이다. 대공황 시기 24번 구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빈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빈곤하다고 생각할 때, 슬픔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

이제 24번 구역의 어느 누구도 절대비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어디를 보고 있든, 어떻게 생각하든, 누구를 위해 기도하든 상관없이 쉼터의 거주자들이 바라보는 건 타인의 두툼한 지갑에서 넘쳐나는 부일 뿐이다. … 이제 24번 구역에서는 어떠한 정치활동도 일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경제가 지배 규칙이 된 것이다.

세계는 경주 만큼이나 상대적이며, 상대적인 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 이것은 인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존중에 대한 모욕이다. 게임의 끄트머리에서 중산층이 승자와 맺는 동맹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 이들을 빈민으로 규정해버리면, 24번 구역에 시기심이 등장한다. 그 시기심에서 소외, 증오, 그리고 분노가 피어오른다." p. 57-58


결론은 이것이다. 불평등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존재할 때 발생하며, 그 속에서 폭력의 씨앗(소외, 증오, 분노)은 무럭무럭 탄생한다. 우리가 사회의 암덩어리라 생각하는 IS나 일베도 그러한 현상의 일부일 따름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키케로는 주장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며, 사적 삶이 아니라 공적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의 일치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적절하게 중용을 지킬 수 있으며, 정치를 통해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P.71


내가 내리는 이 책의 짦은 결론은 이렇다.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함께 대화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라' 인문학이라는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의 형태가 처음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적 세계’에서 인문학을 따로 떼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인문학과 도시국가는 자신의 존립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다.(p.27)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고대 폴리스에선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현자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폴리스에스 진정한 삶이란 정치적인 삶이었으며, 다른 것은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었다. 개인적 삶에 매몰된 사람들은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시민의 대상에서 배재됐다. 폴리스의 경이로움은 대화 속에, 그리고 언제나 공적인 삶, 행동하는 삶 속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함께 대화하고, 행동해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자연스럽게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문득 그립다.


칭화대 10년간 최고의 교양 강의라고 불리는 <수신의 길>의 팡차오후이 교수. 예전에 보고 싶어서 체크해 둔 영상인데, 시간이 없어서 못 보고 있다가 지지난 주에 보고, 간단히 정리했다. (당시에 에버노트에 옮겨 놓았는데, 다시 블로그에 옮기기 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구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보시길.

0. 도입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수신>의 문제다. 에니메이션 <닐스의 모험>에 나오는 여우 렉스를 보자. 렉스는 아주 계획적이고 바쁘다. 하지만 반면, 심리적 소양은 나쁘다. 그는 좌절을 겪었을 때 냉정하지 못하다. 결국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리고 바쁘게 쫓아다니기만 하다가, 자신의 꾀에 자신이 당한다. 

결국, 수신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내면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을 겪을 때 마음의 냉정함과 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팡차오후이 교수


1. 수정
수정이란, 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제갈량의 침착한 거문고 소리를 듣고, 15만의 사마의는 도망간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세상에 나오기 전, 매일 정좌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법을 수련했다. 세상 모든 대결은 사실 ‘마음’과 ‘마음’의 대결인 것이다. 우린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좌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정좌를 해보라. 놀라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 특히 송나라의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좌선을 한다.”  



2. 존양
존양이란, 마음을 살펴 하늘의 뜻을 찾는 힘이다. 우린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중국의 왕균요라는 CEO는 암 수술 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계속 일만 했고, 결국 38세에 죽었다. 사람을 때론 자기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이나 쾌락을 지나치게 중시할 때 우린 이성을 잃게 된다. 사실 일도 취미도 모두 삶을 위한 것임에도, 어느새 일과 취미를 위해 사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존양의 문제다. 존양이란, '삶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 속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떻게 존양을 기를 수 있을까? 짜증나는 일을 겪을 때 자신을 일깨우라.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찾으라. 마지막으로 눈앞의 이해득실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3. 자성
자성이란, 패러다임을 깨고 한계를 허무는 힘이다. 엄청나게 큰 코끼리는 가느다란 쇠사슬로 말뚝에 묶여있다. 그 이유는 어릴 적 기억 때문인데, 그 기억은 ‘아무리 힘을 써도 쇠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습관은 무섭다. 나쁜 습관이 생기면 옆의 충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심각해진다. 그러한 자아반성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자부심’이다. 결국 자기극복이란 나쁜 습관을 거치고 생활이 마음 속 깊이 만들어 놓은 한계를 허무는 것이다. 


4. 결론

결과적으로 수신이란, 공예가가 섬세하게 옥을 다듬듯 자신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가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를 지켜내는 법’이다.  





핵심
-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저자조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그녀는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나서 정체성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자원 봉사 활동을 통해 그녀는 인생을 바칠 소명을 발견한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뜬 것이다. 정신 의학을 공부한 그녀는 이후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는데,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킨다. ‘죽음’ 분야의 전문가가 된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인생 수업>을 마지막으로 2004년 8월 24일 눈을 감았다.

데이비드 케슬러
-  그는 미국 홋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엘리자베스와 생애 마지막을 함께 보내며 책을 집필했다. 현재는 가정 및 병동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옮겨적기
0. 서문_인생 수업에는 행복하라는 숙제뿐.
-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예외없이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수업이 하루 24시간인 학교에. 살아 있는 한 그 수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수업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 우리가 배워야 할 과목들은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들임, 용서, 행복 등이다. 나아가 이 수업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것이 이 수업이 완성이다. (..)  P.9-10

우리가 배워야할 과목은 사랑과 행복, 혹은 평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삶에서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한다. 나 역시 20대 중반에 삶의 절반만을 취하려고 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으로 자유로워 지고 평화로워지고자 했지, 그것을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다. 이 수업의 완성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두려움, 상실, 용서, 받아들임 이러한 키워드를 충분히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을 타인과 나누면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치유하고자 애쓰는 것. 그것이 삶이란 수업이 주려는 교훈이 아닐까. 삶의 모든 영역을 경험하는 것 말이다. 

- 이 기간 동안엔 행복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마지막으로 멀리 떠나 본 적은 언제였는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껴안아 본 적이 언제였는가?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P.14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일까? 나는 여행도 좋아하고, 독서도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서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시간은 바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 ‘사람들을 초대해서’ + ‘함께 대화하고 나누는 것’이다. 최근,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워크샵을 만들었는데, 그걸 만드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자선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어떤 활동이 나에겐 재미있다. 현재로썬 이러한 활동을 멈추지 않으면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1.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여성 역시 한 가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배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배움입니다. (…) 배움을 얻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P.19

최근에 사마천에 대한 글을 보다가,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란 문장을 봤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죽음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그에게 삶 역시 중요하다.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삶도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죽음과 삶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삶을 잘 인식하지 못할까? 그건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그렇기에 삶을 잘 살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죽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매일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은 평생에 한번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보다 삶을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반댓말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동의어다. 

- 우리는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죽음이라는 종착점에서 바라본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발견해 나갈 것입니다. (..) 또한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P.20

나에겐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모든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참 근거없는 신념이다. 얼마 전에 아기가 태어났고, 앞으로 나갈 돈은 많지만 나의 수입은 그렇지 않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도 아직 안정적이지 않고, 두려움도 많다. 다시 말해, 지금 시점에서 앞으로의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나에게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면 꽤 놀랍다. 어려움이 처하거나, 큰 힘이 들 때 삶은 나를 도와주었고, 그랬기에 지금의 나도 있다. ‘아, 나에게 이미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선 아마 앞으로 꽤 많은 경험과 배움이 쌓여야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실험 중일 뿐이다. 나는 연구원일 따름이고. 

- 평생에 걸쳐 진정한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요령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것을 ‘냄새 맡는다’고까지 표현합니다. (…)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진정성의 냄새를 맡는 예민한 후각을 갖게 됩니다. P.25 
+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진짜 좋은 책을 읽다보면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힘이 생기는 것. 게다가 스스로 글을 쓰다보면 더욱 잘 느끼지 않을까. 존재는 존재에 반응할 것이기에.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누구와 관계할 것인가?' 라는 질문보다 먼저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해야 그러한 사람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간디에서 히틀러까지, 모든 인물이 될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히틀러가 될 수 있는 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 자신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P.26

과거에 ‘그림자 그리고’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이런 말이 나왔다. "당신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빌 스피노자. 크게 공감하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운 면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리석어 지는 것’을 인정하기 싫다. 계속 똑똑해 보이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누군가 어떤 의견을 내도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려고 한다. 그에게 보지 못한 관점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실은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고집도 쎄다. 누군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은 내가 그보다 ‘어리석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겉으론 동의하는 척 하지만 실은 잘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똑똑해지고 싶다’는 페르소나를 갖고 있으면서 정말 어리석게 살아왔다. 실은 어리석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진짜 지혜로움은 그런 것이 아닐테니 말이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조금은 알아채고 있어서 다행이다. 잊지 말자. 나는 ‘똑똑함의 존재’가 아니다. 나는 ‘똑똑함과 어리석음의 가능성’이다. 어리석은 놈아. 

- 가끔씩은 억누르고 있던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무엇을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누구인지, 적어도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2009년에 위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의 대답은 ‘위대한 코치’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맥락상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코치’ + ‘학습 경험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역할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만약, 하나 더 추가한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요즘 떠오르는 것은 ‘인류학’이라는 주제이다. ‘인류학자’가 되어서 인디언을 비롯한 내가 관심 있는 인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코치 + 학습 경험 디자이너 + 인류학자. 이 세 가지 직업을 합치면 어떤 것이 나올까? 나도 무지 궁금하다. 

2.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말라.
- 사랑, 정의 내리기조차 매우 힘든 이것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 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습니다. P.38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인가?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아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무엇인가? 사랑이란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사랑과 두려움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니 실은 대부분 두려움으로 움직이고 있다. 두려움은 무엇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바로 권력과 돈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있게 하였고, 이미 권력도 돈과 동일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미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더욱 두려움으로 가득찬 곳으로 만들려고 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조종한다. 굳이 <1984> 처럼 빅브라더가 통제하지 않아도, <멋진 신세계>처럼 스스로 통제를 잃어버리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권력과 돈의 매트릭스를 깨기 위해선 무엇이 요구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행위와 상관없는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낳고, 발견하는 것. 그것만이 이 세상의 신화를 부수고,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네오와 트리니티의 사랑이 이미 그랬듯 말이다. 

- 사랑하는 사람과 다툴 때면 당신은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사랑을 거두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입니다. (…) 그가 또는 그녀가 당신의 마음에 들면 어떻고, 또 안 들면 어떻습니까? 어머니, 친구, 형제들이 변하지 않는 다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건가요?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변화를 보게 될 것이고, 갇혀 있던 우주의 모든 힘이 해방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P.42-43

참 맞는 말이면서, 참 어려운 말이다. 상대의 있는 그대로, 있지 않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결혼을 하고, 살면서 수 없이 이러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다툴 때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조건과 옳음’이 있는지 보게 된다.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그런걸 주장하면 할 수록 아내와 멀어졌고, 그런 ‘나만의 옳음’을 내려놓고 상대를 인정하려 할 수록 아내와 가까워 졌다. 답은 간단하고 쉽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쉽게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언제나 진짜 문제는 ‘답을 아는 것’과는 상관없기에. ‘답을 실천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부디 지혜와 용기가 나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랄뿐. 

- 당신은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사랑할 때는 스스로를 미소 짓게 만드는 일들로 삶을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배운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 뿐입니다. P.49 

이 글을 읽으며, 내가 하는 한 가지 반성은 바로. ‘식사’다. 나는 나를 위해 식사를 하는 것에 인색하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포함이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대충 먹는다. 혼자 있을 때는 편의점에서 하는 식사가 대부분일 정도로. 물론, 약속이 많고 집에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기에 ‘이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좀 더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단 의지가 생긴다. 나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싶다. 미안하네 그려. 

- 삶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냥 옆에 있어 줄 수는 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두고 본다면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P.54
-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56

내 아내가 출산을 할 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께 옆에서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어떨 때는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침묵은 수 많은 말을 내포하고 있듯, 존재와 존재는 서로 말할 수 없는 것을 주고 받기에. 

3.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 생을 다 살고 나서 지난 일들을 되돌아볼 때, 내가 그 순간들에 한쪽 다리만 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을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느끼길 바라요. 

나는 내 생애 모든 순간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나? 온전히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한쪽 다리만 걸치고 ‘다 던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예 들어가지도 않고 있는가? 죽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어떤 결정이 결정적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싶은가? 모든 순간들에 어떻게 대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 전 생애 동안 우리는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배우자나 연인, 친구처럼 우리가 선택해서 맺은 관계도 있고, 부모 형제처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관계도 있습니다. 그 관계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기회를 갖습니다. P.63

이 글에선 친구나 배우자 우리가 선택해서 맺은 관계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예를 들어, 내가 대학을 들어가서 친해진 친구들은 오티 때 단지 ‘같은 방’에 있었을 뿐이다. 2001년 2월 어느 날 우린 우연히 같은 방에 있었을 뿐, 그 친구들을 내가 고르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것을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베프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다. 어쩌면 관계야 말로 우리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그들을 만나고 난 이후 관계의 질은 나에게 달려있지만, 만나기 까지의 과정은 전혀 예측불가이므로. 그러한 예측 불가능성과 개선 가능성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에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고, 가장 복잡한 것이 관계가 아닐까. 

- 사랑할 누군가를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당신의 배가 물에 뜨지 못한다면 아무도 당신과 함께 물을 건너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을 찾고 있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스승이 나타난다는 것을. 당신이 관계를 맺을 시기가 되면 ‘특별한 누군가’가 나타날 것입니다. P.70

이 글의 핵심은 ‘스스로 준비하라, 그러면 나타날 것이니’이다. 앞선 글에서 관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 글에선 관계의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믿는다. 내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만날 필요가 있었기에 만난 것이라고. 그렇다면 모든 관계가 다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50%는 나의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관계, 50%는 만나야 했기에 만난 관계라고. 바뀔 수 있는 관계는 ‘현재의 나’에 달려 있다. 내가 얼마나 인생을 잘 살고 있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린 것이다. 그게 맞춰서 스승이나 도반이 나타날 수도, 경쟁자나 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과거의 나’에 달려 있다. 과거 내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았고, 서로 풀어야 할 것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따라서 달려있다고 믿는다. 뭐 정답이 있는지 없는진 모르지만, 나에게 이런 사고 방식은 ‘받아들임과 바꾸는 용기’ 둘 다를 연습하게 하는 유용한 도구다. 

-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에서 어떤 부분이 달라진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 하지만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꿀 수 없으며,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진정한 그들로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P.73

이 부분이 참 어려운데.. 나는 내 생각을 일단 말하고 싶다. 정말 그게 진실일까? 우린 상대를 바꿀 수 없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상대방을 ‘더 좋게’ 만들겠다란 생각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다. 무엇이 더 나은 것이고, 좋은 것일까? 그런 건 없다. 계몽주의자가 저지르는 주요 실수가 바로 ‘절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므로. 나도 안다. 각자의 삶은 모두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하지만 한 가지 더 말하고 싶다. 삶에서 방향성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 방향성이 아예 없다면 우린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방향성이 있다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방향성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일까? 물론 우선 인정은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머무르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요청’이다. 진정한 그들로 살 수 있도록 한번 더 용기를 부추기는 것. 그들의 현재에 대해서 말 거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게 말 거는 것. 그들은 분명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것.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 더 과감하게 ‘변화와 행동’을 요청하는 것. 시작은 분명 나부터 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로 살기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그냥 내 생각을 나눠본다. 사랑 그리고 요청이란,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이기에.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P.82

우리가 가진 ‘소유물’은 다 사라진다. 내가 가진 집, 책, 자료, 지식도 모두 '나의 것’에 불과하다. 내가 죽으면 사라지는 것들. 하지만 나의 ‘본질’은 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본질일까? 대표적으론 ‘경험’이다. 누구도 나에게 ‘경험’은 가져갈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경험을 공유한 타인 안에는 분명 내가 있다. 경험적 차원에서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더 많은, 더 깊은 경험을 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다. 

-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우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P.85

누군가 그랬다. 성공하면 한 가지를 배우고, 실패하면 모든 것을 배운다고. 

-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한 번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냈다고 해서, 아예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상실로 인해 고통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국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P.89 

요즘,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인지 아이와 관련된 문구라 인상 깊었다. 우리 아이도 한 달 먼저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부모를 만났다. 아이가 너무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나는 비록 1주일 떨어져 있었지만, 그 잠깐의 경험으로도 얼마나 그 부모들의 마음이 아릴지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그들은 돌아가고 싶을까? 예상컨데, 아마 그들은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그 격렬한 사랑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삶에서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의 경험이며, 그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들어 준다. 더 열렬하게 사랑하자. 아내와 아이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 상실의 감정이 복잡하든 단순하든, 우리는 자신만의 시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치유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금쯤 상처가 치유되었어야만 해” 라거나 “치유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슬픔의 방식은 개인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한 지점에 묶여 있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한 우리는 치유될 것입니다. P.99

어느 누구도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충분히 어리석고, 충분히 지혜롭다. 각자의 상실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함께 있어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나의 조언을 받아들일 시점이 되었을 때 진심으로 몇 마디 던져주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가 아닐까.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 우리의 진정한 힘은 사회적 지위나 넉넉한 은행 잔고, 번듯한 직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강인한, 그리고 고귀한 내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당신의 사유지를 가로질러 지나다닌다면,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그 땅이 당신의 것임을 알리는 푯말을 세워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뇨’ 또는 ‘그건 나한테 상처를 주는 말이야’ 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다. P.108

강인한 내면에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 그리고 강인한 내면은 내가 경계선을 그을 때 지켜질 수 있다. 이 힘을 되찾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지난 번에 본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에서 언급된 ‘의식’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주기적으로 나의 의식을 반복하고, 우선 순위를 정리하면서 나의 내면을 지켜야 할 것이다. 

- 더 많은 돈을 소유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외부 환경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것은 진정한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영향력일 뿐입니다. P.111

이는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다뤄보아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기보다 열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백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하고, 천배 부자면 그를 위해 일을 하고, 만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이 말은 지금 현대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돈은 곧 권력이자 종교가 되었다. 우린 정말 이 ‘돈과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존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렇기에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돈과 권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현실을 부정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내가 정치나 사회적 경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 쨌든, 이 책을 조금 비판한다면 그 영역(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언급이 없이 개인 마인드의 중요성만 언급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 삶이 충분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 진정한 힘은 자신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더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완전히 잊은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모든 사람이 정해진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진정한 힘이 생겨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P.117

삶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강하다. 예전, <나는 꼼수다>의 유행어가 있다. 쫄지마 씨바.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가장 강한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미 충분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쫄 필요가 없다. 당시 김어준, 정봉주, 주진우는 최고의 권력과 상대했었고, 단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었다. 그 사람들이 힘을 가졌던 이유도 단순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에. 이는 맑스가 주장한 공산당 선언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힘을 갖고, 그 힘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의 뿌리와 현재 위치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부단한 자기인식과 죽음을 통한 삶에의 자각, 그것이 우리가 가진 본래의 힘을 회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6.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 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라고 말했습니다. P.136

오, 내가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여기에 나오다니, 놀랐다. 나는 그 문장의 출처도 잘 몰랐고,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까지였으나,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 문제의 본질은 그 복도를 버텨낼 수 있느냐이다. 불확실함과 불안 속에서 신념을 갖고 버텨내는 사람은 결국 새로운 문과 마주하지만,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좌절하고 만다. 나 역시 어느 정도 경험했다. 전공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걸어가는 지금이 아마 복도 중간이 아닐까. 그렇게 큰 복도 안에서도 수 많은 작은 복도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어떤 문은 내 예상과 달리 빨리 닫히기도 하고, 어떤 문은 기대도 하지 않았음에도 열려서 나를 반기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에서 내가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은 바로 ‘복도의 끝에는 반드시 문이 있다’는 진실. 바로 그것이다. 

- 그는 현재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완벽한 모델입니다. (..)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아무도 “잘 지내요?”나 “별 일 없어?”와 같은 그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싶게끔 만들며, 그의 질문에는 진심을 담아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P.142

그렇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아니다. 누가 그 질문을 하느냐가 핵심이다. 나도 잭처럼 울림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만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꿈을 추구한다면, 당신의 삶을 틀림없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얻는 배움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P.158

대담한 행동은 두려움이 사라질 때 가능하다. 두려움은 어떻게 사라질까? 두려움과 자주 마주하고,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가장 두려워할까? 그건 바로 ‘자신의 그림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죽음'이 최고의 두려움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 논리에서 ‘자살’은 맞지 않으므로. 죽음이 최고로 두렵다면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하는걸까.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진짜 자신의 모습_그림자’과 마주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초등학생이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빌어먹을. 다시 말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림자’다. 그림자를 들춰내는 것은 어찌보면 죽음보다 더 두렵다. 그렇담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가? 자신의 그림자와 직면하는 것이다. 나의 어두운 면을 밝혀내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렇게 자기 자신과 통합을 이루어낸 사람처럼 두려움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치 부끄럼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게 아닐까?

- 진정한 자유는 가장 두려운 일들을 대담하게 행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고 크게 한 걸을 내딛는 순간, 당신의 삶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게 됩니다. (…) 두려움을 걷어 버리거나 이겨 내야 역설적이게도 삶의 가장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P.164

삶의 가장 안전한 장소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곳이다.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이며, 모험이다. 

7. 영원과 하루 
- 화를 내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며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표현할 때는 매우 쓸모가 있습니다. (..) 화를 내면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고, 그럼으로써 주위 환경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삶에 알맞은 경계선을 설정해 줍니다. P.169

아, 나도 화를 좀 내야 하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잘 표현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닌가? ㅋㅋ

-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솔직히 느낀 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 사람은 죽음의 시기에 이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정직해집니다. (…)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솔직해지는 법과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P.180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 우리 아들 재원이에게 많이 느낀다. 그 녀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분명히 표현한다. 단 한번도 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울 수 있을가? 주위 사람들 눈치가 보이는데? 하지만 우리 아가는 그냥 시원하게 운다. 그 시간이 새벽이든, 낮이든, 밤이든 신경쓰지 않는다. 솔직하고, 감정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순수함을 닮고 싶다. 

-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생산적이고 성공적이어야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시달립니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일하는 법은 알지만 존재하는 법인 잘 모릅니다. P.183

아무도 ‘일을 더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에선 참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일 하는게 왜 이리 싫을까 ㅋ 일하는 것보다 배우고 대화하고, 노는 걸 더 좋아하는게 철이 덜 들었나.. 생각했는데. 요즘엔 이러한 생활이 참 마음에 든다. 다만 가장으로서 책임은 더 져야겠지만. (돈은 더 벌어야 한다.) 그것만 잘 되면 참 만족스런 삶이다.  

8.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 더 많은 인내심을 갖는 첫번째 단계는 상황을 고치거나 바꾸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고 또 볼 수 없을지라도 어떤 일들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알아차리거나 보지 못하더라도, 모든 일이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신뢰하는 것, 인내심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P.208

네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

- 받아들이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나서 양손을 치켜올리며 “희망이 없어. 난 죽게 될 거야!”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포기입니다. 받아들임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치료법을 선택해 시도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우리의 삶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포기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은 받아들임입니다. P.217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머지는 하늘의 몫으로 돌리는 것.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질문하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는가? 하늘의 몫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뭔가 해보기도 전에 기도부터 시작한다면 그건 내 잠재력을 미리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확률에 몸을 맡기지 말고, 나의 성실성에 몸을 맡기자. 그리고 상황으로 몸을 돌리자. 직시하고, 대안을 세우고, 실천하자. 

- 삶을 되돌아본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과 멋진 기회들이 반드시 당신이 세워 놓은 계획과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때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의 일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이 일하는 방식이며, 삶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P.224

삶의 신비를 내가 살아서 풀어낼 수 있을까? 참으로 신비하다. 이 우연과 필연의 매커니즘을 꼭 밝혀내고 싶다. 

9. 용서와 치유의 시간
- 용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짓밟고 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용서하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의 당시 상태가 최선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잘못 이상의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을 용서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그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P.230

기억하자. 그 사람의 행동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 내 삶을 위해서. 

-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데 중요한 열쇠는 우리가 그때 더 좋은 방법을 알았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P.237

나의 어리석은 행동에 몸서리 쳐지고, 자다가 이불에 하이킥하고 싶을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말을 기억한다면 좀 더 회복되지 않을까. 수 많은 행동을 저지를 것이고, 앞으로도 저지르겠지만 스스로를 용서하고 평화를 되찾기를.. 

-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보다 더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내주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더 친절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합니다. 불행을 이기적인 행동을 낳는 반면에, 행복은 주는 능력을 더 키워 줍니다. P.241

행복은 ‘욕심’이 아닌, ‘양심’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욕심은 나를 더 배려하라고 말하지만, 양심은 자연스래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욕심과 양심은 반대일까? 아니다. 나는 그 두 단어는 ‘범위’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한다. 사실 욕심의 기준은 ‘나’이고 양심의 기준은 ‘우리’이다. 우리가 오래 살기 위해선 양심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종보다 사회적인 동물이며,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나 역시 잘 살아갈 수 있기에. 그렇게 진화한 것이 아닐까. 꼭 이런 식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서로를 향할 때 가장 아름답더라.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 처음부터 끝까지 삶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도전으로 이루어진 학교입니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을 때, 또한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배운 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번 삶에서는 깨닫지 못하게 될 배움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배움입니다. P.257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고, 무엇을 가르치려 왔을까? 그리고 무엇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까? 갑자기 생각해 보건데, 내가 깨닫게 될 것들보다 깨닫지 못하게 될 것들이 참 재미있다. 나는 왜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게 될까? 이 대답도 물론 의미는 없겠지. 이것에 대답한다는 것은 깨닫고 있단 뜻이기에. 생각해보면 우린 누구나 배움과 깨달음의 한계를 갖고 산다. 누구에게 나의 관점은 정말 의미없을 수 있겠구나. 전적으로 옳음이란 없겠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 죽음을 앞군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P.260

전체 리뷰
오늘이 아이가 태어난지 한달이 되는 날이다. 처음 일주일은 애처러움. 그 이후 2주일은, 너무 좋았지만 조금은 막연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집에서 보낸 최근 2주일은 정말 ‘가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던 것 같다. 위의 글에서 나오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시간을 효율성으로만 보면 성과는 ‘제로’에 가깝다. 아이를 안고 있는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쌓이는 것도 아니기에. 하지만 인생을 그렇게만 본다면 얼마나 슬플까. 이번 설 연휴에도 아이를 엄청나게 안고 있었다. 아이를 내 품에 쏙 두고 그저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의 입도 보고, 코도 보고, 냄새도 맡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면 내 안의 여러 감정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도 모를 충만함이 온 몸을 감싸더라.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안고 아내랑 함께 미소짓는 시간이 많았다. 참 좋았다. 물론 밤에 1시간 단위로 깨는 고충은 말도 못하지만.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저 그 순간 충만함과 연결감을 경험하는 것. 그 감정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기 위해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멈춰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 타인의 어리석음은 용서하고, 내 안의 두려움은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순간의 모험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가길. 그리고 이 여정이 끝날 때 ‘아, 내 인생은 참 반짝 거렸다’라고 말하길. 나의 반짝거림이 내 아내와 아이에게 전달되어 그들도 반짝거릴 수 있게 되길. 그 파장이 널리 전달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충만함과 연결됨을 경험하길. 그리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후회없을까. :) 





핵심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자. 

질문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P.27
(중략)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펑크록 밴드 멤버가 대학 총학생회 간부보다 더 훌륭하다는 게 아니다. (…)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공연을 하면 행복했기에, 대학을 가지 않거나 대학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노래와 연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중략) 그들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라고 나는 믿는다. 

+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직업을 갖기로 결정했는지가 중요하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의도'를 '결과'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게 여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자.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 일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없거나 심지어 나쁘다면 어떻게 평가 해야 하는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사회적 입장에서도 그러할까? 의도라는 것은 이렇게 언제나 어렵다. 


P.37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 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혹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탁월한 유산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기에. 하지만 한 가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내린 선택은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 그건 내 삶을 통해서 이미 증명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선택에 앞서 그 선택이 온전히 자신으로 부터 나올 때 책임을 지고, 그러한 책임 아래에선 '후회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P.40
나는 ‘먹물’이다. 좋은 뜻에서든 좋지 못한 뜻에서든 확실히 그렇다. ‘먹물 근성’이 있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책이나 자료부터 찾아본다. 이것이 먹물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
여기 먹물 하나 추가요. 물론 먹물의 클래스가 한참 못 미치지만. 

P.56
상처받지 않은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
뒤의 말을 조금 쉽게 바꾸면, 자신의 인생을 소중해 여기는 사람만이 타인의 인생을 소중해 여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누구나 다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가진 사람을 위로한다. 하지만 똑같은 아픔에 누군가는 넘어지고 쓰러진다. 그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 평생의 주제가 될 듯하다. 

p.61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다. (…) 나는 셀리그만의 견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 셋 말고도 ‘연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도 사랑의 표현 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쓰는 사랑과는 의미가 다르다. 좁게 보면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넓게 보면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자문해본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연대'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뜻도 그렇고.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 아. 정말 좋다. 내가 심마니스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진짜 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내가 일단 교육 분야에서 넓은 스팩트럼으로 경험하고 부딪치는 것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경험을 나누고, 성장하고 싶은 것.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연대'라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P.71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가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는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모든 시나리오 작가는 끝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조만간, 죽음을 위한 성찰을 시작하자. 시간이 많이 남았을 수록 빨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 하리라.

P.88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지만 그 과정은 의심이다. 공부한 모든 사상을 다 받아들인다면 누구도 특정한 ‘주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공부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마무리 된다. 아 좋은 말이다. 나 역시 지금 이 책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우선 이 글에 반론을 제기해보자. 공부는 호기심으로 시작하는가?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공부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의심인가? 아니다. 물론 맞지만, 하나의 단계가 더 필요해 보인다. 내가 공부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되니까. 공부의 과정은 '욕망'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욕망으로 치달리는 것이 공부가 아닐까. 공부를 하면 내가 무언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욕망도 있고, 스승을 닮겠다는 욕망도 포함한다. 나는 이 욕망이 공부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심은 언제 시작되는가? 욕망 때문에 눈이 멀어서 오만해지고, 스스로를 속이려할 때, '의심'이 필요하다. 자기 의심이 없는 공부는 그때부터 '믿음의 영역'으로 치닿기에. 종교가 되는 것이지. 요는,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고, 과정은 욕망이지만, 그 끝은 의심이다. 이 문장이 나에겐 더 와 닿는다. 

P.154
글을 잘 쓰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1부를 다섯 번 넘게 읽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과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도 여러 번 읽었다.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베껴 쓰기 못지 않게 어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훈련법은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하는 것이다. 수첩에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거나 스쳐가는 상념들을 붙잡아 메모했다. 성매매와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쓴 기억이 난다. (…)  찻집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밖을 내다보는 젊은 여성의 옷차림과 이목구비를 세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
글을 잘 쓰려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데 나는 어찌해야 할꼬. 군대 혹은 감옥에 가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요즘은 알것 같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자기 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 이 현실을 끌어다 맞추려고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비판적 독서' 말이다. 

P.156
‘폐 끼치지 말고 살자’ 이것이 내 좌우명이다. 남들에게, 사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본은 ‘쓸모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밥을 먹기는 먹어야 한다. 밥을 먹으려면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 분업 사회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계를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면 존엄한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쓴다. 이것이 내 일이다. 내게 글쓰기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다.글을 써서 내 생각과 내가 가진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즐겁고 기쁘다.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놀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이든 놀이든, 이것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쓰는 글이 쓸모가 있어야 한다. (…) 물론 쓸모와 훌륭함은 다르다. 많이 팔리는 책이 꼭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쓴 책들 중에도 내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게 그렇지 않은 책보다 덜 팔렸다. 마찬가지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나는 많이 읽히는 동시에 훌륭한 책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훌륭한 글쟁이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쓸모 있는 글쟁이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생계를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는 삶. 그건 정말 상상하기 싫다. 하지만 이 사회는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 말했다. 돈이 10배가 많으면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1000배가 많으면 두려움을, 10000배가 많으면 그의 노예가 된다고. 최소한의 공간과 시간을 보장 받기 위해선 나는 '돈'이 필요하다. 그 것이 보장받지 못하면 나는 결국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아이와 함께 보내야 한다거나, 지식을 쌓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거나)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존엄한 삶은 정신으로마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쉽지 않다. 정신과 몸을 바짝 차려야 한다. 

P.174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할 준비를 하라. 자격증이 필요하면 기능을 익혀 자격증을 따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니 스스로 글쓰기 훈련을 하라. 중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유통되는 게 현실인 만큼 영어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 좋다. 중국어나 스페인어처럼 사용 인구가 많은 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것도 바람직하다. 열정을 쏟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이라면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역시 즐거울 것이다.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않고 그저 막연히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청년들이 꼭 그렇게 하면 좋겠다. 

+
이번에도 그냥 반론해보자. 뭐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대학생들에게 과제가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일까? 나는 그건 잘 모르겠다. 의도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방법론은 조금 바꾸고 싶다. 오히려 나는 대학생들에게 지금 가장 즐거운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 나는 사람의 성장은 '관심의 이동'에서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20대 초반에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한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40대가 되어서까지 계속 그에게만 열광한다면 어떨까? 그는 성장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관심이 '고정'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성장과 성숙은 '관심의 이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관심'은 호기심을 담보로 움직이기에. 만약, 호기심만 확보되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사람은 자신이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아서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즐거워야 한다. 그 '즐거움의 경험'이 그들의 호기심을 성장시킬 것이기에. 제발 스팩 지옥에서 벗어나서,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보드게임을 밤새서 한다거나,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마음껏 읽어본다거나. 그러한  몰입 경험은 시간이 훨씬 지나도 우리를 지지하고 지탱한다. 무너지지 않는다. 

P.186
왜 정치를 했는가? 내게 정치는 연대의 한 방법이었다. 연대는 아픔과 기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사회적인 선과 미덕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정치는 스무 살에 야학교사를 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
정치에 무지했던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관심을 두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자아가 없는 이상, 그는 사회와 함께 하기는 하나, 사회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그랬다. 유시민이 인생을 걸고 싸우던 시기에 나는 사회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투표 한번 하지 않았다.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는데, 나는 사회와 동 떨어져 있었다. 그 후회감에 나는 어느새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더라. 

P.187
내가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려움, 강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진화적으로 인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

나는 유권자로서 언제나 진보정당을 지지했다. (..)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추구하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
덜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P.216
유년기의 양육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우는 세 살 이전에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 이후에도 아이의 뇌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은 아주 강력하다. 좋은 양육은 가훈이나 규칙을 정해두고 예의범절을 익히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해주고 부모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육의 핵심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느끼고 이해한다. 부모의 꿈, 정서, 가치관, 감정, 부모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뇌에 영향을 준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 더 창의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 최악의 훈육 방법은 아이를 떼리는 것이다. 폭력은 어떤 것이든 정서 발달을 왜곡한다. 승복할 수 없는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은 소통과 공감 능력 발달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이 말’을 쓰면 아이의 생각도 반쪽까리가 된다. 

+
핵심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 실제로 나는 이제 태어난지 1달이 된 재원이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믿는다. 내가 고 녀석을 안고 조용히 '아빠야~'라고 말하면 재원이는 울음을 그치고 멀뚱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상황을 다 설명한다. 이렇고 저렇고. 재원이도 뭐 끄덕끄덕 하는 것 같다. 설사 못 알아듣는 다고 해도 실망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우리 부부가 가진 그 자세는 아이가 느낄 것이기에.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걸 배웠다면 나중에 재원이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물림되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닐까. 

P.236
나만의 세계에 집착하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해 고립될 수 있고, 대중의 취향만 따라가다 보면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지 못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이다. 나의 글쓰기도 여기서 주저하고 방황한다. 

어쨌든 나는 글쓰기가 좋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일 자체가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다. 무엇이든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쓰는 일은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다. 배움과 깨달음이 따라온다.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거나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좋은 문장 하나를 쓰고 혼자 감탄하면서 싱글벙글할 때, 나의 뇌에서는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이 대량 분비되는 것 같다. 그것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마약을 복용할 때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화학 물질이다. 

+
나는 글쓰기로 언제 이런걸 경험하나. 

P.250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중략)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만, 진보주의 그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크게든 작게든,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생활환경은 늘 변화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가 예전의 상황에 맞는 익숙한 생각과 행동만 한다면 개체 뿐만 아니라 집단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은 인간의 일반 지능을 진화시켰다. 

P.329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름을 담긴다는 것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 행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든 그 사람의 마음이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훌륭한 삶을 살면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이름을 남겼다고 해서 다 훌륭하게 산 것은 아니다. 이름이 길이 남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훌륭한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존재를 남겼다. 하지만 이름도 같이 남았지. 내가 별로 존경하지 않는 이들은 이름을 남기려고 했고, 존재는 남기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은 물론 남았다. 불명예로. 이름이 남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삶의 본질적 요소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란 경험의 영역이다. 사랑을 경험하고, 아픔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경험하고, 두려움을 경험하고, 깨달음을 경험하고, 소외를 경험하고, 연대를 경험하고,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모든 스팩트럼을 누리고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로 살고 싶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삶을 누리면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말이다. 



0. 서문
인문학의 기본 방향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시민을 위한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인문학이 자칫 개인의 덕성 함양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인문학이 추구했던 정신에 위배된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를 시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시도이다. 인문학은 학문적으로 심화되어야 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확산되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장에서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라는 글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과거에 이지성 작가가 쓴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읽으며 든 불편한 생각이 해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의 부재는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이었는데, 인문학을 하는 이유가 마치 천재가 되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함이란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저자의 목적은 그러한 이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숨은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서 볼 책은 바로 <희망의 인문학>이다. 그 책은 시민을 위한 인문학이란 취지를 현실로 구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1. 논어 / 공자


앎이란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인간은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고난할 때 배우는 사람,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우린 많은 경우 곤에 굴복하고, 곤을 변명으로 대한다. 나이 핑계, 애 핑계, 부족한 잠을 핑계로 댄다. ‘학’을 거부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지지대가 필요하며, 그것이 평생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이는 정말 천재다.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이 분명 세상에는 있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한 천재로 유명한 율곡 이이 선생님보다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김득신 같은 분을 더 존경한다. <백이전>을 1억1만3천번을 읽으면서 자신의 아둔함을 극복한 스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최소한 배움을 멈추지는 말자. 배움이 없다면, 영원히 이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건 별로 즐겁지 않다. 


2. 목민심서 / 정약용

일이란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진리다. 이런 문장은 머릿 속에 아예 외우자. 내가 리더로 속한 모든 조직은 정확히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뀌면, 분명 바뀐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조직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심플한 진리. 


3. 성학십도 / 이황

자아 완성이란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할 따름이다. ‘자아 완성’이란 장경부가 말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떨기 난초가 꽃을 피워 종일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난초 스스로는 향기를 내고 있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자아 완성을 위해 공부하는 뜻과 꼭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와 기를 겸하고 성과 정을 통섭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 정서가 되는 순간이 한 마음의 기미요, 온갖 변화의 지도리가 되며 선과 악이 거기서 나누어진다. 학자가 진실로 한결같이 을 유지하여 이와 욕의 구분에 어둡지 않고, 더욱 여기에서 삼가기를 지극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마음이 발하기 전에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깊게 하고, 마음이 이미 발하였을 때에는 성찰하는 습관을 익숙하게 하여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힘써 그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중을 잡는’ 성학과 ‘체를 보존하여 작용에 응하는’ 심법을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여기에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 아닐까. 물론 자아 완성이 내면의 양심을 깨우고, 저절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알기에 큰 문제는 없다. 내가 아는 말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군자란 <내성외왕>이 아닐까. 내적으로는 성인이 되고(아마 자아 완성과 같은 말일 것이다.) 외적으로는 왕이 되는 것(군림하는 왕이 아닌,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 이를 위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하는 것이니라. 


3. 격몽요결 / 이이 
 
공부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과거에 어떤 글에서 이이가 12살에 썼다는 자경문을 읽고 한 동안 정신을 못 차린 적이 있다. 당시에 묘한 열등감에 사로 잡혔었다. 내가 30이 다 되어서야 '아 그게 중요하지'라고 알아낸 것을 누군가는 고작 12살의 나이에 스스로 썼다는 것에 좌절했었다. 물론 이이와 나를 비교한다는 건 아니나, 왠지 슬픈건 사실이었다. ㅠ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맞다.   
 

4. 맹자 / 맹자
 
사람의 본성이란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러하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우산에는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맹자가 주장한 본성의 선함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했다. 이때의 적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고, 대인은 순수성을 잃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양학자는 공자와 맹자다. 특히 맹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나 역시 비슷하기에 아무래도 좀 더 마음이 간다. 인간의 온전함을 믿고, 그 가능성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교육이고 그러한 교육을 하고 싶어서 심마니스쿨이란 커뮤니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분명 언젠간 그에 맞는 흐름과 과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나의 성장에 달려있으리라. 


5. 장자 / 장자

자유란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둘레의 치수는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 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대붕은 허구적 새, 메추라기는 현실적 새다. 메추라기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대붕은 초월적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장자 자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로부터 속박되어 있지만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붕은 현실 세계로부터 비약하여 이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도를 확보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꼈으면 한다. 그래야 아픈 사람들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힘들지 않으면 절대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다. 어머니가 돼서도 안 되고 아버지가 돼서도 안 된다.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 높이만큼 겪었던 고통의 깊이만큼 나는 그만큼 어른이 되었을까를 고민해 봐야 한다. 

19세기 명상가이자 사상가인 구르지예프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 먼저 그 사실을 깨우쳐야 자유로워 질 수 있고 했다. 나도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그 사실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고 인정하는지 척도가 어른이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경험과 성찰 없이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각자에게 필요한 과제를 풀어야 우린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6. 사기 / 사마천

삶과 죽음이란
사마천의 생사관을 잘 나타내는 말이 ‘구우일모’이다. 다음은 사기 <보임안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 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해 놓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죽음이 있으려면 삶 자체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해도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보여 준 행위나 행동이 천박하거나 형편없었다면 그 죽음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이기에 이 말이 와닿는다.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위대한 죽음을 맛볼 수 있을까? 내가 눈을 감을 때 어떤 여한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렵다. 
 

개혁이란
입목득신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상앙이 진나라를 개혁하려고 하니 백성들이 전혀 믿지를 않았다. 그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않고든 법이 시행되지 않겠단 생각으로, 성북 밖 한쪽 문에다가 나무 기둥을 세워 놓고 이것을 저쪽 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금 스무 냥을 상으로 주겠다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는다.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상금은 오십 냥으로 올린다. 그랬더니 지나가는 젊은이 하나가, 할 일도 없고 힘이 남아도니까 나무를 옮겼다. 그러자 상앙이 그 자리에서 오십 냥을 상금으로 주게 되고, 이후 백성들은 상앙의 정책에 믿음을 갖게 된다. 

“법이 안 지켜지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으며,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따르지 않습니다.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낡은 습속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예의범절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당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무언가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시간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한다.  


서문. 

원래의 나는 책을 2번씩 잘 읽지 않는다. 그저 한번 읽고 이후에는 필요할 때 꺼내서 다시 읽는 정도.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별 다른 철학이 있는건 아니다. 그저 다양한 책에 계속 흥미가 가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에 읽을 책이 눈에 보인다. 그러다보면 예전에 봤던 책은 우선 순위에서 미뤄지기 마련이더라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내가 수업하는 학교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다시 봤다.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분명히 봤던 책이고 심지어 이 블로그에 리뷰도 남겼었다. 리뷰 링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서서 책을 훑어보는데, 왠지 글을 읽지 않은 느낌? 기묘한 느낌이 들어서 빌려왔다. 개정증보판이기도 했고. 


다시 책을 읽는데, 참 좋았다. 2010년의 내가 어떤 지점에서 반응했었는지도 알겠거니와, 지금의 내가 어디서 글을 멈추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리해 보고 싶었다. 지금 나만의 정리로. 사실 정리한 지는 거의 한달이나 되어가지만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올린다. 이번 필사는 10개의 개념 중심으로 옮겨적어 보았다. 책의 내용과 조금씩 다르게 편집되었기에, 전체 맥락과 흐름을 알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책을 읽기를.







1. 리더란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주변을 살펴보라. 어떤 그룹이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썰을 푸는’ 인간이다. 상황을 언어화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말과 이야기로 세상을 보는 눈을 홀라당 뒤집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혁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은 늘 새로운 말, 낯선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했다. 

+ 리더십은 삶에 대한 통찰에 달려있다. 
구술 능력이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다. 삶에 인간,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의 표현이다.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이 있어야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므로 글쓰기 훈련 전에 이 능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그러면 발성과 몸짓, 호흡 등 보디랭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하게 되고, 소통의 중요성을 절로 터득하게 된다. 이런 구술 능력은 리더십과 연결된다. 리더십의 대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 능력이다. 주제를 이끌어내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2. 공부란
질문은 세상천지에 널려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가 끝나는 것이라면,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력은 언제,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독서와 공부는 서로 다른 것인가?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무엇인가? 등등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 공부란 네트워킹이다.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어짊을 북돋운다."


3. 학교란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 /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공부에 때가 있다고?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은, 아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학습하는 과정 아닌가. 아이들의 눈이 그토록 맑은 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 들어가면서 갓난아이의 이 경이에 찬 호기심은 학교식으로 재편되어 버린다. 더 이상 삶과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낄 수도, 느낄 필요도 없다. 대신 잘게 쪼개진 학년별 단위 학습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4. 함께 공부하는 것이란
한 사회가 공동체적 리듬을 가지려면, 노인은 청년과 함께 섞여야 하고 어린이와 청년은 노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집합적 기운의 분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단연코 공부밖에 없다. 공부할 때 노인과 청년은 권위와 위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 공부엔 다 때가 있다! 숨을 쉬고 있는 때,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이다. 

4. 독서란
요즘 대학생들의 독서력은 실로 심각하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토론 수업이나 자기주도 학습도 세계와 대상을 학습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헌데, 대체 독서를 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눈을 기를 수 있단 말인가?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다. 

독서란 이것이다. 기억하라. “위로 성현과 짝할 수 있고, 아래로 뭇 백성을 깨우칠 수 있으며, 그윽하게는 귀신과 통할 수 있고, 밝게는 왕도와 패도의 방략을 터득하여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것” 

5. 자유란
카프카가 말했듯이,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 가량, 지금 10들은 게임과 포르노에 전면 노출되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치명적 중독성에 있다. 거기에 한번 붙들리면 헤어나기가 힘들다는 것. 그게 바로 억압이다. 그렇다면 그때 자유란 ‘그 억압에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는가’ ‘그에 맞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법이다. 

6. 고전이란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도래할’ 시간이다. 고전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지만 늘 우리에게 도래할 시간에 대해 예고해 준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고전! 

+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이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읽으면 안 된다.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그런 책으로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반드시 내 몸과 운명을 바꿔 줄 책을 읽어야 한다. 일단 나보다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7. 코뮌이란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건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감을 의미했다.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고뮌이란 기성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다. 

8. 글쓰기란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심급,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지식인에게 있어 글이란 자신의 삶의 특이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현방식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신체적 조성을 바꿀 수 없다면, 담론을 생산할 수도, 코뮌의 리더도 될 수 없다. 내가 공부한 과정은 이렇다. 선배들은 한 마디를 던졌다. “기존 연구와 다른 주장은 뭐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자신의 눈으로 자료를 보라.’ ‘너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설정하라.’ 즉, 차이를 구성하라는 것. 정말 뚫어지게 자료를 보고 또 보았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낱말을 수정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파지를 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곤 했다. 참으로 미미한 차이였다. 하지만 “호리의 차이가 천리의 어긋남을 빚는다”고 하지 않던가. 대상이건 방법론이건 지식인이라면 일단 자신이 던진 물음과 ‘온몸으로’ 마주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화살-되기’ 그러다 보면, 문득 알게 된다. 내가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료가 내 신체를 통해 스스로 웅성거린다는 것을. 세상 가득히 앎의 흐름이 있고, 나는 단지 그 흐름 속을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질문을 던질 것, 하나의 논리로 관통할 것 - 이 두 가지가 내가 석사과정 내내 갈고 닦은 글쓰기의 초석이었다.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 줄 것이다.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제를 바꾸면 된다. “생긴대로 쓰고, 쓰는 만큼 살아간다.”

9. 스승이란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렵다. 배움의 열기가 사라진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10.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소외와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고, 삶을 조직하고, 천하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주자가 말했듯이,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일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야말로 가장 억압적이면서 가장 소외된 계급에 해당한다. 이 억압과 소외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을 배움터로 바꾸고, 지식의 향연을 구가하는 학습망을 조직할 것. 즉, 청춘의 패기와 열정을 모아 지식의 노예가 아닌 지식을 통해 자유를 누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스스로가 ‘호모 쿵푸스’임을 자각해야 하리라. 

"교육의 목표는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콩도르세


이 책의 결론,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나만의 결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짜 공부란, 목적없는 것이라고.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건 '삶을 잘 살기 위한 것'이라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 라거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읽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일이지 공부는 아니다. 공부는 존재의 놀이가 아닐까. 그렇게 함께 놀면서 배우는 벗들과 이를 촉발시키는 스승이 있다면 진정한 삶의 절반 정도는 채워진 것이 아닐까. 심마니스쿨이 원하는 모습도 결국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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