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도입 글에 이어서, 이제는 각각 책에 대한 한줄 리뷰다.
우선 1월과 2월에 읽은 책들이다. 바로 스타트


2015년 1월 
1. 어떻게 살 것인가_유시민 

+ 나는 유시민이란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한참 유명해지고, 활동 할 당시의 나는 정치에 전혀 무관심이었으니까. 하다못해 100분 토론에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꽤 좋아하는 사람이다. 올해 초, 유시민이란 사람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자 해서 산 책이 <나의 한국현대사>였고, 빌려서 본 책이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 대해선 초서를 한 적이 있다.링크입니다.어떻게 살 것인가, 핵심은 이것이었다.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자.”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이다. 

2. 블리스, 내 삶의 신화를 찾아서_조지프 캠벨

+ 내가 진행하는 독창적인 수업 중에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가 있다. 사실 작년에 매달 심톡을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워크샵을 디자인하고, 또 진행해보는 경험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 만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기존에 있던 것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이 <자신찾>에 애정이 생겼다. 이 책은 이 워크샵을 하루짜리 워크샵으로 확장시키고자 해서 들여다 본 책이다. 조지프 캠벨이 새롭게 만든 책은 아니고, 그가 했던 말을 잘 편집해서 ‘주제’에 맞게 배열한 책이다. 하지만 꽤 재미있게 편집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세계관과 잘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 올해 1월의 책!

3. 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_이희석

+ 올해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 바로, 와우 스토리 연구소의 10기 연구원이 되는 것이다. <와우랩>이란 이희석 선생님을 필두로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커뮤니티다. '마음을 나눈 사람들의 자기실현 학습 커뮤니티’ 굳이 비교하자면, 구본형 변화연구소의 연구원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희석 선생님도 구본형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했고, 느낌도 비슷하다. 원래 나는 구본형 선생님께 한번 배워보고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 작고하시면서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와우랩과 인연이 닿아서 올해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 독서축제란 이름으로 숙제를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이 첫 책이다. 나의 합류는 다소 늦게 이루어져서 이번 책은 리뷰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분실하는 바람에 꼼꼼히 리뷰도 못 하지만, 읽는 동안은 ‘독서법’에 대한 좋은 개론서라고 느껴졌다. 

4.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_짐 로허

+ 앞서 설명한 <와우랩> 2번째 책이다. 이 책의 초서와 리뷰는 여기. 링크입니다. 일반적인 자기계발 서적과 비교했을 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특히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다'라는 점에서 아주 공감했다. 충분한 ‘감정적, 신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있어야, 짦은 시간에도 몰입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 수 없다는 점. 공감한다. 마지막 장에서 언급된 목표, 현실, 행동도 유익했다. 목표는 나의 내적 가치와 자기 이익을 뛰어넘는 것. 현실 인식은 진실과 대면하고, 자기 기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행동은 지속적인 의식의 활용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 이 책에선 리츄얼의 중요성을 많이 언급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제대로 된 리츄얼이 없단 생각도 한다. 아직 일상을 가지런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시 한번 재독하고 싶다. 

5. 유태인의 공부_정현모

+ 2015년 1월은 아내의 출산이 임박한 때이자, 특히 1월 22일엔 우리 재원이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1월 중순 이후에는 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실 우린 자연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달 먼저 태어나는 사람에 결국 종합병원에서 낳아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교대역 <메디플라워>라는 곳에서 상담도 받고, 교육도 듣고 있었다. 자연출산으론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갔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다. 출산을 앞둔 분들에게 내가 많이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고. 여기서 대기하면서 읽었던 책이 <유태인의 공부>다. 마음에 드는 몇 문장이 있었다. 하지만 구입해서, 아주 몰입해서 볼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란 정도의 책이었다. 


2015년 2월
6. 희망의 인문학_얼 쇼리스

+ 2월도 갑작스런 1월 출산의 여파 때문에 많은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은 정말 의미있게 읽었다. 바로 <희망의 인문학>이다. 너무 좋게 읽어서 리뷰를 남긴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구나. 그때 쯤 정신없어서 그런가보다. 핵심은 인문학이 ‘(물질적, 정신적)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얼 쇼리스는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어찌보면 이 책은 오랜 나의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 앞에 있는 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결국 인문학이란 회의하고, 탐구하여 기존의 ‘나의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정의지만,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인문학이란 나의 공간을 뛰어넘어 ‘타자의 공간’에 합류하는 것이다.라고. 얼 쇼리스는 이를 정치적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얼 쇼리스도 동의하는 건,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찰적 사고란, 나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린 나를 이해할 수도, 서로를 이해할 수도, 사회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린 괴태의 말마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멸한다. 즉, 타자의 공간에 합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찰’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연결고리를 배웠다. 고마운 책이다. 올해 2월의 책!

7. 인생수업_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

+ 와우랩 3번째 책.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었다. 한때 열풍이 불었던 책이고, 나는 이상하게도 베스트셀러를 잘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책도 대충 봤던 거 같긴 한데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할 때는 잘 안 보다가, 시간이 지나서 뒤늦게 읽고 좋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사실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당시 내 관심사를 굳이 바꿔서까지 읽고 싶지는 않은 것일 뿐. 그랬던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 였고, 이번 <인생수업>도 그런 책이다. 읽고 나니, 참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뷰는 과거에 적었다. 링크입니다.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앞서 <어떻게 살 것인가>와 비슷하다.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8.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_진 리들로프

+ 2월에 한참 육아에 관심이 많을 때 봤던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바로 ‘안고 다녀라’라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예콰이족의 경우, 아이를 항상 안고 다닌다. 그렇게 언제나 아이를 안고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 그럴 경우 자라서도 우리가 걱정하는 응석받이가 되기보단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라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육아법이라고 말하는 책이 이 책이다. 물론, 소수 민족의 육아법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사회와 너무나 다른 맥락에 있기 때문에 이것만이 육아의 진리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분명 우리 사회는 주 양육자와 아이의 밀착을 너무나 관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100% 밀착이 너무나 힘든 건 알지만, 이런 책들로 인해 적어도 20-30%에서 40-50%까지라도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건 의미있는 책이 아닐까? 

9. 올바른 생계수단에 대하여_크리슈나무르티

크리슈나무르티의 엄청난 책이다. 인도의 성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높게 치는 사람이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오쇼 라즈니쉬를 비롯한 많은 성자들은 가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뿐만 아니라 드물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별의 교단 해체를 선언한,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권력을 뒤고 하고, ‘진리는 네 안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 분이 썼던 글을 옮겨 적은게 있는데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다. 조만간 올려야 겠다. 하나의 문답만 올려보도록 하겠다. 크리슈나무르티의 핵심적 사상을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기에. 

Q. 어쨌거나 문제는 제가 어떻게 보통의 평균적인 평범한 사람은 안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A. 내가 한마디 더 하자면 이렇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어떻게”라고 말하지 말아라. 어떻게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와서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보호막이나 어떤 체계가 누군가를 끌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너는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고, 네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네 고유한 행위와 고유의 사고력을, 그리하여 네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라고 묻는다는 것은 네가 중고품 인간으로 되었다는 뜻이거든. 그것은 시야의 전체적인 감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본질적인 정직성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남아 있는 길을, 그리하여 지금의 이 모습을 넘어서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거지.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라고 묻지 말아요. 

물론 이것은 심리적인 영역에서 하는 말이다. 자동차를 조립한다거나 컴퓨터를 만드는 문제등에서는 반드시 “어떻게” 라고 물어봐야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서라도 배워야만 해. 그러나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문제에서, 그 원천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행위들을 알아채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라보고,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그 본성을, 그 근원을 관찰하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는 것이 없어야만 한단 말이다. 관찰하고 바라보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인간은 책으로부터라거나 또는 어떤 심리학자로부터라거나, 혹은 복잡하고 교활하며 박식한 학자나 교수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배우는 점이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이게 정말로 어렵단다, 얘야. 이게 너를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을지도 몰라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지, 소위 유혹이라고 불리는 것들 말이다. 생물학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하는 따위들 말이지. 그리고도 네 자신은 사회의 잔인성으로 하여 생매장이 될 지도 몰라요. 당연히 네 스스로 홀로 우뚝 서야 하지만, 그것은 강제나 의도나 또는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와 내면의 거짓들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에요. 감정이나 희망이나 하는 것들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네가 거짓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알아채기 시작할 것이고, 지성이 생겨나겠지. 네가 네 스스로에게 빛이 되어야만 하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이지.

1983년 5월 30일
브록우드 파크

크리슈나무르티가 자기 자신에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핵심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자. 

질문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P.27
(중략)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펑크록 밴드 멤버가 대학 총학생회 간부보다 더 훌륭하다는 게 아니다. (…)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공연을 하면 행복했기에, 대학을 가지 않거나 대학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노래와 연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중략) 그들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라고 나는 믿는다. 

+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직업을 갖기로 결정했는지가 중요하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의도'를 '결과'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게 여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자.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 일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없거나 심지어 나쁘다면 어떻게 평가 해야 하는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사회적 입장에서도 그러할까? 의도라는 것은 이렇게 언제나 어렵다. 


P.37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 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 하는 사람, 권력을 쫓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혹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탁월한 유산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기에. 하지만 한 가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내린 선택은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 그건 내 삶을 통해서 이미 증명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선택에 앞서 그 선택이 온전히 자신으로 부터 나올 때 책임을 지고, 그러한 책임 아래에선 '후회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P.40
나는 ‘먹물’이다. 좋은 뜻에서든 좋지 못한 뜻에서든 확실히 그렇다. ‘먹물 근성’이 있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책이나 자료부터 찾아본다. 이것이 먹물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
여기 먹물 하나 추가요. 물론 먹물의 클래스가 한참 못 미치지만. 

P.56
상처받지 않은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
뒤의 말을 조금 쉽게 바꾸면, 자신의 인생을 소중해 여기는 사람만이 타인의 인생을 소중해 여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누구나 다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가진 사람을 위로한다. 하지만 똑같은 아픔에 누군가는 넘어지고 쓰러진다. 그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 평생의 주제가 될 듯하다. 

p.61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다. (…) 나는 셀리그만의 견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 셋 말고도 ‘연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도 사랑의 표현 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쓰는 사랑과는 의미가 다르다. 좁게 보면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넓게 보면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자문해본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연대'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뜻도 그렇고.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 아. 정말 좋다. 내가 심마니스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진짜 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내가 일단 교육 분야에서 넓은 스팩트럼으로 경험하고 부딪치는 것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경험을 나누고, 성장하고 싶은 것.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연대'라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P.71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가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이는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모든 시나리오 작가는 끝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조만간, 죽음을 위한 성찰을 시작하자. 시간이 많이 남았을 수록 빨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 하리라.

P.88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지만 그 과정은 의심이다. 공부한 모든 사상을 다 받아들인다면 누구도 특정한 ‘주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공부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마무리 된다. 아 좋은 말이다. 나 역시 지금 이 책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우선 이 글에 반론을 제기해보자. 공부는 호기심으로 시작하는가?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공부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의심인가? 아니다. 물론 맞지만, 하나의 단계가 더 필요해 보인다. 내가 공부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되니까. 공부의 과정은 '욕망'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욕망으로 치달리는 것이 공부가 아닐까. 공부를 하면 내가 무언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욕망도 있고, 스승을 닮겠다는 욕망도 포함한다. 나는 이 욕망이 공부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심은 언제 시작되는가? 욕망 때문에 눈이 멀어서 오만해지고, 스스로를 속이려할 때, '의심'이 필요하다. 자기 의심이 없는 공부는 그때부터 '믿음의 영역'으로 치닿기에. 종교가 되는 것이지. 요는,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고, 과정은 욕망이지만, 그 끝은 의심이다. 이 문장이 나에겐 더 와 닿는다. 

P.154
글을 잘 쓰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1부를 다섯 번 넘게 읽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과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도 여러 번 읽었다.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베껴 쓰기 못지 않게 어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훈련법은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하는 것이다. 수첩에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거나 스쳐가는 상념들을 붙잡아 메모했다. 성매매와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쓴 기억이 난다. (…)  찻집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밖을 내다보는 젊은 여성의 옷차림과 이목구비를 세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
글을 잘 쓰려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데 나는 어찌해야 할꼬. 군대 혹은 감옥에 가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요즘은 알것 같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자기 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 이 현실을 끌어다 맞추려고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비판적 독서' 말이다. 

P.156
‘폐 끼치지 말고 살자’ 이것이 내 좌우명이다. 남들에게, 사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본은 ‘쓸모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밥을 먹기는 먹어야 한다. 밥을 먹으려면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 분업 사회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계를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면 존엄한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쓴다. 이것이 내 일이다. 내게 글쓰기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다.글을 써서 내 생각과 내가 가진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즐겁고 기쁘다.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놀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이든 놀이든, 이것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쓰는 글이 쓸모가 있어야 한다. (…) 물론 쓸모와 훌륭함은 다르다. 많이 팔리는 책이 꼭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쓴 책들 중에도 내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게 그렇지 않은 책보다 덜 팔렸다. 마찬가지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나는 많이 읽히는 동시에 훌륭한 책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훌륭한 글쟁이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쓸모 있는 글쟁이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생계를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는 삶. 그건 정말 상상하기 싫다. 하지만 이 사회는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 말했다. 돈이 10배가 많으면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1000배가 많으면 두려움을, 10000배가 많으면 그의 노예가 된다고. 최소한의 공간과 시간을 보장 받기 위해선 나는 '돈'이 필요하다. 그 것이 보장받지 못하면 나는 결국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아이와 함께 보내야 한다거나, 지식을 쌓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거나)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존엄한 삶은 정신으로마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쉽지 않다. 정신과 몸을 바짝 차려야 한다. 

P.174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할 준비를 하라. 자격증이 필요하면 기능을 익혀 자격증을 따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니 스스로 글쓰기 훈련을 하라. 중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유통되는 게 현실인 만큼 영어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 좋다. 중국어나 스페인어처럼 사용 인구가 많은 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것도 바람직하다. 열정을 쏟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이라면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역시 즐거울 것이다.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않고 그저 막연히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청년들이 꼭 그렇게 하면 좋겠다. 

+
이번에도 그냥 반론해보자. 뭐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대학생들에게 과제가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일까? 나는 그건 잘 모르겠다. 의도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방법론은 조금 바꾸고 싶다. 오히려 나는 대학생들에게 지금 가장 즐거운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 나는 사람의 성장은 '관심의 이동'에서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20대 초반에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좋아한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40대가 되어서까지 계속 그에게만 열광한다면 어떨까? 그는 성장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관심이 '고정'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성장과 성숙은 '관심의 이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관심'은 호기심을 담보로 움직이기에. 만약, 호기심만 확보되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사람은 자신이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아서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즐거워야 한다. 그 '즐거움의 경험'이 그들의 호기심을 성장시킬 것이기에. 제발 스팩 지옥에서 벗어나서,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보드게임을 밤새서 한다거나,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마음껏 읽어본다거나. 그러한  몰입 경험은 시간이 훨씬 지나도 우리를 지지하고 지탱한다. 무너지지 않는다. 

P.186
왜 정치를 했는가? 내게 정치는 연대의 한 방법이었다. 연대는 아픔과 기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사회적인 선과 미덕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정치는 스무 살에 야학교사를 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
정치에 무지했던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관심을 두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자아가 없는 이상, 그는 사회와 함께 하기는 하나, 사회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그랬다. 유시민이 인생을 걸고 싸우던 시기에 나는 사회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투표 한번 하지 않았다.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는데, 나는 사회와 동 떨어져 있었다. 그 후회감에 나는 어느새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더라. 

P.187
내가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려움, 강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진화적으로 인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

나는 유권자로서 언제나 진보정당을 지지했다. (..)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추구하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
덜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P.216
유년기의 양육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우는 세 살 이전에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 이후에도 아이의 뇌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은 아주 강력하다. 좋은 양육은 가훈이나 규칙을 정해두고 예의범절을 익히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해주고 부모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육의 핵심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느끼고 이해한다. 부모의 꿈, 정서, 가치관, 감정, 부모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뇌에 영향을 준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 더 창의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 최악의 훈육 방법은 아이를 떼리는 것이다. 폭력은 어떤 것이든 정서 발달을 왜곡한다. 승복할 수 없는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은 소통과 공감 능력 발달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이 말’을 쓰면 아이의 생각도 반쪽까리가 된다. 

+
핵심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 실제로 나는 이제 태어난지 1달이 된 재원이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믿는다. 내가 고 녀석을 안고 조용히 '아빠야~'라고 말하면 재원이는 울음을 그치고 멀뚱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상황을 다 설명한다. 이렇고 저렇고. 재원이도 뭐 끄덕끄덕 하는 것 같다. 설사 못 알아듣는 다고 해도 실망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우리 부부가 가진 그 자세는 아이가 느낄 것이기에.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걸 배웠다면 나중에 재원이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물림되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닐까. 

P.236
나만의 세계에 집착하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해 고립될 수 있고, 대중의 취향만 따라가다 보면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지 못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이다. 나의 글쓰기도 여기서 주저하고 방황한다. 

어쨌든 나는 글쓰기가 좋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일 자체가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다. 무엇이든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쓰는 일은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다. 배움과 깨달음이 따라온다.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거나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좋은 문장 하나를 쓰고 혼자 감탄하면서 싱글벙글할 때, 나의 뇌에서는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이 대량 분비되는 것 같다. 그것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마약을 복용할 때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화학 물질이다. 

+
나는 글쓰기로 언제 이런걸 경험하나. 

P.250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중략)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만, 진보주의 그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크게든 작게든,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생활환경은 늘 변화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가 예전의 상황에 맞는 익숙한 생각과 행동만 한다면 개체 뿐만 아니라 집단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은 인간의 일반 지능을 진화시켰다. 

P.329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름을 담긴다는 것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 행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든 그 사람의 마음이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훌륭한 삶을 살면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이름을 남겼다고 해서 다 훌륭하게 산 것은 아니다. 이름이 길이 남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훌륭한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존재를 남겼다. 하지만 이름도 같이 남았지. 내가 별로 존경하지 않는 이들은 이름을 남기려고 했고, 존재는 남기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은 물론 남았다. 불명예로. 이름이 남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삶의 본질적 요소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란 경험의 영역이다. 사랑을 경험하고, 아픔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경험하고, 두려움을 경험하고, 깨달음을 경험하고, 소외를 경험하고, 연대를 경험하고,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모든 스팩트럼을 누리고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로 살고 싶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삶을 누리면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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