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심톡 : 나의 읽어보기

"함께 떠나는 무의식으로의 여행"


여러분은 자면서 꿈을 자주 꾸나요? 

어떤 사람은 꿈을 자주 생생하게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꿈’. 관심을 갖고 내가 꾸는 꿈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몰랐던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한다는거, 알고 계신가요? 

꿈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지요 smile 이모티콘


10월 심톡에서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나의 꿈들을 되돌아보고 

어떤 의미일지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심리, 상담, 최면까지 관심있게 공부하신 김소연 선생님께서 스페셜 호스트로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smile 이모티콘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의 무의식, 함께 들여다 보는 특별한 시간 함께해요!






* 심톡이란?

'온전함을 회복하는 대화, 심톡'입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때 공감받고 힘을 얻습니다.

내 앞에 놓인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서로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모든 공간이 바로 심톡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함을 회복하고, 나아가 가족을 회복하고,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것.

그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저희는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대상]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들도 환영합니다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도 환영합니다

가까이에서 그냥 놀러오시는 분들도 환영합니다! 

 

[참가비 / 장소]

1인당 12,000원

- 참가비는 장소비, 음료비, 강의 준비로 사용됩니다.  

- 장소는 합정역나눔문화플랫폼 <허그인> 2층입니다. 

- 참여 방법은 https://www.facebook.com/events/1499545720371894/  이곳에서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6월 29일
내 안의 스승과 대화하다

오늘 우연히 유투브에서 ‘쿠마레’라는 다큐 영화를 보았다. 스스로 거짓 스승이 되어, 사람들에게 ‘진짜 스승’은 스스로에게서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 매우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런 수준의 다큐를 공짜로 (번역까지 되어서) 볼 수 있음에 일단 감사한 하루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만났던 몇몇 스승(이라 칭하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내가 무엇을 바랬는지도 좀 더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스승을 찾았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지만 이 ‘쿠마레’는 말한다. 그 답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다고. 나는 내면의 스승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스승이여. 앞으로 나에게 중요한 3가지 일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다. 스승이 답했다. 첫 번째. 관계를 소중히 여겨라. 가까운 관계든 먼 관계든 진심을 다하라. 두 번째. 글을 써라. 더욱 밀도 깊게, 더욱 정기적으로, 더 많은 글을 생산하라. 마지막 가르침. 그건 바로, 침묵하라. 말을 줄여라. 말하려는 스스로를 인식하라. 그리고 더 천천히 말하라. 말에 힘을 실어라. 정리하자면 이렇다. 말을 줄이고, 글을 쓰고, 관계를 소중히 여겨라. 스승의 말이 옳다. 맞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 3가지 맞다. 

쿠마레 링크


6월 30일
진욱이와 대화

오늘 오전에 오랜만에 진욱이를 만났다. 진욱이는 나와 가치중심적 성향임은 비슷하지만, 실제 행동양식은 거의 정반대다. 나는 교육쪽 관심사가 많다보니 책을 읽고, 수업을 하고, 가까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면 진욱이는 좀 더 사업가에 가깝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이제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데, 대단한 일이다. 1년 만에 이 정도로 법인을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계되어서 무언가를 벌이는 것. 어쨌든 나는 진욱이의 지난 1년간의 홀로서기가 대단해 보인다. 나를 돌아본다. 나는 지난 2년이란 시간 동안 무엇을 헌신하고 있는지. 내가 좋아서 움직이는 활동은 늘었지만, 해야 해서 하는 것들 (사업화, 마케팅, 브랜딩 등)은 분명 많이 줄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악순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일의 조화, 그것이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놓친다. 저녁엔 심톡이 있었다. 대략 지금까지 10번 넘게 진행되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다. 나는 심톡 한번 한번의 성공이나 실패 혹은 사람들의 반응보다,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는 것. 잘 하고 못 하고가 있는게 아니라, 하고 안 하고가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앞의 것들이 행동에 초점을 맞춘 거라면, 뒤의 것은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마치 작가들이 ‘글을 잘 쓰는 것’ 보다 ‘글을 매일 쓰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듯. 그리고 한가지 더. 사람들에게 나눌 만한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사람들(진지하면서도 한편 가벼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면, 의미있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 결국 핵심은 ‘적절한 사람’ 그리고 ‘적절한 주제’다. 그 두 가지가 ‘주연'이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렇게 매번 주연이 빛나게 하는 것이 앞으로 심톡의 중요한 역할이 될 듯 하다. 다음 호스트는 또 누가 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서 설렌다. 그 누구도 함께 할 수 있고, 또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으니까.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곤 한달 전에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심톡 전체 사진


 
7월 1일 
시스템 사고 교육

오늘 오전엔 인디언 계모임이 있었고, 오후에는 어린이를 위한 시스템 사고 교육을 선보이는 자리가 있었다. 진행되었던 곳은 이화여대 종합과학관이었는데,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대를 가보게 되었다. 사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건 언제나 낯섬과 설렘을 준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이대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얼마나 언덕이 많은지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았을 터인데, 그냥 무작정 지도만 보고 찾아가다보니 엄청난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날씨는 덥고, 생각보다 크기는 크고, 방학이라 그런지 물어볼 사람은 없고, 또 강의실 찾는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한참을 해메다 겨우 찾아서 들어갔다.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물배치가 아닌가. 그런 원망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ㅠ 암튼, 들어갔더니 시스템사고 교육은 한창이었다. 5-6개 정도의 게임을 통해서 쉽게 접근하도록 디자인되었더라. 워낙 미국에서 잘 개발된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나도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바로 ‘감염 게임’ 이 게임은 정말 재미있었다. 나중에 사람들 한 100명 정도 모아놓고 진행하면 대박일듯. 변수도 좀 더 다양하게 넣고 말이다. 2학기에 기회가 닿으면 한 학교 정도 시스템사고 교육 진행하면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배우는게 너무 좋은가봐. 


7월 2일 
피드백이란

어제 시스템사고 교육에서 이런 게임이 있었다. 2명이 나온다. 랜덤으로 2명의 사람을 뽑는다. 그럼 그 사람들이 다시 나온다. 다시 2명을 뽑느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나면 전체 친구도 일정하게 늘어난다. 산술급수라고 하나? 암튼 그런 식으로 매 라운드마다 2명씩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2번째 게임에선 방식을 바꿨다. 2명이 나온다. 새로 2명을 뽑는다. 그리곤 앞서 뽑은 친구를 포함해서 4명이 다시 친구를 뽑는다. 그 다음엔 8명이 뽑는다. 그런 식으로 뽑다보니 금방 모든 친구들이 뽑혔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관계를 그리자면 앞의 실험은 새로운 친구 -> 전체 친구 / 뒤의 실험은 새로운 친구 <-> 전체친구 인 것이다. 

이 둘은 확연히 다르다. 원인과 결과가 일차적 관계를 맺을 때 이를 선형 인과라고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단순하다. 예측하기도 쉽다. 10라운드가 지났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인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 이를 비선형 인과라고 하며, 이것은 복잡하다. 예측도 어렵다. 확산의 속도도 매우 빠르다. 이 둘의 차이를 만든건 무엇일까? 바로 ‘피드백 고리’다. 결과가 원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 그것이 지금처럼 가파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양의 피드백 고리, 혹은 균형을 위해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음의 피드백 고리라고 한다. 이러한 피드백 고리는 ‘시스템 씽킹’의 핵심이다. 

이 피드백 고리는 디자인씽킹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무언가를 만들고, 실제 유저에게 테스트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개선한다. 하물며 성찰이나 일기쓰기도 하나의 ‘피드백 고리’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한 행동(결과)가 다시 나의 계획(의도)에 영향을 주고, 나 자신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렇게 피드백 고리를 삶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사람은 ‘비약적으로 성장(양의 피드백)’하거나, 혹은 지나치지 않게 '균형을 잡는(음의 피드백)’다. 나는 그것을 ‘비선형적 인생’이라고 본다. 그들은 어찌 되었든 범인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간혹 피드백 고리가 없는(혹은 약한) 사람들이 있다. 같은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 이처럼 자기인식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결국 ‘선형적 인생’을 산다. 

소통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무엇이 옳은 삶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무엇이 좀 더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일지는 쉽게 예상 가능하다. 인생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뽑으라면 바로 이 ‘피드백 고리’가 아닐까.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결과를 시인하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려는 탐구적인 태도. 이 모든 것이 ‘피드백’이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이 '피드백 고리'는 '나는 모른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7월 3일
칠보초 발표 수업 - 나는 나야! 

칠보초에서 이번 1학기를 마무리하면서 대대적인 개인 발표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사실 발표 시간을 많이 갖지 않은건, 무언가 앞에 나와서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각하는 것, 함께 문제를 해결해보는 것, 협업하는 것,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한번 정도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마지막 과제로 10장의 PPT를 만들어서 ‘나’에 대해서 발표하게 했다. 주제는 ‘나, 나의 가족, 내가 잘하는 것, 못하는 것, 화날 때, 슬플 때, 기쁠 때, 10년 뒤 내모습..등등’ 다양하게 주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평소 수업 태도가 게으른 친구들도 이번 시간 만큼은 꽤 열정적으로 임했다. 다들 정말 잘 했다. 그리고 특히 개인적으로 감동했던 친구는 5학년의 선아와 민균이다. 선아와 민균이 모두 가정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둘 다 그리 친구들 사이에서 도드라지지 않는다. 민균이는 착하고 배려심이라도 많은데, 선아는 그런 편도 아니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친구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번 발표에서 둘 다 너무 잘 해줬다. 발표를 할 때 침착하게 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까지 드러낼 수 있었다. 친구들이 서로에게 준 피드백을 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발표를 잘 했다.’ 라거나 ‘진심을 말했다’라는 말이 종종 있었다. 나에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나 역시 어릴 적 한번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칭찬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한다. 목소리가 좋다는 그 칭찬을. 그런 작은 단서들이 쌓여서 지금 내가 강의를 하게 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7월 4일
와우 수업 6번째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느낀 점을 나누고 싶다. 우선, 함께 모이니 좋았다. 특히 MBTI에 대한 사전 지식 덕분에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좀 더 ‘공유된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초반에 선생님이 ‘다양성’에 대한 언급을 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가급적 다양한 성향과 성별을 모으려고 노력하셨구나.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혼란스러웠다. MBTI를 제대로 공부해 본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그리고 아직 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인지 내가 어떤 유형인지, 무엇이 더 나다운 것인지 헷갈렸다. 나 덕분에 다들 더 헷갈려하시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움이 나로썬 더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탐구할 만한 거리가 주어진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다. 이렇게 절반이 끝났다. 생각해보면 올해도, 인생도 대략 절반 정도 온 것 같다. (물론 내 인생은 좀 더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활력있는 시절은 절반 정도 남지 않았을까) 아직 뭔가 해보기도 전인데, 승부를 걸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반이나 흐른 느낌이다. 자기다움 5장면에서도 나왔지만, 나는 뭔가 지지부진하고, 이것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 그렇게 절박할 때 움직인다. 이젠 나이가 더 들었다. 더 현명해지고 싶다. 건강에 절박해졌을 때는 이미 늦다. 삶도 마찬가지다. 이젠 더 빨리 내다보고, 먼저 움직이고 싶다. 아쉬움을 뒤로 남기고 싶진 않다. 전심전력으로, 생생하게, 살아나가고 싶다. 와우도, 올해도, 내 인생도. 


7월 5일
일산 호수공원

한 차례 메르스 태풍이 지나간, 평화로운 오후다. 아내는 오늘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듯 보였고, 나 역시 그저 집에서 쉬는 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목적지는 바로 ‘일산 호수공원’이다. 서로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아내는 원래 일산을 좋아한다. 그 깔끔한 분위기. 그리고 나는 ‘알라딘’이 목표였다. 일산 지점이 예쁘다는 소식을 이미 접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우린 일산으로 향했다. 아웃백에서 맛있는 밥도 먹고, 호수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중간에 뽑기도 했는데, 아내는 엄청난 실력으로 정확히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근처 초딩들이 굉장히 부러워한다는 걸 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달아서 반쯤 버린건 함정. 어릴 적 추억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즐거웠다. 라페스타를 구경하다가, 홈플러스가서 재원이 맘마도 먹였다. 결국 마지막 종착지는 알라딘. 둥근 구조가 참 예뻤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나는 2권의 책을 구입했고, 아내 책도 하나 사주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자 하루가 다 지나갔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갈 수 있음에 행복한 일요일이라 총평한다. 



6월 22일
작가란 무엇일까

오늘 아침, 작가수업이란 책을 꺼내 들었다. 인상 깊은 구절이 2개 있다. 첫째. 글을 잘 쓰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맞다. Doing과 Being의 차이점은 생각보다 큰 법이다. 작가의 삶을 산다는 것과 작가처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작가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창조적 자아와 비판적 자아를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두번째 인상깊은 구절이다. 이것을 처음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어보니, 그리고 요즘 창조적 자아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다 보니 더 와닿는다. 어쩌면 둘 다 내 안에 있는 친구다. 내가 일찍이 잘 놀아주지 못했던 친구들. 그 친구들을 새롭게 만나고, 놀고, 친해지고, 그들과 통합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아닐까. 그러므로 당연히 작가는 글쓰기와는 좀 거리가 있다. 그렇게 논 결과가 글로 나오는 것이 책일 뿐, 굳이 책을 쓰는 것이 작가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나는 여기서 한 명의 친구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창조적 자아와 비판적 자아와 함께 놀면 좋은 자아는 바로, ‘관찰적 자아’다.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 보면서, 어떤 자아가 활동하고 있는지, 어떤 자아는 숨죽이고 있는지, 관찰하고 나에게 알려주는 역할. 즉, 깨어있기 위해선 관찰적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관찰적 자아는 서로 거리가 먼 두 자아들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내 안에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나가는 재미. 그것이 예술가의 특권이자 의무가 아닐까. 삶의 예술가가 되고 싶은 나에게도 이 사실은 중요하다.  


6월 23일
검단초 수업을 마치고

오늘 성남에 있는 검단초 수업을 마무리했다. 4학년들과 지난 3개월에 걸쳐서 5번 정도 수업을 진행했는데, 작년보다 더 재미있었다. 왜냐면, 좀 더 오랫동안 수업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아이들 한명 한명이 눈에 들어올 수 있었기에. 그리고 나 역시 새로운 수업 자료를 만들어 보고, 또 실험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새롭게 만들어 본 2개의 독서토론 주제는 ‘경쟁’과 ‘자유’다. 그것을 나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과 ‘스갱아저씨의 염소’라는 책을 기반으로 아이들과 나누었는데 꽤나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실제 이슈를 가지고 토론을 해보기까지 했으니 더욱 좋았고. 아이들의 피드백을 받아보았다. 끝나서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 중 몇몇은 별 느낀 점이 없었는지 쿨하게 “안녕히가세요”라고 한 글자씩 쓴 아이들도 있었다. ㅋㅋ 마지막 반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려는 길에 몇몇 아이들이 손을 내밀더라. 뭘 주려는지 보니 자기들이 쓰는 샤프랑 볼펜 이런걸 주는 게 아닌가. 헐. 내가 아이고 괜찮다고 너희들 써야지 나한테 주면 어떻하니. 하면서 아무리 만류하고 다시 도로 집어 줘도 막무가내로 나에게 집어넣는다. 끝까지 씨름했지만 아이들이 결국 이겼고, 나는 아이들이 주는 걸 가지고 왔다. 아이고.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참 짠했다.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나. ㅠ 

어떻게 갚아야 하나 ㅠ


6월 24일
의존성, 독립성, 그리고 상호의존성
 
근대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까먹어버려서 일어나는 착각이다. 무슨 얘기냐면, 재원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이다. 우리 아가는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다. 심지어 처음 태어났을 때는 스스로 몸을 가둘 수도 없다. 옆의 사람들이 목을 잡아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물며 그것 뿐이랴. 2-3시간 단위로 밥도 먹어야 살 수 있고, 혼자선 옷도 못 입는다. 똥이랑 오줌도 다 갈아줘야 한다. 그렇게 약 3년의 시간이 흘러야 그제서야 인간은 부모의 행동과 태도를 모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허긴 그러고도 30년 정도가 흘러서 아이를 낳을 때 쯤에 인간이 되지만. 나처럼 말이다. ㅎㅎ 이처럼 인간은 철저하게 의존적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느낀다. 아, 내가 혼자 잘나서 지금까지 살아온게 아니구나. 나 역시 철저히 의존적인 상태가 있었고 그 당시 부모님의 헌신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도 없겠구나. 지금까지도 어떤 영역에선 의존적이고 말이다. 그러한 ‘관계’에 눈을 뜨지 않으면 자신의 1/3만 보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가 말했다. 의존성을 넘어 독립성이 있고, 그것을 넘어 상호의존성이 있다고. 독립성으로 나아가야 서로의 힘을 보태서 더 큰 것을 만들어내는 상호의존성, 즉 시너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첫 시간은 철저히 의존적이었음을, 그 기간에는 충분히 의존적이어야 함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디폴트값이기에. 아침에 재원이를 보면서 느낀 점이다. 


6월 25일
에피톤 프로젝트

나는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이다. 하지만 듣는 수준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교양 있는 편도 아니다. 그저 내가 듣기 좋으면 그게 좋다. 장르는 가리지 않는다. 케이팝도 자주 듣고, 팝송도 끌리는대로 듣는다. 그런 내가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듣고 있는 가수가 있다. 바로 에피톤 프로젝트다. 몇년 전에 우연히 듣고 나선, 이후 발매되는 대부분의 앨범을 듣는 편이다. 비록, 콘서트엔 가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나와 맞는 뮤지션을 발견하고, 함께 한다는 건 기쁜 일이다. 사실 오늘은 정읍 가는 날이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오전은 자연스럽게 개인 작업 시간이 되었다. 밀린 책도 보고, 초서도 하고, 못 다 만든 강의도 손 보는 그런 나만의 시간. 나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오늘도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으니 참 좋더라. 따뜻한 햇살, 흔들리는 창가, 적당히 조용한 버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널리 홍보하지 않아도, 자신의 목소리나 생각을 꾸준히 알리고, 그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그의 결과물을 기다리고. 그렇게 새로운 결과물을 가지고 대중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창조적인 작업을 하러 들어가고. 작가나 음악가, 미술가.. 등 내가 생각하는 모든 예술가들은 일정한 흐름이 존재한다. 나도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나만의 창조적인 시간을 갖고, 결과물을 만들고, 그것으로 다시 사람들과 공유하고, 더 큰 것을 공동 창조하는 것. 그런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고 싶다. 

6월 26일
청년참 인터뷰, 디씽 교사연수 있던 날

오늘은 청년참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커뮤니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프로그램인데, 나도 한번 지원해봤다. 그래서 불광동 청년허브로 갔다. 인터뷰를 하고, 청년허브에서 일도 좀 했다. 그나마 여유있는 오전, 오후였다. 오후 늦게부턴 ‘디자인씽킹 교사연수’가 있었다. 지난 주에 미술과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어봤는데, 이번 주는 그 2번째 시간이다. 이번 주제는 ‘미술 교실’을 더 낫게 디자인하는 것! 다들 미술쪽 분야 선생님들이셔서 그런지 정말 멋진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이핑 실력을 보여주셨다. 내가 한 수 배운 느낌. 워크샵을 마치고 몇몇 선생님들이 말씀을 걸어주셨다. 한 선생님은 지난 수 수업 끝나고 오늘이 굉장히 기다려졌다는 분도 계셨고. (황송하게도) 어떤 선생님은 방학 중 프로그램을 같이 해보자는 분도 계셨다. (황송 황송) 다행히 워크샵이 좋게 느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수업을 하고도 힘이 빠지기 보다는 함께 공감하고 이야기나눌 수 있어서 더 힘이 나는, 그런 행복한 수업을 했단 생각이다. 요즘 그런 수업이 많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6월 27일
합정 메세나폴리스

오늘 오전에는 소아과 병원에 들렸다가 왔다. 재원이가 요즘 계속 응가를 자주해서 갔는데, 그래도 속 상태는 좋단다. 시간을 갔고 지켜보자고 말씀하신다. 집에 와서 잠깐 쉬었다가 오후에는 합정 메세나폴리스에 갔다. 집에서 걸어서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아내랑 평소에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편이다. 최근 유행하는 메르스 때문에 사람들이 적지 않을까 했었는데, 날씨가 좋아서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특히 메세나 폴리스는 동그란 광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벤트를 하는 편인데, 그 분위기가 참 좋다. 뭔가 가족적인 분위기. 과거에 어딘가에서 ‘둥근 구조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딱딱한, 네모형의 집’에 사는 사람들 보다 스트레스가 적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나에겐 메세나폴리스에서 그러한 ‘둥근 구조’가 주는 긍정적 힘을 느낄 수 있다. 아, 다른 좋은 예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도 있다. 다만 단점은 그렇기 때문에 길이 헷갈리기 쉽다는 점. 그리고 자주 이용하는 길 이외에는 잘 가지 않게 된다는 점. 뭐 몇 가지 단점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둥근게 더 좋다. 홈플러스에서 몇 가지 필요한 걸 사고, 망원동 미스터피자에서 피자를 먹고, 망원시장을 거쳐서 집으로 왔다. 시장을 거쳐서 오는 길에 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거의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은 꼭 재원이를 보면서 한 마디씩 하시더라. 인상깊은 말은 ‘참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장군감이다’ ㅋㅋ 지금 살이 많이 쪄서 그렇게 보이나보다. 그런 주말이었다. 재미있었다. 

참 예뻤던 우산과 하늘



6월 28일
빠르다. 일요일은. 

오늘 일요일은 여느 일요일과 좀 달랐다. 보통 4-5시에 한번 깨는 재원이는 오늘은 새벽 2시 50분쯤 깼다. 한참을 울고 불고 하길래, (아내는 몸이 좋지 않았다) 내가 재운다고 재원이를 포대기로 품었다. 새벽 3시 반이었나, 그때부터 포대기를 했는데 한참을 돌아다녔다. 재원이가 푹 잘 수 있도록. 4시 넘어서 재원이를 다시 눕혔더니 내 잠이 다 깨버렸더라. 그래서 난 오랜만이다 싶어서 책상 앞으로 갔다. 요즘 주말에는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보고 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진도가 안 나가던 차였다. 이왕 잠이 깬거 그냥 읽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7시 넘어서까지 책도 보고, 중간 중간 놀기도 하면서 개인 시간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잠이 너무 모자랄 것 같은 걱정. 8시쯤 다 되어서 다시 누웠다. 아내는 눈을 뜰려고 하고 있었고, 마치 바톤 터치처럼 나는 뻗었다. 그렇게 2시간을 더 자고 일어났다. 그리곤 뭐 1시까지 청소하고, 오후엔 책도보고 티비도 보다가, 오후 늦겐 장모님과 이모님, 형님, 아주버님과 밥먹고 들어왔더니 하루가 다 갔다. 아기와 함께 하는 일요일은 참 빠르다. 정말로 말이다. 찰나라고나 할까. 



6월 15일
디자인씽킹으로 가르치고, 나누고

아침에 원래 주정미 코치님과 미팅이 있는데, 이번 주는 한번 미뤘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갔어야 했기에. 그래야 용마중학교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 내내 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용마산역 근처로 이동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수업 준비를 하는데, 그나마 주말에 좀 쉬고 병원을 갔다 와서인지 주말보단 나았다. 그나마 감사하단 생각이 든다. 만약 평일 중에 이렇게 아팠다면, 게다가 특히 큰 강의를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생각해보니 감사할 일이다. 용마중 수업은 아쉬웠다. 내가 진행했지만, 나에겐 참 디테일이 부족하단 생각을 한다. 큰 흐름을 짚어주는 건 좋아하고, 잘 하는 편이지만, 작게 작게 아이들이 충분히 경험할 수 있게 배려하는 세심함은 나에게 잘 없는 약점이다. 왠만한 약점은 그럴 수 있지만, 이런 약점은 나에겐 치명적이다. 결국 학습 경험을 더 끌어내지 못하도록 막는 제약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성하고 다른 분들을 통해 더 배워야 할 것이다. 저녁엔 디자인씽킹 교사모임에 갔다. 지난 주에 진행한 사례를 공유했다. 나의 강의안을 가지고 강의를 하듯이 발표헀는데, 전반적으로 다들 호의적인 반응을 해 주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발표를 하면서 나의 깊이에 대한 불만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인터뷰나 관찰 정보를 가지고 그 속에서 숨겨진 통찰을 찾아내는 것이 디자인씽킹에서 중요한 부분인데, 그런 연습이나 통찰을 발휘할 기회가 많이 없었고, 또 아이들과 그렇게 진행하기엔 적합하지 않아서 넘어간 부분이 있다. 그걸 좀 보충하고 싶다. 


6월 16일
무지는 죄다. 특히 건강에의 무지는 더욱

지난 며칠이 공백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건강’이다. 허리가 아프니 아무것도 잘 되지 않더라. 건강에의 소중함은 언제나 머리로 알고 넘어가는 것. 내가 가진 크나큰 죄악이다. 죄라는 말을 정말 안 쓰는 나이지만, 이번엔 쓰고 싶다. 무지는 죄다. 멍청아. 아침에 스트레칭을 하는 습관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허리 상태가 어떤지. 어떤 운동을 주로 해야 하는지. 그런 고민을 해결해 줄 전문가 어디 없을까. 몇년 전에 알렉산더 테크닉에 관심이 있어서 본 적이 있는데, 그건 넘 비싸고. (요즘 여윳돈이 없다.) 몸살림 운동인가? 그것도 좋다고 들었는데 집이랑 멀고 (핑계도 가지가지). 1:1 PT를 받기엔 또 비싸고. 이리저리 도움을 받을 곳은 많지만, 또 마땅한 곳은 없더라. 고민 고민이다. 정말. 


6월 17일
가볍게 시작하되 깊이 있게 진행하기

인디언 모임이 있는 날. 종로 3가 뒷골목으로 갔다. 나는 처음 가보는 골목길이었는데, 꽤 좋았다. 뭐랄까. 예전에 전통 가옥들과 현대식 카페들이 잘 어우러진 느낌. 요즘 통의동, 연남동을 비롯한 골목길이 유행인데, 여기도 사람들이 꽤 몰릴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간 곳은 ‘카페 식물’이었다. 의자가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갑이었다. 첨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어느 새 자리도 꽉 차더라.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참 신기했다. 오늘 이야기 나누며, 청년허브에서 지원한다는 ‘청년참’이란 것도 신청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재미있으니 절반은 성공이다. 요즘 그 자유로움이 참 좋다. 목숨 걸고 ‘꼭 되어야 해’라는 중요성 없이, 그저 좋으니깐 가볍게 툭툭 하는 것.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서 진지함 그리고 헌신이 더 추가된다면 완벽하지 않을가. 가볍게 시작하되 깊이 있게 진행하는 것. 내가 배워야 할 지혜는 언제나 ‘중용’에 있더라. 그러니 가벼움만 쫓지는 말자. 


6월 18일
칠보초등학교 수업 이야기

칠보초 수업 이야기를 좀 하자. 오늘 3학년 선생님이 수심 깊은 얼굴로 나에게 물어봤다. 수업 태도가 어떠냐고. 분명한 건, 그리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 보다는, 내가 편하고 좋은 쪽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때쓰고, 고집부리기 선수들이 많다. 초등학생 3학년들과 이렇게 오래 수업을 해보는 건 나도 처음인데, 사실 어떻게 다뤄야할지 어렵다. 꾸짖는 것도 조심스럽고, 그렇다고 계속 좋은 말로 하면 수업이 나아가질 않는다. 담임 선생님도 같은 고민을 하고 계셨다. 어렵다. 4학년들은 지금 수업을 조정 중이다. 함께 하는 작업 보다는 개인별로 하는 쪽으로. 아무래도 이 아이들에게 협동학습은 아직 시기상조다. 아무리 함께 하는 것을 강조하는 나라지만, 아이들 상태를 반영하지 않는건 내 고집일 뿐이다. 확실히, 개인 작업으로 돌리니 수업 분위기는 좋아진다. 아이들의 마음을 듣고, 가슴을 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수업했다. 오늘 주제는 ‘내 인생의 최고의 장면’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성찰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그나마 좋았다. 오늘 마지막은 5-6학년 수업. 지난 주 프로젝트 과제를 주었고, 오늘 발표를 했다. 발표를 들었는데 꽤 잘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로 ‘발표’다. 발표를 못해서? 아니다. 발표를 너무 잘 해서다. 아띠의 잔재가 남아있더라. 아이들이 발표 수업을 좋아하고 잘 하는 건 좋지만, 활동보단 그것에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아서 아쉬운 소리를 좀 했다. 돌이키면서 바로 후회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아이들에게 잘 했다는 칭찬이 박할까?” 자괴감에 빠진다. ㅠ

6월 19일
오랜 벗들과 마주하는 즐거움

오늘은 오랜만에 그간 못 봤던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보지 못하거나 멀리 있어도, 비슷한 가치로 살아가는 분들은 나를 ‘벗’이라 부르고 싶다. 다들 나의 ‘벗’이다. 오전에는 이코치님을 만났다. 원래 올해 초에 한번 뵙기로 했는데, 재원이 태어나는 시기랑 겹쳐서 못 봤었다. 꾸준히 훈련하시고, 또 공부하시는 코치님이라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요즘엔 한 분의 선생님께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하셨는데, 나도 아는 분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삶에서 ‘고수’ 혹은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는데,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연결되는 경험은 중요하다. 나 역시 한창때는 언제나 스승을 찾아서 돌아다녔고, 지금도 그 여정은 지속되고 있다. 올해는 인연이 닿지 않겠지만, 내년 혹은 내후년에는 나도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 다음에 만난 선생님은 예전에 토론 수업 같이 했던 쌤인데, 오래만에 다시 교육으로 복귀하셨다고 해서 만났다. 지속적으로 독서 및 토론 쪽으로 관심 갔고 계시더라. 그리고 역시 든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피해서 돌고 돌아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되어있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과 관련된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한다면 언젠가는 그 빛을 발할거라는 것.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어쨌거나 저쨌거나 교육이란 필드로 들어와서 몸을 비벼대는 것이니까. 그 결과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나의 기쁨을 따르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 어쨌든 삶은 살아질테니.


6월 20일
비오는 토요일, 카페에서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아내가 일하라고 시간을 줬다. 요즘 일이 좀 밀렸다. 수업 준비하고, 수업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다 보면 ‘기획서’를 작성할 시간이 항상 부족하더라. 2개 정도 써야 하는데 쓰질 못 하고 있어서, 오늘은 아침부터 카페로 갔다. 아내의 배려가 고마웠다. 합정 근처의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랬더니 밖으론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게 들어왔던 것이지. 카페에서 밖으로 비 오는 걸 쳐다볼 때 (밖의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참 기분 좋을 때가 있다. 오늘도 그랬다. 사람 구경도 하고, 비도 보고, 밀린 일도 하고. 비가 와서 좋았던 이유는 더 있다. 바로 가뭄 때문이다. 요즘 산천이 물이 부족해서 난리란다. 우리나라도 물부족 국가가 된지 오래라고 하던데, 그에 대한 인식은 나를 포함해 아직 멀어보인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 사대강 사업을 벌렸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 효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처참하다. 물 부족과 관련해서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해 보인다. 내가 관심있게 봤던 프로젝트는 ‘빗물’을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다. 각 빌라나 아파트 위에 모두 빗물을 받는 통을 만들고, 그 빗물로 어느 정도 생활용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그것을 법으로 규정해서 만들면 초기 비용은 많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론 이득일텐데. 암튼 그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하루다. 


6월 21일
프로듀사의 날

프로듀사의 날이었다. 아내와 내가 요즘에 함께 보는 거의 유일한 프로다. 아, 삼시세끼와 복면가왕도 즐겨 보는 편이지만, 드라마를 함께 본 기억은 거의 유일하다. 원채 티비를 잘 안 보는 편이긴 했지만, 금요일 밤은 편히 쉬자는 주의여서 보게 되었다. 오전에 청소를 마치고 오후부터 지난 11편과 12편을 이어서 봤다. 그냥 말로는 ‘봤다’라고 하니 편하게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런 건 아니다. 아직 돌도 안 된 아가랑 무언가를 한다는 건 언제나 상상 이상의 노동력과 수고를 요한다. 사실상 드라마 반, 재원이 반 봤다고 보면 된다. 하도 침을 흘려대서 침 닦아주고, 조금 보채면 안아주고, 토닥토닥 거려주고. 그러면서 주말을 보내면 언제나 시간은 쏟살갔다. 프로듀사는 재미있었다. 12편이었나. 송해 할아버지가 나와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35년을 했지만, 나도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고. 그저 좋아서 한회 한회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라고. 맞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가야한다. 그저 한번 한번 좋아서 하면 된다. 그래서 그 순간 순간의 즐거움이 중요하다.  



6월 8일
그것은 진짜 다룰 만한 문제인가? 

월요일. 나는 일반 직장인이 아니기에 월요병은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미팅을 갔다. 이번 주가 좋은 건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에겐 아주 꿀맛 같은 한주가 될 것 같다. 오후엔 용마중 수업이 있었다. 포인나인의 손민희 쌤이 특강을 진행해 주셨는데, 아이들도 잘 해 주었다. 다만 한 가지 고민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것은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주변의 불편함이나 고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공감하는 것, 그런 것들을 전하기란 참 어렵다. 디자인씽킹에서 핵심은 이것이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그것이 진짜 문제인지, 그리고 내가 정말 다루고 싶은지? 그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 답이 어렵다. 내 삶에 적용해봐도 그렇고. 나 역시 관심이 한정적인 편이라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면 완전히 무심하니 말이다. 그 고민은 쭉 계속 될 것 같다. 


6월 9일
디자인씽킹 교사연수 진행하다

오전에 검단초에서 수업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메르스 때문에 휴교를 하느냐 마느냐. 아주 여기저기서 난리다. 결국 검단초는 일단 휴교하지 않는 걸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나도 사람들이 모여야 뭔가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타격이 있다. 다음 주 시흥에서 진행할 예정이던 강의는 연기되었다. 암튼 그랬다. 수업이 끝나고 디자인씽킹을 활용한 수업과 관련해서 교사연수가 있었다. 창덕여중 근처 스타벅스에서 머물면서 일도 하고, 수업 준비도 했다. 저녁에 있었던 교사연수는 좋은 경험이었다. 중요한 것은 디자인씽킹이 아니라 디자인씽킹을 내 수업에서 어떻게 적용하느냐인데, 나름대로 내가 적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생님들도 많이 공감하시는 느낌이 드셨고, 특히 몇몇 선생님들은 이제 감을 잡으셨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족한 시간덕에 마무리가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하면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니체와 함께 한 하루

오늘은 청년허브에 놀러왔다. 그리고 그저 내 관심과 흐름에 따라서 주욱 공부하고 있다. 오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간단히 보면서 생각해보고, 집에서 가져 온 <30분에 읽는 니체>를 보면서 생각을 나름 정리하고 있었다. 강신주 박사가 니체와 관련해서 했던 강의도 찾아보면서 오늘은 니체를 만나고 있다. 일은 잠시 뒤로 미뤘다. 무언가 일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공부하던 기억이 최근에 드물었는데, 오늘은 그래서 의미있는 날이다. 즐겁다. 니체 옆에 앉아 있던 쇼펜하우어도 잠깐 만날 수 있어서 더 즐거웠다. (…) 하루를 마무리 했다. 오늘을 점수로 매긴다면 6점이다. 10점이 아닌 이유. 게임, 게임, 게임. 아까 글을 쓸 때만 해도 8-9점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게임방송을 본다거나 하면서 완전히 놀아버렸다. 그나마 0점이 아닌 이유. 니체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팩스를 보냈다. 나름 회의도 하고 글도 썼다. 마무리 짓지 못해서 그렇지. 하지만 이건 불만스럽다. 


6월 11일
어린 시절과 이른 아침은 내 삶에 결정적이다

어제 뭔가 불만스런 것들이 있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책을 보고, 생각하고, 또 책을 보고 연결짓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그랬더니 다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순간 순간 구성된다. 나라는 자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특히나 지금처럼 수 많은 정보가 교차하는 시대에는 더욱. 나는 일어나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정보가 중요하다. 마치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처럼. 일어나자 마자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금물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에게 TV를 틀어주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일수록, 이른 아침일수록 정보에 민감하기에, 편향성도 강하다. 아침에 스마트폰을 만지지 않았다. 그리곤 책을 쥐었다. 저자의 다양한 생각들이 내 머릿 속을 지나간다. 그리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걸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그리고 글을 쓰고, 또 쓴다. 무언가 풀리지 않던 것들이 해소된다. 그래, 이게 나의 삶이다.  


6월 12일
읽고 쓰고, 나누는 것, 그것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나다. 

오늘 11시에 와서 니체에 대한 글을 마무리했다. 마무리 한 시간이 결국 4시 20분. 하루를 꼬박 썼다. 사실상 수요일에 한 작업과 다 합치면 10시간은 쓴 글이 아닐까. 왠지 그저 하나의 시험을 친 느낌이다. 기분이 시원하면서도, 찝찝한 그런 느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감은 꽤 있는 편이다. ‘포트폴리오 인생’을 읽다가 찰스 핸디가 받은 첫번째 에세이 주제가 떠오른다. 그는 옥스포드대학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그가 처음으로 받은 에세이 주제는 바로 ‘진리란 무엇인가?’이다. 그걸 3000자로 정리해서 갖고 오라고 했다는데, 얼마나 많은 공부와 생각을 필요로 했을까? 대학을 부러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옥스퍼드 대학은 나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만약 내가 그 어린 시절에 그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해보면 그저 지나가버린 시간 같아서 아쉬울 때가 많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쌓아야 한다. 분명 나에겐 이런 경험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 지금부터라도 내 시간을 할애해서 이렇게 쓰자. 마치, 대학교 에세이를 쓰는 것 처럼. 읽고 쓰고, 나누는 것. 그것 말고 어떤 다른 일이 중요한가? 이제 와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지 않은가? 

6월 13일
건강이 무너진 날

처음으로 탈이 났던 날. 일어나자 마자, 느낌이 싸했다. 사실 어제부터 앉아서 글을 쓸 때 허리 쪽에서 종종 전기가 짜르르 흐르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한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번은 패턴이고 습관이다.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시 돌아봤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절대적으로 ‘앉아 있는 시간’ 때문일 것이다. 나는 거의 앉아있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경우도 많다. 육체적인 활동으론 걷기 말고는 없는 편인데, 의사 말로는 허리엔 걷기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단다. 지금 내 허리는 일자허리라고 한다. 심해지면 디스크가 되는. 너무 부끄러웠고 무력했다. 허리가 아프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내도 유일하게 주말에 나에게 의지하는 편인데, 나도 아프고 재원이도 장염 때문에 속이 아픈 상태라 너무 힘들어했다.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내 신세도 처량했고. 나는 참 멍청하다. 가장 중요한 걸 나는 왜 이리도 쉽게 무시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주말이다. 

6월 14일
프로듀사를 보면서

허리가 쉬이 낫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서 계속 기어다니고 있다. 그나마 걷는 것 보다, 기어다니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고양이 자세도 많이 하라고 했다. 그나마 하나 활동이 있다면, TV다. 요즘 아내와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프로듀사’가 그것이다. 드라마라는 것, 스토리라는 것이 대단한게, 유연히 1회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꾸준히 보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시작을 안 하는 편인데, 또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 것 같다. 사실, 별에서 온 그대를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박지은 작가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드라마를 보고 있다. 헌데 상당히 재미있다. 4명의 주인공들의 러브라인도 꽤 재미있지만, 나에게 더 재미있는 것은 예능국 일상과 러브라인 그리고 제목과의 연결점이다. 내가 워낙 의미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그런 것이 잘 보였다. 예를 들어, 결방의 이해라는 편에선 실제로 러브라인에서의 결방 (차태현의 결방 프로그램이고 김수현의 파일럿 프로그램인듯)으로 연결 짓고, 또 그 곳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집어넣는 구성이 반복되는데 꽤 재미있게 보고 있다.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서로 연결짓는 것. 그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는 것. 나의 강점과 갈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2015년 봄, 성남 검단초등학교 아이들과



6월 1일
나는 무엇을 얻는가? 나는 무엇을 얻게 하는가?

새로운 한주다. 지지난주까지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다가, 아마 허리를 다친 이후에 멈췄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일어나서 으샤으샤 열심히 운동했다. 오늘 중으로 할 일이 꽤 많았다. 그래서 틈틈히 시간을 내서 일하고자 한다. 오전에는 주정미 코치님을 만나서 질문에 대한 연구 및 스터디를 진행했다. 기억에 남는 질문 2개. 나는 여기서 어떤 유익을 얻어가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중요한 사람인가? 참 좋은 질문이다. 심플해서 좋다. 첫 번째 질문은 다들 하는 질문이지만, 두 번째 질문은 색다르다. 사실 이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교육에서 우린 배웠다고 느낀다. 디자인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이후 용마중 수업을 갔다. 첫 시간이 비교하면 일취월장한 실력들이었다. 5달러 프로젝트를 발표했는데, 인상깊었던 활동은 3가지다. 첫 번째는 지난 번에 이미 예산을 다 사용해서, 이번에는 예산 없이 그저 매일 매일 친구들을 칭찬해주는 팀. 돈과 가치는 그리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두번째로는 선생님들께 편지와 함께 커피를 건낸 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교장선생님께도 전달하고 같이 사진도 찍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론 친구들에게 사탕과 편지를 나눠준 팀. 사탕만 나눠주니 피드백이 별로 였지만, 편지와 함께 나눠주니 너무 좋았단 그 메시지 자체가 좋았다. 그렇다. 가치는 언제나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 그곳에서 가치가 출현한다. 나도 많이 배웠다. 

6월 2일
토론, 생각하게 한다는 것. 

오늘은 검단중에서 새로운 독서토론 컨텐츠로 진행했다. 나름대로 철학 토론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참 재미있었다. 아이들의 상상력도 좋았고. 특히 하브루타 형식으로 둘이 1:1로 토론하는 것이 좋았다. 다들 활발하게 토론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엔 홍대로 왔다. 저녁에 인문학 강의를 듣기 위해서 미리 왔는데, 오랜만에 블로그에 포스팅도 하고, 강의도 듣고, 또 이런 저런 생각도 했다. 이렇게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현재를 붙잡자’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최근의 헤이한 모습과도 이제 결별이다. 배고프다. 저녁을 먹고 강의를 들으러 가야겠다. 기대 기대 중. 

6월 3일
삶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다시 배움을 얻기

연남동 인디언 모임과 당산서중 디자인씽킹 수업이 있는 날. 오늘 오전은 연남동에서 보냈다. 지난 번에 이어서 다양한 주제들이 오고 갔는데,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각자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 자체 만으로 많은 도움을 얻는다. 아직 학습조직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흐름이 나쁘지 않다. 즐겁다. 당산서중의 경우 이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4팀이 있는데 각자 주제는 다양하다. 비흡연자를 위한 팀, 스마트폰 중독자를 위한 팀,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팀, 왕따 문제 해결을 위한 팀. 특히 왕따 문제는 참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음 수업까지 텀이 길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아이들이 잘 해올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무지 기대된다. 

6월 4일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칠보초 수업이다. 2주 만에 정읍에 가는 날이라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간단한 수업 리뷰를 해보자. 3학년 수업. 요즘 가장 어려운 수업이다. 3학년들을 장기간 가르쳐 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헤매고 있다. 사실 진짜 문제는 그 중의 몇몇 아이들이다. 감정기복이 너무 심해서 수업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경우, 타일러도 윽박질러도 안 된다. 4학년과 3학년에게 내가 뭔가 인지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그들의 감정부터 먼저 작업해야 겠단 생각을 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기 때문이다. 5,6학년은 잘 진행되고 있다. 어려움은 좀 있지만 그래도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위 내에 있고, 아이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 아이들과는 앞으로 디자인씽킹 수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3,4학년은 따로 진행해야 겠다. 집에 가서 미술을 활용한 방법을 알아봐야 겠다. 

6월 5일
메르스로 인한 수업 환불

오전에 신촌에 갔다. 아내가 원래 수업을 듣기로 했는데, 그 강좌를 환불하기 위해서. 사실 요즘 메르스 때문에 난리다. 특히 애기엄마들은 혹시나 모를 위험 때문에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 나도 안타깝다. 어쨌든 나도 사람들과 함께 모여야 뭔가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강의들이 취소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많다. 생각해보면 나는 문제도 아니다. 진짜 힘든건 문화, 예술, 공연 분야일 것이다. 안 그래도 일년에 몇번 할까 말까 하는 공연을 이런 일로 그냥 날려버리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작년에도 세월호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올해는 메르스까지.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에효. 암튼 그랬다. 오늘 오후엔 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이라 그런지 영 집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봤다. 아내가 날 배려해 준다고 재원이 데리고 친정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난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지 못했다. 에효. 왜 이럴까. 나는. 

6월 6일
재원이랑 하루 종일 놀다

최근 들어 가장 편안한 토요일이다.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토요일. 내가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이 별로 없어서, 아내는 기분 좋아했다. 나 역시 별다른 일정 없이 그냥 쉬는 것이 좋았다. 쉰다고 표현하기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실 거의 재원이와 시간을 보냈으니. 누군가에겐 스트레스 받는 것일수도 있지만, 나는 재원이랑 노는 건 그냥 재미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논다. 특히 요즘에는 서있는 것을 곧잘 한다. 모유를 먹어서 그런지 두 다리도 튼실하고, 서 있어나 엎드려 있으면 고개도 빠빳하다. 오늘은 넘 꼬부기를 닮은 모습이 귀여워서 영상도 많이 찍었다. 나중에 크면 보여주고 싶다. 얼마나 귀여웠었는지 본인은 알까. 독서축제를 위해서 노트북을 좀 보고, 책을 좀 보고, 한 것 이외에는 거의 재원이와 시간을 보냈다. 아내도 좀 쉬게 할 겸. 저녁에는 오랜만에 치킨도 시켜 먹었다. 지금까지 연애기간을 합쳐 7년을 함께 지내면서 치킨을 시켜 먹은 기억이 3번 정도 된다. 그 중의 하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ㅎㅎ 

6월 7일
온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오늘 오전에 독서축제 제출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의 책의 분량이 워낙 많았기도 했지만, 나의 게으름과 기만도 한몫을 했다. 이렇게 보내지 말자고 마음먹인지 일주일이 되지도 않았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게 인간인가. 아니다. 인간이란 보편성으로 회피하려 하지 말자. 이것은 나의 문제이자, 개인의 의지력일 따름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원인을 복잡하게 돌리면 돌릴 수록 답은 불분명해진다. 답은 단순한다. 하기로 한 것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온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온전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되는 일이 없다. 회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시 말한 것을 하는 것.  






저자조사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교육공동체리더십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강의수련 활동을 벌여온 그를 사람들은 교사의 교사’ 또는 위대한 스승이라 부른다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명으로 선정되었으며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많은 이들을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승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책에서 파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고백과 통찰력으로 인생의 좌절과 성공나약함과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페이지마다 넘치는 특유의 부드러운 유머와 따뜻함으로 진정한 자기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그 길을 안내한다저서로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낯선 사람과 함께하기>,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등이 있으며잡지 <커몬빌> <크리스천 센추리>작가상을 수상했다고등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교육출판연합과 사립학교협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1장.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 분리되지 않은 삶
- 나는 온전해지기를 갈망하나 분리가 오히려 손쉬운 선택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어떤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와 내 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지만,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좋은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의 재능을 억합한다. 아니면 나쁨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17
+ 분리는 쉽다. 아니다. 분리는 더 익숙하다. 그 표현이 맞겠다. 우리는 분리를 권하는 사회에서 자랐다. 사회는 온전한 자를 원하지 않는다. 온전한 자는 사회와 대립한다. 왜냐? 그는 통제되지 않는다. 온전한 자들은 자신의 기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로부터 나온 권력을 틀어쥔 사람들은 외부의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분리를 권한다. 서로 싸우면 통제하긴 더 쉽기 때문에. 지금 영호남이 그런 구도가 아닌가. 그래서 우린 더욱 온전함을 회복하면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일깨워 나가야 한다. 나부터.  

- 나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른다. 주위 사람들 역시 그 대가를 치른다. 이제 그들도 내 분리된 삶 탓에 불안한 길을 걷는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의 온전함을 무시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온전함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곘는가. 17
+ 내가 나의 온전함을 무시하는데 다른 사람의 온전함은 소중히 여길 수 없다. 이 말은 계속 곱씹게 된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내가 나의 아이를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아이도 무시할 수 있다.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무시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출발은 ‘나 자신과의 관계'다.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결국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정답은 이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다면, 나를 먼저 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배움으로 이끌고 싶은 나는 결국 가장 배움을 좋아해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한다. 

-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18
+ 내 삶은 완벽해질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완벽하다’라는 말에 저항이 있다. 자연을 예로 들어 보자. 자연이 완벽한가? 아니다. 자연은 그저 역동하고, 순환한다. 어떤 완벽한 생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의 죽음으로 서로를 살리고, 어디선가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선가 균형을 다시 세운다. 하나의 상태에 이르는 순간은 오로지 죽음 뿐이다. 자연은 멈춤이 없다. 그렇기에 완벽한 상태라는 것도 없다. 완벽하다는 것은 그래서 나에게 ‘죽음’으로 들린다. 개인적으로 ‘완벽한 이미지’ (예를 들면 이데아나 전형적 의미에서의 천국)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생태계가 가장 좋다. 그 안에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고, 혼란과 질서도 역동한다.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이다. 삶의 반댓말은 멈춤이고, 죽음이자, 완벽함이다. 

- 우리는 십대와 이십 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두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21
+ 예전에 하버드 교수가 했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는 수 많은 똑똑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하지만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 아무리 똑똑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월스트리트로 건너갔고, 자신들의 탐욕에 의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역들이 되었다. 세상을 주무르고, 조종할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한 지식은 오히려 그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것에 되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리라. 굉장히 공감했다. 나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뜻은 균형을 놓치기 쉽다는 뜻이니까. (다 갖춘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으니, 편견을 가지고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더라) 

- 분리되지 않은 삶으로 계속 나아가길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난관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 우리는 자기기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24
+ 분리되지 않은 삶을 위해선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말. 나는 이 말에 절절히 공감했고, 파커 파머의 펜이 되었다. 내가 20대 중반에 하나의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도 그것의 힘이다. 그 위험성도 함께 보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결국 ‘리더’가 중요하다. 이 언급은 나중에 다시 하련다. 

2장. 분리의 벽을 넘어서: 영혼과 역할의 만남
-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는 데 몰두하면서 영혼과 접촉을 끊고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그 비용은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 내면의 빛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세상의 빛이 내면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내면의 어둠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위험한 장소로 만든다. 거짓과 투사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므로 고독해진다. 30
+ 지금 나는 거짓과 투사로 이루어진 관계가 드물다. 공적 관계로만 일하는 범위를 많이 줄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요즘은 거의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과 일한다.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과 만나서 함께 하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학교, 학과, 자격증, 학위증 등등. 나는 전자공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교육쪽 관련해서 어떤 자격증도, 학위도 없다. 간혹 그런 사람들도 만난다. ‘강의를 맡기고 싶은데, 석사 이상만 가능한 조건이네요.’라고. 나는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 양이 줄어간다. 하지만 질은 더 깊어졌다고 느낀다. 고독감도 훨씬 덜 하다. 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것이 발각되는 순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바로 잡고자 노력한다. 관계라는 것는 고독지향적인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실마리는 찾았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그것에 반응이 있으면 관계한다. ‘삶의 이야기’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서류부터 요구하는 사람들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그냥 그것이 편하다. 

- 우리는 날마다 가족, 친지, 친구, 낯선 이들과 만나면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실제 모습인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우리를 보면서 같은 의문을 품는다! 31
+ 요즘 나는 그렇다. 약간의 촉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은 불완전한 촉수이지만, 약간 발달하고 있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간격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나이가 들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직접 경험’의 탓이 클 것이다. 그 감각은 아주 동물적인 감각이라, 이론이나 사례로 발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서 운전하면 처음에는 앞뒤좌우 간격을 알지 못한다.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옆면을 확 긇히는 것이다. 그러면 동물적으로 그 미묘한 간격이 뇌에 박힌다. 다음에 그 정도 위치에 닿을 것 같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 부딪칠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확’ 당해본 사람은 다음에 그런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몸’이 반응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를 지배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그 비슷한 인간 유형을 보면 요즘은 잘 반응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믿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 분리된 삶이 유행병처럼 퍼져 있으나 언제나 온전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온전한 삶을 살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33
+ 이런 궁극적인 진리를 이렇게 쉽게 말하다니! 중요한 것은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냐는 질문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친절하게 그 해답도 말해주지만. 

- 분리된 삶은 상처 입은 삶이다. 영혼은 그 상처를 치유하라고 계속 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면 술과 약물, 일과 쇼핑, 분별없는 대중매체 같은 마취제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분리된 채로 살면서 고통을 깨닫길 원치 않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마취제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개인에게는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분리된 삶이 사회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6
+ 사회는 다양한 마취제를 제공한다. 주말 저녁에는 예능을, 평일 저녁에는 드라마를, TV를 안 보는 사람들에겐 스포츠를, 낚시를, 다양한 취미들을. 끊임없이 제공되는 기본 옵션 이외에도 추가 옵션이 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에는 야근을,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회식을, 주말에는 추가 근무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렇게 폭 넓은 옵션의 마취제에 취해서 삶을 산다. 아니 살아진다. 그 중에서 나는 가장 치명적인 마취제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다른 것들에 비해서 '일’은 너무나 긍정적인 활동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거든. 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면 이 일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에 빠진다. 그 중독은 매우 강해져서, 나중에는 마치 자신이 이 회사에, 이 사회에, 이 국가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 사회라는 메트릭스를 유지시키는 가장 큰 배터리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고. 나는 그래서 ‘분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미디어를, 언론을, 사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작년부턴 왜 이리 소수 민족들의 삶이나 아나키즘에 관심이 가는지 모르겠다. 에효. 요즘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 생각이 많아진다. 그만 하자. 

- 사회 제도는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을 벌할 때가 많다. 누구나 ‘온전한 삶’을 살면서 처벌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거짓된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면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 우리의 삶에 미치던 제도의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37
+ 우리가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면 우리의 삶에 미치던 제도의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라는 문장을 가장 잘 설명하는 건 ‘메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이다. 네오는 진실에 눈을 떴고, 요원들은 총을 쏘았다. 하지만 네오에게 이것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가 권력과 힘이 있다고 믿을 때 그곳에는 권력과 힘이 있다. <왕좌의 게임>이란 드라마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중간에 바리스와 리틀 핑거가 하는 대화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권력은 사람들이 그것이 있다고 믿는 곳에 있습니다.” 맞다. 권력은 우리가 그곳에 권력이 있다고 믿는 곳에 있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 속에 살고, 그 제도의 암묵적 동의자로서 우린 ‘대통령’에게 권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난다. 또 다른 예로, 대부분의 우리는 지금 ‘돈’에 권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돈’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돈에, 사회적 압박에,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권력이 어디에 있다고 믿을까? 그래서 과거 김어준 충수는 이런 말을 했다. “쫄지마 씨바” 권력에 쫄지 않으면, 그 사람이 권력이 된다.

- 물론 홀로됨은 개인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또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영혼과 역할을 다시 결합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하다. 
+ 인간은 자기기만의 동물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한 때 내가 가진 생각들이 굉장히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창의적인 사람이란 착각에 빠졌다. 책을 몇 권 보지도 않고, 충분한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혼자 생각을 오래 하면 그렇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내가 빠졌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들을 만나면서 내 얼굴을 붉어졌고, 내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그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피터드러커가 했던 말 중에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말이 있다.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 ‘소외된 기업은 소멸한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 믿는다. 사람도 그렇다 ‘소외된 사람은 소멸한다.'

-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커뮤니티를 나는 ‘신뢰의 서클’이라고 부른다. (…) 내가 펜들힐에서 경험한 신뢰의 서클들은 내적인 탐구를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는 커뮤니티로서, 두 가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첫째는 누구나 자신 안에 내면의 교사가 있고 그것의 안내가 이데올로기, 집단의 신념, 제도, 지도자들의 안내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이들과 교류하면서 내면의 교사가 하는 말을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43

-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신뢰의 서클을 이루는 원칙과 실행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를 결코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내면에 지닌 두려움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주위에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45

- 나는 나의 좋은 자아가 드러나고 내가 진정으로 나 자신일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내 안에 이와 같은 안전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기쁨과 고통을 나눈 적이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47

- 먼저 그 밑바탕에 놓인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두 원칙이란 ‘영혼 또는 참자아가 실재하며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영혼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안전을 느낀다’는 것이다. 
+ 이 책에서 언급되는 신뢰의 서클은 내가 마음 속으로 꿈꿔왓던 모습이었다. 서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여는 곳. 그것은 강한 믿음이 기반되었기에 가능하다. 그 믿음이란 바로 ‘내면의 안내’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그 믿음이 굉장히 굳건하다. 내 안에는 분명 나를 바로잡아주는 스승이, 목소리가, 메시지가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육아’를 꼽는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을 통해 ‘세계관’이 형성된다도 믿기에.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안전한 관계’ 역시 아이가 처음 맺는 부모와의 관계와 오버랩된다. 모든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안전하다고 믿으며, 그 믿음 안에서만 세상을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신뢰의 서클의 시작은 ‘육아’라고 믿는다. 건강한 육아를 통해 영혼이 보존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다시 보존시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승전육아. ㅋㅋ

3장. 참자아 찾기: 영혼의 암시들
- 우리 문화의 두 흐름이 이러한 영혼의 무관심에 기여한다. 하나는 인간 자아를 위한 어떤 창조적 핵심도 없는 사회적 구조로 여기는 ‘세속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모든 관심을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도덕주의’다. 세속주의와 도덕주의는 반대되는 것 같으나, 그 둘은 모두 참자아를 부인하도록 이끈다. 54
+ 세속주의는 앞서 말했던 맥락과도 비슷하기에 패스. 도덕주의는 아마 청교도 정신이라든지, 이성을 앞세운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허긴 한창 인간의 합리성과 계몽주의를 앞세웠을 때는 그것이 인간을 위한 바른 길이라고 믿었겠지. 세속주의는 ‘참자아가 아닌 이기적 자아’를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고, 도덕주의는 ‘참자아가 아닌 이타적 자아’를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참자아는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일 뿐. 그리고 이기성과 이타성을 자신의 삶에 맞게 균형있게 추구할 뿐. 

- 참자아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참자아를 부인하며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데서 나온다. 이는 내가 우울증을 겪으면서 깨달은 교훈이다. (…) 내게 우울증은 여기서 멈추고 되돌아가, 뚫고 나아갈 수 잇는 다른 길을 찾으라는 영혼의 외침이었다. 55-56

-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이 사라지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것이 뉴에이지의 나르시시즘의 책임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를 고립시켜 불안하게 만드는 대중 사회, 인간의 권리보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경제 체제. 시민들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 과정이 우리의 도덕적인 무관심을 낳는 외부 원인들이다. 이런 것드이 고삐 풀린 경쟁, 사회적인 무책임, 빈부 격차를 가져오고 부추기는 세력들이다. 58
+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보살핌이 사라지는 것에 가장 큰 책임은 ‘경쟁과 빈부 격차’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및 세속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에선 뉴에이지가 책임이 적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말에 반박한다. 누구보다 뉴에이지를 좋아했고, 흠뻑 빠졌던 나이기에. 반박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내가 보는 뉴에이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3가지다. 첫 번째. 너무 나를 강조하는 <유아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뉴에이지에 따르면 이 세상에 진리는 없다. 그렇기에 나 이외에 모든 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나’ ‘나’ ‘나’만 강조한다. 나의 행복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란 이상한 논리가 생긴다.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음을 간과한다. 두 번째. 긍정을 너무 강조한다. 부정적인 것에 힘을 주면 그것이 커진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온 책이 <긍정의 배신>이지 아마. 나는 부정적인 것들을 오히려 직면하고 직시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뉴에이지의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허용, 수용, 포용을 강조하고, 나를 사랑할 것을 반복한다. 물론,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던 누군가에겐 뉴에이지는 좋은 처방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수용과 허용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든다.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선 싸울 필요도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지금 경남 도지사가 무상 급식을 중단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분노해야 할 상황에선 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런 의미에서 뉴에이지는 적잖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본다.  

- 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정체 경제적 세력에 의해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자아감 결핍 증후군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참자아에 대한 의식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커뮤니티 안에서만 자아를 주고받고, 귀 기울이며 말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약해지고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자아는 위축되고 우리 자신과의 접촉도 약해진다. 59
+ 진실한 대화를 위한 커뮤니티가 사람들을 살리고,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이 시스템과 구조에 대항한다. 다시 말하면, 우린 서로 싸워선 안 된다. 우리의 적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유일한 적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구조와 시스템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권력’에서 다시 우리의 몫을 찾아봐야 한다. ‘권력’을 되찾는 방법은 내적 권위에 힘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내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뭉치고, 권력이 휘둘리지 않을 때 우린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본다. 아, 오늘 내 글이 왜 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것은 내가 과거에 사회 변화에 눈을 감고,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반성이자 분노가 커서 그럴 것이다. 나는 약 10년에 가까운 시절 동안 사회에, 주변 사람들에 무관심 했다. 그랬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후회가 아직 남아있다. 앞으론 좀 더 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나 다운 삶을 권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 아이를 비롯한 앞으로 자라날 2세들을 위해서도.  

-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참자아를 벽으로 둘러싸야 할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간단히 말해, 나는 실제 모습보다 더 똑똑하고 더 거칠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나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내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벽이 필요했다. 그러나 낯선 이들에게 감춰진 자아는 곧 가까운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65
+ 내가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썼던 방법은 바로 ‘모든 상황을 뛰어넘은 듯한’ 가면이었다. 실제의 삶과 동 떨어진, 하지만 조금은 고급져보이는 텍스트를 가까이 하려고 애썼고, 그것도 귀찮으면 온라인 게임의 세상을 도망쳤다. 그러면 나는 나만의 안전한 공간을 어디서든 만들 수 있거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영역으로 도망간 가다보니 결국 벽에 부딪쳐 직면하게 되었고. 그때의 나는 참 벽이 두터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오만함과 방자함이 가득했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차가웠다. 진짜 바보같은 놈. 온몸을 던져서 살아본 경험도 없는 녀석이 뭣도 모르고 까불었던게 왜 이리 부끄러운지. 

- 벽 뒤에서 살다 보면 적어도 세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첫째, 내면의 빛이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을 비출 수 없다. 나는 젊은 교수였을 때, 종신재직제도의 압력에 굴복하여 참자아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건 교사의 소명을 저버린다는 걸 뜻했다. (..) 둘째,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세상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비출 수 없다. (..) 셋째, 우리가 벽 뒤에 살면 우리와 가까운 이들은 우리가 무대 위 모습과 무대 뒤 실제 모습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관계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다. 66-67
+ 아. 이 글은 너무 좋아서, 무언가 덧붙이기가 그렇다. 아.

- 뫼비우스 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계속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계속 안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뫼비우스 띠는 인생 그 자체와 같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실재가 존재할 따름이다. (…) 그러나 내면의 삶과 바깥세상,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개인적인 측면과 전문가적인 측면을 분리하는 문화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 단순한 진리조차 무시한다. 70-71

- 예를 들어 내가 대학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사는 자신의 신념에 열려 있고 솔직해야 한다며 ‘신념에서 벗어난 가르침’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 개인적인 신념을 교실에 끌어들이는 건 ‘비전문가적인’ 행위라고 믿는 이들에게 반박을 당한다. 71
+ 오늘 수업 시작 전에 초등학교 4학년 이선아랑 잠깐 이야기하고 놀았다. 선아는 무슨 시간이 잴 재미있어? 체육 시간이랑, 그리고 미술 시간이요. 아, 그리고 쌤 수업도 재미있어요. 나는 반짝이며 물었다. 어떤 내용이 가장 재미있었어? 그랬더니 선아가 하는 말. 쌤이 ‘아기' 얘기 해 줄 때요. ….. 음. 그.. 그랬구나. 그리고 수업 끝나고 5학년 세운이는 나에게 몇번이나 반복했다. 쌤 서울 가셔서 ‘아기' 잘 키우셔야 해요. ….. 음 그.. 그렇다. 아이들에게 나는 재원이를 키우는 아빠다. 그리고 나는 재원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주 한다. 오늘은 똥을 얼마나 쌌고, 오늘은 병원을 가서 주사를 맞고. 그런 것들. 아이들 눈은 반짝인다. 나는 그리고 그것과 배움을 연결한다. 예를 들면, 재원이는 눈치 보지 않는다고. 자기가 배고프면 소리지른다고. 여러분도 눈치 보지 말라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말 하라고. 내 삶과 내가 말하는 것이 떨어질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개인적인 신념을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신념이 맹목적이거나, 아이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안 되겠지만, 좀 더 균형잡힌 공부를 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에게 자신의 신념, 자신의 삶을 꺼내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제발. 우리나라는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쓸데없이 아이들 착한일 평가하려고만 하지 말고, 선생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일반인들이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서로 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를 통제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이지만 말이다. 

4장. 함께 홀로되기: 고독한 커뮤니티
- 에고 뒤에는 내면의 교사의 존재와 그 힘에 대한 불신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교사가 없다고 확신하고 그들을 도와주려 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줘야 한다고 여긴다. 무수한 재난이 여기에서 즉, 다른 이들을 위축시키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주제넘은 ‘충고 베풀기’에서 비롯된다. 76
+ 주제넘은 '충고 베풀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은 하게 된다. 무관심한 것 보다는 애정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 그럴 경우 (지나칠 경우) 주제넘은 충고가 되기도 한다. 그 간격을 잘 조정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텐데. 나야 뭐 성향상 간섭 보다는 무간섭에 가깝긴 하다만, 앞으론 특히 자식이 크면서는 더 주의해야 할 것 같다. 말하기 보단 보여주자. 

- 신뢰의 서클은 목적이 없다. 사람들의 삶이 바뀌고, 그래서 세상이 약간 바뀌게 영향을 끼킬 수 있으나 서클 자체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에 초점을 맞춘다.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지원해서 영혼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이 각자 내면의 교사에게 귀 기울이도록 돕는 것이다. 79
+ 목적이 없다. 유일한 목적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건 마치 도교를 접하는 듯 하다. 퀘이커교는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 우리는 신뢰의 서클을 통해 ‘고독의 커뮤니티’로서 서로에게 현존하는 ‘함께 홀로되기’라는 역설을 실천한다. (…) 신학자 디트리히 본희퍼는 <함께 삶>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80
+ 나는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홀로됨을 경계했다. 나에게 굉장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말이다. 위의 이 문장은. 나는 벨런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연지원 팀장님의 멘토링 방식이 나와 맞다고 느낀다. 물론 와우 광땡들은 모두 그렇겠지만. 누구보다 균형을 추구하려는 모습에서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나 역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쓰는 삶을 살고자 한다. 

- 우리가 홀로됨과 커뮤니티를 진정한 역설로 함께 받아들이려면 그 양극에 대한 이해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이지 않음을 뜻한다. (…) 커뮤니티는 반드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음을 뜻한다. (…) 우리가 이런 식으로 홀로됨과 커뮤니티를 이해할 때 영혼을 맞아들이는 우리 사이의 공간, 즉 우리가 함께 혼자일 수 있는 ‘홀로됨의 커뮤니티’인 신뢰의 서클을 만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신뢰의 서클은 조심스러운 영혼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조용히 ‘숲에’ 앉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밀어붙이지 않고 기다린다. 대결하지 않고 관대하다. 

- “사랑이란 두 홀로됨이 서로를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하는 것”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보다 신뢰의 서클을 특징짓는 관계를 더 아름답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 같다. (…) 사랑에 대한 릴케의 묘사는 우리에게 제3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이들을 고치려 하거나 꾸짖는 대신, 그들이 내면에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의 정중함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들이 홀로 서 있는 자리 곁에 그저 정중하게 서 있을 수 있다.  89,92
+ 위의 글들에서 계속적으로 언급이 되는 묘사는 바로 ‘숲’이다. 나무들이 너무 빽빽해도 서로 살 수가 없고, 너무 듬성듬성 해도 숲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역동성 (동물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식물들, 서로 엉켜서 단단해지는 뿌리들)이 사라진다. 

5장. 여행을 위한 준비: 신뢰의 서클 만들기
- 당신이 맡은 임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그 임무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당신의 교채 요구는 승낙받을 수 없다. 왜인가? 당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당신이 제정신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고, 조종사들은 미쳤다는게 증명되지 않는 한 절대로 교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행을 계속하다가 격추될 수 밖에 없다 해도 계속 비행해야 한다! 102
+ 현대 사회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1) 정해진 기한
- 신뢰의 서클은 사람의 인원 수에 의존하지 않는다. 홀로됨을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할’ 줄 아는 두 사람만 모이면 신뢰의 서클을 만들 수 있다. (…) 신뢰의 서클은 늘 만나야 할 필요가 없다. 일주일에 한 번 두어 시간 정도, 한 달에 한번 반나절 정도, 또는 일 년에 서너 번 주말에 만나는 것도 상관없다. (…) 신뢰의 서클에 참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우리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은 사라진다. 우리가 영혼의 지혜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사는 법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 105-106

2) 유능한 리더십
- 두 번째 중요한 조건은 영혼에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대 필요한 원칙과 실천들을 잘 숙지하고 있는 유능한 리더의 존재다. (…) 불행히도 우리는 하향식으로 운영되는 조직에서만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계급 사회보다 커뮤니티에서 리더십이 더욱 필요하다. (…) 커뮤니티는 계속해서 보살펴야만 하는 혼란스럽고, 긴박하며, 창조적인 공간이다. (..) 그러므로 원칙에 뿌리박고 합의된 방침을 실천하고 모임을 이끌 충분한 권위를 부여받은 리더가 없다면 실패하기 쉽다. 그러한 리더에게 필요한 권위는 권력과는 다르다. (..) 우리는 말과 행동을 스스로 ‘스스로 창조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대본으로 말하지 않고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107-108
+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렇다. 권력에의 의지와 권위는 오히려 반대 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랬지만, 나는 앞으론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답게 사는 사람이 권력을 잡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내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바로 ‘리더십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커뮤니티일수록 리더가 필요없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되려 훨씬 더 노련하고 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조직을 꿈꾸었던 것 같다. 모두가, 하나하나가 리더여서 누가 리더야? 라고 물으면 누구 한명을 집어낼 수 없는 그런 모습.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의 조직은 바로 원피스의 ‘밀짚모자 해적단’이다. 루피가 전체 리더이지만, 각자의 영역에선 그들이 리더다. 결정적인 순간을 제외하곤, 각자의 파트에선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조직은 참 멋져 보인다. 

3) 강요하지 않은 초대
- 세 번째 조건은 모든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열린 초대에 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종하거나 강압하려고 하면 영혼은 놀라 달아난다. (…) 그들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약점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한두 사람은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하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 있다. (…)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잠시 침묵합시다. 그 다음 자신을 소개할 준비가 된 사람이 말하고, 그 다음 또 원하는 사람이 뒤를 잇고, 그렇게 마지막 사람이 말할 때까지 자기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10-112
+ 아, 이런 바보같은! 내가 그랬다. 분명 이 책을 2번 정도 읽었었는데 이 부분에 집중하진 못 했었나보다. 그래서 좋은 책은 여러번 봐야 한다. 내가 만드는 모임에서 나는 사람들이 약간의 압박을 느끼게 하였으리라. 기다림이 부족했다. 침묵도. 분명, 자신을 소개할 준비가 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부터 자연스래 이어서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서로를 지목하게 했단 생각이다. 다음 모임부턴 이 방법을 사용해야 겠다. 

4) 공동의 근거
- 네 번째 조건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필 수 있는 공동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우리는 가치관이나 신앙이 다르더라도 계절의 은유 덕분에 각자의 내면의 삶을 내놓고 집중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 다른 믿음 아래 놓인, 믿음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즉 자연의 리듬과 자연 속 생명의 리듬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다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법칙은 찬성 혹은 반대가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중력에 반대한다’라거나, ‘나는 삼한사온에 반대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계절의 비유는 훌륭하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법칙을 가지고 말하기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다. 아주 직관적이며, 또한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커다란 토대 위에서 우린 안정감을 느끼고 가치관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똑똑한 방법이다. 

5) 정중한 분위기
-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우리는 단정하고 품위 있는 곳에 모여, 단정하고 품위 있는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 다행히도 영혼이 좋아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간단한 공식이 있다. *충분한 공간에 편안한 의자들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임의 규모가 크다면 쉽게 소그룹으로 흩어져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문이 눈높이에 있어야 한다. *싱싱한 꽃과 같은 간단한 꾸밈이 곁들여져 있어야 한다. *소리가 사방으로 튀지 않도록 바닥에 양탄자를 깐다 *조명은 따듯한 백열광이어야 한다. 118-119

- 우리는 기다란 본문과 많은 주제를 다루는 대신 오전 대부분을 간단한 시 한 편을 매개로 하여 단 하나의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 함께한 탐구에서부터 홀로됨과 침묵으로, 그 다음 소모임의 대화로, 그리고 다시 모두 함께한 모임으로 움직이면서 다양한 방식을 배우고, 영혼을 존중하는 공간을 만든다. 천천히 하고, ‘더’를 ‘덜’로 바꾸고, 리듬에 주의를 기울여라. 122

6장. 빗대어 말한 진실: 비유의 힘 
- 신뢰의 서클에서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조심스러운 영혼을 존중하기 때문에 ‘참자아를 잃고 찾는 주제’에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는다. (…) 대신에 리더는 시 한편, 이야기 한편, 음악 한곡, 또는 그림 한점,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은유와 표현들을 통해 주제를 탐구한다. 125
+ 답은 이것이다. 은유다! 질문에 대한 답을 요청하기 전에 정확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 질문은 은유로 말해야 한다. 영혼은 부끄럼을 많이 탄다. 그것은 밝은 대낮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달밤에 흘낏 자신의 모습을 내비친다. 우리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직유법이 아니라 은유법으로 영혼을 말을 한다. 빚대어 표현하는 법을 익히자. 그래서 아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때도, 갖가지 사례, 이야기 들로 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매번 이것은 느끼고는 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아직 은유법에 익숙하지 못한가보다. 하다 보면 그냥 또 어떤 개념을 꺼내는 나를 본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자. 그것도 살짝. 

- 우리가 영혼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빙 둘러서’ 접근해야 한다. (…) 영혼에게 말하도록 명령하는 게 아니라 초대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127

- 나는 이런 예술적 소재를 ‘제3의 것’이라 부르는데, 리더의 목소리도, 참여자의 목소리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의 목소리, 즉 주제의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은유적인 방식으로 빗대어 말해준다. 128
+ 예술적 소재에 대한 설명이 마음에 든다. 리더의 목소리도, 참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제 3의 것. 이는 마치 제 3의 공간의 설명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곳에선 사적인 모습의 나도, 공적인 모습의 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은 그곳에서 반응한다. 어쩌면 영혼이 이러한 방법을 선호하는게 아닐까?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인, 직유법이 아닌 은유를, 메시지가 아니 컨텍스트를, 영혼은 더 좋아한다. 

- 우리는 보통 워트숍이나 수양회에 가면 리더가 하는 말 대부분을 적고 그 다음 다른 이들이 하는 흥미로운 말들은 잘 적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은 거의 적지 않는 편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뢰의 서클에서는 자신이 하는 말과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주로 적는다. 128
+ 내면의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기!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목공>에 대한 탐구를 끝내면서 뫼비우스 위의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자각한다. 사려 깊고, 서로 준중하는 대화를 통해 영혼을 일깨우고, 혼자서 읽었더라면 어려웠을 통찰에 이른다. 153 

7장. 깊음이 깊음에게 말하다: 말하고 듣는 법
- 우리가 신뢰의 서클에서 행하는 규칙들의 형식뿐 아니라 정신까지 맞아들이려 한다면 서로 고치고, 구하려 하고, 충고하고, 바로잡으려는 마음의 습관이 어째서 우리의 삶을 그토록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159

- 당신이 내게 가장 깊은 문제를 털어놓을 때, 당신은 개선되거나 구제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자신의 진실을 보이고, 들려주고,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 당신이 내게 삶의 깊은 의문에 대해 말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내면의 교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에 당신을 최대한 붙들어두는 일뿐이다. 그러나 당신을 그런 식으로 붙들기 위해서는 시간, 에너지, 인내가 필요하다. 161

+ 강한 습관이다. 서로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누구나 그런 모습이 있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습관처럼 책을 펴고 형광펜을 손에 쥘려고 하는데 이럴수가. 형광펜이, 그리고 빨간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는 중간중간 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줄을 긋는 습관이 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에 인생을 바꿔보리라 마음 먹었을 때, 그때부터 책을 사는 것도, 줄을 치는 것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것 자체가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줄을 긋는 것 자체가 나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형광펜이 손에 쥐어지지 않은 상황이 거의 없다. 그렇게 아침에 책을 손에 쥐고 읽으려는데 잘 읽히지 않았다. 중요한 단락이 지나가면 아쉬웠다. 이런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남기고 싶어서 페북에 글을 남겼다. 몇몇 사람들이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난 댓글을 읽고 한 가지 느낌과 생각이 지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느낌은 ‘약간의 불편함’이었고, 생각은 ‘초대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충고는 불편하구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고자, 혹은 내 습관을 고치고자 이 글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모습의 내가 웃겨서 그 상황을 썼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책읽는 습관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로 부터 조언을 받아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 글에서 내가 나의 문제라고 느껴지게 했나?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약간의 변명을 댓글로 추가했다. 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읽는다고. 그렇게 쓰고 말았다. 나는 그리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얼마나 많이 ‘초대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충고, 혹은 조언을 던지는가?" 아마 그 선생님은 그것이 나에게 충고나 조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말이다. 받는 사람에게는 어떤 작은 의견도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더라는 것이다. 나도 종종 페북으로 내 의견을 나눈다. 누군가가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음에도 그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는 조심해야 겠단 생각을 했다. 우린 무의식적으로 서로 고치고, 구하려 하고, 충고하고, 바로잡으려 하기에. 영혼은 그 만큼 섬세하다. 우리의 영혼은 좀 더 민감하게 배려되어야 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것을 배운 에피소드였다. 

-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귀 기울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개 건성으로 듣는다. (…)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영혼의 귀로 솔직하게 듣는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말하고 있음을 알기에 무슨 말이든 충실하게 귀 기울일 수 있다. 165

- 진실하게 말하고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영혼에 안전한 공간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의견, 관념, 믿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떠오르는 영혼의 진실을 말하게 된다. 167

- 나는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삶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는 걸 알아차리면서 문제의 근원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갈 만큼 자유로워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게 필요한 어떤 해결책이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171
+ 우린 직감적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가? 아님 그저 내 곁에 있고자 하는가?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자. 알아채고, 정신차리자. 곁에서 머물자. 공간을 주고, 귀 기울이자. 나 역시 나에게 필요한 해결책은 어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있을 것이며, 내가 답을 발견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 주위에선 더욱 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 내가 주고자 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아이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공간. 가끔 나도 아이들은 판단한다. 특히 내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 사실 그랬다. 한 아이가 내 검은 새끼 손가락을 가지고 뭐라고 했다. 자기는 내 손가락을 보는게 불편하다고, 그냥 빼면 안 되냐고 말했다. 나는 그 아이의 그 말에 기분이 나빴다. 지금까지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솔직한 마음은 이랬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행동이 미워보였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나도 기분이 나쁘다고 약간은 흥분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성숙한 반응이 아니었다. 좀 더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 들어보고, 내 마음도 살피고, 좀 더 침착해진 다음에 반응해도 괜찮았을 것인데. 너무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좀 부끄럽다. 음. 판단하려는 나를 알아채자. 

8장. 물음 속에 살기: 진리의 실험
- 솔직하고 열린 질문의 특징은 무엇인가? 솔직한 질문은 ‘나는 이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고, 당신이 그것을 말해주기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는 질문이다. 솔직하지 못한 질문은 상대방의 영혼을 모욕한다. (…) 열린 질문은 상대방의 탐구를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넓혀주는 질문이며, 특정 방식으로 상황을 처리하라고 재촉하거나 유도하지 않는 질문이다. 180-181

- “한 걸음이라도 말하는 이의 말보다 앞서 나아가지 마라”가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위한 지침이다. (…) 영혼은 아주 잘 조율된 거짓말 탐지기와 같다. 영혼은 자신을 조종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아주 예민하게 포착하고 달아난다. 182

- 중심인물에게만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공간을 만들고, 보호한다’는 이미지는 투명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거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준다. (…) 우리가 중심인물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또 하나의 규칙은 ‘이중 기밀’의 규칙이다. 위원회를 마치고 나면 그 안에서 이야기한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197

9장. 웃음과 침묵에 대해: 알고 보면 아주 가까운 사이
-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어색해하거나 긴장하지 않으면서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유머로써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물론 우리는 그들을 좋은 친구라 부른다. (…) 침묵과 웃음을 자주 나눌수록 신뢰는 더욱 깊어진다. 영혼은 잘 놀라기 때문에 침묵을 사랑하고, 침묵은 영혼에게 안전한 느낌을 준다. 영혼은 진실을 원하기 때문에 웃음을 사랑하고, 웃음을 종종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혼은 생명을 사랑하고, 침묵과 웃음 모두 생명을 준다. 205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하는 침묵은 교감의 한 형태다. 서로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침묵은 우리를 연결하고, 어떤 말로도 전달되지 않는 진실에 가닿게 하고, 또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돕는다. 208
+ 침묵은 우리를 연결한다는 말. 생각해보면 침묵을 견딜 수 있는 건 '친밀한 사람'일 때 가능하다. 친밀함이 없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침묵하고 있으면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간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 교감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 생각해보지 못 했던 아이디어다. 무엇보다 모임의 리더 스스로가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다음에 한번 시도해보자. 

-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소음이 가득한 공간에서 일한다. 그러나 일터에서 나와 침묵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차에 오르자마자 라디오를 켜는가? (…) 침묵이 없다면 우리의 모임은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영혼에게 나오라고 소리치는 다른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213

- 웃음과 침묵이야 말로 우리가 신뢰의 서클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 가장 비정치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웃음과 침묵이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고 권력을 바꾸는 데 이용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 웃음이 불의한 정치체제를 뒤흔들 때 권력의 기반에 금이 가고, 정치적 지진계를 계속 요동치게 할 수 있다. 216
+ 웃음은 탁월한 저항의 방법이다. 침묵도 그러하다. 얼마 전에 프랑스 IS태러 사건이 떠오른다. ‘샤를리 엡도’ 그들은 철저하게 웃음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대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신>에선 이런 말도 있다. ‘사랑을 무기로, 웃음을 방패로’ 말 그대로, 웃음은 방패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10장. 제3의 길: 일상생활에서의 비폭력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세상의 폭력에 대응하는 ‘제3의 길’에 대해 배운다. 제3의 길이라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동물적 본능인 ‘싸우느냐, 아니면 달아나느냐’하는 이분법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 제3의 길은 비폭력의 길이고, 내가 말하는 비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225

- 제 3의 길을 걷는 건 문자 그대로 걷기와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영혼을 존중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우리가 제 3의 길을 걷기 원한다면 이 같은 실천이 얼마나 간단한지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같은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기업 문화에서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게 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는 것에만 연연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외면하는 생활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225-227
+ 이 문장을 쓰면서 약간 전율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영혼을 존중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너무나 완벽한 표현 방법이었다. 영혼을 존중만 해선 안 된다.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영혼이 없는 행동은 의미없다. 그리고 빨리 뛸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조금씩 영혼을 존중하는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나다운 장면을 쓸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나다운 장면’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내가 영혼을 존중하기 시작했던 모습, 그리고 조금씩 더 존중해나가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기존에 익숙하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 하지만 내 영혼의 입장에서 더욱 두근거리는 선택들. 그 선택을 반복해 나가는 것이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나의 큰 꿈으로 마을과 학교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을 그리 높은 수준으로 두지 않는다.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만약, 그 과정에 마을과 학교가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면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다.

- 우리가 제 3의 길을 걷기 원한다면 이 같은 실천이 얼마나 간단한지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같은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기업 문화에서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게 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는 것에만 연연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외면하는 생활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227

- 비폭력 이론의 핵심 근거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혼이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근거에서 행동할 때 세상이 변화할 수도 있고,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혼을 존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최소한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227
+ 내가 영혼을 존중할 때 세상은 변화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지나친 사회혁신가들을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 변화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더 자기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바로잡고자 기꺼이 나서는 행동은 더욱 존경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발성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혁신과 혁명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는 될 수 있지만 결코 목적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목적은 언제나 ‘온전함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 최고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진실 말하기를 하고자 할 때 먼저 자신의 진실부터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진실 말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부터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자신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요컨대, 최고 경영자의 진실 말하기가 분명하고 감동적일 때 어떤 직급에서든 진실말하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 229

- 자신의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선의에서 한 행동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선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평화로울 때 작은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될 수 있다. 230
+ 누군가 진정하지 않았던 것을 진정하게 말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그에게 감동하고, 영향을 받는다. 그 순간은 자신의 ‘옳음’과 ‘에고’를 내려놓은 순간이자, ‘그림자'를 직면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너무나 무서운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지날 때 느껴지는 그 연결감과 깨끗함은 아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 우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수준까지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힘을 요구하고, 그러한 자극이 우리의 삶에 사랑, 아름다움, 선함, 진실을 가져온다. 237

- 영혼은 관대해서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영혼은 현명해서 고통스러워도 문을 닫고 숨지 않는다. 영혼은 희망에 차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방향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영혼은 창조적이어서, 우리를 패배하게 하는 현실과 도피일 뿐인 환상 사이에서 길을 찾아낸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는 단지 우리 자신과 영혼을 분리시키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영혼의 힘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무는 일이다. 244
+ 벽을 허무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아마 벽 뒤에 숨으려는 나의 민낯을 자주 확인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어제 분명 빛에 노출 된 것 같은데, 오늘 나는 또 벽을 쌓고 뒤에 머문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꺼내는 순간, 벽은 사라진다. 그렇게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쌓고, 허문다. 벽은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 벽은 언제나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나는 좀 더 빨리 벽 뒤에 숨은 나를 발견할 것이며, 더 자주 벽을 허물 것이다. 오늘도 2시간 정도는 벽 뒤에 있을 만한 행동들 (쓸데없는 웹서핑과 게임 방송 보기)을 했다. 하지만 더 자주 인식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행동을 바로잡아 나갈 것이다. 세상의 빛과 내 영혼의 빛이 만날 수 있게 말이다. 

리뷰
책에 대한 리뷰는 간단하다. 이 책은 10번은 봐야 할 책이다. 이번에 보는 게 3번째인데, 또 새로운 책을 보는 것 같았다. 앞부분은 워낙 공감하면서 봤던 내용이라 새롭진 않았는데, 중반 이후, 특히 실제로 신뢰의 서클을 만들 수 있도록 자세한 지침을 쓴 부분은 내가 그렇게 몰두해서 읽지 않았나 보다. 새로웠다. 침묵과 웃음에 대한 부분도 새로웠고, 마지막 제 3의 길도 그랬다. 그래서 더 좋았다. 또 지난 2번은 초서를 하면서 읽은 게 아니라서 이번에 읽을 때 더 깊이 읽었던 것 같다. 

글을 읽고, 생각을 적으면서 ‘아, 내가 생각보다 사회에 불만이 많구나’란 맥락을 읽었다. 음하하핫.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반항심이 커지고 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역사를 배우면서 현 권력과 제도, 시스템에 대한 저항심은 날로 날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반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작년에 들어서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 그리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책이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였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아, 나는 이런 부족사회를 꿈꾸고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인디언들의 생활 태도나 성숙한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앞으로 인디언과 관련해서 공부하겠단 다짐도 했다. 파커 파머의 사상의 흐름이나, 공동체의 모습도 이러한 인디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한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함께 연대하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그러한 상상을 하게 한 책이 나에겐 이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이다. 그래서 더욱 값지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목표설정와 자기다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가 바로 '목표설정'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변화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보는 매체가 '책-자기계발 서적'이고, 그 수 많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변화하고 싶으면 우선 목표를 설정하라'이기 때문이다.

드림 리스트, 비전 보드, SMART목표 달성법, Works,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등 너무나 많은 책이 이 이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 목표를 성취했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목표를 정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 쌓여서 실제로 아무리 좋은 책을 봐도 작심삼일에 그치는 경우를 나를 포함해서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싶은가?'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위의 두 질문의 차이점을 구분하겠는가? 위의 질문을 다시 고쳐서 쓸 수 있다면, 이런 식의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더욱 충만함을 느낄까?'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더욱 인정받고 사랑받을 것인가?'

여기서 슬슬 드러나있지 않던 상관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방정식의 출현이다.
'나는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기분이 충만하다' 이 생각을 신뢰하는 사람은 최초에 제시했던 2가지 질문을 구분하지 못한다. 타인의 사랑과 인정으로부터 나의 존재가치를 찾는 사람은, 나의 내면에 질문을 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왜냐면, 그 순간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질문을 해보자.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싶은가?' vs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전자의 질문은 당신의 가슴으로, 내면으로 향하고 있고, 후자의 질문은 당신의 머리로, 외부로 향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표설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나를 아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 내가 무엇을 하면 남보다 좀 더 잘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면 돈을 안 벌어도 행복한지, 내가 무엇을 할 때 자기다운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때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인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헌데 이것이 쉽지 많은 않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나의 자유가 완벽하게 제한'되는 상황에 왔을 때, 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정말 나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그러면서 그 상황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를 찾고자 했고,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했을 때,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그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구나 하는 통찰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절박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배 부른'상태에서는 나의 진실된 내면을 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삶의 결정이 외부의 영향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렇게 외부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안전함을 쫓아왔던 나의 삶을 자각했을 때야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해야겠다는 깊은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 '무한한 자유'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면 그와 함께 수반되는 '엄청난 책임감'이 나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자유는 사실 '방종'이라는 말에 가깝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다 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은 방종이다. 하지만 진짜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면서 그것에 대한 100% 온전한 책임기꺼이 지려는 태도 그 자체이다.

'자기다움'을 알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깊이 인식할 때, 내 삶의 기준이 세워진다.
내 삶의 기준을 아는 사람만이 방종이 아닌 자유를 맛보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스스로 느끼기에 아직 그러한 말을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지르고 보는거다!
온전하게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