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조사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교육공동체리더십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강의수련 활동을 벌여온 그를 사람들은 교사의 교사’ 또는 위대한 스승이라 부른다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명으로 선정되었으며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많은 이들을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승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책에서 파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고백과 통찰력으로 인생의 좌절과 성공나약함과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페이지마다 넘치는 특유의 부드러운 유머와 따뜻함으로 진정한 자기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그 길을 안내한다저서로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낯선 사람과 함께하기>,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등이 있으며잡지 <커몬빌> <크리스천 센추리>작가상을 수상했다고등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교육출판연합과 사립학교협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1장.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 분리되지 않은 삶
- 나는 온전해지기를 갈망하나 분리가 오히려 손쉬운 선택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어떤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와 내 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지만,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좋은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의 재능을 억합한다. 아니면 나쁨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17
+ 분리는 쉽다. 아니다. 분리는 더 익숙하다. 그 표현이 맞겠다. 우리는 분리를 권하는 사회에서 자랐다. 사회는 온전한 자를 원하지 않는다. 온전한 자는 사회와 대립한다. 왜냐? 그는 통제되지 않는다. 온전한 자들은 자신의 기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로부터 나온 권력을 틀어쥔 사람들은 외부의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분리를 권한다. 서로 싸우면 통제하긴 더 쉽기 때문에. 지금 영호남이 그런 구도가 아닌가. 그래서 우린 더욱 온전함을 회복하면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일깨워 나가야 한다. 나부터.  

- 나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른다. 주위 사람들 역시 그 대가를 치른다. 이제 그들도 내 분리된 삶 탓에 불안한 길을 걷는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의 온전함을 무시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온전함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곘는가. 17
+ 내가 나의 온전함을 무시하는데 다른 사람의 온전함은 소중히 여길 수 없다. 이 말은 계속 곱씹게 된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내가 나의 아이를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아이도 무시할 수 있다.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무시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출발은 ‘나 자신과의 관계'다.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결국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정답은 이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다면, 나를 먼저 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배움으로 이끌고 싶은 나는 결국 가장 배움을 좋아해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한다. 

-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18
+ 내 삶은 완벽해질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완벽하다’라는 말에 저항이 있다. 자연을 예로 들어 보자. 자연이 완벽한가? 아니다. 자연은 그저 역동하고, 순환한다. 어떤 완벽한 생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의 죽음으로 서로를 살리고, 어디선가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선가 균형을 다시 세운다. 하나의 상태에 이르는 순간은 오로지 죽음 뿐이다. 자연은 멈춤이 없다. 그렇기에 완벽한 상태라는 것도 없다. 완벽하다는 것은 그래서 나에게 ‘죽음’으로 들린다. 개인적으로 ‘완벽한 이미지’ (예를 들면 이데아나 전형적 의미에서의 천국)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생태계가 가장 좋다. 그 안에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고, 혼란과 질서도 역동한다.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이다. 삶의 반댓말은 멈춤이고, 죽음이자, 완벽함이다. 

- 우리는 십대와 이십 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두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21
+ 예전에 하버드 교수가 했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는 수 많은 똑똑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하지만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 아무리 똑똑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월스트리트로 건너갔고, 자신들의 탐욕에 의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역들이 되었다. 세상을 주무르고, 조종할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한 지식은 오히려 그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것에 되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리라. 굉장히 공감했다. 나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뜻은 균형을 놓치기 쉽다는 뜻이니까. (다 갖춘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으니, 편견을 가지고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더라) 

- 분리되지 않은 삶으로 계속 나아가길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난관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 우리는 자기기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24
+ 분리되지 않은 삶을 위해선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말. 나는 이 말에 절절히 공감했고, 파커 파머의 펜이 되었다. 내가 20대 중반에 하나의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도 그것의 힘이다. 그 위험성도 함께 보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결국 ‘리더’가 중요하다. 이 언급은 나중에 다시 하련다. 

2장. 분리의 벽을 넘어서: 영혼과 역할의 만남
-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는 데 몰두하면서 영혼과 접촉을 끊고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그 비용은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 내면의 빛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세상의 빛이 내면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내면의 어둠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위험한 장소로 만든다. 거짓과 투사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므로 고독해진다. 30
+ 지금 나는 거짓과 투사로 이루어진 관계가 드물다. 공적 관계로만 일하는 범위를 많이 줄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요즘은 거의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과 일한다.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과 만나서 함께 하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학교, 학과, 자격증, 학위증 등등. 나는 전자공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교육쪽 관련해서 어떤 자격증도, 학위도 없다. 간혹 그런 사람들도 만난다. ‘강의를 맡기고 싶은데, 석사 이상만 가능한 조건이네요.’라고. 나는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 양이 줄어간다. 하지만 질은 더 깊어졌다고 느낀다. 고독감도 훨씬 덜 하다. 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것이 발각되는 순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바로 잡고자 노력한다. 관계라는 것는 고독지향적인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실마리는 찾았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그것에 반응이 있으면 관계한다. ‘삶의 이야기’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서류부터 요구하는 사람들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그냥 그것이 편하다. 

- 우리는 날마다 가족, 친지, 친구, 낯선 이들과 만나면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실제 모습인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우리를 보면서 같은 의문을 품는다! 31
+ 요즘 나는 그렇다. 약간의 촉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은 불완전한 촉수이지만, 약간 발달하고 있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간격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나이가 들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직접 경험’의 탓이 클 것이다. 그 감각은 아주 동물적인 감각이라, 이론이나 사례로 발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서 운전하면 처음에는 앞뒤좌우 간격을 알지 못한다.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옆면을 확 긇히는 것이다. 그러면 동물적으로 그 미묘한 간격이 뇌에 박힌다. 다음에 그 정도 위치에 닿을 것 같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 부딪칠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확’ 당해본 사람은 다음에 그런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몸’이 반응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를 지배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그 비슷한 인간 유형을 보면 요즘은 잘 반응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믿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 분리된 삶이 유행병처럼 퍼져 있으나 언제나 온전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온전한 삶을 살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33
+ 이런 궁극적인 진리를 이렇게 쉽게 말하다니! 중요한 것은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냐는 질문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친절하게 그 해답도 말해주지만. 

- 분리된 삶은 상처 입은 삶이다. 영혼은 그 상처를 치유하라고 계속 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면 술과 약물, 일과 쇼핑, 분별없는 대중매체 같은 마취제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분리된 채로 살면서 고통을 깨닫길 원치 않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마취제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개인에게는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분리된 삶이 사회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6
+ 사회는 다양한 마취제를 제공한다. 주말 저녁에는 예능을, 평일 저녁에는 드라마를, TV를 안 보는 사람들에겐 스포츠를, 낚시를, 다양한 취미들을. 끊임없이 제공되는 기본 옵션 이외에도 추가 옵션이 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에는 야근을,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회식을, 주말에는 추가 근무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렇게 폭 넓은 옵션의 마취제에 취해서 삶을 산다. 아니 살아진다. 그 중에서 나는 가장 치명적인 마취제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다른 것들에 비해서 '일’은 너무나 긍정적인 활동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거든. 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면 이 일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에 빠진다. 그 중독은 매우 강해져서, 나중에는 마치 자신이 이 회사에, 이 사회에, 이 국가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 사회라는 메트릭스를 유지시키는 가장 큰 배터리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고. 나는 그래서 ‘분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미디어를, 언론을, 사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작년부턴 왜 이리 소수 민족들의 삶이나 아나키즘에 관심이 가는지 모르겠다. 에효. 요즘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 생각이 많아진다. 그만 하자. 

- 사회 제도는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을 벌할 때가 많다. 누구나 ‘온전한 삶’을 살면서 처벌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거짓된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면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 우리의 삶에 미치던 제도의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37
+ 우리가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면 우리의 삶에 미치던 제도의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라는 문장을 가장 잘 설명하는 건 ‘메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이다. 네오는 진실에 눈을 떴고, 요원들은 총을 쏘았다. 하지만 네오에게 이것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가 권력과 힘이 있다고 믿을 때 그곳에는 권력과 힘이 있다. <왕좌의 게임>이란 드라마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중간에 바리스와 리틀 핑거가 하는 대화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권력은 사람들이 그것이 있다고 믿는 곳에 있습니다.” 맞다. 권력은 우리가 그곳에 권력이 있다고 믿는 곳에 있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 속에 살고, 그 제도의 암묵적 동의자로서 우린 ‘대통령’에게 권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난다. 또 다른 예로, 대부분의 우리는 지금 ‘돈’에 권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돈’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돈에, 사회적 압박에,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권력이 어디에 있다고 믿을까? 그래서 과거 김어준 충수는 이런 말을 했다. “쫄지마 씨바” 권력에 쫄지 않으면, 그 사람이 권력이 된다.

- 물론 홀로됨은 개인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또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영혼과 역할을 다시 결합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하다. 
+ 인간은 자기기만의 동물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한 때 내가 가진 생각들이 굉장히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창의적인 사람이란 착각에 빠졌다. 책을 몇 권 보지도 않고, 충분한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혼자 생각을 오래 하면 그렇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내가 빠졌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들을 만나면서 내 얼굴을 붉어졌고, 내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그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피터드러커가 했던 말 중에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말이 있다.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 ‘소외된 기업은 소멸한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 믿는다. 사람도 그렇다 ‘소외된 사람은 소멸한다.'

-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커뮤니티를 나는 ‘신뢰의 서클’이라고 부른다. (…) 내가 펜들힐에서 경험한 신뢰의 서클들은 내적인 탐구를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는 커뮤니티로서, 두 가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첫째는 누구나 자신 안에 내면의 교사가 있고 그것의 안내가 이데올로기, 집단의 신념, 제도, 지도자들의 안내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이들과 교류하면서 내면의 교사가 하는 말을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43

-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신뢰의 서클을 이루는 원칙과 실행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를 결코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내면에 지닌 두려움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주위에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45

- 나는 나의 좋은 자아가 드러나고 내가 진정으로 나 자신일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내 안에 이와 같은 안전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기쁨과 고통을 나눈 적이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47

- 먼저 그 밑바탕에 놓인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두 원칙이란 ‘영혼 또는 참자아가 실재하며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영혼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안전을 느낀다’는 것이다. 
+ 이 책에서 언급되는 신뢰의 서클은 내가 마음 속으로 꿈꿔왓던 모습이었다. 서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여는 곳. 그것은 강한 믿음이 기반되었기에 가능하다. 그 믿음이란 바로 ‘내면의 안내’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그 믿음이 굉장히 굳건하다. 내 안에는 분명 나를 바로잡아주는 스승이, 목소리가, 메시지가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육아’를 꼽는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을 통해 ‘세계관’이 형성된다도 믿기에.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안전한 관계’ 역시 아이가 처음 맺는 부모와의 관계와 오버랩된다. 모든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안전하다고 믿으며, 그 믿음 안에서만 세상을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신뢰의 서클의 시작은 ‘육아’라고 믿는다. 건강한 육아를 통해 영혼이 보존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다시 보존시킬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승전육아. ㅋㅋ

3장. 참자아 찾기: 영혼의 암시들
- 우리 문화의 두 흐름이 이러한 영혼의 무관심에 기여한다. 하나는 인간 자아를 위한 어떤 창조적 핵심도 없는 사회적 구조로 여기는 ‘세속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모든 관심을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도덕주의’다. 세속주의와 도덕주의는 반대되는 것 같으나, 그 둘은 모두 참자아를 부인하도록 이끈다. 54
+ 세속주의는 앞서 말했던 맥락과도 비슷하기에 패스. 도덕주의는 아마 청교도 정신이라든지, 이성을 앞세운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허긴 한창 인간의 합리성과 계몽주의를 앞세웠을 때는 그것이 인간을 위한 바른 길이라고 믿었겠지. 세속주의는 ‘참자아가 아닌 이기적 자아’를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고, 도덕주의는 ‘참자아가 아닌 이타적 자아’를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참자아는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일 뿐. 그리고 이기성과 이타성을 자신의 삶에 맞게 균형있게 추구할 뿐. 

- 참자아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참자아를 부인하며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데서 나온다. 이는 내가 우울증을 겪으면서 깨달은 교훈이다. (…) 내게 우울증은 여기서 멈추고 되돌아가, 뚫고 나아갈 수 잇는 다른 길을 찾으라는 영혼의 외침이었다. 55-56

-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이 사라지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것이 뉴에이지의 나르시시즘의 책임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를 고립시켜 불안하게 만드는 대중 사회, 인간의 권리보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경제 체제. 시민들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 과정이 우리의 도덕적인 무관심을 낳는 외부 원인들이다. 이런 것드이 고삐 풀린 경쟁, 사회적인 무책임, 빈부 격차를 가져오고 부추기는 세력들이다. 58
+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보살핌이 사라지는 것에 가장 큰 책임은 ‘경쟁과 빈부 격차’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및 세속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에선 뉴에이지가 책임이 적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말에 반박한다. 누구보다 뉴에이지를 좋아했고, 흠뻑 빠졌던 나이기에. 반박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내가 보는 뉴에이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3가지다. 첫 번째. 너무 나를 강조하는 <유아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뉴에이지에 따르면 이 세상에 진리는 없다. 그렇기에 나 이외에 모든 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나’ ‘나’ ‘나’만 강조한다. 나의 행복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란 이상한 논리가 생긴다.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음을 간과한다. 두 번째. 긍정을 너무 강조한다. 부정적인 것에 힘을 주면 그것이 커진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온 책이 <긍정의 배신>이지 아마. 나는 부정적인 것들을 오히려 직면하고 직시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뉴에이지의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허용, 수용, 포용을 강조하고, 나를 사랑할 것을 반복한다. 물론,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던 누군가에겐 뉴에이지는 좋은 처방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수용과 허용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든다.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선 싸울 필요도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지금 경남 도지사가 무상 급식을 중단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분노해야 할 상황에선 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런 의미에서 뉴에이지는 적잖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본다.  

- 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정체 경제적 세력에 의해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자아감 결핍 증후군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참자아에 대한 의식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커뮤니티 안에서만 자아를 주고받고, 귀 기울이며 말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약해지고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자아는 위축되고 우리 자신과의 접촉도 약해진다. 59
+ 진실한 대화를 위한 커뮤니티가 사람들을 살리고,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이 시스템과 구조에 대항한다. 다시 말하면, 우린 서로 싸워선 안 된다. 우리의 적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유일한 적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구조와 시스템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권력’에서 다시 우리의 몫을 찾아봐야 한다. ‘권력’을 되찾는 방법은 내적 권위에 힘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내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뭉치고, 권력이 휘둘리지 않을 때 우린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본다. 아, 오늘 내 글이 왜 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것은 내가 과거에 사회 변화에 눈을 감고,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반성이자 분노가 커서 그럴 것이다. 나는 약 10년에 가까운 시절 동안 사회에, 주변 사람들에 무관심 했다. 그랬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후회가 아직 남아있다. 앞으론 좀 더 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나 다운 삶을 권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 아이를 비롯한 앞으로 자라날 2세들을 위해서도.  

-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참자아를 벽으로 둘러싸야 할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간단히 말해, 나는 실제 모습보다 더 똑똑하고 더 거칠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나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내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벽이 필요했다. 그러나 낯선 이들에게 감춰진 자아는 곧 가까운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65
+ 내가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썼던 방법은 바로 ‘모든 상황을 뛰어넘은 듯한’ 가면이었다. 실제의 삶과 동 떨어진, 하지만 조금은 고급져보이는 텍스트를 가까이 하려고 애썼고, 그것도 귀찮으면 온라인 게임의 세상을 도망쳤다. 그러면 나는 나만의 안전한 공간을 어디서든 만들 수 있거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영역으로 도망간 가다보니 결국 벽에 부딪쳐 직면하게 되었고. 그때의 나는 참 벽이 두터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오만함과 방자함이 가득했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차가웠다. 진짜 바보같은 놈. 온몸을 던져서 살아본 경험도 없는 녀석이 뭣도 모르고 까불었던게 왜 이리 부끄러운지. 

- 벽 뒤에서 살다 보면 적어도 세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첫째, 내면의 빛이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을 비출 수 없다. 나는 젊은 교수였을 때, 종신재직제도의 압력에 굴복하여 참자아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건 교사의 소명을 저버린다는 걸 뜻했다. (..) 둘째,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세상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비출 수 없다. (..) 셋째, 우리가 벽 뒤에 살면 우리와 가까운 이들은 우리가 무대 위 모습과 무대 뒤 실제 모습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관계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다. 66-67
+ 아. 이 글은 너무 좋아서, 무언가 덧붙이기가 그렇다. 아.

- 뫼비우스 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계속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계속 안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뫼비우스 띠는 인생 그 자체와 같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실재가 존재할 따름이다. (…) 그러나 내면의 삶과 바깥세상,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개인적인 측면과 전문가적인 측면을 분리하는 문화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 단순한 진리조차 무시한다. 70-71

- 예를 들어 내가 대학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사는 자신의 신념에 열려 있고 솔직해야 한다며 ‘신념에서 벗어난 가르침’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 개인적인 신념을 교실에 끌어들이는 건 ‘비전문가적인’ 행위라고 믿는 이들에게 반박을 당한다. 71
+ 오늘 수업 시작 전에 초등학교 4학년 이선아랑 잠깐 이야기하고 놀았다. 선아는 무슨 시간이 잴 재미있어? 체육 시간이랑, 그리고 미술 시간이요. 아, 그리고 쌤 수업도 재미있어요. 나는 반짝이며 물었다. 어떤 내용이 가장 재미있었어? 그랬더니 선아가 하는 말. 쌤이 ‘아기' 얘기 해 줄 때요. ….. 음. 그.. 그랬구나. 그리고 수업 끝나고 5학년 세운이는 나에게 몇번이나 반복했다. 쌤 서울 가셔서 ‘아기' 잘 키우셔야 해요. ….. 음 그.. 그렇다. 아이들에게 나는 재원이를 키우는 아빠다. 그리고 나는 재원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주 한다. 오늘은 똥을 얼마나 쌌고, 오늘은 병원을 가서 주사를 맞고. 그런 것들. 아이들 눈은 반짝인다. 나는 그리고 그것과 배움을 연결한다. 예를 들면, 재원이는 눈치 보지 않는다고. 자기가 배고프면 소리지른다고. 여러분도 눈치 보지 말라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말 하라고. 내 삶과 내가 말하는 것이 떨어질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개인적인 신념을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신념이 맹목적이거나, 아이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안 되겠지만, 좀 더 균형잡힌 공부를 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에게 자신의 신념, 자신의 삶을 꺼내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제발. 우리나라는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쓸데없이 아이들 착한일 평가하려고만 하지 말고, 선생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일반인들이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서로 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를 통제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이지만 말이다. 

4장. 함께 홀로되기: 고독한 커뮤니티
- 에고 뒤에는 내면의 교사의 존재와 그 힘에 대한 불신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교사가 없다고 확신하고 그들을 도와주려 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줘야 한다고 여긴다. 무수한 재난이 여기에서 즉, 다른 이들을 위축시키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주제넘은 ‘충고 베풀기’에서 비롯된다. 76
+ 주제넘은 '충고 베풀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은 하게 된다. 무관심한 것 보다는 애정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 그럴 경우 (지나칠 경우) 주제넘은 충고가 되기도 한다. 그 간격을 잘 조정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텐데. 나야 뭐 성향상 간섭 보다는 무간섭에 가깝긴 하다만, 앞으론 특히 자식이 크면서는 더 주의해야 할 것 같다. 말하기 보단 보여주자. 

- 신뢰의 서클은 목적이 없다. 사람들의 삶이 바뀌고, 그래서 세상이 약간 바뀌게 영향을 끼킬 수 있으나 서클 자체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에 초점을 맞춘다.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지원해서 영혼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이 각자 내면의 교사에게 귀 기울이도록 돕는 것이다. 79
+ 목적이 없다. 유일한 목적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건 마치 도교를 접하는 듯 하다. 퀘이커교는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 우리는 신뢰의 서클을 통해 ‘고독의 커뮤니티’로서 서로에게 현존하는 ‘함께 홀로되기’라는 역설을 실천한다. (…) 신학자 디트리히 본희퍼는 <함께 삶>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80
+ 나는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홀로됨을 경계했다. 나에게 굉장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말이다. 위의 이 문장은. 나는 벨런스를 좋아한다. 그래서 연지원 팀장님의 멘토링 방식이 나와 맞다고 느낀다. 물론 와우 광땡들은 모두 그렇겠지만. 누구보다 균형을 추구하려는 모습에서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나 역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쓰는 삶을 살고자 한다. 

- 우리가 홀로됨과 커뮤니티를 진정한 역설로 함께 받아들이려면 그 양극에 대한 이해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이지 않음을 뜻한다. (…) 커뮤니티는 반드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음을 뜻한다. (…) 우리가 이런 식으로 홀로됨과 커뮤니티를 이해할 때 영혼을 맞아들이는 우리 사이의 공간, 즉 우리가 함께 혼자일 수 있는 ‘홀로됨의 커뮤니티’인 신뢰의 서클을 만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신뢰의 서클은 조심스러운 영혼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조용히 ‘숲에’ 앉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밀어붙이지 않고 기다린다. 대결하지 않고 관대하다. 

- “사랑이란 두 홀로됨이 서로를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하는 것”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보다 신뢰의 서클을 특징짓는 관계를 더 아름답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 같다. (…) 사랑에 대한 릴케의 묘사는 우리에게 제3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이들을 고치려 하거나 꾸짖는 대신, 그들이 내면에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의 정중함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들이 홀로 서 있는 자리 곁에 그저 정중하게 서 있을 수 있다.  89,92
+ 위의 글들에서 계속적으로 언급이 되는 묘사는 바로 ‘숲’이다. 나무들이 너무 빽빽해도 서로 살 수가 없고, 너무 듬성듬성 해도 숲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역동성 (동물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식물들, 서로 엉켜서 단단해지는 뿌리들)이 사라진다. 

5장. 여행을 위한 준비: 신뢰의 서클 만들기
- 당신이 맡은 임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그 임무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당신의 교채 요구는 승낙받을 수 없다. 왜인가? 당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당신이 제정신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고, 조종사들은 미쳤다는게 증명되지 않는 한 절대로 교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행을 계속하다가 격추될 수 밖에 없다 해도 계속 비행해야 한다! 102
+ 현대 사회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1) 정해진 기한
- 신뢰의 서클은 사람의 인원 수에 의존하지 않는다. 홀로됨을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할’ 줄 아는 두 사람만 모이면 신뢰의 서클을 만들 수 있다. (…) 신뢰의 서클은 늘 만나야 할 필요가 없다. 일주일에 한 번 두어 시간 정도, 한 달에 한번 반나절 정도, 또는 일 년에 서너 번 주말에 만나는 것도 상관없다. (…) 신뢰의 서클에 참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우리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은 사라진다. 우리가 영혼의 지혜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사는 법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 105-106

2) 유능한 리더십
- 두 번째 중요한 조건은 영혼에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대 필요한 원칙과 실천들을 잘 숙지하고 있는 유능한 리더의 존재다. (…) 불행히도 우리는 하향식으로 운영되는 조직에서만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계급 사회보다 커뮤니티에서 리더십이 더욱 필요하다. (…) 커뮤니티는 계속해서 보살펴야만 하는 혼란스럽고, 긴박하며, 창조적인 공간이다. (..) 그러므로 원칙에 뿌리박고 합의된 방침을 실천하고 모임을 이끌 충분한 권위를 부여받은 리더가 없다면 실패하기 쉽다. 그러한 리더에게 필요한 권위는 권력과는 다르다. (..) 우리는 말과 행동을 스스로 ‘스스로 창조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대본으로 말하지 않고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107-108
+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렇다. 권력에의 의지와 권위는 오히려 반대 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랬지만, 나는 앞으론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답게 사는 사람이 권력을 잡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내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바로 ‘리더십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커뮤니티일수록 리더가 필요없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되려 훨씬 더 노련하고 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조직을 꿈꾸었던 것 같다. 모두가, 하나하나가 리더여서 누가 리더야? 라고 물으면 누구 한명을 집어낼 수 없는 그런 모습.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의 조직은 바로 원피스의 ‘밀짚모자 해적단’이다. 루피가 전체 리더이지만, 각자의 영역에선 그들이 리더다. 결정적인 순간을 제외하곤, 각자의 파트에선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조직은 참 멋져 보인다. 

3) 강요하지 않은 초대
- 세 번째 조건은 모든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열린 초대에 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종하거나 강압하려고 하면 영혼은 놀라 달아난다. (…) 그들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약점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한두 사람은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하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 있다. (…)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잠시 침묵합시다. 그 다음 자신을 소개할 준비가 된 사람이 말하고, 그 다음 또 원하는 사람이 뒤를 잇고, 그렇게 마지막 사람이 말할 때까지 자기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10-112
+ 아, 이런 바보같은! 내가 그랬다. 분명 이 책을 2번 정도 읽었었는데 이 부분에 집중하진 못 했었나보다. 그래서 좋은 책은 여러번 봐야 한다. 내가 만드는 모임에서 나는 사람들이 약간의 압박을 느끼게 하였으리라. 기다림이 부족했다. 침묵도. 분명, 자신을 소개할 준비가 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부터 자연스래 이어서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서로를 지목하게 했단 생각이다. 다음 모임부턴 이 방법을 사용해야 겠다. 

4) 공동의 근거
- 네 번째 조건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필 수 있는 공동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우리는 가치관이나 신앙이 다르더라도 계절의 은유 덕분에 각자의 내면의 삶을 내놓고 집중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 다른 믿음 아래 놓인, 믿음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즉 자연의 리듬과 자연 속 생명의 리듬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다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법칙은 찬성 혹은 반대가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중력에 반대한다’라거나, ‘나는 삼한사온에 반대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계절의 비유는 훌륭하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법칙을 가지고 말하기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다. 아주 직관적이며, 또한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커다란 토대 위에서 우린 안정감을 느끼고 가치관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똑똑한 방법이다. 

5) 정중한 분위기
-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우리는 단정하고 품위 있는 곳에 모여, 단정하고 품위 있는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 다행히도 영혼이 좋아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간단한 공식이 있다. *충분한 공간에 편안한 의자들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임의 규모가 크다면 쉽게 소그룹으로 흩어져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문이 눈높이에 있어야 한다. *싱싱한 꽃과 같은 간단한 꾸밈이 곁들여져 있어야 한다. *소리가 사방으로 튀지 않도록 바닥에 양탄자를 깐다 *조명은 따듯한 백열광이어야 한다. 118-119

- 우리는 기다란 본문과 많은 주제를 다루는 대신 오전 대부분을 간단한 시 한 편을 매개로 하여 단 하나의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 함께한 탐구에서부터 홀로됨과 침묵으로, 그 다음 소모임의 대화로, 그리고 다시 모두 함께한 모임으로 움직이면서 다양한 방식을 배우고, 영혼을 존중하는 공간을 만든다. 천천히 하고, ‘더’를 ‘덜’로 바꾸고, 리듬에 주의를 기울여라. 122

6장. 빗대어 말한 진실: 비유의 힘 
- 신뢰의 서클에서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조심스러운 영혼을 존중하기 때문에 ‘참자아를 잃고 찾는 주제’에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는다. (…) 대신에 리더는 시 한편, 이야기 한편, 음악 한곡, 또는 그림 한점,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은유와 표현들을 통해 주제를 탐구한다. 125
+ 답은 이것이다. 은유다! 질문에 대한 답을 요청하기 전에 정확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 질문은 은유로 말해야 한다. 영혼은 부끄럼을 많이 탄다. 그것은 밝은 대낮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달밤에 흘낏 자신의 모습을 내비친다. 우리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직유법이 아니라 은유법으로 영혼을 말을 한다. 빚대어 표현하는 법을 익히자. 그래서 아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때도, 갖가지 사례, 이야기 들로 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매번 이것은 느끼고는 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아직 은유법에 익숙하지 못한가보다. 하다 보면 그냥 또 어떤 개념을 꺼내는 나를 본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자. 그것도 살짝. 

- 우리가 영혼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빙 둘러서’ 접근해야 한다. (…) 영혼에게 말하도록 명령하는 게 아니라 초대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127

- 나는 이런 예술적 소재를 ‘제3의 것’이라 부르는데, 리더의 목소리도, 참여자의 목소리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의 목소리, 즉 주제의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은유적인 방식으로 빗대어 말해준다. 128
+ 예술적 소재에 대한 설명이 마음에 든다. 리더의 목소리도, 참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제 3의 것. 이는 마치 제 3의 공간의 설명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곳에선 사적인 모습의 나도, 공적인 모습의 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은 그곳에서 반응한다. 어쩌면 영혼이 이러한 방법을 선호하는게 아닐까?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인, 직유법이 아닌 은유를, 메시지가 아니 컨텍스트를, 영혼은 더 좋아한다. 

- 우리는 보통 워트숍이나 수양회에 가면 리더가 하는 말 대부분을 적고 그 다음 다른 이들이 하는 흥미로운 말들은 잘 적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은 거의 적지 않는 편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뢰의 서클에서는 자신이 하는 말과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주로 적는다. 128
+ 내면의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기!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목공>에 대한 탐구를 끝내면서 뫼비우스 위의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자각한다. 사려 깊고, 서로 준중하는 대화를 통해 영혼을 일깨우고, 혼자서 읽었더라면 어려웠을 통찰에 이른다. 153 

7장. 깊음이 깊음에게 말하다: 말하고 듣는 법
- 우리가 신뢰의 서클에서 행하는 규칙들의 형식뿐 아니라 정신까지 맞아들이려 한다면 서로 고치고, 구하려 하고, 충고하고, 바로잡으려는 마음의 습관이 어째서 우리의 삶을 그토록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159

- 당신이 내게 가장 깊은 문제를 털어놓을 때, 당신은 개선되거나 구제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자신의 진실을 보이고, 들려주고,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 당신이 내게 삶의 깊은 의문에 대해 말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내면의 교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에 당신을 최대한 붙들어두는 일뿐이다. 그러나 당신을 그런 식으로 붙들기 위해서는 시간, 에너지, 인내가 필요하다. 161

+ 강한 습관이다. 서로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누구나 그런 모습이 있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습관처럼 책을 펴고 형광펜을 손에 쥘려고 하는데 이럴수가. 형광펜이, 그리고 빨간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는 중간중간 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줄을 긋는 습관이 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에 인생을 바꿔보리라 마음 먹었을 때, 그때부터 책을 사는 것도, 줄을 치는 것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것 자체가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줄을 긋는 것 자체가 나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형광펜이 손에 쥐어지지 않은 상황이 거의 없다. 그렇게 아침에 책을 손에 쥐고 읽으려는데 잘 읽히지 않았다. 중요한 단락이 지나가면 아쉬웠다. 이런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남기고 싶어서 페북에 글을 남겼다. 몇몇 사람들이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난 댓글을 읽고 한 가지 느낌과 생각이 지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느낌은 ‘약간의 불편함’이었고, 생각은 ‘초대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충고는 불편하구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고자, 혹은 내 습관을 고치고자 이 글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모습의 내가 웃겨서 그 상황을 썼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책읽는 습관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로 부터 조언을 받아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 글에서 내가 나의 문제라고 느껴지게 했나?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약간의 변명을 댓글로 추가했다. 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읽는다고. 그렇게 쓰고 말았다. 나는 그리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얼마나 많이 ‘초대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충고, 혹은 조언을 던지는가?" 아마 그 선생님은 그것이 나에게 충고나 조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말이다. 받는 사람에게는 어떤 작은 의견도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더라는 것이다. 나도 종종 페북으로 내 의견을 나눈다. 누군가가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음에도 그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는 조심해야 겠단 생각을 했다. 우린 무의식적으로 서로 고치고, 구하려 하고, 충고하고, 바로잡으려 하기에. 영혼은 그 만큼 섬세하다. 우리의 영혼은 좀 더 민감하게 배려되어야 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것을 배운 에피소드였다. 

-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귀 기울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개 건성으로 듣는다. (…)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영혼의 귀로 솔직하게 듣는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말하고 있음을 알기에 무슨 말이든 충실하게 귀 기울일 수 있다. 165

- 진실하게 말하고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영혼에 안전한 공간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의견, 관념, 믿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떠오르는 영혼의 진실을 말하게 된다. 167

- 나는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삶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는 걸 알아차리면서 문제의 근원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갈 만큼 자유로워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게 필요한 어떤 해결책이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171
+ 우린 직감적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가? 아님 그저 내 곁에 있고자 하는가?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자. 알아채고, 정신차리자. 곁에서 머물자. 공간을 주고, 귀 기울이자. 나 역시 나에게 필요한 해결책은 어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있을 것이며, 내가 답을 발견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 주위에선 더욱 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 내가 주고자 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아이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공간. 가끔 나도 아이들은 판단한다. 특히 내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 사실 그랬다. 한 아이가 내 검은 새끼 손가락을 가지고 뭐라고 했다. 자기는 내 손가락을 보는게 불편하다고, 그냥 빼면 안 되냐고 말했다. 나는 그 아이의 그 말에 기분이 나빴다. 지금까지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솔직한 마음은 이랬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행동이 미워보였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나도 기분이 나쁘다고 약간은 흥분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성숙한 반응이 아니었다. 좀 더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 들어보고, 내 마음도 살피고, 좀 더 침착해진 다음에 반응해도 괜찮았을 것인데. 너무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좀 부끄럽다. 음. 판단하려는 나를 알아채자. 

8장. 물음 속에 살기: 진리의 실험
- 솔직하고 열린 질문의 특징은 무엇인가? 솔직한 질문은 ‘나는 이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고, 당신이 그것을 말해주기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는 질문이다. 솔직하지 못한 질문은 상대방의 영혼을 모욕한다. (…) 열린 질문은 상대방의 탐구를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넓혀주는 질문이며, 특정 방식으로 상황을 처리하라고 재촉하거나 유도하지 않는 질문이다. 180-181

- “한 걸음이라도 말하는 이의 말보다 앞서 나아가지 마라”가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위한 지침이다. (…) 영혼은 아주 잘 조율된 거짓말 탐지기와 같다. 영혼은 자신을 조종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아주 예민하게 포착하고 달아난다. 182

- 중심인물에게만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공간을 만들고, 보호한다’는 이미지는 투명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거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준다. (…) 우리가 중심인물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또 하나의 규칙은 ‘이중 기밀’의 규칙이다. 위원회를 마치고 나면 그 안에서 이야기한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197

9장. 웃음과 침묵에 대해: 알고 보면 아주 가까운 사이
-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어색해하거나 긴장하지 않으면서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유머로써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물론 우리는 그들을 좋은 친구라 부른다. (…) 침묵과 웃음을 자주 나눌수록 신뢰는 더욱 깊어진다. 영혼은 잘 놀라기 때문에 침묵을 사랑하고, 침묵은 영혼에게 안전한 느낌을 준다. 영혼은 진실을 원하기 때문에 웃음을 사랑하고, 웃음을 종종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혼은 생명을 사랑하고, 침묵과 웃음 모두 생명을 준다. 205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하는 침묵은 교감의 한 형태다. 서로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침묵은 우리를 연결하고, 어떤 말로도 전달되지 않는 진실에 가닿게 하고, 또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돕는다. 208
+ 침묵은 우리를 연결한다는 말. 생각해보면 침묵을 견딜 수 있는 건 '친밀한 사람'일 때 가능하다. 친밀함이 없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침묵하고 있으면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간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 교감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 생각해보지 못 했던 아이디어다. 무엇보다 모임의 리더 스스로가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다음에 한번 시도해보자. 

-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소음이 가득한 공간에서 일한다. 그러나 일터에서 나와 침묵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차에 오르자마자 라디오를 켜는가? (…) 침묵이 없다면 우리의 모임은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영혼에게 나오라고 소리치는 다른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213

- 웃음과 침묵이야 말로 우리가 신뢰의 서클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 가장 비정치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웃음과 침묵이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고 권력을 바꾸는 데 이용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 웃음이 불의한 정치체제를 뒤흔들 때 권력의 기반에 금이 가고, 정치적 지진계를 계속 요동치게 할 수 있다. 216
+ 웃음은 탁월한 저항의 방법이다. 침묵도 그러하다. 얼마 전에 프랑스 IS태러 사건이 떠오른다. ‘샤를리 엡도’ 그들은 철저하게 웃음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대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신>에선 이런 말도 있다. ‘사랑을 무기로, 웃음을 방패로’ 말 그대로, 웃음은 방패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10장. 제3의 길: 일상생활에서의 비폭력
- 우리는 신뢰의 서클에서 세상의 폭력에 대응하는 ‘제3의 길’에 대해 배운다. 제3의 길이라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동물적 본능인 ‘싸우느냐, 아니면 달아나느냐’하는 이분법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 제3의 길은 비폭력의 길이고, 내가 말하는 비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225

- 제 3의 길을 걷는 건 문자 그대로 걷기와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영혼을 존중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우리가 제 3의 길을 걷기 원한다면 이 같은 실천이 얼마나 간단한지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같은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기업 문화에서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게 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는 것에만 연연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외면하는 생활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225-227
+ 이 문장을 쓰면서 약간 전율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영혼을 존중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너무나 완벽한 표현 방법이었다. 영혼을 존중만 해선 안 된다.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영혼이 없는 행동은 의미없다. 그리고 빨리 뛸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조금씩 영혼을 존중하는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나다운 장면을 쓸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나다운 장면’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내가 영혼을 존중하기 시작했던 모습, 그리고 조금씩 더 존중해나가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기존에 익숙하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 하지만 내 영혼의 입장에서 더욱 두근거리는 선택들. 그 선택을 반복해 나가는 것이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나의 큰 꿈으로 마을과 학교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을 그리 높은 수준으로 두지 않는다.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만약, 그 과정에 마을과 학교가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면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다.

- 우리가 제 3의 길을 걷기 원한다면 이 같은 실천이 얼마나 간단한지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같은 실천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기업 문화에서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게 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는 것에만 연연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외면하는 생활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227

- 비폭력 이론의 핵심 근거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혼이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근거에서 행동할 때 세상이 변화할 수도 있고,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혼을 존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최소한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227
+ 내가 영혼을 존중할 때 세상은 변화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지나친 사회혁신가들을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 변화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더 자기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바로잡고자 기꺼이 나서는 행동은 더욱 존경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발성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혁신과 혁명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는 될 수 있지만 결코 목적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목적은 언제나 ‘온전함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 최고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진실 말하기를 하고자 할 때 먼저 자신의 진실부터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진실 말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부터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자신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요컨대, 최고 경영자의 진실 말하기가 분명하고 감동적일 때 어떤 직급에서든 진실말하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 229

- 자신의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선의에서 한 행동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선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평화로울 때 작은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될 수 있다. 230
+ 누군가 진정하지 않았던 것을 진정하게 말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그에게 감동하고, 영향을 받는다. 그 순간은 자신의 ‘옳음’과 ‘에고’를 내려놓은 순간이자, ‘그림자'를 직면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너무나 무서운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지날 때 느껴지는 그 연결감과 깨끗함은 아마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 우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수준까지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힘을 요구하고, 그러한 자극이 우리의 삶에 사랑, 아름다움, 선함, 진실을 가져온다. 237

- 영혼은 관대해서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영혼은 현명해서 고통스러워도 문을 닫고 숨지 않는다. 영혼은 희망에 차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방향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영혼은 창조적이어서, 우리를 패배하게 하는 현실과 도피일 뿐인 환상 사이에서 길을 찾아낸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는 단지 우리 자신과 영혼을 분리시키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영혼의 힘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무는 일이다. 244
+ 벽을 허무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아마 벽 뒤에 숨으려는 나의 민낯을 자주 확인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어제 분명 빛에 노출 된 것 같은데, 오늘 나는 또 벽을 쌓고 뒤에 머문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꺼내는 순간, 벽은 사라진다. 그렇게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쌓고, 허문다. 벽은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 벽은 언제나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나는 좀 더 빨리 벽 뒤에 숨은 나를 발견할 것이며, 더 자주 벽을 허물 것이다. 오늘도 2시간 정도는 벽 뒤에 있을 만한 행동들 (쓸데없는 웹서핑과 게임 방송 보기)을 했다. 하지만 더 자주 인식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행동을 바로잡아 나갈 것이다. 세상의 빛과 내 영혼의 빛이 만날 수 있게 말이다. 

리뷰
책에 대한 리뷰는 간단하다. 이 책은 10번은 봐야 할 책이다. 이번에 보는 게 3번째인데, 또 새로운 책을 보는 것 같았다. 앞부분은 워낙 공감하면서 봤던 내용이라 새롭진 않았는데, 중반 이후, 특히 실제로 신뢰의 서클을 만들 수 있도록 자세한 지침을 쓴 부분은 내가 그렇게 몰두해서 읽지 않았나 보다. 새로웠다. 침묵과 웃음에 대한 부분도 새로웠고, 마지막 제 3의 길도 그랬다. 그래서 더 좋았다. 또 지난 2번은 초서를 하면서 읽은 게 아니라서 이번에 읽을 때 더 깊이 읽었던 것 같다. 

글을 읽고, 생각을 적으면서 ‘아, 내가 생각보다 사회에 불만이 많구나’란 맥락을 읽었다. 음하하핫.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반항심이 커지고 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역사를 배우면서 현 권력과 제도, 시스템에 대한 저항심은 날로 날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반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작년에 들어서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 그리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책이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였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아, 나는 이런 부족사회를 꿈꾸고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인디언들의 생활 태도나 성숙한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앞으로 인디언과 관련해서 공부하겠단 다짐도 했다. 파커 파머의 사상의 흐름이나, 공동체의 모습도 이러한 인디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한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함께 연대하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그러한 상상을 하게 한 책이 나에겐 이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이다. 그래서 더욱 값지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핵심 한 줄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작가 소개_파커. J. 파머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교육공동체리더십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강의수련 활동을 벌여온 그를 사람들은 교사의 교사’ 또는 위대한 스승이라 부른다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명으로 선정되었으며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많은 이들을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승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책에서 파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고백과 통찰력으로 인생의 좌절과 성공나약함과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페이지마다 넘치는 특유의 부드러운 유머와 따뜻함으로 진정한 자기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그 길을 안내한다저서로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낯선 사람과 함께하기>,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등이 있으며잡지 <커몬빌> <크리스천 센추리>작가상을 수상했다고등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교육출판연합과 사립학교협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옮겨적기 + 리뷰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Listening to Life
- 소명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P.19
-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21
- 영혼은 고요하게 그들 받아들이며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P.22

+ 이 책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과 잦은 침묵이 찾아왔다. 워낙 관심있는 분야이고, 좋아하는 작가라 그런지 읽는 내내 참 행복했다. 소명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소명이란 외부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며 언어라기 보단 비언어에 가깝다. 소명은 재촉해선 알 수 없다. 고요히, 영혼을 신뢰하는 상황 속에서만 말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미세한 신호를 캐치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고속도로처럼 내 머릿 속에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그 신호를 민감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고요함 그리고 깨어있음’이다. 생각은 고요하게, 그러면서도 정신은 깨어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소명은 말한다. 

-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온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P.18

+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참 어렵다. 특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나라에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부모의 욕심’ 혹은 ‘사회의 강요’로 인해 엉뚱한 꿈을 따르기 쉽다. 나 역시 전파통신 전공 졸업 후, 그 길로 나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당연한 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 길이 나에겐 의미가 없었고, 나는 마음의 신호를 들으려고 애썼다. 그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아주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나의 손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존재로 이 땅에 온 것이다. P.30

+ 이미 갖추어져 있음. 이 명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선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아들 재원이를 키우면서 파커 파머 손녀 이야기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재원이를 보면서 느끼는 것도, 그는 자기만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놀 수 있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왔다는 느낌이 든다. ‘난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아빠로서 우리 아이가 무슨 놀이를 하러 왔는지 함께 찾고 싶다. 그리고 이미 가진 본연의 모습으로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격려하고 싶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여정도 지지받고 격려 받으리라. 

- 진정한 소명은 자아와 봉사(섬김)을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대 인류의 의문은 불가피하게도 역시 중요한 문제인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귀결된다. (…) 왜냐하면 관계의 바깥에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자아란 없기 때문이다. P.39

+ 존재론과 관계론이 여기서 나온다. 관계론이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누구와 연결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주를 이룬다. 서양에 비해 동양이 관계론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동양 문명은 애초에 ‘분리된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동양 사상은 어떤 현상 이면에는 언제나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 엉뚱한 곳을 헤매는 여행을 하고 나서야 자아와 소명의 개념에 눈을 뜬다. 하지만 이 여행은 아무 걱정 없는 ‘패키지 여행상품’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그 옛날의 고난과 어둠, 위험이 가득한 성지 여행이나 순례 여행과 흡사하다.  P.41

+ 마치, 패키지 여행을 갔을 때보다 자유여행을 했을 때 고생도 많지만 기쁨도 큰 것처럼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헤매고 고생하더라도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사는 삶. 

- 나는 워싱턴 시대로 이주해서 교수가 아닌 커뮤니티 조직자가 되었다. (…) 나는 훌륭한 커뮤니티 조직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민감했다. 소명으로의 발돋움은 내게 너무도 힘에 부쳤다. / 내가 도망친 진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학자로 성공하지 못할까봐 두려웠고 대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연구와 저술활동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 나는 언제든 어떤 주제든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 영향받지 않고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 약간의 게으름과 성급함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해 온 다른 사람들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 /나는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발전시키는 재능을 부족하지만 나만의 어떤 것을 조물락거려 만드는 일은 잘 한다. 

+ 내가 위의 글들을 모든 이유는 단순하다. 파커 파머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이 글들이 나에게 너무나 와닿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도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 책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이번 단락에서는 유난히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아니, 지금 파커 파머가 설명하는 게 바로 나잖아! 라는 느낌마저 받았다. 특히 제도권 생활을 벗어나 변두리를 향해 나아가는 점을 비롯해서. 그리고 내가 꿈꾸고 바라는 삶이 파커 파머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란 생각도 많이 했다.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는 삶. 어떤 삶이 나에게 주어질 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런 삶을 닮고 싶다. 

- 인류와 인간 상호관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은 바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보살피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나온다. 사회제도는 종종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려 든다. (…)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회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더 이상 내면에 깊이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방식을 가장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며 그것을 표출하며 살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을 사회 변혁의 파문을 일으킨다. 수백만 명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P.61

+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회변혁가’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과거 ‘내면에만’ 빠져있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본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자신’으로 살려는,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사회적으론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노력도 없었고, 게다가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의 사건에는 눈을 감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나이가 들어선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자주 봤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생긴 의구심은 바로 ‘진정성’이었다. 아무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대단한 일을 사람이긴 하나 행복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인간상에서도 멀어지는 것이고. 파커 파머의 이 글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고. 

3. 길이 닫힐 때 
- 루스의 대답은 솔직했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라네. 그리고 60년이 넘게 살아왔지. 그러나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반면에 내 뒤에서는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다네. 이 역시 삶이 나를 준비된 길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  P.74

+ 삶이 나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이 아닐까? 경험상, 내 뒤에서 길이 닫힌 경험은 무엇이 있을까? 3가지만 떠올려 보자. 첫 번째로 나는 젊은 시절, 출판기획자가 되고자 출판 전문 학교에 입사하려 애썼던 적이 있다.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 길로 나는 출판사와는 멀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에게 맞는 길이었다. 그땐 속상해서 눈물도 났지만. 두 번째로 나에게도 취업을 하러 돌아다니던 시절이 짧게나마 있었다. 그 당시 몇몇 대기업에 면접까지 봤지만,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의 내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다행이다. 나는 다행히 몇 번 떨어지고 나선, 그래 이 길이 아니다며 바로 취업을 포기했는데, 그 선택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직전 회사에서 나올 때가 아닐까. 그곳에서 (갑작스러웠지만)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심마니스쿨이 있고, 내가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모든 이유는 적절할 때에 적절한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신뢰가 나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건 아닐까. 앞으로 어디로 날 데리고 갈 지 궁금하기도 하고. 

- 세상에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의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인 경우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본연의 나와 상관없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한동안은 남에게나 나에게 근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한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결국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맞는다. 나 자신과, 남을,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좋은’ 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끼치고 말 것이다. 내가 나의 본성, 관계의 본성이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덤빈다면, 그 순간 나의 등 뒤에서 길이 닫힐 것이다.  P.86

+ 지난 2013년에 처음 심마니스쿨을 만들었을 때, 나는 2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 지 몰랐다. 원래 그렇게 계획적이고 치밀한 편이 아니라, 일단 만들고 나면 ‘심마니스쿨’이라고 하는 것이 알아서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참 무계획적인 계획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교육철학이었다. 아이들의 온전함을 믿고, 그들을 그 자신으로 자랄 수 있게 돕는 ‘내용’과 ‘방법론’을 개발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뜻에 관심있는 어른들과 연대하겠다는 것. 그렇게 심마니스쿨을 만들고, 다른 두 선생님들과 정기적으로 모여서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참여도 하고 개최도 하고 그랬다. 2014년에 했던 가장 큰 실험은 매월 1번 열었던 심톡이었고. 나는 학기 중으로 계속 교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다양한 사업 기회를 따내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얻어 낸 기회가 ‘사회적 기업가 육성 과정’이다. 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창업지원 사업인데, 꽤 큰 금액의 예산을 지원해준다. 다만 몇 가지 자연스러운 제약도 있었다. 이 사업을 신청하게 되면 1년 뒤에는 반드시 법인화를 거쳐야 한다든지 하는. 누군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고민했다. ‘내가 정말 하려고 하는 것이 교육 회사를 만드는 것일까?’라는 고민에서 자유로워 지지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러한 교육 회사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이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고해졌고. 나는 아직은 그저 '느슨한 네트워크’로 나아가고자 한다. 좀 더 강력한 1인 기업가가 되고, 더 밀접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그리고 힘이 더 모이고, 나 역시 WHY가 분명해졌을 때 필요하다면 기업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성찰이고, 실천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경험과 관계. (돈이라고 씌여진) 하나의 문은 닫혔다. 하지만 나머지 세상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걸어 나가보자. 가볍게 말이다. 

- 영적 여행의 길에서 자주 일어나듯이 우리는 역설의 심장부에 도달한다.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 문이 닫히면 방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것은 곧 그 공간을 제외한 다른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P.98
-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P.99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생에서 막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은 논리가 아니다 그저 믿음일 뿐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믿음이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부딪쳤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너진다. 되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인생에서 2번 정도의 경험이 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은 왜 이딴 식일까. 그 순간 만큼은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왜 이런 식이냐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를 가지고 그러냐고. 이정도면 양심껏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거냐고. 되지도 않는 불평과 화를 쏟아낸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그럼에도 내가 그나마(?)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이러한 사건에도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거란 믿음. 그래도 죽진 않았으니 뭐가 되도 될 것이란 믿음. 말도 안 되지만 그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 말이다. 그렇게 작은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고 숨만 붙어있으면 되더라. 시간은 지나가고, 나는 결국 살아있더라.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성숙해졌다고 말하더라. 인간은 합리화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뭐, 일정 사실이기도 하고. 그 경험이 없었담 그 경험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경험의 폭 만큼 이해의 폭도 넓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상태이다. 우울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 버린다. (..) 사람과 사람 사이를, 머리와 감정 사이를, 또 자기가 보는 자기 이미지와 남들이 보는 자기 모습 사이이의 관계를 끊어 놓는다. P.114

+ 나는 우울증을 겪어 본 적은 없다. 다만 곁에서 본 적은 있다. 3년 전쯤, 우리 할머니가 노인 우울증에 걸리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사실 때는 몸은 안 좋으셨지만 우울증은 없으셨다. 참고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평생 앙숙같은 관계셔서, 나는 두 분이서 기분 좋아하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워낙 오래 전에 결혼해서 사시느라 이혼을 안 한 것이지, 요즘 같았음 바로 이혼했을 성격 차이셨다. 그래서 두 분은 틈만 나면 싸우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싸움’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나자, 할머니는 ‘싸움 할 대상’이 사라져 버려서인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마셨다. 처음에는 오히려 속 편하다는 식으로 말씀 하셨는대도 말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를 확인한다. 그래서 ‘사람 인’과 ‘사이 간’은 ‘인간’이라는 말로 묶인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할머니는 되려 할아버지와 다투실 때 자신을 확인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고립됨과 단절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더 많이, 더 깊이 주위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인식해주자. 연결되었음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삶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위안자들처럼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저 불쌍한 사람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재차 확인하려고 든다. P.115

+ 이 인간의 뿌리깊은 ‘구별짓기’! 그저 함께 공감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느 새 우리의 에고는 고개를 쳐들고, ‘나 여기있소!’라고 외친다. 특히 남자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언을 하려고 하는데, 진짜 그러지 말지어다. 그저 충분히 들어줄 지어다. 함께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함께 올라올 수 있다. 함께 내려가지 못하면 둘은 떨어지고, 그럼 여지없이 싸움이 나더라. 왜냐, 같은 공간에 없으니 ‘분리’ 되었다고 느끼거든. 잊지말자. 

- 당신은 우울증을 당신을 망가뜨리려는 적의 손아쉬로 보는 것 같군요. 그러지 말고 당신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친구의 손길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 P.120

+역경은 우리의 친구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니까. 

-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게 된 데는 최소한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지성인으로 생각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머리속에서 살도록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신을 체험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 더 열중했다. 셋째는 높아진 나의 에고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왜곡된 도덕률 떄문이다. P.121

+ 나는 위의 문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분리의 이유 4가지와 그 해결책. 
1) 가슴과 머리의 분리 : 생각하기 보단 느껴라. 순간을 살아라. 
2) 경험과 개념의 분리 : 신은 언어 밖의 존재다. 침묵하고, 받아들여라. 
3) 진아와 에고의 분리 : 내가 꾸미고 있는 것을 말하라. 거짓을 고백하라.
4) self1와 self2의 분리 : ‘해야 한다’에서 ‘하고 싶다’로. 내면의 욕구를 들어라. 

- 이제 나는 나 자신이 약함과 강함, 약점과 재능,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이제 나는 온전해진다는 것이 그 중 어느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임을 안다. (..) 전체를 받아들이는 인생은 살아가기에 더 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생 전체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P.129

+ 온전함으로 가는 길은 선택이다.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반쪽 인생을 살게 된다. 가게 된다면, 분명 역경을 겪는다. 하지만 더 큰 평화가 찾아온다. 충분한 흔들림을 통해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선한 길보다 온전한 길은 훨씬 더 어렵다. 온전한 길에선 내 안의 선한과 악함을 동시에 봐야 하기 때문이다.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개념에 종종 거부감을 나타낸다. 자신을 리더로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지나친 자기 확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피일 수도 있다. (…) 단지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역시 이 땅에 살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P.135
-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떄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 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리더로 만드는 진실이다.  P.140

+ 리더십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내 공감한 내용이다. 나 역시 리더십에 대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았을 때 거부감 혹은 부담감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 안에 태어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인정한다면, 리더십 또한 모두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마다 영향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영향력 그 자체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기에. 

- 왜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걸까? 왜냐하면 그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드리우는 그늘의 궁극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억압하는 리더가 되고 만다. 하지만 애니 딜라드의 말대로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의 괴물들을 타고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중요한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지점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장이며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또한 조각난 인간 삶의 표면 아래 공유되는 의식의 공동체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온전함’으로 이끌 수 있다.  P.144

+ 이 부분에서 내가 좋아하는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 비유가 나온다. 여기서의 영웅이란, 뭔가 외부로 대단한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기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란 적을 자신에게서 발견한 사람이 더 가깝다. 그 괴물을 물리치고, 더 밑으로 내려가 근원적인 사랑과 연결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을 ‘각자의 여정’으로 이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영웅이며, 내가 지향하는 인간상이자, 내가 밟아가고 싶은 여정이다. 

- 우리가 리더로서 내적 생활을 다루는 데 자주 실패하면 너무 많은 개인과 단체를 어둠 속에 방치하게 된다. (…) 서로 도와서 우리 내면의 삶을 탐험해야 한다. 그런 도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내면 활동’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 그러한 활동에는 일기 쓰기, 책읽기, 명상과 기도처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두번쨰로 내면 활동은 공동체를 통해서 도움 받을 수 있다. (…)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비결은, 관계를 맺되 그 안에서 서로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는 역설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되, 그 방식은 영혼의 고독을 존중해야 한다. (…) 세 번째로, 우리는 서로에게 두려움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P.164

+ 내적 생활을 다루는 법으로 혼자, 함께 하는 방법이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두려움은 홀로 있을 때 극대화 되지만, 함께 할 때 넘어설 수 있다. 마치 아이가 엄마가 함께 있는 공간에선 세상에 대한 탐험을 지속하지만, 엄마가 없어진 상황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삶을 탐험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부모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재원이를 키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들이려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애착 형성이 잘 되어야 ‘세상에의 탐험’이 가능하고, 사회성이 계발된다고 한다. 꼭 그런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시절은 한번 밖에 없기에, 그리고 나중에 ‘내가 왜 일하느라 아이 한번 더 안아주지 못했을까’ 후회하기 싫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0

6.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계절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의 법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 알의 씨앗은 끊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삶의 단계를 진행시킨다. 계절의 순환은 우리에게 그 여행에 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와 같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주위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시인 릴케는 우리 삶 전체가 ‘질문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P.170

+ 본질적인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질문을 사는 것. 꼭 질문을 풀어내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다.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답없는 질문일 지라도. 

- 계절은 인생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현명한 비유이다. (…) 우리의 인생이 끝없는 계절의 순환과 같다는 개념은 투쟁과 기쁨, 손실과 이득, 어둠과 빛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다. (…)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생이 순환이라는 비유에는 어려움과 함께 안락함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는 게 좋다. 그 이미지에 비추어, 세상에는 우리만 홀로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광대한 존재의 공동체에 참가하는 일원으로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인도에 따르면 이 위대하고 은혜로운 진리의 공동체에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울 수 있다.  P.175

- 가을. 자연은 가을에 어떤 일을 하는가? 자연은 새봄에 다시 자라날 씨앗을 뿌린다. 그것도 놀랄 만큼 풍부하게 뿌려댄다. (..) 죽음과 씨 뿌리기라는 가을의 역설을 탐험하면서, 나는 비유의 위력을 느낀다. (…)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역설 속에서 상반되는 둘은 각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 우리는 어둠 없는 빛을 원하며 가을과 겨울의 고난 없이 봄, 여름의 영광을 원한다. 그런 파우스트적인 거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 (…) 가을은 새 생명의 전조로서 매일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P.178

- 겨울. 겨울은 아주 힘겨운 계절이다. (…) 하지만 겨울의 광포함에도 가을의 쇠락이 그랬던 것처럼 놀라운 선물이 따라온다. 하나의 선물은 아름다움이다. (…) 또 하나의 선물은 모든 살이 있는 것에는 겨울잠과 깊은 휴식이 꼭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 겨울은 눈앞의 풍경을 깨끗히 치워 준다. 혹독하긴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서로를 더 분명히 볼 수 있는 기회, 우리 존재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P.182

- 봄. 봄이 도면 그 계절적 화려함에 나는 낭만적 감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아픈 진실 하나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봄은 그 아름다움을 갖추기 전에 진흙과 오물에 지나지 않는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내 인생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나는 진흙탕을 지나는 것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더 큰 생명이 다가올 거라는 작은 조짐도 믿기 힘들었으며 그 결과가 확실할 때 까지는 희망을 품기도 힘들었다. 봄은 내게 가능성을 지닌 초록 줄기를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가르친다. p.185

- 가을의 풍족한 씨 뿌리기에서부터 엄청난 봄의 선물공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한결같은 교훈을 일러 준다. 즉, 우리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그것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아낌없이 써 버리라는 것이다. (…) ‘최단코스’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결실을 맺기도 힘들고, 우리 인생에서 봄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힘들 것이다. 언제부터 ‘꿀벌이 다니는 길’을 최단코스라는 잘못된 뜻으로 쓰기 시작했을까? 봄에 꿀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잘 보라. 벌들은 꽃과 자신의 운명을 희롱하며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분명 벌들은 실리적이며 생산적이다. 하지만 그 일을 동시에 스스로 즐기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p.189

- 여름. 여름은 한마디로 풍요 그 자체다. (…) 인간 세상에서 풍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요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식을 가지고, 공동으로 저장한 것들을 자축하고 함께 나눌 때 찾아온다. (…) 진정한 풍요는 든든하게 쌓아놓고 음식이나, 형금, 권력, 애정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 찾아 온다. (…) "물론 우리는 커뮤니티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그게 단 하나의 훌륭한 생물학이죠.” (…) 여기 여름철의 진리가 있다.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창조이다. 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p.193 

+ 이 전체적인 계절에 대한 비유는 정말 멋졌다. 파커 파머가 보는 관점에서 삶은 역설이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라 생각되는 겨울은 오히려 자신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쇠락하는 순간이라 생각하는 가을은 오히려 가장 많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 화려한 봄은 그 아름다운 이면의 추함. 풍요로운 여름은 그 속에서 ‘공동체’에의 성찰을 잊지 말자는 것까지. 정말 완벽했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단편적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일회일비 하지 말고, 그저 묵묵하게 가을에는 씨를 뿌리고, 겨울에는 견뎌내고 자신을 직면하고, 봄에는 들뜨지 않되 희망의 신호를 잡아내고, 여름에는 풍요로움에 취하지 않되 공동체에 다시 나누어주는 삶. 파커 파머는 그런 삶을 말하고자 하고 있고, 내가 가장 공명하는 형태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좌절이다. 너무나 닮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록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같이 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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