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나의 목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올해 읽은 책 리뷰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손을 놓으려고 하면 다시 잡게 되는 목표다. 아무리 명색이 블로그인데 독서 리뷰까지 미뤄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하지만 하지 못할 핑계는 많이 생각난다. 바쁘단 핑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핑계, 독서 축제 해야 한다는 핑계, 아직 못한 일이 많다는 핑계.. 모든 핑계를 넘어서서 지금 당장 블로그 리뷰를 쓰자. 그래야 나의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 서두르자! 

5월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불안_알랭 드 보통
생태요괴전_우석훈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남자의 물건_김정운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6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2015년 5월 
25.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올해 인생학교 책을 꽤 봤다. 아주 양질의, 권할 만한 책이란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 정리가 잘 되어있다. 좋은 책이다. 아래의 글이 이 책의 지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삶의 고수는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 몸과 머리, 공부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중 뭐가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탁월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게 완성할 뿐, 그것이 일인지 놀이인지는 타인의 판단에 맡긴다. 그 자신은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다."

나 역시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살기로 마음 먹은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사람, 자신만의 천직을 찾으려는 사람,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분명 초서까지 마쳤는데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구나. 오늘 중으로 올려야겠다. 
 

26. 불안_알랭 드 보통
2015년 가장 많이 본 작가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 나에겐 알랭 드 보통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 이 사람의 책을 읽지 않았지?”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비슷한 작가다. 인생학교를 왜 만들었는지도 공감이 가고, 또 그가 기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기에. 불안이란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불안에 대해서 예전에 TED강의가 있었다. 나도 한번 포스팅 한적이 있고. 


그 내용을 면밀하게 담은 책이다. 각박한 현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워낙 에티카를 재미있게 읽어서 순위는 밀렸지만, 그래도 5월 최고의 책 중의 하나다. 


27. 생태요괴전_우석훈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팟케스트 <나는 딴따라다>에서 우석훈과 선대인씨가 말하는 걸 인상깊게 들었었다. 공감도 많이 했고.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 씨의 책이라기에, 또 가볍게 읽고 싶었던 책이 필요했기에 빌려 봤다. 솔직히 약간 짜맞춘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신자본주의로 인한 부작용들을 요괴로 설정하고,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아이디어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주제는 흥미로웠다.

나는 희안한 습관이 하나 있다. 좋은 책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빌려본 책은 가급적 초서를 하는 편이다. 왜냐면, 앞으로 그 책을 볼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초서를 했다. 초서 말미에 내가 이런 글을 적었더라. 옮겨본다.  

"그냥 내 생각. 교육도 마찬가지. 대학이나 외국의 유명한 프로그램 다 좋다. 하지만 그것에 의존한다면 결국 생태계는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생산자는 따로 존재하고, 우린 교육을 소비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희망은 로컬이다. 우리가 만든 교육을 우리가 소비하는 것.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보는 것. 조금 어설퍼도, 조금 낯설어도, 조금 불편해도 그래도 이용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꼭 필요한 자세라고 본다. 모두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고, 또 듣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이 학교가 되는 것 말이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노예다. 우리를 왕으로 떠받드려는 사람들일 수록, 기업일 수록 경계하라. 그렇게 왕이라는 기분에 취할 수록 나는 더욱 더 그들에게 예속된다. 노예가 된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내고, 그들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지배한다. 고객이라는 말에는 너는 그저 나에게 돈이나 내고 기분이나 좋아해라. 라는 말이 들어있다. 그러니 깨어있자. 우리 모두"
 

28.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충분히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물론 No다. 하지만, 에티카에 감명받고 마음이 움직이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100% Yes!라고 외친다. 올해 나에게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해도 이 책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흠뻑 빠졌던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다. 올해 5월의 책으로 선정했다. 

나는 지나친 고전 만능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전을 일단 읽기 시작해라. 이해를 못해도 그냥 읽어내려가라. 그래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천재 그거 해봐야 뭐 좋을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이다. 내가 몰랐던 것을 인식하고,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힘이 독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티카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언저리를 살펴본 느낌이고, 그것만으로도 올해는 만족스럽다. 고전에 너무 목맬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읽을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읽게 되니 말이다. 

이 책을 필두로,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일단 니체를 좀 더 읽었고, 들뢰즈에 대한 책도 몇권 샀다. 철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삶에 대한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싶단 생각은 아주 커졌다. 스피노자가 꿈꾼 세상.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나도 그것을 함께 꿈꾼다. 나와 함께 할 사람들도 어서 이 책을 읽어보시길! 


29.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강점 혁명에 이어서 읽은 책. 뭘뭘 하라! 라는 식의 책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강점 카드를 적기엔 좋은 책이었다. 강점 혁명과 셋트로 보면 괜찮을 책이나, 한권만 권한다면 역시 강점 혁명이다. 링크는 여기


30. 남자의 물건_김정운
이 책은 다행히도! 블로그에 올렸었다. 김정운 교수님의 책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재미가 있다.
그분 삶을 존경하기도 하고. 링크는 여기로


31.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이 책은 누군가의 페북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려서 찾았다가, 한참을 보고 다시 꼽아 두었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글쓰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이 있다면 글을 써야겠구나! 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 이 책도 옮겨적었었다. 글을 쓰며 그래도 이때는 내가 꽤 부지런했었다는 사실을 재 확인한다. 링크는 여기로




2015년 6월 
32.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했던 책이다. 꽤 길게 써 보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여기로 링크
이 당시 나는 스피노자에서 자연스럽게 니체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고, 일단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책을 골랐다. 알고보니 이진우 교수님은 한국니체학회 회장이시더라. 니체가 있었던 지역을 방문하면서 적은 에세이다. 내가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니체의 삶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사실 일반 분들께 니체 입문서로는 이후에 읽었던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더 권하고 싶다. 


33.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자 상상 속 멘토, 피터 드러커 옹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다. 하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개인적으론 드러커옹의 책으론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2009년에 경영에 대해서 한참 관심이 많았을 때가 있었는데 요즘엔 인문학 책들을 더 읽다보니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이 책은 길게 리뷰했었다. 링크는 여기 
 

34.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이 책은 핸드북이다.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한 책. 짦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다. 


35.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올해 6월의 책!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을 한번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찰스 핸디의 선택이 역시 옳았음을 재확인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 독립적 프리에이전트를 꿈꾸는 사람들, 1인 기업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책 역시 이미 블로그에 써 두었었다. 링크는 여기로. 


36.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책. 작가수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 요즘은 결론이 명쾌한 책이 좋다.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고. 결론은 이것이다. 글을 쓰는 자가 작가다.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일단 써라. 쓰다 보면 된다. 핑계 만들지 말라. 


37.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나는 지금까지 에니어그렘을 위주로 공부해왔다. 그러다 보니, MBTI는 비교적 소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와우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첫 시작이 이 책이다. 아주 쉬운 책이고, 누구나 MBTI를 배울 수 있게 써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에니어그램과 같은 이유이다. 
이 책의 잘못은 아니고, 절대 기질이나 성격은 책을 통해서는 온전히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배웠다. 처음에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고 생각한 MBTI를 온전히 이해한건 10월이 넘어서니까. 책으론 한계가 있다. 


38.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아. 이 책도 강렬하다. 이번 달에 읽은 책 중에서 3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 그가 말하는 어조도 특이하고,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다. 앞서 작가수업과 딜리셔스 샌드위치가 읽고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이라면, 이 책을 되려 읽고 나면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아니, 사실은 책이 아니다. 위대한 인간의 정신을 미친듯 읽고 싶어진다. 니체가 그랬고, 사사키가 그랬듯.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어디러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명령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따르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의 정보를, 즉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명령은 자기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확실한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지도 없이 이국의 숲을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시달리게 합니다. …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있는 이유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 김현 

인문학 강의를 들을 때 봤던 글인데, 최근 책 <싸우는 인문학>을 보다가 다시 접했다. 이 글은 나에게 꽤나 큰 울림을 주었다. 문학과 인문학의 유용적 무용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 글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비평가에 의해서 무용한 것이 되려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윗 글에서도 특히 나는 이 두 가지 글자에 꽃혀버렸다. ‘억 to the 압'. 사전적 의미로 '억압’이란,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의 주제가 ‘친밀함’이었다면, 요즘은 이 억압이란 개념이 나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요근래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펼쳐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이 글을 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무엇에 억압 당하고 있을까? 질문을 한번 품어보자. 

앞서 나온 사례를 통해 억압을 한번 들여다보자.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 필요한 말이라, 차라리 지금은 유용함은 무용함을 억압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들은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들은 노래부르는 베짱이를 억압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느냐고, 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베짱이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무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억누른다. 그렇게 베짱이는 ‘유용함’으로 억압당한다. 이러한 예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다. 대학생들은 이제 1학년 부터 ‘유용한’ 스팩을 쌓느라 ‘무용한’ 다양한 경험들을 뒷전으로 미룬지 오래고, 고등학생들은 ‘유용한’ 국영수 공부를 하느라 ‘무용한’ 미술 및 음악, 체육 활동을 억압당하고 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다를까?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유용함의 바다’이고 우린 그곳에서 사는 ‘물고기'다. 유용해 보이지 않는 활동을 무시하다 못해 조소하고 심지어는 타박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렇게 우리네 물고기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유용함의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에 억압 당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억압하는지도 모른채. 

신문 기사의 폭력성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생각해보자, '핵심은 곁가지를 억압한다.’고. 신문 기사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자의 역할은 사건의 주제가 되는 헤드 라인을 가급적 ‘간결하게’ 다듬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곁가지들은 필연적으로 잘려나가게 된다. ‘핵심만 논하는 것’ 그것은 바쁜 우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필연적 일상이 되었다. 즉, 핵심과 본론이 곧 미덕이 된 사회다. 언듯보면, 이것은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억압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 제목을 보자.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 아마 대부분은 시선을 0.1초 정도 머물다가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기사로 쓱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실은 이 기사의 사건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지 보이는가? 알랭 드 보통의 <푸르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오는 예시인데, 참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곁가지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품고 있지만, ‘사건의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모두 잘려나간다. 그와 동시에 비극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사라진다. 결국 우린 삶의 본질 중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랭 드 보통의 책 48쪽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주의깊게 읽어보자. “이른바 신문을 읽는다고 불리는 혐오스럽고도 관능적인 행위.”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 덕분에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벌어진 모든 불운과 격변,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가와 배우의 냉정함 등등은, 심지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일종의 아침 대접으로 변모되며, 아울러 우리는 카페오레 몇 모금을 마시도록 권유받는 것이다.” ...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5만 명의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잊고, 신문을 한편에 던져버리고, 일사의 지루함에 대한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나는 이것이 매일 아침 뉴스로부터 우리가 받는 ‘억압’이라 생각한다. 글자수 40자 제한의 트위터나 페북도 실은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억압받는 삶의 풍부한 곁가지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성실함은 당연한 미덕인가
우리기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실함과 게으름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성실함은 게으름을 억압한다. 며칠 전 페북에서 웃긴 자료를 보았다. 한 남자가 말한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각자 생각해보라. 그리곤 남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ㅋㅋ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한다. 알아 봤더니 이 남자는 러셀 포스터, 수면 주기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경학자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보시라. ‘수면’에 대한 좋은 강연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해당 발언은 16:45초 쯤에 있다. (링크는 여기 http://on.ted.com/Foster) 나 역시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성실한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으른 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말 그대로 '게으른 사람들'로 본다. 딱 한번 필터를 쒸울 뿐이지만 그 타격은 크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그렇게 ‘반대편 사람에 의해서’ 손 쉽게 억압받는다.  




이 비슷한 맥락에서 ‘목표’는 ‘방황’을 억압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 부터 우린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몇번이나 듣는다. 넌 꿈이 뭐니? 넌 나중에 하고 싶은게 뭐니? 올해 목표는 뭐니?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나에게 관심있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던지는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만들어낸 어릴 적 나의 꿈은 ‘과학자’다. 그러면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ㅋㅋㅋ 이처럼 '꿈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꿈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억압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나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며, 왜 목표를 적지 않냐고. 왜. 왜. 도대체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나 역시 이러한 오류를 많이 저질렀다. 아니,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 중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던 나의 당시 꿈은 ‘20대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멘토링을 해주겠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미친 생각임에 틀림없지만, 그 당시 나에겐 하나의 ‘비전’ 이었다. 그리곤 외치고 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그 말이 ‘방황 혹은 목표 없음’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겐 얼마나 억압적이었을까. 평생 죄를 갚으며 살기에도 모자란 죄를 지었다.

모든 구분은, 그 자체로 억압이 된다.
그렇다. 어쩌면 모든 구분은 억압일지도 모르겠다. 선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점이 되며, 그와 동시에 악을 억압한다. 전문가는 스스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기준이 된다. 그리곤 자연스래 비전문가를 억압한다. 이게 어떤 장면인지 연상되지 않으면 상상해보라.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그 주제에 관해서’ 함께 존중 받으며 활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상상되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아직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한 편이다. 전문가는 그 존재로서 비전문가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연스래 발언권을 뺏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까닭은 위의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명히 기준 짓는 사람일수록, 그 기준으로부터 타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되려 어려운 법이기에. (게다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돈을 많이 쓰면 썼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최근 철학자 들뢰즈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이런 개념이 있더라. 들뢰즈는 '분리'를 '층화'라 칭했다. 그는 말한다. 층화된 사회일수록 고착화된 사회라고. 계층끼리 대화가 안 되는 그런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반면 탈층화된 사회는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관계를 맺어가며 훨씬 더 역동적 삶을 창출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and (그리고)’의 관계를 맺는 것을 꿈꾼다. 사물들이 하나의 중심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새로운 ‘and 그리고’ 그리고 ‘between 사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이 형식의 사유를 들뢰즈는 ‘리좀’이라고 불렀다. 리좀이란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통해 자유롭게 관계 맺으면서, 장 전체을 만들어가는 사고를 말한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데 난 너무 즐거웠다. 그래. 내가 원하는 사회가 바로 이러한 ‘탈층화 된’ 사회임에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전문가란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사회. 물론 꿈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동문회나 향우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로써 자연스러워 진다. 사실 어릴 적 부터 그런 집단에 대한 이상한 반감이 있었는데, 그 반감의 이유를 이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억압에 대한 마지막 성찰, 깨달음.

정리해보자. ‘분리'은 억압을 만들고, 억압은 '인간 소외'를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린 분리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로 부터 소외된다. 관계는 그렇게 단절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는 파편처럼 살아간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끼리. 선함은 선함끼리. 유용함은 유용함끼리.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준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 반대편의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그 이유로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의 생동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시키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성 및 깨달음’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20대 중반부터 이 ‘영성 및 깨달음’이란 테마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나는 강렬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출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젠 정반대의 물음을 던진다. ‘깨달음’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품고 산책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깨달음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하다. Oneness, 즉 개체가 분리를 넘어 하나됨을 인식하는 것, 깨달음은 이 상태를 말한다. 이는 평화로운, 비이원적인 상태를 의미하며 자아(에고)로 부터 자유로워진, 언어를 넘어선 영역을 가리킨다. 나의 미천한 지식이 이 모든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으론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레 무엇을 억압할까? 나는 보았다. ‘깨달음’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수 많은 구분이 생겨나는 모습을. 영성이나 의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선을 긋는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앞서 말한 ‘탈층화’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비판하려는 것은 ‘깨달음의 추구’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일련의 ‘무의식적 억압’이다. 우리를 둘러싼 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수 많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했고, 억압했고, 무시했던 적이 있고 말이다. 이러한 예시가 아디야 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집단에서 매우 흔히 일어난다. 나는 옳다. 깨어났으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깨어났으니까. 에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꿰뚫기가 가장 힘든 에고는 바로 실재를 잠시라도 보았던 에고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남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깊숙이 미혹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지나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디야 샨티의 말처럼 우리에겐 결국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 새로운 눈을 갖는 훈련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과 대면하는 것이다. ‘옳다고 주장하고, 구분하고, 억압하는’ 내 모습과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이다.  

결론, 자명한 것을 의심해보자는 것 
깨달음이란, 결국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알아차림이다. 무엇에 대한 알아차림일까? ‘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도입, '유용함과 무용함'에 대한 분리를 너무도 지혜롭게 정리한 글이기에 빌린다. 이 지혜로운 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모든 분리는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앞서 말한, 무용함과 유용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분리해서 읽을 수는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분리하려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결론을 쉽게 풀어보자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것, 자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일수록 그것은 되려 상대를 강하게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들 옳다고 느껴지는 개념 마저도, 예를 들어 ‘깊이 있는 삶’ ‘친밀한 관계’ 심지어 ‘타인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삶’ 마저도, 억압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게 억압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특히 가까운 아내와 가족들)에게 내 가치를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그 축적된 억압들은 내가 앞으로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나의 업이다. 나는 이러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무엇을 억압하는가. 아니, 당신은 무엇을 자명하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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