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없는 경청

-영화 ‘Good will hunting'을 보고-


 영화 ‘굿 윌 헌팅’을 볼 때마다 나는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생각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영화 ‘타이타닉’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총 11개 부분을 수상했으며 아직까지 그것이 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카데미 각본상을 ‘굿 윌 헌팅’이 탔는데, 나는 당시 실제 주연인 멧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어린나이에 어떻게 저런 좋은 각본을 어떻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자, 이제 그 당시 흥행했던 수많은 영화중에서도 유독 우리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이 영화의 매력을 한번 알아보자.

 

 이 영화에서 윌은 소위 말하는 천재다. MIT의 내노라 하는 교수들도 풀기 어려워하는 문제를 초등학교 수학문제 풀듯이 풀어내고, 만들어 낸 12명 형의 이름을 한 번도 안 틀리고 줄줄 외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형적인 천재의 역경 극복 스토리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랑받은 적도, 사랑을 해 본 적도 없는 한 인간의 러브스토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세상에 60억 인구가 있다면 그 60억 인구는 어느 한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60억의 각각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라이프 코치를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이 영화는 탁월한 코치영화라는 느낌이다. 코치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는 특질은 어떤 이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그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그 사람의 완전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판단 없는 경청이 코치에게 가장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을 익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판단한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어릴 때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야’라고 쉽게 판단한다고 할 때 그것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인 경우,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 한권만 읽은 사람이다.’라고.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윌을 머리만 좋은 문제아로 보는 것과 달리, 숀 맥과이어 교수님은 그를 남들과 다름없이 바라봐준다. 어떠한 특별 취급도 하지 않고, 단지 한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열리도록 같이 있어 줄 뿐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의 가슴을 여는 유일한 방법이다. 윌은 자신을 어떤 편견도 없이 함께 있어주는 교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찾아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의 인생을 찾아서 떠난다. 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는 명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깨고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고마웠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역시 교수님이 "It's not your fault."을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윌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안기고 눈물을 흘렸으리라고 생각된다. 즉,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용납하고 인정한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이런 코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옅은 연민이 아니라 깊은 동정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 이것이 코치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굿 윌 헌팅, 이 영화야 말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기분 좋은 여운을 선사해주는 영화가 아닐까.

 

 

- 2009. 6.10  예전에 썼던 글을 옮겨 오다..^^

공부의달인호모쿵푸스인문학인생역전프로젝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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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맨 앞에 나와있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많은 이들이 지금의 시대를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내내 '공부의 달인, 즉 호모 쿵푸스' 만이 이 인문학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호모 쿵푸스'란 무엇인가?
공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의 달인'을 말한다.
마치 쿵푸를 하듯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꿔 나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것이 그의 존재론이며,
"공부해서 남 주자", 이것이 그의 실천론이다.

자, 이쯤이면 호모 쿵푸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나에게 울림이 되었던 말을 (편집을 조금 가해서) 옮겨 놓았다. 함께 공부의 달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



- 학교'코뮌'의 차이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에서만 작동한다. 고로 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그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선생을 만나 어떤 학문을 터득하겠다는 발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학교의 위상, 그 학과의 사회 진출 비율, 그게 선택의 유일한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학벌이 높아질수록 공부와 삶 사이의 소외와 간극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발심이 공부의 출발이자 원동력이었던 셈.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주는 자이다. 그리고 도반이란 그 길을 함께 가는 벗들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었다. 초학자뿐 아니라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면 스승과 친구, 제자 사시의 경계를 서로 넘나들게 된다. 그리하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제자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지기가 되는 '코뮌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과 도반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연령대별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을 하는' 학교제도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오랬동안 학교를 다녀도 평생을 좌우할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대학원생들에게 공부는 참고 견뎌야 하는 지겨운 노동이고, 학과는 스트레스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사제관계도, 우정의 연대도 없는 곳, 거기에서 즐거운 지식의 생성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 공부는 네트워킹!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유포하는 교수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교수들이 대학 안에서 능동적인 학습망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먼저,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시작하면 된다. 소규모일지라도 사제 간에 '즐거운 공부'의 장을 만들어가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합적 관계망을 만들면 그게 곧 '앎의 코뮌'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적 열정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한 일상적 노력도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식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 글쓰기운명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문체는 말투와 동선, 삶의 패턴과 나란히 간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실제로 고전의 시대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그런데 몸이든, 문체든 혼자 힘으론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변이시켜줄 연기조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밑천이 없을 때,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등등. 또 상호 신뢰가 두텁다 해도 가혹한 비판을 견뎌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체력과 끈기, 오기와 집요함이었다. 길 위에 있는 한, 나는 수 많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은 또 나를 아주 낯설고 경이로운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글쓰기가 신체를 단련시켜주고, 나아가 운명까지 바꿔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돈!돈!을 외치며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삶의 낙이라곤 연애밖에 없는 듯하다.

중략..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치명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예컨데 '주역'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상생상극이 필요하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죽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쳐주듯이 아이에게도 적당한 극을 줘야'한다. '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명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 감염촉발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구조적 양태가 싫다면, 먼저 교수들이 열정적으로 배우면 된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 Sitemap 2011.08.17 14:00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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