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새해의 시작

2016년 새해가 밝았다. 드디어 34살이 되었다. 어릴 적, 30대 중반 아저씨를 보면 다 알것 같고, 꼭 어른 같았는데.. 지금의 나를 보면,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 나이는 그저 나이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철이 더 드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만큼 생각하고, 실천한 만큼 철이 들 뿐이다. 1월 1일, 나와 아내는 오전에 아주버님 산부인과로 향했다.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리고 향한 곳은 종각이다. 어머님이 우리 재원이 돌을 맞이해서 목걸이를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새해 첫날 한번 알아보러 가게 되었다. 이런 저런 곳에서 견적도 물어보고, 또 명동에 가서 떡볶이도 먹었다. 무엇보다 재원이 덕분이 많이 웃은 날이었는데, 뭐만 했다하면 꺄르르 꺄르르 엄청 웃은 하루였다. 재원이가 감기가 다 나아서 그런지, 웃음이 많아졌다. 행복했다.


1월 2-3일 
휴일의 끝

주말은 온종일 휴식이었다. 요즘 다소 무리한 탓인지 청소만 마치고 쉬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재미있다고 해서 다운 받아서 봤다. 일요일도 별일 없었다. 청소를 하고, 이유식을 만들고, 오후엔 잠깐 홍대로 산책을 갔다. 하루가 왜이리 짧은지. 그렇게 연휴가 끝났다. 나로썬 이번 2주를 만들기 위해서 나름 신경을 썼다. 다른 건 최대한 줄이고, 아내와 재원이랑만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큰일도 치뤘다. 할머니 장례식도 있었고, 형님 2세 탄생도 지켜볼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이, 연말과 연초가,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2주였다.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특히 재원이는 2주 전까지만 해도 아빠 아빠를 잘 하지 않앗는데, 이젠 곧잘 아빠 아빠를 외친다.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는 시간도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육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간다는 것도 깨달았다. 밥 먹이고, 밥 차리고, 재우고, 기저귀 갈고, 씻기고, 놀아주고, 약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그 경험을 온전하게 했다. 좋았던 것도 있지만, 아쉬운 것도 있다. 일상에서 너무 멀어졌다. 책을 본지도 꽤 되었고, 글을 쓰지도 못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일상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정말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겠단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잘 구분해야 할 것 같다. 이젠 끝이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일주일, 나의 패턴을 회복하자.  


1월 4일
일상은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 사실상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건만, 쓸데없는 시간으로 채우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익숙한 그런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일상은 작은 습관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작은 습관들은 하나 하나를 보면 별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들이 연계되면 어마어마한 패턴을 형성한다. 나는 그 패턴의 주인이 아니다. 노예다. 그 패턴을 자각하고 벗어나려는 의식적 노력 없이는 말이다. 지난 2주 동안 나의 일상적 패턴은 완전히 깨진 상태다. 회복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위로하자. 하지만 위로는 절반의 역할이다. 절반의 역할은 단호한 자아의 것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결단력 있는 자아를 불러내자. 그가 발언권을 갖도록 하자. 내 안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그가 이기도록 하자. 그것이 자아 회의 주관권을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다.
 

1월 5일
철학 아카데미 첫 수업

정읍에서 캠프를 마치고, 경복궁 옆 철학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다. 박남희 교수님께서 수업을 진행해 주셨는데,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좋은 자극이 되었다. 우선적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철학적 삶을 산다는 것이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다듬고, 내 태도를 고치듯 철학자들의 생각과 글을 보며 내 삶을 다듬는 것이 곧 철학이다. 매우 공감하는 바였다. 나 역시 삶을 위한 기술로써의 철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첫 시간이라, 전체 얼개를 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 철학자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스윽 지나갔는데, 다행히 이리 저리 본 책들 덕분인지 이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가장 큰 자극이 된 것은 역시 책이다. 이번 수업 교재는 교수님이 직접 쓰신 책을 가지고 하는데, 나도 그렇게 수업하고 싶었다. 내가 쓴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한다는 것. 내 생각을 그대로 공유하고, 그로 인한 다른 이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다.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매달 글 쓰는 미션 꼭 성공하자. 


1월 6일
EBS 캠프 3년차가 되다. 

오늘은 EBS 프리미엄 캠프에 갔다. 일찍 베어스 타운에 갔는데, 스키 시즌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강의장 위치도 아주 높아서 스키타는 사람들 구경 실컷했다. 나는 발에 눈도 안 묻히고 왔지만. ㅎㅎㅎ 이번 캠프로 나도 이제 3년차가 되었다. 2013년에 시작했으니 인연이 꽤 되 편이다. 비록 일년에 2번의 캠프지만, 여름 겨울이면 반복되는 연례 행사가 되었다. 그 동안 프로그램도 변화가 있었다. 크게 변화한 것은 1번이고, 나름 대로 캠프 마다 작게 작게 변화하고 있다. 이번에 또 하나의 시도를 했는데, 나름대로 괜찮았다. 아이들에게 전할 메시지도 나름대로 정리되었고, 수업도 용이했다. 오늘은 꽤 만족하는 수업이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셔틀버스가 운행한다는 점이곘지만. 그것도 왕복 3000원에 말이다! :) 

그러고 보니 그렇다. 예전에는 선택의 기준이 단순했다. '기쁨'이었다. 물론 단순한 기쁨은 아니다. 의미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몸을 옮겼다. 남들이 버기엔 무모해 보이는 결정도 나에겐 아니았다. 힘들어도, 분명 기뻤으니까. 지금도 그 기준은 유효하다. 나는 소중하니까. ㅎㅎㅎ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게 되어 바렸다. 이젠 하나의 기준이 더 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우리 가족도 '기쁜가?'라는 것. 나로 인해 가족에게도 의미있는 기쁨이 전달되어야 한다. 왜냐. 가족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이젠 떨어져 생각할 수가 없다. 하나 더 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기쁜가! 나의 선택으로 인해 말이다. 그 선택이 옳다고 세상이 말하는가. 이것은 유심히 관찰하고, 귀 기울여 들어야 겨우 알 수 있는 신호이다. 앞서 보다 큰 범주이지만 분명 중요한 관점이다. 이 셋이 모두 일치하는 지점. 그 교집합이 내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이럴 땐 드래곤 라자의 명언이 떠오른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섬이 아니다.


1월 7-8일 
교사 연수 및 미팅 

사실, 일지를 놓쳤다. 그래도 짧게라도 기록하자. 목요일에는 교사연수가 있었다. 프로토타이핑에 대한 워크샵을 진행했는데 선생님들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워낙 훌륭해서 내가 할 것이 거의 없더라. 오후에는 리버럴 아츠에 대한 수업이 있었다. 명쾌해서 좋았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좀 더 내제화가 되어야 하는데.. 라는 개인적 공부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금요일엔 계속 미팅이었다. SCM 관련 캠프와 시흥 프로젝트가 시작될 것 같다. 지난 주 일정은 그래도 괜찮았다.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바쁘게, 반갑게 시간을 보냈다. 


1월 9-10일 
주말 일정

주말이다. 토요일에는 대학교 친구 상근이 결혼식 기념 (?)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최근에는 워낙 자주 만나지 못하는 터라, 반가웠다. 아내와 재원이도 가서 자리를 빛냈다.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대화 주제도 많이 바뀌더라. ㅎㅎ 재미있었다. 나름대로 다들 철이 들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일요일에는 오전에 SCM미팅이 있었고, 저녁에는 돌잔치를 하지 않는 대신,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이모님 가족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고기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못 먹겠더라. ㅎㅎㅎ 어쨌든 맛있게 먹었다. 사실 일요일은 내가 큰 실수를 했다. 하기로 한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아내도 나도 다쳤다. 온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월요일도 이어진다. 


1월 11일
온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오늘은 정말 온전하지 않았다. 꾸준한 사람이 삶을 망친다. 꾸준히 온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나는 패턴이 있다. 잘 하다가도 중간에 무너지는 시기가 온다. 그렇다고 엄청 무너지지도 않는다. 중간에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다. 하지만 앞으론 좀 더 민감하고 싶다. 하기로 한 일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참으로 매정하게 다가왔다. 1월의 목표는 이것이다. 온전한 몸을 만들기. 만족도를 9점까지 올리기. 나에게 남은 20일, 나는 하기로 한 일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있고 싶다. 


1월 12일
철학 수업

매주 화, 목요일이 나는 참으로 좋다. 화요일 저녁에는 철학 아카데미에서 수업이 있는데, 오늘 배운 내용을 한번 정리해보자. 우선, 수업 중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흐름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이 좋았다. 나 역시, 맥락을 중요시 여기는 편인데, 왜 이런 사상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접근이 좋았다. 자연철학자들이 세계의 근본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들이야 말로, 어떤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순수하게 질문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공식적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철학자들. 그들의 사유는 근대까지 ‘이성의 빛’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되려 재발견되고 있다. 특히 소피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나에겐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저 궤변론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진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할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소피스트였다는 것은 대반전이었다. 서양 철학의 시작점을 피타고라스라고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예를 들면, 수)를 기준으로 삼았던, 그리고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목적으로 삼았던 철학자이기에. 오늘 수업을 듣고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니체가 왜 ‘근대 사상’을 전복할 수 있었는지. 그는 문헌학에 능통했다. 아마 이러한 고대와 자연 철학자들의 사상에도 쉬이 접근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 변화의 시작은 ‘읽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해하고, 탐구하다가 결국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순간, 내면에서 강한 울림이 따라오는 순간, 인간은 변화한다.  


1월 13일
자신감 리더십 캠프

지난 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자신감 리더십 캠프가 있었다. 매년 비슷한 포맷이기는 하지만, 아주 조금씩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한번에 확 달라진건 초반에 몇 번이었고, 지금처럼 완성된 형태가 된 건 작년 이맘때부터 였던 것 같다. 올해는 어떤 변화를 줄까 하다가, 앞부분에 ‘자신감을 올리는 법’에 대해서 좀 더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만든게 안전지대, 기적지대, 도전지대를 채우는 것. 나에게 익숙한 활동을 쓰고, 나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쓴다. 그리고 나서 ‘도전하고 싶은 것’들을 쓰는 것. 그 중 하나를 발표해 보는 것. 나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사실 내가 도전하는 것들을 하나씩 이뤄나가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들 잘 해주었다. 다음에는 뭘 바꿔볼까? ㅎㅎㅎ 


1월 14일
지식의 얼개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날이 있다. 그건 바로 화요일과 목요일, 공부하는 날이다. 화요일은 철학 아카데미에서, 목요일은 GLA에서 수업을 듣는데 두 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얼개’다. 전체 학문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많이 공감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균형감각’이기에. 오늘은 교양인에 대해서 배웠는데, 역시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인’과는 많이 다른 개념이었다. 신영복 선생님 책 <강의>에선 이렇게 설명한다.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 악, 사, 어, 서, 수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 나는 이러한 ‘얼개를 아는 힘’, ‘육예를 두루 익히는 힘’이 지금 시대에 재발견되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하며, 올해는 이 공부에 한 목숨(?) 바치고 싶다는 각오를 던진다. ㅎㅎㅎㅎ


12월 14일
학기말 자유학기제 캠프
 
지난 주에 이어서, 당산서중 교육이 있었다. 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들어가서 같은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것. 끝나고 느낀 것은 절반의 성취감과 절반의 아쉬움이다. 우선, 성취감은 있다. 내가 워낙 잘 못 하는 영역 (단체 교섭 및 교육 및 단일 프로그램 구성 등등)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배운 점도 많았기에.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사실, 나는 모든 교육은 그걸 진행하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달랐음 한다. 각자 개성과 강점이 다르고, 그게 100% 발휘될 수 있을 때 교육생들도 만족하는 법이니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교육은 원치 않는다. 하지만, 장단점도 있다. 그런 교육일수록 더 실험적이고, 망할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에선 ‘안정’을 더 중요시한다. 예전 성인 대상 교육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다. 특정 콘텐츠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되는 것이다. 만족도가 높게 나와야 하기에. 결국, 결과가 보장될 수 있는 게임을 활용한 교육이 선호되고, 계속 열릴 수 밖에 없는지도 이제는 이해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교육 비즈니스가 아님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실험소’다.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펼쳐지는 학교. 학생들도 선생도 모두 공부하고, 실험하고, 성장하는! 나는 무엇보다 그런 모델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것은 배운 경험이었다. 


12월 15일
연지원 선생님 멘토링

연지원 선생님은 올해 맺은 인연 중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 중 한 명이다. 알고 있었던 것은 꽤 되었지만,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작년 이맘때니, 그리 오래된 인연은 아니다. 하지만 1년 동안의 와우 수업을 듣게 되면서 가깝게 인연을 맺었다. 오늘은 1:1 멘토링이 있던 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딱 지나가버린 시간이었다. 오후에는 블랑에서 대화하다가 저녁은 홍대밀방에서 먹고, 저녁에 연남동 낙랑파라로 옮겼다. 관심사나 주제가 어느 정도 비슷해서 그런 것일 수 있지만, 끊임없이 대화하고 하루 종일 웃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만나기 전, 선생님이 허리를 삐긋하는 바람에 중간 중간 꽤나 고통스러우셨으리라는 것. 허리를 아파보았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주로 나눈 주제는 올해 1년을 돌아보기 였고, 선생님의 근황도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주력하는 직업적 역할과 앞으로의 계획도 나누었는데 말하면서 정리되는 것도 느낄 수 있었고, 중간 중간 필요한 조언도 주었다. 뜬금없지만, 나에게 가장 자극이 된 건 ‘시간관리’였다. 한창 젊을 때는 5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말에서 ‘나는 어느 정도의 시간 단위’를 아까워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1시간 정도 그냥 쓰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볼 책이 많고, 할 공부가 많은데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이다. 그 ‘시간 단위’를 좁혀나가자. 그게 의외로(?) 꽤 와닿았던 멘토링 시간이었다. 


12월 16일
한가로운 저녁 시간 

엄청 추운 날이었다. 오후에 나의 사무실(?) 망원역 스벅에서 일하다가 아내와 재원이를 만났다. 원래는 홈플러스도 가고 좀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너무 매서워서 망원시장만 둘러보다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뭐 먹을까? 하다가 소고기 무국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무 하나랑, 재원이 먹을 유기농 야채랑 딸기만 사서 왔다. 집에만 오면, 재원이는 활동 시작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바쁘고, 나는 뒷꽁무니 따라다니느라 바쁘다. 그렇게 내가 돌보는 사이에, 아내는 저녁을 준비했다. 아내가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저녁 준비 할 맛이 난다’고. 왜냐믄, 평소 내가 집에 별로 없으니 저녁도 안 챙겨먹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데 뜨끔했다.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12월에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재원이를 재웠다. 그리곤 안전망을 설치했다. 그간 재원이가 워낙 활발해서 부엌에 들어오는 걸 막느라 고생이 많았기에. 다 설치하고 누우니 벌써 10시다. 얼른 자자. 


12월 17일 - 19일
보람찼던 3일

내 예상에, 내 일정은 12월 중순이면 아주 여유넘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17일, 오늘도 하루종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주로 했던 것은 와우광땡 12월 수업 축제 준비다. 다음 주에 정말 푹 쉬고 싶었기에, 오늘 모든 일을 다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다보니, 쉼 없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뿌듯했다. 요즘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글쓰고, 일하기를 반복하는데.. 그게 참 마음에 드는 일상이란 생각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18일. 오늘은 오전에 유유님과 만남이 있었다. 한 1년 반 정도에 1번 정도 보는 것 같다. 예전에 코칭 공부할 때 만났던 분인데, 지금은 학습 코칭 쪽으로 관심을 두고 일하고 계시다. 공동 육아에 대해서 선배시기도 하시고, 또 의식이나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나도 오랜만에 다시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깨어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기도 했고. 사실 깨달음은 깨어있음이 자주 출몰하는 상태이기에. 그리곤 오후엔 은성중에서 수업이 있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과 대화를 나누는게 난 왜이리 즐거울까. 강의보단 이런 식의 소규모 수업이 훨씬 즐겁단 생각을 했다. 19일엔 원래 구미에서 강의였다. 하지만, 취소되었다. 중학생 신청자가 너무 적어서란다. 허긴 시험이 끝나는 지금 시점에 수업 들으러 오는 사람이 많을리가 없다. 덕분에 생긴 여유 시간 때문에 우린 즐거운 토요일을 보낼 수 있었다. 


12월 20일 - 23일
영원처럼 길고, 정신없이 짧았던 시간

일요일 오후, 부모님께 연락이 왔다. 사실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다. 내일 수업을 앞당겨서 진행하기로 하고, 바로 대구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내와 재원이는 두고 가고 싶었지만, 실랑이 끝에 결국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많이 떠오른 장면은 희안하게도 중학교 다닐 적, 할머니와 산에 가던 모습이었다.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편이 아니었다. 소수의 친구들과 놀거나, 집에 와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다 였다. 그러던 나를 보던 할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동네 산에 함께 올라가자고 권하셨다. 집에 가만히 있음 사람이 처진다고. 그래서 난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면 할머니와 함께 산을 많이 올랐다. 그래봐야 동네 언덕이지만, 그래도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할머니와 수다도 떨고, 운동도 했다. 사실 별거 아닌 기억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기억이긴 하다. 누군가와 함께 보낸다는 건, 그 절대적 시간은 참으로 가치있다는걸 세삼 느낀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매형차를 얻어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차에서 재원이 때문에 힘들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잘 자주는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재원이가 얼마나 기특한지. 성주 요양원에 마련된 장례식 장에 갔다. 친척들이 미리 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다들 얼굴을 보기 힘든데, 슬픈 와중에도 반가웠다. 이런 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느낀다. 가족만이 가져다 주는 그 특유의 연대감을. 그리고 그 소중함을. 할머니께 절을 드리고, 부모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친척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밤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와 재원이는 내일 일정을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매형의 도움을 얻어서 다시 대구로 갔다. 나와 매형만 새벽에 다시 오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결정이 정말 탁월했다고 본다. 실제로 다음 날까지 재원이와 아내가 계속 장례식장에 있었다면 나는 정말 멘붕이었을 것이다. 새벽 4시부터 내내 정신없었으니. 발인을 시작했다. 나는 지난 번 할아버지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영정 사진을 드는 임무를 맡았다. 발인을 마치고 차에 탔다. 화장하는 곳으로 갔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나에겐 이곳이 가장 슬픈 곳이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할머니만 본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아내, 그리고 재원이의 모습마저 떠올린다. 이런 생각도 한다.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사실. 우린 태어나고, 또 죽는다는 것. 사람은 선택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 사건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냐는 것. 수 많은 질문과 기억이 떠오르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화장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는 영천의 호국원이었다. 할아버지가 6.25에 참전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놓여진 할머니를 보았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리 잘 맞는 인연은 아니었다. 두 분이 싸우지 않고,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니. 이제 다시 만나셨다. 하늘나라에선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하기도 하다. 제사를 드렸다. 이후 절에가서 다시 한번 공양을 드리고 집으로 왔다. 숨가쁜 하루였고, 많은 생각이 올라오고 사라진 날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뭔가 싶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도 된다. 


12월 24일 - 27일
2015년의 크리스마스 

아내는 크리스마스를 특별히 여긴다. 그래서 2013년 우린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 작년에는 출산 준비로 재원이 방을 꾸몄고. 올해는 싱크대를 만들었다. 재원이와 아내의 역할극을 위한 미니 주방을. 사실 장난감이라고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정말 거대한 작업이었다. 만드는데 총 소요한 시간은 7시간에 가깝다. 가구 하나를 만드는데 이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구나. 라는 단순한 진리를 얻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긴 했다. 생각이 없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나에게 적합한 경험은 아니었다. 나란 사람이 잘 하는 일과 못하는 일에 대해선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느려터진 나의 손과 발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재원이 밥 먹이기와 놀기. 이번 연휴에는 난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을 맛 보고자, 노력했다. 그랬더니 얻은 수확이 있다. 이제 재원이가 ‘아빠 아빠’를 곧잘 외친다. 과거에 아무리 알려주려고 했어도 잘 말하지 않았던 아빠를 이젠 잘 한다. 역시 ‘절대적 시간’은 중요하다. 재원이가 내 얼굴을 확실히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아. 그렇지. 하나의 수확이 더 있다. 바로 '영화보기'다. 아내와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인턴>을 다 보았다. 다소 뻔한 내용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영화에 푹 빠진 아내를 보는 것이 나에겐 더 큰 즐거움이었지만. ㅎㅎ 그렇게 조용하게 올해도 지나가고 있다. 


12월 28일
오늘 아침, 베트남 커피와 함께

얼마 만에 오는 낯선 카페인가. 새로운 경험과 맛을 중요시하는 나이지만, 딱 하나 고정적인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카페다. 나는 주로 망원역과 합정역의 스타벅스를 이용한다. 그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주로 카페에 머물게 되면, 나는 꽤 오래 일한다. 그래서, '가장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큰 규모의 카페를 선호하는 편이다. 작은 카페에서 오래 앉아있는건 왠지 민폐라고 느껴지지만, 스벅은 그런 느낌이 덜하다. ㅋㅋ 오늘 아침엔 수원 화서역으로 왔다. 근처 강의가 있기에, 미리 도착해서 일하려고 앉았다. 주문하려고 하는데, 베트남식 사이공 커피가 있더라. 연유를 넣어먹는 맛이라고 들었는데, 호기심에 한번 시켜봤다. 맛있다. 일단, 커피가 달달하니 겨울에 먹기 좋은 맛이다. 이제 다시, 일주일의 시작이다. 일상으로 복귀한 느낌이랄까. 오늘 월요일과 지난 주 월요일과의 간격은 꽤 크다. 이제, 일 하자. 


12월 29일 - 30일
영화 '사도'를 보고

어젯 밤과 오늘 오후에 걸쳐서 영화 ‘사도’를 봤다. 스토리는 간단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밀도는 그리 얕지 않다. 이 사건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온갖 드라마와 영화로 많이도 등장했다. 영화가 끝나고 좀 더 살펴봤다. ‘한중록’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한다. 비극의 시작은 사도가 1살때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야할 아기가 세자가 되고, 떨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애정 결핍’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에 비해 영조의 기준은 높기만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영화를 봐도 사도는 그림과 춤, 무예를 좋아하는 아이다. 만약 그 강점을 살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아이의 입장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사도 입장에서 보면 그가 이해가 되지만, 영조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사랑했음 세자로 책봉했을까. 하지만, 지혜롭지 않은 자의 최선은 최악을 결과를 낳는다. 마음도 좋요하지만, 그 마음을 지혜롭게 표현하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 그 조그만 아이에게 세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닌 사랑받는 느낌만 충분히 주었더라고 이런 결과가 일어났을까 싶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이러한 내용과는 별개로,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사관’의 존재다. 영조가 하는 말 중에 ‘너는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라는 어조가 많이 나오는데,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사건이 후대에 기록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모두 누군가에게 보여지게 되고, 이야깃 거리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인간이 타자를 인식하는 순간, 게다가 후대를 머릿 속에 넣는 순간, 그가 판단 기준은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선대의 좋은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시대에는 후대를 유념하며 살아간다면, 그리고 어떤 유산을 남겨야 할지 고민한다면, 분명 이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사관 제도를 온 국민에게 도입한다면 어떨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저자에 대하여 

주관적 저자조사 
이번에도 같은 저자다. 이번에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저자에 대한 글을 써볼까 살짝 고민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책 연금술사를 읽고 파울로 코엘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인공’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지난 번엔 순례자의 곁을 지키는 페트루스를 통해 드러내었다면, 이번에는 살렘의 왕, 크리스탈 가게 주인, 영국인, 낙타몰이 꾼, 연금술사, 그리고 성장하는 산티아고 자신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의 주장을 잘 드러내는 문장을 몇 가지 추려 보고 연결해 보기로 했다.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임무지.” “자네의 삶이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세.” “마크툽.”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지 않는 거죠?”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밤새 자네를 기다렸어. 그는 첫별이 뜰 때 나타났지. 아제껏 당신을 찾아다녔노라고 말했지. 그러자 그가 납을 금으로 변하게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더군.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직접 한번 해보라는 거야. 그게 다였어.” “그대의 용기를 시험해본 것이네. 용기야말로 만물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부터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그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깨우쳐주었을 뿐이지.” “만일 내가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그대는 정녕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리니.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 

그는 말한다. 삶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사실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우린 서둘러서도 안 된다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도 안 된다고. 직접 해야 한다고. 용기야 말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가혹한 시험을 이겨내야,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걸 해낼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설사 보물을 발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꿈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아의 신화를 살 수 있다고. 나도 살고 있으니 당신도 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그러하고 싶다. 




가슴에 남는 글

1부

- “저 녀석들은 이제 내게 너무 익숙해져서 내 일과시간을 훤히 꿰뚫고 있지.” 산티아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자신이 양들의 일과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20 
+ 나에게도 첫 번째 도약은 분명히 있었다. 매번 언급하는 2009년의 사건, 내 전공을 포기하면서 한번 나의 길로 도약했던 사건이 바로 그 도약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이제 나의 일과시간은 내 주위 사람들에게, 심지어 나에게도 꿰뚫어지고 있다. 어쩌면 그 도약 역시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 “양치기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책보다 양들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겠죠.” 
산티아고가 대답했다. 22
+ 책보다 양들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그 거대한 세상을 다 말하지 못함에도, 나의 채널은 대부분 책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올해 들어서 좀 더 넓은 세상을 만지고, 맛보고, 듣고, 보려고 애쓰지만, 아직은 머물러 있다. 나의 두번째 도약은 아마 ‘책’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아버지, 저는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싶습니다."
“… 하지만 우리 중에 떠돌아다니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양치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전 양치기가 되겠어요."
아버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버지는 주머니를 하나 건네주었다. 스페인의 옛 금화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들에서 주운 거란다. 네 이름으로 교회에 헌금할 생각이었지. 이것으로 양들을 사거라.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맘껏 돌아다녀. 우리의 성이 가장 가치 있고, 우리 마을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배울 때까지 말이다.” 아버지는 축복을 빌어주었다. 27
+ 훌륭한 아버지다. 자식이 떠난다고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적절한 도움을 주고, 축복을 빌어주는 것.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자 용기가 아닐까? 나의 여정에 빗대어 볼 때도 가장 큰 지지는 부모님으로 부터 나왔다. 그렇다고 우리 부모님이 내가 하는 걸 다 이해하고, 격려하고, 도와준 것이냐? 그건 아니다. 아직도 내가 뭐 하면서 뭘 가르치면서 지내는지 명확하게 아시리라 생각친 않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내 스스로 판단한다고 했을 때 절대 막으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나의 길을 미리 정하시거나, 간섭하시지도 않았다. 학창 시절에 공부할 때도 그랬다. 억지로 무언가를 시키시거나, 공부로 스트레스 주는 경험은 거의 없었던거 같다. 혹시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런 유사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없었던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듯 하다. 어쨌든 그것으로 다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다. 사실 옛날에는 다 그랬지만 청소년기에 나는 우리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이 조금 부족한 편이라고 느꼈다. 20대에도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다고 말하긴 어렵고. 나이가 들고 요즘 들어서 사이는 확실히 더 좋아졌다. 관심이 적어도, 넘쳐도 모두 문제다 문제.)  

- “꿈을 풀이해달라고 온 게지. 꿈이란 곧 신의 말씀이지. 신이 이 세상의 언어로 말했다면 나는 자네의 꿈을 풀어줄 수 있어. 그러나 만약 신이 자네 영혼의 언어로 말했다면 그건 오직 자네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네. 하지만 어느 쪽이 됐건 복채는 내야 해.” 34
+ 나의 꿈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해될 수 없다는 말. 얼마 전에 꿈에 대한 워크샵(심톡)을 준비하면서 꿈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꿈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거더라. 세상에서 오직 나밖에 모른다는 것. 그렇다. 내가 꾼 꿈을 다른 누구에게 설명을 할 순 있지만, 그 사람에게 경험시켜 줄 수는, 보여줄 수는 없는 법이다. 꿈이야 말로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꿈을 해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다. 요즘 자고 일어나서 가급적 꿈 일기를 적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아 글을 쓰면서 인식된다. 요즘 꿈에 선생님을 비롯한 와우가 자주 출현한다는 사실을 ㅋㅋ 이건 무슨 메시지일까 해석 중이라는 사실을 ㅋㅋ 

- 그는 이 마을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늘 새로운 친구들과의 새로운 만남. 하지만 그렇게 만난 친구들과 며칠씩 함께 지낼 필요는 없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39
+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서서히 우리 삶을 차지한다. 이 말은 정말 공감했던 말이다. 나의 경우 커뮤니티에 속했다가, 그곳을 떠난 경험이 몇 번 있다. 꽤 깊이 관여했던 적도 있고, 근처에 머물렀다가 아무도 모르게 쏙 빠져나온 적도 있지만, 어쨌든 몇번의 경험을 통해 인식한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커뮤니티가 주는 명와 암이다. 우선 좋은 점은 굉장히 많다. 우선 나의 관심사에 대해 나눌 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이곳에선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나의 어떤 이야기도 이 사람들은 수용해줄 수 있다. 게다가 커뮤니티에는 참 착한 사람도 많고, 능력자도 많다. 그들에게 이런 저런걸 배우면서 성장하는 즐거움은 말도 다 할 수 없다. 그 공통의 정체성과 친밀함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점이 아닐까.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늘도 있다. 우선적으론, 하나의 프레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안에서는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볼 수 없다. 물고기는 물을 인지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순간 뭔가 커다란 프레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커뮤니티는 하나의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것을 추구할 때는 둘 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내가 다른 생각을 하거나, 그 목적이 내 삶에서 힘을 잃게 될 때 그들 역시 내 삶에서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목격한 진짜 문제는 사실 이것이 아니라, ‘리더’에게 의존하는 모습이다. 사이비 종교처럼, 어떤 집단이든 견제할 만한 세력이 갖추어 지지 않을 때 리더는 괴물이 된다. 그건 그의 잘못도 아니다. 되려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사람을 추종하기에 바쁘고, 시간이 지나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는 차츰 사라지는 것. 마치 종교집단화 되는 것. 그런 것들을 많이 봤다. 그리고 가장 슬픈때가 있다. 바로, 떠날 때다.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해 버린 커뮤니티가 사라질 때, 나는 나의 한쪽 팔과 다리를 내놓은 것과 같은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다. 아마 밀접한 관계를 이루던 커뮤니티에서 한번 쯤 탈퇴해 본 분이면 공감하시리라. 그 상실감은 쉽게 달래지지 않더라. 

-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게 이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임무지.” 46
+ 요즘 이 아름다운 말이 참 많이 악용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리다. 특히 현 우리나라 최고 통수권자이자 반인반신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로 유명한 박근혜는 이 말을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어디에서도 남발함으로써 그 권위를 떨어뜨렸다. 언제나 메시지보단 맥락이 더 우선하고, 더 중요하다. 미디어가 컨텐츠를 좌우하듯.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기회로 보인다. 지나 다니는 것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도 재조정된다. 그러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얻는 혜택은 바로 ‘경험치의 축적’이다. 예전에는 쌓이지 않았던 경험치가 그때서야 쌓이기 시작한다. 사람과 사건의 만남이 쌓이고,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레벨업을 한다. 그리고 한참 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어쨌든 삶에서 이루어낼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리라. 그 간단한 자연법칙을 굳이 신화하하고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여지를 만드는 것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렇게 자신의 내적 욕망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의 표정은 주로 밝다. 주위 사람들의 기분은 좋아진다. 그러니 더욱 꿈을 이루어내는 과정은 과속화 될 수 밖에. 이걸, 단순히 우주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면 뭔가 아쉽다. 

- “저 사람도 어릴 때 떠돌아다니기를 소망했지. ... 어리석게도 사람에게는 꿈꾸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한 거야.” ...
“결국,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거지.” 49
+ 자아의 신화를 사는 것의 반댓말은 ‘자아의 신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중도는 없다고 본다. 가까워 지거나 멀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본다. 사실, 자신의 진짜 자아와 하나가 되어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드물다. 다들 각자의 미션과 숙제를 해결하면서 가까워지고자 아둥바둥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실은, 아예 저멀리 도망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 그 주된 원인은 아마 ‘내가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일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자아의 신화는 멀리 도망가는 것이 아닐까. 물론 차라리 강하게 도망가다가, 강한 반동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아의 신화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마치 이런 느낌. 나는 숙제를 안 풀고 있는데 너는 왜 푸는 거야? 짜증나네. 같이 망치자. 일로와~ 내가 망가뜨려주마~ 뭐 그런 느낌? 

… “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일세. 그런데 지금 자네는 포기하려 하고 있어."
+ 음. 이 대목이 나에게 걸린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산티아고가 양치기를 선언한 것은 나에겐 전공을 포기했던 일로 연결된다. 나는 내 자아의 신화를 살려고 했다. 분명히. 하지만 산티아고는 이내 양치는 일에 익숙해졌고, 다시 꿈을 꾸긴 꾸지만, 이제는 그냥 머물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다. 나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번의 도약이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이 삶이 익숙해졌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긴 하다. 삶에는 각자 거쳐야 할 단계가 있는 법이기에. 물론 내가 포기하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늦지 않게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야 겠단 생각은 분명하게 하게 된다. 올해는 자아의 신화를 살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앞으론 정말 본격적인 전쟁이다. 

- 산티아고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바람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떠나지 못하게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신말고는. 양들, 양털 가게 주인의 딸,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평원은 그에게 단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가는 과정들에 불과했다. 56
+ 사실, 나를 막는 것은 없다. 내가 몇번 경험한 것이, 결단의 힘은 세다. 내가 결단하면, 기필코 이루겠다고 하면, 그것에 맞춰 세상이 재배열되는 경험을 몇번 한 적이 있다. 나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가족이 생기면서 책임감이 더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몸이 무거워진것도 맞다. 예전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 이제는 정말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사실 그것이 나의 성장을 돕는 길이기도 할테다. 욕망 추구에서 어느 정도 의무 추구로 나를 옮겨가는 것. 그것이 나에겐 고유성을 넘어서 탁월성을 향해 가는 중요한 신호란 생각도 들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할 뿐, 그것이 무엇이든 경험해 보는 건 괜찮다. 

- “… 만약 자네가 처음으로 카드 놀이를 하게 된다고 치세. 자넨 틀림없이 따게 돼. 바로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거지.”
노인이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죠?”
“자네의 삶이 자네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세.”57
+ 초심자의 행운! 나에게도 초심자의 행운이 있었다. 몇번 기억나지만, 가장 극적이어던 시기는 바로 2013년 7월이다. 바로 심마니스쿨을 만들었던 시기. 내 생애에서 가장 수입이 적었던 시기. 나는 그때 한 달에 80만원인가? 벌고 있었다 ㅋㅋㅋ 하지만 그해 10월엔 결혼을 해야 했고, 필요한 자금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대출도 받고 있었고,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암튼 막막한 상황임에 분명했다. 뭔가 열심히 해보고 싶었지만, 한동안 일거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자 나는 어느덧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있을 수 만은 없었기에 . 나는 선언했다. 앞으로 3달 동안 700만원을 벌겠다고. (왜 그러한 액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대담한 목표를 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실제로 다 합쳐서 거의 700만원에 가까운 돈을 벌게 된 것이다. 아는 코치님이 함께 프로그램을 디자인해보자고 해서, 전국을 돌며 캠프를 하기도 했고, 다른 분 도움으로 새로운 코치분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암튼 2013년 여름, 나름대로 바쁘게 돌아다닌 결과로 나는 내가 원했던 돈을 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나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아마 그 행운이 없었다면 난 몇 개월 이후 아마 그냥 취업을 택하지 않았을까. 먹고는 살아야 하니 말이다. 나에게 그 경험이 지속되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진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 들어서는 다시 수입이 줄어들었고, 결혼식을 기점으로 힘든 시련이 견뎌내야만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분명 초심자의 행운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참 감사하다. 

-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표지를 따라가야 한다네. 신께서는 우리 인간들 각자가 따라가야 하는 길을 적어주셨다네. 자네는 신이 적어주신 길을 읽기만 하면 되는 거야.” 58
+ 나는 표지를 잘 읽어내지 못한다. 그리 예민하지 않은 편이다. 굳이 하나의 표지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을 본다. 사람도 잘 보지 못했었지만, 그대로 뼈저린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은 늘어난 편이다. 어떤 사람과 함께 나아가야 할지, 어디서 멈춰야 할지. 그것을 읽어낼 수만 있어도 삶의 어려움을 꽤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은 데 있도다.” 62
+ 정말 감탄했던 대목이다. 작년에 비해서 훨씬 더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 내가 지금 균형을 잘 잃어버리는 상태라 그런가보다. 나는 주로 주위를 보느라 숟가락은 잘 안 보는 것 같다. 분명 몰입해야 할 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뺏기느라 집중을 못 한다. 탁월하다고 할 만한 결과도 없고. 그저 꾸준히 하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이지만, 그리 만족스럽진 못하다. 기름 두 방울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할까. 참 부족감이 많이 느낀다. 

- 하지만 장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고향에서도 멀리 떨어진 낯선 곳이었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신을 불공평했다. 오직 꿈 하나만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보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72 
+ 초심자의 행운은 영원하지 않다. 나에게도 지금 산티아고의 기분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바로 2013년 2월, 예전에 머물던 교육 회사를 퇴사하고 난 시점이다. 2년간 영업 사원 일을 마치고, 나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 (아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일)을 찾아 1년 동안 미친듯 일하게 된다. 보수는 되려 예전 직장보다 더 적었고, 안정성은 하나도 없었던 일이었지만,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생각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 했었다. 일요일은 제외하곤 모두 일을 했을 정도로 시간을 많이 보냈고, 정성도 쏟았다. 그리고 정말 잘 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느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어쨌든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더 슬펐던 것은 1년 동안 쏟아부었던 내 열정이 모두 의미가 없어져버리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그 시점에 내가 본 영화가 ‘파이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울었다. 파이가 처한 상황이 내가 처한 상황과 별 다를바가 없어 보였기에. 정말 그 때 내 심정은 이랬다. 오직 꿈 하나만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보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나 자신의 결정을 따르기로 약속했었지.” 
그는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말했다. 어쨌든 보석들은 노인의 보살핌이 계속될 거라고 말해주었고, 그의 믿음은 힘을 얻었다. 산티아고는 텅 빈 시장을 다시 한번 바라본 후, 조금 전 느꼈던 절망을 털어냈다. 이곳은 더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였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일이었다. 그는 진정 새로운 세상을 알고 싶어했다.
...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세상은 도둑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린 불행한 피해자의 눈으로도 볼 수 있지만, 보물을 찾아나선 모험가의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보물을 찾아나선 모험가야.’ 75-76
+ 새로운 세상은 없다. 새로운 눈이 있을 뿐이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뒤바뀐다. 지금 내가 그렇다. 사실 올해 12월까지 1년 동안 계약한 학교가 있다. 목요일에는 매주 수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나도 별 다른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예산 문제로 인해 그만 10월까지만 수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누군가의 잘못이나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 뿐이었다. 정해진 일정과 수익이 사라졌지만, 나에게 가능성의 공간과 시간이 열린 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정말 고민 중이다. 나에게 11월과 12월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시기다. 나는 지금, 보물을 찾아나선 모험가다. 

- 산티아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노인과 똑같은 일을 자기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아의 신화와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78
+ 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아의 신화와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그 자연스러움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우선 그 사람의 인상과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파악되기도 한다. 다소 조급하거나 외부의 시야를 의식하는 사람의 눈은 다소 돌출되어 있고, 목소리는 떠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눈이 다소 들어가 있고 (깊다고 표현해야 할까) 목소리도 차분하더라.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는 이 정도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건 오랜 시간 ‘함께 있어보는 것’이다. 관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2부

- “그런데 아저씨는 왜 지금이라도 메카에 가지 않는 거죠?” 산티아고가 물었다.
“왜냐하면 내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바로 메카이기 때문이지. 이 모든 똑같은 나날들, 진열대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저 크리스탈 그릇들, 그리고 초라한 식당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바로 메카에서 나온다네. 난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94
+ 정말 그렇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방식은 나에게만 옳다. 다른 사람에게 내 방식을 적용할 때, 그건 억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에 아내와 살짝 다툰 적이 있다. 아내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분위기에 예민하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은 꼭 호텔 뷔페에서 밥을 먹기로 약속했었다. 뭐, 나도 맛있는 것 먹는 건 좋지만, 그 비용이 너무 비싸면 스트레스가 있는 편이다. 관련해서 아내와 대화하다가 나도 모르게 계속 ‘꼭 그래야 할까? 다른 데 돈을 쓰면 되지 않을까?’란 입장을 내세우게 되었던 것 같다.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여보는 내가 이런데 돈 쓰면 아까워 하는거 같다고.’ 나는 솔직히 말해다. ‘솔직히 어느 정도 아깝단 생각을 한다고’ 그런데 아내가 나의 정곡을 찔렀다. ‘그런데 여본 교육비나 책 사는 건 아깝단 생각하냐고. 나는 그 돈이 아깝단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뭐라고 하지 않지 않냐고’ 맞다. 그 말이 맞았다. 허긴, 지금까지 썼던 교육비만 모았어도 소형 차 한대는 살 수 있었을 나다. 각자 그 기준은 다 다르다. 아내도 교육비와 책값으로 돈을 다 쓰는 내가 답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믿어주고 별로 스트레스 안 주는 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미안했다. 가끔 아내에게 엄청난 통찰력을 볼 때가 있다. ㅋㅋ 그리고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집안의 평화가 오겠단 생각도 했다. 서로 다른 그 가치들을 어느 수준까진 만족시키려면 현실적인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 순간, 그는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는 언제든지 양치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시 크리스털 장수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엔 어쩌면 다른 보물들이 더 많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 그의 손에는 여전히 우림과 툼밈이 쥐어져 있었다. 그 두 개의 보석 덕분에 그는 보물을 찾아가는 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사람 곁에 항상 있다네.”
늙은 왕은 말했었다. 111
+ 나도 가끔 최악의 상상을 한다. 그러면 뭔가 가벼워질 때가 있다. 이러다 뭣도 안 되면 다시 취업하면 되지 뭐. 허긴 최악의 경우가 직장생활이라고 생각해보면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최악은 아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기 싫으면 더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난 아직 굻어죽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할 정도로 주위의 상황이 도와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해지고, 힘을 쌓으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결정이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면 그는 세찬 물줄기 속으로 잠겨들어서, 결심한 순간에는 꿈도 꿔보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116
+ 앞서 말했지만, 결단은 힘이 세다. 게다가 나의 온 존재를 건 결단은 분명 내 인생의 트랙을 바꾸어 놓는다. 2009년에 내가 결단한 것은 이것이다. 난 절대 엔지니어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 결단은 실제로 작동했다. 아직까지 어쨌든 버티고 있으니. 하지만 이제 2번째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 예감, 어머니가 자주 입에 올리던 말이었다. 그는 ‘예감’이라는 것이 삶의 보편적인 흐름 한가운데,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들 속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져 있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모든 일이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크툽.” 127
+ 마크툽. 예전에 슬럼독 밀리어네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온갖 고초를 겪고 퀴즈쇼에 나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그러한 고초를 겪으면서 경험했던 모든 경험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만약, 주인공이 미리 엔딩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담 당시에 경험들이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트툽에는 그런 힘이 있다. 지금 경험하는 세상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게 만들어 준다. 이 또한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받아들이자. 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수용을 하게 한다. 하지만 양이 있으면 음도 있는 법. 지나친 결정론자. 혹은 운명주의자들은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에 회의적인 경우도 많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되, 바뚤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바꿔나가는 변증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크툽은 그러한 지혜 위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빛낼 수 있을 것이다. 

- 선생은 대상의 행렬을 좀 더 눈여겨보셔야 할 것 같군요. 행렬은 비록 수없이 길을 돌아가긴 하지만 언제나 한곳을 향해 가니까요.”
“자네야말로 책을 더 많이 읽도록 하게. 그 점에서라면 책과 대상의 행로는 똑같은 것이니 말이야."

- 산티아고는 달과 흰 모래사막을 바라보며 얼마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대상 행렬이 사막을 건너는 것을 쭉 지켜봤어요. 대상 행렬과 사막은 같은 언어로 이야기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막은 대상 행렬이 자신을 건너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거겠지요. 사막은 대상 행렬이 자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나는 곳마다 끊임없이 시험을 해요. 만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대상 행렬은 오아시스가 있는 곳까지 가게 되겠지요.” ...

말없이 있던 영국인은 입을 뗐다. 
“이제부터는 나도 행렬을 좀더 주의깊게 지켜봐야겠군."
그러자 산티아고가 대꾸했다. 
“나는 선생이 갖고 있는 책들을 읽어야겠어요.” 135
+ 산티아고가 감각형이라면, 영국인은 직관형이 아닐까. 나는 전형적인 직관형이다. 나의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선 오로지 독서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서가 나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반만 맞다. 나는 책이 아닌 세상을 더 봐야 한다. 세상을 본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내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보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산티아고와 영국인이 서로를 존경하는 ‘지혜’가 어울려졌던 명장면이 아닐까 한다. 

- 산티아고는 그릇을 닦으며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불꽃을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연금술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점차 확신을 갖게 되었다. 138
+ 일상에 몰두하는 사람은 잡념이 사라지게 된다. 내가 요즘 가장 신경쓰고 있는 것도 역시 ‘잡념’이다. 스마트폰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리고 마니, 요즘 나의 일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고 있는 내가 싫어질 지경이지만, 그 습관 만큼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 일상의 자각 상태를 놓치고 싶지 않다. 예전처럼 다시 명상이라도 해야 할까보다. 

-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배우는 거야. 저 사람의 방식과 내 방식이 같을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는 제각기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길이고, 그게 바로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지.’ 142
+ 그렇기 때문에 우린 더 겸손해야 한다. 각자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쉽게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 사실만 잊지 않아도 절반은 성공이다. 

- “저기가 오아시스요."
낙타몰이꾼이 별 있는 쪽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지 않는 거죠?"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145
+ 잘 때는 자야 한다. 해가 뜨면 걸어야 한다. 자신의 흐름을 잘 아는 것은 ‘자아의 신화’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구본형 선생님이 새벽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었던 것 처럼, 우리에게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필요하다. 창의성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기에. 

- 산티아고는 자신의 보물을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늙은 왕이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불렀던 것도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의 끈기와 용기를 시험하는 시련뿐이라는 것을. 그 때문에 그는 서두를 수도, 초조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이 그의 앞길에 준비해놓은 표지들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153
+ 서두르지도 말고, 초조해 하지도 말라는 말. 나에게 자주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1-2달 정도의 단절적 시간이 필요하다. 방향 점검을 위해선 가고 있는 길에서 멈춰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지금 가고 있는 길로 계속 갈 것인지, 어느 속도로 갈 것인지, 아니면 방향을 살짝 바꿀 것인지. 좀 쉴 것인지. 그 결정은 멈췄을 때 가장 잘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내 상황이 그러하다. 나의 끈기와 용기를 시험하는 시련이 날 조금씩 조르고 있고, 나는 이제 좀 더 예민하게 세상이 나에게 주는 표지들을 읽어야 할 시점이다. 표지를 읽자. 삶이 주는 신호를 보자. 

- ‘초조해하지 말자.’ 그는 속으로 되뇌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낙타몰이꾼이 얘기한 대로, 먹을 때는 먹기만 하는 거야. 그리고 길을 떠나야 할 때는 떠나는 거고.’ 154

-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침묵해야 할지 미소 지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는 순간, 그는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만물의 언어’의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난해한 부분과 맞닥뜨렸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158
+ 순례자에서 읽었던 ‘사랑’과 ‘열정’에 대한 내용이 갑자기 다시 떠오른다. 가장 본질적 변화는 결국 사랑에서 온다. 사랑은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결국 그렇더라. ‘사랑’이 있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고, 변화한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엔 변화도, 지속성도 없다. 

- 영국인은 사막을 응시하고 있었다. 
“밤새 자네를 기다렸어. 그는 첫별이 뜰 때 나타났지. 아제껏 당신을 찾아다녔노라고 말했지. 그러자 그가 납을 금으로 변하게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더군.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직접 한번 해보라는 거야. 그게 다였어."
산티아고는 잠자코 있었다. 가엾은 영국인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듣기 위해 그 먼길을 여행한 셈이었다. 산티아고는 자기 역시 늙은 왕에게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요! 한번 해보세요."
“그럴 참이었어. 지금 당장 다시 시작해야지.” 161
+ 나도 많은 스승을 찾아서 돌아다닌 편이다. 그리고 나만의 스승관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스승은 이것이다. ‘진리’라고 여겨지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일수록 스승이 아니다.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스승이 아니다. 자신(스승)처럼 살아가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스승이 아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스승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반대로, 제자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스승이다. 제자들이 실은 자기 자신의 스승이었음을 알게 하는 사람이 스승이다. 참된 스승은 나도 모르니,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스승관과는 반대로 세상은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고기를 잡아주는 사람을 참된 스승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스승은 결코 제자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힘, 그 자발성을 빼앗아선 안 된다. 그래서 가끔은 되려 거칠고, 불편해야 한다.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 나는 당신 꿈의 일부이고, 당신이 자주 얘기하는 자아의 신화의 일부이기도 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여행을 계속하길 원해요. 당신이 찾는 그곳으로 말예요. 만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전에 떠나야 한다면 당신의 신화를 향해 떠나세요. 사막의 모래언덕을 바람에 따라 변하지만, 사막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랍니다. 우리의 사랑도 사막과 같을 거예요.” 164 
+ 사랑은 자아의 신화의 일부다. 파티마의 참 멋진 대사였다. 

- 낙타몰이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산티아고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대지는 갖가지 표정으로 세상의 어떤 일이든 알려줄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도, 사람의 손을 들여다보거나 새들의 비행을 바라볼 때도, 카드놀이를 할 때도,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의미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사물들은 그 어떤 것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며 만물의 정기를 꿰뚫어보는 방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169
+ 이 부분은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들, 예전에 천지의 기운을 읽은 사람들의 메시지와 다를 바가 없다. 예를 들어,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이나, 하늘의 떨어지는 별을 붙잡았다는 제갈 공명과 같은 사람들. 그들 대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삶의 신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시 말해, 굳이 어떤 도구에 의존하지 않아도 ‘눈과 귀를 열면’ 세상이 미리 말해주는 신호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오기 전, 수 많은 곤충들과 동물들은 미리 그 신호를 읽고 산으로 도망갔다고 했는데, ‘눈과 귀가 먼’ 인간들은 전혀 그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위의 글을 뒷받침하는게 아닐려나. 참고로 신기한 것이 재원이가 희안하게 재체기를 할 때가 있는데 어른들 말씀이 그럼 그 다음 날 비가 온다고 한다. 아기 때 우리는 그러한 신호에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진짜 신기했다. 

- "미래는 신께 속한 것이니, 그거을 드러내는 일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네. 그럼 난 어떻게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건 현재의 표지들 덕분이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 현재가 좋아지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날들도 마찬가지로 좋아지는 것이고."
+ 앞서 말했듯, 미래는 현재에 와 있다. 내가 아직 그 신호를 읽어내지 못할 뿐. 

“신께서 미래를 보여주실 때라네. 신께서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미래를 잘 보여주시지 않아. 한 가지 예외란 바로, 미래가 바뀌도록 기록되어 있을 대를 말하지.” 
늙은 점쟁이가 말했다. 171-172

- “우리 상인들이 그를 사서 이집트로 데리고 왔었네. 그때나 지금이나, 꿈을 믿는 자는 꿈을 해석할 줄도 안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176 
+ 꿈을 믿는 자는 꿈을 해석할 줄도 안다. 꿈을 꾸는 자는 다른 꿈꾸는 자들을 알아볼 줄도 안다. 뭐든 스스로 경험이 되면, 다른 경험에 대한 비평이나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 집을 떠나온 후로 그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 내일 죽게 될 지라도, 그의 두 눈은 다른 양치기들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180
+ 분명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면서 더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맞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본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어느새 초심을 잃고 벌써 부터 나태해지려는 내 모습에 자꾸 경종을 울리게 된다. 탁월함을 위한 필연적 수고를 종종 잃어버리는 내가 안타깝다. 

- “그대의 용기를 시험해본 것이네. 용기야말로 만물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그 순간 산티아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먼길을 걸어왔다 해도,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되네. 사막을 사랑해야 하지만, 사막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돼. 사막은 모든 인간을 시험하기 때문이야. 내딛는 걸음마다 시험에 빠뜨리고, 방심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안겨주지.” 183
+ 용기야 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용기 중에서도 최고의 용기는,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다. 바람이 불어도, 더워도, 비가 와도, 쓰러져도 그 어떤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으려고 하는 자, 그 자가 가장 용기있는 사람이 아닐까. 

- “사람이 어느 한 가지 일을 소망할 때, 천지간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뜻을 모은다네.” 189

-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휴식을 취하듯 그대도 쉬게. 하지만 그대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대의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대의 여행길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때 그대의 보물은 발견되는 걸세.” 190
+ 순례자를 읽으면서 각오를 품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 보기로 했다. 거기서 내 보물을 발견해 보고 싶다. 앞으로 11월과 12월 동안 내 주위에 있으면서도  미처 돌아보지도 못했던 나의 보물을 찾으러 가야 겠다. 

- “제가 이곳에 남기로 한다면요?"
“그후 일어날 일을 그대에게 말해줌세. 그대는 오아시스의 고문이 될 걸세. ... 이 년째 되는 해, 그대는 보물의 존재를 기억하게 될 것이네. 표지들은 집요하게 보물의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테고, 그대는 그것을 잊으려 무진 애를 쓸 걸세. ... 삼 년째 되는 해에도 표지들은 그대의 보물과 자아의 신화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할 것이네. 그대는 밤마다 오아시스를 배회하고, 파티마는 자신이 그대의 길을 가로막았다는 자책감으로 번민하는 슬픈 여인이 될 것이네. ... 사 년째 되는 해, 표지들은 그대를 떠날 것이네. 그대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부족장들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대에게서 고문의 자리를 빼앗아갈 걸세. ... 명심하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196-197
+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가는 길은 멈출 수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표지들이 나를 떠나는 것이다. 내가 둔감해지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비록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끝까지 듣고자 노력하고 싶다. 표지가 나를 먼저 버릴지언정, 내가 표지를 먼저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다. 

- “그렇다면 금을 만들려다 실패한 다른 연금술사들은 뭐가 잘못되었던 거죠?"
“그들은 단지 금만을 구했네. 자아의 신화, 그 보물에만 집착했을 뿐 자아의 신화를 몸소 살아내려고는 하지 않았지.” 206 
+ 내가 보상을 싫어하는 이유를 잠깐 하고 싶다. 나는 청소년들은 대상으로 주로 이런 저런 강의와 워크샵을 한다. 헌데, 이런 경우 많은 주위의 코치님들이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편으로 ‘당근과 채찍’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본다. 아이들에게 어떤 미션을 주고, 가장 빨리 하는, 혹은 가장 잘하는 팀에게 선물을 주는 것. 그것은 꽤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다. 당장은 아이들의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보상’을 내건 경험이 손에 꼽는다. 초반에 뭣도 모를 땐 다른 코치님들 따라서 몇번 해보기도 했지만 그게 나와는 안 맞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 잃는 것은 ‘환호성’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보상과 관계 없이 흥미를 보이게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얻는 것도 있다. 바로 ‘진정성’이다. 아이들의 가짜 반응이 아닌 진짜 반응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운이 좋아서 흥미를 동하게 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정말 아이들에겐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예전에 봤던 책 ‘드라이브’에서도 외재적 보상이 내재적 보상(의미추구)를 방해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연금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 “아무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는 없어. 그러니 마음의 소리를 귀담아드는 편이 낫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대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대를 덮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야.”

‘내가 때때로 불평하는 건, 내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야.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인간의 마음은 정작 가장 큰 꿈들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해. 자기는 그걸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211
+ 그렇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한다는 말이 공감이 된다.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마음이 자주 귀를 열어줘야 겠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 ‘그래, 무언가를 찾아가는 매순간이 신과 조우하는 순간인 거야. 내 보물을 찾아가는 동안의 모든 날들은 빛나는 시간이었어. ... 보물을 찾아가는 길에서, 나는 이전에는 결코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어.’ ... 그날 오후 내내 그의 마음은 평온했고, 그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눈을 뜨자, 그의 마음을 만물의 정기로부터 나온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모든 행복한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신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마음은 속삭였다. 213
+ 그래,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사실 모든 보물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 마음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낮은 소리로 말하지. 214 

- “피라미드가 있는 방향으로 계속 가게. 그리고 표지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그대의 마음은 이제 그대에게 보물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 “누군가 꿈을 이루기에 앞서, 만물의 정기는 언제나 그 사람이 그 동안의 여정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시험해보고 싶어하지. ...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부터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215-216
+ 가혹한 시험은 곧 ‘탁월한 결과’와 같고, 초심자의 행운은 곧 '차가운 현실’과 동의어다. 시험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이고, 행운과 현실 (혹은 불행)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래서 우린 일회일비하지 않아야 한다. 유일한 지침이 있다면,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에게도 필요한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걸어가기. 행운이 오든 시험이 오든 관계 없이 그저 걸어가기. 

-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을 도와주나요?”
그가 다시 연금술사에게 물었다.
“주로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사람들만 도와주지. 하지만 어린아이들, 술취한 사람들, 노인들도 도와준다네.” 220
+ 내 생각에 마음은 자신에게 귀를 열어주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진정한 연금술사들을 나는 알고 있네. 그들은 실험실에서 틀어박힌 채 자신들도 마치 금처럼 진화하고자 노력했지. 그래서 발견해낸게 ‘철학자의 돌’이야. 어떤 한 가지 사물이 진화할 때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더불어 진화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걸세. ... 끝으로, 오직 금만을 찾으려는 자들이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비밀을 찾아내지 못했어. 납과 구리, 쇠에게도 역시 이루어야 할 자아의 신화가 있다는 걸 잊었던 걸세. 다른 사물들의 자아의 신화를 방해하는 자는 그 자신의 신화를 결코 찾지 못하는 법이지.” 223
+ 주위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이 있다. 내가 변화하기 위해선 주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내가 요즘 진로 교육을 하다가 든 생각은 이렇다. 나의 꿈, 나의 강점, 나의 가치관을 찾고자 애쓸 시간에 차라리 내 주위 친구들의 강점과, 꿈, 가치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자신의 진로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란 생각. 언제나 그렇듯 ‘나’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면 찾고나 하는 ‘나’는 결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존재다. ‘너’가 없이 홀로 존재하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해선 되려 타인의 신화를 찾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런 자만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제서야 그 빛을 보고 다른 사람에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되지만, 내부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것은 오히려 외부다. 그게 내가 요즘 드는 생각이고, 진로 교육의 방향성이다. 

- “자아의 신화를 사는 자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세.” ...
“만일 제가 해내지 못하면요?” 
“그대 자아의 신화를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이지. 자아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죽음에 이르렀던 무수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네.” 230
+ 나는 아이들과 '토끼와 거북이’ 토론을 주로 하는 편이다.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중요한 이야기는 정말 다 들어있다. 여러 가지 질문과 토론이 이어지고,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거북이라면 토끼에게 시합을 신청할래?’란 질문. 아이들 대부분은 그런 무모한 짓을 안 한다고 말한다. 질 것이 뻔한데 뭐하러 신청하냐고 말한다. 뭐 그럴싸한, 아주 논리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그러던 중 한 아이의 대답이 내 마음을 움직인 적이 있다. 그 아이가 그랬다. ‘나는 거북이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왜?’ ‘만약, 졌다고 하더라도 그 거북이는 거북이들 중에선 유일하게 토끼와 대결해 본 거북이잖아요.’ 심쿵했다. 맞는 말이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탓에, 나는 이후에 아이들에게 모두 이 말을 한다. 아이들도 역시 끄덕거린다. 맞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건 그런 의미가 있다. 죽더라도, 실패하더라도, 거기까지 갔다는 사실, 무언가에 흠뻑 취했었다는 경험. 그것이 의미가 있다.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것이다. 그럼 되었다. 더 바랄 것이 뭐가 있을까?

- 만물이게는 저마다 자아의 신화가 있고, 그 신화는 언젠가 이루어지지. 그게 바로 진리야. 그래서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존재로 변해야 하고, 새로운 자아의 신화를 만들어야 해.” 
… ‘바로 그게 연금술의 존재 이유야.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연금술인 거지. 납은 세상이 더 이상 납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납의 역할을 다 하고, 마침내는 금으로 변하는 거야.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 그거야. 우리가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진다는 걸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 241-242
+ 우리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자아의 발견’이 아니다. 실은 ‘새로운 자아의 발견’이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존재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과정이 바로 삶이기에. 나는, 우리는 그렇게 계속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 역시 거듭나지 못하는 것이기에. 

- “스승님, 고맙습니다. 스승님은 제게 만물의 언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깨우쳐주었을 뿐이지.” 246
+ 참된 스승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코치’도 이러한 사람이고, 심마니스쿨이 지향하는 선생님도 바로 이런 모습이다. 뭔가 덧대거나 뺴는 것이 아닌, 온전한 그 모습 그대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들. 공간을 만들어주는 존재들. 

- 내가 믿고 있는 이 땅의 속담이 있지.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250
+ 아무리 중요한 것이든 한번 일어난 것은 괜찮다.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든 무엇인가를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다면, 그 반복은 내 삶을 지배한다. 내 삶을 만드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니까. 

- “아닐세” 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만일 내가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그대는 정녕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리니.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 264
+ 살아서 꼭 한번쯤은 직접 사막을 건너고 싶다. 피라미드를 보고 싶다. 허긴 지난 번 순례자를 보면서는 순례길을 걷고 싶었는데 말이지. ㅋㅋㅋ

- 그는 배낭 속에서 우림과 툼밈을 꺼냈다. 그 두 개의 돌은 언젠가 아침 무렵의 장터에서 꼭 한 번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돌들 말고도 얼마나 많은 표지들이 그의 여로를 밝혀 주었던가. 자아의 신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얼마나 자비로운지 새삼 신의 뜻에 고개가 숙여졌다. 265
+ 토템이 하는 역할이 있다. ‘흔들릴 때’ 나를 잡아주는 힘. 산티아고에게 우림과 툼밈이 있다면, 나에겐 어떤 토템이 있나. 모르겠다. 지금 하나 떠오르는 건, 내가 군대에서부터 적어온 수첩? 허긴 나에게 보물 1호는 바로 지금까지 내가 써온 수첩들이다. 2012년까지도 나는 아날로그 수첩을 써왔다. 2013년 이후엔 거의 에버노트를 중심으로 옮겨오면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 이전까지의 수첩들은 분명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아날로그 수첩을 다시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나날이었다. ... 내 인생의 그 다음 6년간을 지배한 것은 지독한 회의 였다. 그간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의 언어들은 모두 거짓인 것 같았다. ... 나는 이 절망의 바다에서 비로소 신의 음성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 깊이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 이었다. ...

“그럼 세번째 부류는요?"
“연금술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연금술의 비밀을 얻고,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해낸 사람들일세.” 270-271
+ 내가 마음 깊이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라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킬레스 건은 사실 바로 ‘이기심’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시간을 쓰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철저히 이기적이다. 굳이 좋게 표현하면, 욕망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가치에는 돈이나 시간을 아주 호화롭게 쓰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스쿠르지보다 더 인색하고 못 됐다.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도 인색하고, 심지어 아내나 가족에게도 그런 편이다. 어쩌면 내가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저하고 있는 까닭은 이 ‘이기심’이 저항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빤히 보이기 때문에 나의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슬퍼할 과거의 내가 있다. 하지만 새로운 나, 더 발전된 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균형을 이루고, 내가 진짜 원하는 그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거부하는 내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거부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조만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 위대한 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내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조용히 열려 있었다. 272
+ 진리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길이다. 이 교훈은 순례자와도 겹친다. 그리고 어쩌면 파울로 코엘료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말은 곧 그 주인공은 ‘바로 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자 고통이기에. 그렇게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가는 우리 모두는 결국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필수 조건은 ‘하루 하루’ 자신의 일상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독서 후 성찰

지난 번에 이어서 또 파울로 코엘료다. 사실, 나는 순례자와 연금술사의 내용과 흐름이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는 둘 다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가는 여정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금술사가 비교적 좀 더 쉽고, 편하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선생님은 타고난 직관형 작가가 감각형의 묘사 능력을 습득한 결과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순례자는 내가 잘 모르는 용어들이 많아서 책을 읽는 내내 멈칫멈칫 하는 것에 비해서, 연금술사는 대체로 쉬운 용어로 구성되어서 잘 넘어간다. 순례자보다 훨씬 편하게 볼 수 있는 책이면서도, 메시지와 감동은 그에 못지 않은 훌륭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몇 가지 내 생각을 적어본다.

우선, 주인공을 보자. 나는 순례자의 주인공(이름이 뭐였더라)이 좀 더 파울로 코엘료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는 되려 파울로 코엘료가 살고 싶었던 삶 혹은 수많은 경험 이후에 더욱 탁월해진 자아의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면 지금 현재 시점에서의 파울로 코엘료일 수도 있고. 어찌보면 연금술사의 영국인과 순례자의 주인공, 그리고 파울로 코엘료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 셋은 몇몇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산티아고는 정말 탁월한 성장형 주인공이다. MBTI로 표현하면, 처음에는 내향성 그리고 감각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양들을 돌보며, 그저 이리저리 여행하고 숙고하는 모습에서 나는 내향형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이후 자아의 신화를 이루고자 무의식이 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되고, 좀 더 큰 도전에 직면한다. 양들을 팔고, 사기도 당하고, 크리스탈 가게에서 일도 한다. 이후 사막을 걸어가면서 ‘만물의 정기’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꿈꿨던 피라미드에 결국 도달하게 된다. 끊임없이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을 변모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귀를 닫고, 자신에게 몰두하려 했던 내향적 모습에 비해, 시간이 지날 수록 산티아고는 세상에 자신을 열고, 더 느끼고, 함께 존재하고자 노력한다는 것. 그러한 열림에서 나는 외향형의 장점을 느꼈다. 

산티아고에게는 감각형의 성향도 보인다. 이것은 그의 탁월한 고유성이기도 하다. 아마 추측컨대 파울로 코엘료는 상당한 직관형으로 느껴진다. 영국인도, 순례자의 주인공도 모두 강한 직관형이니까. 하지만 그것으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느낀 파울로가 아마 자신이 가장 지혜롭게 생각하는 내면의 자아를 불러낸 것이 산티아고의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티아고를 감각형 성향으로 추측한 까닭은 직관형보다 좀 더 경험주의적이면서도,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느낄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인과의 대화 <말없이 있던 영국인은 입을 뗐다. “이제부터는 나도 행렬을 좀더 주의깊게 지켜봐야겠군.” 그러자 산티아고가 대꾸했다. “나는 선생이 갖고 있는 책들을 읽어야겠어요.”>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감각형의 모습이었다. 처음에 자신의 꿈을 부정했던 것도 그러한 모습이고. 하지만 산티아고는 이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감각형과 직관형의 탁월함을 취한다. 꿈을 외면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모습도 그렇고, 자신이 지나친 모든 경험에서 의미의 연결고리를 발견해내는 모습도 그렇다. 내가, 아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을 산티아고라는 캐릭터에서 보았다. 그러나 실은, 산티아고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 그의 영웅적 삶은 우리에게 커다락 자극을 준다.

그렇다. 이 책은 사실 영웅의 이야기다. 조셉 캠벨의 명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자신의 시련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영웅의 용기다.” 산티아고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단 나부터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이 말에 공감할 수가 있다. 우리의 삶도 영웅의 여정과 비견될 수 있기에. 나 역시 이번 연금술사에 나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한번 넣어보았다. 이 글로 인해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나의 신화를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글을 다 적은 지금, 나는 어떤 인식의 변화를 이루어냈을까? 분명해진 것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양을 치고 있다는 것.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산티아고의 열망처럼, 나 역시 그 열망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는 것. 첫 번째 도전은 이루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새로운 종류의 게임이다. 나는 이제 살렘의 왕과 노파를 만나서 대화하고 있다. 아직 양을 판 것은 아니다. 아마 다음 미션은 ‘자유’가 아니라 ‘관계’라고 생각된다. 더 어렵고, 더 힘든 도전이 예상된다. 산티아고가 사막길을 걸어간 것 처럼,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할 시점이다. 삶의 신호과 표지를 읽어내는 것, 행운과 불행을 담담하게 여기는 것, 책과 세상을 모두 품는 것, 사랑과 열정을 그 추진력으로 삼는 것, 만물의 정기와 하나가 되는 것,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세상은 나의 발걸음만을 기다릴 따름이다. 










짦은 리뷰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그저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중 이런 멋진 문장을 만났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었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목적을 가지지 말라고? 누군가는 이 말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영어단어가 바로 For (~을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재미를 위해서, 혹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노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미있을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이 아닌 과정 추구.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반작용도 만만찮다. 모든 것엔 음과 양이 있듯) 독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과를 위해선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목적을 가진 독서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가까운 활동이지, 순수한 독서활동이라 할 수는 없다. 삶에는 일도 필요하지만, 순수 독서도 필요하기에.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글을 읽는다고 모두 독서를 하는 건 아니란 것이다. 


다음 부분도 의미있는 문장이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의 경우에도, 충분히 윤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 윤리성은 내 안의 타자, 즉 양심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아무리 종교를 가지고 있고, 열심히 믿는다 하더라도 타자성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면 윤리는 얻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종교적이면서 집단 이기주의적인 희안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타자'를 인식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성찰 그리고 독서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홀로 찬찬히 읽어 나가는 독서 활동과 성찰 활동은 그것을 가능캐 한다.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만 해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것들에 공감하고 반응하기 시작하기에.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문장을 꼽아보자.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모든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이렇게 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한번 읽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고. 나의 경우에도 중요한 책은 3번 정도 읽는다. 처음에 줄을 치면서 읽고, 두 번째는 인상 깊은 문장을 옮겨적으면서 다시 읽는다. 그때 놀라는 일도 많다. 이런 문장이 있었어? 라고. 마지막은 내가 옮겨적은 문장을 다시 읽으며 느낀 점을 적거나 리뷰를 적는다. 그렇게 3번은 읽어야 조금은 책이 나에게 들어온다는 걸 느낀다. 내가 읽는 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갈 수록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진짜 독서의 참맛이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책 조금 많이 읽는다고 우쭐했던 내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 



가슴에 남는 글귀 

p.28
프랑스의 교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자신의 독서론 ‘소설처럼’에서 ‘책을 읽다’라는 동사가 ‘꿈꾸다’ ‘사랑하다’와 함께 명령어로 바꿀 수 없는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사랑하라’ ‘꿈꾸라’하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것이 명령자의 뜻대로 실행될 수 없듯이, 읽기 싫은 사람에게 ‘읽어라’하고 명령해보았자 그저 읽는 척하거나 이내 수면제 대용으로 활용해버릴 뿐이다. 그래서 페나크는 책 읽기를 보다 친근한 일로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독자의 10가지 권리를 제창하고 있다. 

첫째, 읽지 않을 권리. (나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장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하든 읽고 싶지 않을 때는 안 읽는다.)
둘째, 건너뛰어서 읽을 권리. (새로 발간된 전공 서적을 읽을 때 내가 잘 쓰는 수법이다.)
셋째,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다.)
넷째, 연거푸 읽을 권리 (내가 좋아하는 로크카의 시집은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이제는 거의 다 외운다.)
다섯째, 손에 집히는 대로 읽을 권리 (이현세의 만화를 읽다가 갑자기 막스 베버를 읽은들 어떠랴.)
여섯째, 작중 인물과 자신을 혼동할 권리.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 햄릿이 되고 또 가끔 홍길동이 되기도 한다.)
일곱째, 읽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권리. (침대에서 읽고, 기차간에서 읽고, 수영장에서도 읽는다.) 
여덟째,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읽을 권리 (내 특기다)
아홉째, 소리 내어 읽을 권리. (흥이 겹거나 감동했을 때는 저절로 소리가 난다.)
열 번째,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책 읽기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즐거움을 혼자만의 비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p.50-51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거냐?” 이 질문은 ‘효용’이라는 관점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질문이다. 물론 책 읽기는 실용적 동기를 가진 사람에게도 쓸모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 무언인가를 배워서 응용하기 위해 책을 찾는 사람들이 독서 인구의 가장 큰 축을 이룬다. 이 책 읽기는 ‘공부’로서의 책 읽기이므로 누구에게도 박해받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궁극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또는 아내에게 핀잔 받는 책 읽기야말로 책 읽는 자에게 지고의 쾌락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4만 권이 넘는 자신의 책을 밀라노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는 말한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그가 권하는 ‘목적 없는 독서’야말로 문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다. 이런 책 읽기는 시험에도 취업에도 농사일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되면 어떤가? 그 무엇보다도 책 읽기는 쾌락으로 충만해 있지 않은가. ...

...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는 진정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을까?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나중에 세상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지는 사람이 된다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깨달아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많이 한 사람일수로 목적 있는 책 읽기만 주로 한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고 더 따뜻한 것을 나는 보았다. 


p.60
책을 읽을 때는 사람이 주인이다. 읽으려는 의도와 읽는 속도, 그만두는 행위를 사람이 스스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매체는 사람보다 더 힘이 세고, 사람보다 더 빨라서 사람을 종종 압도한다. 물론 편하기는 하다. 영상의 속도에 감정을 맞춰두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일을 남의 의도에 내맡기기 쉽다. 책 읽는 일이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스스로 책을 고르고, 책장을 연다. 또 스스로 활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 때로 앞장으로 되돌아가려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또는 읽다가 팍 덮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린다. 이 모두 사람이 스스로 하는 일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일보다 귀찮고 힘이 드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래서 그만큼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p.64-7
어떻게 하면 이 ‘끔찍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서간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는 그 해답의 작은 단서가 비친다. 로마교구의 마르티니 추기경이 던진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코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사람은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 육체의 확장인 다른 사람의 말, 사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량학살, 식인 풍습, 타자의 육체에 대한 모욕을 인정하는 문화가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 것일까요? 그 문화들은 ‘타자’의 개념을 단지 부족 공동체에만 국한시키고, ‘야만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병사들조차 이교도들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를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들을 타자에게서도 존중해야 할 필요성, 이것은 바로 천년에 걸친 인류 성장의 결실입니다."
/ 움베르트 에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 

…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상은 나치 학살자들이 ‘타자’의 범위를 자기 민족으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생긴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영상미디어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전쟁과 살인의 물화를 거부하는 일, 미디어 이벤트가 된 전쟁과 테러의 와중에도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는 일,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읽는 일이다.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만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특별한 혜택이다. ... 책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인간 유형을 만나게 해준다. 우리는 책 속에서 허락도 약속도 없이 여러 유형의 인간들과 마음대로 만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책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선에 우리를 세워준다. 


p.85
종이책은 ‘무한 에너지’를 가진 매체다. 충전시키지 않아도 되고, 콘센트에 꽂지 않아도 볼 수 있다. ... 또 책은 개인매체다. 혼자서 사용하고, 혼자서 통제하고, 혼자서 즐기는 매체다. ... 책은 내용에 제한이 없다. 즉 어떤 콘텐츠도 다 담을 수 있다. 이런 콘텐츠의 ‘다양성’이 매체로서 책이 가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의 하나다. 


p.88

이 모든 장점을 다 합쳐도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책만이 가진, 책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책이 ‘사람이 주인인 매체’라는 데 있다. 즉, 책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통제해야만 하는 매체다. 책을 읽는 일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행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행위와는 달리 ‘읽는 의지’가 필요하다.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려는 인간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만큼 쉽지 않다. ... 책 읽기가 고통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책이 독자에게 자신을 해독할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을 온전히 읽으려면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문장 전후의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 그러나 책 읽기에 따라오는 이런 고통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모든 쾌락은 고통의 시간 뒤에 온다. ... 깊은 쾌락일수록 깊은 고통을 요구한다. 


p.94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위정자가 독재자였고, 누가 민주적인 통치자였는지 한 칼에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손쉬운 독재자 판별법이 있다. 책을 불태운 자가 바로 독재자다. 네로, 진시황,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불사르는 자가 빼앗고 없애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상력, 꿈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또한 ‘남과 다른 생각’이며, 남의 말이나 남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다. 그렇다. 책을 읽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 귀찮고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더욱, 인간으로 태어난 지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책 읽기는 때로 어렵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  


p.122
다시 읽기를 주창하는 사람 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씨가 있다. 그는 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오래전에 갔던 산사를 다시 찾아가는 일과 같다. 전에는 안 보이던 빛바랜 단청이며 뒤뜰의 부도탑이 어느덧 눈에 들어온다. 몇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왜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같은 절을 여러 번 방문하면, 무엇보다도 절집 전체의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뒷산과 대웅전 처마 끝이 맞닿은 풍광이 가슴에 천천히 안겨오게 된다. 책도 이와 같다. 오래 사귄 책은 오래된 절과도 같다.


p.134
내용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책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추억만 읽으면 된다. 가끔 어딘가에서 책을 읽었던 그 행위 자체가 한 권의 책이 된다. 프루스트는 말했다. “자신이 읽은 책에는 그 책을 읽은 밤의 달빛이 섞여 있다.” 


p.146
그렇다고 고전이 필요없다는 건 아니다. 고전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큰 울림을 남긴 책이다. 사람들이 되풀이해서 읽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그 내용과 명성이 오랜 시간 전해지면서 비로소 전설이 된 책이 고전이다. 그러나 책 읽는 사람 각자에게 의미 있는 ‘고전’이 있을 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고전’은 없다. 저명한 학자나 권위자가 정한 고전 목록에 체크를 해가면서 한 권 한 권 억지로 읽는, 마치 방학 숙제와 같은 책 읽기에서 좀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p.164-6
아무도 내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책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매달리는가?”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을 바라보듯이, 책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책 읽기보다 더 즐거운 일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 오래도록 책을 읽고 있는 까닭도 책 읽기가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정치학자인 최장집 선생이 자신의 일과가 “전공 책을 읽는 시간과 비전공 책을 읽는 시간으로 나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 얼마 전 일본 문학의 두 거장인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의 ‘필담’을 읽다가 거기에 나오는 쓰지 구니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있다. 다음의 문장 중에서 ‘문학’이라는 말을 ‘책’으로 바꾸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될 듯싶다. 

“문학이란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놀아야 한다’고 해서 ‘놀이’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하나의 ‘놀이’와 같습니다.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어떤 ‘놀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관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행복’ 그 자체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무관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마냥 즐거운가. 그렇지만은 않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하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동시에 경험한다. 책을 읽는 자는 완전한 단독자로서 세계와 맞닥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읽는 일은 구원인 동시에 좌절이다.  


  1. 조아하자 2015.11.30 21:29 신고

    책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 맞는말인듯... 책을 포함해서 문화유산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라는 말도 맞는거같아요... 최근에는 IS가 문화유산을 불태워서 말많았죠.

10월 1일
두 번의 감동

오늘은 오전이 유난히 인상깊은 날이다. 일찍부터 미팅이 있어서 일찍 나온 아침이었다. 매일 보던 정류장이고 매일 타던 버스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달랐다. 대구에 다녀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것인지, 어둑어둑한 날씨 때문인지, 조금씩 떨어지는 낙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버스를 타고 노래를 선곡했다. 왠지 오늘 아침에 어울릴 것 같은 곡, 황혼을 틀고 이어폰을 귀에 꼽는 순간, 살짝 전률했다. 지금의 이 공간, 이 시간, 그리고 노래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그 느낌. 그걸 포착하자 기분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노래를 온전히 들었다. 그저 좋았다. 미팅 장소는 종각 투썸이었다. 맨 윗층에 가면 야외 테라스가 있는데, 나는 거기 앉아서 읽던 책을 마저 읽기로 했다. 어둑한 날씨는 더욱 그 정도가 심해지고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드문 일이었다. 빗 속에서 책을 읽는 건. 빨간 파라솔이 나를 지켜주고, 그 속에서 책을 읽는 경험은 색달랐고 그 맛은 깊었다.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10월 2일 
아내와 함께 한 금요일

오래 전 부터 약속했던, 아내와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이다. 벌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육아를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아주 많아진다. 분명 가족과 (특히 재원이와)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 놀라운 경험. 육아가 주는 놀라운 망각의 힘이다. 분명한 건, 이날 나와 아내는 합정에 다녀왔다. 그리곤, 뭐 했더라. 흠. 그날 적지 않았더니 벌써 이런 부작용이. 원래 홍대에 나가기로 했는데, 급 피로해진 아내 때문에 합정에서 멈췄던 기억만 나는구나. 에헤라디야. 

10월 3일-4일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

토요일은 일정이 있어서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다. 일요일은 언제나 그렇듯, 대항해의 시대가 아닌 대청소의 시대. 먼지를 훔치고, 청소기를 돌리고, 그 와중에 재원이를 보고, 창문틀도 닦고. 이리저리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2-3시간이 훌쩍 지난다. 사실 오늘은 지난 번 외출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멀리 나가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처음 목표는 이케아였다. 하지만 청소를 하면서 점점 빠지는 기운들. 결국 이케아를 가긴 무리일 것 같단 결론을 내렸고, 해서 간 곳은 명동이다. 아내는 유난히 명동을 좋아한다. 명동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나는 엄청난 중국 관광객들에게 치이는 것이 두렵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멀리 나가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막상 도착해서 본 명동은 사실상 ‘홍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아내와 홍콩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자꾸 났다. 중추절은 맞은 요우커의 위엄은 대단했다. 그렇게 사람 반, 물건 반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미국을 따라한 이벤트가 있었다.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해서 국가적인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아마 그 영향인지, 사람들이 더 많아진 듯 하다. 예전의 나 같았음 별 생각이 없었을 것 같다. 그냥 ‘아 물건 싸게 파는구나. 뭐라도 사 볼까?’ 정도의 생각만 했을 테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요즘 이런 저런 철학책을 뒤적거려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이 현상이 너무나 비판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소비’를 권장하는 세상이라니. 어느새 이 세상의 경제 원리는 자원을 많이 가공하고, 물건을 만들고, 사용하고, 서둘러서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야 ‘경제’가 발달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오래 쓰는, 튼튼한 물건을 만들면 경제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소비가 경제 생활의 중추라니. 그렇게 해서 경제 성장률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니. 생산과잉과 소비과잉, 그러한 모든 ‘과잉’이 미덕이 되어버린 이 사회가 이젠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적절하게 생산하고, 오래쓰는 삶은 그리 권장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왠지 슬프게 다가온다. 뭐 그렇다고 내가 당장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건 아니지만, 좀 더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다. 그건 분명하다. 이번 쇼핑에서 느낀 교훈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10월 5일 
시간의 효율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굉장히 효율이 높은 시간대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간대도 있다. 아마 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음악하는 사람들은 주로 밤에 작업한다고 하는데, 그들에겐 아마 그 시간이 가장 생산적인 때가 아닐까?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인, 직장인들은 9시에서 6시 사이에 근무한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가장 생산적인 것을 아닐 테지만, 어쩔 수 없다. 다들 그 시간에 일하니, 나도 해야 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인식되길, 낮 시간은 일을 하는 시간이다. 특히 오전에 회의를 진행하고, 그 회의 결과를 토대로 오후에는 각자의 업무를 진행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왜 이렇게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느냐고? 왜냐면 시간을 망쳤기 때문이다. 무슨 시간을? 오후 업무 시간을 말이다. 나에게 있어 시간은 매우 불규칙적이다. 강의를 하는 중간 중간 시간이 나에겐 업무 시간이다. 따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한다. 특히 자투리 시간이 많기 때문에 잘 쓰면 보물같고, 잘못 쓰면 인생 금방 나락으로 떨어진다. 오늘 나에겐 2시부터 4시까지 자투리 시간이 있었다. 남들에겐 가장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황금 오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왠지 어수선했던 것 같다. 난 희안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충분히 하고나서 일을 하면 잘 되는 편인데, 그렇지 못하고 바로 일을 할 때는 잘 되지 않더라. 게다가 나에게 오후 시간은 정말 지루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차라리 강의를 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일은 정말 효율이 낫다. 차라리 책이나 읽을 껄. 하는 생각을 이제는 한다. 내가 잘 쓰는 시간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기에. 성찰을 하는 이유는 나의 부족함을 알고, 다음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늘 망쳤으니 다음에는 더 제대로 만들자. 오전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자. 


10월 6일 
초서를 하는 이유

초서(옮겨적기)를 하게 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첫 번째.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 패턴을 보게 된다. 내가 줄을 그은 곳을 다시 읽으며, 하나하나 정성들여 옮겨적다 보면 ‘아, 나는 이런 문구에, 이런 의미에 반응하는구나.' 그걸 알게 된다. 두 번째.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다. 나중에 내가 책을 쓸 때, 결국 모든 사례들은 나의 초서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의 열매는 나의 씨앗이 된다. 마지막, 내 책을 누가 읽어줄 때 이렇게 읽었음 좋겠다. 하나하나 나에게 공감했던 것에 줄을 치고, 옮겨적는 과정은, 사실 내가 저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다. 나도 이런 성의를 들여서 내 책을 읽는 독자를 만나고 싶기에.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값어치 있는 것을 값어치 있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만큼 가치있는 글을 쓰고 싶단 갈망도 여전하다. 

10월 7일
세계를 담은 스쿨 성과발표회

오전은 마들역 상경중에서 시작했다. 시스템 사고 강의를 마치고 허겁지겁 노들역 동양중으로 갔다. 동양중은 정말 산 위에 있는 학교다. 처음 갔을 때 엄청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수업을 마친 시간은 4시 10분. 아직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은 시흥의 ABC행복학습타운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바로 ‘세계를 담은 스쿨’ 성과발표회를 여는 날이었으므로. 갔더니 엄청 나게 준비를 하셨더라. 학생들 사진 하나하나를 다 코팅하고, 자르고.. 이렇게 디테일한 것에서 감동을 준다는 걸 세삼 느꼈다. 성과 발표회는 잘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문자를 이렇게 보냈다. 다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늘 참석함으로써 프로젝트를 완주하신 분들, 그리고 개인 일정으로 완주하지는 못 했지만 마음으로라도 함께 해준 분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탔던 롤러코스터는 이제 내리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펼쳐질 여러분의 가능성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더 멋지게, 더 행복하게 잘 살아갑시다. (씨익) 워낙에 좁아진 세상이라, 언제든 어디서든 다음에 또 만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담에 만나면 또 웃으며 인사해요. 앞으로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다시 한번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하트뿅)"

10월 8일
칠보초 짧은 회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3주. 사실상 다음 주 1주 남았다. 그때, 퍼실리테이션을 해야 겠다. 우선, 3학년 수업. 이번 시간에 우진이랑 성민이 했지만, 한명 한명과 시간을 보내볼까. 각자의 강점과 단점을 인지하는 것. 그 활동을 해보자. 수업 시간에 기억남는 것은 마지막 시간에. 4학년은 좀 더 다르다. 차별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퍼실리테이션을 해보자. 크로스 더 라인을 해볼까. 아니면, 무엇을 할까. 고민이 된다. 세아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하고 싶다. 5-6학년은 뭐 이번에 나온 기획을 그대로 해보면 된다. 아이들이 마음먹고 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다. 마지막 2번은 그대로 하면  되고. 아. 함께 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짧아지니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해진 일정을 바꿀 수 없으니 바꿀 수 있는 걸 바꾸자. 바로 나의 마음! 언제나 나의 신조를 염두하자.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그 교훈은 언제나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 

10월 10일
딥스

아침에 딥스를 읽으면서 캠프를 진행하러 가는 길이다. 아침에 밥이 얼마 없길래 그냥 안 먹고 나왔다. 아내는 배고플 때 민감해진다. 사실 지난 번에 일어났는데 나 때문에 밥이 없다고 한번 혼난 이후에 좀 신경이 쓰이기도 하다. 지하철에서 통하를 하는데 아내가 왜 밥을 안 먹었냐고 한다. 나는 지난 번에 혼나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살짝 울컥했다. 아 내 안에 있는 어린 자아는 그 말에 상처 받았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를 품고 있다. 성숙한 자아에서 외롭고 어린 자아까지. 각각의 자아는 자신의 역할을 맡아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딥스를 보면서 그런 관점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이것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것.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 그렇구나 상처 받았었구나. 그랬구나. 라고 말해주는 것.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9월 21일
책 읽기 - 한번 더 옮기기

현대인들에겐 책 볼 시간이 없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책 볼 시간이 도저히 없다. 내가 유일하게 책을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하철'뿐이다. 지하철 이외의 장소에서 책을 본 기억은 나름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하던 시기뿐이다. 2012년을 기점으론, 앉아서 책을 읽은 적은 손에 꼽는다. 앉으면 보통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책을 읽기 위해 나는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일단 강의장소가 멀면 멀수록 보통은 주저하지만, 난 마다하지 않는다. (되려 속으론 반긴다.) 비효율적인 동선을 많이 만들수록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기에. 작년엔 그 정도가 심해서 매주 오산, 일산, 남양주, 시흥, 성남을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다. 올해 들어서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이동시간이 만만찮은 곳들이 여전히 많다. 그렇게 시간을 확보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강의 준비는 끝이 없는 거라서, 이동 내내 강의 준비를 하면 책을 볼 순 없게 된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에 이어 두번째 조건, '정신적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나는 이동 중엔 내가 강의 하러 간다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 강의 준비 시간과 책 보는 시간은 철저히 구분하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없기에. 마지막, 사실 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 발터 벤야민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강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 기쁨이 참으로 커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탁월한 비유다. 그 문구를 나에게 가지고 오면 이렇게 된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일까, 책을 보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일까. 문득,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게. 어느새 성큼 다가온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9월 22일
중간 점검

9월의 2/3가 지났다. 중간 점검을 해보자. 탁월한 삶을 위한 훈련은 필연적이기에.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3월부터 하나의 실험을 했다. 매일 성찰일지 적기. 물론 밀릴 때가 대부분이다. 3-4일 정도 밀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일주일 이상 밀리진 않았다. 그리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적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나 자신에게 칭찬해 줄 부분이다. 그래서, 작년 내 삶의 만족도를 6-7점 정도라고 한다면, 올해는 8-8.5점은 된다. 꽤 높은 점수의 상승의 절반은 재원이가, 절반은 성찰이 책임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끝인가? 아니다. 아직 멀었다. 그 하나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었다. 9월부터 시작된 실험은 바로 ’Self-control’ 프로젝트. 매일 하나의 할 일을 정하고, 그것을 하는 것.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지속하기에 그리 쉽지도 않다. 매일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 그 자체가 꽤 어려운 일임을 고백한다. 실제로 처음 며칠은 생각도 나지 않더라. 하지만 어느새 거짓말처럼 21일 정도가 지났다. 누군가 그랬다. 습관을 형성하는 시간이 21일이라고. 꽤나 설득력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젠 알아서 매일 할 일을 기록하고, 체크하고 있다. 그래. 올해는 나를 대상으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자. 그리고 내년엔 그 실험 결과를 공유하고, 함께 나아가자.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자고 하는 것은 기만이지만, 내가 갔던 길을 가자고 하는 것은 초대이자, 배려기에. 그렇게 함께 훈련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다 같이 걸어들어가 보고 싶다. 9월 지금까지 나의 만족도는 8.5점이다. 남은 1.5점은 단순하다. (솔직히 9점 이상이 되긴 어려울 듯 하지만) 남은 기간도 온전하게 이 프로젝트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9월 23일 
열정에 대하여 

오늘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연이은 미팅이 있는 날. 앞서서 김희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나는 사회적 기업과 관련된 공부를 한참 할 때였다. 아마 10월이었나 mysc에서 주관하는 소셜 이노베이터 캠프가 열렸다. 다른 것보다 기대가 된 것은 체험형 워크샵과 OST를 직접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박 2일이란 일정에도 불구하고, 신청했다. 결과적으론 만족스런 경험이었다. 그 과정에서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했다는 인연으로 만났었다. 왜냐? 당시 선생님께서 협동조합 보드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때 한참 보드게임에도 관심이 많던 나는, 이후 몇번 회사를 찾아서 이야기도 했고,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해 보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쯤, 교육 하나 같이 하자고 의견도 모았지만 결국 그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근 1년만에 다시 만나서 대화하는 거라, 근황을 주로 나누었다. 이번 만남에서 특히 인상깊은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이었다. 신나게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며, ‘아, 이분은 정말 좋아하는거 하시는 구나’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저런 곳에 역사 탐방을 다니시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듣고, 공부도 하시는 모습이 나에게 좋은 자극도 되었다. 또한, 대동법 시행과 관련한 비석을 설명할 때는 정말 기존에 ‘의미없었던 비석’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어 출현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역사가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열정에 감탄을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만난 선생님은 최승표 선생님. '우리 아이는 야구선수'란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시는 분이다. 사실 인연이 된지는 꽤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미내사에서 부터 이어져오니 ㅋㅋ 암튼 선생님도 앞서 처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 나라에 좋은 운동 문화가 퍼졌음하는 바람이 나에게도 전해져 온다. 나 역시 이에 감화되어서 이번에 워크샵을 함께 진행하기로 했고 말이다. 암튼 이런 분들의 열정을 접하면, ‘열정’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열정이란, 정말 ‘삶’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아닐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그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 의미있게 생각하는 것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것, 그렇게 삶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열정이 아닐까. 


9월 24일 
칠보초 수업 성찰

칠보초 감사 수업이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시간은 감사편지를 읽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이번 1년은 나름의 주제를 바탕으로 주제별 수업을 진행해오고 있는데, 이번 감사수업에서 그건 가장 잘 지켜진 것 같다. 도입은 이야기로, 전개는 자신들의 실제 사례로, 절정은 역할극이나 프로젝트로. 마무리는 나눔이나 표현으로. 그렇게 하나의 주제를 탐색해보는 활동을 의도했었는데, 이번에 그나마 잘 된 것 같다. 그렇게 하반기 수업도 하나씩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잘 따라와주는,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는 아이들이 감사하다. 


9월 25일 
지현쌤과의 대화

꼴라주 프로그램 때문에 서둘러 미팅을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미팅을 하면서 느끼는 건, 재미있는 과정이 될 것 같다는 기대다. 역시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고, 그 특징이 잘 발현되는 분위기가 연출될 때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건 기정사실인듯. 미팅을 마치고 지현쌤과 남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했다. 지현쌤은 나와 애니어그램 성향은 다르지만, MBTI적 성향은 비슷하다. 나보다 외부에 비교적 많이 열려있으신 편이지만, 그래도 내부와 외부의 균형이 잘 맞는 편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나 관심사도 비슷한 편이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성향도 비슷하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저런 주제로 대화했는데, 마무리할 때쯤 정리가 된 것이 있다. 퍼실리테이션과 디자인씽킹과 시스템씽킹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다. ㅋㅋ 일단 도입은 퍼실리테이션이다. 왜냐? 참가자들에게 ‘힘’을 되찾게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언와 아이디어이 반영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필수다. 그것이 없으면 공동 창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힘을 되찾게 하고, 그 힘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역시 ‘디자인씽킹’이다. 디자인씽킹의 ‘행동 중심 모델’은 굉장히 뛰어나다. 공감을 중심으로 한 행동, 그리고 지속적 피드백. 그렇게 참가자들은 자신의 힘을 자각한다. 마지막은 시스템씽킹이다. 자신이 발휘한 힘에 대한 영향력을 추적하는 것은 역시 ‘시스템씽킹적 관점’이 최고다.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고, 결과가 원인에게 다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그 피드백을 고려하는 것. 그렇게 해서 큰 그림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것. 그렇게 되면 전체 과정은 하나의 조각으로 완성된다. 끝없는 이 그림을 맞추는 것은 각자가 일상에서 돌아가서 해야 할 몫으로 남고 말이다. 역시 함께 아이디어를 합치고 나누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었다. 


9월 26일 - 29일 
추석 연휴 리뷰

이번 추석 연휴를 간단히 리뷰한다. 첫날, KTX를 타고 대구로 이동했다. 평소 나는 돈이 아까워서, 그리고 기차에서 책을 읽고자 주로 ‘무궁화호’를 이용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재원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빈 자리가 없어서 특실을 끊었다. 비싸서 그렇지 진짜 빠르긴 하더라. 1시간 40분만에 대구에 도착했다. 평소 왠만한 수업 다니는 거리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달떡’을 사러 간 것이다. 달고 떡볶이는 정말 맛있고 싸다. 2000원치만 사면 2-3명이 배부르다. 게다가 맛있다. 나는 매년 2번 대구를 가고, 매번 도착하자마자 사 먹는다. 올해는 아버지가 이벤트를 준비했더라. 재원이의 방문을 축하하는 대자보가 뙇! 진짜 웃겼다. ㅋㅋㅋ 손주가 이쁘긴 이쁜가보다. 한참을 웃고 제사음식도 먹고 놀았다. 저녁에는 아버지랑 같이 두류공원도 산책했다. 

ㅋㅋㅋ 대박 ㅋㅋㅋ


다음 날, 아침일찍 차례를 지냈다. 사실 지난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내도 나도 재원이도. 왜냐? 그놈의 모기! 재원이도 팔과 다리에 10방 정도를 물렸고, 나도 그랬다. 한 녀석이 그런거 같은데, 암튼 엄청 힘들었다. 비몽사몽으로 차례를 지내고, 사촌동생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후엔 성묘를 갔다가 할머니 요양원도 들렸다. 할머니는 이제 정말 치매가 심해지셨더라. 우리들이 가서 인사를 해도, 엄마가 먹을 것을 드려도, 그저 ‘감사합니다’만 반복하셨다. 처음보는 사람처럼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사실 할머니를 통해서 키워졌기 때문에 할머니랑 각별한데, 마음이 너무나 아렸다. 평소에 편히 눈감으시는 것을 얼마나 꿈꾸셨는데.. 매번 편하게 눈감게 해달라고 애원하셨는데, 지금은 편안해 지셨으려나 모르겠다. 암튼 남은 기간 동안 할머니가 진심으로 평안하시길 기도한다. 정말 그러하시길.. 에효. 암튼 저녁에는 다들 힘들어서 뻗었다. 다음 날, 오전에 아파트 주위에 산책을 다녀온 것 이외에는 별 일이 없었다. 재원이 보느라 다들 정신없었다. 오후에 외출을 했다. 요즘 뜬다는 ‘김광석 거리’에 방문했다. 정말 예쁘더라. 그림과 음악이 어울려진 거리였고, 그에 맞춰서 갖가지 상업적 시설(;;)도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는 ‘예술의 힘’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서울로 치면 연남동이나 통의동을 걷는 기분? 예술이 자리를 잡으면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 사람들을 따라서 돈이 들어오는 모습에 더불어 볼 수 있었고 말이다. 백화점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왔다. 마지막 날은 오전에 떡볶이를 먹고, 오후에 KTX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 추석 연휴를 정리하자면. (혼자일 때보다) 정신적, 시간적 여유는 많이 없어졌지만, 그 덕분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광경들을 새롭게 목격할 수 있었던, 그런 의미있는 명절 연휴라고 정리하고 싶다.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에서



생후 8개월이 된 재원이. 
어느덧, 우리 집에 아기가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다. 추웠다가, 더웠다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육아는 세상에 있는 아이의 숫자만큼 다 다르면서도 또 비슷하다.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 고르게 존재하는 것이 육아의 매력이 아닐까. 일단 하나의 사례로써, 생후 8개월 차 재원이를 보는 내 생각을 적어보기로 한다. 생후 6개월부터 8개월까진 아이의 성장도 급격했고, 육아 모습의 변화도 컸다. 그래서 부모가 꽤 힘든 시기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이유로 아기가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보채기’도 더 많아졌다는 점이다. 아내만 해도 이렇게 말한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모유 수유 할 때를 제외하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고. 대부분 시간은 아기가 잠을 자니 말이다. 하지만 5-6개월 지나면서 재원이가 낮에 깨어있는 시간은 부쩍이나 많아지고 그에 비례해서 보채기도 늘어났다. 누워있어도 ‘으앵~' 바운서에 앉아있어도 ‘으앵~' 모빌을 보여줘도 ‘으앵~' 울리는 것이 싫으면 엄마가 계속 안고 있어야 하는데, 이제 10킬로에 근접하는 꿀돼지 재원이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책을 찾아보니, 워낙에 빨리 성장하는 시기라 아기들도 많이 힘들다고 한다. 그래. 너희들도 얼마나 힘들까. 게다가 이제 슬슬 낯을 가리는 때라서 더욱 그렇다고 하니, 정말 부모의 한없는 인내심과 체력이 요구되는 시기임엔 틀림없다.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바로 이유식 만들기라는 수고다. 아내는 유기농 재료를 직접 다 사서 찌고, 갈아서, 만들어 준다. 그 과정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더라. 이처럼 집안 일 하는 시간이 대폭 늘어난 것이, 새롭게 발생한 일거리다. 수유 하랴, 이유식 만드랴, 간식도 만드랴, 장도 보랴. 엄마가 되는 건 정말 만만찮은 일이다. 나도 한번씩 간식이나 이유식을 먹일 때가 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다행히 재원이의 경우엔 잘 먹는다. 이렇게 잘 먹는 아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먹는 편이라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유식 먹이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특히 다소 까탈스런 여아의 경우에는 밥 한번 한번 먹이는게 전쟁이라고 하니,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들은 그래서 지나가다 눈빛만 주고 받아도 서로 공감하는 게 있다. 안 봐도 그 집안 꼴이 훤히 보이니 말이다. 어찌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만 서로 커질 뿐이다. ㅎㅎㅎ 

조심해야 할 환절기에 감기가 걸리다. 
어디선가 들었다. 태어난 직후 엄마의 초유를 먹게 되면, 그 성분이 아기를 지켜주는 슈퍼 방어막 역할을 한다고. 그래서 대략 생후 6개월까지 아기들은 몸 안의 초유 성분 때문에 거의 아프지 않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인체의 신비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후 6개월 이후는 자체 면역력을 길러야 하는 시기다. 덕분에 감기를 비롯한 잡다한 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고, 또 이유식을 먹기 때문에 다양한 알러지 반응도 잘 지켜봐야 한다. 이래저래 부모들은 정신이 없는 시기인 것이다. 몇 주 전이었다. 마침 환절기라, 나는 가벼운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으슬으슬한 느낌도 없었는데, 어느새 일어나보니 목이 칼칼하고, 콧물이 나더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원이도 감기가 걸리고 말았다. 아내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나를 향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육아관’이 부딪치기도 했다. 많은 집에서 이런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을까. 아빠는 ‘괜찮다’쪽, 엄마는 ‘안된다’쪽. 모든 문제를 망원경으로 보는 아빠와, 현미경으로 보는 엄마의 관점 차이는 결국 전쟁이란 파국으로 치닿고 만다. 그래봐야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모든 아빠일터. 

어쨌든, 한번은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감기이긴 하지만 미리 예방하고 대처하는데 게으른 나의 과오가 더 돋보인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조금만 아이가 아파도, 내가 아픈 것보다 훨씬 놀라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특히 엄마들의 마음)이 아닐까.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암튼, 그렇게 감기에 걸리자 열이 꽤 높아지기 시작했다. 38도가 넘어가자 나도 아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급히 편의점에 가서, 유아용 해열제를 사왔다. 아내는 재원이 옷을 벗기고, 계속해서 온도를 체크했다.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으면 응급실을 갈 수도 있었기에. 콧물 때문에 숨을 쌕쌕 거리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아기를 보니, 정말 우리 마음은 찢어지더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아플 때 그랬겠지?'라고 생각하니,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기도 했다. 다행히 튼튼한 재원이는 그날을 기점으론 열이 더 올라가지 않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엄~마~' 라고 말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늘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특히 요즘 들어서 느끼는 재원이는 부쩍 귀엽다.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허허허허. 이젠 활동 범위도 꽤나 넓어져서, 아직 엎드려서 앞으로 나아가진 못 하지만, 제 자리에서 뱅글 뱅글 잘도 돈다. 어지럽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눕혀두면 뒤집고, 뒤집고 나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빙글빙글 움직이는 재원이. 보고 있노라면 정말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게다가 요즘은 얼굴에도 물이 올랐다. ㅋㅋ 7개월까지만 해도 호빵 하나를 크게 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될 정도로 얼굴이 빵빵했었는데, 8개월이 되어가니 얼굴살도 좀 빠지고, 더 훤칠해진 느낌이다. 몸무게는 9.6키로 정도에서 어느새 정체하고 있는데, 활동성에 비례해서 살도 빠지나보다. 아내는 몸무게가 안 늘어난다고 투정이지만 말이다. 얼마나 찌울 생각이셨는지. ㅋㅋ

아이가 성장하는 속도 만큼이나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태어나서 몇 년 동안 인간은 가장 빠른 속도로 자란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더라. 그렇게 아이가 육체적으로 쑥쑥 크는 시기에, 부모는 이런 저런 경험을 거치며 정신적으로 쑥쑥 자랄 수 밖에 없다. 결국, 아이도 부모도 함께 쑥쑥 자라는 시기다. 참으로 고마운 시기이고, 인생에서 한번 밖에 없기에 더 없이 아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글을 쓰며 다시금 각오를 다진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 순위를 두고 아내와, 재원이와 함께 하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반가운 소식이다. 일단 기록해야 겠다. 2015년 9월 24일 저녁, 재원이가 첨으로 ‘엄~마’라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럴수가, 이 역사적 순간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 모든 엄마는 거짓말쟁이라고, 처음엔 나도 믿지 않았는데, 이모도 같이 들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이제 말을 시작하는구나. 한 동안 웅얼웅얼 하겠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말을 쏟아낼지, 어떤 삶을 살지 참 궁금하다. 부모로서, 그 미지의 세계로 용기있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첫 말문 터진 것, 정말 축하해 재원아!  




  1. nabistory 2015.09.25 08:59

    그 개월수가 이제 저는 까마득 하네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저처럼 까마득해질 때쯤 이글을 다시보면 행복할것 같아요. 저도 지난 기록 좀 뒤져봐야겠어요 ~^^

    • 맞아요.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지금의 기억을 생생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랍니다. :) 기록이 기억을 지탱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쌤 추석 잘 쉬셔요!

  2. aquaplanet 2015.09.30 09:42 신고

    환절기엔 아이들이 감기며 알레르기며 많은 걸 조심해야 할 때죠ㅠㅠ
    아이들의 면연력이 빨리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독서 #책읽기 #가을 


현대인들에겐 책 볼 시간이 없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책 볼 시간이 도저히 없다. 내가 유일하게 책을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하철'뿐이다. 지하철 이외의 장소에서 책을 본 기억은 나름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하던 시기뿐이다. 2012년을 기점으론, 앉아서 책을 읽은 적은 손에 꼽는다. 앉으면 보통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책을 읽기 위해 나는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일단 강의장소가 멀면 멀수록 보통은 주저하지만, 난 마다하지 않는다. (되려 속으론 반긴다.) 비효율적인 동선을 많이 만들수록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기에. 작년엔 그 정도가 심해서 매주 오산, 일산, 남양주, 시흥, 성남을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다. 올해 들어서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이동시간이 만만찮은 곳들이 여전히 많다.


그렇게 시간을 확보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강의 준비는 끝이 없는 거라서, 이동 내내 강의 준비를 하면 책을 볼 순 없게 된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에 이어 두번째 조건, '정신적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나는 이동 중엔 내가 강의 하러 간다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 강의 준비 시간과 책 보는 시간은 철저히 구분하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없기에.


마지막, 사실 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 발터 벤야민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강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 기쁨이 참으로 커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탁월한 비유다. 그 문구를 나에게 가지고 오면 이렇게 된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일까, 책을 보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일까. 문득,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게. 어느새 성큼 다가온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9월 1일
싸우는 인문학

오늘 왔다 갔다 하면서 본 책은 싸우는 인문학. 본 이유는 간단하다. 가볍게 보고 싶었을 뿐이다. 여러 저자에 의해서 쓰어진 책이기 때문에 일관적인 논리의 흐름은 아니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중간 중간 통찰을 주는 내용도 많았고, 인문학이란 분야에서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그런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오전에 초딩 3학년들과 수업을 하면서 마음이 참 따뜻했다면, 오후에 중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는 다소 무거웠다. 물론 아이들은 잘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왜 이렇게 생기가 사라졌을까. 그런 안타까움이 든건 사실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이를 먹을 수록 아이들이 이렇게 바뀌는 것일까? 인문학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연결시켜 본다면, 지금 우리의 사회,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더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무엇이 아이들로부터 그리고 우리들로부터, 삶과 교육을 이렇게 분리시켰을까? 그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문주의자들에게 ‘인문학’이란, ‘신학’이 아닌 그 무언가였다. ... 어찌됐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작가들은 ‘이교도’였고, 이교도의 글을 연구하고 읽고 흠모하고 애호하는 행위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고대 문헌 연구자들, 인문주의자들이 다 이단으로 몰렸거나 고초를 겪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묻혀져 있었던 ‘새로운 옛 사람’을 복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기독교적인 세계 속에서 ‘신학이 아닌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국에서 ‘인문학’은 지금 여기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및 세계관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있는가? 돈을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라는 자본주의적 계시 앞에서, 묵묵히 다른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새로운 옛 사람’을 찾아내는 인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9월 2일
왼손이 하는 일

한 동안 신경 쓰였던 것이 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스트레스 받았다. 우리 집 앞에 놓여진, 차츰 쌓여가는 쓰레기가 바로 그것이다. 깨끗했던 곳이었는데, 개념없는 몇몇이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쓰레기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고 되려 그 세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지어는 먹나 남은 음식들, 피자, 치킨, 심지어는 음식물 쓰레기도 놓여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들어가려는 내 계획은 언제나 쓰레기와 함께 무산되었다. 누군가는 치워야 함에도,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뭐하러 그러겠는가. 나도 한동안은 지켜보기만 했다. 누가 치우겠지하는 안일한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정체 불명의 쓰레기가 쌓여가는 것을 보며 나는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더라. 변화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오로지 내가 만드는 것. 오늘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5시 반이었다. 5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들고 비닐 장갑을 끼고 쓰레기 더미로 향했다. 그 악취나는 쓰레기들을 손으로 주워서 버리는 것은 정말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엄청난 수의 벌레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그렇다. 손에 잡히는 촉감도 물컹한게 너무 이상했다. 한 동안 치웠더니 50리터짜리 봉지가 가득차기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치웠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나는 내 마음을 봤다. 무슨 마음일까?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날 바줬으면 하는 마음을 본 것이다. 생색을 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생색을 내고 싶었고, 또한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양심을 가책을 느껴서 다신 쓰레기가 모이지 않았음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고,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돌아보니 부끄러웠다. 이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로움은 이해타산 없이 행하는 정신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해타산을 한다면 그것은 잇속의 마음으로써, 그는 도둑이나 다름없다. 선행을 하더라도 거기에 공명을 얻으려는 마음이 끼어 있으면 그것 또한 잇속의 마음이다. 군자는 그것을 도둑보다 더한 심보로 여긴다” 사람들이 이러한 내 모습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 때문에 나는 결국 ‘선행’을 했지만, ‘선행’을 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 작은 일에도 이런 ‘인정에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데, 하물며 큰 일이면 어떻게 될까. 내 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렇게 부끄럽게 하나 더 배운다. 

9월 3일
감사 수업

오늘은 칠보초 수업 날이다. 3학년 수업은 무겁게 시작했다. 특히 지난 번 수업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혼을 좀 냈는데, 숙제에 대한 중요성은 꼭 주고 싶었다. 다음 시간까지 감사한 것을 써 오지 못하면 어떻게 피드백 해야 할까. 벌써부터 고민이다. 4학년 수업은 드디어 끝났다. 지난 학기 프레젠테이션 수업이 이제서야 끝난 것이다. 워낙 수업 시간이 짧기도 하고, 아이들의 진도가 생각보다 늦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 발표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꽤 큰 기쁨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4학년들이 서로를 도와가면서 미션을 수행한 느낌이라. 뿌듯함이 오늘은 더 크다. 5-6학년 수업은 감사 수업을 이어갔다. 이지선님의 이야기도 보여주고, 각자의 사례를 통해 ABC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작년 깨알감사를 했던 일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기쁘다. 세상 어떤 것도 쓸모 없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자유자제로 수업할 수 있다는 상황도 너무 감사하고 말이다. 뒷 부분에는 감사 상황극을 준비해서 하기로 했는데, 어찌 나올지 기대 중이다. 21일 동안 감사 일지 쓰는 것도 나도 함께 해야 겠다. 오늘 감사한 것 3가지를 써보자. 1. 무사히 수업 잘 마칠 수 있음에 감사. 2. 옥수수를 1000원에 사먹을 수 있음에 감사 3.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 감사. 모든 것에 감사하다. 

9월 4일
처음 가 보는 광교

아침부터 서둘렀다. 8시에 광교 스타벅스에서 인디언 계모임이 있었다. 아침에 서둘러 갔더니 되려 일찍 도착했다. 뭔가 신도시가 세워지는 느낌이었는데, 아침 일찍 돌아다니면서 책도 보고. 기분이 좋았다.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면 뭔가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또 그걸 가지고 글로 풀어내는 경험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 하나 더 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어디서 많이 본 분이 왔다갔다 하시는거 아닌가. 알고 보니 김성우 코치님이셨다. 작년 여름에 동양미래대학에서 강의 때문에 한번 뵙고 처음 보는 것. 광교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런 저런 근황을 주고 받았다. 스타벅스에서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책을 읽었고, 아까 대화 나누며 나왔던 키워드인 ‘억압’에 대한 글감을 떠올랐고, 아이폰에 이런 저런 글들을 끼적끼적 거렸다.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고 싶어서 써지면 참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진 그런 편인데, 앞으론 또 모르지 뭐. 

9월 5-6일
녹차를 먹은 주말

내가 너무 멍청하다는 것을 깨달은 주말이다. 우선 토요일. 음. 뭐했지? 갑자기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분명 집에 있었는데, 뭐했지. 일단 아침에 한강을 나갔다. 아가를 안고 한강을 걸었고, 비가와서 금방 들어왔다. 그리곤 집에 와서 뭐했더라. 재원이랑 논건 기억나지만, 잘 모르겠다. 육아를 하면서 주부들은 흔히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 기억났다. 오후엔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먹으러 시장에 갔다. 그렇게 산책하고 왔구나. 저녁엔 SCM 학기 프로그램 미팅이 있어서 압구정으로 갔다. 여기서 나의 실수가 나온다. 음료를 시켰고, 난 커피는 먹기 싫어서 녹차 블랜디드 아이스(?)를 먹었는데, 먹으면서도 참 녹차가 진하구나란 생각을 했다. 거의 10시 50분이 되어서 미팅을 마쳤고, 나는 집으로 왔다. 잘 준비를 해서 침대에 누웠는데,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잠이 오질 않는 것이다. 분명 엄청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오지 않았다. 이 느낌을 느낀 경험이 과거에 딱 1번 있다. 그건 바로 진한 커피를 마셨을 때! 이번엔 녹차였던 것이다. 평소 커피를 잘 안 마시던 나라, 카페인에 엄청 민감한 것 같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3시가 되었다. 눈은 엄청 감기는데 뇌는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 화가 났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오지 않아서 결국 일어났다. 감사한 점이 있다면, ‘저녁에 커피나 녹차를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는 점’ 그리고 ‘다음 날이 월요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어난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곤 책을 좀 보다가 어제 끄적거렸던 글을 완성시키고자 했다. 2-3시간 정도에 걸쳐서 손을 봤고, 결국 블로그에 포스팅까지 할 수 있었다. 얻은 것이 있다면 글이고, 잃은 것이 있다면 건강이다. ㅎㅎ 일요일은 그렇게 비몽사몽으로 보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7월 27일
7월 심톡

오늘은 7월 심톡이 있는 날이다. 거의 1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주제는 한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하지만 장소와 포맷은 거의 동일했다. 합정역 근처 ‘허그인’이란 카페에서 주로 만나서 대화를 나눴었는데, 이번에는 장소가 바뀌었다. 이미영 코치님의 마음챙김 명상과 요가를 제대로 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고른 장소는 젠 내츄럴 힐링센터였다. 사람들이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눕거나 혹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는 공간. 아주 훌륭했다. 10분 정도가 오셨다. 공간에 맞는 적절한 인원이 모였고, 우린 함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요가도 했고, 호오포노포노도 배워보고, 요가니드라도 했다. 짧은 3시간이었지만 나름 알차게 진행되었고,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생각을 했다. 3번의 한번 정도는 이런 식으로 심톡을 꾸려가고 싶단 생각. 대화도 좋지만 가끔은 대화가 아닌 몸 동작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도 참 좋구나 라는 생각. 그리고 언제나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구나. 적절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심사, 혹은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내가 할 일은 공간을 열고, 좋은 컨텐츠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초대장을 보내는 일이구나. 그런 것이 참 즐겁단 생각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갔다. 


7월 28일 
월드 카페를 진행하다

이번 7월에 가장 많은 수업을 진행하는 곳은 바로 시흥 <세계를 담은 스쿨>이다. 외국인 대학생들과 한국인 고등학생이라는 재미있는 조합 덕분에, 매 수업 시간마다 즐거운 일이 많이 벌어진다. 전체적인 프로그램 과정 역시 스스로 주제를 뽑고, 결과물을 만들어 나가는 프로젝트 형태이다. 그러다 보니,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려움도 많다. 하지만 좋은 점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번 시간에는 프로젝트별 주제를 결정하고, 서로간의 피드백을 주고 받는 시간을 가졌다. 형식은 <월드 카페> 토론 방식을 취했는데, 각자 프로젝트를 열심히 설명하고, 피드백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오늘 수업을 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앞으로 나만의 단단한 사상적 체계를 가진, 그러면서도 참여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그런 퍼실리테이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 배우되 한번씩 깊이 있는 피드백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꿰하게 만드는 역할, 그런 역할을 담당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신나고 즐겁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수업도 즐거웠다는 :) 


7월 29일
EBS 프리미엄 캠프

오늘은 2015년 하계 EBS 프리미엄 캠프를 진행하러 용평 리조트로 갔다. 2013년 여름부터 진행했으니, 벌써 2년이 다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진행하는 경우는 나로선 처음인데, 나름대로 대규모 캠프임에도 잘 진행되고 있어서 감사하다. 생각해보면, 참 어려운 대상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한번에 몰아서 있을 뿐더러, 인원도 많다. 가장 많았을 때는 70명 가까이 된 적도 있었고, 여름에는 보통 50명 정도 된다. 인원이 다양하고, 많다보니 할 수 있는 활동도 한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난이도가 높은 편인데, 그래도 이렇게 매년 2번씩 반복해서 진행하다 보니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매번 조금씩 변화를 주는 편이다. 이번에도 지난 겨울과 비교했을 때도 조금 다르게 진행했다. 핵심은 <부족 리더십>이다. "나만 최고야"에서, "우리가 최고야”로 도약하는 지점을 설계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에게 즐겁게 전달된 느낌이다. 중간 중간 멘토들도 아이들이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처음본다고 말해줘서, 기뻤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내 수업이구나. 아이고 바쁘다. 


7월 30일 - 8월 2일
여름 휴가 

장장 3박 4일에 걸친 휴가였다. 대구에서 부모님이 수요일에 올라오셨는데, 사실상 나는 목요일부터 함께 놀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부모님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재원이다. 재원이를 너무너무 보고 싶었지만, 평소에 잘 볼 수 없기에 이번 휴가 시즌에 맞춰서 올라오신 것이다. 5개월만에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낯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재원이는 잘 적응했다. 종종 힘들다고 앙앙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수월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 목요일 오전엔 부모님과 홍대로 놀러가서 팥빙수를 먹고 놀았고, 오후엔 용인의 누나집으로 갔다. 누나도 12월 출산이 예정이라 꽤 힘들었을 텐데도, 재원이를 많이 이뻐해 주었다. 저녁엔 영화도 봤다. <쥬라기 월드>를 봤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영화에 난 감동했다. ㅠㅜ  담날은 다 같이 코다리 냉면을 먹고, 이천에 있는 롯데 아울렛에 갔다. 간단한 쇼핑을 끝으로 집으로 오니 벌써 저녁. 다들 녹초가 되었다. 토욜은 오전 오후 편히 쉬면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놀았고 (정광수 돈까스 가게에서 돈까스도 먹었다) 저녁엔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만나서 저녁 먹고 한강에서 놀았다. 이번 휴가에서 느낀 것은 3가지다. 1. 가족이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가족은 세상과 내가 이어지는 가장 강한 연결선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넘어지고 싶을 때도 가족이 주는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2. 휴가가 별게 아니구나.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잠도 푹 자고, 재원이 재롱도 보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것. 그게 최고의 휴가구나. 3. 집안에 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바뀌는구나. 특히 아빠는 재원이를 완전 물고 빨고 했는데, 그렇게나 좋아하실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자라는 재원이가 참 부럽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올해 중으로 조카도 다들 태어날 텐데, 나중에 다 같이 여행다니면 정말 정신 없을듯 ㅋㅋㅋ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재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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