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는 이렇다.
나도 저지를 법한 잘못이라면 실수고,
내가 저지를 일이 아니면 질병인 것이다.

누군가 거부감이 든다면,
어떤 집단에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내가 본모습이라고 믿는 면을
그 사람이 보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피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짓 때문에 내가 괴롭다면,
당신이 아무리 다르게 표현한다 해도
당신의 잘못은 내 잘못이기도 하다.


어떤 책에서 본 글이다. (출처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
내가 언제든 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면, 결코 나에게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절대 저런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럴 수 있어?'라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와 세상은 멀어지고, 나에게서 사랑이나 자비는 사라진다.
나는 저 사람과 '분리'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NOW란 책을 보면 이런 맥락의 글이 나온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NOW:행성의미래를상상하는사람들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에크하르트 톨레 (조화로운삶, 2008년)
상세보기


고타마 싯다르타가 말한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사랑' 역시 결국 한 지점으로 귀결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결국, 사람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타인을 대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자신을 대하게 되어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라.
마음속의 소음을 잊고 침묵 속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당신이 우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사물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에고의 만족은 수명이 짧고,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찾고 계속해서 사고 소비할 것이다.
사물들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 때 그것들에 대한 집착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자비는 당신 자신과 모든 창조물 사이에 있는 깊은 연결의 자각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있는 이곳과 이 순간에 저항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에크하르트 톨레,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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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쉬운길
카테고리 자기계발 > 성공/처세 > 자기혁신/자기관리
지은이 마벨 카츠 (눈과마음, 2008년)
상세보기

오늘 소개할 책은 '호오포노포노' 시리즈 중에서 가장 얇은 책, [평화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
호오포노포노포의 비밀과 호오포노포노의 지혜를 읽은 분이라면 가볍게 읽고 많은 통찰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아주 주옥같은 얘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성경이나 불경, 혹은 코람 등으로 접할 수 밖에 없었던 고대의 지혜들을 이렇게 현대적인 언어와 현대적인 방법으로 접할 수 있고, 그것으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우리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오전, 집 앞 카페에 혼자 나와 따뜻한 차와 함께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호오포노포노, 평화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

2010 7 12일 월요일

오후 10:31


p.22

호오포노포노는 용서와 회개, 변형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온전한 책임을 지고,

-우리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들이 우리가 가진

'프로그램'의 투영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놓아주고 관조하거나,

아니면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반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호오포노포노는 정화와 반응, 즉 행복과 고통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우리 내면의 힘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매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문제이다.


''는 나입니다.

''는 생명을 기르는 호흡입니다.

''는 모든 의식을 넘어선 텅 빔, 비어 있음입니다.

''는 근원이며 모든 것입니다.

''는 물방울을 가로질러 무지개를 그려냅니다.

물질로 이어지는 마음의 연속.

''는 호흡의 들어감과 나감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산들바람,

표현할 수 없는 창조의 근원.

''는 나입니다.


p.35

'가정하기'의 필요성

"당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가정하세요. 당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완벽하다고 가정해보세요. 당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완벽하다고 가정해보세요. 지금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자신이 진실한 존재라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것들이 이해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실제로 그렇다고 여기면, 그 경험의 진실은 당신의 삶 속으로 저절로 끌려오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         이하레아카라 휴 렌


 

무의식은 우리의 감정적인 측면으로 우리 내면의

'아이'이다. 우리의 모든 기억들이 이곳에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무의식을 사랑하고 잘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온전한 책임을 진다면, 우리 내면의 아이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도 자동적으로 정화를 해줄 것이다.

 

p.40

'삼나무'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사과나무와 오렌지 나무, 아름다운 장미들이 함께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사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했지만, 한 그루의 나무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 불쌍한 나무에게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과나무가 말했다.

"네가 필요한 것은 집중이다. 진정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아름다운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야"

 

"그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어. 장미를 피우는 게 더 쉽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를 봐!"

장미 덤불이 주장했다. 절망한 나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두 시도해보았지만 다른 나무들처럼 될 수 없었다. 매 순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깊은 좌절뿐이었다.

하루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알려진 올빼미 한 마리가 정원으로 날아왔다. 올빼미는 나무가 절망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야. 지구 위에 있는 많은 인간들과 같은 문제일 뿐이지. 내가 해결 방법을 알려줄게.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려고 네 인생을 희생하지 마. 너 자신이 되는 거야. 너 자신을 알면 돼. 그러기 위해서는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렇게 말하고 올빼미는 사라졌다.

 

"내면의 목소리? 나 자신이 되라고? 나 자신을 알라고?"

절망한 나무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는 귀를 닫고 가슴을 열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넌 사과는 결코 만들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사과나무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넌 봄에 꽃을 피우지도 못할 거야. 왜냐하면 장미 나무도 아니기 때문이야. 너는 삼나무야. 너의 운명은 크고 당당하게 자라나는 거야. 너는 새들에게 쉴 곳을 주고 여행자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시골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너에게는 임무가 있어! 그 임무를 따르면 돼!'

 

나무는 그렇게 스스로 강한 확신을 얻었고, 곧이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는 곧 공간을 채우고 모든 이들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정원은 그제서야 비로소 완전히 행복해졌다.

 

나는 종종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하곤 한다.

'얼마나 많은 삼나무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춰 버리는가. 얼마나 많은 장미 덤불들이 가시만 돋아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가' 우리의 삶 속에는 성취해야 할 운명과 채워야 할 공간이 있다. 어떤 일이나 사람도 그것을 알고 나누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자.

 

p.49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 당신도 함께 한다.

만일 문제가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들은 마치 테이프에 녹음된 정보와 같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도 못하지만, 무의식은 항상 테이프를 돌리고 있다.

 

온전한 책임 = 그것이 우리의 기록이고 프로그램임을 아는 것

 

불경에서..

"싫음과 좋음에 영향을 받는 자는 상황의 의미를 알 수 없고 그것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초연한 자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그 사람에게는 모든 일들이 새롭고 의미가 있다. 행복 뒤에는 슬픔이 있고, 슬픔 뒤에는 행복이 따른다. 하지만 행복과 슬픔을 차별하지 않을 때, 좋고 나쁨을 차별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p.68

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한다. 우리가 그것을 허용한다면,

즉 마음을 다해 신뢰한다면 모든 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문제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또 우리가 이미 받는 것에 대한 감사함은 우리의 진동을 변화시킨다. 감사해야 할 이유는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경이로운 삶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미지의 세계로 과감히 들어가 불확실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멈추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믿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불굴의 존재가 된다. 우리는 삶을 살며, 또 누리고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행복을 불러온다.

 

p.83

우리가 결과에 집착하고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멈출 때, 평가와 판단을 그만둘 때,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상황을 삶의 과정에 내맡기고 수용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삶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길로 다가온다. 신은 지구 위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주위를 둘러보면 신이 창조한 것은 모두 무한하고 풍요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만이 부족하고 제한되어 있다.


p.97

우리는 두려움과 고통에 중독되어 있다. 우리가 두려움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친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려움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고 그것이 주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집을 팔고 싶으면 백 개의 가위표가 생길 때까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사람들에게 집을 팔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보게" - 거절을 감수하지 않으면 승낙 역시 얻을 수 없다.

 

p.110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대로 우리를 대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데, 사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녀들은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변화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사랑은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마침내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하고 선택함으로써' 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된다.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서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며, 그래서 인생은 예전에 이미 여러 번 보았던, 계속해서 돌아가는 영화와 같다. 즉 문제의 반응은 기억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부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온전한 책임을 지기로 한다면 그때 우린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용서는 쉽고 빠른 길의 일부이다.

"신이시여 미안합니다. 이런 상황과 문제를 창조한 나의 내면의 모든 것들을 용서해주세요"

 

이것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차이점은 내가 중심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을 깨달을 때까지 분노는 단지 몇 분 정도만 지속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프로그램, 기록의 결과입니다. 나는 그것을 지울 수 있습니다"

 

'정화'의 결과를 보기 위해서는 호흡하듯 매 순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화는 항상 행해져야 한다. 물론 우린 많은 순간 잊어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자주 연습하는 것이다. 문제가 일어날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왜 그럴까? 마음은 항상 테이프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정화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삶 속에서 변화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더 많이 지우면 지울수록,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정화의 도구

"라이트 스위치"

"아이스 블루"

"플라이 페이퍼"


  1. 짱이 2010.07.18 23:36

    사랑합니다.미안합니다.용서해주세요..감사합니다..
    호오 포노포노포노~~^^*

공부의달인호모쿵푸스인문학인생역전프로젝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7년)
상세보기

이 책의 주제는 맨 앞에 나와있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많은 이들이 지금의 시대를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내내 '공부의 달인, 즉 호모 쿵푸스' 만이 이 인문학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호모 쿵푸스'란 무엇인가?
공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의 달인'을 말한다.
마치 쿵푸를 하듯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꿔 나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것이 그의 존재론이며,
"공부해서 남 주자", 이것이 그의 실천론이다.

자, 이쯤이면 호모 쿵푸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나에게 울림이 되었던 말을 (편집을 조금 가해서) 옮겨 놓았다. 함께 공부의 달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



- 학교'코뮌'의 차이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에서만 작동한다. 고로 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그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선생을 만나 어떤 학문을 터득하겠다는 발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학교의 위상, 그 학과의 사회 진출 비율, 그게 선택의 유일한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학벌이 높아질수록 공부와 삶 사이의 소외와 간극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발심이 공부의 출발이자 원동력이었던 셈.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주는 자이다. 그리고 도반이란 그 길을 함께 가는 벗들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었다. 초학자뿐 아니라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면 스승과 친구, 제자 사시의 경계를 서로 넘나들게 된다. 그리하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제자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지기가 되는 '코뮌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과 도반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연령대별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을 하는' 학교제도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오랬동안 학교를 다녀도 평생을 좌우할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대학원생들에게 공부는 참고 견뎌야 하는 지겨운 노동이고, 학과는 스트레스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사제관계도, 우정의 연대도 없는 곳, 거기에서 즐거운 지식의 생성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 공부는 네트워킹!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유포하는 교수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교수들이 대학 안에서 능동적인 학습망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먼저,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시작하면 된다. 소규모일지라도 사제 간에 '즐거운 공부'의 장을 만들어가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합적 관계망을 만들면 그게 곧 '앎의 코뮌'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적 열정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한 일상적 노력도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식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 글쓰기운명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문체는 말투와 동선, 삶의 패턴과 나란히 간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실제로 고전의 시대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그런데 몸이든, 문체든 혼자 힘으론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변이시켜줄 연기조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밑천이 없을 때,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등등. 또 상호 신뢰가 두텁다 해도 가혹한 비판을 견뎌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체력과 끈기, 오기와 집요함이었다. 길 위에 있는 한, 나는 수 많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은 또 나를 아주 낯설고 경이로운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글쓰기가 신체를 단련시켜주고, 나아가 운명까지 바꿔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돈!돈!을 외치며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삶의 낙이라곤 연애밖에 없는 듯하다.

중략..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치명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예컨데 '주역'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상생상극이 필요하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죽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쳐주듯이 아이에게도 적당한 극을 줘야'한다. '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명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 감염촉발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구조적 양태가 싫다면, 먼저 교수들이 열정적으로 배우면 된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 Sitemap 2011.08.17 14:00

    수고하세요~^^


칼럼 1.
-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나를 먼저 좋아하는 것!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인가? 감성적인 동물인가?
이런 얘기들이 하도 많이 나와서 답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답은 감성적인 동물이다.
이런 질문이 있더라.
'첫 수학 시간을 떠올려 보라' vs '첫 키스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것이 기억에 나는가?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답은 후자일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철저하게' 감성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간다면, 인간의 기억은 감정이라는 접착제가 있어야 나에게 온전히 붙어있을 수 있고,
그 감정이라는 접착제는 내가 다시 그 감정을 어루만져주기 전에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감성적, 감정적이라는 증거는 또 하나 있다.
나도 많은 강의를 다니고, 실제로 교육을 많이 받고, 모니터링도 하지만..
강사가 앞에서 교육생 혹은 관중들에게 해야 할 것은 딱 한가지다. 
그것은 바로..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그 사람(강사)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강의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 할 수도 있겠다. '아니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의 내용이라는 게 있는데!'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강의 내용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강사 본인을 좋아하게 만들지 못하고선 좋은 강의는 절대로! 단언컨데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맞는 말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말에 반응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꿈적도 안하는 사람들이..(잔소리=맞는 말=이성)
별 말 안하는 아버지가 가끔 심부름 시키면 잘 한다. 왜? 아버지는 가끔 용돈을 주기 때문이다. (용돈=호감=감성)

이처럼 인간이 가진 특성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재미있는 사람, 좀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게 아닐까 한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

그런데~ 이것이 꼭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만 해당 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 말처럼 우리 안에는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거는 목소리.. 가끔은 나를 좌지우지 하기도 하는 그 목소리를 내는 '아이'가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나의 진짜 행동과 습관이 바뀐다. 하지만 만약 이 아이가 나를 싫어하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내 안의 내면의 목소리는 자꾸 움츠리고 두려워 할 것이고 나는 자유롭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내면 아이'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을 해보자.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나를 좋아해' '나는 나이기에 감사해' 자꾸 자꾸 해주는 것이다.
내(내면의 아이)가 나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아해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먼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먼저 나 자신의 내면에게 감성으로 접근하고 나서 충분히 사랑을 준 이후에..
그 다음에 내가 생각하는 '옳은 길'로 나를 이끌어야 내면의 나(아이)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절대로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맞는' 방법으로 나를 먼저 이끌고 갈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맞는, 올바른 방법'은 엄마의 잔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또 자책하고 자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선 아빠의 용돈처럼,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다.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자주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봤다고 해서 또 자기 사랑을 하면 뭔가 잘 풀리겠지 라는 숨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받고자, 원하고자 해서 하는 자기사랑이 아닌 진실된 자기사랑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Take and Give가 아닌, Give and Take !! ^^ 내가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받게 되는 것이다.(안 받으면 할 수 없고)

그러고 나서 기분 좋은 나를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좀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때 (기분이 좋을 때) 엄마의 잔소리가 효력을 발휘한다.
나를 그렇게 수용하고 또한 성장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진짜 힘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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