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에버 노트엔 묵은지처럼 오래된 글이 꽤 있다. 

분명 책을 읽을 땐 신나게 옮겨 적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활용되지 못한 글들. 이들은 분명히 나에게 들어와 감화를 일으켰음 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기엔 실패했다. 그리고 내 게으름을 분명하게 직시하게 해 주는 내 소중한 거울이다. 오랜만에 그 중 하나를 들춰보았다. 

오늘 다룰 책은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란 긴 제목의 책이다. 무려 1년 반 전에 읽은 책이고, 저자는 권용선 작가다. 아주 유명한 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도 당시에 읽었을 때의 흥분과 감동이 남아있다. 적어도 나에겐 의미있는 책이 분명한데, 무엇보다 벤야민이란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이 가장 감사하다. 이 책을 대략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발터 벤야민’은 이동하는 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벤야민이 위대한 것은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이 아니다. 그의 존재 방식,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마드’로서 존재했던 균형 감각, 거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떄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 닮고 싶은 것도 거기에 있다. 나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싶다. 방향성은 있지만, 예상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으면 한다. 그것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인, ‘노마드’라고 부른다. 

"그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그가 그 무엇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들에 대한 빛나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되지 않았던 그의 선택, 혹은 탁월한 위치 감각에 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장소 혹은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지식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고 시선의 위치를 바꾸며 글쓰기의 패턴을 교정하면서 매번 다른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류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P. 20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고 그곳에 안주하는 정착민의 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성격은 오히려 척박한 불모의 땅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유목민의 것에 가깝다. 유목민은 벤야민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괴적 성격’을 지닌 자이다." P. 26


2. 벤야민의 비평이란, ‘그들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의 비평은 일반적인 개념과 다르다. 그는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보는 것’을 비평이라 여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라고 하는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서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의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는 ‘노마드’의 것. 그 독특한 정체성이 비평의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그의 어떤 경험이 그러한 철학을 낳게 했을까. 더욱 궁금해진다. 

"벤야민이 되고자 했던 ‘비평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격의 비평가들처럼 작품을 해설하고 평가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벤야민은 비평적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 혹은 연구자들을 통해 무엇인가 그들 안에 있는 고유한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개념의 형태로, 또 때로는 방법적 틀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새로운 글쓰기를 발명했고, 자기 당대에는 없는 새로운 직업을 창안하고자 했던 것이다. ... 그는 대중적인 동의나 학문적 권위를 획득하는 일에 일관되게 무심했고, 비평가라는 제도적 칭호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오히려 ‘비평’이라는 개념을 그 자신이 철처히 실천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드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36-39


3. 중요한 것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 
과거에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기’ 벤야민은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해낸다. "문학적 몽타주. 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 줄 뿐. 가치 있는 것만 발취하거나 재기발랄한 표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같은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누더기와 쓰레기를 목록별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으로 그것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해줄 생각이다. 즉 그것들을 재인용하는 것이다.” 파편들을 새롭게 연결함으로써, 매번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마셜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란 사실을 벤야민은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 

"벤야민은 개념적인 언어로 사물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이미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념적 층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것을 위해 ‘인용부호 없는 인용술’이 동원된다. 벤야민은 그것을 ‘문학적 몽타주’라고 불렀다. 

벤야민의 문학적 몽타주는 언어로 만들어진 문장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공간에 재배열 되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때 각각의 파편들은 자기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장소에서 이웃한 것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각각의 파편들이 하나의 별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그들 사이에 관계의 선분이 그어질 때마다 매번 하나의 별자리가 만들어지도록 문장들을 배열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이 시도했던 문학적 몽타주 혹은 문학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조성법이다.” P.83

4.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변화’는 언제 시작될까?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불만’을 가지지 않는 자는 변화할 수도 없다.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재앙이다. 고민할 것도, 더 나아질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안전한 삶. 그것이야 말로 가장 불안한 삶이 아닐까. 벤야민은 이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라 부른다.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니체의 언어로 표현하면 ‘말세인의 삶!’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떤 것인가. 불편과 부당, 폭력이 만연하는 세계? 혹은 차별과 빈곤과 착취로 얼룩진 세계? 물론 이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는 세련된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에서 배짱 좋게 잠자는 일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권태와 무위’ 속에서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조장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사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조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는 상태를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 그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출구는 그때 만들어진다.” P.167
 

5. 노동자는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는가?  
자본주의은 노동자와 결과물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모두 ‘생산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자는 결코 ‘집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은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다. 그들은 멈춰있는 자들이며, 고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벤야민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기화하는 ‘허의의식’을 갖는 것,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 자기 노동이 노동자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실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자기소외는 필연적이다. 부르주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허의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노동을 자본의 도구로 만들고, 노동의 결과물인 상품으로부터 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착취를 전면화한다. ... 부르주아 계급의 심리적 토대는 그의 전 시간을 자본가로서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감독하고 생산물을 판매하는 데 바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이 고도화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곧, 부르주아의 계급적 정체성은 그가 지닌 재화(화폐)를 소비할 때가 아니라, 자본가로서 잉여적인 것을 생산하고 축적할 때 만들어진다는 점을 그는 맑스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벤야민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생산하는 자로서 ‘노동자’가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게 되는지이며,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오랜만에 보는 글이라 두서가 없다. 당시에 인상깊은 글을 남겼기에, 다시 쓰려니 말문이 막힌다. 역시, 바로 바로 쓰는 것이 최고다. 그 순간 느낀 생생한 깨달음은 쉬이 날아가는 법이다. 어쨌든 앞서 나의 글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지향하는 바를 3가지 정도만 정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 : 멈춰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것
-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도, 지금 상태에 머무는 것도 모두 여기에 해당이 된다. 이를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가 누구인지,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집요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움직이려면 지금의 내가 멈춰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에. 변화는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일어나기에. 
 
두 번째 : 말하기 보단, 보여주는 것. 
-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개념어는 사어다’라고.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도 예전엔 그것을 몰았지만, 지금은 절감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관찰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다시 태어나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차근차근 노력하는 수 밖에. 

세 번째 : 소비하기 보단, 생산하는 것. 
- 근대는 사회가 ‘생산자’를 '소비자’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대부분은 그것에 쉽게 길들여졌지만, 몇몇 지식인들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건해졌다. 이제 사람은 너무나 쉽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일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직장인들은 주말이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주중엔 온라인 쇼핑을 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을 만들었다. 벤야민은 이를 두려워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이것이 두렵다. ‘내 이름을 거는 것'은 그래서 무섭지만, 중요하다. 살이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불만족한 상태를,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자기만의 균형 감각을,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벤야민은 싸웠다. 나도 그렇게 싸우고 싶다.





내가 읽은 10개의 장면 & 내가 만든 10개의 질문 

1.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concept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 개념, 임신, 그것은 세계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이며, 창조에는 잉태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품고 있는가? 


2. 
저에게는 니체의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또는 보답 없는 것을, 무명을, 음지를 말이지요. 

: 나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누구의 말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가? 


3.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 저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 때문에 입에 붙어 거의 원문 그대로 술술 나옵니다.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 한창 이런 때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읽은 것은. ...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몇 번을 읽어도 그런 것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혁명을 낳는가?   


5.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성서의 일부분을 일부러 여백이 많은 종이에 베껴 쓰게 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메모를 해가며 되풀이해서 읽기까지 했습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습니다. ...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6.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루터는 가톨릭교외에서 파견된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 논쟁을 벌입니다. ... 루터는 “얀 후스가 옳다” “교회도 잘못을 저지른다.”라는 치명적인 말을 해버립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면 말이지요. 그리하여 루터는 대이단임을 선고받습니다. ...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대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살아가는가? 양심인가? 권력인가? 또 다른 무엇인가? 


7.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권 중 한권입니다. 즉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그들은 승부에 져서 훗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걸까요? ...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0.1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 고전이란 무엇인가? 고전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8. 
아주 옛날부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도사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는 공부하여 출세하려는, 귀족계급보다는 하층계급 사람들이 말이지요.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군자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만의 아름다운 상식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귀족이면 무학이고 난폭해도 된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고귀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의 고귀함은 핏줄만이 보증합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가 되어도 로베르토 미셀스라는 독일 귀족이 “학문이야말로 혁명의 선구이자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바로 말 그대로 입니다. 이 말에 여실히 드러난 대로, 책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늘 혁명의 힘이 거처하는 곳이었습니다. 

: 혁명을 꿈꾸는 자는 누구이며, 거부하는 자는 누구인가? 혁명의 힘은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가?


9.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 표현은 왜 하는가? 표현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무엇을 읽어야 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10.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 니체가 말한 ‘번혁을 초래한 인간’은 누구인가? 당신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의 한 줄 요약
읽어라. 미쳐라. 그리고 혁명하라.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