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달 리뷰를 남깁니다. 

제가 주기적으로 글을 공유하다보니, 그리고 이런저런 독서모임도 참석하다 보니, 종종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책은 주로 언제 읽나요?”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르나요?” “책은 왜 읽나요?” 등등. 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워낙 좋아하기에 신나게 대답하지만, 지금까지 제 의견을 명확하게 정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책 읽기로 글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독서’를 주제로 선정하자, 제 깊은 곳에 이상한 욕심이 고개를 쳐듭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굳이 ‘잘 써야겠다’는 부담감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는데요. 그래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쓸 수 있었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의 욕심이 저를 자극합니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저를 압박하지 않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한번 써 보겠습니다. 글을 쓰며 독서와 관련한 다양한 책을 인용하게 되었고 딱히 대표할 만한 책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담고 있기에, 기준이 되는 책을 선정했습니다. 바로,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 입니다.

PS : 참고로, 글을 쓰다보니 다소 길어지고 말았네요. 그래서 1부와 2부로 나뉘고자 합니다. 1부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입니다.







1. 당신은 왜 책을 읽나요?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왜 책을 읽나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나요?” 그러면 전 대답합니다. “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읽기 시작했고, 그 계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멋진 순간은 아닙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불안해서 읽었습니다. ‘독서’라는 고상한 말보단 ‘발버둥치기’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렇게 습관이 되었고, 지금은 솔직히 별 이유 없습니다. 그냥 읽습니다. 제가 처음에 책을 읽게 된 계기, 그곳으로 거슬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감 못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남자는 군대에서 살짝 철이 듭니다. 철이 드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지 ‘혼자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동안 뭘 할까요? 처음에는 잡 생각이나 잡담을 합니다. 이런 저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거없는 자신감까지. 그러다 더 시간이 지나면 적막함이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소란스런 생각들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대학생’ ‘아들’ ‘친구'이란 껍질을 벗어버린 저를 말이죠. 그게 2003년이었습니다.

변화는 ‘객관적 자기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고자 아둥바둥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저를 봤습니다. 덜컥 걱정이 들더군요. “전공 공부는 정말 싫은데” “졸업하고 달리 할 것도 없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전 뭐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발버둥’이란 말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네요. 고상한 이유 따윈 없었습니다. 뭐라고 하고자 그렇게 저는 제 주위에 놓인 책들을 주워들었습니다. 월간지 '좋은 생각'부터 자기계발서, 판타지 소설, 종교 서적, 등등. 맥락도 흐름도 없는 파편적인 독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 간 300여권을 읽었습니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물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인간성을 갈고 닦을 수 있겠지만 혼자 조용히 자신과 마주 서는 시간이 자아 형성에는 필요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멍하니 있는 시간도 즐거운 법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긴장을 필요로 한다. 이 적절한 긴장이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독서는 혼자 하는 듯싶지만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쓴 사람과 함께하는 둘만의 시간이다. ... 뛰어난 인물이 공들여 조탁한 문장을 혼자 음미하는 시간. 이런 시간에 얻게 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p.75

그 결과, 제가 얻은 결과물은 초라합니다. 겨우 ‘읽기’에 대한 부담감을 털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순간이 자발적 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적고, 휴가 나와서 볼 때의 기쁨. 그렇게 ‘책에 목 말라 본 느낌’은 아직도 생생 합니다. 책 읽기, 구절 옮겨적기, 생각 끄적거리기. 그렇게 보냈던 2년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소박하면서,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그렇게 '책'에 흠뻑 빠져 본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비교적 늦게 알았지만, 더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은 더더욱 행운이겠죠. 그것은 값진 경험입니다. 그 순간 만큼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것이 자발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첫 번째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는 장거리 달리기'라고 말합니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한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독서는 정직합니다. 그저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장거리 여정에서 '즐거움'은 독서가의 가장 큰 우군입니다.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책을 읽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어떤 어떤 실험에서 아이큐는 높지만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혔더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때 그 사람은 “난 아이큐가 꽤 높은 편인데 이해할 수 없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은 독서를 잘 모르기에 나온 발언이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장거리달리기나 행군과 비슷하다. 특별히 발이 빠를 필요가 없다. 날마다 달리고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가면 대부분 장거리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된다. ... 독서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꾸준히 하는 것’이 힘이 된다.” P.45


2. 경험하면 되지, 굳이 책을 읽어야 하나요?

여기까지 쓰자, 예상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래 좋겠다. 당신이 그럴 수 있었던 건 군대이니 가능한 일이지, 요즘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게 가능 하겠어?" '즐거움'이란 달달한 용어 정도론 설득이 안 된다는 것,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묻습니다. “살아가기도 바쁜 일상에, 굳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요?” 그럼에도 저는 “네”라고 대답합니다. 적어도 독서는 많은 이에게 ‘자아 발견의 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책을 읽던 당시에 저는 우연히 심리와 종교, 인문학과 교육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끌리는 저를 볼 수 있었고, 이후로 몇 년간 제 전공인 ‘공학’을 뒤로 하고 관련 책을 읽는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넓혀 갔던 것이죠. 다방면의 독서가 주는 유익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디에 끌리는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지도 분명해 집니다. 그렇게 나의 강점과 약점, 흥미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굳건히 하지 않으면 쉬이 휩쓸려 버리고 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나를 알아가는 방법으로, 독서를 신뢰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책을 가지고 어떻게 나를 발견한다는 말이야? 니가 ‘경험’을 안 해봐서 그렇지,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최고야.” "... ..." 잠시 말문이 막히지만, 다시 반론해 보겠습니다. '경험과 이론' 이는 지난 번에 언급한 ‘본성과 양육’처럼 아주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서양 철학사를 돌아봐도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로 기나긴 평행선을 달리죠. 경험주의자는 이론가들을 ‘해본 것이 없다고’ 쉽게 얕잡아 봅니다. 그리고 이론가는 경험주의자를 ‘그게 다인줄 안다’며 무식 하다고 비하하죠. 저는 이 논쟁을 아래 책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에 나오는 글입니다.




"몸은 인간에게 가까운 것이어서 겪어서 알게 된 것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중의 하나는 바로 ‘겪어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주제에 관한 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즉 “낙동강 전선에서 압록강 전선까지 모든 전쟁을 겪었느냐’는 반론 말이다. 오히려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고 전체를 이론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태의 실상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몸으로 겪어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 이론 둘 다가 겸비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지식이라 하기 어렵다. ...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 라고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실망 하시겠지만 결국, 답은 ‘둘 다’입니다. 겪어서 아는 것과, 책을 읽어 아는 것. 모두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되려 경험주의자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책을 읽는 이들은 총을 매고 전쟁터로 나아가야 하겠죠. 제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책을 읽을 수록 '호기심'이 많아지고, '경험'에 목 마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삶에 뛰어드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책을 통해 관심사를 넓히고, 행동으로 검증하고, 다시 책을 통해 성찰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선 순환. 그 반복을 통해 ‘나'를 더 알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책을 읽는 두 번째 이유, 바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책은 그런 존재입니다.

"‘독서는 할 필요가 없다.’는 근거로서 책을 읽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이 있으면 체험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체험을 하는 일과 책을 읽는 일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불타오릴 수 있다. 예를 들면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을 읽고 아시아 여행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 책에 이끌려 여행에 나서는 경우는 흔하다. ... 독서가 계기가 되어 체험하는 세계가 확대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체험한 일의 의미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는 공감대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p.97


3. 만약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렇게까지 설명 했음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 읽는 것은 좋아. 인정해. 하지만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별다른 일이 생기는건 아니잖아?" 예전에 저는 이 답을 어렵게 답했지만, 이젠 비교적 쉽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운이 좋게 대통령이 되어도 '탄핵'이란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곧 ‘사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실질적 문맹률(문해력으로 보면 75%에 달합니다. OECD 중 최하위입니다.)은 엄청나게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알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드라마나 예능은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손 안의 스마트 폰은 우리가 전지전능해 졌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든 '검색'하면 다 알 수 있지만, 깊은 '사색'은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를 그나마 볼 수 있었으나, 이젠 거의 드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전 그것이 솔직히 두렵습니다. 홍세화 작가의 책 <생각의 좌표>에 나오는 글을 옮겨 적습니다. 




"네 경로(독서, 토론, 직접견문, 성찰)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작가가 말했듯, 책을 읽지 않아도 현대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듣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책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말은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나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하지만 읽고 글쓰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추상’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머, 톱, 손도끼 등을 보여주며 공통점을 말하라고 하니, 그들은 ‘연장’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대신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톱은 나무를 썰고, 손도끼는 통나무를 가르죠.”

구술문화권 사람들은 자신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도 곤란을 느낍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인격을 기술하는 대신 신상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우츠구르간 출신이죠. 무척 가난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자식도 있어요.” 이러한 ‘인식 능력’의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유’는 문자 문화의 영역이며, 훈련에 의해 단련됩니다. 저는 이 차이가 지금의 우리나라, 그리고 광화문에서 볼 수 있는 세대간 갈등을 설명하는 하나의 근거라고 봅니다. 절대적인 가치 하나만을 쫓은 사고 방식, 그 맹목성을 닮아가지 않으려면 스스로 ‘언어의 한계’를 넓히고 '사고의 주체성'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어야, 결국 ‘주체적인 자아’를 기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세 번째 이유, 단순합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함입니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한 가지 사실을 절대시하게 된다. ... 눈앞의 한 가지 신비에 마음이 빼앗겨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지성이나 교양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대학 시절에 신비주의 단체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그런 단체의 교리를 철저히 믿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절대적인 가치관을 하나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것은 부정하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다. ... 어떤 철학적인 문제에는 강한 면을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음미하는 관용적인 태도를 볼 수 없었고 한 가지 삶의 방식만을 모범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모순되고 복잡한 사실들을 마음속에 공존시키는 것. 독서로 기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의 공존이다. 자아가 한 덩이의 단단한 바위라면 부서지기 쉽다. 복잡성을 공존시키면서 서서히 나선 모양으로 상승해가야 한다. 그래야 강인한 자아를 기를 수 있다.” p.69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책을 왜 읽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에 자문하면서 답해 보았습니다. 설득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저 제 생각을 좀 더 다듬어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지?” 책 읽는 방법으로 다시 써 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분들을 위한 3줄 정리

1.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단, 자발적으로 읽는 경우에.
2. 책을 통한 지식과 경험을 통한 앎은 모두 중요하며, 책은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3.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매월 책을 보고, 간단한 리뷰를 공유하는 것. 이것은 내가 세운 목표였다. 
내가 어떤 책을 보는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연결되기에도 좋은 통로라서 생각해서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벌써 6개월이 넘게 밀리고 있는 일이다. 
나는 한번 미뤄지면 끝도 없다. 일들이야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고, 블로그 안 올린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기에. 게다가 요즘 다양한 성찰 글들이나 독서 리뷰를 올리고 있는 것도 이미 만족이 되기에. 

처음엔 그냥 없었던 일로 할까.. 지금 올리던 컨텐츠나 꾸준히 올릴까.. 하다가,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 뭐 대단한 거라고 미루긴 미뤄. 대충 써서 올리면 되지 까짓꺼. 사람들에겐 좀 늦었다고 하면 되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이 블로그 누가 본다고. 그냥 내 맘대로 하자. 그래서 쓴다. 
작년 10월에서 12월까지 읽은 책 리뷰다. 지난 9월까지 읽은 책이 78권이었더라. 79에서 쭉 이어진다. 


2014년 10월 
79. 질문의 힘_사이토 다카시 : 질문을 몇 가지 기준으로 나눈 점이 꽤 인상적이었던 책이지만, 그리 좋은 책이란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전형적으로 일본 사람이 쓴 책. 그 느낌 그대로. 

80. 스토리_티모시 윌슨 : 좋은 책이었다. 사람의 네러티브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쓴 책이다. 각자의 세계관이 어떻게 인생을 좌우하는지, 그리고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나에게 생각을 정리할 계기를 마련해 준 책이다. 

81.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_고미숙 : 고미숙 작가의 책은 언제나 읽기 편하다. 그리고 내가 공감하는 주제를 어쩜 그렇게 콕콕 잘 뽑아내는지. 수유+너머와 같은 학습 공동체를 꿈꾸는 나로선 이런 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된다. 

82. 공감하는 능력_로먼 크르즈나릭 
2014년 10월 최고의 책. 작년 한해 공감에 대해서 공부해보자고 마음 먹고 본 책이 4-5권 정도 되는데, 공감의 시대와 더불어 최고의 책이었다. 공감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실험과 근거로 제시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83. 원피스식 세계 최강의 팀을 만드는 힘_야스다 유키 : 10월 중순이었나, 우연한 계기로 한일청년포럼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주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원피스를 다시 꺼내들었다. 강의 주제로 원피스를 고른 이유는, 일본인들도 있을 거란 기대를 하기도 했고, 메시지를 잘 정리하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 하지만 결과적으로 강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의란 형식이 내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나는 사람들의 피드백이 없이 혼자 주절주절 하는 것을 참 어려워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던 강의였다. 좋은 기회였지만,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84. 예술가들에게 슬쩍한 크리에이티브 킷 59_케리스미스 : 중고책방에서 혹 해서 산 책이었다. 엄청 유용하게 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ㅠ 


2014년 11월 
85. 체인지메이커 혁명_베벌리 슈왈츠 : 아쇼카 재단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례들을 모은 책. 우리 집에 이런 책들이 몇 권 있다. 수업 준비 겸, 나도 볼 겸 사는 책들인데, 공통점도 있다. 좋은 책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끝까지 잘 안 보게 되는 책들이라는 것. 내 성향은 남의 사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런 배움도 얻는다. 

86. 인문학 명강_플라톤 아카데미 : 2014년 11월 부터 내가 다루는 주제가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공감과 스토리에서 ‘인문학’으로. 공감은 내가 잘 하고 싶은 분야이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더라. 공감의 중요성은 뼈져리게 알지만, 공감은 결국 공감받는 경험으로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로선 육아과 교육을 통해서 공감을 배우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공부로 넘어갔다. 원래 관심은 무지 많았지만 시작이 늦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의 일부로 가볍게 본 책이었다. 

87. 위베르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 : 내가 당시에 수업하던 <하나인학교>에 있던 책이라 슬쩍 슬쩍 봤던 책. 옛날에 우주 참 좋아했는데 ㅠ

88. 몸으로 하는 공부_강유원 
2014년 11월 최고의 책. 철학자 강유원이 쓴 산문집이다. 이 책의 중간 중간 통찰도 좋지만, 백미는 바로 마지막에 위치한 <공부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부하는 방법을 공유했고, 나 역시 꽤 많은 분들을 알지만, 이렇게 이치에 맞게 그리고 재미있게 쓴 글은 드물다. 나는 정말 종종 생각나면 그 부분만 읽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몸으로 하는 공부’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았구나. 난 정말 몸이 아니라 머리로 공부하나 보다. 읽고 쓰고, 행동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시간을 쓰는지. 혀가 찬다. 쯧쯧. 




89.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제목이 흥미로워서 잠깐 빌려본 책. 결국 진화론 적 관점에서 용기있는 척하던 생명체들은 다 죽었다. 오히려 겁이 많은 동물이나 식물들이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가 단지 몸이라면 이 작가의 주장에 맞다. 하지만 나는 어떤 ‘존재’가 꼭 몸으로만 해석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린 인간이기에.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는 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진화론 적으론 실패이고, 수 많은 친일파들은 오래 오래 부유하게 (현재까지도) 살아가고 있으니 성공적 진화인가? 그런 의미에선 비판 받을 면이 너무나 많은 책이다. 존재의 정의에 따라서 해석이 다 다를 수 있기에. 나는 반대다.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세상을 거부할꺼다. 메롱이다. 


2014년 12월 
90. 책은 도끼다._박웅현 : 광고하는 인문학자. 혹은 인문하는 광고쟁이(?) 라 불릴 수 있는 박웅현 CD의 책이다. 꽤 글을 잘 쓰시는 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본인 본 책을 나름의 개념과 느낌으로 잘 정리해두고 계시는구나. 참 똑똑하신 분이다. 그런 감탄을 많이 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도 함께 공유되었고. 인문학을 쉽게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책이다. 

91. 학교 없는 사회_이반 일리히 : 
2014년 12월 최고의 책. 이 책은 단순하다. 가치의 제도화가 인간의 자율성과 자생력을 되려 방해한다는 것. 병원 때문에 인간은 공동체에서 스스로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고, 교회 때문에 인간은 신과 직접 연결되는 방법을 잃어버렸고, 학교 때문에 인간은 삶에 꼭 필요한 공부를 하는 법,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제도에 의지하고, 그렇게 길러지는 나약한 인간만이 남았다는 것. 이것이 이반 일리히가 던지는 담론이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질문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지성인들이 해야 할 역할이다. 꼭 던져야 할 질문을 두려움 없이 세상에 던지는 것. 이건 내가 글을 써서 올린바가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셔요. 링크 - [책] 학교 없는 사회_이반일리히






92. 황홀한 출산 : 당시 아내가 만삭을 앞두고 있었다. 출산 준비를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중반 이후엔 다소 떨어지지만.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우린 스스로 생명을 낳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남에게 넘겨버리는 순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이 고통을 자극한다. 출산은 철저히 개인적이어야 하고, 자율적이어야 하고, 축제여야 한다는 것. 앞서 말한 학교 없는 사회의 맥락과도 연결된다. 되려 산부인과가 생겨남으로써 출산의 과정은 고통과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 우리에겐 이미 힘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 아내와 함께 자연출산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이다. 

93. 초인수업 : 니체가 말한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나는 듣는다.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리뷰를 썼던 책이라 주소를 옮긴다. 사실 돌아보니, 쓰고 나서 꽤 마음에 들었던 글이었다. 링크- [철학] 초인수업_박찬국


2014년 4분기 리뷰

지난 3개월의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10월에 ‘공감’에 대한 공부의 방점을 찍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결과물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 내 생각을 담은 글 하나가 없다는 것. 농사로 비유하자면 씨앗을 그렇게 뿌리고 물도 줬는데 열매를 맺기 전 다른 농사로 떠나버린 느낌. 그 당시만 해도 글을 쓰는 것에 두려움이 컸었다. 올해 들어서 공감에 대한 글을 좀 쓰려고 하는데 다시 들춰보려니 정리 안 한 나의 과거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11월부터 시작한 공부는 ‘인문학’이다. 나에게 인문학 공부는 결국 ‘인간 본연의 힘을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반 일리히가 말했듯, 학교가 공부는 동의어가 아니기에. 소중한 가치는 누군가에게 맡겨져선 안 된다. 내가 직접 챙겨야 한다. 그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그 힘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나는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갖도록 말이다. 그러한 존재에 대한 사랑 위에 ‘공감’도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니까. 

나는 그렇게 2014년을 마무리했더라. 예상했던 권수는 100권이었지만 결국 93권을 읽었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년 동안 단 1권을 읽어도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지난 1년간 아쉬운 것은 분명하다. 글쓰기기와 실천에의 결과물. 책은 꽤 읽었지만 성찰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에 걸맞는 실천도 그렇고. 올해는 그것을 반복하기 싫어서 궁시렁 궁시렁 계속 글을 쓴다. 성찰하고, 반복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이번 달 안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2015년의 내 공부 흐름도 공유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신 분들이 있다면 감사를 전합니다. :)


  1. 조아하자 2015.05.16 13:47 신고

    책 '예술가들에게 슬쩍한 크리에이티브 킷 59'는 저도 읽었는데 공감가네요. 저도 이 책 보면 창의적인 뭔가를 실천할 방법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ㅠㅠ

    • 하하 재미있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꽤 잘 디자인된 책이라 그런 기대를 만드나봐요. 그래도 아주 드물게 도움이 되는 재미있는 질문도 있던것 같습니다만 하하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는 말한다.
"두 사람이 업무에 대해 항상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불필요한 사람이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갈등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는 더 깊어지고,
조직의 창조적 생산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갈등을 지배할 것인가? 갈등에 지배당할 것인가?

오늘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보다가 나온 말입니다.
참 멋지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톰 피터스라는 사람을 안 좋아하기가 힘든거 같습니다. ㅋㅋ
갈등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


왜 이런 뜻을 가졌나, 하고 보면 갈등의 어원이 그 힌트가 됩니다.
갈등칡나무 갈葛 + 등나무 등藤 이렇게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둘 다 회전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데요,
재미있게도 칡나무와 등나무의 회전 방향이 서로 정 반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심으면 서로 꼬이고 얽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즉, 진짜 의미로서의 갈등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을 때는 발생조차 하지 않습니다.
같은 방향(목표)을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회전 방향(의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갈등인거죠..
갈등이 없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겠지만, 또한 순조롭게 망할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충분한 가설과 실험, 검증없이 그냥 되는 일은 원래 없으니까요..

이 처럼 '갈등'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극적인 스토리는 언제나 갈등 속에서만 태어나니까요~ 마치 질서는 언제나 혼돈 속에서만 양태되는 것 처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갈등이 발생했을 때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그래서 '누가 잘못했냐'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석합니다. 아직도 '다름'과 '틀림'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

사실 삶을 살다보면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이 효과적이었냐?, 무엇이 효과적이지 않았냐?'를 분별하고
가능한 빨리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갈등의 원인을 처벌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그 문제의 원인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이구요..
(시스템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우리는 그 진짜 본질을 알기에는 너무나 많은 착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들이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인데,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거의 '사람'으로 한정짓고 해석하니까요..)

단순해 보이는 '갈등'에 대한 것도 이렇게 쓰다보니 참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우주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구나.. 하는 것을 요즘에서야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언어에 거의 종속되어 있고,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의 사고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강유원 교수님'몸으로 하는 공부'손영기 한의사'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 몇 가지를 끝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으로하는공부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강유원 (여름언덕, 2005년)
상세보기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한의학어떻게공부할것인가
카테고리 미분류
지은이 손영기 (북라인, 2004년)
상세보기


진리를 깨닫기 이전에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와 인식을 철저히 지배한다.
생각이 깊을수록 언어력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쓰임이 없을수록 사고력이 증진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만든 언어의 틀 속에서만 사고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숙은 언어의 학습 과정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1. 호련 2011.05.22 22:47 신고

    ^_^ 저도 톰 피터스 좋아요. ㅎㅎ

  2. 난봉 2011.06.30 14:22

    좋은글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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