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있는 이유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 김현 

인문학 강의를 들을 때 봤던 글인데, 최근 책 <싸우는 인문학>을 보다가 다시 접했다. 이 글은 나에게 꽤나 큰 울림을 주었다. 문학과 인문학의 유용적 무용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 글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비평가에 의해서 무용한 것이 되려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윗 글에서도 특히 나는 이 두 가지 글자에 꽃혀버렸다. ‘억 to the 압'. 사전적 의미로 '억압’이란,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의 주제가 ‘친밀함’이었다면, 요즘은 이 억압이란 개념이 나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요근래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펼쳐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이 글을 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무엇에 억압 당하고 있을까? 질문을 한번 품어보자. 

앞서 나온 사례를 통해 억압을 한번 들여다보자.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 필요한 말이라, 차라리 지금은 유용함은 무용함을 억압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들은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들은 노래부르는 베짱이를 억압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느냐고, 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베짱이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무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억누른다. 그렇게 베짱이는 ‘유용함’으로 억압당한다. 이러한 예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다. 대학생들은 이제 1학년 부터 ‘유용한’ 스팩을 쌓느라 ‘무용한’ 다양한 경험들을 뒷전으로 미룬지 오래고, 고등학생들은 ‘유용한’ 국영수 공부를 하느라 ‘무용한’ 미술 및 음악, 체육 활동을 억압당하고 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다를까?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유용함의 바다’이고 우린 그곳에서 사는 ‘물고기'다. 유용해 보이지 않는 활동을 무시하다 못해 조소하고 심지어는 타박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렇게 우리네 물고기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유용함의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에 억압 당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억압하는지도 모른채. 

신문 기사의 폭력성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생각해보자, '핵심은 곁가지를 억압한다.’고. 신문 기사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자의 역할은 사건의 주제가 되는 헤드 라인을 가급적 ‘간결하게’ 다듬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곁가지들은 필연적으로 잘려나가게 된다. ‘핵심만 논하는 것’ 그것은 바쁜 우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필연적 일상이 되었다. 즉, 핵심과 본론이 곧 미덕이 된 사회다. 언듯보면, 이것은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억압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 제목을 보자.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 아마 대부분은 시선을 0.1초 정도 머물다가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기사로 쓱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실은 이 기사의 사건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지 보이는가? 알랭 드 보통의 <푸르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오는 예시인데, 참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곁가지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품고 있지만, ‘사건의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모두 잘려나간다. 그와 동시에 비극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사라진다. 결국 우린 삶의 본질 중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랭 드 보통의 책 48쪽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주의깊게 읽어보자. “이른바 신문을 읽는다고 불리는 혐오스럽고도 관능적인 행위.”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 덕분에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벌어진 모든 불운과 격변,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가와 배우의 냉정함 등등은, 심지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일종의 아침 대접으로 변모되며, 아울러 우리는 카페오레 몇 모금을 마시도록 권유받는 것이다.” ...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5만 명의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잊고, 신문을 한편에 던져버리고, 일사의 지루함에 대한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나는 이것이 매일 아침 뉴스로부터 우리가 받는 ‘억압’이라 생각한다. 글자수 40자 제한의 트위터나 페북도 실은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억압받는 삶의 풍부한 곁가지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성실함은 당연한 미덕인가
우리기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실함과 게으름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성실함은 게으름을 억압한다. 며칠 전 페북에서 웃긴 자료를 보았다. 한 남자가 말한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각자 생각해보라. 그리곤 남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ㅋㅋ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한다. 알아 봤더니 이 남자는 러셀 포스터, 수면 주기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경학자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보시라. ‘수면’에 대한 좋은 강연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해당 발언은 16:45초 쯤에 있다. (링크는 여기 http://on.ted.com/Foster) 나 역시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성실한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으른 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말 그대로 '게으른 사람들'로 본다. 딱 한번 필터를 쒸울 뿐이지만 그 타격은 크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그렇게 ‘반대편 사람에 의해서’ 손 쉽게 억압받는다.  




이 비슷한 맥락에서 ‘목표’는 ‘방황’을 억압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 부터 우린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몇번이나 듣는다. 넌 꿈이 뭐니? 넌 나중에 하고 싶은게 뭐니? 올해 목표는 뭐니?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나에게 관심있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던지는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만들어낸 어릴 적 나의 꿈은 ‘과학자’다. 그러면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ㅋㅋㅋ 이처럼 '꿈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꿈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억압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나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며, 왜 목표를 적지 않냐고. 왜. 왜. 도대체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나 역시 이러한 오류를 많이 저질렀다. 아니,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 중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던 나의 당시 꿈은 ‘20대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멘토링을 해주겠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미친 생각임에 틀림없지만, 그 당시 나에겐 하나의 ‘비전’ 이었다. 그리곤 외치고 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그 말이 ‘방황 혹은 목표 없음’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겐 얼마나 억압적이었을까. 평생 죄를 갚으며 살기에도 모자란 죄를 지었다.

모든 구분은, 그 자체로 억압이 된다.
그렇다. 어쩌면 모든 구분은 억압일지도 모르겠다. 선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점이 되며, 그와 동시에 악을 억압한다. 전문가는 스스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기준이 된다. 그리곤 자연스래 비전문가를 억압한다. 이게 어떤 장면인지 연상되지 않으면 상상해보라.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그 주제에 관해서’ 함께 존중 받으며 활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상상되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아직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한 편이다. 전문가는 그 존재로서 비전문가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연스래 발언권을 뺏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까닭은 위의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명히 기준 짓는 사람일수록, 그 기준으로부터 타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되려 어려운 법이기에. (게다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돈을 많이 쓰면 썼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최근 철학자 들뢰즈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이런 개념이 있더라. 들뢰즈는 '분리'를 '층화'라 칭했다. 그는 말한다. 층화된 사회일수록 고착화된 사회라고. 계층끼리 대화가 안 되는 그런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반면 탈층화된 사회는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관계를 맺어가며 훨씬 더 역동적 삶을 창출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and (그리고)’의 관계를 맺는 것을 꿈꾼다. 사물들이 하나의 중심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새로운 ‘and 그리고’ 그리고 ‘between 사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이 형식의 사유를 들뢰즈는 ‘리좀’이라고 불렀다. 리좀이란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통해 자유롭게 관계 맺으면서, 장 전체을 만들어가는 사고를 말한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데 난 너무 즐거웠다. 그래. 내가 원하는 사회가 바로 이러한 ‘탈층화 된’ 사회임에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전문가란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사회. 물론 꿈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동문회나 향우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로써 자연스러워 진다. 사실 어릴 적 부터 그런 집단에 대한 이상한 반감이 있었는데, 그 반감의 이유를 이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억압에 대한 마지막 성찰, 깨달음.

정리해보자. ‘분리'은 억압을 만들고, 억압은 '인간 소외'를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린 분리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로 부터 소외된다. 관계는 그렇게 단절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는 파편처럼 살아간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끼리. 선함은 선함끼리. 유용함은 유용함끼리.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준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 반대편의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그 이유로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의 생동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시키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성 및 깨달음’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20대 중반부터 이 ‘영성 및 깨달음’이란 테마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나는 강렬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출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젠 정반대의 물음을 던진다. ‘깨달음’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품고 산책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깨달음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하다. Oneness, 즉 개체가 분리를 넘어 하나됨을 인식하는 것, 깨달음은 이 상태를 말한다. 이는 평화로운, 비이원적인 상태를 의미하며 자아(에고)로 부터 자유로워진, 언어를 넘어선 영역을 가리킨다. 나의 미천한 지식이 이 모든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으론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레 무엇을 억압할까? 나는 보았다. ‘깨달음’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수 많은 구분이 생겨나는 모습을. 영성이나 의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선을 긋는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앞서 말한 ‘탈층화’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비판하려는 것은 ‘깨달음의 추구’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일련의 ‘무의식적 억압’이다. 우리를 둘러싼 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수 많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했고, 억압했고, 무시했던 적이 있고 말이다. 이러한 예시가 아디야 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집단에서 매우 흔히 일어난다. 나는 옳다. 깨어났으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깨어났으니까. 에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꿰뚫기가 가장 힘든 에고는 바로 실재를 잠시라도 보았던 에고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남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깊숙이 미혹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지나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디야 샨티의 말처럼 우리에겐 결국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 새로운 눈을 갖는 훈련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과 대면하는 것이다. ‘옳다고 주장하고, 구분하고, 억압하는’ 내 모습과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이다.  

결론, 자명한 것을 의심해보자는 것 
깨달음이란, 결국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알아차림이다. 무엇에 대한 알아차림일까? ‘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도입, '유용함과 무용함'에 대한 분리를 너무도 지혜롭게 정리한 글이기에 빌린다. 이 지혜로운 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모든 분리는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앞서 말한, 무용함과 유용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분리해서 읽을 수는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분리하려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결론을 쉽게 풀어보자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것, 자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일수록 그것은 되려 상대를 강하게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들 옳다고 느껴지는 개념 마저도, 예를 들어 ‘깊이 있는 삶’ ‘친밀한 관계’ 심지어 ‘타인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삶’ 마저도, 억압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게 억압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특히 가까운 아내와 가족들)에게 내 가치를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그 축적된 억압들은 내가 앞으로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나의 업이다. 나는 이러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무엇을 억압하는가. 아니, 당신은 무엇을 자명하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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