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마이크로소사이어티로간다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일반 > 경제전망
지은이 팔란티리 2020 (웅진윙스, 2008년)
상세보기

지난 일요일 아침, 홍대에 있는 카페베네에서 발견한 책이다.
예전에 다른 후배가 읽고 있는 것은 봤었는데, 카페에 보이길래 얼른 중요한 부분을 나의 사랑하는 블루투스 키보드로 옮겨 적었다. 두둥!
 


요 녀석은.. 가끔 구입하기에는 조금 부담이 되면서, 중요한 부분을 옮기고 싶은 책을 발견 했을 때 아주 유용하다.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아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 아이폰과 함께 아주 궁함이 좋다. 아이패드를 나중에 사게 되면 더 좋겠지만 ^^

일단 이 책 '우리는 마이크로소사이어티로 간다' 라는 책을 보면 여러 사람들의 스터디 모임을 통해 공동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상당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고, 내가 학습조직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시스템.. ^^
인상 깊었던 부분은 거의 1장에 다 있었는데, 그래서 1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옮겨 적어보려한다.

재미있게 본 것

[나는 몇 개인가?] (네트워크 속 개인과 인간관계)

무한한 인터넷 공간의 확장으로 나는 과거에 비해 더 다양한 상황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 앞에 놓이게 된다. 인터넷상에서는 여러 가지 자신의 모습을 시도해보고 필요에 따라 수정하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다. 사회적 정체성은 자신과 타인 간의 '상호 주관성'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므로, 네트워크상에서 자아는 고정된 단일의 실체를 갖기보다는 관계에 따라 늘 유동적이고 파편화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객관화시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에게 큰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는 사람은 다양한 사람이나 집단과의 교류를 즐기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성찰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는 한발 더 앞서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대해지느냐에 따라서 변한다. 네트워크의 엄청난 효력은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이 네트워크의 강력한 효과를 인지하고 자발적으로 구성하도록 촉진한다는 점이다.

개인이 기본 구성 단위가 되어 서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위에서 신뢰를 교환하고 참여하는 것이 사회학자 배리 웰맨이 지칭하는 '네크워크화된 개인주의'이다. 개인은 네트워크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안정에 대한 욕구) 동시에 스스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싶어한다. (개인 중심적 원리)

하지만 수많은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얽매이게 되면, 진정한 자아의 형성을 위해 나 자신을 반추해보는 성찰을 할 여유가 없어진다. 단일성과 자율성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자기중심적 집단을 직접 건설하는 개인, 네트워크에 의해 자신을 구성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개인, 그 안에서 나는 과연 어디에 위치할까? 동시에 여러 곳에,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본다면, 현대 철학자들이 말하듯, '나는 누구인가?' 보다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구성주의적 질문이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소집단 커뮤니케이션의 부상]

한국의 경우 10여년 전과 비교해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집단의 정체성은 약화되고, 대신 개인적으로 정서적 교류를 나누는 집단, 끊임없이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접속하는 집단의 정체성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발달로 나타난 변화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카페'라고 불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성화였다.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모임을 만드는 일이나, 일상에서 경험하기 어렵고 돈도 되지 않으며 쓸데없어 보이지만 잔재미를 주는 인터넷상의 모든 일은 계속 번창할 것이다. 이것들이 사람들에게 원천적인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즐거움은 나의 더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참여와 활동은 또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이렇게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에너지는 빠른 속도로 증폭될 것이다.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의 단점:

명품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찾는 현상은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양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 자아의 개념의 덜 독립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는 서양 문화에서는 독립적 개인을 지칭하는 주체인 반면 집단주의에 기반을 두는 동양 문화에서는 자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다른 사람들와 서로 연결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됨을 의미한다. 단지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명품을 소비하기 보다는 명품족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알리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관계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 구성원의 주체성과 개인성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 요인을 찾는다면 단연 '관계형 매체의 이용 증가'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가상적 사회 집단의 활동이 늘어나고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 늘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 실체가 있는 것인가? 관계란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유지되는 것이고,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 그 자체이다. 스몰토크가 없다면 그것이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도구적인 커뮤니케이션만 생각한다면 자주 만나는 친구보다 아주 오래만에 만난 친구들과 할 이야기가 더 많아야 한다. 서로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가야 하는 정보도 더 많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던가? 대개는 "이야 반갑다. 어떻게 지냈어?"를 한 순배씩 교환하고 나면 썰렁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들은 매일 만나서 끊임없이 얘기해도,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도 할 이야기가 샘솟는다. 이렇듯 일상적인 수다로 관계는 지속적으로 다져지는 것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다져진 관계 사이에서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수단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 비해 개인이 인간관계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졌다. 메신저, 문자, 블로그를 통해 스몰토크가 이루어지며, 관계의 중심에는 개인이 있고 개인을 중심으로 여러 관계망이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정보에 강한 개인은 열려 있고 활발한 교류를 하지만, 정보에 약한 개인은 오히려 주어진 집단에 의존하게 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단, 여전히 인간과 인간의 면대면 만남이 갖는 의미나 가치를 간과하지 말아햐 한다. 클릭 한번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어떤 정보가 값지기 위해서는 그 정보를 아는 사람들의 수가 본질적으로 적어야 한다. 그렇다면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널린 정보는 고급 정보가 아니다. 진짜 고급 정보는 인터넷 회선이 아니라 관계를 타고 온다.

스몰토크는 사소하지만, 아니 사소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는 행위의 의미가 심대한 대화가 아닐까? 그 영향력이 작지 않다. 물론 스몰토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반드시 친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형식적인 관계는 지극히 스몰토크만 하는 관계일 수 있다. 우리는 상대의 이름도 잘 모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등 '깊은' 속사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렇지만 스몰토크는 친한 사람과 단연 많이 한다. 관계가 긴밀할 수록 미시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Where are you?'라고 한다. 우리도 가장 많이 들리는 표현은 '너 어디야?'이다.

어쨌거나 친한 사이에서는 수많은 스몰토크가 교환되고, 친한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몰토크를 계속해야 한다. 스몰토크는 관계 그 자체이다. 스몰토크는 점차 큰 이야기들이 나오고 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휴대폰 이용이 증가하면서 '친밀성'의 개념이 변화했는가? 스몰토크는 얼마나 오래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얼마나 자주 접촉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여기서 '의사소통 회기'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의사소통 회기'란 물리적 시공간에서 시작과 끝으로 구획되는 한 번의 의사소통의 흐름을 지칭한다. 가족 구성원 간에 휴대전화 이용이 증가함에 따라 친밀함이 강화되었ㅇ며, 그 친밀성을 강화시키는 기제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지만 잦은 빈도를 보이는 의사소통을 반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매개로 언제 어디에서나 연락 가능한 사회에서 짧지만 빈번한 의사소통 회기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사이는 더 이상 친한 사이가 아닌 것이다. 친하지 않으면 단지 어색한 관계일 뿐이며, 이는 친구나 연인 또는 동료는 물론 심지어 가족 구성원에게도 적용된다.

[승자는 스몰토크로 세상을 지배한다]

- 블로그나 미니홈피에서 인기 있는 '나'가 되려면 '전문성'보다는 '근면성'이 중요하다. 부지런히 자신을 홍보하고 광장에 노출해야 입소문이 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역시 스몰토크를 진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너 어디니'라고 물을 경우, 정말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네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렴'이라는 함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즉 친밀성을 형성하고 확대하기 위한 고유한 코드가 스몰토크인 것이다.

관계적 매체가 폭증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쑥스러움을 느끼는 주체, 머뭇거리는 주체, 말을 건네지 않거나 말이 없는 주체는 더 이상 사회적 상호작용의 당사자가 되기 어렵다. 방문과 댓글이 없는 썰렁한 미니홈피나 발신자 목록이 텅 빈 휴대전화는 소통하는 주체의 무능력함을 증명할 뿐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관계도 없다. 따라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사회적 성공을 가져오는 발판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느낀 것

이 책에서 예전에 몰랐던, 새롭게 배우게 된 부분은 '스몰토크의 중요성'이다. 사실 나는 관계맺는 것이 아주 서툴고, 전화하는 것이 쑥쓰럽고, 비지니스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잘 먼저 전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전화가 잘 오지도 않는다. 그런 식의 관계 맺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관계는 스몰토크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보는데, 정말 나에게 많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부분이겠구나 싶었다. 트위터도 하고, 페이스북도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블로그 역시 나 혼자 일방적으로 글을 만들어내고 혼자 정리하는 공간이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다거나 댓글이 달리거나 그런 일도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남이 쓴 글에 댓글을 달아주는 일에 많이 인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온라인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타인'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나 할까.. 이번 랜드마크를 들으면서 많이 배웠고, 또 내 삶의 커다란 숙제가 던져진 기분이지만, 앞으로 나는 더욱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난이도 높은' 그러나 '보상도 큰' 길이리라.. 마지막 줄에 나오는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고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존재가 되는 것에 뜻을 둘 것이다. 화이팅!!
  1. 김명곤 2011.05.13 15:38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관심'이 없는 블로그,페이스북,사람들을 만난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관심이 별로 없는데 '의지'를 사용해서 관심을 갖는건 꽤나 에너지가 소비가 심한일이죠, 커뮤니케이션이라는것도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구요. 제가 생각한 방법은 '의도'가 같은 사람들 즉 '공명'이 되는 사람들 부터 우선적으로 만나는것 입니다. '정보의 바다' 라고 불릴만큼 방대한 곳에서 자신과 공명이 되는 사람을 만난다는건 어쩌면 어려우면서도 쉽지 않는 일이죠, 전 우선적으로 오프라인에서 '공명'이 되는 사람들과 만남을 하고 그 공명이 되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져 온라인에서 만들고 저와 공명이 되는 사람이 좀더 쉽게 찾을수있도록 하는것을 의도중입니다. 물론 그 과정중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것은 쉬지 않아야겠지요 ^^ 커뮤니케이션이란 상대방에 혼신을 다해서 듣는것인데 그건 쉽지도 않고 에너지가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명이 되지 않는 상태라면 더욱더 힘들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법은 오프라인->온라인->오프라인->온라인 으로 생각하고있습니다. 순환의 사이클이 되도록 하고 그 사이클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수있도록 해야겠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분명 '공명'이 되는 사람들을 볼수있을테고 그사람들을 모으다보면 점점더 공명이 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공명이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에너지는 점점더 커지겠구요, 그걸 기반으로해서 처음엔 공명이 되지않더라도 관심을 가질수있겠죠, 그렇지 않다면 에너지 소비가 심하고, 소위 '에너지 충전'이 되지않는다면 오히려 악순환에 빠질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명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걸 기반으로해서 좀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좀더 탄탄한 사이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관심'자체가 가지 않은데 만난다는건 꽤나 쉽지 않을일이라 생각해서요 ^^ 내안에 '무엇'이 있어서 긴댓글이 되었는데 잘 소통할수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ㅎㅎ

  2. 김명곤 2011.05.13 15:52

    아, 그리고 글을 만들어내고 글을 정리하는것도 꽤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공개적'인 곳에서 공유를 한다는 자체가 꽤나 대단한 에너지들이 유입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자기 일기장에서 쓰는것과 그래도 블로그,인터넷 이라는 사람들이 볼수있는 공개적인 곳에서 공유하는것과는 천지 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코멘트가 없다는걸 보면 힘이 빠질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라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기 블로그들을 보면 사실상 그렇게 제가 보는 관점에선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봤던 블로그 들은 주로 연예,음악,tv 가끔은 IT,정치 정도 됬었는데 제가 봤던 블로그들중에 얼마나 의미가있는 정보를 보았다거나 교류를 했다하면 미지수네요, 저의 한계이기도 하고, 저의 해석이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정보'를 잘 소통하는 블로거나 그룹들을 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최소한 소통이 되는곳 조차 별로 못봤습니다. 보통 다 와 글 좋습니다,최고네요,추천합니다 라는 글이지 이글은 이글은 이러이러해서 좋은것같고, 내생각은 저러저러한데 어떻게 생각하냐 라는 '토론의 장'이라던지 별로 그런걸 보지 못한것같습니다. 혹자는 인터넷에서 뭘 그렇게까지 바라냐 라고 할수도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터넷은 정말 위대하고 대단한곳입니다. '시공'을 초월할수있죠. 한국에 거주하는 분과 미국에서 거주하는 분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을 한다면 이 얼마나 위대한일 아닙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것 이죠, 물론 시차라는 핸디캡이 있긴 하지만요, 사실 서울에 사는 사람끼리 만나는것도 신기한 일이고, 이렇게 강구환 코치님의 블로그에 댓글을 쓰는것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경이로운일인지 모르죠. 결국에는 얼마나 '공명'되는 사람들과 소통할것이고(정보라던지, 여러가지 것들을) 그리고 최소 수십명에서 최대 수억명까지 영향력을 행사할수있는 인터넷을 잘 이용할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자신과 공명이 되는, 혹은 좀더 질좋은 정보, 좀더 깨끗한 에너지(저의 판단입니다만)을 어떻게 교류할것인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것이 기반이 될거라고 전 봅니다. 조금 두서없이 엄청난 댓글을 써버리게 됬는데, 음 잘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

  3. 김명곤 2011.05.13 16:09

    저또한 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쉽지 않음을 느끼네요, 제가 가야할 길임을 느낍니다. ^^

  4. 김명곤 2011.05.18 05:49

    네, 강구환 코치님께 학습조직도 문의했던 사람이랍니다!

  5. 김명곤 2011.05.20 13:44

    언제 뵐지는 저는 잘 모르겠던데 언제 뵙길 원하세요? ㅎ

    • 음^^ 요즘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정말 즐거운 일인거 같아요 ^^ 6월달에는 일정이 조금 빡빡한데, 여유있게 7월 초나 중순이 좋을 듯 합니다.


링크(21세기를지배하는네트워크과학)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과학이야기
지은이 A. L. 바라바시 (동아시아, 2002년)
상세보기

이 책의 주제:

- 오늘날 우리는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따로 떨어져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건이나 현상은 복잡한 세계(complex universe)라는 퍼즐의 엄청나게 많은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생겨나고 또 상호작용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는 좁은 세상(small world)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히 상이한 학문 분야에 속한 모든 과학자들이 모든 복잡성은 '엄격한 구조(architecture)'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히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는 거대한 혁명이 진행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비로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재미있게 읽은 글:

- 여러분은 경제, 세포, 인터넷 등과 같이 매우 상이한 시스템들 간의 놀라운 유사성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모든 과학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설명해줄 가능한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섯 단계의 분리 원칙은 놀랍게도, 우리 사회의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간을 연결하는 링크를 따라가면 쉽게 그 안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60억의 노드들로 이뤄진 네트워크에서 임의의 한 쌍의 노드를 선택했을 때, 그들 간의 거리는 평균적으로 6단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짧은 거리는 고사하고 두 노드를 연결하는 경로가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 말이다.
(우리는 사회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한 명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친구들을 갖고 있다.)

- '약한 연결의 힘'에서 그라노베터는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직업을 구할 때, 새로운 소식을 접할 때, 식당을 새로 차릴 때, 최신의 유행이 전파될 때, 우리의 약한 사회적 연결이 강한 친분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정작 직업을 구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들은 나와 같은 서클에 있으므로 대개 동일한 정보를 갖고 있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보통 자연은 멱함수를 싫어한다. 보통의 시스템에서 모든 양들은 종형 곡선을 따른다. 하지만 시스템이 상전이 겪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달라진다. 이 때에는 멱함수 법칙이 등장한다. 상전이 이론은 무질서에서 질서 상태로 가는 길은 자기 조직화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유지되며, 멱함수 법칙에 의해 그 길이 닦여진다는 것을 크고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즉, 멱함수 법칙은 복잡한 시스템에서의 자기 조직화의 표직이라는 말과 같다.
(멱함수 법칙이 이 네트워크들을 무작위 정글에서 자기 조직화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일관성의 단면을 본 것이다.)

- 현실의 네트워크는 두개의 법칙을 따른다. 성장과 선호적 연결. 이 선호적 연결의 법칙은 연결선 수가 많은 노드들이 뒤늦게 들어온 노드들보다 훨씬 많은 링크를 붙잡게 되는 부익부(rich-get-richer)현상을 야기한다. 이 경우에는 대개 허브와 멱함수 법칙이 등장한다. 복잡한 네트워크에 있어서 척도 없는 구조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경우이며 네트워크가 아무리 복잡하고 커도 성장과 선호적 연결이 존재하면 거기에는 허브가 지배하는 척도 없는 위상구조가 자리잡게 된다.

- 장애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시스템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고도의 상호연결성을 가진 복잡한 네트워크에 의해 시스템 기능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즉, 자연은 상호연결성을 통해서 견고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20세기 기업들의 네트워크 구조는 나뭇가지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명령 체계가 확고해짐에 따라 하부조직으로 내려갈수록 책임감은 점차 감소된다. 나뭇가지 구조는 오늘날까지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량생산 체계에는 가장 적합했으나, 오늘날의 정보 산업과 아이디어 산업 체계에는 알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산업의 변화에 걸맞은 체계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조직을 나뭇가지 구조에서 거미줄 구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원이 물질에서 정보로, 운영이 수직적인 것에서 수평적인 것으로, 사업의 범위가 국지적인 지역에서 세계로, 제품의 생명이 몇 시간이나 몇 개월에서 영구적인 것으로, 기업의 전략은 상의하달에서 하의상달로, 일용직이 고용직이나 파견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수동적인 기업은 자연히 도태되고,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면을 가린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우리 앞에 있는 복잡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의 구조와 위상적 성질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네트워크의 링크를 따라 전개되는 '동역학적 성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보냈던 20세기는 복잡계를 이루는 조각들을 밝혀내고 설명하려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탐구는 대개 실패로 돌아갔다. 앞으로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이 링크에서 저 링크로 옮겨 다니면서 부서진 유리 조각을 맞추는 연구를 하나 하나 진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98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서 21세기를 복잡계를 이해할 수 있는 세기로 만들었으면 한다.

느끼고 적용할 점: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말을 듣고 한 것이 2년 전이었는데, 이제야 체감이 정말로 나는 걸 보니, '참 세상 정말로 빠르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예전에는 이런 책이 나오면 '아 그렇구나'하면서 나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는 정말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수 많은 각자(覺子)들이 말했던 세상은 점점 더 겹쳐져 가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세상을 이제 조금씩 빼꼼 내밀어 보는 느낌이다. 그들이 말한 세상은 분명 '복잡계'와 함께 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복잡계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논의하고 다투고 정리하고 숙고하고 싶다.

적용할 점은 네이버 블로그에 '복잡계 학습 노트'를 만들어서 최신 복잡계 연구를 나누고 쉽게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는 것!

'의지와 환경'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다. 음.. 그냥 '많이'라는 단어로는 묘사가 안 된다. '무지하게'가 좋겠다
사람은 환경에 무지하게 영향을 받는 존재다.

복잡계라는 학문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서로 많은 사람, 공간, 사물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이는 아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밈이나, 거울세포 등 여러가지 학문적 측면에서 실제로 연구되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모습을 배우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성(본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오만한' 생각이다.
나와 주위의 환경을 무시하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고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면 그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나와 연결된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 말은 그저그런 말로 그치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의 의지'는 하나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우물에 아무리 많은 물이 있다고 한들, 최초의 마중물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듯, 최초의 나의 의지가 그 마중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처음에 마중물을 붓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그 일이 '저절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우물의 물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나올 수 있도록 나의 환경과 사람들을 SETTING 해야 한다.




공부가 잘 안 된다? 먼저 최초의 의지가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겠다는 최초의 의지!
우선, 컴퓨터와 tv를 지금 아파트 밖으로 던지면 된다. 그리고 내 방에 공부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린다. (공간)
그리고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을 무조건 9시간을 맞춘다.(예를 들면)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시간)
그리고나서 주위 친구들 중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를 가까이 하고, 그 친구들과 그냥 어울려 논다. (사람)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서 공부가 늘지 않았다면 당신은 책을 낼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공부에 무조건 실패한다'
왠지 대박할 것 같지 않은가?

좋은 습관은 배우기 어렵지만 삶에 도움이 되고, 나쁜 습관은 배우기 쉽지만 삶에 방해가 된다.
그리고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둘 다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편해진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왜 쓰고 있는가?
내가 스스로 환경을 셋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글을 하루에 일주일에 4-5회 쓰기로 했는데 7월에 접어들면서 어김없이 어겨지고 있는 나를 보면서 저절로 이런 글이 나오고 있다. ㅎㅎㅎ
그래 좋다 다시 한번 나의 마중물을 넣어보자. 우물이 제대로 작동될 때까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성찰 노트 > 일상 성찰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9.17 아침] 변화와 학습  (0) 2010.09.17
[2010.9.16 아침] 유지  (0) 2010.09.16
오늘의 인식 7/16  (0) 2010.07.16
오늘의 인식 7/11  (0) 2010.07.11
오늘의 인식 7/7 [나는 나의 길을 간다]  (0) 2010.07.07
오늘의 인식 6/22  (0) 2010.06.22

공부의달인호모쿵푸스인문학인생역전프로젝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7년)
상세보기

이 책의 주제는 맨 앞에 나와있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많은 이들이 지금의 시대를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내내 '공부의 달인, 즉 호모 쿵푸스' 만이 이 인문학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호모 쿵푸스'란 무엇인가?
공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의 달인'을 말한다.
마치 쿵푸를 하듯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꿔 나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것이 그의 존재론이며,
"공부해서 남 주자", 이것이 그의 실천론이다.

자, 이쯤이면 호모 쿵푸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나에게 울림이 되었던 말을 (편집을 조금 가해서) 옮겨 놓았다. 함께 공부의 달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



- 학교'코뮌'의 차이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에서만 작동한다. 고로 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그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선생을 만나 어떤 학문을 터득하겠다는 발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학교의 위상, 그 학과의 사회 진출 비율, 그게 선택의 유일한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학벌이 높아질수록 공부와 삶 사이의 소외와 간극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그 시절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발심이 공부의 출발이자 원동력이었던 셈.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주는 자이다. 그리고 도반이란 그 길을 함께 가는 벗들이다. 뭔가를 배운다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스승을 만나는 것이자 의기투합하는 벗을 모으는 일이었다. 초학자뿐 아니라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면 스승과 친구, 제자 사시의 경계를 서로 넘나들게 된다. 그리하여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제자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지기가 되는 '코뮌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과 도반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연령대별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을 하는' 학교제도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오랬동안 학교를 다녀도 평생을 좌우할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대학원생들에게 공부는 참고 견뎌야 하는 지겨운 노동이고, 학과는 스트레스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사제관계도, 우정의 연대도 없는 곳, 거기에서 즐거운 지식의 생성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 공부는 네트워킹!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유포하는 교수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교수들이 대학 안에서 능동적인 학습망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먼저,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시작하면 된다. 소규모일지라도 사제 간에 '즐거운 공부'의 장을 만들어가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합적 관계망을 만들면 그게 곧 '앎의 코뮌'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적 열정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한 일상적 노력도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식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사제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 글쓰기운명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문체는 말투와 동선, 삶의 패턴과 나란히 간다. 신기할 정도로.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실제로 고전의 시대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그런데 몸이든, 문체든 혼자 힘으론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변이시켜줄 연기조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밑천이 없을 때,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등등. 또 상호 신뢰가 두텁다 해도 가혹한 비판을 견뎌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체력과 끈기, 오기와 집요함이었다. 길 위에 있는 한, 나는 수 많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은 또 나를 아주 낯설고 경이로운 곳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글쓰기가 신체를 단련시켜주고, 나아가 운명까지 바꿔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랑, 이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없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돈!돈!을 외치며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삶의 낙이라곤 연애밖에 없는 듯하다.

중략..    지금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치명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예컨데 '주역'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상생상극이 필요하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죽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쳐주듯이 아이에게도 적당한 극을 줘야'한다. '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명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 감염촉발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구조적 양태가 싫다면, 먼저 교수들이 열정적으로 배우면 된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 Sitemap 2011.08.17 14:00

    수고하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