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좋은 부모가 되기를 고민한다.

지난 주였나, 이런 일이 있었다. 오전에 아내와 나는 잠깐 약간의 말다툼을 벌렸다. 사실 어떤 문제 때문에 그랬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원래 남녀간의 다툼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시작하기 마련이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툼이 끝나고, 그날 저녁에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를 옆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은데 잘 안 돼. 그게 고민이야.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그때 느꼈다. '아, 아내가 스스로 변하려고 하는구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 변화하려는 의지는 분명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아이 때문이었다. 아내는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선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짧은 생각을 전했다. “중요한 건, 화를 내거나 안 내는 거 아닌거 같아. 일단 화를 내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해보여. 화를 억지로 참는 것이 되려 더 안 좋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화 났을 때, 각자가 먼저 화 났다고 말했음 좋겠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말할 수 있으면 그 화의 절반은 다뤄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도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렇다. 서로의 감정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수준만 가도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I-message>나 <비폭력 대화>가 그러한 맥락을 담고 있다. 나도 아내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어갔다. 일단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말하는 연습까지 하자고. 자신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상대의 감정도 들을 수 있고, 나중에 아이가 커서도 서로의 감정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기에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자마자 너무 공감했던 표현이다. 사실 아이를 키우기 전에 이미 우린 이런 마음을 먹었을 때가 있었다. 떠올려보라. 기억나는가? 그건 바로 지금의 배우자(혹은 애인)를 처음 만났을 때다. 즉,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린 사랑에 빠질 때 좀 더 성숙해진다. 그 전에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뿐 이었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타자’를 ‘나’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두게 한다. 그건 인생에서 몇 번 일어나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다. 타자를 위해 무언가를 고민하고, 그를 위해 나를 변화시키는 것. 그 놀라운 경험은 오직 ‘사랑’만이 가능캐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 우리는 기존의 사랑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이건 정말 삶에서 이미 연습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올 뿐이며,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그렇게 아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면서 우린 앞서 연애 때 했던 맹세를 다시 꺼내든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나말고 다른 존재를 더 우선 순위에 둔 적이 없었기에, 이 경험은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삶이며, 후회를 동반하지 않는 선택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이성적인 판단보단 비이성적인 선택을 했을 때 우린 좀 더 ‘삶을 진하고 깊게’ 맛보게 된다. 나에게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이 바로 그럴 때다.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한다. 

사랑하자. 더 사랑하자. 
나는 삶을 깊이 사는, 그리고 더 나아지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알고 보니, 아내가 아이를 옆에 두고 다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에는 내가 전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예전에 아내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내가 그랬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내 앞에서 거의 안 싸우셨던 거 같아. 나는 싸운 걸 본 적이 없거든. 나 없을 때 조금 다투시거나 그랬겠지.” 나는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아내에겐 그 말이 꽃혔나 보다. 그래서 노력하려고 했나보다. 나도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보여준 몇 가지 면들을 높이 산다. 참고로,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어릴 때만 해도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다. 어떤 일에도 끝까지 믿어주시는 것도 너무나 대단해 보인다. 그런 부모님의 훈육법을 잘 추리고, 익혀서 우리도 재원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자고 서로 다짐했다. 

이처럼,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 우린 변화하고자 한다. 주위의 좋은 사례를 듣고, 그걸 우리의 삶에서 적용시키고자 한다. 어쩌면 부모가 된다는 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한번 더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가 보는 좋은 동화책을 함께 읽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고민 하면서 우리가 한 차례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육아, 그 자체를 애찬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사랑이다. 오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보는데 사랑에 대한 정의 하나가 와 닿았다. “사랑이란 하나의 추상명사이며 흐릿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히고 화면이 먹통이 되는 순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하게 견고한 부분은 바로 사랑임이 드러난다.” 나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통해 흐릿했던 사랑을 분명하게 세긴다. 그러니 우리 사랑하자. 부모라면 더욱 사랑하자. 그게 우리의 삶이니.


  1. aquaplanet 2015.04.20 11:36 신고

    좋은 글이에요~ ^^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내가 되려고하는 마음가짐, 저도 용기와 성장의 단계라고 생각해요. 잘 읽었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경계한다. 
나는 2015년 올해 서른 세살이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나이다. 아직 사회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사람 경험은 적지 않은 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게을리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겪고, 관계 맺었었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몇 가지 기준들이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이것은 내가 체계적이고 면밀하게 분석해서 만든 기준이 아니다. 그것보단 오히려 몸이 반응하는 기준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그 느낌을 예를 들어보자. 몇 년 전에 운전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앞뒤좌우 간격’이었다.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운전하는 입장에선 간격을 모르니 회전할 때 마다 옆 차와 부딪칠 것 같았고, 주차할 때도 한참이나 해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연수를 도와주는 분께 물었다. “선생님, 어느 정도 운전해야 앞뒤좌우 간격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시간이 걸리지요. 하지만 빨리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자동차 양 옆을 싸-악 긁혀보면 됩니다. 그때 경험은 절대 잊혀지지 않거든요. 그 간격을 몸이 기억하고, 그 다음부턴 알아서 피합니다.” “아, 그..그렇군요"

나에게 이 조언은 꽤 인상깊었다. 왜냐, 이것은 비단 운전에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강렬한 감정적 경험을 통해 경계를 형성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고, 다치고, 경험하다 보면, 나중엔 비슷한 패턴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몸이 반응한다. 다들 그런 경험들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몇 년의 사회 생활과 관계를 거치면서 나에겐 나름의 ‘인간관계 안테나'가 생겼고, 그 레이더 망에서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견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을 편견없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받을 정도의 훌륭하고 멋진 사람은 아니다. 앞으로도 그런 천사 코스프레는 지양한다. 나는 독립적이며, 나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관계 지향적인 성격이 아니기에, 더욱 엄격하게 관계 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인간관계 안테나’는 적어도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과 공간을 보장한다. 앞으론 더 성숙해져야 겠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한번 끄적거려 보려한다.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 다섯 가지 부류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 첫 번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라 실망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기에.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작게는 작은 약속에서부터, 크게는 회사의 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평가 지표이자, 평가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일수록 자주 나타난다. 교육이나 강의 분야, 종교 분야, 정치 분야, 사업, 방송 분야 등등 나도 강의나 코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기에, 이 기준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김제동도 그랬다. 집으로 갈 때 마다 후회한다고. 스스로 말했던 것 반의 반 만큼만 살라며 자책한다고. 그 말이 맞다. 이 기준은 말이 많은 사람들에겐 불리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간격을 주의깊게 살피고,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려는 ‘자기인식 능력' 그리고 ‘실천하려는 의지'이다. 그 노력의 여하는 아주 결정적이다. 왜냐면, 시간이 흐르면 결국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좁히려고 애쓰는 사람과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말이다. 그래서 이 영역을 분별하기 위해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사적 거리에서 지켜봐야하는 어려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정확하게 그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이다.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신뢰하는 것. 말과 생각 심지어는 글도 그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과 선택이며, 그것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삶을 길게 지켜보는 것.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옳다. 관계를 맺을 때 그 사실만 알고 있어도, 천천히 관계 맺는 법만 알아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을 보면서 천천히 사귀어도 된다. 오래 갈 사이라면 되려 그게 더 좋다.

두 번째 사람들은 바로 ‘공과 사’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어려워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파커.j.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훌륭한 교사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지역에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줄이기 위해 우리 교사들은 학생, 과목, 심지어 스스로부터도 도망친다. 우리는 내적 진실과 외적 연기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교사라는 역할을 연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지역. 그 지점에서 서 있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면, 결코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는 일과 떨어질 수 없기에. 하지만 나는 자주 목격했다. 자신의 일과 삶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사람들을. 본인의 삶이 지향하는 이야기는 하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 혹은 자신이 다루는 주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 높은 벽을 쌓고 연기하는 사람들. 이해는 가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끔은 대의를 부르짓는 경우도 많이 봤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들이 닿게 되는 결말은 대부분 ‘삶의 망가짐’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 왔던 것은 아닐까. 삶을 도피하고자 하는 결과가 일이어선 안 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될 것이다. 관계를 맺을 때, 그래서 나는 서로의 삶을 들으려고 한다. 그 사람의 맥락과 일이 일치할 때 좀 더 신뢰하고, 가까이 다가간다. 첫 번째 원칙은 물론 지켜져야 하겠지만. 

세 번째 사람들은 과장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과장하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 같은 자기PR의 시대에 참 뒤떨어지는 말이긴 하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사실 요즘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어딘가에 빗대어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은 많다. 예를 들면, 자신이 머무는 공간, 머물렀던 회사나 학교, 언론에서 노출된 경험, 혹은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 등으로 자신을 과장한다. 교묘하게.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것들을 중간에 툭툭 흘린다거나, 호기심을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사려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은연중에 높이면서,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나)도 함께 높이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나는 특별하다. 그런데 너도 이제 나와 함께 있으니, 너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그런 메시지를 심어주고자 한다. "너는 나와 함께 하면 너의 꿈을 이룰 수 있어”와 같은 메시지가 있다. 그런 사람들일 수록,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것들이 자신을 귀찮게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막상 유명해지면 이제야 세상이 나를 인정하기 시작한다고 하면서, 또 은연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슬쩍 알린다. 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첫 만남에 호의적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문제가 있다면 지나치다는 것. 그리고 상대가 어느 정도 엉겨붙을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그런다는 것. 아무것도 없는 상대에겐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노출하지 않는다. 약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접근하고, 호의를 보이고 관심을 빼앗는다. 그리고 함께 저 멀리 날아간다. "우린 특별해”라는 비행기를 타고. 관계를 맺을 때, 그래서 나는 과장하는 사람들을 좀 더 지켜본다. (물론 기질이거나 습관일 수도 있다는 점은 고려한다.) 그리고 첫 번째 원칙을 기억한다. 거품이 아니라 진짜 실력과 삶을 보고자 노력한다. 

네 번째 사람들은 조금 특이한 기준일 수 있다. 그건 바로 지나치게 어림에도 자신 만만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철저히 나의 반성에서 오는 기준이다. 나는 과거 한때 이런 꿈을 꾸었다. ‘20대 코치, 20대 멘토가 되어야지’라는. 20대에, 20대들을 코칭하고 멘토링하고 싶다는 헛된 욕망이었다. 물론 그 목표의 의도는 선했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경험을 나누고 싶고, 들려주고 싶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것이기에. 하지만 선한 의도와는 별게로, 그것은 분명 나의 조급증이었다. 서툴렀고, 어리숙했다. 아직도 깊이 반성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혜민 스님’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그 분의 말은 물론 아름답다. 분명 우리를 일깨우는 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분의 삶이 그 말을 뒷받침하는가? 다시 말해, 입이 아니라 존재로 말 하는가? 아직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낀다. 그 와는 다르게, 법륜 스님에겐 좀 더 ‘깊은 울림’을 느끼지만 말이다. 일정 기간의 삶의 경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좀 더 개인적 견해지만, 나는 깨달음도 믿지 않는다. 아니 없다고 믿는다. 젊은 나이에 깨우쳤다는 사람들도 꽤 만나봤는데,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는 이는 아직 없었다. 책 몇 천권, 몇 만권을 읽고 깨우쳤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다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그럴 때 다시 한번 삶과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행할 수 있어야, 쌓을 수 있어야 진짜 아는 것이다. 그곳까지 가기 전에 말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재앙은 시작된다. 차라리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헌신하는 엄마들, 그런 엄마를 지원하며 함께 성장하는 아빠들, 나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더 신뢰한다. 실제로 그들이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삶의 지혜는 적어도 한 생명을 살리긴 했으니까. 젊은 시절은 열매를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나이가 아니다.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히는 시기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맺을 때, 지나치게 어린, 영특한, 하지만 거만한 사람들은 좀 더 두고본다. 삶이 자연스래 그들의 스승이 될 것이기에. 퇴계 이황의 선집에 나오듯, “경솔하게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다가 끝내 아무런 성과도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기에.

마지막 사람들은 좀 더 모호하다. 그건 바로 대화하고 있지만,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앞서 말했던 것들은 모두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꽤나 직관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실수 할 가능성도 높은 영역이다. 하지만 꽤 중요하고, 또 생각보다 정확하다. 다니엘 골먼의 <포커스>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공감은 주의력에 달려있다. 상대의 느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정, 목소리 그리고 감정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을 위애서는 먼저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로 인해,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발견했다. 공감능력과 주의력, 그리고 자기인식 능력. 앞서 말했던 것들과 연관되지 않는가? 그리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주의를 쏟지 못한다. 항상 산만하다. 내가 경계하려는 사람들도 그러한 공통점이 있었다. 상대방에게, 우리의 대화에, 심지어는 자신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공감하는 척은 했지만, 나에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이는 굉장히 직관적인 영역이다. 이것만 기억하자. 말이나 논리 모든 것이 올바름에도 가끔 꺼림칙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는 GO가 아니라 STOP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영역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단순히 직관으로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맹목적이지만, 직관 없이 관계를 결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때로는 몸이 알아서 말을 할 때도 있기에. 



실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위의 모습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꼭 찍어서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준으로 삼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위의 글에는 분명 내가 있다.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총합은 바로 어린 시절의 나다. 나는 나를 경계하고자 이 글을 썼다. 내 안에 저 모습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들어있음을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반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들에게도 저러한 모습이 있었다. 결국 내 인생의 ‘관계 사고’는 결코 온전히 그들의 잘못 만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자, 공동 창조였다. 한 때 나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들을 만나지 않고, 더 좋은 더 착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건 아니다. 쉬운 답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언제나 인생은 어려운 답이 진짜 답일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의 ‘반짝임'에 반응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깃들어 있는 오만, 지적 허영, 에고, 두려움, 기만이었다. 나는 내 본모습을 그들을 통해 봤고, 공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을 통해 내 진짜 모습에 눈을 뜬 것이다. 저런 모습이 되지 않으려는 진짜 모습, 양심, 내면의 목소리. 그래서 이 리스트는 열려 있다. 이것은 더 성숙하고자 하는 나를 위한 경고이자, 경계선이다. 나는 나를 경계할 것이다. 깨어있을 것이며, 쉽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과 행동을 더 지켜볼 것이다. 삶을 꺼낼 것이고, 과장하려는 내 마음을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삶의 경험을 쌓고, 더 공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윗 글을 앞으로의 나를 위한 ‘알람’으로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결론이 여기서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진 않는다. 분명 하나의 목적이 더 있다. 나에겐 ‘그들’을 실제로 경계하고자 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다. 내가 말한 위의 행동을 반복하는, ‘양심’이 없는 ‘그들’이란 바로 ‘소시오패스’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그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한번 언급하고자 하지만, 그래서 우린 우리의 양심이 가려질 때를 잘 살피고, 정말로 양심이 없는 ‘그들’을 피해야 한다. 소시오패스와 관련해선, 책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를 참고하면 좋다. 한 가지 참고할 만한 대응법이 있다. 박홍규 교수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에 나오는 글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원시사회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젊은이가 고기를 많이 잡아 오면 그는 자기가 추장처럼 대단한 사람인 줄로 생각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자기보다 못한 걸로 알아요.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는 놈은 못 봐줍니다. 그 오만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잡아온 고기에 대해 항상 무시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가슴을 식히고 그를 예절 바르게 만들지요.” 나는 이 인디언들의 방법이 ‘그들’을 대처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이자 대응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각자가 성숙한 사회가 되어서 무분별한 욕망과 기만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그렇담 어떻게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나는 그 답이 ‘공동체, 커뮤니티’에 있다고 믿는다. 파커.j.파머의 책<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물론 홀로됨은 개인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또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영혼과 역할을 다시 결합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하다.” 나는 이 문장이 그 중요한 힌트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와 몇몇 동료들이 매월 <심톡>이란 대화 모임을 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나 스스로 누군가에게 경계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지 않는 그런 폭 넓은 연대를 만들고 가고 싶은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개인의 그리고 공동체의 온전함’이다. 그 시작은 말과 행동을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개인적인 진실한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고, 과장하려는 척하려는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인생의 경험을 빠짐없이 쌓고, 내 느낌과 직관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각자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 각박한 시대에, 최소한 관계 스트레스 만큼은 서로의 현명함으로 줄여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른 많은 분들의 지혜가 함께 모아졌으면 한다. 이러한 담론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들의 소중한 지혜도 구하고 싶다.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이 하나 있다면, 이 시행착오의 경험 뿐이니까.

마지막, 덧붙이기
사실, 지난 1년간 진행했던 심톡을 워크북으로 만들었다. 올해 초에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이었는데, 급박했던 개인적인 일들(아내의 출산을 비롯한)과 게으름의 부덕으로 인해 아직까지 못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든 생각이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였다. 완벽한 준비를 갖추지 않더라도 일단 행동하는 것. 내가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지금이라도 공유하고자 한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누구든 다운 받으실 수 있으니, 원하시는 분들은 다운 받아서 일상에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











  1. 소교의 행복코칭 2015.04.16 13:41 신고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2. 2015.04.19 00:27

    비밀댓글입니다

    • 네 안녕하세요? 재능세공사님. 저도 1인 기업에 관심이 있는지 오래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열심히 활동하시는 거 익히 알곤 있었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제가 알기론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원 출신이시죠~ 아마 중간에 연결 된 사람들이 몇명 있을 겁니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요. :)

  3. 2016.10.09 20:55

    비밀댓글입니다

4월 6일
오늘 오전에는 자유학교 디자인씽킹 수업. 리모콘을 새롭게 디자인하라는 미션을 줬는데, 꽤나 재미있었다. 문제점을 공감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토타이핑을 하는데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그 결과물도 의미있었고.  지금까지 내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 중에서 내적, 외적 만족도가 가장 높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가장 좋다. 어딘가 소속되어서 강의해야 한다면 이렇게 하진 못했을 껄. 남은 시간동안 정말 알차게 잘 만들어서 좋은 디자인씽킹 커리큘럼 완성하고 싶다. 그게 이번 4월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후 시간에는 2시간 가량 독서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올바른 생계수단에 대하여>를 읽었다. 상반기 안에 ‘아는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역시 그는 구루다. 이후에 시스템사고 프로젝트 하나 완성하고, 독서축제도 거의 마무리했다. 2시간 정도 웹서핑을 비롯한 쓸데없는 일에 쓴 것이 아쉽다. 

4월 7일
오늘은 SCM보고서를 작성하고, 오후에는 오랜만에 정희와 미팅했다.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에서 팀창업입문에 대한 궁금증까지. 즐거웠다. 무엇보다 대학생활을 막 시작하는 입장이 너무 부러웠다. 내가 만약, 지금 대학교 1학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보낼까? 분면 나의 2001년과 2002년보다는 더 잘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우선 전공을 전자공학으로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좀 더 인문적인 학과, 철학과나 사회학과 혹은 교육학과도 재미있었을 텐데. 그리고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고 더 많은 독서와, 더 많은 실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다 보면 끝이 없다. 그리고 뭐 또 그런 방황과 낭비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더 시간을 아끼려고 하고, 더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일테니. 후회는 멈추기로 하자. 미팅이 끝나고 블로그에 간단한 포스팅을 했다. 저녁에는 심미팅이 있었다. 이번 심톡의 호스트는 ‘미정쌤’이다. 개인의 이슈로 시작해서 워크샵을 함께 디자인하는 작업이 이번 심톡의 핵심인데, 그 과정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던지지만, 그 선택을 최종적으로 호스트가 하는 것! 호스트의 이슈가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해결되는 것. 그런 것들을 상상한다. 

4월 8일
오늘 오전 미팅은 동그라미 재단에서 진행되었다. 포인나인의 민희쌤, VTON의 지현쌤과 한보쌤. 그리고 심마니스쿨의 나 ㅋㅋ 그렇게 모였다. 일단 근황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결국 인간관계의 갈등과 해결로 이야기는 급진전되었다. 학교 다닐 때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가 인간관계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그걸 알았다면 학교 다닐 때 배워야 하는 과목이 바뀌어야 하는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더 온전해지고, 더 진실된 소통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성인이 되고 이렇게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텐데. 점심은 곤드레 비빔밥을 먹었다. 완전 맛있었다. 오후에는 강의안을 만들어야 한다. 대략 4개 정도의 강의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이다. 시작하자. 

4월 9일
오늘은 정읍가는 날. 날씨가 지난 주에 비해서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차갑다. 오늘 수업은 <너는 특별하단다> 자신의 강점에 대해서 인식하고, 서로의 강점을 찾아주는 수업의 마지막이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 일어나게 해서 강점을 찾아주고,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했는데. 5-6학년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느낀 점도 잘 말해 주었고. 헌데 문제는 3-4학년이다. 생각보다 너무 떠든다. 뭔가 내가 말하고 있을 때 집중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냥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단 느낌. 오늘도 3번 정도 수업을 멈추고 분위기를 무겁게 가져갔다. 즐거운 미션을 할 때는 그래도 잘 따라하는데. 그렇다고 수업 시간 내내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조금 힘들다. 특히 한 녀석이 있는데 유난히 반감을 가진 듯 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주 까지 스스로 태도에 대해서 적어오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잘 할지 모르겠다. 에효. 

4월 10일
금요일 오전은 자유학교에서의 수업. 이후엔 시스템사고를 배우러 서울크리에이티브랩으로. 오늘의 불광동 청년허브 건물은 너무 멋졌다. 벗꽃이 그렇게 만발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막상 보니 아주 아름답더라. 내일의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 4시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각자 프로젝트를 사고, 그걸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 우리 팀 <마을 만들기 A>는 4주부턴 나 말고 아무도 출석하지 않더라. 그래서 그냥 나 혼자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마무리했다. ㅋㅋㅋ 사실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되는, 강제성은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 시스템 사고도 나에게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디자인씽킹은 내가 닮아가고 싶은, 내가 배우고 싶은 영역이고, 시스템씽킹은 원래 나의 기질에 맞는 영역이란 생각. 재미있었다.  

4월 11일
토요일이다. 오늘은 오후에 바즈 나누기 체험이 있었다.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분이 소개해줘서 갔는데, 뭐랄까. 과거에 배웠던 것들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 또 다르게 보니 완전 새로웠다. 엑세스 컨쳐스니스랑 바즈에 대해서 처음 들어봤지만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바즈를 받고 나니 이완도 깊어지고, 에너지 흐름도 잘 느껴졌다. 요즘엔 명상이나 그런 것들을 잘 안 했는데, 아이들에게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도 흥미를 가지고 임하기로 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왔다 갔다 책도 읽고, 강의 준비도 하고, 하루를 아주 알차게 보냈다. 

4월 12일

일요일 오전은 언제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 때다. 하지만 오늘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평화로운 오전을 보내고 있었던 찰나, 우리 아가는 또 응가를 퍼질렀기 때문이다. 헌데 보통의 경우라면 별 문제 없었을지 모르나, 이번엔 달랐다. 새로 산 하얕고 뽀얀 매트 위에서 응가를 했고, 그 응가가 번졌고, 매트에 다 묻었다. 워낙 깔끔하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 아내는 당황했고, 그 길로 우리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오전은 그렇게 끝. 오후에는 예정된 나들이를 떠났다. 윤중로로 벗꽃 구경을 가기에는 너무 멀기에, 우린 유모차를 태우고 홍대로 향했다. 망원시장을 지나, 합정역을 지나 홍대로 걸어가는 길은 참 좋았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고, 벗꽃이 떨어지는 풍광도 멋졌다. 우린 그렇게 홍대 길목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서, 간단한 음료와 디저트를 먹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왔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외출일지 모르나, 육아에 지친 우리에겐 꿀맛같은 휴식이었다. 좋았다. 그리고 케이팝스타4 결승전을 보고, 쓰레기도 버리고, 나는 잠깐 앉아서 초서를 했다. 책을 옮겨적는 것을 이젠 시간을 짬내서 겨우 만들어 해야 하니, 참 이 시간도 고맙다. 


3월 30일
오늘은 자유학교 수업일. 나만의 강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건 참 재미있다. 오늘도 ‘가치’에 대해서 다루고, 바로 ‘5달러 프로젝트’를 건냈다. 꽤 의미있는 연결이었다고 자평한다. 수업 내용도 나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되는 수업이다. 오후에는 간단히 일 하고, 저녁에는 심마니 미팅이 있다. 요즘 일 할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한데,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고민 고민 중. 저녁에 심마니 미팅을 하는데, 또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면 내가 공감 능력이나 디자인씽킹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시오패스라는 중요한 개념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생각하면 사례들을 잘 정리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단 생각도 들다. 그리고 육아와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고 말이다. 아,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든 주제는 내 삶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구나.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데 별로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 삶의 이슈로부터 시작하는 공부가 정답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슈가 자연스런 호기심으로 연결되고, 그것에 결국 내 삶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삶을 나아가게 만들기에. 

3월 31일
나는 지금 도곡역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따 저녁에 여기 근처에서 수업이 있기도 해서, 일찍 와서 일하려고 구석에 자리잡았다. 그랬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아줌마들이다. 아, 그렇지 이 근처는 학구열에 높은 곳이었지. 아차 싶었다.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이미 음료는 주문한 뒤다. 일단 앉았다. 나는 원래 카페에 가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하지만 예외가 있다. 너무나 크게 들려올 때는 어쩔 수 없이 듣게 된다. 게다가 그 주제가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라면. 살짝 살짝 들려오는 이야기 중에 몇 가지 걸리는 단어가 있다. ‘서울대’ ‘내신’ ‘입시’ 등등. 아,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강남 학부모들인가. 선입견 때문인지 인상들도 다들 비슷해보인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집중하는지 놀라웠다. 아줌마들이 하는 이야기의 99%는 모두 자기 자식들 이야기 였다. 그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디에 관심을 갖고, 최근 무얼 하면서 놀았는지가 아니다. 누구는 몇점이고, 누구는 어디로 갔으며, 누구는 서울대를 가느니 마느니. 잠깐 잠깐 흘려 들어오는 단어들만으로도 기가 빠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우리 엄마가 이러고 있었다면 나는 지금 내가 엄마를 존경하는 만큼 존경했을까? 아닐꺼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은 다르다. 존경받기 위해선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본인이 스스로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 존경을 얻는다는 건 쉬운게 아니다. 이런 말이 있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자식 없고, 부모가 하는대로 안 하는 자식 없다’고. 그 말이 정답이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자녀들에 대해서 말하지 마시고, 본인들에 대해서 말 하시라고. 아이에게 반성하라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더 나아질 것이 없는지 자기 반성적 삶을 실천하라고.”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날이다. 나부터 그러한 부모가 되어야 겠지만 말이다. 

4월 1일
오늘은 아침부터 재원이가 난리다. 안아달라고. 침대로 갔다가, 쇼파로 갔다가, 침대로 갔다가 돌아다니며 안아줬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곤히 자는데 혼자 있음 심심한가보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부모는 죽어난다. ㅎㅎ 나는 아직 좋지만. 아내는 힘들거다. 나도 하루종일 그러면 힘들것이고. 어제 너무 늦게 들어온게 미안해서, 오전에 집에 있으면서 아내를 도왔다. 잠깐 짬을 내서 육아일기도 쓰고. 이번에 느낀 것인데, 확실히 글쓰기는 습관에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글을 쓸려고 하면 뭔가 자리를 잡고 써야 할 것 같은, 그리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이젠 그렇진 않아졌다. 그냥 쭉 써 내려가면 왠만큼 글이 된다. 잘 쓴다는 것이 아니라 많이 쓴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보면 나중에 잘 쓸 수도 있겠지. 어쨌든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와우프로젝트가 많은 도움을 준 듯 하다. 오후에 당산역 근처에서 강의가 있어서, 지금은 당산 스타벅스에 와 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홀로 있는 이 시간은 정말 금쪽 같다. 이 행복을 글로 붙잡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일 정읍 가는 날이구나. 강의 준비를 해야겠다.  

4월 2일
정읍에 가는 날이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이 날은 나에게 금쪽같은 6시간을 선사한다. 나는 버스 안에서 공부를, 글쓰기를, 생각을, 강연 준비를 한다. 아직은 없지만, 피곤하면 올라오는 길에 영화도 보고 싶다. 어쨌든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나에게 정읍에 왔다 갔다 하는 이 하루는 꽤나 좋은 충전지 역할을 한다. 오늘 초서할 책은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는 커뮤니티를 꿈꾸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심마니스쿨의 모습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나의 꿈이 되었다. 지금부터 초서를 시작하자. (…)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강점을 스스로 분석하고, 서로 간의 강점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참 잘 따라와줬다. 아쉬운 것은 내가 아이들의 발표를 못 들었다는 것. 다음 시간에 발표를 하고, 앞으로 더 나아지고 싶은 것을 사진으로 찾아보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혹은 난 말이야 등의 책을 함께 보자. 서울 올라오는 길에 ‘강신주’의 EBS초대석을 조금 봤다. 그는 말한다. 21세기 한국에서 고민했던 철학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맞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이 시기에, 이 공간에 내가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결정하는 아주 결정적인 요소다. 나중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펼쳐내기 위해선, 지금은 특수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부딪쳐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나만의 이론으로 무장해서 세상에 펼쳐 놓아야 할 것이다. 철학자는 진짜와 가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도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가 되고 싶다. 아니 되어야 한다. 

강신주 <공구함>의 비유. 일단 공구함에 다양한 공구가 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것들로 현실의 자물쇠를 따기 위해 막 써봐야 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이란 공구로 우리 사회를 설몀하기 위해 노력해본다고 치자. 그럼 이런 반응이 나온다. “아, 우리 사회의 고민이 이거 였는데, 플라톤이 이것을 보았구나!”라는. 현대 학자들의 문제는 현실이라는 텍스트를 읽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로지 과거의 텍스트들만 쳐다 볼 뿐이다. 

‘No’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의 ‘Yes’만이 의미가 있다. 
강한 예술가가, 강한 철학가, 강한 소설가가 없다. 우리나라는 남루한 사회다. 
사랑과 자유는 같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약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땐 강해진다.
자유가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자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4월 3일
금요일. 자유학교 디자인씽킹 프로젝트가 기다린다. 2팀으로 나뉘어 5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정말 다들 잘 해줬다. 한 팀은 5000원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야 가장 극대화 될까? 하다가 만두피를 사다가 포춘쿠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메시지를 넣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키워드는 ‘공감’이었다. 두번째 팀은 누군가에게 필요없는 물건을 모아서 꼭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주기로 한다. 그런데 아파트 방송으로 물건을 모으려고 했더니 막상 절차가 복잡했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전화해서 물건을 모은다. 그렇게 모든 물건에 거의 3박스 정도 되었다. 역시 3명이 모이면 불가능도 가능할 수 있었단 느낌이다. 서로 피드백을 하고, 디자인씽킹에 대한 간략한 개념만 정리했다. 최근에 내가 진행하는 수업 중에선 가장 만족스런 수업이다. 앞으로도 잘 준비해서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 마지막 3의 법칙을 보여주고 했던 피드배은 좋았다. 만약 각자에게 5000원을 주고 혼자 이 프로젝트를 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4월 4일
오늘은 5시부터 아가랑 함께 보냈다. 물론 계속 깨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침대에서 같이 껴앉고 잤다. 아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잘 잔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엄청 낑낑대로 칭얼댄다. 그렇게 2시간을 잤는데, 아가가 더운지 불편한지 울어대기 시작했다. 데리고 마루로 나갔다. 다시 배에 올리고 쓰다듬어 주었더니 코~ 하면서 잔다. 더웠나보나. 나는 그렇게 재원이를 보다가, 갑자기 행복감에 빠진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나선 좀 심심해져서 책을 읽었다. 8시가 되자 다시 운다. 이젠 정말 배가 고픈 시간이다. 그때부터 우리 하루는 시작되었다. 아내는 맘마를 먹이고,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한다. 그리고 내가 데리고 있는 동안 아내는 아침을 준비한다. 다행히 장모님이 오셔서 집안일을 더 할 수 있었다. 나는 오후에 삼성크레이티브 수업이 있어서 일찍 나왔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서 빨리 해야 한다. 

4월 5일

오늘은 오전부터 서둘렀다. 준화 결혼식에 가는 날이었기에. 아내도 축하를 할겸, 바람도 쇨겸 함께 나왔다. 그런데 확실히 아이가 있으니 준비하는 시간은 2-3배가 되더라. 나름 서둘러 갔음에도 겨우 겨우 맞춰서 도착했다. 다행히 준화는 식장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겨우 인사를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안일을 하고, 저녁에는 일을 했다. 프리랜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일을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요즘은 시간만 나면 일한다. 일이라고 해봐야. 글쓰기, 미팅, 블로그 포스팅, 강의 준비, 공부하기 정도겠지만. 그것도 따라갈려면 쉽지 않다. 


와우 스토리 연구소 팀장, 연지원 작가의 책 <어떻게 자기답게 사는가>에 대한 초서 및 끄적거림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와우 스토리 연구소 내부에서 공유되는 책이라는 점 미리 말씀 드립니다. 나중에 출간될 수도 있겠지요 :) 검은 색은 책이고, 파란 색은 제 생각입니다. 독서 축제, 시작합니다. 

프롤로그
- 천직을 자기 업으로 삼은 이들은 자기 재능과 직업을 연결한 이들이다. 그들은 만족과 경제적 안정을 모두 얻는다. 경제적 수입이 많이 않더라도 자기 일에 대한 만족도가 크다. 이들은 근면과 학습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상위 10%의 세계에 속할 수 있을까? 일하는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 천직은 일 처리의 수준이 아닌 자기이해로 이르는 영역이니까. p.2
+ 돈을 위해 일하는 것, 경력을 위해 일하는 것, 인생을 위해 일하는 것. 일하는 행위는 같지만 동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 동기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어떤가? 나는 이런 지표에 좀 예민하다. 다시 말해, 천직이 아닐 경우 많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좀 더 나다운 일을 찾기 위해 요 몇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해왔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일하는 수준으로 천직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3년 전에 내가 했던 일은 영업이고 기획이었다. 그 일을 나보다 훨씬 더 잘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천직인가? 그렇지 않다. 그냥 그 일을 잘 했던 것 뿐이다. 나 역시 그 일을 몇년 동안 더 해서 마스터했다면 어땠을까? 만족이 있었겠지만 그리 크지 않았으리란 추측이다. 지금의 삶은 내가 꿈꿔온 모습 중에선 가장 닮아 있다. 수입이 많이 않아서 오는 스트레스 이외에 일 자체만으로 오는 스트레스는 거의 없기에. 

- 천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대답을 찾은 사람들의 세계다. (…) 개인화를 위한 노력, 다시 말해 자기이해에 이르는 물음을 붙들고 하나둘 대답을 발견하면서 천직에 가까워진다.  p.2
+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위의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이렇다. ‘나는 어떤 일에서 의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일을 더 잘 하고 좋아하는가?’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을 거듭하다 보니, 지식을 쌓고, 그것들을 체계화해서 전달하고, 또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것. 나는 그런 걸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미래는 정해두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40대의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이 천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것이 더 기대된다. 뭘 하면서 살고 있을까?

- 모든 인위적인 것은 단명하나, 자연스러운 것은 오래 간다.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에 비해 자연의 생명력은 영속적이다. 오래가면 성취가 되고, 의미 있는 역사가 된다. 오래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자연스러움의 인간적 용어, 즉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p.3
+ 왜 자기답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이 아닐까. 모든 인위적인 것은 단명하나, 자연스러운 것은 오래 가기에, 그렇기에 우린 더 자기다워져야 한다. 그렇게 자신과 마찰이 적어져야 오래할 수 있고, 의미를 남길 수 있다. 어쩌면 후대에 훌륭한 유산을 남기는 사람도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오래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사람. 

-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가 뭔지 느끼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수업에 들어갔어요. 저희 아이들이 보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쉽게 알더라고요. (…)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문데, 우리 아이들에게 제일 쉬운 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는 거더라고요. 영어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다 부족하지만 그런 면에서 만족하죠.” p.7
+ 내가 좋아하는 서머힐학교! 나는 미래에 이런 학교를 만들고 싶다. 꼭 하드웨어적인 학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교 문화, 정신, 커리큘럼, 소프트웨어,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 재원이가 커서 ‘아빠는 우리나라 교육이랑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뭐했어?’라는 질문을 던질 때 부끄럽게 않게 말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 앞으로 7년 남았다. 아이들을 스스로 더 자기답게 만드는 법을 개발하자. 그 시작은 내가 더 자기다워져야겠지. 

- 학교는 우리에게 공부를 권한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학습을 방해하는 것이 학교다.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꿈을 실현하라고 말하는 세상도 실상은 개인의 자기실현을 돕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p.8
+ 이 글을 읽고 떠오른 책은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 그 책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교가 공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병원이 건강의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화도 그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과 실체를 혼돈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학교는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내가 대학원을 고민하다가 가지 않은 것도 그 신화에 저항하고 싶어서다. 무슨 공부를 하기 위해 석사, 박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그래야 지식인 인것처럼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아이고 의미없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 잘 못하면 이런 사회에서 ‘신화와 환상’만 쫓으며 달려가다가 ‘실재’를 만나서 곤두박칠 칠 수 있다. 삶은 그런 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진짜 만이 진짜를 구원할 수 있다. 

- 젊은이들의 자기철학도 희소해져간다. 젊은이들만 탓할 순 없다. 등록금 천만원 시대를 사는 대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고민하느라 자기 인생을 사유할 시간을 놓친다. 취업 준비를 하지, 자기철학의 얼개를 짜지는 않는다.  p.8
+ 내가 요즘 드는 생각은, 메트릭스는 사회에 대한 정말 완벽한 비유라는 것.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지금 사회의 모습은 가장 편한 상태이지 않을까?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사람들은 힘겹게 일어나 겨우 출근하고, 지하철에선 모두 고개를 쳐박고 웹툰을 보면서 실실대거나 자고, 저녁이 있는 삶은 커녕 주말도 없어서 노예처럼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 눈치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기 바쁜 사회. 다시 말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회란 이런 모습 아닐까. 젊은이들에게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니 쓸데없는 짓, 딴짓을 하지 않고, 딴짓을 안 하니 뭐가 좋고 뭐나 나쁜지 구분하지도 못하고. 부모님이나 친구들 의견 거스르기도 어려우니 ‘일단 직진’하고. 그렇게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산다. 무엇이 문제인지 가끔 주위를 둘러보지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을 애써 외면하고. 그들과 멀어진다. 네오는 이런 사회에서 ‘진실에의 갈망’으로 시온으로 들어오고, ‘사랑의 힘’으로 메트릭스를 넘어서고, ‘행동’으로 자신이 누구임을 자각하는데, 그 첫번째 시작은 ‘해킹’이라는 딴짓거리 다시 말해 호기심이었다. 그 최소한의 여유가 세상을 바꾼다고 나는 믿는다. 제발 대학생들에게 학비 좀 받지 말자. 이 빌어먹을 정부야. (쓰면서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교 학비를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 때문에 어떤 혜택을 받았기에. 그래서 전공을 바꿀 때 ‘미안함’이 솔직히 덜 했다. 만약 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으로 4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내가 이렇게 쉽게 전공을 포기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아, 그랬구나. 그런 부담감이 사람을 질식시키는구나. 갑자기 진심 감사하다. 부모님께)

- 김중혁은 자신만의 시간에 “소설을 썼으며, 온갖 발명품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때로는 직접 곡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시간이 많았지만, 그만큼 바빴다.” 여러분의 바쁨은 무엇을 위한 바쁨인가? 사회화에 여념이 없는 바쁨이 아니라, 자기철학을 세우는 데에 도움을 주는 바쁨이기를 바란다.  p.9
+ 그래, 이런 사람이 네오가 된다. 

1. 자신만의 길을 가라
- 확신과 회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다시 자기 길을 가면 된다. 나는 강연을 진행하면서 자기 길을 모르겠다고 답답해하는 사람들, 직관적인 선택을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 확신하지만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자기다움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말자. 자기다워질수록 인생살이가 자연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자기다움의 여정은 자기신뢰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길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결국엔 나만의 길을 찾아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p.21
+ 길에 대한 확신이 아닌, 나에 대한 확신. 그것이 정확한 답이다. 나는 교차점에 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명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전공을 때려쳤을 때, 수입이 훨씬 적어짐에도 이직을 결정할 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결정할 때 등등. (다 돈과 연관되어 있구나) 그 당시 내가 하는 한 가지 생각이 바로 ‘에라이 굶어죽지는 않겠지’였다. 정말이다. 특히 2013년, 회사를 나오고 아무 일이 없을 때 결혼을 준비했다. 경제적으론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대출을 받기도 했으니. 그 과정에서도 나는 그랬다. ‘굶어죽진 않겠지? 설마?’ 결과는 어땠을까? 결혼식으로 온 나름의 수입마저 모두 생활비로 쓰긴 했고, 약간의 대출이 있긴 했지만 굶어죽진 않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좀 나아졌다. 올해는 어떤가? 2015년 3월은 보릿고개다. 힘든 건 사실이다. 돈이 회전이 안 되기도 하고. 사실 결혼하고 생활고에서 자유로워진 적은 없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하다. 조금 씩 더 나아지고 있기에. 그리고 결국은 버텨왔기에. 뭐 일단은 버텨보자. 굶어죽지는 않겠지. 

- 20대는 원대한 이상을 추구하고 도전 정신이 살아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하다. 한 마디로 현실인식이 약하다. 반면, 중년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삶의 한계를 인식하고 페풀 줄 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원대한 이상이다. 너무 소박하게만 꿈을 꾸는 것이다.  p.26
+ 나이가 들어갈 수록 원대한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 분명히 보인다. 특히 아이가 생기고 가정을 꾸려가면서 경제적 부분에서 일정 조급함이 생기더라. 그리고 내 가정도 제대로 일구지 못하면서 꿈은 무슨.. 이란 생각도 생기더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정을 일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꿈을 일구는 것이 그 뒤의 순서가 아니라는 것. 그 둘은 각각의 다른 게임이다. 두 개의 목표를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격하면 되는 것이다. 둘 다 나에겐 중요하기에. 어떤 목표가 어떤 목표의 제약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엔 아직 젊다. 

- 집착은 일관성을 오해하여 빚어진 결과다. 집착은 의미 없는 일관성이다. (..) 일관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자신이 내뱉은 모든 말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실수와 실패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관성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진정한 성장이다. 
+ 무엇이든, 그 ‘양’이 중요하다.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외없이. 일관성이란 그 좋은 성품도 마찬가지. 지나치면 외골수가 된다. 변함없어서 좋다는 평가와 넌 맨날 똑같니라는 평가는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할 것이다. ‘원칙’은 목숨처럼 지키되, ‘응용’은 자유롭게. 그것이 정답일듯. 

- 인생살이에는 이성이 필요할 때가 많지만, 자기여행자가 인생길을 선택할 순간에는 이성을 내려놓고 직관을 따라야 한다. 이 순간 만큼은 이성이 자기여행자들의 적이 된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라. 논리적인 사유를 거치지 않은 직관이 종종 머리를 싸맨 분석보다 현명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음을 신뢰하라. (…) 당신이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직관으로 대답하고, 어떻게 그곳에 다다를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이성으로 답하면 된다. p.35
+ 그렇다. 직관에 관한 가장 훌륭한 분석이다. 역쉬 팀장님. 내가 왜 이렇게 말 하냐면, 예전에 직관을 너무 맹신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직관을 언급한 것을 올바른 맥락이었다. 현대 사회의 그 갑갑한 삶을 사는 사람들. 몸이나 가슴이 아닌 오로지 머리로만, 이성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반인들에겐 ‘직관을 듣고, 따라라’라는 메시지는 얼마나 의미 있는가. 하지만 나는 곧 그 메시지의 위험성도 함께 보게 되었다. ‘직관’이 ‘직관’이라고 스스로 말 하는가? 라는 질문. 직관 역시 언어이다. 언어는 나의 언어 기반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것 또한 나의 한계를 넘어서긴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임을 어떻게 아는가? 그 구분이 가능한가? 물론 대략 느낀을 그럴 수 있으나, 그렇기에 조심해야 한다. 나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서 직관 역시 익숙해지면 이성과 다를 바 없이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일 수도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직관’은 ‘책임’이 모호하다. 누군가에게 조언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냥 직관이 떠올랐어’ 그 말이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작을 수도 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직관에게는 책임을 돌릴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 피해를 본 사람이 따져도 그는 ‘내가 말한게 아니라 직관이 그런거야’라고 한다면? 답이 없다. 그러므로 직관 이후에는 면밀한 분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직관의 책임마저도 오롯히 자기 자신이 가져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직관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너무 쉬이 조언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지나치면 ‘직관이 옮다’ 가 아니라 '내가 옳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내는 직관에 스스로 익숙해지고 주위에서도 받아들여질 때 사이비교주가 되는 것이지. 모. 


- 나에게 있어 자기다움의 상징, 네오 - 


2. 몰입과 성찰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동기와 성격’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  p.40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요즘엔 더욱 그렇다. 나의 주의를 빨아들이는 빨판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여자들의 경우에 뷰티나 먹거리, 페션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고, 남자들의 경우 게임, 스포츠, 자동자 그런 것들이 있다. 적당히 추구하는 것은 삶의 윤활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의 속성은 끝도 없다는 것. 특히 게임은 하면 할 수록 재미있다. 내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아도 그것을 하고 있다. 이미 중독되었기에. 나도 몇번이나 빠졌었기에 잘 안다. 그래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프로게이머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걸 구분하긴 어렵다. 기차를 중간에 멈추는 것처럼 '충격적 사건' 정도가 아니면 종착역에 내려서야 ‘아, 여기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너무 늦는다. 

- 내가 정의하는 천직이란 무엇일까? 나는 천직을 이렇게 정의한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일하면서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높은 성과와 공헌을 이룰 수 있는 일’ 천직이란 ‘하늘이 내려 준 일’이라고 기억하되, 그것은 개인의 자기실현과 타인으로의 공헌을 모두 이룰 수 있도록 내려 준 것임을 명심하자.  p.43
+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자연스런 모습으로 일하면서도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은 일. 나아가 주위에서 사회와 후손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엄청난 권력과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부럽지 않지만, 자연스런 모습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이건희 회장은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이희석 팀장님은 좀 부럽다.ㅋㅋ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고 있는 일(현업)에 몰입하다가 하고 싶은 일(천직의 가능성이 있는 일)이 생기면 힘차게 도전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 choice를 통해 얻은 체험들이 selection 감각을 키워준다. (…) 그러므로 지금 당장 천직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 발견을 위한 실험을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젊은 날의 직업 선택은 selection이 아니라 choice여야 한다는 말이다. p.45
+ 하고 있는 일에서 하고 싶은 일로 뛰어들기. 맞다. 내가 아이들 교육으로 뛰어든 일이 아마 이걸 말한 것이리라. 나는 2010년-11년에 기업 교육 시장에서 영업 및 기획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이런 교육으로 진정으로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 질문. 나는 조금씩 회의가 들었다. 물론 성인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다 흘러내리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훌쩍 커있는 것처럼 성인 교육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뭐든 아까워 하는 나는 그 흘러내리는 물이 아까웠다. 특히 CEO들 모아놓고 몇 천만원 하는 특강이나 교육을 볼 때면 더 그랬다. 저런다고 저 사장이나 회장이 바뀔까?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그 물이 좀 더 어린 시절로 내려갈 수 있다면, 특히 아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말이 길어지지만, 나는 회사를 옮겼고 아이들 교육을 직접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고생길은 새롭게 열렸고, 또 다른 의미의 질문이 시작되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교육은 연령대가 중요하다는 것. 동물에는 모두 결정적 시점이 있다. 오리는 1시간, 고양이는 4주, 원숭이는 1년, 그리고 인간의 결정적 시점은 태어나서 딱 10년이라고 한다. 그렇담 당연히 CEO교육에 들어갈 돈이 육아와 보육에 사용된다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란 생각도 한다. 흘러흘러 왔다. 지금 나는 아이들과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고, 육아는 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다. 내 입장에선 기업 교육과 육아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모르지, 앞으로 10년 뒤에는 내가 육아 쪽으로 방향을 더 틀지도. 나의 질문은 바뀌지 않았지만. 

-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라. 그러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니체  p.50
+ 나에겐 회계나 그런 숫자 가지고 노는 일들이 그렇다. 공대를 나왔음에도 전혀 늘지 않았고, 오히려 고등학교에 비하면 퇴보하고 있다. 나름 수능 때 수학 2개 틀렸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수능은 참 썩었다. 내가 수학을 좀 잘 한다는 이유로 공대를 가다니. 어쨌든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의 질이 높아지겠지만, 그 일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회계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나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ㅎㅎ

- 많은 이들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 여기는 반면, 여가는 자신이 선택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롭고 가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험 결과, 일과 여가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과 그들의 실제 생활은 상당히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여가를 보내는 시간보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보냈다. 직장에서는 자신이 유능하다고 느끼고 자신감을 체험하지만, 집에 와서는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p.53
+ 생각해보면, 칙센트마하이의 ‘몰입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과업의 난이도와 나의 능력의 적절한 간격을 유지할 때 우린 자기효능감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레벨 1인 전사가 레벨 2의 스마일을 죽이러 갈 때 재미있고, 흥분이 된다. 하지만 레벨 100의 전사가 스마일을 죽이라고 하면? 당근 재미없고 의미도 없다. 집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도전 과제가 없는 곳은 효능감을 경험할 수도 없기에. 우린 우리가 레벨업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찾아서 나보다 레벨이 높은 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 경험치를 얻고 운이 좋다면 아이템도 얻는다. 

-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좋다. 멀티테스킹의 본질은 동시에 두세 가지 업무를 해내는 것(multi)이 아니라, 매우 빠르게 일을 바꾸는 것(switch)이다.  p.55
+ 일을 하고, 마무리 짓고, 잠깐 쉬기.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 그것이 성과를 높이는 방법이다. 얼마 전부터 뽀모도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계속 쓰고 싶은 좋은 방법이더라. 하나의 일을 마무리할 때 까지 다른 것은 하지 않는 것.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꺼도 90%는 가능하다. 

- 여가 시간 중 집중하고 정신을 쏟으며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거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은 여가 시간을 미리 계획하여 멋진 일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p.57
+ 반성이 되는 지점이다. 나는 거의 여가를 따로 계획하지 않는다. 나에겐 그저 책보는 것이 여가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럼에도 누군가가 기획한 여가에 참여하면 그렇게 즐겁더라.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가 아직 익숙치 못한 영역이란 뜻이다. 참고로, 작년 말에 연말 파티를 기획하고 진행한 적이 있는데 꽤나 성취감이 컸다. 즐거웠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나에게도 삶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올해는 어렵지만 내년쯤? 가족의 여가를 위한 멋진 계획을 실천해보자. 여행 떠나기!

- 몰입을 완성하는 것은 성찰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이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사고 훈련을 말한다. 몰입과 성찰의 반복은 자신을 발견하는 최적의 과정이다.  p.57
+ 삶을 깊이 사는 법.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중요한 일은 몰입해서 성과를 만들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관리한다. 몰입해서 이룬 성과는 성찰한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집중했다면 그것 또한 성찰한다. 다음에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다시 중요한 일에 몰입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면 어찌 삶을 가볍게 살 수 있을까? 


3. 점진적으로 준비하여 과정을 즐겨라. 
- 출가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충동적 출가, 우발적 출가, 그리고 점진적 출가가 그것이다. (…) 충동적 출가의 본질은 불화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 우발적 출가는 강한 끌림으로 시작된다. (…) 끌림은 들여다볼만한 감정이지만, 결정하기에는 불충분한 요소다. (…) 홧김에 관두지는 말자, 준비 없는 결정은 후회나 힘겨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일시적인 끌림에 흔들리지 말자. 성찰 없이는 자기발견의 여정이 길어진다. 인생이라는 학교는 우리가 충분히 배울 때까지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여행가는 점진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 p.62
+ 나는 충동적 출가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우발적 출가는 종종 한다. 확실히 그 선택은 단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이루지는 않더라. 후회할 일을 많이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나에게 우발적 출가는 분명히 필요한 과정이었다. 왜냐면, 강한 끌림에 내가 손을 뻗지 않았다면 내 삶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거기에.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야 그나마 나는 긴장감을 가지고 삶을 대할 수 있었다. 현명한 사람은 점진적 출가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 지금의 나는 그렇겠지만 20대의 나는 그런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그러한 끌림에 반응해서 조금씩 손을 뻗어준, 그때의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또한 순간적, 우발적 선택에 의한 실패도 경험해 봐야, 아, 이렇게 선택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배우지 않나 싶다.  

- 하루 24시간을 현업, 일상, 미래라는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누어 경영하는 것을 ‘포트폴리오 하루경영’이라 부르자. (…) 포트폴리오 하루 경영의 목표는 위험을 줄이고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24시간을 분산 투자하여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현업에 몰입하기, 일상을 관리하기, 미래를 준비하기)  p.65
+ 하루하루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기. 캬.

-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 그러니 계속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편해영 p.66
+ 이런 탁월한 비유가! 우리 아가가 떠오르면서 자연스래 공감하게 되는 비유였다. 아가를 돌보듯 일상을 관리하라. 평온한듯 보이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일상이다. 캬. 

- “당신이 대기업의 CEO라면 현재와 관련된 사업에 본부장을 두고, 미래와 관련된 사업에도 본부장을 두라.” 켄 블랜차드  p.67
+ 나는 이 미래 본부장과 현재 본부장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미래 본부장의 역할은 ‘공부’도 있지만 ‘장기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있을 텐데, 언제나 현재 본부장에게 밀린다. 닥친 일을 해나가는 것도 아직 벅차서 그런가. 현재 본부장이 좀 더 유능해져야 할 듯하고, 미래 본부장은 좀 더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듯 하다. 가장 중요한 건 과거(습관) 본부장이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걔만 다물어도 둘이 생산성을 더 늘릴 수 있다. 총 책임자인 내가 매 순간 깨어있어야 그들이 말을 잘 들을텐데. 

- 현업을 해야 할 시간에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 근무시간을 적당히 보내고 해야 할 일에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모를 수 있지만, 자신은 안다. 의무에 불성실한 태도는 우리 영혼을 잠식시킨다. (…) 자부심이 약해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작고 사소한 일상의 일들에서 자기 영혼을 속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p.69
+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게 나에게 즉각 영향이 온다. 나는 그 경우가 심하다. 지난 2학기가 그랬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분명 일은 잘 진행되었지만 나는 삶의 만족도를 잃어버렸다.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 2학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 “안내 데스크 직에 종사를 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여섯시에 칼 퇴근하고 쉬는 시간도 있어 글쓰기 좋은 조건이에요. 쉬는 시간에 틈틈이, 퇴근 후에는 근처 카페에 들러 글을 씁니다. 직장에 다니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글쓰기에 도움이 되고요.” 이것이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모습이다.  p.72
+ 짱인데? 탁월하다. 안경수리공 대철학자 스피노자가 생각난다. 

- 포트폴리오 하루경영은 결국 실천의 문제다. <필살기>에서 구본형 선생님 실천을 멋지게 표현했다. “전략은 온갖 치장으로 늘 요란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실천은 늘 간단하고 명료하다. Just do it! 이게 전부다. 그러나 늘 어렵다. 매일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다가 그만두기 때문이다. (..) 실천은 간단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필사적으로 실행하라. 매일의 힘을 빌리지 못하면 누구도 꿈을 이룰 수 없다.” (…) 하루하루가 모일 때 그것은 성과가 되고 의미가 된다. 멀찌감치 떨어진 하루하루라면 에너지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버리지만, 촘촘히 붙은 하루라면 탄력이 붙고 힘이 모아진다. 그래서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하다.  p.73
+ 매일의 힘은 복리와 같다. 복리는 지속성에 그 비밀이 있다. 예전에 봤었는데, 복리로 인해 예상되는 결과에서 한 두번이라도 빠지면 최종 수익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무슨 말이냐면, 매일 매일 하다가 한 두번이라도 안 하면 최종 지점에서 성과는 극명하게 다르다는 뜻이다. 멋진 말이기도, 두려운 말이기도 하다. 

- 대가들은 반드시 자신만의 구별된 시간을 가졌다. 대가들이게도 조용한 시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시간을 가졌기에 대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대가들이 개인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공간을 가졌다.  p.76
+ 요즘 나에게 많이 없어진 것. 개인 공간. 

4. 두려움에 맞서 시행착오를 경영하라. 
- 타석에 서야 홈런을 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석에 서기를 꺼린다. 홈런을 친다는 보장이 있다면 누구나 타석에 쉽게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 타석에 서지 않으면 홈런을 치지 못하긴 하지만, 실패할 일도 없어진다.  p.82
+ 가능성 앞에 서는 것이 생각보다 무섭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나 수업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뭔가 말하기를 주저하진 않지만, 조금의 의구심만 있어도 나는 나를 알리지 않는다. 특히 이런 일을 하려면 다양한 사람들도 찾아가고, 교육 행사도 같이 열고, 적극적으로 포스팅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영 그러지 않는다. 아마 절반은 내가 가진 ‘약간은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일 것이고, 절반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듯. 지난 번 김제동의 강의에서 말한 것을 잊지말자. 나에겐 고백할 권리가 있고, 그녀에겐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고백하라. 고백하면 당신의 고민은 그녀의 것이 되지만, 하지 않으면 당신의 고민은 오롯이 당신의 것이기에. 

- 현명한 자기여행자들은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까?”하고 묻지 않는다. (..) 그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배울 수 있을까?”하고 묻는다. 배울 수 있다면 실패도 마다하지 않는다. 140개 이상의 특허를 지닌 찰스 케터링의 말을 기억하자.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시도하고 실패하고 나서 다시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p.84
+ <어떻게 하면 빨리 배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핵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학습했던 방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내 경험상, 빨리 배우는 방법은 무언가 시도하고 망하는 것이다. 작게 망할 수록 더 현명하게 배우고, 크게 망하면 많이 배우긴 하지만 좀 슬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더 현명하게 배우는 법을 체득하고 있단 뜻이니라. 그리고 빨리 배우는 2번째 방법은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 쌓일 때 내면에 가득차는 자신감은 대단하다. 그 자신감이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한다. 작년에는 ‘심톡’을 꾸준히 매월마다 개최하고, 연말에 ‘심파티’를 개최하면서 그 경험을 했고, 올해는 심톡과 와우 프로젝트가 나의 지속성의 실험소가 될 듯 하다. 

-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은 좀 더 활용하기 쉬운 개념으로 시행착오를 “어떠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수정해 나감으로써 점차 최적의 방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쏜다이크는 시행착오의 반복을 연습이라고 하였으며, 시행착오를 학습의 기본과정이라고 말했다.  p.93
+ 시행착오를 공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듯 하다. ‘시행착오 = 실천 + 성찰’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시행착오 + 체득 = 인생의 성공’ 무언가를 실천하고, 그 과정을 성찰함으로써 최적의 방법을 찾고. 그러한 ‘시행착오 프로세스'를 몸으로 체득하게 되면 그게 바로 인생의 성공이 아닐까. 어떤 위기나 고난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사람일테니. 

- 우리가 도전한 모든 일든은 세 개의 바구니에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성공의 바구니다. 어떤 일에 도전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일들을 담는 바구니다.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의 바구니다. 힘차게 도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일들을 담는 바구니다. 좋지 않은 결과라도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결과까지 얻어냈다면 여기에 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실패의 바구니다. 생각은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담긴 바구니다. 여러분은 어떤 바구니가 채워져 있는가?  p.94
+ 생각은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나에게도 많다. 요즘에야 조금 나아지고 있다지만, 그 ‘미룸’의 뿌리는 워낙 깊어서. 올해를 기점으로 좀 더 자주 시도하고, 부딪치는 모습을 갖고 싶다. 그래도 대략 1년 전에 비해  글쓰기가 주저하지 않아진 모습은 내가 스스로 칭찬하는 부분이다. 그냥 주절주절 하는 재미가 들었다고 할까? 독서축제를 하면서도 나름의 주절거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하핫.



5. 완벽을 찾지 말고 현재를 잡아라. 
- 인생은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으로의 여정이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자기실현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우리를 이 모든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더 완벽한 것을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온전해지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보다 온전해지도록 도와주자. p.102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온전함’이다. 20대에 나는 ‘자유’를 골랐었는데 조금 달라졌다. 온전해지는 것, 자기다워 지는 것, 그리고 자기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 것. 그게 가장 신나고 재미있고 나를 자유롭게 한다. 

- 영감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계적인 글쓰기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도 완벽주의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완성한 원고를 반복해서 검토하느라 탈고를 무한정 미뤘던 것이다 (…) 그러다가 2011년 1월, 내게 감당 못할 불행이 닥쳤다.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통째로 유실한 것이다.  p.103
+ 아이고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나도 몇 달 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 노트북을 교채하는 과정에서 모든 데이터를 옮기는데 하나의 폴더만 옮겨지지 않았다. 헌데, 하필이면 그 폴더에 내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결과들, 개인 기록들, 스터디 강의안들이 다 들어있었지 뭐야. 모든 자료가 날라간 것은 아니기에 감할 못할 불행은 아니지만, 꽤나 상심이 컸다. 검색했을 때 나오던 자료들이 이젠 나오지 않을 때 그 상심이란.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하나 배운 것은 있다. 그건 바로, ‘과거에 공부했던 흔적’에 더 이상 기대지 말라는 것. 그건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였다. 나는 예전에 내가 공부했던 모습들에 기대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공부했네’라면서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던 것. 공부는 끝이 없고, 내가 배워야 할 것들도 끝이 없는데 고작 몇년 공부했던 자료에 의지하고 있었다니.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삶이 나에게 앞으로 더 가열차게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이런 일을 벌였구나. 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그렇게라고 생각해야 위로가 되기도 했고. ㅎㅎ 하지만 팀장님 수준의 사건은 단기간 회복이 어려울 듯 하다. 조만간 백업해야 겠다.ㅜㅠ

- 나에게 완벽은, 탁월함을 한껏 추구하다가 하늘의 운이 닿아 만들어지는 경지다. 분명 완벽은 아주 좋은 것이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완벽과 완벽주의의 관계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다. (…) 권위는 남을 따르게 하는 인격적이고 자연스러운 힘이다. 막스 베버는 권력은 강제로 얻을 수 있지만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했다. 권위는 좋은 것이지만, 권위주의자가 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없는 사람이 나이, 신분, 성별 등으로 권위를 억지로 취하려 하는 태도다.  p.105
+  권위를 가지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고, 권위주의를 가지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건, 본질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그걸 가지기 위한 노력은 하기 싫을 때 ‘~척’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권위를 가지기 위해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그런 신뢰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연스래 권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달콤한 결과만을 원한다.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는 그것! 그래서 다른 이상한 것들을 들고 나온다. 나이, 신분, 성별, 회사, 돈 등. 그렇게 ‘-척’하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시간이 지나서 부작용을 낳으면서 몰락한다. 

- 완벽주의가 근면, 높은 기준, 시간 엄수, 청결, 단정함, 도덕성에 도움을 주는가 하면 우유부단함, 미루기, 강박 행동,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에 빠진 이들은 자신과 동일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p.107
+ 아까 말했던 부작용들이다. 나도 가지고 있는 것들, 특히 미루기나 우유부단함은 참 만성적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결과를 내는 편도 아닌데 쓸데 없이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 완벽주의에 관한 선도적인 두 학자, 고든 플렛과 폴 휴잇은 “해로운 완벽주의 - 적당주의 - 건강한 완벽주의”라는 3가지의 스펙트럼으로 완벽주의의 성숙도를 설명했다.  p.110
+ 완벽주의도 결국 정반합이구나. 중용이란 개념은 언제나 옳다. 

- 완벽주의가 발동하여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셀프 스타터의 전원을 키면 된다. 그것은 다음의 한 문장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지금 곧 시작하라!”  p.115
+ 책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에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문장이다."작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는 별개이다. 몽상가는 꿈을 꾸고 작가는 글을 쓴다. 글쓰기를 꿈꾸는 것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쓰기를 생각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멋진 스토리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흥분하거나, 머릿속으로 책을 몇 권씩 구상하거나, 글쓰기에 대한 무수한 책을 읽는 것, 그 어떤 것도 글쓰기 행위가 아니다.” 요즘 내가 하는 실험은 일기다. 다만 몇 문장으로 구성된 글이지만 매일 쓰는 힘을 경험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끄적끄적 거린다. ㅎㅎ 

- 2002년 2월, 나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책 집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대하는 저자로서의 모든 자격을 갖춘 후에 글을 쓰려면 나는 평생 책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썼던 원고들은 출간할 수준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수년 후 내가 다니던 회사의 웹진의 초고가 되어 주었다.  p.115
+ 이제 나도 책을 쓰기 시작할까? 구상하고 있는 내용은 있는데 말이다. 허긴, 생각으로 책을 썼다면 벌써 전집은 만들었겠지. 책을 써볼까? 라는 질문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지금 책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이다. 지금 책을 쓸 것인가? 네. 아마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결과물도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책을 쓰지 않으면 책은 써지지 않는다. 완벽주의의 덫을 뿌리치고, 지금 책을 쓴다. 깔끔한 질문이다. "지금 쓸 것이냐?" 

에필로그
- 아리스토텔리스에 따르면 최고의 용기는 “희망과는 무관”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헤라클레스보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물러서지 않는 헥토르의 모습이 진정한 용기에 가깝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넵! 


2015년은 2014년 보다 더 나아지고 있다. 일이나 벌이에 대한 부분이 아니다. 사실 그건 작년보다 못하다. 뭐 앞으론 좀 더 나아지겠지만. 내가 말하는 '나아지고 있음'은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 대한 것이다. 일상의 만족도가 더 높아졌던 이야기다. 그리고 나에겐 그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다룰 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충실히 일상을 보내다 보면 더 좋은 결과도 맺게 되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3월은 의미있었다. 


4월부턴 좀 더 바쁘다. 24번의 강의가 있다. 그런데 거의 모두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강의들이 막 생겨나고, 준비할 것도 많다. 시간이 빠듯하다. 그럴 때 일수록 더 자주 성찰하고, 실천해야 한다. 시간에 휩쓸리지 말고 의도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만들자. 이 글은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고, 관리하기 위함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자. 2015년 4월 강연일정은 다음과 같다. 



1. 

 언제

무엇을  

어디서 누구와

 4월 1일

 당산서중 디자인씽킹 수업 1차시

 서울 당산서중학교 (2-3학년 20명) 2시간

 4월 2일 

 창의인성 수업 5차시 

 정읍 칠보초등학교 (3-6학년 40명) 4시간

 4월 3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4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4일

 별꿈별일 3차시  

 삼성크리에이티브멤버십 (유스반 20명) 3시간

 4월 6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5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9일

 창의인성 수업 6차시 

 정읍 칠보초등학교 (3-6학년 40명) 4시간

 4월 10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6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13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7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13일 

 용마중 디자인씽킹 수업 1차시

 서울 용마중학교 (1-2학년 20명) 2시간


2.

 언제

무엇을  

어디서 누구와

 4월 14일

 검단초 비경쟁 독서 토론 

 성남 검단초등학교 (4학년) 3시간

 4월 15일

 당산서중 디자인씽킹 수업 2차시

 서울 당산서중학교 (2-3학년 20명) 2시간 

 4월 16일

 창의인성 수업 7차시 

 정읍 칠보초등학교 (3-6학년 40명) 4시간

 4월 17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8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18일

 별꿈별일 4차시

 삼성크리에이티브멤버십 (유스반 20명) 3시간

 4월 20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9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20일

 용마중 디자인씽킹 수업 2차시

 서울 용마중학교 (1-2학년 20명) 2시간

 4월 21일

 검단초 비경쟁 독서 토론 

 성남 검단초등학교 (4학년) 3시간

 4월 23일

 창의인성 수업 8차시 

 정읍 칠보초등학교 (3-6학년 40명) 4시간 


3.

 언제

무엇을  

어디서 누구와

 4월 24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10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27일

 영체인지메이커 스쿨 11차시

 고양 자유학교 (10학년 6명) 3시간

 4월 27일

 용마중 디자인씽킹 수업 3차시

 서울 용마중학교 (1-2학년 20명) 2시간

 4월 28일

 검단초 비경쟁 독서 토론 

 성남 검단초등학교 (4학년) 3시간

 4월 28일

 온전함을 위한 대화, 심톡!

 합정 허그인 (미정) 3시간

 4월 30일

 창의인성 수업 9차시 

 정읍 칠보초등학교 (3-6학년 40명) 4시간 

 

 

 

 

 

 

 

 





재원이는 나를 닮았다. 
재원이는 이제 5키로를 넘어섰다. 태어난지 2달이 넘었고, 엄청난 속도로 크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원래 작게 태어난 아이들이 모유 수유를 통해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든 엄청나게 잘 크고 있다. 태어날 때 그 작던 아기를 생각해보면 너무 감사하게도. 이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자. 눈은 추욱 쳐진 것이 꼭 나를 닮았다. 선하게 보인다는 장점과 사기 당하기 좋게 생겼다는 단점을 가진 ‘쳐진 눈’이다. 속쌍커풀은 살짝 있는 것 같다. 특히 왼쪽에 더 짙게 있어서, 왼쪽 눈이 상대적으로 더 커 보인다. 이 또한 나를 닮았다. 나도 눈이 짝짝인데, 왼쪽 눈이 더 크다. 눈썹은 정말 길다. 여자처럼 길어서 눈을 감으면 놀랄 때가 많다. 그 다음에 머리통을 보자. 머리통은 완벽한 앞, 뒷 짱구다. 여기까지도 나의 판박이다. 뒷 머리가 툭 튀어나와서 똑바로 누워있는걸 힘들어 한다. 자꾸 한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짱구배게를 사줬다. 누군가에겐 뒷통수를 동그랗게 만들고자 함이지만, 우리는 그저 똑바로 누워서 자게 할 목적이다. 나의 경우, 아직도 높은 배게는 힘들다. 잠도 거의 옆으로 누워잔다. 그게 더 편하다. 우리 재원이도 그럴 것 같다. 코를 보면 나름 오똑하다. 재원이가 갓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하던 가장 많은 피드백이 바로 ‘콧대가 높다’는 말이었다. 동양 쪽 특히 우리나라 아기들은 태어날 때 콧대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재원이는 작게 태어났음에도 코가 높았다. 그래서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가랑 같이 코끝을 비비는 걸 좋아하는데, 내 코를 재원이 코끝에 톡톡 간지럽히면 참 기분이 좋다. 코는 누구 닮았나 모르겠다. 아내도 나도 비슷하다.

재원이는 아내도 닮았다.
입은 아내를 닮았다. 아내의 입은 약간 ‘참새’입이라고 해야하나, 윗 입술이 아랫 입술에 비해 쏙 튀어나왔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입술이다. 그런데 재원이도 그렇다. 배고플 때 쩝쩝 거리면서 입술을 오무렸다 펼 때 너무 귀엽다. 참새같은 입술. 그리고 볼살과 턱살은 지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믿고 싶다. 딱 떠오르는 캐릭터는 바로 ‘놀부’다. 아니 ‘아기 놀부’가 되겠지. 엄청난 볼살과 3겹 정도는 되어 보이는 턱살은 놀부 정도말고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 나중에 다 키로 갈거라 믿는다. 아니, 믿어야 한다. 나는 부모니까. 마지막으로 귀. 사람들이 재원이 귀가 크단 이야기도 많이 했다. 키가 크면 복이 많다는데, 정말 그렇겠지? 내가 보기에도 귀는 잘 생겼다. 무엇보다 귀는 말랑말랑해서 내가 참 좋아한다. 귓살이 부드럽고 말랑해서 귓가에 속살일 때 그 느낌이 너무 좋다. 또 어떤 부분이 있을까. 손과 발은 모든 아기가 그렇겠지만, 참 작고 귀엽다. 특히 손이 이쁜데, 여자 손처럼 가늘고 길다. 색깔도 하얗고. 손톱이 자주 자라는 편이라 나를 껴앉을 때 꽤 아프다. 토실토실한 손에 내 손가락을 끼우면 요즘은 곧잘 잡는다. 그럼 같이 쎄쎄쎄 하면서 논다. 지금 아가는 엄마와 함께 있다. 엄마한테 달라 붙어서 맘마를 먹는 중인데, 뒷모습이 동그랗게 보인다. 떠오르는 건 ‘비엔나 소세지’다. 자꾸 이런게 생각나서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모습은 아주 큰 소세지 같다. 동글동글하고 탐스러운 녀석. 킹킹 대면서 밥을 먹는 모습이 참 애처럽고 대견하다. 갑자기 어른처럼 방구 뿡뿡 뀔 때는 아직 적응이 안 되지만. 

애착육아란 무엇일까

재원이는 이제 태어난지 70일이 되었다. 안아주면 안 울고, 혼자 있으면 우는, 소위 말해서 어른들이 ‘손 탄다’라고 말하는 시점이다. 사실 재원이는 이미 손이 탔다. 우리가 안고 있으면 천사처럼 조용하지만, 혼자 있으면 기차처럼 운다. 아내가 그래서 많이 힘들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니까. 하지만 잘 해나가고 있다. 내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진 철학이 맞다고 믿는다. 아이는 손을 타야 한다. 아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엄마의 냄새를 맡고, 몸을 부대끼고, 연결되면서 자연스래 애착이 생기고, 안정감도 생기기라 믿는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절대 시간’이다. 이러한 애착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져선 안 된다. 아웃소싱은 금물이다. 부모가 직접 아이와 맺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급적 나도 많이 안으려 한다. (아내에겐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하루 3시간 엄마 냄새>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식이 심리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은 부모의 간절한 기도이자 모든 양육의 종착점이다. 이 기도가 완성되려면 아기가 어렸을 때 애착이 견고해야 한다. (…) 애착이 심하게 불안정하거나 아예 애착이 형성되지 않으면 마음이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해 건강한 줄기를 뻗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격과 정서에 문제가 생겨 삶이 위태로워진다.” 이 말에 동의한다. 앞으로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이다. 결정적 시기임을 부모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듯 하다. 돈도 중요하고, 커리어도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생명, 한 사람을 오롯히 키워내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가장 가치있게 대하는 것. 그 마음가짐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재원이는 지금 엄마 허벅지에 매달려 곤히 뻗어있고, 아내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이제 식사 준비하러 가야겠다. 


  1. aquaplanet 2015.04.02 13:53 신고

    ㅎㅎ 글을 재밌게 잘 쓰시네요 :)
    아가랑 항상 행복하세요~!

3월 23일
요즘 카페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 일상을 살고,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고 있는지라. 손에 익어가고 있다. 21일과 22일 일기를 마무리했다. 이제 몸은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다시 심해지는게 감기라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전에 자유학교 10학년 수업은 잘 마쳤다. 즐거웠다. 무엇보다 수업 의도가 심플했고, 그 의도에 맞춰서 진행되었던게 즐거웠다. 복잡한 의도는 언제나 실패한다. 단순하게 가자.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장점을 서로를 통해 인식하게 하고, 내가 앞으로 가졌으면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서로를 통해 일깨워주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그리 단순한 작업만은 아니다. 하지만 다들 서로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잘 해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소규모 수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친밀함과 안정감이 마음에 들었고. 어쨌든 요약하자면 즐거웠던 시간!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서 감기약을 타서 지금은 스벅이다. 나의 사무실 ㅎㅎ 5시 미팅 전까지 보고서 작성하자. 저녁에는 심톡. 이번에는 처음으로 지현쌤이 호스트로 진행을 해주셨는데,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름의 삶과 관점을 나누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매달 이런 식으로 새로운 주제와 호스트를 발굴하고 싶단 생각도 했고. 하하. 2015년 심톡은 계속 잘 진핼될 듯 하다!

3월 24일
아직 몸살이 다 낫지 않았다. 하지만 토요일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상태. 아침에는 재원이 병원을 가야했다. 목욕도 시키고, 아침도 먹고, 포대기에 싸서 근처 소아과로 갔다. 갔더니 너무너무 잘 크고 있다고 하신다. 오히려 체중과다를 걱정해야 할 정도. 모자라서 문제지 넘치는 건 뭐 그리 문젤까. 기분이 좋았다. 주사 두방을 허벅지에 맞고 으앙 울던 재원이는 어느새 안고 집에 오는 길에 잠이 들었다. 집에 와서 밥먹고 오후에는 검단초를 잠깐 방문했다. 토론 교사 계약서 작성 때문에. 작년에 인연이 되었는데 올해도 1년에 걸쳐서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 믿고 맡겨주심에 감사하다. 왔다 갔다 하고 나니 벌써 5시. 집에 와선 재원이를 안고 좀 잤다. 나도 피곤하고 아내도 피곤하고. 푹 자고 일어나서 저녁먹고, 집안일 좀 하고, 잠도 재우고 하니 벌써 12시. 하루가 이렇게 갈 수도 있구나. 그래도 아내가 주말에 이어 계속 힘들어했는데 도와줘서 다행이다. 낼은 위플래쉬 보고 다시 충전해야지!

3월 25일
위플래쉬를 보고. 아내님의 무한한 아량과 배려 덕분에 지난 번 <킹스맨>에 이어서 또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평일 아침에 조조로 혼자 가서 보는 영화감상이란, 직장인들은 꿈도 못 꿀 호사다. 나도 직장 다닐 때는 그랬고. 위플래쉬에 대한 워낙 높은 관심들과 극찬의 리뷰를 미리 봐서인지, 음악적 두뇌가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처럼 기립박수가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렬한 비트와 메시지는 분명 내 머릿 속에 하나의 자취를 남겼는데, 이는 위플래쉬가 ‘가볍게 지나갈 만한 영화’도 아님을 말한다. 내가 ‘듣고 느낀’ 위플래쉬를 3가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재즈의 매력! 재즈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느낌을 남겼고 2) 탁월함과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겼으며 3) 두 주인공의 미친 광기를 내 삶에서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도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플레쳐 교수의 교수법과 인성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탁월함의 수준은 동의했기에 꽤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막판 10분쯤 보이는 미친 인생 연주는 두고두고 남을 것 같은 느낌. 

오늘 광화문에서 있었던 일. 하나 더. 묘목을 나눠주는 행사였던 것 같다. 사람들 몇 백명이 쭈욱 길을 서 있었다. 마지막에 새롭게 줄을 서려는 사람이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거 뭐 나눠주는 거에요? 그랬더니 앞 사람이 이랬다. 글쎄요. 저도 몰라요 막 줄 서서. 지나가는 길에 스쳐 들은 대화였지만 정말 흥미진진한 대화였다. 우리나라가 이 대화에 담겨 있었다고 본다. 무슨 이야기냐?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인데, 일단 줄이 길면 그 줄에 선다. 그리고 물어본다. 뭐 주는지?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특징과 유사한데, 일단 줄이 긴 과에 들어간다. 예를 들면 의대나 법대. 그리고 물어본다. 어떤 전공인지? 이는 우리나라 취준생들의 특징과 유사한데, 일단 줄이 긴 회사에 들어간다. 예를 들면 삼성. 그리고 물어본다. 무슨 일 하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자신의 선택이 된다. 그것이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선택을 내리는지도 잘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이 줄이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선 줄이 맞는가? 이 줄 끝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거 맞는가? 만약 중간에라도 그 줄이 아니라면 나는 이 줄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을 했던 짧은 일상이었다. 

3월 26일
오늘은 정읍에 가는 날이다. 칠보초 가는 길은 그나마 내가 일주일 중에서 가장 ‘나만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올라오는 길은 피곤해서 잘 활용하지 못하는 편인데, 내려가는 길은 확실히 오전이라 잘 쓴다. 오늘은 이번 주 와우 수업축제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칠보초 수업은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주제로 진행했는데, ‘특별함’에 대해서 다루기 위해서 <미션 임파서블>을 준비했다. 내가 워낙 즐겨쓰는 프로그램이라 아이들 반응은 좋았는데, 앞으로는 계속 걱정이다. 허긴 어쩌면 새로운 실험을 하기에는 최고의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실험소이기도 하고. 다양한 협동학습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가서 실험하고, 아이들의 성장을 일구어나갔으면 한다.  

3월 27일
오늘 오전은 자유학교에서 수업이 있었다. 팀을 꾸리고, 배움에 대해서 간략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던 시간. 던지는 건 많이 던졌고, 앞으론 내가 어떻게 하냐에 달렸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좋다. 별명도 좋고. 사실 하나인학교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작년에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다. 오후에는 소셜크리에이티브랩에 왔다. 시스템 사고도 참 매력있는 듯. 복잡계 공부도 꾸준하게 하자. 흐름을 끊기지 말자. 

3월 28일
오늘은 와우수업이 있는 날. 하루 종일 수업에 몰두한 날이다. 자세한 내용은 수업 리뷰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패스!

3월 29일
오랜만의 일요일. 오늘은 정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가정에 충실했다. 재원이 보고, 청소하고, 바닥도 닦고, 설거지도 하고, 재원이 응가 치우고, 재우고, 쓰레기도 비우고, 창문틀도 닦고 등등. 육아와 집안일을 평소에 해내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다들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대충 청소가 다 마무리 되니까 4시 정도 되더라. 집안일은 끝이 없다. 5시부턴 내가 유일하게 보는 티비 프로그램, 케이팝스타. 원래 무한도전을 빼먹지 않고 보는 무도빠였지만, 물론 지금도 무도빠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시간 관계상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케이팝스타는 시간대가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챙겨보는데 참 재미있다. 심사의원들 멘트 중에서도 귀 기울릴 만한 것도 많고. 물론 무시해야 하는 말들도 많지만. 그렇게 잠깐 보고, 저녁 먹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잘 시간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는 이리도 빠르다. 





이 책의 의미

- 나는 종종 평생학습관을 간다.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과 '자극'이 된다. 지난 겨울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머물 예정으로 마포구 평생학습관을 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책과 인터넷 강의 그리고 문제집과 싸우고 있었다. 나도 차분히 앉아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은 낯설게.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아,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 이게 왠말인가. 공부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니. 하지만 나는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그때 받은 느낌은 뭐랄까.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때 공부하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평생학습관에 모인 사람들 열 중의 아홉은 모두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예비 선생님, 민법을 공부하는 사법고시 준비생, 문제집을 푸는 고등학생, 토익을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은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명한 목적'와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책들을 들척이는 몇몇 할아버지들이 보일 뿐.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번 귀기울여 보자.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학교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 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노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 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 교회 간다고 영혼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고. 학교 간다고 지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면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일리히는 그것을 콕 찍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학교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단의 왕국’을 조심하라고. 우리는 ‘목적의 왕국’을 만들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눈에 보이는 제도화가 될 때 우린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번 평생학습관에서 이반 일리히가 말하는 '가치의 제도화'가 낳는 폐혜를 보았던 것이다. '학습과 배움'이라는 가치가 '학교와 시험'이라는 제도로 치환되면서 어쩌면 우리는 본래의 '학습과 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모두가 학습하고 있지만 학습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는, 배움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슬픈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한 단편이었다. 

핵심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곳인가, 인간을 타율화 시키는 곳인가? 


옮겨적기
- 교육기회의 평등화란 사실 바람직한 것이고 동시에 실현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이를 강제적 학교화와 동일시함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 권리헌장 1조는 “국가는 교육의 확립에 관한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로 규정돼야 한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적 의무는 허용될 수 없다. (…)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시민을 보호해야만 비로서 헌법상 학교의 비국가화가 심리적으로 유효하게 된다. P. 39
+ 우리는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그 반대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 대부분의 기능은 반복훈련에 의해 습득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 그러나 기능을 탐구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교육은 반복훈련에 의존할 수 없다. 교육이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런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반복훈련에 반대되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가 축적해온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교육은 의존한다. (…)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정의한 문제를 둘러싸고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이고 탐구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같은 말이나 문제에 대해 동시에 고민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51
+ 교육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교과서에? 칠판에? 교사에? 인터넷에? 교육은 공동체 사이에 존재한다. 교육은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정당, 교회, 노동조합, 클럽, 마을센터는 이미 그들의 교육활동을 조직하고, 그것은 학교로 활동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미리 짜인 강의, 세미나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에 의한 사람들의 연결은 당연히 교사중심적이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한 형태로 책, 영화 등의 제목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경우, 특수한 언어와 용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문제나 사실을 서술하는 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저자에 따르면 되고, 이는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즉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 몇이 선택한 ‘고전 읽기’와 달리, 두 사람의 동료는 그 어떤 책이라도 더욱 깊은 분석을 위해 선택할 수 있다. 54
+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순수한 형태로 학습 모임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당연히 학습자 중심 학습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학습이 잘 일어나는 배경도 바로 그것이다. '자발성' '같은 주제' 그리고 '다양한 참가자' 이렇게 한다면 어찌 배움이 재미없을 수가 있을까?

- 시카고에 사는 나의 흑인 친구는 참된 교육을 하는 사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의 상상력이 ‘완전히 학교화된 것’이라고 훌륭하게 정의했다. 61
+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 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 없이, 가끔은 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배운다. 가장 비극적인 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전혀 학교에 ‘가지’ 않음에도 학교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 밖에서 배운다. 우리는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고, 놀고, 저주하고, 정치하고, 일하는 것을 배운다. 72-73

+ 나는 이 정도로 급진적인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존재한다. 필요한 배움도 있고. 중요한 것은 '지나친 학교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이 나는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학교 자체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기에. 

- 학교는 초중고라는 연속되는 게임에서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 학위는 언제나 그 소비자의 이력에 불변의 가격표로 남는다. 학위를 가진 대학교 졸업생은 그들 머리에 가격표를 달고 다니는 세계에만 적합하고, 그것에 의해 그들 사회에서 기대수준을 정의하는 권력을 부여받는다. 각국에서 대학교 졸업자의 소비량이 다른 사람들의 표준을 결정한다. 즉, 직업 유무와 관계없이 문명화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대학교 졸업자의 생활방식을 동경하게 된다. 이처럼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82-83

- 학교는 또한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 (…) 학교는 우리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 우리는 학교에서, 가치 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있다. 88
+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 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도 재미있는 통찰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학교의 서열화가 모든 사회의 서열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리고 학교는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사회는 더욱 굳건해지고, 빈곤층은 악순환에 빠져든다. 학교의 역할은 '배움'이 아닌,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회가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한 담론은 이미 저 뒤로 밀려나버린지 오래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세 가지 목적을 가져야 한다. 첫째, 공부하기를 원하는 모두에게 그 나이에 관계없이 필요하나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그로부터 배우고자 원하는 사람을 찾게 해주어야 한다. 셋째, 공중에게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도전을 알릴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 공부하는 사람은 강제적 교육과정에 복종하도록 강요되거나, 자격증이나 졸업장 소유에 의해 차별되도록 강요돼서도 안 된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따라서 완벽하게 교육적인 자유로운 언론, 자유로운 집회, 자유로운 보도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150-152
+ 상당히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공부하기를 원하는 누구가 공부할 수 있고, 그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자유롭게 알려질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일 것이다. MOOC나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학습모임들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비주류에 불과하다. 이것이 기존 교육체제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널리 증명될 수 있다면 '교육 개혁'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하다. 

- 최악의 학교 수업은 학생을 한 방에 모아놓고 수학과 사회 및 철자를 똑같은 순서로 가르치는 것이다. 최선의 학교 수업은 학생 각자에게 제한된 과정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여하튼 동료 집단이 교사의 목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바람직한 교육 제도는 각자에게 그가 동료를 찾는 활동을 특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에게 그들의 가정을 떠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178
+ 칸 아카데미가 생각난다. 예전에 적었었는데. 어디더라. 심마니스쿨 블로그였나. 
링크 걸어둡니다. 책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여기서부턴, 일리히의 주장에 대한 옮긴이의 생각들입니다. 

- 공부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걷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가용이나 병원에 의해 타율화됐듯이 우리의 모든 고유한 능력이 타율화돼 사회 자체를 자율적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 역사로 보면 그런 신앙의 자율화로 부터 모든 타율화가 시작됐다. 

일리히의 주장은 사실 간단하다. 기독교를 믿는 서양인으로서 그는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예수는 어떤 학교를 나온 소위 전문가가 아니었다. 전문지식과 권력, 위신, 지위, 부, 여유 등을 가진 속세의 속물적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 흉내를 내며 예수를 떠드는 신부나 목사, 그리고 성당과 교회는 웃기는 속물이니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 그것들이 없어지면 민중은 스스로 신을 믿고, 공부하고, 치유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회복해 그런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220
+ 생각해보면, 나도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최근 파커 파머를 통해 '퀘이커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아마 이 퀘이커교의 교리가 지금 말하는 이반 일리히의 생각과 비슷해보인다. 퀘이커교는 실제로 목사의 존재가 없다. 단지 침묵 속에서 직접 신과 대면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직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선 가장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볼 생각이다. 

- 사회의 ‘학교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다. 첫째,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계급구조를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고유한 ‘공부’ ‘배움’을 학교라는 형태의 조직에 의하여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졸업장-학위-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 이상이 아니다. 곧 학교는 계층화라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있다. 둘째, 학교화는 ‘배움’이라는 것을 소비과정의 결과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 셋째, 학교화는 교사가 없는 배움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넷째, 학교화는 지적인 민감성을 비롯한 인간의 고유한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 226
+ 학교가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니, 너무 슬픈 말이지만 상당히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 교실을 들어가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다. 그곳이 생동감이 가득한 '배움'의 현장인지, 생기가 사라져 오로지 처절함 만이 난무하는 '생존'의 현장인지 다녀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 우리는 사실 학교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전거나 대중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 있고, 교회에 가지 않아도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범죄인을 교도소에 보내지 않고도 사회갱생을 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오다가 별안간 모든 것이 철저히 제도에 의존하는 세계에 살게 됐다. 바로 일제 이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학교교육 때문이었다. 234
+ 사실 이건 굉장히 놀라운 통찰인데, 나에게만 그런가? 

- 일리히는 평생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학교는 교육 장애물이고, 병원은 건강 장애물이며, 근대회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극대화하고, 국가 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을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 에리히 프롬은 일리히 사상을 근원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그의 근원적 비판이 항상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더욱 큰 활기와 기쁨을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천부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에서 나오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민주주적의 이념이다. (…)

일리히가 평생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이리라.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반면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희망이 아니라 기대하는 존재로 인간보다 재물을 사랑하고 제도에 기대하는 존재다. 그들은 과학, 기계, 전자계산기, 컴퓨터에 의존한다. 일리히가 희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 양식을 극복하고 진실한 인간의 욕구와 본성에 더욱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246
+ 근원적 휴머니즘. 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제도와 시스템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은 나약하고 두려운 존재로 가정한다. 그에 맞춰서 통제와 처벌은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려 한다. 나는 저항하고 싶다. 내가 지향으로 하는 인간상도 이반 일리히, 에리히 프롬과 같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이러한 존중과 배려 안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일리히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가장 근원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여 현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도발하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가 비판한 현실은 바로 발전의 종교를 섬기다가 본래의 자율성을 잃고 타율화된 인간의 세상이었다. 260
+ 르네상스적 인간! 근원을 고민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비판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오로지 인간 본래의 자율성 회복을 지향하고 타율화된 인간을 지양한 인간! 멋지다.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 

- 일리히에 따르면 산업의 과잉성장은 자율성이 제도를 수용하고 결국은 제도에 의존하게 하는, 곧 타율성이 승리하는 편제를 만든다. (…) 그는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에 자율, 공동적 도구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제창했다. (…) 그가 단순히 학교나, 병원이나, 차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의 여러 제도가 도구 수단을 지나치게 발전, 확대시켰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힘이었던 자율성이 마비 당하고 타인에 대한 의존이 증대되면, 필요를 충족시키는 대량소비가 지구의 유한성을 파국으로 몰아넣도록 소모시키기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자율적 공생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학’ 숭배를 비신화화하고 일상언어를 회복하며, 나아가 법적조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세 가지 차원의 도구를 고찰한다. 272

“건강, 공부, 위엄, 독립, 창조라고 하는 가치는 그런 가치의 실현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 제도 활동과 같은 것으로 오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제도화’다. 이러한 것에 의해 학교는 모든 사회를 두 영역으로 구별한다. 곧 특정 시간대, 특정 방법, 특정 조치와 배려, 그리고 특정 전문 직업은 학술적이거나 교육적이라고 간주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276
+ 마지막 문장을 되세기자.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마치,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우리의 '기억들(휴대전화 번호, 간단한 일정 등)'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휴대폰을 처음 사용했을 때만 해도, 주위 왠만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다 외우고 다녔는데, 이젠 내 번호도 잃어버릴 지경이다. 이는 뿐만 기계만이 아니다. 일리히가 말했듯, 제도적 배려 역시 인간을 타율화시킨다. 

- 존 홀트, 교육이 아니라 /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정의란 없다. ‘교육이 아니라’ 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특수한 장소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면서 행해지도록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는 주변 세계와의 교류에 의해 그 전보다 사물을 알고 현명하게 되며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능력이나 기능도 몸에 익혀 자각적으로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인생에는 큰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떄문이다. 즉 나는 매우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가고 일하며 놀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단절은 없다. 그 전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정의에 알맞은 말을 하나 고르기란 불가능하다. 349

+ 나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다. 교육이란 특수한 장소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다. 차라리 호기심 그리고 삶에 가깝다. 배우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배울 수 없는 곳은 없으며,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다. 배움이란 철저히 삶과 관계한다. 삶을 말하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나 역시 이러한 배움을 토대로 학생들과 삶으로 만나고 싶다. 내 삶을 먼저 꺼내고, 그들의 삶을 꺼내어 내고 싶다. 그렇게 제도화 된 배움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역동적인 배움터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온전함을 회복하는 대화, 심톡입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때 공감받고 힘을 얻습니다.

내 앞에 놓인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서로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모든 공간이 바로 심톡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함을 회복하고, 나아가 가족을 회복하고,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것.

그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저희는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대상]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들도 환영합니다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도 환영합니다

가까이에서 그냥 놀러오시는 분들도 환영합니다! 

 

[진행 계획]

1) 나의 인생 나무 그리기

2) 나의 두려움 마주하기 & 힘에의 의지 신호 찾기

3) 온전히 자라나 '우리 자신'이 되는 방법

 

[참가비 / 장소]

- 1인당 12,000원

- 참가비는 장소비, 음료비, 강의 준비로 사용됩니다.  

- 장소는 합정역 나눔문화플랫폼 <허그인> 2층입니다. 

- 위즈돔 외 추가 참여인원이 있습니다. (예상 참가 인원은 10-12명 입니다.)


[참가신청]

 1) 페이스북 이벤트를 통해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events/1583807715238906/

2) 사람도서관 위즈돔을 통해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http://www.wisdo.me/11295

어디로든 만날 수 있으니 자유롭게 신청해 주셔요 :)


-책 <초인수업> 중에서-

- 예술가란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세상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 생이 만약 영원히 되돌아오더라도 그대는 생을 사랑할 것인가? 그대는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 운명은 견디는 것도 반항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이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운명애라고 한다.

- 확신이란 감옥이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마음속 소리를 찾고 싶다면, 더 행복한 삶을 꿈꾸신다면 심톡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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