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일주일에 걸쳐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고 있다. 아니, 만나고 있다. 내가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올해 초에 박찬국 교수가 쓴 <초인수업>을 하나 읽었을 뿐, 그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철학책 역시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 VS 철학>을 비롯한 철학사 중심으로 봤을 뿐,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책은 역시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접했다. 물론 그 어렵다는 에티카를 바로 읽은 것은 아니다. 먼저 이수영 선생님이 쓴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을 만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읽기의 짜릿함’. 그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느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에티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책 중에 가장 완벽한 책이다”라고 찬탄했다. 매우 논리정연하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훔치는 그런 매혹적인 책이었다. 읽으면서도 읽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운, 그런 책이었다. 에티카를 덮을 때쯤, 다시 니체가 떠올랐다. 니체는 <에티카>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나에게 선구자가 있었다네. 그것도 얼마나 놀라운 선구자인가! 나는 스피노자를 거의 모르고 있었지. … 그의 전체적인 경향 - 즉 인식을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만드는 것 - 이 나와 같을 뿐 아니라,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네. … 그는 의지와 자유, 목적론, 도덕적 명법, 비이기적인 것, 그리고 악 등을 부인했어. 설령 차이가 많다고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주로 시대와 문화, 그리고 학문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야. 한 마디로 산마루에 올라 혼자라는 느낌이 이제 적어도 둘이라는 느낌이 되었네."

그들은 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마주했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그는 <에티카>로 스피노자의 저벅저벅한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도 그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었다. 나도 그 옆에서 발걸음을 따라 걷고 싶었다. 니체는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공감했던 것인지, 내가 공감했던 것과 무엇이 비슷한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니체로 넘어가는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 스피노자는 뒤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를 더 탐색하고 싶었다. 그가 주는 즐거움은 너무 크기에, 한번에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니체와 괴테, 들뢰즈를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많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방향, 현재로썬 ‘그들의 철학'을 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니체를 만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강의 준비와 강의 시간을 빼곤 나머지 시간에 나는 니체를 만나고 있다. 우선 이진우 교수가 쓴 기행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를 읽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이문회우에서 주최하는 김동국 선생님의 특강<신의 죽음, 예수의 죽음>도 찾아 들었다. 20차시 정도의 정기 수업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엊그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조금 읽었고 발췌독했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봤던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를 한번 더 복습했다. 암튼 이 정도 니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중간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 마주했던 책과 강의에 나의 의견은 많이 빚지고 있고, 아직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설하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먹기만 해서 변비에 걸렸으니까.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은 너무 많이 하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그들은 대식증과 이따금씩 생기는 복통을 동시에 갖고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야위어간다.” 아마, 올해 들어서 니체에 자연스래 관심이 가게 된 것도 배설에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어떤 두려움도 없이 표현하는 것. 나에게 잠재된 창조적 자아를 깨우는 것. 그 시작은 니체에의 탐구다.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니체로 넘어가기로 하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철학책을 읽는가?
내가 책을 읽은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나는 그저 충동적으로 책을 읽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읽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치지어린 애송이 독서가에 불과했다. 일년에 몇권을 읽었느니 그런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서야 나는 내가 왜 책을 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보는 이유는 결국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답을 한다. 왜냐면 삶은 결국 반응이고, 그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가진 세계관, 고정된 인식의 틀>이라고. 나의 세계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아들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의 경험이 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의미부여가 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삶은 크게 일어난 일과 해석으로 나뉜다. 우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흔히 접하는 예로 컵에 물이 반정도 차 있을 때 누군가는 ‘반밖에 남지 않았네’ 라고 해석하고, 누군가는 ‘반이나 남았네’라고 해석한다는 것. 그 해석을 통해 우린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삶이 펼쳐진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월요일 아침, 바쁜 출근 길에서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매우 기분이 더럽다.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라 회사에 가기 싫은데 말이다. 성격이 급한 누군가는 욱해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을 가정하자. 극단적인 예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 똑같은 욕을 들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월요일 아침과 같은 반응일까? 아닐 것이다. 그저 허허 웃고 지나갈 것이다. 무엇이 바뀐 것인가? 상황에 바뀐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훨씬 더 너그러워진 인식 속에선 그 정도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해석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내가 가진 관점, 세계관, 인식의 틀’이며, 그 세계관을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책은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선 ‘내가 가진 세계관’을 잘 정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로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그들이 가진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이란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결코 교과서로는 습득되지 않는다. 인식이란 것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방법들이 지금으로썬 독서 토론이나 디자인씽킹, 프로젝트 학습이다. 다양한 생각과 체험을 통해 삶에 유익한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앞으론 철학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싶기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도 하고. 암튼, 나는 철학자들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던지는 자들이다.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해석 체계를 버리고, 내가 던져주는 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써 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철학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읽기의 혁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읽고 나면, 새로운 눈을 갖게 되고, 한번 눈을 뜬 자는 다시 감을 수 없다.

철학자들도 다른 철학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경험한다. 탐구하고, 숙고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눈을 발견한다. 1865년 10월 어느날,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노력은 내 자신에게 맞는 삶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행복하게 은둔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읽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상상해보라. 어느 날 나는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내겐 전혀 낯선 이 책을 집어 들고는 몇 쪽을 넘겨보았다. 나는 어떤 마귀가 ‘이 책을 들고 집에 사라’고 나의 귀에 속삭였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책을 좀처럼 서둘러 사지 않는 나의 습관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집에 와서 막 획득한 보물을 갖고 소파의 귀퉁이에 몸을 던지고는 저 에너지 넘치고 암울한 수호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읽기의 혁명성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한권 소개한다. 일본의 니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 굉장히 재미있지 않은가?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하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은 무엇인가?
니체는 이런 사람이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한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된 사람. 34세에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맥을 방황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을 개척한 사람.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었던 사람. 이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의 짧은 약력이다. 나는 니체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짧게나마 내가 느낀 니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에게 니체는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의 삶은 예민 그 자체였다. 강신주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상처에 둔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아파했다. 수 많은 여성들 그리고 트라우마 속에서 자랐고, 평생 아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인생의 절반을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 어릴 적 너무 많은 책을 보고, 눈이 나빠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쨌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니체의 위대한 면이 나온다. 그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한다.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위버멘쉬, 초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쓰고, 생각하고, 또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언제나 아파했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 아픈 것들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아마 그들로부터 자신의 맨살을 봤던게 아닐까? 그가 죽기 얼마 전, 마차에서 매 맞는 말을 부둥켜 앉고 오열한 장면은 그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러한 니체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 나는 ‘힘에의 의지’를 꼽는다.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엔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얼마 전에 다시 보았는데, 이진경 선생님이 쓴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도 권력에의 의지라고 나오더라. 이진우 교수도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한다.) 이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와도 비슷한 개념인데,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모습으로 있고자 한다는 것. 즉,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심지어 약자도 권력을 추구한다. 그들은 강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삼는다. 모든 생명은 그러하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힘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언제 강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책을 볼 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받을 때, 가족들과 함께 연결된 느낌을 가질 때. 그럴 때 강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 활동을 반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힘에의 의지’다. 내가 매월 심톡을 개최하는 것도 단순하다. 그 활동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나의 기쁨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권력 욕구도 없는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혹시 주말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기를 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권력을 추구하는 자다. 왜냐면, 누구에세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자유롭게 쓰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자 권력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말을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얼마나 주말을 간절히 바라는가? 그렇기에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자명하게 들린다. 



니체 전집 / 책세상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가?
이 시점에서, 니체가 기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설명 된다. 니체가 보는 기독교의 논리는 이러하다. “지금 고생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목사였다. 그리고 니체 역시 그에 순응하면서 자랐지만, 결국 맹목적 믿음에 저항한다. “네가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믿어라. 네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한다면, 탐구해라.” 마음의 평화는 니체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의 내세가 현세의 ‘힘에의 의지’를 거스른다고 보았다. 이처럼 니체는 ‘믿음’이란 개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그리스도교는 오직 예수 한명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제들의 종교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의 말에 나 역시 일견 동의한다. 어쩌면 기독교의 숨겨진 메시지는 그의 말대로 ‘사랑’이 아니라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재작년에 로마의 카타콤을 들린 적이 있다. 그곳은 어둡고, 답답하고, 음침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간 수 많은 초기 기독교도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에게 분명 ‘사랑’이 남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곳은 ‘복수심’이 자라기 좋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지내지만, 내세에선, 하늘나라에선 ‘두고보자’는 복수심.”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부폐한 한국 교회나 사이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목도한다. 길거리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물론, 참다운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니다. 참다운 종교는 언제나 죄와 벌이 아닌, 현재를 이야기 하니까.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보상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죄>, 즉 신과 인간 사이를 멀게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 -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네 안에’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예수를 치켜세워 ‘신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어버렸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았던 대로, 그가 가르친 대로 죽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뜻에 맞게 살았고, 행동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그걸로 이미 완전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힘에 의지’에 따라 살았다. 그 완전한 존재를 불완전하게 만들고 의지한게 어쩌면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재단이 아닐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니체는 목 놓아 외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그래야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사람들이 다시 ‘힘에의 의지’를 되찾지 않을까? 내세를 위해 지금을 무기력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해서.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니체의 이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게 한다.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소멸. 뒤를 이어 찾아온 허무주의의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신이 죽은 시대다. 종교적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내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돈’을 이야기한다. 벤야민이 얘기했듯, 자본주의라는 ‘세속화(secularization)’된 종교가 우리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린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앞서 말했던 기독교가 ‘내세’를 이야기한다면,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둘 다 본질은 같다. 종교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못 살게 하고, 자본주의는 퇴직 이후를 걱정하게 하느라 지금을 못 살게 한다. 그래서 이 ‘의미의 소멸’ 앞에서 우린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허무주의가 문 앞에서 서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로마 카타콤 내묘실



이러한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앞서 논리를 정리해보자. 니체는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그와 반대되는, 되려 힘을 억압하는 논리를 폈으며, 니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안전한 믿음을 부수고, 불안한 진리를 찾아서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신은, 진리는 없다는 것. 이러한 불안한 의미의 소멸이 가져오는 허무주의 앞에서 니체는 어떤 대안을 내놓았을까? 그는 기나 긴 사유 끝에 ‘영원회귀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그건 1881년 8월, 그에게 찾아온 번뜩임이었다. 질파플라나 호수가 가져온 선물.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련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 즉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적 정식은 1881년 8월의 것이다. 그것을 종이 한 장에 휘갈겨 쓰고,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지면”이라고 서명했다. 그날 나는 질파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주글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지금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고 소리친다. 그저 지금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는 지금 강해지고 있는가? 너의 '힘에의 의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래서 강신주 선생님을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정오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묻는다. 그는 진리를 부정한게 아니라, 진리의 자명성을 부정한다. 그는 오로지 회의하고 순간에 산다.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나는 지금 이 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열렬히 맞이할 수 있는가?" 나에겐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딱 5분만 있다가’ 아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아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어떤 일이든 그 순간 해 버린다. 성격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언제나 느릿느릿. 해야 할 일도 ‘딱 5분만 있다가’ 한다. 그런데 막상 ‘5분 있다가’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순간 순간에 살지 못한다. 시간의 찰나성을 언제나 간과하는 것이다. 나에게 마치 영원한 시간이 허락될 것 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곤 언제나 후회한다. 지금의 이 삶을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무엇을 고쳐 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내 자세를 고쳐잡게 만는다. 나에게 힘을 뺏는 것들을 멈춘다. 나는 또 한번 다짐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무분별한 욕망에 선을 긋고, 진정으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그렇게 자유로울 때 나는 이 삶을 다시 영원히 반복하고픈 욕망에 빠진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삶의 예술가
우리의 삶, 모든 생성과 죽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은 ‘목표’를 쫓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할 수 있을까?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단이다. 하지만, 만약 목표가 없다면 무엇인가? 니체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최종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문을 뒤집어 보자. 삶은 어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목표다. 이 답에서 나는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당신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는가? 그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굴리지만 그 바위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신의 노여움으로 영원히 돌을 굴리는 형벌에 처했지만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멈춘다는 것은 신께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신에게 반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거창한 목표 따윈 없다. 그저 내 앞에 놓여진 돌을 굴릴 뿐이다. 순수하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롭다는 것은 양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처럼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상의 지루함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형벌과도 같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감내한다. 인생을 살만하다고 느끼기 위해선, 일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일상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형벌이다. 최대한 피하고 싶은, 굴리기 싫은 돌이 되버린다. 내가 그런 편이다. 일상은 내 삶에서 어느 새 뒤처지기 마련이더라. 나에게 권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등 우리에게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이 일상을 이제 목적으로 바라보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 마치 처음 설거지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경이감이 어느새 익숙함이 되어버리지 않게 스스로를 경계하자.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허용된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그렇게 살자.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하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니체가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제 드디어, 니체의 초인, 위버멘쉬가 등장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이제 니체는 쉴세 없이 몰아친다. 위버멘쉬에겐 사람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들은 별이다. 니체는 이렇게 통탄한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빡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 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 그 자가 인간 말종(말세인)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경멸할 수도 없다. 어떤 일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 그 역동성. 이제야 그의 ‘정오의 사상’이 환히 빛을 발한다. 


낙타와 어린아이


당신은 어떤 혼돈을 품고 있는가?
이제 마지막 장이다. 니체는 이제 인간말종(말세인)에서 초인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한번 따라가보자.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엇은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 짐깨나 지는 정신는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첫번째, 그 시작은 낙타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현실에 안주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안에서 낙타를 본다. ‘5분만 있다가’라고 말하는,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합리화하는, 타협하는, 수동적인, 그런 낙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낙타가 산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낙타는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섬겨온 신, 그리고 주인을 죽인다. 낙타가 ‘해야한다’를 의미한다면, 사자는 ‘하고싶다’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 사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자에게서 주체성, 혁명을 본다. 나도 내 안에 사자를 들여다 본다. 전공을 거스르는, 양심에 따르는, 주위 사람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사자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사자도 산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사자는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 그리고 진지하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망각이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다. 그는 어떤 ‘목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한 ‘자기원인!’ 그 어떤 목적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순간’에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도 내 안에 어린아이를 본다. 하지만 아직 잠들어 있다. 가끔 깨어나서 뭐라고 하지만, 금세 잠에 빠진다. 

'니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제 이 질문은 헛되다. 되물어보자.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을 장착해보자. '나는 니체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가?' 우린 별자리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별자리에 그려진 수 많은 그림은 이제 지워졌다. 스스로 별자리를 그리고, 이름 붙여야 하는 시대를 우린 건너고 있다. 그 어떤 정해진 답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말했듯, 오로지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의미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즉,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기억하자. 세상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 말. 그 말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 이제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두번째 목소리는 바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말 조차 허무하다는 말이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제 그 텅빈 하늘에서 당신는 어떤 별을 탄생시킬 것인가? 당신의 혼돈은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  


도입. 
메르스가 한창이다. 다들 걱정이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로 걱정이 없는 편이다.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지만 만약 걸리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각종 찌라시들과 기사들은 우리를 걱정과 염려에 중독되게 만든다. 이런 시기일 수록 우린 ‘염려’의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강의가 있어서 옮겨적어 보았다. 강의는 강신주가 했지만 편집자는 나다. 강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내 위주로 편집하게 되었다. 소제목도 그냥 지어봤다. 사실 그게 더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다시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즐겁다. 다들 재미있게 보시길. 



제목 : 우리는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다.
강사 : 강신주

1.
우리 사회는 지금 철학자를 부른다.

요즘 바쁘다. 사실 철학자가 세상에 나와선 안 된다. 철학책을 본다는 것은 고민한다는 뜻이기에. 다시 말해 살기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되려 10년 전에는 사람들이 날 찾지 않았다. 생계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니 나를 찾는 것이다. 1997년 IMF를 경험하면서 우린 바닥을 알았다. 그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린 불안한 것이다. 이 고민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사실 큰 구조적 문제이다. 다만 철학자들의 주어는 ‘나’이다. '나는 어디에 직면해있는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인문학자들이다. 그 관점에서 살펴보자.

2.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권하다.
 
우리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제도에 산다. 우리의 표와 재벌의 표 그리고 국회의원의 표가 같아지는 순간은 선거날 단 한번이다. 나머지 날엔 실질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지배한다. 월급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들이 왜 월급을 줄까? 쓰라고.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돈을 안 쓰는 것이다. 돈을 다 쓰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일해야 한다. 다람쥐의 삶과 다를바 없다. 그런 쳇바퀴 중에 좋은 쳇바퀴가 대기업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좋은 쳇바퀴에 들어가라고 한다. 

3.
우리는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소비의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온 돈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가들은 우리를 소비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보드리야르는 책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다. 소비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붙어있는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우린 옷이 있다. 하지만 또 구입한다. 소비에 중독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소비를 통해 잠시 행복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각종 영화, 드라마, 광고를 비롯한 미디어들은 소비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란 착각을 선사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심리학은 대부분 소비자 심리학으로 발달한다. 소비자를 연구해서 사게하기 위해. 요지는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필요를 구입하지 않는다. 

4. 
욕망의 집합체, 자본주의의 교육장 백화점.

자본주의의 첫번째 이미지는 욕망이다.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교육장이다. 만약, 백화점에 부자들만 오게 하면 나중에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오지 않게 된다. 서로를 통해 부자들은 우월감을 느끼고, 빈자들은 욕망을 느낀다. 돈을 벌겠다는 욕망, 나도 저곳에 속하겠다는 욕망. 방송국도 마찬가지다. 광고는 시청률과 연결되어 있고,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낚기 위해서 방송을 만든다. 실은 방송이 아니라 광고가 본질이다.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 광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자본, 광고와 결부되지 않을 때 진짜 가치있는 것이 출현한다. 

5. 
욕망과 염려를 파는 사회

경기가 좋을 때 자본주의는 ‘욕망’의 이미지를 만들고, 안 좋을 때 자본주의는 두 번째 이미지를 만든다. 염려의 이미지. 그래서 우린 연금도 들고 보험도 든다. 우린 아이들에게도 염려한다. "너 이렇게 살면 나중에 이렇게 이렇게 된다." 병원은 염려를 가장 잘 파는 곳이다. 진단을 하고,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간다. 우리의 염려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린 생수를 사 먹는다. 물은 누가 오염시켰나? 수 많은 공장들이. 그 공장이 다시 물을 팔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는 모든 것을 판다. 특히 지금의 우리 사회는 욕망보단 염려를 판다.

6. 
종교, 자본주의 그리고 인문학

인문학과 종교는 다르다. 종교는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가까운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문학자들은 현재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내 아이와 남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은 종교와 자본을 비판한다. 현재를 못 살도록 하기 때문에. 상상해보자. 만약, 당신의 아이가 1년 뒤에 죽는다고. 그럼 학원 보낼 것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의 미래만 걱정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관계는 사라진다. 미래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꽃을 볼 수 있을까? 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염려의 이미지는 치명적이다. 나와 주위 사람들을 제촉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7.
미래에 대한 염려를 줄이는 법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다’라고. 왜냐면 자본은 미래를 팔기 때문이다. 우린 전문가들에 의해 걱정이 증폭된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괜찮을까? 아프지 않을까?" 하면서 그 사이에 병이 든다. 이 사회가 우리의 스트레스를 조장한다. 어떻게 해야 미래에 대한 염려를 줄일 수 있을까? 일단, 집에 있으면 안 된다. 밖에 나가서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야 한다. 다만, 염려를 가중시키는 친구는 만나면 안 된다. 순간에 머물게 도와주는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렇게 순간을 살기 위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8.
부처, 있는 그대로 사는 자
 
내일을 걱정하거나 10년 뒤를 걱정하고 있을 때 우린 현재를 살지 못한다. 당신도 아주 즐거웠던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진여 여여 타타타)' 사는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나의 세계에 집중하면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한다. 자유로운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하면 사랑이 끝날 것을 걱정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인가? 그냥 살다가 꽃이 지듯이 죽으면 된다. 

9
돈은 좋은 관계를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동안 무엇이 사라질까? 관계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에 집중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힘을 잃는다. 우리는 보통 염려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험을 들고, 돈을 모은다. 만약, 그 돈으로 아이과 좋은 관계를 쌓는데 쓴다면 어땠을까? 나중에 아파서 누웠을 때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여러분 옆에 있을 것이다. 우린 내 미래가 두렵기 때문에 내 미래에 집중하느라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현재에 머물러야 관계가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똑바로 서야 한다. 

10.
아이를 미래가 아닌, 현재에 머물게 하라. 

어떤 어머니가 서울역에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꼴난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자기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과연 앞으로 엄마 걱정을 할까?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공포를 주입하는 순간, 염려는 되물림된다. 그 아이는 대학을 가든 어디를 가든 불안해한다. 아이를 잘 가르치는 엄마는 아이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 제대로 가르치는 엄마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학원 가지 말고, 나를 봐’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해야 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친구나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를 잡게 하라. 

11.
미래를 두려워하는 만큼 삶은 낭비된다.
 
영원한 현재. 여러분은 얼마나 현재를 잡고 있는가? 어제가 또렷히 기억나는가? 기억나지 않는 다면, 당신은 헛산 것이다. 현재가 차곡차곡 쌓이면 눈감을 때 웃을 수 있다. 미래는 공포가 아니다. 절대로. 한국처럼 공포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없다. 행복하고 싶으면 현재에 머물고, 불행하고 싶으면 미래에 머물라.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내 앞에 있는 풍경과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문화 예술이 위축되어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들 미래에 가있기 때문이다. 카르페디엠. 현재를 잡아라. 자기계발은 미래가 두려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통해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 저자들이다. 나머지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인문학적 통찰들은 그곳에서 현재에 머물게 돕는다. 우린 싸워야 한다. 싸우지 못하면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아무리 미래를 요구해도, 우린 반드시 현재를 붙잡아야 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만큼 삶은 낭비된다. 


강의 리뷰.

1. 
강의를 듣고 느낀 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다소 뜬금없지만 ‘경청’이다. 나는 지금까지 강신주 작가의 강의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들었다. 인문학 강의가 워낙 붐이 일다보니 유투브에 ‘강신주’만 입력해도 엄청나게 다양한 강의가 뜬다.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아침마당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경청의 힘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2013년 봄 쯤에 한번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모임이었는데, 대부분 40-50대 아주머니들이었다.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리고 그 경험은 내 인생의 손꼽히는 행복했던 강의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느꼈다. "아, 강의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강의를 듣고 참여하는 분들이 만드는 거구나." 라는 것을. 지식도 경험도 일천한 나였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 하나 하나 귀를 기울여주고, 뭔가를 받아적기까지 하시고, 또 중간 중간 ‘아’ 하는 감탄사까지. 정말 완벽한 경청이었고, 나도 그 분위기에 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의 120%를 발휘할 수 있었다. 중간에 이런 생각까지 했다. “지금 이 말을 누가 하는거지?” 

좋은 강의는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침마당의 특강을 본다. 거기는 정말 ‘숙련된 조교(아닌 아주머니)’들이 계신다. 무슨 말만 해도 ‘아~’ ‘오~’ ‘꺄르르’ 별 말 하지 않아도 엄청난 리액션이 쏟아진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당에서 좋은 강의를 많이 건진다. 강사들도 공중파 방송이기에 아무래도 준비도 많이 할 것이고, 시간도 딱 1시간이다. 그리 길지 않아서 좋다. 사족이 길었지만, 이것이 내가 이번 방송을 본 이유다. 

2. 
내용에서의 느낀 점은 이렇다. 결론은 ‘현재를 살아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주 탁월했다. 유려하게 말과 글을 만들어내는 분이란 생각을 다시금 했다. 그 논리도 심플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산다. 경기가 좋을 때는 욕망을, 경기가 나쁠 때는 염려를 파는 시대. 욕망도 염려도 결국 시선이 현재가 아닌 미래로 가게 하는 것이다. 미래로 가는 순간, 일상의 중요성, 관계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자. 진리는 언제나 쉽다. 하지만 실천하긴 어렵다. 이번에 메르스 때문에 우리 사회는 또 걱정과 염려가 확장되고 있다. 물론 나도 걱정한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는지도 안다. 그것과 관련해서 종사하는 분들은 정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증폭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해석’들이다. 이미 많은 어머니들이 걱정을 시작했다. 나도 이제 130일 된 아가를 키우는 아빠다. 걱정은 된다. 그리고 적당한 걱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언제나 우리를 해친다. 한 독물학자가 말했다. “독이나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현실적으로 대처할 것은 대처하되, 그 더 이상의 확대해석은 금물이다. 이러한 염려에 대응해서 무언가는 또 나올 것이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듯한 각종 상품과 서비스들. 이것만 구매하면 당신의 염려는 사라질 수 있다는 착각들. 거기에 속아선 안 될 것이다. 우린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한다.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해줄 수는 없다. 배에 힘을 탁 줘야 한다. 만약 내일 내가 메르스에 걸린다면, 그건 걸린 것이다. 내가 최선의 대처를 했음에도 걸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그건 그때 생각해도 된다. 그러니 시선을 돌리자. 미래에 대한 걱정, 염려와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순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 <인생수업>의 이 말을 기억하자. 

"죽음을 앞군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0. 서문
인문학의 기본 방향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시민을 위한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인문학이 자칫 개인의 덕성 함양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인문학이 추구했던 정신에 위배된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를 시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시도이다. 인문학은 학문적으로 심화되어야 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확산되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장에서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라는 글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과거에 이지성 작가가 쓴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읽으며 든 불편한 생각이 해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의 부재는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이었는데, 인문학을 하는 이유가 마치 천재가 되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함이란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저자의 목적은 그러한 이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숨은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서 볼 책은 바로 <희망의 인문학>이다. 그 책은 시민을 위한 인문학이란 취지를 현실로 구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1. 논어 / 공자


앎이란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인간은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고난할 때 배우는 사람,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우린 많은 경우 곤에 굴복하고, 곤을 변명으로 대한다. 나이 핑계, 애 핑계, 부족한 잠을 핑계로 댄다. ‘학’을 거부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지지대가 필요하며, 그것이 평생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이는 정말 천재다.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이 분명 세상에는 있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한 천재로 유명한 율곡 이이 선생님보다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김득신 같은 분을 더 존경한다. <백이전>을 1억1만3천번을 읽으면서 자신의 아둔함을 극복한 스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최소한 배움을 멈추지는 말자. 배움이 없다면, 영원히 이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건 별로 즐겁지 않다. 


2. 목민심서 / 정약용

일이란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진리다. 이런 문장은 머릿 속에 아예 외우자. 내가 리더로 속한 모든 조직은 정확히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뀌면, 분명 바뀐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조직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심플한 진리. 


3. 성학십도 / 이황

자아 완성이란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할 따름이다. ‘자아 완성’이란 장경부가 말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떨기 난초가 꽃을 피워 종일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난초 스스로는 향기를 내고 있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자아 완성을 위해 공부하는 뜻과 꼭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와 기를 겸하고 성과 정을 통섭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 정서가 되는 순간이 한 마음의 기미요, 온갖 변화의 지도리가 되며 선과 악이 거기서 나누어진다. 학자가 진실로 한결같이 을 유지하여 이와 욕의 구분에 어둡지 않고, 더욱 여기에서 삼가기를 지극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마음이 발하기 전에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깊게 하고, 마음이 이미 발하였을 때에는 성찰하는 습관을 익숙하게 하여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힘써 그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중을 잡는’ 성학과 ‘체를 보존하여 작용에 응하는’ 심법을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여기에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 아닐까. 물론 자아 완성이 내면의 양심을 깨우고, 저절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알기에 큰 문제는 없다. 내가 아는 말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군자란 <내성외왕>이 아닐까. 내적으로는 성인이 되고(아마 자아 완성과 같은 말일 것이다.) 외적으로는 왕이 되는 것(군림하는 왕이 아닌,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 이를 위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하는 것이니라. 


3. 격몽요결 / 이이 
 
공부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과거에 어떤 글에서 이이가 12살에 썼다는 자경문을 읽고 한 동안 정신을 못 차린 적이 있다. 당시에 묘한 열등감에 사로 잡혔었다. 내가 30이 다 되어서야 '아 그게 중요하지'라고 알아낸 것을 누군가는 고작 12살의 나이에 스스로 썼다는 것에 좌절했었다. 물론 이이와 나를 비교한다는 건 아니나, 왠지 슬픈건 사실이었다. ㅠ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맞다.   
 

4. 맹자 / 맹자
 
사람의 본성이란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러하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우산에는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맹자가 주장한 본성의 선함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했다. 이때의 적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고, 대인은 순수성을 잃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양학자는 공자와 맹자다. 특히 맹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나 역시 비슷하기에 아무래도 좀 더 마음이 간다. 인간의 온전함을 믿고, 그 가능성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교육이고 그러한 교육을 하고 싶어서 심마니스쿨이란 커뮤니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분명 언젠간 그에 맞는 흐름과 과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나의 성장에 달려있으리라. 


5. 장자 / 장자

자유란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둘레의 치수는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 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대붕은 허구적 새, 메추라기는 현실적 새다. 메추라기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대붕은 초월적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장자 자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로부터 속박되어 있지만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붕은 현실 세계로부터 비약하여 이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도를 확보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꼈으면 한다. 그래야 아픈 사람들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힘들지 않으면 절대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다. 어머니가 돼서도 안 되고 아버지가 돼서도 안 된다.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 높이만큼 겪었던 고통의 깊이만큼 나는 그만큼 어른이 되었을까를 고민해 봐야 한다. 

19세기 명상가이자 사상가인 구르지예프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 먼저 그 사실을 깨우쳐야 자유로워 질 수 있고 했다. 나도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그 사실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고 인정하는지 척도가 어른이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경험과 성찰 없이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각자에게 필요한 과제를 풀어야 우린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6. 사기 / 사마천

삶과 죽음이란
사마천의 생사관을 잘 나타내는 말이 ‘구우일모’이다. 다음은 사기 <보임안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 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해 놓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죽음이 있으려면 삶 자체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해도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보여 준 행위나 행동이 천박하거나 형편없었다면 그 죽음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이기에 이 말이 와닿는다.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위대한 죽음을 맛볼 수 있을까? 내가 눈을 감을 때 어떤 여한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렵다. 
 

개혁이란
입목득신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상앙이 진나라를 개혁하려고 하니 백성들이 전혀 믿지를 않았다. 그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않고든 법이 시행되지 않겠단 생각으로, 성북 밖 한쪽 문에다가 나무 기둥을 세워 놓고 이것을 저쪽 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금 스무 냥을 상으로 주겠다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는다.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상금은 오십 냥으로 올린다. 그랬더니 지나가는 젊은이 하나가, 할 일도 없고 힘이 남아도니까 나무를 옮겼다. 그러자 상앙이 그 자리에서 오십 냥을 상금으로 주게 되고, 이후 백성들은 상앙의 정책에 믿음을 갖게 된다. 

“법이 안 지켜지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으며,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따르지 않습니다.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낡은 습속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예의범절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당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무언가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시간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한다.  


내가 가진 취미 중에서 최근에 가장 못했던 것이 바로 '강의 시청'이다. 나는 책을 보고, 강의를 듣고 그러한 정보와 지식을 새롭게 연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인지 작년 1년은 강의를 많이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지난 주 시간이 나서 '뭘 볼까?'하다가 보게 된 '인문학당 락/ 시, 철학에게 말걸다' 강의. 최근 2-3년 간 인문학 강의가 트렌드를 주도하다보니 예전에 오마이스쿨에서나 볼 수 있던 강사들이 이제는 공중파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강신주 박사를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생각을 비틀어준다는 부분에선 꽤 훌륭한 역량을 가진 분이라 생각한다. 




  

1. 거울

프란츠 카프카 
"한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 앞으로 4주 동안 우리는 너무 익숙해진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을 할 것이다. 인문학은 지금 너무 편하다. 인문학은 낯설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반성을 한다. 

- 인문학의 양 극단에 시와 철학이 있다. 시는 우리의 정서를 불쾌하게 만든다. 철학은 우리의 지성을 불쾌하게 한다. 
좋은 시는 가슴으로 들어와 머리를 움직인다. 하지만 좋은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시와 철학은 본질적으로 같다. 

- 이상의 '거울' 낭독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 절대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내 모습인지..
우리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을 뿐이다. 내가 없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어디에 갔을까?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끄 라깡이 업그레이드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있을 뿐이다. 나의 자아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거울이 없으면 나는 나라는 것을 모른다. 
거울이 자아 인식의 매개체이다. 우리의 자아는 거울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울단계)

- 고양이와 개는 거울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을 갖고 있다.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거울 속 '나'는 내가 아니다. '대상화된 나'이다. 화장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다. 
아무리 화장을 내도 나는 절대 못 본다.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 거울 속 나는 나인가?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는가?
거울 속에 내가 나라고 완전히 믿는 사람은 나르시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 친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당신에게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거울이 필요없다. 
타인을 신뢰하면 그 사람은 내 거울이 되어 줄 수 있다. 거짓말 하지 않는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거울보다 강력하다. 
타인은 나의 사각지대를 말할 수 있기에 비로소 나를 완전하게 해준다. 

느낀 점 : 


다시 말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신뢰하고, 나를 신뢰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물어봐야 한다. 
외로울 때 우리는 거울을 꺼낸다. 외롭지 않으면 우린 거울이 필요없다. 물어보면 되니까. 결국 우린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2. 커피

마르셀 프루스트
"예술 덕분에 우리는, 오직 하나인 우리 자신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계를 보고, 또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으면 그만큼 우리 뜻대로 되는 더 많은 세계, 무한 속에 빙빙 도는 숱한 세계 이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갖게 된다."

-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내가 고통스러우면 모두가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숙한 사람은 다른 세계가 있음을, 타자가 있음을 인정한다. 예술가는 자신이 느낀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과 예술을 공부한 아이들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 우리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깊이 들어갈 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시를 써서 시인이 무용해지는 것, 그것이 시인의 꿈이다. <김수영 시인>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인데, 그런 사람은 돈을 벌 수 없다.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 오규원 시인의 <프란츠 카프카> 중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커피는 둘이 있어도 혼자 있으려고 할 때 마시고, 술은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마신다. 차와 커피는 홀로 있음이다. 술 먹자는 이야기와 커피 마시자는 이야기는 다르다. 커피는 누구와 함께 있어도 홀로 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술은 그 홀로 있음을 깨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어른은 홀로 있음을 즐기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술을 마신다. 홀로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성숙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철학자 슈프랑거
"주체의 발견은 섬과 같이 언제나 세계 내의 그 밖의 모든 것, 즉 사물들이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의 발견이다. 이런 설명에 따른다면, 그런 발견은 위대한 고독의 경험이기도 하다."

- 사물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과 나를 언어로 인식하는 과정은 다르다. 어린아이는 '나'라는 의식이 없다. 옆에 아이가 울면 따라 울 뿐이다. 옆에 아이가 울어도 울지 않기 시작할 때 어른이 된 것이며,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철학자 슈트라서 <대화적 현상학의 이념>
- 언어는 자아와 당신 사에에 매개로 들어선다. 언어는 간격을 만들어 내지만 또 이 간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반면 아주 어린 시절의 느낌은 어떤 간격도 없는 직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 이야기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엄격하고 정당한 의미로 '자신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커다른 전체에 통합한다."

- 글쓰기, 시 읽기, 일기 등 자신 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답을 찾아보자.
숲을 묘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숲에서 나와야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숲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써야 한다. 그런데 숲에서 나와 있는 위치는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라 숲의 모습이 다 다르다. 우리는 함께 어울리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세계를 표현할 때 작가가 된다. 나의 세계를 구축해야 작가가 될 수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은 묘사하기 어렵다. 왜냐면 붙어있기 때문에.. 떨어져야, 헤어지고 나야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 그나마 그 과정을 글로 표현하게 되면 떨어져서 표현할 수 있다. 글쓰기는 세계와 떨어져서 다시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그래서 묘사를 하거나 글을 쓰는 작업은 고독한 작업이다. 작가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그 외로움을 지켜야 좋은 작가가 된다. 

- 글을 읽는 이유는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시를 쓰기 위해선 많은 시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많은 그림을 읽어야 한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세상을 묘사할 수 있었는지 경외심을 가지면서.. 

느낀 점 : 


다시 말해, 좋은 관계는 차를 마시는 관계다.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만이 '우리'라고 하는 전체에 통합된다. 나의 세계가 있고, 타인의 세계가 온전히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울리는 세계가 있는 것. 그것이 삶이다. 



3. 선글라스

김미정 시인 <선글라스>

- 선글라스는 묘한 매체다. 내 눈동자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나의 시선을 대상이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관음증의 사회다. 모두 TV 속 스타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TV를 볼 때, TV 속 인물은 나를 볼 수 없다. 영화<링>이 무서운 건, 그 안에서 뛰쳐나오기 때문이다. 관음증은 몰래 보는 것이다. 관음증자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아는 것이다. 관음증자는 내 앞에 사람의 눈을 볼 수 없다. 소심한 사람이다.

- 로드킬이 발생하는 이유? 동물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사냥꾼이고 보이는 자는 사냥감이 된다. 누군가 등을 보이면 사냥감이 된다. 그래서 동물들이 길을 건너다가 차가 있으면 멈춰선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사냥감이 되기 때문에. 

- 보는 자는 강한 자고, 보이는 자는 열등한 자이다. 불량배는 항상 말한다. 눈 깔아. 다시 말해, 선비나 지식인이 강한 이유, 권력을 똑바로 쳐다보고 눈을 깔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을 두려워 한다. 

철학자 미와 마사시 <몸의 철학>
"보이는 것이 흔히 불안을 가져다 주게 되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으로는 자기의 주체성이 무시되고, 자기가 도구로 보이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 쪽은 주체이고 지배하는 것이며 우월한 것이다. 이에 비해 보이는 쪽은 객체이고 지배되는 것이며 종속되는 것이다."

- 신은 항상 우리는 보는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못 보지만, 나를 어디서나 보고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 만든 신이다. 인간의 힘이 약할수록 신의 힘은 강해진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나는 그를 보지 못할 때 가장 두렵다. 나는 못 보지만 나는 다 보여지는, 그 존재가 가장 무섭다. 신 중에 가장 오래된 신이 '태양신'이다. 우리는 태양을 볼 순 없지만 태양은 언제나 나를 보기 때문에..

철학자 미와 마사시 <몸의 철학>
"보는 것은 주체이고 정신이다. 보이는 것은 객체이고 사물이다. 내가 타인을 단순히 보고 있는 한 타인은 단순한 사물이다. 내가 주체로서 타인을 보는 것은 타인이 사물을 보고 있을 때, 특히 나에게 눈을 향할 때이다."

- 내가 보듯이 저 사람도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타자'가 된다. 그걸 모르면 '사물'이 된다. 독재자에게 시민들은 사물이다. 독재자들은 선글라스를 낀다. 자신의 의도를 감춘다. 그래서 선글라스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약한 존재이다. 사물이 되기 싫다면, 그 사람의 눈을 응시하라. 

느낀 점 : 


나는 용기가 없다. 내 글을 보이고, 내 표현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평가되는 것이 두렵다. 세상이 무서운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평생 누군가를 보면서 살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하지만 그건 관음증자가 되는 길이다. 나는 보는 자인가 보여지는 자인가? 둘 다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가 나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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