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스토리 연구소> 이희석 코치님의 4주 강연의 일부입니다. 
강의 내용이 좋아서 공유합니다. 요즘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 즐겁네요. :)



도입
기존 인문학 책은 ‘지식관’에 해당되는 것이 많다. 아무래도 실용기반으로 ‘인문학’을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그럴 것이다. 가만 보면 사람들이 책을 접하는 태도와 강사인 내가 책을 접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다. 나는 곡괭이를 들고, 원석을 찾아보려는 자세를 가지는 반면, 대부분은 나무 밑에 누워서 ‘뭐라도 떨어지겠지’라는 느낌으로 책을 읽는 것 같다. 조금은 다른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경영서는 ‘실천하는 독자’를 만나면 효과를 발휘하고, 인문서는 ‘사유하는 독자’를 만나야 효과를 발휘한다."

1부 강연 
Q. 인문학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성서 해석적 독서
책에서 인용구를 추려내고, 자기 생각을 덧붙여서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이 그 예다. 이것의 지배정서는 '숭배’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너무 편한 방법이다. 내 생각과 비슷한 것들만 모으다 보면, 기만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다른 생각, 반대 생각을 하는 게 귀찮아지고, 결국 ‘사유를 차단한다’. 들뢰즈는 말한다. 책상 앞이나, 대화를 통해선 ‘사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을 때 우린 진짜 사유를 한다. 충격은 사유의 훌륭한 도우미임에도, 성서 해석적 독서가들은 그러한 충격을 피하려고 애쓰게 된다.

2) 독단적 독서
이것의 지배정서는 '오만’이다.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 

3) 불가지론적 독서
이것의 지배정서는 ‘허무’다. 우리도 그도 모른다. 
(이 '허무'라는 키워드는 강의 중에 나온 것은 아니고 나의 생각이다.)

4) 변증법적 독서
이것의 지배정서는 ‘탐구’다. 우리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와 나의 공동의 탐구를 통해 더 나은 것을 사유할 수 있다.
내 주장을 쓴다. 그리고 나와 반대 주장을 하는 글을 찾는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와서 글을 쓴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줄이고자 매섭게 사유하는 과정이 변증법적 독서이다. “변증법적 독서가들은 문화 충격을 회피하기보다는 기대한다.” 이 말과도 같다. "신을 믿으면서 한번도 회의해보지 않은 사람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고 있다는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논리는 어떤가? 평범하다. 예를 들면, 방이 덥다. 에어콘을 틀었다. 방이 시원하다. 하지만 진짜 멋진 논리는 말도 안 되는 두 소재를 가지고 와서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바로 그런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다. 


Q. 기억해야 할 현대 철학자들과 구조적 ‘자기이해'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중요하다. 그들이 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을 이룬 사람들이기에. 철학자들의 시야는 좁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은 그곳에 있다. 그 ‘한 지점’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 버린기에. 자기만의 논리와 사유체계를 만들어버리기에.

마르크스는 ‘계급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왔다. 당신은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의 계급으로 인해 당신의 생각은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가지고 왔다. 그의 영향 덕분에,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 우린 근대인이다. 이들 영향 덕분에 ‘구조주의’가 20세기 전반에 흐른다. 그 전에는 ‘주체’와 ‘대상’이 중요했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한 요소가 아닌 그것들을 둘러싼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내가 누구인지'를 ‘구조’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즉, 자기이해는 인간이해와 함께 한다. 인간이해란 다른 사람의 관점에 대한 이해다. 

통시적 자기의식이란, 시간의 차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어제까지의 세계>가 좋은 예다. 
공간적 자기인식이란, 공간의 차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상상으론 어렵다. 여행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때 가능하다. 
관계적 자기인식이란, 관계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이 역시 관찰로는 어렵다. 타자를 체험해야 한다. 

이처럼, 나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통시적, 공간적, 관계적인 책을 읽고, 그에 관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구조적 자기이해다. 
니체는 말한다. 영혼이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비교하고, 영혼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그리고 영혼이 강한 사람은 ‘자기 긍정’을 통해 나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까지도 다 받아들인다. 하지만 영혼이 약한 사람은 ‘자기 기만’을 통해 자신을 속인다. 

2부 강연
Q. 인문주의자들의 예술적 일상은 어떨까?
현대 미술에 대한 우리의 첫 인상은 어떨까? 난해하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싸다. 등등 왜 난해해졌을까? 미술 작업의 도구들이 다양해지고, 작가들의 본인들의 심리와 관점을 나타내기 시작했기에. 연출이란, 생각을 배우들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행동을 묘사하면 장면 전환이 빠르다. 하지만 심리를 묘사하면 어떤가? 느려지고 복잡해진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나온 책이 <율리시스>다. 이처럼 19세기엔 그저 장면을 묘사하고 행동을 나타냈다면, 20세기부턴 작가와 감독의 관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술계는 어려워졌다. 현대 예술은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세상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 재능과 훈련, 그리고 의미와 탁월함. 
미술을 그리는 것은 재능의 영역일까? 아니다.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재능은 무엇일까?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힘. 재능은 우리에게 탁월함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재미를 준다. 탁월함은 훈련의 영역이고, 의미는 재능의 영역이다. 아무리 잘 해도,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결론은 여러분도 가볍게 그림을 그려보라. 그리고 미술관을 가보라. 어렵게 여기지 말고.

#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에 대하여 
사건이 존재를 바꾼다. 철학은 진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정치, 예술, 과학, 사랑이 진리를 만든다. 예를 들자. 사랑은 두 진리의 충돌이다. 그 과정에서 진짜 진리가 생성된다. 그는 "후사건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Post-event acts> 한번의 행동이 아닌 실천들. 그것이 우리를 바꿔간다. 결론, 어떤 사건을 통해 경험한 새로운 깨달음을 실천을 통해 표현하라!



+ 나의 작은 성찰들. 

1.
나는 치약이 되고 싶다. 짜면 쭈욱 하고 나오는. 나는 이런 저런 것들을 잔뜩 쌓아두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앞으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래봐야 노트북이 날라가거나, 에버노트 서버가 폭파되거나, 인터넷이 먹통에 되면 다 사라진게 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남는 것은 결국 나 밖에 없다. 혹은 나의 머릿 속. 그러한 영역에 대한 롤 모델로는 알랭 드 보통이 될 것이다. '일상의 철학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그는 어떤 주제든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해석함으로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눈’을 부여해 준다. 그것이 참 부럽다. 팀장님의 ‘얼개를 구성하는 능력’도 부럽고. 치약처럼 언제든 짜면 나오는 사람. 무엇이든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지식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학과 습을 해야 할까. 더 단단해지자.

2. 
성서 해석적 독서와 독단적 독서. 그리고 변증법적 독서. 나는 어떤 독서를 하고 있는가? 나도 상당히 편집증적인 인간이란 생각도 든다. 나는 지금까지 거의 내가 보고 싶은 책, 내가 흥미있는 책 위주 로만 봐 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넓고 얇게 책을 봤고, 또 한 분야나 저자에 빠져 읽지는 않았다. 맹목적인 관점을 싫어하기에 그런 걸 멀리하기도 하고. 하지만 깊이 사유하려는 욕심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주장을 접하고, 그 주장에 반대되는 책도 보고, 나도 나의 의견을 내보고 하는 등의 ‘탐구적 자세’를 가졌을까? 많이 아쉽다. 그저 내 흥미와 주의를 끄는 책을 탐욕적으로 봐왔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관점이 생긴건 맞지만, 나의 옅은 사유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이 인상적이었다. “변증법적 독서가들은 문화 충격을 회피하기보다는 기대한다.” 나는 회피하고 있나, 기대하고 있나. 혹은 기대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회피하고 있었나. 

3. 
자기인식 첫 번째. 통시적 자기인식은 내 삶의 역사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있었던 사건을 적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평가해 보는 것. 물론 해석과 평가에 관한한 어느 정도의 자기기만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사실 그 자체를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 삶의 결과가 쌓이면, 누구라도 자신을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나도 20대 중반에 명상의 방편으로 ‘뿌리캐기’라는 걸 했었다. 그게 뭐냐면, 내가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 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기억을 적어보는 것. 언듯 들어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억이 있을 것 같지만, 뇌는 현명하다. 알아서 기억을 정리하는 뇌는, 생각보다 많은 기억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분명 ‘중요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그렇게 적어보는 과정을 통해 나 역시 ‘세세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내가 있구나’란 나름의 통찰을 얻었었다. 나를 더 이해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분명 ‘자기인식’에 도움을 준다. 통시적 자기인식은 과거의 나와 결별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다. 

4. 
두 번째, 공간적 자기인식이란 내 삶의 여행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한국 사람이다. 태어난 곳은 대구이고, 지금 사는 곳은 서울 망원동이다. 33년 동안 보낸 한국이란 나라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언어도, 문화도,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다. 하물며 무한도전이란 방송은 거의 10년째 보고 있으니 말 다했다. 과거에 비하면 비약적인 변화를 이루었지만, 공간적 한계는 우리의 경험을 제한한다. 그 경험을 확장하는 방법은 뭘까? 공간을 바꾸는 것이다. 바로 여행. 여행은 우리를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한다. 새로운 사회, 문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 그곳에서 나는 나를 새로이 바라보게 된다. 나의 첫 해외 여행은 2007년 11월 2일이다. 날짜도 기억한다. 필리핀에서 3개월 머물고 호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아직도 필리핀 특유의 냄새와 정취가 선명하다. 그 당시 1년 동안 영어 공부란 핑계로 해외에 머물렀지만, 사실 나는 내 경험을 확장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안 해본 경험을 해보려고 애쓰기도 했고. (그래서 캥거루 고기도 먹어보고, 수영도 배워보고, 파티에서 막춤도 춰봤더랬다.) 이처럼 낯선 환경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게 한다. 여기선 보지 못했던 나를 그곳에선 만날 수 있다. 공간적 자기인식은 여기의 나와 결별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다. 

5.

마지막 관계적 자기인식이란, 이런 비유가 떠오른다. ‘내 삶의 거울’. 우리는 수 많은 자아를 가진다. 관계의 수만큼. 부모님을 만났을 때의 나와, 친구를 만날 때의 나,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할 때의 나는 동일한 인물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들로서의 나는 친구로서의 내가 갖지 못한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나도 그렇고.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그 총합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조차도 오만한 생각이다. 나는 아직 만나지 못한 수 많은 사람이 있으므로. 그 사람들과 부딪쳤을 때의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나를 안다’고 말하는 건 참 어렵다. 어찌보면 오만한 말일지도.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뒤통수를 볼 수 없다.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과의 부딪침을 통해 ‘살짝’ 들여다 보는 것이다. 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찌질한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 영역들은 나에게 있어 뒤통수에 있었던 것들이다. 그래서 아내는 나의 뒷면을 보게 해주는 '거울’이다. 또한 부모님을 통해 나의 옆면을 보고 우리 아이를 통해 나의 앞통수도 볼 것이다. 내 관계의 수만큼 나는 거울을 가진다. 이처럼 관계적 자기인식은 부분적 나와 결별하고 전체의 나를 보게 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물론 그 관계의 질과 깊이가 그 거울의 ‘선명도’를 좌우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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