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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노트/강의 리뷰

[강의] 인문학당 락_시, 철학에게 말걸다_강신주

내가 가진 취미 중에서 최근에 가장 못했던 것이 바로 '강의 시청'이다. 나는 책을 보고, 강의를 듣고 그러한 정보와 지식을 새롭게 연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인지 작년 1년은 강의를 많이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지난 주 시간이 나서 '뭘 볼까?'하다가 보게 된 '인문학당 락/ 시, 철학에게 말걸다' 강의. 최근 2-3년 간 인문학 강의가 트렌드를 주도하다보니 예전에 오마이스쿨에서나 볼 수 있던 강사들이 이제는 공중파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강신주 박사를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생각을 비틀어준다는 부분에선 꽤 훌륭한 역량을 가진 분이라 생각한다. 




  

1. 거울

프란츠 카프카 
"한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 앞으로 4주 동안 우리는 너무 익숙해진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을 할 것이다. 인문학은 지금 너무 편하다. 인문학은 낯설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반성을 한다. 

- 인문학의 양 극단에 시와 철학이 있다. 시는 우리의 정서를 불쾌하게 만든다. 철학은 우리의 지성을 불쾌하게 한다. 
좋은 시는 가슴으로 들어와 머리를 움직인다. 하지만 좋은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시와 철학은 본질적으로 같다. 

- 이상의 '거울' 낭독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 절대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내 모습인지..
우리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을 뿐이다. 내가 없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어디에 갔을까?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끄 라깡이 업그레이드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있을 뿐이다. 나의 자아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거울이 없으면 나는 나라는 것을 모른다. 
거울이 자아 인식의 매개체이다. 우리의 자아는 거울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울단계)

- 고양이와 개는 거울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을 갖고 있다.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거울 속 '나'는 내가 아니다. '대상화된 나'이다. 화장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다. 
아무리 화장을 내도 나는 절대 못 본다.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 거울 속 나는 나인가?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는가?
거울 속에 내가 나라고 완전히 믿는 사람은 나르시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 친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당신에게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거울이 필요없다. 
타인을 신뢰하면 그 사람은 내 거울이 되어 줄 수 있다. 거짓말 하지 않는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거울보다 강력하다. 
타인은 나의 사각지대를 말할 수 있기에 비로소 나를 완전하게 해준다. 

느낀 점 : 


다시 말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신뢰하고, 나를 신뢰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물어봐야 한다. 
외로울 때 우리는 거울을 꺼낸다. 외롭지 않으면 우린 거울이 필요없다. 물어보면 되니까. 결국 우린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2. 커피

마르셀 프루스트
"예술 덕분에 우리는, 오직 하나인 우리 자신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계를 보고, 또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으면 그만큼 우리 뜻대로 되는 더 많은 세계, 무한 속에 빙빙 도는 숱한 세계 이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갖게 된다."

-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내가 고통스러우면 모두가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숙한 사람은 다른 세계가 있음을, 타자가 있음을 인정한다. 예술가는 자신이 느낀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과 예술을 공부한 아이들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 우리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깊이 들어갈 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시를 써서 시인이 무용해지는 것, 그것이 시인의 꿈이다. <김수영 시인>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인데, 그런 사람은 돈을 벌 수 없다.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 오규원 시인의 <프란츠 카프카> 중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커피는 둘이 있어도 혼자 있으려고 할 때 마시고, 술은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마신다. 차와 커피는 홀로 있음이다. 술 먹자는 이야기와 커피 마시자는 이야기는 다르다. 커피는 누구와 함께 있어도 홀로 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술은 그 홀로 있음을 깨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어른은 홀로 있음을 즐기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술을 마신다. 홀로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성숙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철학자 슈프랑거
"주체의 발견은 섬과 같이 언제나 세계 내의 그 밖의 모든 것, 즉 사물들이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의 발견이다. 이런 설명에 따른다면, 그런 발견은 위대한 고독의 경험이기도 하다."

- 사물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과 나를 언어로 인식하는 과정은 다르다. 어린아이는 '나'라는 의식이 없다. 옆에 아이가 울면 따라 울 뿐이다. 옆에 아이가 울어도 울지 않기 시작할 때 어른이 된 것이며,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철학자 슈트라서 <대화적 현상학의 이념>
- 언어는 자아와 당신 사에에 매개로 들어선다. 언어는 간격을 만들어 내지만 또 이 간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반면 아주 어린 시절의 느낌은 어떤 간격도 없는 직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 이야기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엄격하고 정당한 의미로 '자신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커다른 전체에 통합한다."

- 글쓰기, 시 읽기, 일기 등 자신 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답을 찾아보자.
숲을 묘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숲에서 나와야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숲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써야 한다. 그런데 숲에서 나와 있는 위치는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라 숲의 모습이 다 다르다. 우리는 함께 어울리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세계를 표현할 때 작가가 된다. 나의 세계를 구축해야 작가가 될 수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은 묘사하기 어렵다. 왜냐면 붙어있기 때문에.. 떨어져야, 헤어지고 나야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 그나마 그 과정을 글로 표현하게 되면 떨어져서 표현할 수 있다. 글쓰기는 세계와 떨어져서 다시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그래서 묘사를 하거나 글을 쓰는 작업은 고독한 작업이다. 작가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그 외로움을 지켜야 좋은 작가가 된다. 

- 글을 읽는 이유는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시를 쓰기 위해선 많은 시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많은 그림을 읽어야 한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세상을 묘사할 수 있었는지 경외심을 가지면서.. 

느낀 점 : 


다시 말해, 좋은 관계는 차를 마시는 관계다.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만이 '우리'라고 하는 전체에 통합된다. 나의 세계가 있고, 타인의 세계가 온전히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울리는 세계가 있는 것. 그것이 삶이다. 



3. 선글라스

김미정 시인 <선글라스>

- 선글라스는 묘한 매체다. 내 눈동자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나의 시선을 대상이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관음증의 사회다. 모두 TV 속 스타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TV를 볼 때, TV 속 인물은 나를 볼 수 없다. 영화<링>이 무서운 건, 그 안에서 뛰쳐나오기 때문이다. 관음증은 몰래 보는 것이다. 관음증자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아는 것이다. 관음증자는 내 앞에 사람의 눈을 볼 수 없다. 소심한 사람이다.

- 로드킬이 발생하는 이유? 동물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사냥꾼이고 보이는 자는 사냥감이 된다. 누군가 등을 보이면 사냥감이 된다. 그래서 동물들이 길을 건너다가 차가 있으면 멈춰선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사냥감이 되기 때문에. 

- 보는 자는 강한 자고, 보이는 자는 열등한 자이다. 불량배는 항상 말한다. 눈 깔아. 다시 말해, 선비나 지식인이 강한 이유, 권력을 똑바로 쳐다보고 눈을 깔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을 두려워 한다. 

철학자 미와 마사시 <몸의 철학>
"보이는 것이 흔히 불안을 가져다 주게 되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으로는 자기의 주체성이 무시되고, 자기가 도구로 보이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 쪽은 주체이고 지배하는 것이며 우월한 것이다. 이에 비해 보이는 쪽은 객체이고 지배되는 것이며 종속되는 것이다."

- 신은 항상 우리는 보는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못 보지만, 나를 어디서나 보고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 만든 신이다. 인간의 힘이 약할수록 신의 힘은 강해진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나는 그를 보지 못할 때 가장 두렵다. 나는 못 보지만 나는 다 보여지는, 그 존재가 가장 무섭다. 신 중에 가장 오래된 신이 '태양신'이다. 우리는 태양을 볼 순 없지만 태양은 언제나 나를 보기 때문에..

철학자 미와 마사시 <몸의 철학>
"보는 것은 주체이고 정신이다. 보이는 것은 객체이고 사물이다. 내가 타인을 단순히 보고 있는 한 타인은 단순한 사물이다. 내가 주체로서 타인을 보는 것은 타인이 사물을 보고 있을 때, 특히 나에게 눈을 향할 때이다."

- 내가 보듯이 저 사람도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타자'가 된다. 그걸 모르면 '사물'이 된다. 독재자에게 시민들은 사물이다. 독재자들은 선글라스를 낀다. 자신의 의도를 감춘다. 그래서 선글라스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약한 존재이다. 사물이 되기 싫다면, 그 사람의 눈을 응시하라. 

느낀 점 : 


나는 용기가 없다. 내 글을 보이고, 내 표현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평가되는 것이 두렵다. 세상이 무서운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평생 누군가를 보면서 살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하지만 그건 관음증자가 되는 길이다. 나는 보는 자인가 보여지는 자인가? 둘 다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가 나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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