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책은 근대 세계를 여는데 가장 큰 (숨은) 기여를 한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을 주인공으로 한 책이다. 과거에 이와 관련한 포스팅으로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소장의 강의 '21세기 디지털 유목민 되기' 가 있었는데, 그때도 강조했었지만 나 역시 칭기스칸의 업적은 지금의 '네트워크와 연결의 시대'에서 새롭게 재조명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칭기스 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역시 얼마 전 중고책방에서 발견하자 흥미로운 마음에 바로 읽기 시작했다. 문체은 서사적, 분석적으로 쓰여져있어서 소설처럼 막 드라마틱하게 진행되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칭기스 칸과 그 후손들이 만든 혁신적 형태의 '14세기형 인터넷 제국'을 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핵심을 추려내서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일단 재구성 해놓고 나니 뿌듯하다. ^^ 재미있게 보세요!





칭기스 칸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 워싱턴 포스트 (1989)


머리말 : 사라진 정복자


- 운명은 칭기스 칸을 끌고다니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세 세대가 넘게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 미국을 예로 들어 칭기스 칸이 이룬 일을 이야기해 보자. 교육받은 상인이나 부유한 경작자가 아니라 문맹의 노예 한 사람이 순전히 인격과 통솔력, 결단력 만으로 미국을 건립했다고 생각해보라. 나아가 미국을 외세에서 해방하고, 알파벳을 만들고, 헌법을 쓰고 보편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새로운 전쟁 방식을 고안하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군대를 몰고, 양 대륙을 가로지르며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고 상상해보라. 그가 이룬 업적의 범위는 어떤 수준이나 관점에서든 말문이 막히고 만다. 


- 몽골인은 과학기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고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구조물은 '다리'였다. 다리는 역사상 어느 통치자보다 많이 놓았을 것이다. 몽골은 세계의 문을 열어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새로 흐르게 했다. 그들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각자의 생산품을 이용하여 전례 없는 발명품을 만들었다. 중국의 화약과 유럽의 종주조 기술을 응용하여 대포를 만들었다. 나아가 자유무역과 국제법, 보편적 알파벳에 근거한 세계질서를 수립하여 했다.  


- 유럽은 몽골과 접촉하여 그 문화적 혜택을 모두 누릴 수 있었으며 이러한 과학기술, 지식, 문화는 르네상스를 낳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양으로부터 인쇄술, 화기, 나침반, 주판 등을 흡수함으로써 유럽은 문명의 모든 측면을 바꾸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스 칸을 이해하고 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 인식의 대전환'을 다루는 것과 같다.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1) 칭기스 칸의 군대

- 몽골군은 보급품 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목적은 단순했다. 관대한 항복 조건을 내걸고 받아들이면 자비를 베풀고 거절하면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나아가 칭기스 칸의 군대는 초원 전사의 전통적 공격력, 기동력을 중국 최고의 과학기술과 결합했다. 기상에서는 기병대로, 요새를 만나면 새로운 공성 기술로 성벽을 뚫었다. 


- 이러한 칭기스 칸의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 부하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수완, 세계적 규모의 조직을 끄는 기술 등은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공식 교육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한 적이 없었다. 


2) 칭기스 칸의 인사

 - 칭기스 칸은 친족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충성도에 따라 책임을 나누었다.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고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는 것은 칭기스 칸의 핵심적 업적이라고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이 된다. 


- 칭기스 칸은 깊은 의리에 기초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당시 초원 부족들은 조금만 자극 받아도 편을 바꾸었지만, 칭기스 칸이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칭기스 칸 역시 장군을 벌하거나 해를 준 적이 없었다. 역사 속 위대한 왕과 정복자들도 이런 충실한 군신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다. 


- 칭기스 칸은 1203년 타타르 정복 후 몽골 부족을 혁신적으로 개혁했다. 그는 전사들을 아르반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부족과 상관없이 서로 형제처럼 함께 살고 싸워야 했다. 분대가 모여 100명을 이루고, 중대가 모여 1000명으로 된 연대를 이루었다. 그렇게 새로운 단위로 그들을 편성하여 낡은 체제의 가문, 씨족, 부족, 인종적 정체성의 힘을 파괴해버렸다. 


3) 칭기스 칸의 법령

- 칭기스 칸은 필요한 모든 제도를 새로운 기초 위에 수립하려 했다. 그의 대법령은 다른 입법자들의 법과 달랐다. 그는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어떤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낡은 관행은 없애고, 대법령과 부딧치지 않는한 집단별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은 허용했다. 모든 내적 불화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간통, 도둑질, 짐승 사냥 등을 금지했고, 모든 사람에게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 법 집행과 그것을 지키는 책임은 가장 높은 수준, 즉 칸 자신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을 선포했으며 이렇게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칭기스 칸이 죽자 불과 50년 정도만 이 원칙을 지키다 내팽개치고 말았다. 





2부 몽골 세계대전 1211~1261


4) 금나라와의 전쟁

-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칭기스 칸은 교역 물자 때문에 금나라와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금나라가 복종을 요구하면서 공격할 구실을 얻게 된다. 1211년 쿠릴타이(전체 회의)를 열리게 되고, 오랜 토론 끝에 공동체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는 점이다. 모든 전사의 완전한 헌신은 가장 높은 계급에서 가장 낮은 계급까지 모든 사람이 논의에 참여해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을 때 가능하다. 


- 칭기스 칸은 1211년 금나라를 침공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칭기스 칸 자신도 이 전쟁을 통해 다가올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4년이 지난 1215년, 칭기스칸은 역사상 전례없는 규모의 물자를 고향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과거에 진기했던 것들은 이제 필수품이 되었고, 정복을 할수록 정복에 대한 요구도 늘어났다. 세계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30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골인들은 아시아 전체를 가로지르며 만나는 모든 군대, 요새, 도시를 부수었다.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가 문맹의 젊은 몽골 기병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몽굴군은 전통적인 군대와 2가지가 달랐다. 첫째,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고, 둘째, 병참부나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점이다. 몽골군은 육포로 장거리에 오래 버틸 수 있었고, 천호마다 자체의 의무병을 거느렸으며, 모든 통신은 문자가 아닌 말(노래)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인명 손실의 최소화'였다.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 이야기를 퍼뜨리거나 피난민 무리를 앞세워서 적의 요새를 뚫었다. 가능한 큰 혼란을 일으켜 인명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4) 호라즘과의 전쟁

- 1219년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칭기스 칸은 교역을 위해 호라즘의 술탄에게 사절을 보낸다. 하지만 술탄은 사절을 죽임으로써 칸이 다시금 대규모 전쟁 준비를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칭기스 칸은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고대 문명 전체(아랍, 투르크, 페리스아)를 공격하게 된다. 13세기 무슬림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고, 가장 높은 수준의 학문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몽골군은 어느 곳보다 무자비하게 이곳을 짓밟았다. 


- 몽골군은 이 전쟁을 통해 여러 전략을 배웠다. 우선 그들은 항복하는 자들에겐 정의를 약속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파괴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약탈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모든 귀족을 죽임으로써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공포가 서기나 학자의 펜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불패 신화도 학자들의 글과 편지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 칭기스 칸은 지도력의 첫번째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쳤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권위를 쥐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원로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칭기스 칸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모았지만 평생 소박한 생활을 했다. 그는 백성을 자식처럼 대접하려고 노력했고 재능있는 자들을 출신과 상관없이 형제처럼 대했다. 그는 자신이 역사상 다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 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제 부족의 족장이 아니었다. 칭기스 칸는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사람과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려 했다.


6) 유럽과의 전쟁

- 칭기스 칸의 아들 우구데이에게 정복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위대한 군주들처럼 영원한 수도를 갖고자 했다. 게르들을 모아놓은 야영지가 아니라 진짜 건물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상인들이 그의 새로운 도시를 찾아오게 하기 위해 모든 물건을 아주 높은 값에 사주었다. 결국, 1235년 우구데이는 아버지의 부를 거의 모두 탕진해버렸다. 제국 전역에서 공물이 들어왔지만 아버지 시절보단 적은 양이었다. 몽골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 했다. 


- 위대한 장군 수베데이와 제베는 유럽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8만의 러시아 병력들은 몽골군에 비해 2배나 많았지만 훈련이 잘 된 몽골군의 후퇴 전략에 넘어가 90%가 전멸했다. 거의 1000년 전 훈족이 유럽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 군대가 유럽의 대군을 완파한 것이다. 그것은 곧 다가올 유럽 봉건제 붕괴의 전조였다. 하지만 우구데이는 몽골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하는데, 그것은 몽골군을 나누어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 어정쩡한 공격 때문에 송나라는 비틀거리면서도 40년을 더 버티고 나서야 몽골에게 항복했다. 반면 유럽 원정은 군사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간의 전리품에 비교하면 거의 보잘것 없었다.


7) 칭기스 칸의 후손들

- 몽골 남자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여자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몽골에 필요하던 외부의 재능을 통치세력 내부로 끌어들였으며, 수도원과 학교, 책의 인쇄, 사상과 지식의 교류를 지원하여 제국의 새로운 기초를 닦았다. 몽골이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결국 이 여자들의 손에서 시작된 새로운 제도들이었다. 


-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앞다투어 전쟁을 계속했고, 무슬림 왕국의 도시는 거의 모두 정복했다. 몽골은 결국 칭기스 칸의 손자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그는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을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이후 몽골의 권력은 쿠빌라이와 다른 후손들로 나뉘어졌으며 그들은 서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대한 송나라를 무너뜨리겠다는 쿠빌라이의 계획은 여전히 요원한 꿈처럼 보였다.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 1262~1962


8) 쿠빌라이 칸과 새로운 몽골

-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가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같은 군사 기술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머리가 좋았다. 그는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루었다. 즉, 그는 중국식 수도, 중국식 이름,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고, 중국의 지성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좋은 행정과 정책을 통해 중국 백성이 자신을 새로운 왕조의 황제로서 받아들일 만하게 만들었다. 


- 그는 법전을 만들면서 기존 몽골 법과 중국 법이 양립할 수 있도록 개혁했으며, 대중의 지지를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벌을 완화했다. 그리고 전통적 관료에게 행정을 맡기지 않고 다양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행정 지원을 받았다. 그는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고 하나의 인종이나 민족에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쿠빌라이는 대규모 회의와 토론을 통해 결정내리는 몽골의 쿠릴타이 방식을 도입했다. 중국식 기준에서 보면 이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 비능률적인 제도였지만 몽골은 다양한 작은 회의체를 장려했다. 이런 혁신적 관료 제도는 이후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명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방식의 중국 전통적 관료제로 돌아가게 된다.


- 쿠빌라이는 교역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폐 사용을 급격히 확대했다. 뛰어난 학자들을 위해 한림원을 재건했고, 과거 문헌을 편찬했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치세에 공립학교가 2만개나 세워졌다. 그는 인기를 위한 단기적 전략이 아닌 장기적 전력을 체계적으로 추진했으며, 전쟁도 군사 작전이 아닌 선전전을 지휘했다. 결국 몽골이 중국을 통일하자 100년간 전례 없는 정치적 안정 속에서 상업, 기술, 지성이 화려하게 꽃필 수 있었다.  


9) 팍스 몽골리나

- 몽골은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 있던 문명들은 이제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대륙간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몽골은 이제 기병과 공성 무기를 보내는 대신 겸손한 사제, 학자를 보냈다. 정복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평화의 시대는 막 시작되었다. 훗날 학자들은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라고 명명했다. 


- 몽골의 치세에 학자들은 중국, 아랍, 그리스의 지리 지식을 조합하여 가장 높은 수준의 지도를 만들었고, 쿠빌라이는 무역을 위한 항구 건설을 장려하여 전보다 더 정확한 해도를 만들었다. 기존 중국은 전통적으로 상업을 제한했지만, 몽골은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심지어 상인들은 중국에서 상아로 성모 마리아의 상을 깎아 유럽에 수출하기도 했다. 


-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조했지만 몽골 제국은 가벼웠다. 그들은 각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으라고 장려했다. 단순히 물자 교환이 아니라 지식 교환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의 침술같은 특별한 치료법은 무슬림으로, 무슬림의 뛰어난 수술 방법은 중국으로 교역했다. 달력과 연감을 통일시켰고, 인도 수학자들의 도움으로 국가의 모든 물자를 기록했다. 몽골은 이데올로기적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다. 그리고 답을 찾으면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그 동안 유럽인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교역, 기술 이전 등 몽골의 모든 혜택을 입었다. 유럽은 화약, 나침반, 종이와 인쇄 기술을 비롯한 해양 장비의 광범위한 영향을 받아 이후에 새로운 가능성, 르네상스를 경험하게 된다. 


10) 몽골의 멸망

- 1332년 몽골 통치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의 근원지는 '역병'이었다. 페스트는 인간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계속 퍼져나가게 된다. 감염된 지역은 즉시 고립되었고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유럽, 페르시아, 러시아, 몽골의 연결은 끊어졌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오랫동안 몽골인의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졌어요 대규모 교역이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들이란 이점이 사라지자, 각 나라들은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르기 시작했다. 


-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들이 자신의 영성을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동안 담 너머 바깥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화폐의 가치를 떨어지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결국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가 빠르게 붕괴되었고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지배는 끝이 났다. 남은 몽골인은 달아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흡수되었다. 이후 명 왕조의 통치자들은 기존 몽골 제도를 조직적으로 철폐하고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중국은 다시 금속화폐로 돌아가게 되고 육중한 성벽은 다시 올려졌다. 결국 칭기스 칸의 제국은 세계사 최후의 대형 부족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칭기스 칸의 어록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지도자의 전망이 절대 원로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목표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삶을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삶도 경영할 수가 없다."


"지도자는 백성이 행복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잃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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