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아마 2월이었나? 3월이었나?
북카페에 앉은 자리에서 다 봐버린 소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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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라는 작가는 나와 많이 닮았다.
그냥 데미안을 읽고 싯다르타를 읽은 후 나의 느낌은 그렇다.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관점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물론 나 같은 사람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많이 팔렸겠지? ㅎㅎ)
빛과 어둠을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닌 빛과 어둠 그 전체를 느끼는 것..
밝기에 지향해야 하고 어둡기에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둡기 때문에 밝음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그 역도 성립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존재 역시 그저 밝음이 아니라 밝음과 어둠 속에 존재하는
그 모든 존재여야 한다는 점.
오늘은 글이 이렇게 써지는 구나..^^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
... 그는 너무도 정확하게 예전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 대해, 인도에 대해, 미트라스에 대해, 아프락사스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보았던 형상들을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러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로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미 많은 고독을 나는 맛보았다. 이제 예감했다. 더 깊은 고독이 있으며 그 고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의 집들, 사람과 시설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여기에는 동화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하여 갈라져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고립되어 있던 사람인 내가, 완전한 혼자임을 맛보고 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연대를 보고 시셈이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았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느 종교든지, 어느 구원론이든지 애초부터 죽어 있고 무익했다. 우리가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이런 것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들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기꺼이 살리라는 것.
...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자세였기 때문에, 오로지 그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어, 그것은 모세와 부처에게 적용되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에게도 적용되지, 어느 조류에 봉사하느냐, 어느 극의 다스림을 받느냐, 그것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한번은 그녀가 나를 한켠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당신이 믿지 않는 소망들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요. 그런 소망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완전히 올바르게 소망하든지요. 한번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성취를 확신하도록 그렇게 소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성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망하고, 다시 후회하고 그러면서 두렵지요. 그 모든 것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동화 하나를 들려드리지요.'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별과 사랑에 빠진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청년은 바닷가에 서서, 두 손을 뻗고 별에게 기도했고, 별에 대해 꿈꾸고, 그의 생각은 별에게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혹은 안나고 생각했다. 별은 인간의 포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성취에 대한 희망도 없이 별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 생가겡서 포기와 말없는, 변함없는 고통, 자신을 개선시키고 정화시킬 고통에 관한 삶 전체를 다룬 시를 지었다.
그의 꿈들은 그러나 모두 별에게로 쏠렸다. 한번은 그가 다시 밤에 바닷가 높은 절벽에 서서 별을 쳐다보며 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극도로 커진 그리움의 한순간 그는 별을 향하여 펄쩍 뛰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뛰어드는 순간 번개같이 퍼뜩 그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결국 그는 으스러진 채 바닷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만약 뛰어드는 순간에, 성취를 굳건하게 확실하게 하는 영혼의 힘을 가졌더라면, 그는 위로 날아올라 별과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되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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