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깊은 구절


1. 예술가란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세상을 변형시키는 것, 그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것.
2. 생이 만약 영원이 되돌아오더라도 그대는 생을 사랑할 것인가, 그대는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3. 운명은 견디는 것도, 반항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이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운명애라고 한다. 
4. 권위주의적 종교를 믿을 수록 사람들은 오만하고 의존적이 되며, 인본주의적 종교를 믿을 수록 사람들은 사랑과 성숙한 지혜가 가득차게 된다. 
5. 확신이란 감옥이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6.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7.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삶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성찰하는 글쓰기 


1. 
2006년이었나, 어느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학교에서 개최하는 강의를 신청했다. 원래 학교에서 여는 모든 행사에 비협조적이던 나이지만, 그날은 어쩐 일로 심심했던지 잠자코 들어갔다. 강의를 시작하자  게이처럼 생긴 사람이 나와서 느끼하게 강의를 시작했다. 본인은 스스로를 외국인 노동자를 닮았다고 칭했다. 그의 능청스런 목소리와 웃긴 이야기에 다들 무지하게 웃었었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민국 1 보이스 컨설턴트라고 칭하며 그런 직업이 없어서 스스로 만들었다고 했다. 나에겐  말이  인상깊었는데, 그가 바로 지금  유명해진 김창옥 강사다. 물론 게이는 농담입니다만.

단순히 그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의 강의가 머릿 속에  오래 각인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 그것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을 스스로 만들  있다는 것도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역시 말로 사람들과 배운 것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어느새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2006년의 나는 아마 지금 나의 이런 모습을 꿈이나 꾸었을까.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인생은 살아봐야 아는 것.
 
니체는 말한다. 예술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세상을 변형시키는 , 그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일이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 그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교육에서의 예술은 스스로 참된 사람 되고, 피교육자가 그러한 참된 사람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가장 어려운 직업을 택한 게 아닐까. 처음부터 이러한 것을 염두한 것은 아니나, 말로 사람들 앞에 서서 몇번 이야기하다 보니 그것의 위험성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자기계발 강사가 빠지는 함정, 스스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말의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 전하려는 .  역시 그러한 함정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강의가 익숙해진 오늘 , 다시 던져야  질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예술가인가, 단지 예술을 말할 뿐인가

2. 
연말이다. 벌써 연말이다. 심마니스쿨을 시작한지는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나는 일의 기본도 모르고 강의도 얼마 해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비논리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큰 위안을 준다. 언제나 죽을 지경에 이르면 누군가 짠 나타나서 도와준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이제는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신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감사한 지난 5년이다.
 
하지만,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아니, 종종이 아니라 아주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대로 살면 되는건가?’ 별 생각없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이런 생각으로 몸서리쳐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나는 두렵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 만날 때 나는 두렵다.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두렵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진실되게 뚜벅뚜벅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두렵다. 내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내 삶의 일면들을 그런 이들을 만날 때 도드라지게 보게 된다. 아무리 기만하고 싶어도 기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니체는 말한다. 강력하게 말한다. “생이 만약 영원 되돌아오더라도 그대는 생을 사랑할 것인가, 그대는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이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후회없이 열심히 살던 시절엔 이 삶을 다시 산다해도 살고 싶다고 말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아니다. 조금씩 뭔가 어긋나고 있다. 삶에서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아까 언급했던 신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분명 바로잡으라고. 이 문제를 이젠 극복해야 한다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을 너무 쉬이 여기는 나의 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언제? 바로 지금이다.

3.
내가 과거에 성찰했던 하나의 질문이 있다.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나름의 언어로 답했다.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다고. 사람을 으로 규정하면, 가장 우선시되는 가치는 바로 생존이다. 그러한 사람의 세계관은 어떠할까? 그 사람에게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다. 토머스 홉스의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정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을 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규정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영혼이라든지. 그러한 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가치는 바로 의미. 그 사람은 어떤 세계관을 가질까? 오래 사는 것에 관심이 있을까? 없다. 그저 어떻게해야 이 다음 내세를 위해 살 수 있을까 라든지 뭐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그렇다면 우린 어떠한 정의를 갖고 삶을 살아야 할까? 몸과 영혼 중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까? 나는 하나의 정의에 치우치는 순간 삶은 균형을 잃어버린다고 믿는다. 인간은 몸이자 영혼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자 동물이다. 이러한 삶의 역설과 인간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린 생을 이해하고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전쟁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니체는 분명, 인간의 아이러니함을 이해했을 것이다. 니체는 인간을 단순히 몸으로 규정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안일함을 탐하는 자들을 말세인이라 규정하면서 언제나 초인을 지향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순히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꾸며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비방하고 깔보고 탓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강하게 존재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만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고난함 속에서 끈덕지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경외했다. 나도 그러한 니체의 시선을 닮고 싶다. 발을 땅에 닿으며 생생하게 나의 생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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