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문
인문학의 기본 방향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시민을 위한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인문학이 자칫 개인의 덕성 함양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인문학이 추구했던 정신에 위배된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성되는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를 시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시도이다. 인문학은 학문적으로 심화되어야 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확산되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장에서 '인문학은 탁월한 개인을 만들기 위한 처세의 방편이 아니다.' 라는 글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과거에 이지성 작가가 쓴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읽으며 든 불편한 생각이 해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의 부재는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이었는데, 인문학을 하는 이유가 마치 천재가 되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함이란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저자의 목적은 그러한 이유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숨은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인문학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서 볼 책은 바로 <희망의 인문학>이다. 그 책은 시민을 위한 인문학이란 취지를 현실로 구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1. 논어 / 공자


앎이란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인간은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고난할 때 배우는 사람,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우린 많은 경우 곤에 굴복하고, 곤을 변명으로 대한다. 나이 핑계, 애 핑계, 부족한 잠을 핑계로 댄다. ‘학’을 거부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지지대가 필요하며, 그것이 평생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이는 정말 천재다. 태어나부터 아는 사람이 분명 세상에는 있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한 천재로 유명한 율곡 이이 선생님보다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김득신 같은 분을 더 존경한다. <백이전>을 1억1만3천번을 읽으면서 자신의 아둔함을 극복한 스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최소한 배움을 멈추지는 말자. 배움이 없다면, 영원히 이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건 별로 즐겁지 않다. 


2. 목민심서 / 정약용

일이란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진리다. 이런 문장은 머릿 속에 아예 외우자. 내가 리더로 속한 모든 조직은 정확히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뀌면, 분명 바뀐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조직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심플한 진리. 


3. 성학십도 / 이황

자아 완성이란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할 따름이다. ‘자아 완성’이란 장경부가 말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떨기 난초가 꽃을 피워 종일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난초 스스로는 향기를 내고 있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자아 완성을 위해 공부하는 뜻과 꼭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와 기를 겸하고 성과 정을 통섭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 정서가 되는 순간이 한 마음의 기미요, 온갖 변화의 지도리가 되며 선과 악이 거기서 나누어진다. 학자가 진실로 한결같이 을 유지하여 이와 욕의 구분에 어둡지 않고, 더욱 여기에서 삼가기를 지극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마음이 발하기 전에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깊게 하고, 마음이 이미 발하였을 때에는 성찰하는 습관을 익숙하게 하여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힘써 그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중을 잡는’ 성학과 ‘체를 보존하여 작용에 응하는’ 심법을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여기에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자아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이 아닐까. 물론 자아 완성이 내면의 양심을 깨우고, 저절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알기에 큰 문제는 없다. 내가 아는 말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군자란 <내성외왕>이 아닐까. 내적으로는 성인이 되고(아마 자아 완성과 같은 말일 것이다.) 외적으로는 왕이 되는 것(군림하는 왕이 아닌,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 이를 위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하는 것이니라. 


3. 격몽요결 / 이이 
 
공부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과거에 어떤 글에서 이이가 12살에 썼다는 자경문을 읽고 한 동안 정신을 못 차린 적이 있다. 당시에 묘한 열등감에 사로 잡혔었다. 내가 30이 다 되어서야 '아 그게 중요하지'라고 알아낸 것을 누군가는 고작 12살의 나이에 스스로 썼다는 것에 좌절했었다. 물론 이이와 나를 비교한다는 건 아니나, 왠지 슬픈건 사실이었다. ㅠ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히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맞다.   
 

4. 맹자 / 맹자
 
사람의 본성이란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는 일이 많았다. 이러하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우산에는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맹자가 주장한 본성의 선함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했다. 이때의 적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고, 대인은 순수성을 잃지 않은, 태어난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양학자는 공자와 맹자다. 특히 맹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나 역시 비슷하기에 아무래도 좀 더 마음이 간다. 인간의 온전함을 믿고, 그 가능성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교육이고 그러한 교육을 하고 싶어서 심마니스쿨이란 커뮤니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분명 언젠간 그에 맞는 흐름과 과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나의 성장에 달려있으리라. 


5. 장자 / 장자

자유란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둘레의 치수는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 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대붕은 허구적 새, 메추라기는 현실적 새다. 메추라기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대붕은 초월적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장자 자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로부터 속박되어 있지만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붕은 현실 세계로부터 비약하여 이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도를 확보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꼈으면 한다. 그래야 아픈 사람들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힘들지 않으면 절대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다. 어머니가 돼서도 안 되고 아버지가 돼서도 안 된다.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 높이만큼 겪었던 고통의 깊이만큼 나는 그만큼 어른이 되었을까를 고민해 봐야 한다. 

19세기 명상가이자 사상가인 구르지예프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 먼저 그 사실을 깨우쳐야 자유로워 질 수 있고 했다. 나도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그 사실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고 인정하는지 척도가 어른이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경험과 성찰 없이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각자에게 필요한 과제를 풀어야 우린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6. 사기 / 사마천

삶과 죽음이란
사마천의 생사관을 잘 나타내는 말이 ‘구우일모’이다. 다음은 사기 <보임안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 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해 놓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죽음이 있으려면 삶 자체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해도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보여 준 행위나 행동이 천박하거나 형편없었다면 그 죽음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이기에 이 말이 와닿는다.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나는 위대한 죽음을 맛볼 수 있을까? 내가 눈을 감을 때 어떤 여한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렵다. 
 

개혁이란
입목득신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상앙이 진나라를 개혁하려고 하니 백성들이 전혀 믿지를 않았다. 그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않고든 법이 시행되지 않겠단 생각으로, 성북 밖 한쪽 문에다가 나무 기둥을 세워 놓고 이것을 저쪽 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금 스무 냥을 상으로 주겠다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는다.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상금은 오십 냥으로 올린다. 그랬더니 지나가는 젊은이 하나가, 할 일도 없고 힘이 남아도니까 나무를 옮겼다. 그러자 상앙이 그 자리에서 오십 냥을 상금으로 주게 되고, 이후 백성들은 상앙의 정책에 믿음을 갖게 된다. 

“법이 안 지켜지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으며,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따르지 않습니다.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낡은 습속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예의범절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당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무언가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시간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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