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이불견 청이불문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으며, 헬렌 켈러는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 사용법’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라고 했다. 보지 못하는 자신보다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더 못 본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숲은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것 없었어요”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것이다.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혀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냐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이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 떠오를 장면이 없을 것이다. 

2.
기억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 많은 친구들보다, 감동을 잘 받는 친구들이 일을 더 잘한다. 감동을 잘 받는다는 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돈이 있건 없건 상관 없다. 나뭇잎 하나에도 감탄하고 음악 하나 들으면서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들이 일도 잘 하고 인생도 풍요롭다. 

3. 
박웅현, 내 인생의 질문은 무엇인가
잔디가 자라는 속도. 정 많은 나뭇가지가 가을 바람에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속도. 그 똑같은 나무가 다부진 가지마다 이미 또 다른 봄을 준비하고 있는 속도. 아침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나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하얀 강아지가 자라는 속도. 내 무릎 사이에서 잠자고 있는 고양이가 늙어가고 있는 속도. 부지런한 담쟁이가 기어이 담을 넘어가고 있는 속도. 바람이 부는 속도. 그 바람에 강물이 반응하는 속도. 별이 떠오르는 속도. 달이 차고 기우는 속도. 내 인생을 움직이는 질문. 내 인생을 움직이는 질문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그 속도에 내가 온전히 편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동차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속도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숨쉬는 속도가 파닷가 파도 치는 속도와 한 호흡이 될수 있을까. 내 인생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4.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이다. 만약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5. 
알렝드보통, 인생의 풍요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존 러스킨, 인생의 풍요
삶, 그 사람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6. 
푸르스트, 죽음이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갑자기 생기는 삶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흥미를 잃은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는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일상적인 형태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돌이킬 수 없도록 음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사는 거 정말 힘들어, 거지 같아.’라고 종종 내뱉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 안도해야 한다. 하지만 사는 게 힘들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는 순간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다. 우리가 힘들다, 죽겠다 하는 건 삶의 일상에 흥미를 일었다는 것이다. 아침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저녁에 사람 만나고 집에 가는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 ‘지겨워’라고 했는데 내가 내일 죽는다면? 그럼 다 그리워지는 것이다. 결국 흥미를 잃은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이다. 삶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서 실상 죽음을 반기지 않는다는 건 삶의 문제가 아니라 내 태도의 문제라는 증명이다.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의미는 우리가 시간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프루스트, 신문 읽기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을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7. 
카프카, 책이란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8.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9. 
장 그르니에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몸과 혼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 점이 바로 고양이와 그 사상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일체의 노동이란 노예 생활로 여기는 존재들..

10.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절단된 부분을 만들고 그것을 사물이라 부르는 것은 인위적인 태도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11.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불성은 흡사 방 한구석에 먼지 덮여 있는 어릴 때의 장난감 같은 것이다.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을 버려야 합니다. 

12. 
사실 상, 내가 가장 마음에 남는 한 문장은 바로 이것.
마루야마 겐지

육체와 사는 동안 난 육체에 집중하겠다. 영혼에 집중하는 건 육체와 헤어진 다음에도 할 수 있다.



추천 책 리스트
- 최인훈 / 광장
- 김훈 / 자전거 여행, 개, 화장
- 알랭드 보통 / 불안,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고은 / 순간의 꽃
- 미셸 투르니에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알베르 카뮈 / 이방인
- 앙드레 지드 / 지상의 양식
- 장 그르니에  / 섬
-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레프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 프리초프 카프라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느낀 점
- 나는 이 책은 ‘가볍게' 읽었다. 하지만 내가 책읽는 방법에 '무거운' 영향을 끼쳤다. 마치 도끼처럼. 박웅현 CD는 광고기획자로서도 탁월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들여다보기’라는 것에 전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모든 창조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 ‘관찰하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책을 그렇게 들여다보면서 읽고 있는가.

매년 100권을 읽고 있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 어느새 무너지면 안 되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의 탑이 되어버린건 아닐까. 하지만 참 의미없는 일이다. 아무리 많이 읽으면 뭐하나 그 탑이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다 쏟아져 내릴 텐데 말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하고, 강의하고, 글로 쓰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금 말했던 활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책을 들여다 보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분명 좋은 책이 많았음에도 머리에는 얼마 남아있지 않는걸 보면.. 내가 너무 건성건성 읽은 건 아닐까 불안감이 든다. (분명히 이 생각도 변할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매년 50권을 넘기지 않도록 해야 겠다. 일주일에 1권을 보더라도 정말 좋은 양서를, 천천히, 나의 온몸으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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