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미있는 강연을 들었고, 인상깊은 책을 읽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강연과 책 그리고 개인적 경험이 연결되었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재미있게 본 강연은 바로 TED <당신이 중독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잘못되었습니다>이다. 요한 하리란 작가의 강연이고, 내용이 너무 좋아서 전문을 대략적으로 옮겨 적어 보았다. 링크는 여기로. 내용이 길지만, 핵심만 정리하면 이렇다. 기존에 우린 중독의 원인을 ‘약물’ 그 자체에 둔다. 하지만 중독의 원인은 그것이 아니다. ‘소외’가 중독의 진짜 원인이다. 감옥에 갇힌 쥐들은 헤로인에 쉽게 중독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행복하게 놀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쥐 공원’에서 노는 쥐들은 그것을 쉽게 섭취하지 않는다. 마약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포르투칼 역시 중독자들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을 역으로 사회와 재결합하는데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마약 비율이 현격하게 줄었다. 마약을 합법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은 ‘쥐 감옥’에 가까운가, ‘쥐 공원’에 가까운가? 우리가 아무리 다양한 SNS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루 종일 심심할 틈도 없더라도, 따스한 온정을 나누는 경험이 없다면, 깊은 친밀감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인간 관계’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완벽한 쥐 공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의 쥐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TED 강의 중 이런 말이 나온다. "피터 코헨 교수는 ‘중독’이라 불러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교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에 억눌려 교류를 할 수 없을 때, 우린 안도감을 찾기 위한 어떤 것을 갈구하게 된다. 도박, 성인물, 코카인, 대마초, 게임 등. 그게 우리의 본능이다. 뭔가와 결속하려는 것. 그렇게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이 말에 참 많이도 공감하게 된다. 강의의 결론은 마지막 문장이다. “중독의 반댓말은 단지 ‘많은 정신’이 아니다.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관계’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니었다. 최근 몇 년의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과거의 나는 굉장히 관계 맺기에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때는 그 정도가 심해서, 친한 친구 1-2명을 제외하곤 제대로 관계도 맺지 못했었다. 막 왕따당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영향력은 전혀 갖지 못한, 정말 그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관계를 맺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마냥 귀찮았다. 그래서 되려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거나, 혼자서 책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20대를 지나면서 그런 폐쇄적인 성향은 다소 나아졌으나, 그것도 역시 ‘비교적’이었다. 게다가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2년 동안은 영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에 빠져서 사회적 관계를 고립시켰던 때도 있었다. 자취방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한 달 가까이를 보낸 적도 있었고, 게임이나, TV프로그램, 성인물과 같은 것에 중독 된 것도 사실이다. 가족과도, 친구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관계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지금 생각하면 그리 건강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최대의 암흑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중독’에 빠진 것이 아니라, ‘관계’로 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 ‘친밀함'로부터의 소외는 결국 그에 마땅한 대안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고, 그 대상은 앞서 말했던 그런 ‘구하기 쉬운 것들’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튜 캘리의 <친밀함>이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친밀한 인간관계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거울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고립되어 혼자 있으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우리를 꺼내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다.” (P.26-27)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의 문제점은 이러한 나에게 거울이 되는 ‘친밀한’ 사람들이 적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직언’을 들을 수도 없었고, 내 확신을 스스로 의심할 성찰 능력도 더군다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방에서 온갖 종류의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방에서 나오는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허긴, 아직 내 그림자의 일부는 아직 그 방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튜 켈리의 <친밀함>은 정말 좋은 책이다.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 삶을 더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고, 더 나은 내가 되도록 기여하는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나라의 좋은 책들은 대부분 절판되기 마련이고, 이 책도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없으리라. 이 책은 ‘인생’은 곧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옮겨본다. "인생이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 어떤 사람과 진실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당신 자아의 모든 면을 보여주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가면을 벗고, 숨겨둔 무기를 내려놓은 채 겸손하게 우리의 삶으로 이들을 안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장점과 단점, 허물, 결점, 약점, 재능, 능력, 성취 그리고 잠재력은 또 무엇인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인 까닭이다.” (p.19) 친밀함이란, 자신을 성숙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표현이다.
그렇담, 친밀함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엔 양면성이 있듯, 친밀함도 그러하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선 한 가지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건 무엇일까? 바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두려움’이 아닐까? 매큐 켈리에 따르면, 이 두려움에서 엄청난 기만이 생겨난다. 이 기만 때문에 우린 타인과 관계 맺고, 진실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 고난 속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까닭에 어떤 이는 술의 힘을, 누군가는 쇼핑의 힘은, 혹자은 약물의 힘을 빌린다. 매튜 켈리의 말은 이어진다. “모든 중독은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허전함을 채우려고 할 때 생겨난다. ... 중독은 우리들을 자기중심적인 환상세계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는다. 중독은 우리들의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에 확신을 심어준다.” (p. 31-32) 이렇게 소외와 중독은 ‘우리의 거울 - 타자’를 지운다. 오로지 ‘에고’만을 살찌게 할 뿐이다.
중요하니 반복하자.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친밀함’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결코 친밀함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상의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드러내야 한다. 가장 먼저 누구에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즉, 타인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친밀해져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자신과 함께할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답변은 이렇다. "오직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고독하고 고요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다.” (p.24)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되려 우린 ‘홀로 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홀로 됨'은 ‘외로움’와 비슷한 양태를 가지지만, 본질적으론 완전히 다르다. ‘외로움’이란 '(원치 않지만) 홀로 되어 버린 것'이며, '홀로 됨’이란 ‘(나의 선택에 의해) 홀로 있는 것’이다. 자발적 고독은 결코 고독이 아니다. 그건은 나 자신과 친밀함을 쌓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다. 깊은 자기인식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대화 역시도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홀로 됨’이 필요하다. 그나마 내가 조금씩 철이 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유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 이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생각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나누기 시작하면서, 다시 말해 더 깊은 수준의 대화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홀로됨과 커뮤니티의 '지혜로운 변증법'을 이루어야 한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희퍼는 <함께 삶>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이 경고를 지침으로 삼는다면,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심톡을 하는 이유는 이런 욕구와 갈망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외로웠던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처음 심톡을 열 때 이런 욕구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이러한 결과를 무의식적으로 그리면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친밀함을 위해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첫 시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친밀함이란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기억하기 쉽게 한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가 분별력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p.21) 그리고 내가 파커.j.파머를 위시로한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것도, 사회적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에 관심이 있는 것도, 계속해서 학습조직을 꿈꾸는 것도 모든 것은 이 ‘관계’라는 숙제를 풀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는 것은 참 유익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드러내게 되고, 그 과정에 내가 몰랐던 나의 내적 동인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뒷걸음 치다가 뭐라도 걸린 격이다.
정리해보자. 당신이 만약,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면 주위를 돌아보자. 아니, 스스로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없더라도, 공허하고, 사는 것이 헛헛하다면 자신을 돌아보자. 당신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들과 얼마나 ‘자주’ 만남을 갖는가? 그리고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한번 떠올려보자. 설사 당신이 놓인 곳이 혼자뿐인 ‘감옥’이라도, 이제 우린 서로의 힘으로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 손을 내밀면, 생각보다 우리 주위엔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첫 번째, 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철학자 헤카토가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어떤 진전을 이루었는지 그대가 물었지? 난 이제 막 나 자신의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네’ 그 글에 감동한 세네카가 말했다. "그 말이야말로 내개는 진정 위대한 은총이었다.” 친밀함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내 생각이 어떠한지, 내 느낌과 욕구는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이다. 그 내면의 시간이 없이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 없이는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무엇일까?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 바로 가족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얼마 전 여름 휴가였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랑 함께 놀고 있었고, 나와 아내는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나는 ‘연결됨’을 경험했다. 그리고 인식했다. "가족은 세상과 내가 이어지는 가장 강한 연결선이구나”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우린 수 없이 넘어지고 싶어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뿌리, 가족이 주는 힘으로 말이다. ‘깊은 관계’에의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가족부터 만나보자. 그리고 가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자. 더 나은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기여하자. 그렇게 친밀함의 원을 조금씩 확장시켜 보자. 우리 사회를 감옥이 아닌, 정말 멋진 ‘테마 파크'로 만들어 보자. '중독과 소외'라는 현대 사회의 이 고질적 문제는 이 작은 실천으로 점차 해결될 수 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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