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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트/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

[칼럼]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나는 누군가를 경계한다. 
나는 2015년 올해 서른 세살이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나이다. 아직 사회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사람 경험은 적지 않은 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게을리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겪고, 관계 맺었었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몇 가지 기준들이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이것은 내가 체계적이고 면밀하게 분석해서 만든 기준이 아니다. 그것보단 오히려 몸이 반응하는 기준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그 느낌을 예를 들어보자. 몇 년 전에 운전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앞뒤좌우 간격’이었다.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운전하는 입장에선 간격을 모르니 회전할 때 마다 옆 차와 부딪칠 것 같았고, 주차할 때도 한참이나 해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연수를 도와주는 분께 물었다. “선생님, 어느 정도 운전해야 앞뒤좌우 간격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시간이 걸리지요. 하지만 빨리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자동차 양 옆을 싸-악 긁혀보면 됩니다. 그때 경험은 절대 잊혀지지 않거든요. 그 간격을 몸이 기억하고, 그 다음부턴 알아서 피합니다.” “아, 그..그렇군요"

나에게 이 조언은 꽤 인상깊었다. 왜냐, 이것은 비단 운전에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강렬한 감정적 경험을 통해 경계를 형성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고, 다치고, 경험하다 보면, 나중엔 비슷한 패턴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몸이 반응한다. 다들 그런 경험들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몇 년의 사회 생활과 관계를 거치면서 나에겐 나름의 ‘인간관계 안테나'가 생겼고, 그 레이더 망에서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견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을 편견없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받을 정도의 훌륭하고 멋진 사람은 아니다. 앞으로도 그런 천사 코스프레는 지양한다. 나는 독립적이며, 나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관계 지향적인 성격이 아니기에, 더욱 엄격하게 관계 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인간관계 안테나’는 적어도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과 공간을 보장한다. 앞으론 더 성숙해져야 겠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한번 끄적거려 보려한다.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 다섯 가지 부류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그 첫 번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라 실망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기에.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작게는 작은 약속에서부터, 크게는 회사의 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평가 지표이자, 평가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일수록 자주 나타난다. 교육이나 강의 분야, 종교 분야, 정치 분야, 사업, 방송 분야 등등 나도 강의나 코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기에, 이 기준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김제동도 그랬다. 집으로 갈 때 마다 후회한다고. 스스로 말했던 것 반의 반 만큼만 살라며 자책한다고. 그 말이 맞다. 이 기준은 말이 많은 사람들에겐 불리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간격을 주의깊게 살피고,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려는 ‘자기인식 능력' 그리고 ‘실천하려는 의지'이다. 그 노력의 여하는 아주 결정적이다. 왜냐면, 시간이 흐르면 결국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좁히려고 애쓰는 사람과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말이다. 그래서 이 영역을 분별하기 위해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사적 거리에서 지켜봐야하는 어려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정확하게 그 사람을 판별하는 방법이다.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신뢰하는 것. 말과 생각 심지어는 글도 그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과 선택이며, 그것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삶을 길게 지켜보는 것.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장 옳다. 관계를 맺을 때 그 사실만 알고 있어도, 천천히 관계 맺는 법만 알아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을 보면서 천천히 사귀어도 된다. 오래 갈 사이라면 되려 그게 더 좋다.

두 번째 사람들은 바로 ‘공과 사’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어려워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파커.j.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훌륭한 교사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지역에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줄이기 위해 우리 교사들은 학생, 과목, 심지어 스스로부터도 도망친다. 우리는 내적 진실과 외적 연기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교사라는 역할을 연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지역. 그 지점에서 서 있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면, 결코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는 일과 떨어질 수 없기에. 하지만 나는 자주 목격했다. 자신의 일과 삶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사람들을. 본인의 삶이 지향하는 이야기는 하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 혹은 자신이 다루는 주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 높은 벽을 쌓고 연기하는 사람들. 이해는 가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끔은 대의를 부르짓는 경우도 많이 봤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들이 닿게 되는 결말은 대부분 ‘삶의 망가짐’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 왔던 것은 아닐까. 삶을 도피하고자 하는 결과가 일이어선 안 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될 것이다. 관계를 맺을 때, 그래서 나는 서로의 삶을 들으려고 한다. 그 사람의 맥락과 일이 일치할 때 좀 더 신뢰하고, 가까이 다가간다. 첫 번째 원칙은 물론 지켜져야 하겠지만. 

세 번째 사람들은 과장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과장하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 같은 자기PR의 시대에 참 뒤떨어지는 말이긴 하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사실 요즘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어딘가에 빗대어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은 많다. 예를 들면, 자신이 머무는 공간, 머물렀던 회사나 학교, 언론에서 노출된 경험, 혹은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 등으로 자신을 과장한다. 교묘하게.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것들을 중간에 툭툭 흘린다거나, 호기심을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사려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은연중에 높이면서,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나)도 함께 높이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나는 특별하다. 그런데 너도 이제 나와 함께 있으니, 너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그런 메시지를 심어주고자 한다. "너는 나와 함께 하면 너의 꿈을 이룰 수 있어”와 같은 메시지가 있다. 그런 사람들일 수록,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것들이 자신을 귀찮게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막상 유명해지면 이제야 세상이 나를 인정하기 시작한다고 하면서, 또 은연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슬쩍 알린다. 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첫 만남에 호의적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문제가 있다면 지나치다는 것. 그리고 상대가 어느 정도 엉겨붙을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그런다는 것. 아무것도 없는 상대에겐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노출하지 않는다. 약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접근하고, 호의를 보이고 관심을 빼앗는다. 그리고 함께 저 멀리 날아간다. "우린 특별해”라는 비행기를 타고. 관계를 맺을 때, 그래서 나는 과장하는 사람들을 좀 더 지켜본다. (물론 기질이거나 습관일 수도 있다는 점은 고려한다.) 그리고 첫 번째 원칙을 기억한다. 거품이 아니라 진짜 실력과 삶을 보고자 노력한다. 

네 번째 사람들은 조금 특이한 기준일 수 있다. 그건 바로 지나치게 어림에도 자신 만만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철저히 나의 반성에서 오는 기준이다. 나는 과거 한때 이런 꿈을 꾸었다. ‘20대 코치, 20대 멘토가 되어야지’라는. 20대에, 20대들을 코칭하고 멘토링하고 싶다는 헛된 욕망이었다. 물론 그 목표의 의도는 선했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경험을 나누고 싶고, 들려주고 싶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것이기에. 하지만 선한 의도와는 별게로, 그것은 분명 나의 조급증이었다. 서툴렀고, 어리숙했다. 아직도 깊이 반성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혜민 스님’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그 분의 말은 물론 아름답다. 분명 우리를 일깨우는 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분의 삶이 그 말을 뒷받침하는가? 다시 말해, 입이 아니라 존재로 말 하는가? 아직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낀다. 그 와는 다르게, 법륜 스님에겐 좀 더 ‘깊은 울림’을 느끼지만 말이다. 일정 기간의 삶의 경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좀 더 개인적 견해지만, 나는 깨달음도 믿지 않는다. 아니 없다고 믿는다. 젊은 나이에 깨우쳤다는 사람들도 꽤 만나봤는데,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는 이는 아직 없었다. 책 몇 천권, 몇 만권을 읽고 깨우쳤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다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그럴 때 다시 한번 삶과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행할 수 있어야, 쌓을 수 있어야 진짜 아는 것이다. 그곳까지 가기 전에 말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재앙은 시작된다. 차라리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헌신하는 엄마들, 그런 엄마를 지원하며 함께 성장하는 아빠들, 나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더 신뢰한다. 실제로 그들이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삶의 지혜는 적어도 한 생명을 살리긴 했으니까. 젊은 시절은 열매를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나이가 아니다.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히는 시기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맺을 때, 지나치게 어린, 영특한, 하지만 거만한 사람들은 좀 더 두고본다. 삶이 자연스래 그들의 스승이 될 것이기에. 퇴계 이황의 선집에 나오듯, “경솔하게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다가 끝내 아무런 성과도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기에.

마지막 사람들은 좀 더 모호하다. 그건 바로 대화하고 있지만,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앞서 말했던 것들은 모두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꽤나 직관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실수 할 가능성도 높은 영역이다. 하지만 꽤 중요하고, 또 생각보다 정확하다. 다니엘 골먼의 <포커스>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공감은 주의력에 달려있다. 상대의 느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정, 목소리 그리고 감정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을 위애서는 먼저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로 인해,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발견했다. 공감능력과 주의력, 그리고 자기인식 능력. 앞서 말했던 것들과 연관되지 않는가? 그리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주의를 쏟지 못한다. 항상 산만하다. 내가 경계하려는 사람들도 그러한 공통점이 있었다. 상대방에게, 우리의 대화에, 심지어는 자신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공감하는 척은 했지만, 나에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이는 굉장히 직관적인 영역이다. 이것만 기억하자. 말이나 논리 모든 것이 올바름에도 가끔 꺼림칙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는 GO가 아니라 STOP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영역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단순히 직관으로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맹목적이지만, 직관 없이 관계를 결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때로는 몸이 알아서 말을 할 때도 있기에. 



실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위의 모습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꼭 찍어서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준으로 삼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위의 글에는 분명 내가 있다.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총합은 바로 어린 시절의 나다. 나는 나를 경계하고자 이 글을 썼다. 내 안에 저 모습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들어있음을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반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들에게도 저러한 모습이 있었다. 결국 내 인생의 ‘관계 사고’는 결코 온전히 그들의 잘못 만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자, 공동 창조였다. 한 때 나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들을 만나지 않고, 더 좋은 더 착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건 아니다. 쉬운 답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언제나 인생은 어려운 답이 진짜 답일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의 ‘반짝임'에 반응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깃들어 있는 오만, 지적 허영, 에고, 두려움, 기만이었다. 나는 내 본모습을 그들을 통해 봤고, 공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을 통해 내 진짜 모습에 눈을 뜬 것이다. 저런 모습이 되지 않으려는 진짜 모습, 양심, 내면의 목소리. 그래서 이 리스트는 열려 있다. 이것은 더 성숙하고자 하는 나를 위한 경고이자, 경계선이다. 나는 나를 경계할 것이다. 깨어있을 것이며, 쉽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과 행동을 더 지켜볼 것이다. 삶을 꺼낼 것이고, 과장하려는 내 마음을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삶의 경험을 쌓고, 더 공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윗 글을 앞으로의 나를 위한 ‘알람’으로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결론이 여기서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진 않는다. 분명 하나의 목적이 더 있다. 나에겐 ‘그들’을 실제로 경계하고자 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다. 내가 말한 위의 행동을 반복하는, ‘양심’이 없는 ‘그들’이란 바로 ‘소시오패스’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그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한번 언급하고자 하지만, 그래서 우린 우리의 양심이 가려질 때를 잘 살피고, 정말로 양심이 없는 ‘그들’을 피해야 한다. 소시오패스와 관련해선, 책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를 참고하면 좋다. 한 가지 참고할 만한 대응법이 있다. 박홍규 교수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에 나오는 글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원시사회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젊은이가 고기를 많이 잡아 오면 그는 자기가 추장처럼 대단한 사람인 줄로 생각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자기보다 못한 걸로 알아요.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는 놈은 못 봐줍니다. 그 오만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잡아온 고기에 대해 항상 무시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가슴을 식히고 그를 예절 바르게 만들지요.” 나는 이 인디언들의 방법이 ‘그들’을 대처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이자 대응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각자가 성숙한 사회가 되어서 무분별한 욕망과 기만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그렇담 어떻게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나는 그 답이 ‘공동체, 커뮤니티’에 있다고 믿는다. 파커.j.파머의 책<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물론 홀로됨은 개인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또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영혼과 역할을 다시 결합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하다.” 나는 이 문장이 그 중요한 힌트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와 몇몇 동료들이 매월 <심톡>이란 대화 모임을 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나 스스로 누군가에게 경계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지 않는 그런 폭 넓은 연대를 만들고 가고 싶은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개인의 그리고 공동체의 온전함’이다. 그 시작은 말과 행동을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개인적인 진실한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고, 과장하려는 척하려는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인생의 경험을 빠짐없이 쌓고, 내 느낌과 직관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각자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 각박한 시대에, 최소한 관계 스트레스 만큼은 서로의 현명함으로 줄여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른 많은 분들의 지혜가 함께 모아졌으면 한다. 이러한 담론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들의 소중한 지혜도 구하고 싶다.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이 하나 있다면, 이 시행착오의 경험 뿐이니까.

마지막, 덧붙이기
사실, 지난 1년간 진행했던 심톡을 워크북으로 만들었다. 올해 초에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이었는데, 급박했던 개인적인 일들(아내의 출산을 비롯한)과 게으름의 부덕으로 인해 아직까지 못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든 생각이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였다. 완벽한 준비를 갖추지 않더라도 일단 행동하는 것. 내가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지금이라도 공유하고자 한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누구든 다운 받으실 수 있으니, 원하시는 분들은 다운 받아서 일상에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