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의미

- 나는 종종 평생학습관을 간다.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과 '자극'이 된다. 지난 겨울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머물 예정으로 마포구 평생학습관을 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책과 인터넷 강의 그리고 문제집과 싸우고 있었다. 나도 차분히 앉아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은 낯설게.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아,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 이게 왠말인가. 공부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니. 하지만 나는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그때 받은 느낌은 뭐랄까.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때 공부하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평생학습관에 모인 사람들 열 중의 아홉은 모두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예비 선생님, 민법을 공부하는 사법고시 준비생, 문제집을 푸는 고등학생, 토익을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은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명한 목적'와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책들을 들척이는 몇몇 할아버지들이 보일 뿐.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번 귀기울여 보자.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학교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 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노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 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 교회 간다고 영혼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고. 학교 간다고 지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면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일리히는 그것을 콕 찍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학교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단의 왕국’을 조심하라고. 우리는 ‘목적의 왕국’을 만들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눈에 보이는 제도화가 될 때 우린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번 평생학습관에서 이반 일리히가 말하는 '가치의 제도화'가 낳는 폐혜를 보았던 것이다. '학습과 배움'이라는 가치가 '학교와 시험'이라는 제도로 치환되면서 어쩌면 우리는 본래의 '학습과 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모두가 학습하고 있지만 학습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는, 배움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슬픈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한 단편이었다. 

핵심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곳인가, 인간을 타율화 시키는 곳인가? 


옮겨적기
- 교육기회의 평등화란 사실 바람직한 것이고 동시에 실현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이를 강제적 학교화와 동일시함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 권리헌장 1조는 “국가는 교육의 확립에 관한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로 규정돼야 한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적 의무는 허용될 수 없다. (…)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시민을 보호해야만 비로서 헌법상 학교의 비국가화가 심리적으로 유효하게 된다. P. 39
+ 우리는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그 반대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 대부분의 기능은 반복훈련에 의해 습득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 그러나 기능을 탐구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교육은 반복훈련에 의존할 수 없다. 교육이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런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반복훈련에 반대되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가 축적해온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교육은 의존한다. (…)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정의한 문제를 둘러싸고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이고 탐구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같은 말이나 문제에 대해 동시에 고민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51
+ 교육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교과서에? 칠판에? 교사에? 인터넷에? 교육은 공동체 사이에 존재한다. 교육은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정당, 교회, 노동조합, 클럽, 마을센터는 이미 그들의 교육활동을 조직하고, 그것은 학교로 활동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미리 짜인 강의, 세미나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에 의한 사람들의 연결은 당연히 교사중심적이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한 형태로 책, 영화 등의 제목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경우, 특수한 언어와 용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문제나 사실을 서술하는 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저자에 따르면 되고, 이는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즉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 몇이 선택한 ‘고전 읽기’와 달리, 두 사람의 동료는 그 어떤 책이라도 더욱 깊은 분석을 위해 선택할 수 있다. 54
+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순수한 형태로 학습 모임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당연히 학습자 중심 학습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학습이 잘 일어나는 배경도 바로 그것이다. '자발성' '같은 주제' 그리고 '다양한 참가자' 이렇게 한다면 어찌 배움이 재미없을 수가 있을까?

- 시카고에 사는 나의 흑인 친구는 참된 교육을 하는 사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의 상상력이 ‘완전히 학교화된 것’이라고 훌륭하게 정의했다. 61
+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 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 없이, 가끔은 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배운다. 가장 비극적인 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전혀 학교에 ‘가지’ 않음에도 학교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 밖에서 배운다. 우리는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고, 놀고, 저주하고, 정치하고, 일하는 것을 배운다. 72-73

+ 나는 이 정도로 급진적인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존재한다. 필요한 배움도 있고. 중요한 것은 '지나친 학교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이 나는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학교 자체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기에. 

- 학교는 초중고라는 연속되는 게임에서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 학위는 언제나 그 소비자의 이력에 불변의 가격표로 남는다. 학위를 가진 대학교 졸업생은 그들 머리에 가격표를 달고 다니는 세계에만 적합하고, 그것에 의해 그들 사회에서 기대수준을 정의하는 권력을 부여받는다. 각국에서 대학교 졸업자의 소비량이 다른 사람들의 표준을 결정한다. 즉, 직업 유무와 관계없이 문명화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대학교 졸업자의 생활방식을 동경하게 된다. 이처럼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82-83

- 학교는 또한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 (…) 학교는 우리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 우리는 학교에서, 가치 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있다. 88
+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 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도 재미있는 통찰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학교의 서열화가 모든 사회의 서열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리고 학교는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사회는 더욱 굳건해지고, 빈곤층은 악순환에 빠져든다. 학교의 역할은 '배움'이 아닌,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회가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한 담론은 이미 저 뒤로 밀려나버린지 오래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세 가지 목적을 가져야 한다. 첫째, 공부하기를 원하는 모두에게 그 나이에 관계없이 필요하나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그로부터 배우고자 원하는 사람을 찾게 해주어야 한다. 셋째, 공중에게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도전을 알릴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 공부하는 사람은 강제적 교육과정에 복종하도록 강요되거나, 자격증이나 졸업장 소유에 의해 차별되도록 강요돼서도 안 된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따라서 완벽하게 교육적인 자유로운 언론, 자유로운 집회, 자유로운 보도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150-152
+ 상당히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공부하기를 원하는 누구가 공부할 수 있고, 그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자유롭게 알려질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일 것이다. MOOC나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학습모임들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비주류에 불과하다. 이것이 기존 교육체제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널리 증명될 수 있다면 '교육 개혁'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하다. 

- 최악의 학교 수업은 학생을 한 방에 모아놓고 수학과 사회 및 철자를 똑같은 순서로 가르치는 것이다. 최선의 학교 수업은 학생 각자에게 제한된 과정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여하튼 동료 집단이 교사의 목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바람직한 교육 제도는 각자에게 그가 동료를 찾는 활동을 특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에게 그들의 가정을 떠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178
+ 칸 아카데미가 생각난다. 예전에 적었었는데. 어디더라. 심마니스쿨 블로그였나. 
링크 걸어둡니다. 책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여기서부턴, 일리히의 주장에 대한 옮긴이의 생각들입니다. 

- 공부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걷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가용이나 병원에 의해 타율화됐듯이 우리의 모든 고유한 능력이 타율화돼 사회 자체를 자율적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 역사로 보면 그런 신앙의 자율화로 부터 모든 타율화가 시작됐다. 

일리히의 주장은 사실 간단하다. 기독교를 믿는 서양인으로서 그는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예수는 어떤 학교를 나온 소위 전문가가 아니었다. 전문지식과 권력, 위신, 지위, 부, 여유 등을 가진 속세의 속물적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 흉내를 내며 예수를 떠드는 신부나 목사, 그리고 성당과 교회는 웃기는 속물이니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 그것들이 없어지면 민중은 스스로 신을 믿고, 공부하고, 치유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회복해 그런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220
+ 생각해보면, 나도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최근 파커 파머를 통해 '퀘이커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아마 이 퀘이커교의 교리가 지금 말하는 이반 일리히의 생각과 비슷해보인다. 퀘이커교는 실제로 목사의 존재가 없다. 단지 침묵 속에서 직접 신과 대면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직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선 가장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볼 생각이다. 

- 사회의 ‘학교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다. 첫째,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계급구조를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고유한 ‘공부’ ‘배움’을 학교라는 형태의 조직에 의하여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졸업장-학위-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 이상이 아니다. 곧 학교는 계층화라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있다. 둘째, 학교화는 ‘배움’이라는 것을 소비과정의 결과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 셋째, 학교화는 교사가 없는 배움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넷째, 학교화는 지적인 민감성을 비롯한 인간의 고유한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 226
+ 학교가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니, 너무 슬픈 말이지만 상당히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 교실을 들어가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다. 그곳이 생동감이 가득한 '배움'의 현장인지, 생기가 사라져 오로지 처절함 만이 난무하는 '생존'의 현장인지 다녀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 우리는 사실 학교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전거나 대중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 있고, 교회에 가지 않아도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범죄인을 교도소에 보내지 않고도 사회갱생을 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오다가 별안간 모든 것이 철저히 제도에 의존하는 세계에 살게 됐다. 바로 일제 이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학교교육 때문이었다. 234
+ 사실 이건 굉장히 놀라운 통찰인데, 나에게만 그런가? 

- 일리히는 평생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학교는 교육 장애물이고, 병원은 건강 장애물이며, 근대회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극대화하고, 국가 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을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 에리히 프롬은 일리히 사상을 근원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그의 근원적 비판이 항상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더욱 큰 활기와 기쁨을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천부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에서 나오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민주주적의 이념이다. (…)

일리히가 평생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이리라.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반면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희망이 아니라 기대하는 존재로 인간보다 재물을 사랑하고 제도에 기대하는 존재다. 그들은 과학, 기계, 전자계산기, 컴퓨터에 의존한다. 일리히가 희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 양식을 극복하고 진실한 인간의 욕구와 본성에 더욱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246
+ 근원적 휴머니즘. 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제도와 시스템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은 나약하고 두려운 존재로 가정한다. 그에 맞춰서 통제와 처벌은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려 한다. 나는 저항하고 싶다. 내가 지향으로 하는 인간상도 이반 일리히, 에리히 프롬과 같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이러한 존중과 배려 안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일리히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가장 근원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여 현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도발하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가 비판한 현실은 바로 발전의 종교를 섬기다가 본래의 자율성을 잃고 타율화된 인간의 세상이었다. 260
+ 르네상스적 인간! 근원을 고민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비판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오로지 인간 본래의 자율성 회복을 지향하고 타율화된 인간을 지양한 인간! 멋지다.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 

- 일리히에 따르면 산업의 과잉성장은 자율성이 제도를 수용하고 결국은 제도에 의존하게 하는, 곧 타율성이 승리하는 편제를 만든다. (…) 그는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에 자율, 공동적 도구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제창했다. (…) 그가 단순히 학교나, 병원이나, 차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의 여러 제도가 도구 수단을 지나치게 발전, 확대시켰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힘이었던 자율성이 마비 당하고 타인에 대한 의존이 증대되면, 필요를 충족시키는 대량소비가 지구의 유한성을 파국으로 몰아넣도록 소모시키기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자율적 공생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학’ 숭배를 비신화화하고 일상언어를 회복하며, 나아가 법적조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세 가지 차원의 도구를 고찰한다. 272

“건강, 공부, 위엄, 독립, 창조라고 하는 가치는 그런 가치의 실현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 제도 활동과 같은 것으로 오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제도화’다. 이러한 것에 의해 학교는 모든 사회를 두 영역으로 구별한다. 곧 특정 시간대, 특정 방법, 특정 조치와 배려, 그리고 특정 전문 직업은 학술적이거나 교육적이라고 간주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276
+ 마지막 문장을 되세기자.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마치,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우리의 '기억들(휴대전화 번호, 간단한 일정 등)'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휴대폰을 처음 사용했을 때만 해도, 주위 왠만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다 외우고 다녔는데, 이젠 내 번호도 잃어버릴 지경이다. 이는 뿐만 기계만이 아니다. 일리히가 말했듯, 제도적 배려 역시 인간을 타율화시킨다. 

- 존 홀트, 교육이 아니라 /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정의란 없다. ‘교육이 아니라’ 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특수한 장소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면서 행해지도록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는 주변 세계와의 교류에 의해 그 전보다 사물을 알고 현명하게 되며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능력이나 기능도 몸에 익혀 자각적으로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인생에는 큰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떄문이다. 즉 나는 매우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가고 일하며 놀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단절은 없다. 그 전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정의에 알맞은 말을 하나 고르기란 불가능하다. 349

+ 나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다. 교육이란 특수한 장소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다. 차라리 호기심 그리고 삶에 가깝다. 배우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배울 수 없는 곳은 없으며,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다. 배움이란 철저히 삶과 관계한다. 삶을 말하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나 역시 이러한 배움을 토대로 학생들과 삶으로 만나고 싶다. 내 삶을 먼저 꺼내고, 그들의 삶을 꺼내어 내고 싶다. 그렇게 제도화 된 배움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역동적인 배움터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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