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오전 느즈막히 일어났다. 어릴 적에는 새해 첫날이면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살면서 꼭 그런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다름 없는 아침일 뿐. 다만 이런 경계가 되는 날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기에 좋다. 경계가 없다면 매듭을 짓기도 어렵기에 말이다. 특히나 일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래서 1월 1일은 소중하다. 아빠가 되는 첫해이기도 하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이제 막달을 앞두고 있는 아내는 많이 움직여 줘야한다. 결혼 하고 나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대충 차려입고, 아내와 손 잡고, 한강과 시장을 쏘아 다니는 것이다. 둘 다 격한 운동은 싫어하지만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산책을 나가는데 겨울 냄새가 완연하다. 날씨가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다시 추워진다. 찬 바람이 쌩쌩 불어닥치고, 귓가가 매섭다. 나는 워낙 수다스러워서 산책하는 내내 떠든다. 한 시간 정도 다녀왔다. 산책 후에는 뭐 할까 하다가 그 동안 못 봤던 힐링캠프를 보기로 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거든. 그래서 보게 된 것이 양현석편부터 김봉진, 김영하 소설가 까지다. 쭉 이어서 봤다. 벌써 하루가 지나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래도 각 편마다 인상깊은 말이 하나 이상은 남아 있다. 가만 두면 잊혀지니 옮겨본다. 

우선 양현석 편. 양현석이 이야기 했던 것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2가지다. 첫 번째는 양현석은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는 점. 스스로가 난독증이라고 한다. 유명한 난독증자 중에 톰 크루즈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엄청난 탁월함이 있다고 들었다. 아마 양현석은 춤과 노래에 대한 센스가 아닐까. 두 번째로는 양현석이 생각하는 전생은 부모, 현생은 나, 후생은 자식이라는 점. 꽤 공감되었다. 부모의 삶은 나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쌓은 업으로 내 삶 후반부와 내 자녀의 삶은 책임져야 한다. 부모의 덕을 평생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덕으로 좋은 환경을 갖게 되었다면, 나는 더 큰 덕을 쌓고, 내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관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평소 생각하는 바와 같아서 그렇겠지. 

이어서 김봉진 편. 김봉진 대표는 배달의 민족이란 어플을 개발해서 성공한 사업가로 나왔다. 사실 나는 재작년에 그 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만났었다. 회사에서 강의가 있다고 해서 듣고자 찾아갔는데, 강의도 좋았고, 정말 특이한 회사란 생각이 들어서 유심히 보고 있었다. 힐링 캠프에서 기억에 남는 건 한 가지다. 그게 무엇이든 정의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의자를 디자인해보자>라는 미션이 있다면 그거에 꽃히지 말고, 먼저 의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자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나온다. 예를 들면 ‘앉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자. 이어서 묻는다. 그럼 산에 있는 큰 돌을 가지고 오면 그건 의자인가? 맞다. 돌도 앉을 수 있다면 충분히 훌륭한 의자다. 다시 돌아가서, <의자를 디자인해보자>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우린 돌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왜냐면 이미 머릿 속에 정형화된 의자를 그리고 있기에. 이 점이 핵심이다. 좋은 디자이너와 디자인은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영하 편. 김영하 소설가는 테드에서도 멋진 강연을 했는데 여기까지 나왔구나. 느끼는 점 하나, 책을 많이 읽고 쓰는 사람의 어희는 일반인과 조금 다르다. 꽤 정돈되어 있단 느낌을 받았다. 나의 지향점이기도 하지. 그는 말한다. 본인이 지나왔던 시대는 낙관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우린 기대감소의 시대, 저성장의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린 보란 듯 성공할 수 없다. 특히 완벽한 성공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젠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내 것을 만들어야 하며, 스스로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감정 근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오감을 활용해서 글쓰기>를 해본다거나, 내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보라는 것. 그런 훈련을 통해 우린 내면을 지킬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와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되는 것이다.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이 느끼는 삶. 내면이 건강한 삶을 말한 것이다. 정말 공감이 되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각자의 해답을 찾는 것. 한 가지 더 추구한다면, 물론 내면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고,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양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내면의 근육만 기르다 보면 그저 스스로 자족하는 삶에 만족할 수도 있기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질 수도 있기에. 

주절 주절 한참을 썼네. 제 기억에 혼동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 드립니다. 그렇게 1월 1일 오후를 보내고 아내와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청소를 했다. 청소는 매번 느끼지만 끝도 없다. 그리고 하루에 정말 많은 시간을 써야 하지만 그게 비해서 결과는 그저 ‘깨끗함’이라는 것.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아내는 청소에 예민한지라 같이 열심해 해야 한다. 아니면 평온한 가정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저녁에는 영화를 보러 나갔다. 신촌 cgv로. 내가 좋아하는 중간계 6부작의 마지막, 호빗 <다섯 군대 전투>를 보러. 




난 반지의 제왕을 참 좋아했다. 엘프와 드워프가 나오고 전사들과 마법사가 나오는 세상. 남자들은 모두 판타지를 좋아하겠지만,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호빗은 작년에 소설로 한번 다 본적이 있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영화도 약간 각색을 해서인지, 소설 내용과 달라진 것 같더라. 쨌든,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또 오랜만에 초몰입해서 봤다. 명 장면 3개만 고르라면. 우선 초반에 스마우그가 마을을 휩쓸고 간 장면은 정말 명장면이다. 내가 상상했던 드래곤 브레스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다. 불 타는 마을에 용이 휘젓고 다니는 그 장면. 캬. 두번째 장면은 역시 대규모 전쟁씬. 반지의 제왕의 3편에서도 나온 장면이지만 더욱 업그레이드 된 것 같다. 지겹도록 싸우지만 생각보다 지루함은 덜했다. 다양한 레퍼토리 덕분일 듯.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쩌면 사람들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썰을 풀어 본다. 스포가 있으므로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아래 단락은 보지 마시길.

모든 여정을 마치고 빌보 베긴스는 간달프와 함께 샤이어로 돌아온다. 마을 입구에서 간달프는 말한다. ‘너 반지 갖고 있는거 다 안다’ 뭐 이렇게. 거기서 베긴스는 약간 멋적어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또 거짓말 한다. 그러면서 ‘반지는 걱정마, 내가 알아서 잘 할께’라고 한다. 훈훈하게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그 장면에서 간달프는 마지막에 촌철살인 같은 말을 한다. (물론 나에게 그렇게 들렸다는 뜻임) ‘너도 결국 이 전체 중에서 작은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잊지마’ 왜 그렇게 말 했을까? 그냥 알겠어. 라고 해도 되는데. 왤까? 아마 간달프는 끝까지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한게 아닐까? 인간의 본성은 그렇기에. 내가 보는 인간은 희안하게도 모든 사건에서 자기 자신만 예외로 두는 경향이 있다. 로또를 살 때도, 나는 될 꺼야. (나는 특별해) 아이를 낳아도, 내 아이는 달라 (나는 특별하니까) 반지를 가져가도, 나는 별일 없을꺼야 (나는 특별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자 간달프의 생각은 달랐다. 너도 결국 욕망을 가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 우린 모두 특별하지만 또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모두 강인하지만, 나약한 인간이다. 

이후 빌보 베긴스도 다른 이들과 마친가지로 그 애착(소유욕과 의심)을 완전히 벗어버리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 버티게 되고 이후 프로도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반지 전쟁이 시작되지. 정말 그렇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된다. 나 역시 새해를 다짐하면서, 이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한다. 스스로 나약하다고 믿을 때 우린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 나의 의지는 언제나 나약했다. 하지만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줘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올해도 함께 하고 싶다. 그래야 나의 소유욕과 의심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음에. 이제 다시 시작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작지만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행동이 어둠을 물리친다." / 간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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