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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노트/강의 리뷰

[인터뷰] 안철수 박사 인터뷰 / 프레시안


V3백신 개발자로 널리 알려진 안철수 의장(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이 KAIST 석좌교수가 됐다. 그에게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라는 이미지가 늘 따라다닌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흔히 "매사에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기자와 만난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우선, 이들을 키워낸 대학의 분과학문 체계에 대해 그는 몹시 부정적이었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던 그였지만, 교육과정을 문과와 이과로 획일적으로 구획하는 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학문 간 장벽'이 견고한 대학 문화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너도나도 '학문 간 융합'을 이야기하지만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대학 문화 탓에 융합 학문 전공자가 설 자리는 찾기 힘들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의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기업인에서 교수로 다양한 직업을 넘나들었던 그의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다.
  그리고 '전형적인 모범생'들이 주로 택하는 직장인 대기업의 거래 관행에 대해서도 몹시 비판적이었다. 중소기업과 공존하면서 혁신을 향한 동력을 얻는 미국과 달리, 한국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또 대기업 경영자들이 소프트웨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인색하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모범생을 비판하는 모범생'이 설 자리는?"
  
▲ 안철수 교수. ⓒ프레시안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모범생이다. 대학 시절, 그는 취미로 바둑을 배우면서도 바둑 교재를 꼼꼼히 섭렵한 뒤에야 바둑돌을 잡았다고 했다.
  기업 경영에 대해서도, 그는 '교과서'에 담긴 원칙과 기본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대주주가 전권을 휘두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사회가 경영자를 적절하게 견제해야 하며. 그러려면 기업지배구조가 투명해져야 한다는 지적을 곁들였다.
  그는 인터뷰 도중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왜 '운동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와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는 운동의 과제가 아니라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시장 경제를 위한 원칙이 교과서 속에만 가둬져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이런 목소리는 지난해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불거진 삼성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전형적인 모범생' 집단으로 알려진 삼성의 경영 방식은 '교과서'와 거리가 아주 멀었다.
  '모범생을 비판하는 모범생'이 된 그가 올해 2학기부터 학생들을 가르친다. 소속은 '학제학부(College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낯선 이름이다. KAIST 측의 설명에 따르면, "다학문의 융합을 추구하며,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기 위한 학부다. 이곳에서 그는 이공계 학생들이 경영에 관한 소양을 키우도록 돕는 일을 맡는다. "문과와 이과의 벽, 학문 사이의 벽을 허물어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던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다.
  지난달 31일, 안철수연구소에서 그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간추렸다.
  "'전문화'가 진행될 수록, 다양한 분야를 접목시키는 역할이 중요해진다"

  <프레시안> : 과거 인터뷰에서 공학 교육 혁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공학이 법학, 경영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다양한 학문과 교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KAIST에서 이런 구상을 구현할 기회가 생겼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안철수 : 경영대학원 교수가 됐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나는 대전에 있는 공과대학 소속이다. (KAIST 경영대학원은 서울에, 공과대학·자연과학대학 등은 대전에 있다.) 공학과 경영학을 접목시키는 게 내 역할이다. 한 가지 전공도 잘 하기 어려운데, 두 가지를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두 영역에서 접점을 찾아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이 필요한 때다. 학문과 기술이 전문화될수록, 이런 역할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난다.
  '세계화'에 관한 인상적인 책을 여럿 남긴 토머스 프리드먼을 예로 들고 싶다. 그는 <뉴욕타임즈> 중동 특파원으로 오래 일했다. 이어 그는 월스트리트 금융가를 경험했다. 이 두 경험을 아우르면서 그는 '세계화'에 대해 빼어난 통찰을 하게 됐다. 중동의 역사는 서양 근대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중동 특파원 시절의 경험은 특수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띤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다른 경험과 만나면서,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특정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다른 지식과 연결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융합학문' 전공하면 직장 구하기 어려운 나라가 한국"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학문 간 장벽이 두터운 편이다. 또 직종 간 장벽도 두텁다. 그래서 다른 영역들을 오가면서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사람이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안철수 : 그렇다. 그게 너무 답답하다. 한국에선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분야와 분야 사이의 벽이 너무 높고 두텁다. 다른 분야에 대해 이해도 못하고, 포용력도 없다. 대신, 편견은 강하다.
  요즘 '통섭'(統攝. 지식의 통합을 뜻한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이다.)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래서 학문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현실 속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융합학문을 전공한 사람들이 직장을 잡기 어렵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법학과 의학을 함께 공부한 사람의 경우를 보자. 이런 사람에 대한 수요는 아주 많다. 생명공학 분야의 저작권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또 의료 소송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의료 윤리·생명 윤리 쪽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이들 세 가지 분야 모두 전문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들 분야 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왜 '100%'만 원하나"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의학과 법학을 함께 공부한 사람은 의과대학에도, 법과대학에도 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의과대학에서는 '100%' 의대 일을 봐줄 사람을 원한다. "의대 T/O로 뽑았는데, 왜 법대 일을 하느냐"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온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학과 법학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설 자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법과대학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윗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서로 부딪히는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과 공공기관, 기업을 이끄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런 생각이 없다.
  학문과 산업에서조차 '네 편, 내 편'을 나누는 버릇은 어리석은 짓이다. 전형적인 흑백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관행이 아주 견고하다.
  '회색분자'라는 말이 안 좋은 어감으로 통하는 데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참 궁금하다. '회색분자'가 왜 나쁜가.
  "'수학 잘 하면 이과, 영어 잘 하면 문과'라는 허무맹랑한 편견을 깨자"
  어리석은 이분법의 사례로 또 꼽을 수 있는 게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다. 이런 황당한 제도가 왜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제도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온 사람도 많은데, 이런 제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그리고 이런 구분이 낳은 폐해는 심각하다.
  경영학은 흔히 '문과' 학문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수학 잘 하면 이과, 영어 잘 하면 문과' 라는 식으로 진로를 정한다. 그래서 수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주로 이과 계열 전공을 택한다. 하지만 경영학, 경제학 가운데 재정·금융 분야를 공부하려면 고도의 수학적 재능이 필요하다. 근거 없는 문과-이과 구분 탓에 수학적 재능이 있는 인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 진출할 길이 막힌 셈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해놓고 정부는 '금융 허브'라는 구호를 외친다. 답답한 노릇이다.
  엔지니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학은 대체로 '이과' 전공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는 다양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외국어 능력, 의사소통 능력, 비즈니스에 대한 안목 등이다. 이과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 영역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력 등은 엔지니어에게 필수적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가 '수학 잘 하면 이과, 영어 잘 하면 문과'라는 식의 허무맹랑한 편견을 바탕으로 중등 교육과정을 운용하나. 학문을 위해서나, 산업을 위해서나 이런 상황은 빨리 바뀌어야 한다.
 
 
  "'안정'만 꿈꾸는 20대, 사회 탓이다"
  <프레시안> : 이공계 학생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 호응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창업에 따른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 의사 등처럼 자격증으로 보호받는 전문직이나 공무원, 공기업 직원 등처럼 고용이 보장된 직업으로 젊은이들이 쏠리는 경향이 과거보다 더 거세졌다.
  안철수 : 소설가 공지영 씨가 지금의 20대를 가리켜 "역사 상 가장 안정 지향적인 20대"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놓고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젊은이들을 특정 진로로 몰아넣은 책임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안정 지향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창업'에 국한해서 이야기 하겠다. '창업'은 '모험'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왜 모험을 꺼릴까. 네 가지 가능성을 놓고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사업 기회가 적다"는 점이다. 둘째는 "성공에 대한 보상이 적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공 확률이 너무 낮다"는 점이다. 넷째는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첫째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에나 나왔던 이야기다.
  둘째는 첫째보다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벤처기업 창업자에게 보상이 적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시장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코스닥 시장이 작전 세력에게 놀아나는 탓에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적어졌다. 대신, 작전 세력이 보상을 챙기게 돼 있다. '재벌 2세가 투자했다'는 소문만으로 주가가 폭등하는 시장은 정상적인 시장 기능을 못하는 곳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시장 중에서 이런 곳이 또 있나 싶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곧 바뀌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기업 가치가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게 되고, 창업자 역시 정직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값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력 파견업체인가"

  문제의 핵심은 셋째와 넷째다. 신규 창업을 했을 때 성공 확률이 낮은 이유에 대해서는 과거 인터뷰에서 여러 번 설명했다. 우선 기업가들의 실력이 없다. 또 벤처기업 산업 인프라가 너무 취약하다. 대학, 벤처캐피탈, 금융권, 아웃소싱 업체, 정부의 R&D 정책 등이 인프라인데 모두 엉망이다. 그래서 창업자는 선진국에서라면 할 필요가 없었을 일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게 힘이 분산되면, 경영이 어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신규 창업이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이다. 이게 핵심이다. 현재의 거래 관행은 중소기업이 거둔 이익을 대기업이 모두 가져가도록 돼 있다. 당연히 중소기업은 새로운 인재를 키우고, 신기술을 개발할 여유가 없어진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값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력파견업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시장상황과 기술 환경이 바뀌면, 이런 회사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중소기업의 성공률은 계속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금융권이 져야 할 부담을 왜 기업에 떠맡기나"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젊은이들이 창업을 꺼리는 이유로 하나만 꼽으라면 이것을 들겠다. 한국에서는 기업하다 망한 사람이 재기하는 게 너무 힘들다. 젊은 시절 저지른 한 번 실수 때문에 '금융사범'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한다.
  이런 상황의 핵심에는 '대표이사 연대보증제도'가 있다. 금융권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제도다. 금융권이 돈을 빌려줄 때 사업의 가능성과 위험을 평가해야 한다. 이런 평가에 따라 대출 여부를 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금융권은 이런 실력, 즉 '리스크 관리 능력'이 없다.
  능력이 없으면, 키워야 하는데 한국 금융권은 다른 방법을 썼다. '연대보증'을 통해 모든 위험을 대표이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금융권은 '리스크 관리 능력'을 키울 필요가 없다. 골치 아프게 공부해서 실력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돈 장사'하는 것을 누가 못하겠나.
  금융권이 져야 할 부담을 기업에 전가시키는 구조다. 새로 창업하려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예를 들어보자. 그곳에서는 망하는 회사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경영자를 찾기 힘들다. 망한 기업인들에게도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실패 경험을 통해 더 성숙하고 유능한 기업가로 거듭난 사례가 널려 있다.
  "미국에선 대기업이 '덤핑'…한국에선 망할 회사가 '물귀신 덤핑'"
  최고 경영자는 사업을 접어야 할 때를 누구보다 잘 안다. 이건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만약 사업이 승산이 없다고 여겨지면, 미국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 사업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경영자는 이윤을 내지 못하는 사업도 포기할 수 없다. 사업을 접는 순간, 회사 빚이 개인 빚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다른 대목이다. 혼자 빚을 떠안고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영자는 무조건 버티기만 하려고 한다. '갈 때까지 가자'는 식이다. 명백하게 손해나는 사업인데도, 당장 현금만 쥘 수 있다면 무조건 한다. '운전 자금' 마련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망해서 기업가가 범죄자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는 게 목표인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이 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은 크다. 미국에서는 대기업이 주로 '덤핑(헐값 판매)'을 한다. 중소기업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반면, 한국에서는 위태로운 기업이 덤핑을 한다. 부도를 면하게 위해서다. 한계 상황에 놓인 기업이 워낙 많아서, 이런 식의 덤핑이 비일비재하다.
  "'눈 먼 돈' 연결해 주는 브로커들, 산업을 초토화 시킨다"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덤핑'을 하는 기업들은 물귀신처럼 멀쩡한 회사까지 위기로 몰아넣는다. 결국, 모든 회사가 적정 이익을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기업들은 기술 개발과 신규 채용, 임금 인상을 억제하게 된다. 산업이 초토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게 이른바 '눈 먼 돈'이다. '눈 먼 돈'과 회사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들이 곳곳에서 휘젓고 다닌다.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집행되지 않는 예산을 끌어당기는 브로커들이다.
  이들은 사업 제안서를 대신 써주면서, 경영자에게 '눈먼 돈'을 연결시켜 준다. 대신,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챙긴다.
  '눈먼 돈'으로 위기를 넘긴 경험을 한 경영자는 브로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길게 보면, 산업 전체가 공멸하는 길이다.
  "구글은 중소기업 위한 '우산' 역할하는데, 한국 대기업은…"

  <프레시안> : 과거 인터뷰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관행에 대해 자주 이야기 했다. 대기업만 중시하는 정책 기조 속에서 이런 지적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벤처기업을 경영해본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안철수 :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관행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에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그래서 무척 허탈하다.
  얼핏 생각하면, 미국에는 구글처럼 거대한 회사가 있으니까 작은 회사가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구글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작은 회사들이 성장하는 쪽에 가깝다.
  물론, 구글 역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자선단체가 아니다. 한국 대기업과 달리, 구글은 왜 중소기업을 위한 '우산' 역할을 하는 걸까. 답은 '이노베이션(혁신)'이다.
  전문가들은 시장에 쏟아진 혁신적인 아이디어 가운데 90%가 중소·벤처 기업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대기업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10%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살아남아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계속 쏟아질 수 있다. 또 이런 아이디어들이 시장에서 검증받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대기업은 이런 아이디어들을 기업 인수·합병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대기업은 혁신적인 성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 외부 충격에 약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많다.
  중소기업은 '국가경제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외부 충격에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생생하게 겪은 일이다. 위험 분산을 위해서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균형 있게 키워야 한다. 한국 경제는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몇몇 대기업이 흔들려도, 다음 세대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 체질을 만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중소기업은 전체 고용 면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삼성·현대·엘지 등 재벌은 규모가 더 커졌다. 과거에는 국내 대기업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 하지만 고용은 더 줄었다.

  외환위기 이전에 200만 명 수준이던 대기업 고용이, 이제 13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문제는 대기업이 아무리 성장한다 해도, 고용은 계속 줄거나 제자리걸음 수준일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천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중소기업이 고용을 조금만 늘려도, 고용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된다.
  "중소기업 망하면, 대기업도 손해"
  이런 면에서 정부 당국자들의 태도는 답답할 때가 많다. 과거 한 토론회에서 경제 부처 장관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 장관이 "소프트웨어 산업의 전체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아서 놀랐다. 그리고 돈도 얼마 되지도 않는 시장에 너무 많은 인력이 매달리고 있어서 또 놀랐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소프트웨어 산업이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중소기업이 많기 때문에, 시장이 조금만 더 커져도 많은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이 망하면, 대기업도 결국 손해다.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망하거나 불안정해지면, 대기업 제품을 살 소비자도 사라진다. 대기업은 해외로 수출하면 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외에서 잘 팔리는 상품 역시 대부분 국내 소비자들에게 검증을 거친 것들이다. 국내 시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출도 쉽지 않다. 어떤 회사건 먼저 국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뒤 해외로 나가는 게 자연스런 순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인 소프트웨어ㆍ콘탠츠도 '제 값' 쳐 줘야…"
 
  <프레시안> :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식 노동자의 수가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을 육성하려면, 지식 집약적인 산업을 키워야 한다. 소프트웨어, 문화 콘탠츠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에 대해서는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안철수연구소를 경영하던 시절, 이런 문화 때문에 고생했다고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을 생산하는 지식 산업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안철수 : 경영자 시절, 소프트웨어 산업의 전망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발제를 하면서 정보 산업을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인터넷으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유명 전자업체 CTO(기술 담당 최고 임원)이 다가와서 한마디 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인터넷이라는 구분 방식이 잘못"이라고 이야기했다. "소프트웨어는 결국 하드웨어를 동작하기 위한 부품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를 어떻게 같은 급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느냐"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언젠가 보니까, 이 회사는 아이팟을 만든 미국 애플사를 벤치마킹한다고 했다. 소프트웨어를 경시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 이 회사는 아이팟과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아이팟의 성공은 '아이튠즈'라는 소프트웨어 때문에 가능했다.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종속돼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압도하는 가치를 지니는 경우도 많다.
  "표절에 관대한 문화'가 지식산업 망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기업 임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아주 흔하다는 뜻이다.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지적 재산권이 보호받기는 어렵다. 지식 노동을 통해 생산한 소프트웨어, 콘탠츠 등을 불법 복제하는 일을 막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래서는 지식 산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흔히 한국은 일본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하지만, 지적재산권에 대한 태도는 극명하게 다르다. 일본에서는 백신 소프트웨어를 팔 때 두 명에게만 권한을 줘서 파는 경우가 흔하다. PC(개인용 컴퓨터)를 두 대 갖고 있는 가정을 위한 상품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에서는 가정용 컴퓨터 한 대에 정품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면, 나머지 한 대에는 그냥 복사하면 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영화 등 문화 콘탠츠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불법복제가 흔하지 않다. 반면,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의 지적 재산을 침해하는 일이 '불법'일 수는 있어도, '죄'는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지식 인프라가 워낙 취약한 사회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외국 교재를 복사해서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남이 생산한 지식을 습득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생긴 관행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이 지식산업을 키우려면, 지적재산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표절에 대해 관대한 문화 역시 걸림돌이다. 학생들조차 표절에 대해 죄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지식 산업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프레시안> : 정보기술(IT) 산업은 대표적인 지식산업이다. 하지만 IT산업을 이끌고 있는 포털 업체들이 오히려 지식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서 콘탠츠 가격을 무리하게 낮춘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콘탠츠와 소프트웨어 등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안철수 : 포털 산업은 한국 경제사를 통틀어 가장 빨리 성장한 분야일 게다. 그래서인지, 지식산업에 어울리는 경영 방식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기업이 이미 만들어 놓은 관행을 따르곤 한다. 중소기업을 쥐어짜는 관행이다. 하지만 이런 관행은 경영상의 불투명한 요소와 관계가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대기업이 제대로 거듭나려면, 결국 기업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바꿔야 한다. 이게 핵심이다.
  만약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겸한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고 여길 게다. 특정 개인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지 않기 위해 고안된 '3권 분립'은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기업의 세계로 넘어오면 이런 상식은 곧잘 무시당한다. 경영자를 견제하는 게 이사회의 역할이라고 하면, 다들 이상해 한다. 하지만, 그게 원칙이다. 또 대주주라는 이유로,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이런 간섭을 용인하기 시작하면, 투명한 경영은 불가능하다.
  최근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왜 이런 당연한 주장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와야하는지 모르겠다. 정상적인 시장경제를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다. 누구나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포털이 바뀌어야 IT가 산다"
  대기업이 바뀐다면, 이들을 모방한 다른 회사들도 덩달아 바뀔 게다. 하지만, 대기업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면, 포털 업체들이 먼저 스스로 혁신했으면 좋겠다. 이들은 역사가 짧은 만큼, 개혁도 쉽다. 그리고 포털이 바뀌어야 IT 산업, 콘탠츠 산업이 살아날 수 있다.
 
 
 
 
온통 불안하다는 목소리뿐이다. 다니는 회사가 언제 무너질지 몰라서, 가게 임대료를 계속 낼 자신이 없어서, 유일한 노후 밑천인 부동산 가격이 주저앉을 것 같아서….
'불안'이 '혁신'을 질식시킨 사회, 창백한 시장
그래서인지 젊은이들도 움츠린 기색이 역력하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기존 질서에 의해 기득권이 보호되는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런 이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안정'과 '전망'이다. 내일이 불안하니까 '안정'을 찾고, 자신이 선 자리가 불안하니까 '전망'이 좋은 곳을 따지기에 분주하다. 이런 계산이 창조적 열정을 질식시키면서, 경제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다. 시장에서 창의와 혁신을 장려하는 기풍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경제가 오래 지탱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사실,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지적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불안한 도전에 자신을 내맡긴 적이 한 번도 없이, 늘 따뜻한 아랫목에만 머물렀던 사람이 "왜 다들 '안정'만 찾느냐"며 불평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안철수 KAIST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혁신을 독려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경영자, 대학 교수 등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기존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으려 했던 이력이 그의 이야기에 힘을 싣는 까닭이다. (☞안철수 교수 과거 인터뷰 보기: "'회색분자'가 왜 나쁜 말이죠?")
"기업가는 비즈니스맨과 다르다"

20일 서울 수송동에 있는 희망제작소 세미나실 희망모울에서 안철수 교수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 대해 강연했다. "위기의 한국경제, 진단과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마련된 희망제작소 창립 3주년 기념 특별강연 가운데 하나로 마련된 행사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안 교수는 용어의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업가'를 한자로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企業家, 起業家, 機業家. 모두 우리말로는 '기업가'라고 읽는다. 언론에서는 '企業家'를 주로 쓴다.
하지만, 안 교수가 강조하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서 기업가는 '企業家'가 아니라 '起業家'다. 안 교수는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화를 마치고 나면, 서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起業家'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듣는 쪽에서는 '企業家'로 받아들였다는 게다.

"'기업가 정신' 외치는 이들, 대개는…"
안 교수는 '企業家'는 영어로 'Business man'이며, '起業家'는 영어로 'Entrepreneur'라고 했다. '企業家'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을 뜻하며, '起業家'는 새로운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 안 교수가 이야기하는 '起業家(entrepreneur)'는 꼭 창업자나 발명가만 뜻하는 게 아니다.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면 '起業家(entrepreneur)'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企業家(business man)'들, 특히 대기업에 있는 '企業家'들은 시장에서 이미 확보한 기득권에 안주하는 경향 탓에 '起業家(entrepreneur)'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기업 사장들이 '기업가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고 나서면, 웃음이 날 수밖에.
안 교수는 "비즈니스 친화적인(business friendly) 것과 기업가 정신은 전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실리콘 밸리는 '실패의 요람'이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만 강조하기에는 한국 경제 환경이 척박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 치를 대가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이다. 안 교수 역시 이런 지적을 했다. 그는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할 때, 흔히 미국 실리콘 밸리를 예로 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실리콘 밸리의 성공사례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는 '성공의 요람'이 아니라 '실패의 요람'이다. 이 점을 외면하면, 우리는 실리콘 밸리에서 배울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성공한 기업을 더 키우기에는 실리콘 밸리 문화가 적절치 않다. 실리콘 밸리 문화의 강점은 실패한 기업가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 도전하는 기업가가 많이 나오려면, 성공 사례를 선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장밋빛 미래만 꿈꾸다 더 비참한 처지로 떨어질 수 있다. 다양한 실패 사례에서 배우는 게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 실리콘 밸리 문화에 장점이 있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었다.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문화, 실패 사례를 널리 알리고 여기서 교훈을 얻는 문화가 있다는 게다.
"'실패자 보호' 없이 '기업가 정신'도 없다"
그렇다면, 문화를 바꾸면 침체된 '기업가 정신'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다. 제도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실패자에게 회복할 여유를 주고, 재도전의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안전망이다. 이런 안전망이 한국에는 없다고 안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실패자가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실패의 요람'이 돼야 한다"고 했다. 도덕적인 기업가가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경우에 대해서는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 경험이 사회적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과 실패자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 안전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안 교수는 "20대 젊은이가 사업하다 실패하면, 평생 '금융사범'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대표이사 연대보증제'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않는 한 기업가 정신의 활성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납품단가만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기업가 정신을 짓누르는 짐은 그밖에도 많다. 대표적인 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기 힘든 거래 관행이다.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은 값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 정도로 취급당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것. 대기업이 시장지배력을 통해 납품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안 교수는 "(납품) 가격 문제만 들여다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납품 가격을 정하는 과정의 앞과 뒤에 있는 절차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중소기업과 거래하는 대기업은 납품 계약을 서류가 아닌 구두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대기업이 약속을 어겨도 중소기업이 따질 수 없다. 설령, 계약서류가 있다 해도,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가로막는 다른 장벽이 있다. 이런 점을 허무는 것이 공정한 납품 가격을 정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중소기업에 손해 떠넘기고, '나 몰라라'하는 대기업
"어느 대기업 임원이 사업 기획안을 마련했다. 결재를 받기 전에 그는 거래하는 중소기업 사장을 만나 미리 제품을 만들어두라고 했다. 결재가 나자마자 시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윗선에서 기획안에 결재하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면, 미리 제품을 생산한 중소기업은 막대한 손해를 입는다. 하지만, 대기업 임원은 나 몰라라 한다. 서류로 약속한 게 아니니 따질 수도 없다. 설령 서류가 있다 해도,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

결국 중소기업은 망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이 창업할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원한다면, 대기업 인사 평가 제도를 고쳐야"
안 교수가 소개한 불공정 거래 사례다. 그는 이런 이야기도 곁들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협약이라는 것을 맺도록 했다. 당시 이런 협약이 제대로 지켜질지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협약 준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협약 체결 당시에 협약 준수 가능성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을까. 방법이 있다. 대기업의 인사 평가 기준이 바뀌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대기업 구매 담당자들의 인사 고과가 1년 단위 수익으로 매겨지면,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영자가 설령 중소기업과 상생할 의지가 있다 해도, 실무자들은 중소기업을 쥐어짜게 돼 있다. 중소기업은 망하건 말건, 당장 원가를 낮춰야 승진에 유리한 구조에서 어느 실무자가 중소기업을 보호하려 하겠는가.
진정으로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을 꾀한다면, 대기업 인사 평가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서,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벤처기업을 운영한 경험 때문에 그는 대기업이 벤처·중소기업을 쥐어짜는 사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슴 다 잡아먹고 나면, 사자도 굶어죽는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에게 이윤을 최소한만 보장한다. 그런데 계약 체결 과정에서 대기업 실무자가 중소기업에 '집에서 쓸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식의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고 나면, 그나마 남은 이윤도 사라진다. 중소기업이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기업도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사슴들이 사는 곳에 사자들을 풀어 놓았다. 한동안 사자들은 포식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슴이 멸종하고 나면, 사자끼리 서로 잡아먹는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자 한 마리는 결국 굶어죽는다.
기업 생태계도 이와 비슷하다. 현재 구조에서 대기업은 당분간 성장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게 돌아갈 이익을 챙긴 대가로 몸집을 더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씨가 마른 뒤에도 대기업에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중소기업을 쥐어짜며 성장한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다 망하고 나면 결국 망하게 돼 있다. 대기업이 먼 미래에도 생존하고자 한다면,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대기업에는 일자리 여력 없다…일자리 창출은 중소기업에서"
 
국가 경제 전체를 위해서라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더욱 절실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기업이 고용하는 인원이 150만 명 이상이었다. 최대 200만 명으로 잡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지난 뒤에는 대기업이 제공하는 일자리 수가 130만 개도 안 된다. 문제는, 대기업의 규모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음에도 일자리가 줄었다는 점이다. 공장의 해외 이전, 경영 혁신 등으로 인해 빚어진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정부가 대기업더러 아무리 투자하라고 종용해봤자 소용이 없다. 대기업 일자리는 더 늘어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중소기업이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신규 창업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찾아 고쳐야 한다.
 
"국가 경제 '포트폴리오' 위해 중소기업 살려야"
중소기업에 살길을 열어서 신규 창업을 활성화하는 게 절실한 이유는 꼭 일자리 때문만이 아니다. '국가 경제 포트폴리오' 때문에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이 필수적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것은 경영학의 상식이다.
특정 경제주체에 지나치게 쏠려 있는 경제 구조는 특정 위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고도성장을 하다가도, 환경이 바뀌면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위험 분산을 위해서라도, 대기업 쏠림 현상은 막아야 한다. 대기업 중심 구조의 위험을 우리는 이미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가 이런 경우였다.
"'구글'이 한국 대기업보다 착해서?…천만에!"
 
대기업이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계속 공급받기 위해서도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필요하다. 미국 '구글'사가 좋은 사례다. 한국 상식에서라면, 미국에서 인터넷 벤처기업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시장을 장악한 거대기업 때문에, 신규 창업 기업이 버틸 수 있는 여유가 없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새로운 인터넷 기업이 계속 탄생하고 있다. '구글'이 독창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지니고 시장에 새로 진입한 기업에 적절한 이익을 보장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이 특별히 착해서 그런 걸까. 그렇지 않다. 새로 창업한 벤처기업과 상생하는 게 길게 보면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90%는 중소기업에서 나온다.
기존의 방식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대기업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들다. 신규 창업자가 시장에 진입할 공간을 열어두고, 서로 협력해야 대기업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다. 이런 구조가 없으면, 산업 자체가 망한다. 결국 대기업도 함께 망한다."
안 교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런 주장이 새롭지 않다. 그는 이미 여러 인터뷰에서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도덕적으로 경영했지만 실패한 기업가'를 위한 안전망 마련 등을 주장했었다. IT(정보기술)벤처기업을 창업해 경영했던 그로서는 절실한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은 창업을 한다…신규 창업자의 고민, '남의 일' 아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다른 보통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을까. 안 교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안 교수는 이날 "인생을 통틀어 한번은 창업을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다. 시간이 갈수록 창업 경험자의 비율을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규 창업자의 고민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직업 수명은 짧아지고,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는 추세다. 인생을 통틀어 여러 개의 직업을 거치는 이들도 늘었다. 신규 창업자가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뜻이다.
피할 수 없는 창업이라면, 미리 준비하는 게 낫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창업을 두려워한다. '사업가 기질'이 있는 사람만 창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안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내성적인 창업자가 성공하는 이유
"흔히 말하는 '사업가 기질'은 성공한 기업가의 조건과 거리가 멀다. 유명한 벤처기업가들을 보라. 대부분 내성적이다. 'NHN' 창업자 이해진, '다음' 창업자 이재웅, 'NC소프트' 창업자 김택진, '한글과컴퓨터' 창업자 이찬진. 만나보면 모두 내성적인 성격이다. 외향적인 성격이어야만 창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오히려 자신의 장점과 단점,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안 교수가 소개한 '내성적인 창업자'들은 대부분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했다. 이날 강연의 시작과 마무리 역시 '좋아하는 일'로 성공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문제 풀이 위주 선행학습, 아이 미래를 망친다"
KAIST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 어울리는 교육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서는 문제 풀이 요령을 잘 익힌 학생을 키우는 게 학교교육의 과제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학생을 키우는 게 과제라는 것.
그래서 그는 교육과정을 남보다 앞질러가도록 부추기는 교육, 까다로운 문제를 빨리 푸는 데만 능할 뿐 개념과 현상의 근본을 이해하는 데는 무능한 아이들을 키워내는 교육에 몹시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교육이 '영재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영재를 밀어내는 영재교육"
강연을 시작하며, 그는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에 담긴 한 사례를 소개했다. 캐나다에서는 아이스하키 조기교육이 활발한데, 유명한 선수들의 생일을 조사해보니 1~3월에 태어난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불과 몇 달만 일찍 태어나도 신체 발육 정도가 훨씬 앞선다. 그런데 1월생부터 12월생까지가 한데 모인 유치원에서 선수 후보를 선발하면, 1~3월에 태어난 아이들이 뽑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걸러진 아이들은 여러 기득권을 누리게 된다. 즉, 1~3월에 태어난 아이들이 유독 아이스하키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4~12월에 태어난 더 많은 아이들은 재능을 계발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체육 영재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실시한 조기 선발 교육이 오히려 아이들의 재능 계발을 왜곡한 셈이다.
한번 기득권 잡으면, 영원히 기회 독점하는 사회…'기업가'는 죽는다
 
안 교수는 이런 사례가 꼭 체육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어린 시절 기득권을 얻은 사람이 기회를 독점하는 현상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먼저 시장에서 기득권을 얻은 기업이 신규 창업 기업을 배재하면서 기회를 독점하는 것, 사교육을 통해 점수를 잘 받은 학생이 이후 인생에서도 배타적인 기득권을 누리는 것 등이 이런 경우다.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사회'를 내세워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이런 경향을 오히려 가속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일제고사 실시, 수능 점수 공개 등을 통해 아이들과 학교에 일찌감치 '낙인'을 찍는 일,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 시장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도록 돕는 일 등이 이런 사례다.
'기업가 출신'이라고 자부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기업가 출신' 안철수 교수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