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게 된 계기

고미숙 선생님의 인문학 3종 세트가 있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여기서 호모 쿵푸스는 예전에 글을 남긴 적이 있고, (링크) 이번 기회에 호모 코뮤니타스를 읽었다. 사실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고미숙 선생님이 쓰시는 글에 가깝다. 내가 지향하는 학습 공동체도 <수유 + 너머>와 비슷하고. 하나의 주제가 있고, 그와 관련해서 많은 분들의 책을 공부하고, 인용구를 추려내고, 거기에 나만의 실천 방식을 덧붙이는 것. 그러한 편집력과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책들이 고미숙 선생님의 인문학 시리즈가 아닌가 한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좋은 발자취가 되어주시는 고마운 선생님이다. 이 책을 읽은 건 지난 4월인데, 이런 저런 바쁜 일정들 때문에 지금에서야 올리게 된다. 생각을 충분히 담고 싶은데 그럴 여유도 별로 없다. 일단 초서와 간단한 리뷰를 위주로 올려본다. 혹시, 커뮤니티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일독해 보셨음 좋겠다. 





옮겨적기

p.7
코뮤니타스란 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뜻이다. 화폐는 탄생 이래 늘 공동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폐가 공동체적 삶의 다양성을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코뮤니타스를 특별히 “화폐에 대항하는 공동체”라고 명명하였다. 화폐의 ‘식성’에 맞서 삶의 창조성을 지켜 내고자 한 것이다. 
+ 돈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코뮤니타스 즉, 공동체가 등장해서 참 재미있는 접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실상 공동체적 삶의 다양성을 '화폐'가 먹어 치웠다는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그렇다면 '화폐'에 대항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그렇다. 공동체다. 내가 공동체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4
돈은 제도나 구조의 문제일 뿐이고, 나는 그 제도에 대해 비난과 냉소를 퍼부으면 그만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저 돈에 ‘미친’ 속물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맞다. 하지만 그건 하나하나만 주장이다. 그건 마치 ‘눈 먼’ 사람들 옆에서 자신의 ‘지독한 난시’를 정상이라고 우겨 대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적이 지닌 온갖 결함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나의 옳음이 입증된다면 그때 증명되는 건 정당성이 아니라 나의 초라함과 비겁함일 뿐이다. 니체가 말한 ‘약자 혹은 노예’의 도덕이 이런 것이리라. 
+ 돈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먹힌다. 무조건적인 비난이나 무조건적인 찬사는 옳지 않다. 우리에겐 건강한 회의주의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p.32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중세의 아퀴나스까지 “돈을 돈을 낳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이자, 상인과 고리대업자들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였다. “돈이 돈을 낳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며, 시간이 흐른 뒤 이자를 받는 것은 “신에게 속한 시간을 도둑질한 것”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서유럽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전도되었다. 비난받는 것은 게으른 화폐, 불임의 화폐들이다. 가치 증식하는 화폐, 부를 생산하는 화폐, 이자를 낳는 화폐야 말로 최고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최근에 도달한 화폐의 이미지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283쪽>
+ 올해 2015년 상반기 가장 핫 했던 책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아닐까.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결국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사람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우세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의 소득불평등 구조' 안에서 발생한 필연적 자식이란 뜻이다.  

p.58
요컨대, 우리 시대의 사회적 관계는 쇼핑과 회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뭔가 관계를 맺으려면 이 회로를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친구란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연애야말로 화폐권력의 주요 타깃이니까. 각종 ‘데이’며 이벤트에서 일상적 데이트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기승전결을 주제하는 건 어디까지나 화폐다.
+ 지금 일본에선 남자들의 1/3인가, 1/4인가가 결혼을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다. 그들의 경쟁자가 또래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경쟁자는 나이 많은 부자 아저씨들이다. 이렇게 세대 갈등은 증폭된다. 화폐가 동 시대의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p.65
“누구에게나 들리는 환청이 있다. ‘화폐의 노예’가 돼라. 그러면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19쪽>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증여란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서비스, 여자, 어린이, 춤, 축제 등”을 함께 주도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시 부족들 사이의 증여와 답례 형식을 취하는 교환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사회총체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경제적 필요 떄문이 아니라 공동체 사이의 유대 강화, 공동체적 질서 유지를 위해 교환한다는 것이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174쪽> 말하자면, 교환보다는 증여가 더 주도적인 배치인 것. 하지만 이 배치가 전도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 사이에 치명적인 거리가 생겨난다.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는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폐가 탄생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은 분리된다. 결국 돈은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절대 가치가 되고, 인간 적 가치의 다양함은 사라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런 사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현대사회의 이런 고립와 소외는 '관계의 속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지역사회 기반이었을 때,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모두 '장기적 관계'였다.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과제였다. 그것이 산업사회를 넘어오면서 회사가 생기면서, 도시가 생기면서, 장기적 관계들은 소멸되었다. 한번 보고 안 볼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건도 그렇고, 심지어 이웃도 그렇다. 오래 볼 사람이 아니니 굳이 잘 해줄 필요가 없다. 그러한 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이다. 그렇게 우린 돈과 물건을 '간편하게 교환하기 시작'했고, 장기적 관계의 이점들 (친밀함, 우정, 호혜성, 유대, 공동체적 질서, 집단 양심 등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원시부족에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를 만나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장기적 관계가 주를 이루는 사회에선 '교환'이 '증여'를 압도할 수가 없게 된다.

p.67
일반화된 교환은 동일화 논리이다. 원시 사회가 무엇보다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동일화 논리이다. 타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신을 자신으로 구성해 주는 것,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고유성, 스스로를 자율적 ‘우리’로 생각하는 능력 등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만인 사이의 교환은 원시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동일화는 죽음을 향한 운동인 반면, 원시 사회의 존재는 삶의 긍정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279쪽>

화폐는 그와 같은 속성을 극단화 한다. 돈이 돈을 낳는 것. 생식하는 화폐, 그것이 곧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특히 금융자본은 이런 화폐의 ‘속성’을 최고의 형태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미다스 왕의 오래된 예언까지 실현하고야 말았다. 금융자본은 한마디로 버블경제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었던 돈과 인간, 돈과 살림 사이의 최소한의 연관관계도 해채해 버렸다. (…) 이 자본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순환계를 파괴하고 잠식해 버린다. 
+ 돈의 양면성을 보자. 돈의 가장 큰 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편의성'이 아닐까? . 물건을 물물교환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만, 돈을 이용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젠 카드를 이용하지 않는가? 현금마저도 필요없어진 세상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자. 앞서 말했지만, 돈은 다양한 가치를 일렬로 줄을 세워버린다. 1000원치의 물과 1000만원의 다이아 중에 무엇이 가치있는가? 그걸 돈으로 따질 수 있는가? 하지만 돈은 그것의 순위를 메겨버린다. 그리고 돈은 돈의 가치를 대변하는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우린 카지노에 가면 돈을 칩으로 교환하는데, 마치 칩이 돈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거기선 5달러가 한나의 칩에 불과하고, 그런 식으로 세뇌당하다 보면 어느새 10개 정도의 칩은 아무렇지 않게 베팅하는 나를 볼 수 있다. 또한 돈을 통한 거래는 마치 '정당한 거래'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이정도 서비스에 이정도 돈을 지불했다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서비스 뒤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즉, 인간, 그리고 관계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차양막이 바로 돈이다. 그것이 돈의 이면이 아닐까? 

p.89
“돈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하루에 30키로미터를 걷고 나면 분명 지치고 피곤하고 배가 고플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끼니를 해결할 식당과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을 테고, 다음 날 다시 일어나 두 발로 걷기 시작할 테죠. 그렇게 하는 데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은 겸손해지는 법. 그리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비노바 바베, 버리고 행복하라 13쪽>
+ 돈의 편의성이 낳는 이면에는 '오만'도 있구나. 내가 돈이 없으면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지만, 내가 돈이 있으면 그 도움을 사려는 마음밖에 생기지 않겠구나. 그리고 세상을 이렇게 보겠지 '역시 돈이 있어야 이렇게 대접받고 살지' 그런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p.96
이들은 (임꺽정과 친구들)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먹고 마시고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을 하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만난다. 그들에겐 세상을 구하겠다는 이념이나 명분 같은 건 일체 없다. 대신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자존심,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그 어떤 권력과 제도, 관습 앞에서도 머리 숙이지 않겠다는 원초적 자존심, 오직 그것이었다. 중앙경제를 뒤흔들고, 당대 만중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하고 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집은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모든 가치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기를 부여잡으며 몸부림치기보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술들을 터득해야 하지 않을까. 
+ 어떤 권력에도, 어떤 돈에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세.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자리를 결정한다. 돈이나 권력이 그 자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p.121
브리콜라주란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에 나오는 말로 원주민들의 ‘손재주’를 뜻한다. 브리콜뢰르, 곧 장인들의 작업장에는 별 연관도 없는 재료들과 기구가 널려 있다. 하지만,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장인들은 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들에게 제멋대로 배열된 재료와 도구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다스의 손이 모든 걸 ‘화폐화’해 버린다면, 브리콜라주는 그 반대다. 최소한의 화폐로 다양한 삶을 연출해 낸다. 
+ 이번 칠보초 여름 캠프에서 새롭게 시도했던 것이 '팅커링 게임 만들기'이다. 사실상 디자인씽킹 중, '프로토타이핑'에 방점을 찍은 것인데, 아이들에게 제한적인 도구들만 주고, 게임을 만들어보게 했다. 나는 그걸 아래에 나오는 브리콜라주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게임과 놀이를 사고 소비하는 데 익숙한 아이들이, 스스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에서 진행했는데, 역시 우리 아이들은 이미 훌륭한 크리에이터였다. 처음에는 각자 하나씩 만들어보고, 나중에는 팀별 게임까지 만들었다. 우리가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는 길은 단순하다. 사지 않고, 직접 만들고 표현하면 된다. 브리콜라주의 마법은, 그 거친 창조성과 다양성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성의 회복이 달려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p.136
쉽게 말하면,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무언가를 탐구해 가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한 것이다. 어떻게? 다름 아닌 책을 통해서다. 책은 내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었다. 공부와 우정과 밥은 하나라는 것을. 솔직히 그 당시엔 공동체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 하지만, 내 욕망의 기저에는 ‘사람과 공부’라는 키워드가 뚜렷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 그래서 알게 되었다. 재산이 많은 것과 풍요롭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가난한 삶, 이것이 쇼핑과 부동산이 붙들려 있는 우리 시대 중산층의 풍경이다. 
+ 돈을 벌지만 가난하다. 왜냐, 가난은 돈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 달려있다. 

p.138-9
“경제학자들은 한 가지 유형의 일자리, 즉 봉급 근로자 유형만을 염두해 두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어떤 경제학자도 자립형 노동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 젊은이가 고용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한마디로 역겨움을 느낀다. … 우리 인간의 삶이란 고귀한 것이어서 취업시장에 나가기 위해, 또는 인생을 고용주를 위해 바치느라 커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유누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325쪽>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평생 동안 한 직장에서 쳇바퀴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 아닌가. 그리스 시대에도 노예는 임노동자, 자유인은 아무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 했다. … 애초 이걸 전제로 해서 인생 전체의 사이클을 짜는 게 옳지 않을까. … 처음에는 누구나 어긋난다. 돈을 따르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따르자니 돈이 울고. 여기서 중요한 건 무게중심이다. 존재의 무게중심! 미국의 유명한 대체의학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창의적이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돈과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 돈은 우리가 생명에너지와 바꾸고 있는 물질이다. 따라서 … 당신의 일을 생명에너지로 환산할 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계산해 본다. 고된 노동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 값비산 휴가와 빈번한 병치레를 요구한다면 결국 당신은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422-423쪽>
+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란 무엇인가? 자유인이다. 스스로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이다. 하지만 세상은 자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하기 위해서. 노동은 당연히 '직장에 다녀야 할 수 있는 것'이란 미신을 심었다. 그리고 우린 그 미신을 진실로 믿고 산다. 먹고 사는 길은 오로지 일자리 만드는 것 밖에 없다고 믿고 산다. 다른 삶을 그려볼 여유도 이미 사치라고 여긴다. 이게 메트릭스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p.144
“가까운 장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생 두서너 개씩의 직종을 바꿔 가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이 혼자 독립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보다 빈번해 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273쪽>

p.149-151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이라는 작은 저서에서 고대세계에서는 어디에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조건 등에 대해 정면으로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목적으로서의 부 자체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조건에서 좋은 인간 - 가장 좋은 시민, 친구, 부모, 아이 - 을 창조할 수 있을까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부가 어떻게 인간 창조에 기여할까(혹은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가난하면 사람은 타인의 일을 생각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풍요로우면 호화로움에 빠지게 되어버린다라는 식의, 이 시기 중국 전국시대, 초기 인더스 문명 등등 지구상의 다른 문명에서 끊임없이 논의 되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인간이 될까였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인터뷰>

어떻게 쓰는 것이 증여인가? 인간 혹은 삶을 창조하는데 써야 한다. 그럼 창조란 무엇인가? 내용이 뭐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한 말로 ‘인복’이라고 한다. 사람이 오면 더불어서 많은 것이 함께 온다. 밥과 공부,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활동, 기타 등등. 현대인은 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러니 평생 죽어라고 벌어도 항상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인복으로 해결한다면? 돈을 버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이 모인다.”<대학> … 그렇다면 노후 대책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투잡을 뛰고 각종 보험을 드느니 그 돈으로 사람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써야 하지 않을가? 이게 훨씬 더 경제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조이자 증여에 해당한다. 
+ 돈은 자기 자신의 복제가 아닌, 인간 그리고 삶을 창조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창조의 핵심은 연결성이다. 그러니 단순하다. 돈은 사람들에게 써야 한다.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소비는 옳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 하거나, 미래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소비는 틀렸다. 세상에 옳고 틀린 것은 물론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강조'하기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썼다. 

p.159
1.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한다. 
2. 재물에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색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3. 말솜씨가 뛰어나야 한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160쪽>

p.161
양자론적으로 보면 증여는 생명의 원리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선물에 대해 답례를 하지 않으면 영력의 유동이 정지해 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도 배포 큰 선물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마치 답례를 의무처럼 여겼다.” 증여의 사이클이 깨지면 “전 부족 아니 전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다는 식의 일종의 우주적인 책임감”<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64쪽>이 충만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명인은 한마디로 ‘우주적 미아’다. 오로지 착취와 스톡으로만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 그 결과, 경제는 무한증식을 향해 달려가지만, 존재는 붕괴 직전이다.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 우주에서 단 하나의 존재만 자신의 무한증식을 향해 달려간다. 바로 '암'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 우리 지구는 암을 키우고 있는가? 면역력을 키우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참 간단한데, 현실을 보면 참 어렵다 이 말이지.  

p.168-9
화폐가 탈영토화하여 선물로 변이되는 관계, 다양한 능력들이 순환하면서 새로운 화폐로 탄생되는 배치, 그것이 일상화되는 시공간이 바로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다. … 왜 다들 살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공동체를 기획하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공동체를 주로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관성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우선은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공동체는 특별한 이념적 조직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결의체는 더더욱 아니다. 잘먹고 잘살기 위한 궁리, 화폐에 무릎 꿇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갈 궁리, 무엇보다 고독과 소외의 ‘외딴방’에서 탈주하여 즐겁고 유쾌하게 살기 위한 궁리 등등. 이런 궁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결론이 공동체다. … 한국인 10명 가운데 7명이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증의 원인은 간단하다. 소통이 단절된 탓이다. 공동체란 별 게 아니라, 바로 이 소통의 현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 공동체란 소통의 현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 다른 것들보다 이게 잴 재미있으니까. 난 그렇게 사는거다. 게다가, 이것 말고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p.173
“생명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며, 우주의 조건은 한 존재가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이 자리를 내줌으로써 그 새로운 존재들로 하여금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조한경, 저주의 몫. 239쪽>

“원조를 주는 쪽도 그렇고 받는 쪽도 그렇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 액수이다. 원조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원조를 주는 쪽에도 받는 쪽에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얼마?”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44쪽>

p.177
공동체는 축적을 지향해선 안 된다.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중요한 건 돈을 통해 삶이 구성되는 것이지, 축적, 증식하여 조직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조직은 번창하는데 구성원들은 피로와 무력감에 시달린다면? 그건 실패다. 구성원들의 멤버십과 능력의 향상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요한 건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면 사막이나 심지어 화성에 가서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없고 조직만 비대해지면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 비노바 바베는 평생을 공동체 운동을 했으면서도 늘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창했다. “큰 규모로 일을 하기 위해서 시작된 집단은 그 자체의 조직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직을 가지고는 결코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조직은 틀이며, 그것은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조직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도식에 따라서 일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직에는 정신의 자유가 없다.” <비노바 바베, 265쪽> 그렇다. 중요한 건 삶이고 자유인 것이지 조직 자체가 결코 아니다. 조직을 위해 공동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들이 잘살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네트워킹을 하다 보니 공동체가 된 것뿐이다. 이점을 결코 혼동해선 안 된다. 
+ 공동체의 속성을 잘 말하고 있다. 공동체의 특징은 '흘러가는 것'이지, '쌓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왜 욕을 먹는가? 자신 목숨의 담보를 위해 사내 유보금을 몇조를 쌓아가고만 있을 뿐 그것을 재투자하거나 사회적 책임에 쓰는 것을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사회와 떨어지는 순간 '암 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된다. 기업이 공동체가 되는 방법은 단순하다. 흘러가게 해야 한다. 지역사회로, 구성원들에게, 고객들에게 다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우리 각자의 인생이지, 조직, 기업, 국가,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삶이 잘 보존되도록 하는 사회는 결코 무너질래야 무너질 수도 없다. 제발 다른 가치들에 본질적 가치를 전도시켜선 안 된다. 


p.186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 해도 글쓰기다. 누구든 글쓰기를 해야 비로소 지식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글쓰기는 귀동 공동체의 ‘농사짓기’에 견줄 수 있다. 농사가 땅을 일궈서 먹고사는 노동이라면, 글쓰기는 ‘마음의 대지’를 일구는 노동이다. 농부들이 곡식을 수확하여 세상에 유통시키는 것처럼 지식인들도 글과 책을 통해 ‘마음의 양식’을 널리 순환시켜야 한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늘 아래 머리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법, 지식인에게 그 길은 오직 글쓰기뿐이다.
+ 갑자기 글쓰기로 맥락이 건너 뛰지만, 동의한다.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나였다. 본질은 순환임에도 그렇지 못했다. 나 자신도 하나의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p.195-6
바타유는 말한다. “우리는 부와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 없이 준다.” <저주의 몫, 69쪽> 모든 성장의 근원인 태양빛이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잉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아무 대가 없니 주는 존재에 의해 살아가는 한, 모든 존재는 우주적으로 빚을 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갚아야 한다.
+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태어나는 것에 나의 의지도, 나의 노력도 없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다. 부모의 헌신적인 기다림과 아픔이 없었다면, 그리고 태어난 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다. 요즘 특히 재원이 육아를 하면서 많이 느낀다. 그러니 그 어떤 존재도 홀로 떨어진 섬은 없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미 받았으면, 분명 갚을 것도 있다. 

p.198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다른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총은 무서워하며, 게다가 호랑이는 다른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비굴하게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버리고 행복하라, 36쪽> 이런 논리를 경제적으로 응용해 본다면, 첫째는 돈에 대한 두려움, 부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아무리 엄청난 부와 재물 앞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그 다음엔 내가 부자여도, 아무리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가 부자가 되었는데, 그 부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멀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무외시가 아니다. 내가 그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누구도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p.200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재충전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빈 그릇이 되는 것이며, 한쪽 손을 들고 축복을 받은 후에 다른 손을 열어서 그것을 통해 그 축복이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298쪽>

p.202 
현대인들에겐 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사이의 구별도 참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신성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식의 구별도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그런 표상을 극대화시켰을 터이다.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를 신성시하는, 그래서 오직 소유만 남고 사람은 증발되어 버린 체제라면, 사회주의 체제는 역으로 ‘사회적 소유’만을 강조하다 사회도, 개인도 불행에 빠진 체제다. 자본주의와는 정반대로 소유에 대한 욕망을 단일하게 묶어 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면에서 자본에 종속된 체제였던 셈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대립시키는 한, 아무 대책이 없다. 오히려 그 경계를 무화시켜 버려야 한다.
+ 사회적 소유와 공적 소유의 변증법. 그 경계의 지혜는 무엇일까?  

p.203
“사실상 우리는 생황을 공동체 생활과 개인 생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 둘을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될 것이다. 개인의 행동들은 사회적인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사회적인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개개인과 사회를 갈라놓는 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먹는 것이나 잠을 자는 것까지도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의무로 간주한다. …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 건강하게 잘 자는 것,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나의 사회적 의무의 부분들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회에 바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의 사적인 일에 쓸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는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나의 모든 행동들은 내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체험이다. <비노바 바베,406쪽>
+ 이 정도 레벨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 자신을 확장시켜야 할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의 변증법이 해결이 될 듯 하다. 그렇지 않은가? 이쯤에서 켄 윌버의 무경계와 의식의 스펙트럼이 떠오른다. 

p.208
흥미로운 건 사주에 재물운이 많으면 부자가 될 거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재물은 많은데 그 재물을 감당할 명줄이 약한 경우는 재물을 좇다가 화를 입게 된다. 다시 말해 늘상 재물과 연루되긴 하는데, 그로 인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래서 부자가 되려면 일단 존재의 무게중심이 튼실해야 한다. … 허영만의 <꼴>에도 나오다시피, 격이 낮은 자가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수명이 짧아진다. 그 경우, 차라리 가난하면 오래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존재의 축을 바로잡는 훈련이나 공부가 없이 돈을 함부로 버는 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부자가 되려면 '격'이 높아야 한다. 격이 낮은 자는 액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역시 '수신'이다. 수신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만 부리다가 망하는 사례는 주위에서 많이 봤다. 나는 그러지 말자. 

p.216
비노바 바베의 입을 빌려 말하면, “진정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의 곁에서 스스로 배울 뿐이다. 태양은 누구에게도 자기 빛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의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갈 뿐” <버리고 행복하라, 31쪽>인 것처럼, 지식과 정보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 사방에 정보가 넘쳐 있고, 지식인도 넘쳐난다. 그렇다면 도처에서 배움과 가르침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지식과 대중, 공부와 일상이 나누어진 시대도 드물다. … 그래서 더더욱 교육과 화폐의 결탁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이 견고한 결합을 어떻게 해체시킬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217-8
내가 지금껏 본 것 가운데 최고로 멋진 모델 하나를 소개한다. 이 세계에선 학생이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을 찾아 천하를 떠돈다. 그리고 대학이 따로 어디에 이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만나는 그 현장이 곧 대학이다. 그러므로 대학 또한 움직인다. 방랑하는 교사, 움직이는 대학 - 이거야말로 ‘호모 코뮤니타스’의 향연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라. 벽촌의 사람들도 낯설고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이 방랑하는 ‘산니야시(성자)’의 전통이다. … 산니야시는 한 해의 대부분을 돌아다니다가, 비가 오는 우기 넉 달 동안은 한곳에 머문다. 그래서 산니야시가 머무는 마을에서는 그의 지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친다. 산니야시는 걸어다니는 대학이며, 돌아다니는 학교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학생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가르침을 베푼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신선하고 충분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지식을 얻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아이에게 젖을 빨리면서 기쁨을 느낀다. 만일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돈을 요구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 우리는 이렇게 방랑하는 교사의 전통을 다시 세워야 한다. … 모든 가정은 학교가 되어야 하며, 모든 들판은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 모든 방랑하는 산니야시는 대학교가 되어야 한다. 학생은 배우기를 원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다. 모든 마을에는 하루에 한두 시간씩 가르침을 베풀고 나머지 시간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체제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교육의 완벽한 틀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된다. <버리고, 행복하라 72-73쪽>
+ 정말 멋진 모델이다. 고 함석헌 선생님께서 과거에 매주 1번 성경공부를 하시고, 주 1-2회 강연을 하시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농사를 비롯한 밭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닐까. 나도 지식을 나누고 교류하는 모임을 열고 싶은데, 계속 돈을 생각하느라 늦었구나. 란 생각도 했다. 지식을 얻고 나누는데 돈은 생각하지 말자. 돈과 지식을 교환의 대사고 삼지 말자. 그저 증여하자. 지식을 순환하게 하자. 그것이 나에겐 먼저다. 

p.219
“지난 반 세기 동안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인간이 달에까지 갈 정도로 세상이 변했지만, 어째서 기근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91쪽> 이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이 질문은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찾았다. 그라민 은행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원조나 구호물자가 아니었다. 생존에 필요한 생산도구를 구입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들에게 절대로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 … “우리는 다른 은행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그 반대로 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에선 가난한 사람들, 그것도 천대받는 여성들에게만 돈을 빌려 준다. … 담보나 보증 같은 건 필요없다. 서류도 필요없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다. 반드시 ‘밴드’를 구성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갖은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기 때문에, 융자를 받더라도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또 실천력도 생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149쪽> 돈을 꾸려면 친구를 만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돈을 융자해주고, 또 이 융자를 통해서 우리가 거두고 있는 성공이 바로 회원들의 손에 쥐어진 구겨진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열설적이게도 돈을 매개로, 돈으로써 이루어진 우리의 소액융자는 사실상 돈과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소액융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액융자란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적 자산을 일깨우는 수단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 337쪽>
+ 소액융자의 정의 자체가 다르구만. 그가 보는 융자란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일 뿐이다. 돈이 핵심이 아니다, 관계가 핵심이고 유누스는 그것을 알고 있다. 누구와는 다르다. 

p.245

내가 만나 본 Y는 번듯하고 성실하고 시원시원해 보였다. … 그는 늘 풍족하게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젊을 때 돈을 바짝 벌고 싶다고 했다. … 단 한 번도 가난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서 훗날 자기의 자식에게 그 삶을 물려주는 게 인생 최고의 가치이고 행복이었던 거다. 번듯하고 정의로운 까닭에 위험에 처한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 하지만, 세상의 아픔, 세상의 수많은 빈자들의 아픔에 공명할 만큼 정의롭지는 못한 Y는 자신이 젊을 때 바짝 많이 벌어 놓고 싶다는 그 돈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머리도 좋지만, 한 가장의 눈물이고, 한 학생의 학비이고, 한 가족의 생활비이기도 할 그 돈이 그의 젊음의 커리어를 빛내 줄 연봉이 되리라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 가난을 모르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그의 미래의 직업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다. 그는 그 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 인지하지 못한 잘못이 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이다. 게다가 인지하면서 저지르는 잘못은 분명히 나의 것이고, 책임 또한 나의 것이다. 아니, 되려 책임은 2배가 된다. 무지에 의한 책임보다 알면서 저지르는 책임이 더 큰 이유는, 바로 그는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죄'를 한번 더 저지르기 때문이다.


  1. 조아하자 2015.08.08 15:26 신고

    프리랜서 해서 먹고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건 현실이니 이런 책에 있는 이야기를 너무 믿고 프리랜서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그런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재취업했는데 이전 직장 급여의 50%도 못받거든요.

    • 네 공감합니다. 이런 책에 있는 이야기만 믿고 뛰어드는 건, 안 될 일이지요. 책은 지식을 주고, 자신의 가능성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으로 도움을 받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책이 현실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건 인생의 경험으로 배워야 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사실, 저도 프리랜서를 하고 있지만, 그 양면성은 잘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지요. 사실, 프리랜서는 몇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해보면, 일단 '시간의 자유함' (사실상 자유는 아니지만, 비교적 자신이 하고 싶은, 원하는 일을, 우선순위를 스스로 짜서 움직인다는 점에선 자유하지요.) 그리고 '가치나 강점 살리기'가 떠오르네요. 저의 경우, 원래 공대 출신이지만 지금은 아이들 교육을 주로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일이 저에겐 가치관(교육)와 강점(코칭과 강의) 살리기에 더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엔지니어링 분야에 있었다면 이런 만족감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공통되는 키워드는 '내적 만족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강한 양은 강한 음을 부르듯, 반대되는 측면도 있지요. 많은 경우 결국 '돈'인데요, 저 역시 갑자기 수업이 없을 때도 꽤 있고, 또 언제나 불안하다는 측면에선 정말 쉽게 권하지 못할 일이긴 합니다. 게다가 말씀하신대로 프리랜서 하다가 재취업하는 경우, 더 좋은 대우를 받기도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전 현실적인 경제적 안정감이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람에겐 쉽게 프리랜서를 권하진 않습니다. 차라리 직장생활로 안정적인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좋지요. 비행기로 치면 연착륙하는 거지요. 저의 경우 다소 급작스런 프리랜서 생활을 하게 된 경우(급착륙)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생활을 몇년간 유지하고, 버티면서 배운 것 하나는 있습니다. 이게 삶이구나. 삶을 진하게 산다는 건 이런거구나. 뭐랄까요. 삶의 생생함이라고 할까요. 공부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역량을 쌓고, 갑작스런 목돈도 쥐어보고, 돈을 떼이기도 해보고, 큰 프로젝트도 했다가, 망해도 보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전 분명 직장생활 보단 좀 더 삶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경험들 속에서 반응하는 저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그리하여 저를 더 많이 알 수 있었던건 덤이구요. 어쩌면 저는 그 덤 때문에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렇게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직 저도 풋내기라 미래가 어떻게 될진 잘 모르겠네요. 결국 선택과 책임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조용한 블로그에 오셔서 가끔 댓글 달아주심에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심에)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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