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버린 육아 일기
올해를 시작하며 나에겐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꾸준함을 훈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년부터 매월 심톡을 진행 하면서 느낀 바도 역시 ‘꾸준함’에 대한 교훈이다. 일회일비하지 않고, 그저 꾸준히 할 때만이 ‘깊은 기쁨’을 건져올릴 수 있다는 사실! 나는 그 교훈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해야만 해서 억지로 하는 것도 좋지 않고,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우린 너무나 쉽게 최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각오가 습관이 될 때까지는 약간의 ‘의식화’가 필요하다. 올해 나의 중요한 ‘의식화’는 이것이다. 매일 1번의 성찰 일지 쓰기. 매월 1번의 육아 일기 쓰기. 그리고 분기별 1번 칼럼 쓰기. 육아와 교육으로 인한 (나름) 바쁜 일정 가운데 이정도 글을 쓰기만 해도 스스로 칭찬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이로 인한 만족도 컸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육아 일기가 한번 밀렸다. 꾸준함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질끈 눈감고 말았다. 사실 8월 초에 썼어야 했는데, 바쁜 일정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시기를 지나자, 힘들었던 여름에 대한 보상으로 ‘당장 하고 싶은 공부'에 더 몰두하고 말았고 결국 9월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쓰려니 ‘힘들어도 그냥 쓸 껄’이란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온다. 꾸준히 하던 양치질을 거른 느낌, 그런 찝찝한 기분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시작한다. 사실 하반기는 지난 상반기보다 더 정신이 없을 것 같은 일정이지만, 그래도 한번 힘을 내보자. 내가 재원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정신적 유산 역시 ‘뛰어난 재능이 없어도 꾸준히 하면 누구나 탁월함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니깐 말이다. 나부터 시작하자. 늦은 건 없으니까.
재원이의 3대 뉴스
지난 2개월 동안 재원이는 어떻게 지냈을까. 그 사이 변화에 대해 재원이의 3대 뉴스를 꼽아보자. 사실, 성찰은 매우 주관적인 영역이라 재원이가 스스로 3대 뉴스에 대해서 정리해야 하지만, 아직 그러한 사고를 할 시기가 아닌지라 아빠가 대신하는 걸로 하겠다. 다시 말하면 재원이의 3대 뉴스가 아니라 ‘(아빠가 보는) 재원이에게 벌어진 3대 뉴스’가 더 적확한 단어이다. ㅎㅎ 그 첫 번째 뉴스는 바로 ‘뒤집기’다. 지난 7월 중순 쯤부터 재원이는 뒤집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재원이를 눕혀놓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근데 이게 왠일, 돌아오자 재원이가 어느새 뒤집어서 바둥바둥 거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웃으며 안아주었다. 아이고 예뻐라. 이제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하지만 나는 또 결정적 순간을 놓치고 말았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재원인 나에게 처음으로 뒤집기를 보여주었다. 그 곰돌이 푸우처럼 뚱뚱한 아가가 낑낑대며 넘어가는게 왜 그렇게 귀엽고 예쁘던지. 처음에 그렇게 힘들어하던 재원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뭐 가만 놔두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뒤집기 기계가 되었다. 기저귀를 갈 때도, 로션을 바를 때도, 함께 놀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휙휙 돌아간다. 아마 글을 쓰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겠지. 휙휙휙.
두 번째 뉴스는 무엇일까? 나는 ‘이유식’으로 꼽고 싶다. 7월부터 시작된 이유식은 아내에게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감을 선사했다. 처음에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과 걱정으로 밤을 지새던(?) 아내는 이제는 어느새 이유식 마스터가 되었고, 그렇게 재원이는 이유식 먹는 마스터가 되었다. 남들은 이유식 한번 먹이는게 그렇게 어렵다고 하던데, 예외도 있나보다. 재원이는 처음먹는 쌀미음부터 가리지 않았다. 물론 가끔 낯선 음식은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처음만 그럴 뿐 어떤 낯선 음식도 두번째부턴 사정이 없었다. 냠냠 꿀꺽 잘도 들어갔다. 어릴 적 이런 말을 들었다. ‘어비 어미는 자식 새끼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나는 이 말이 거짓말인줄 알았다. 그저 부모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참말이었다. 재원이가 고 작은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배가 부른지. 어른 말씀 틀린 말 하나 없더라. 이유식과 더불어 소비의 변화도 있었다. 유기농 야채와 고기를 먹여야 한다는 일념하게 우린 가까운 '두레생협’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다소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잘 이용하고 있다. 굉장히 인색한 나지만, 이번에는 별 이의가 없었다. 되려 "언제 한번 윤리적 소비를 해볼까"라고 생각하던 차에,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정말 좋은 소비 습관을 만들어보자는게 나의 생각이다. 좋은 음식을 적정한 가격으로. 이러한 ‘윤리 소비'의 시작은 어쩌면 나보다 자식을 더 끔찍히 여기는, 그래서 중요한 가치를 잊으려 하지 않는 ‘위대한 엄마’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여름 휴가 그리고 할머니 가설
재원이의 마지막 뉴스론, 7월 마지막 주에 즐긴 여름 휴가를 언급하고 싶다. 약 한달 전에 대구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출산을 마치고 난 직후인 설 연휴 때 한번 올라오셨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나는 엄마와 아부지가 손자를 그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다. 4박 5일 휴가 동안 완전히 업고, 뽀뽀하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잠시 동안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허긴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나는 요즘 뒷전이 되버린지 오래다. 전화로 맨날 재원이만 찾는다. 소외감 느끼게시리. 이건 단순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만의 현상이 아니다. 외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아내 말로는 장모님도 그렇게 아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 했는데, 재원이한테는 예외인가 보다. 재원이만 보면 장모님 웃음꽃이 활짝 핀다. 하루 종일 데리고 있으셔도 힘들단 불평 한번 없이 재원이를 봐주시는데, 얼마나 이쁠까. 장인 어른도 재원이랑 엄청 잘 놀아주신다. 이렇게 우리들의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제 한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고, 그 역할이 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맛 보는 시기가 아닐까.
얼마 전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할머니’란 존재는 사람과 범고래, 그리고 들쇠고래에게만 예외적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동물은 죽기 전까지 새끼를 낳지만, 번식을 하지 못하면 곧 죽고 만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동물만은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생존을 지속한다. 그리고 북아메리카 태평양 해안에 서식하는 범고래를 관찰, 연구해 온 해양생물학자들은 할머니 범고래가 집단에서 특별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연구에서 나온 ‘할머니 가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할머니가 식량 확보, 아이 돌보기, 홍수나 기근을 극복한 경험 등을 통해 자손을 번창하게 만들고, 이것이 폐경 이후의 수명연장을 재촉했다고 설명한다. 하물며 범고래 마저도 이 정도인데 우리네 할머니들은 이미 얼마나 뛰어난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걸가?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또한 우리들 역시 그 보답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타인을 돕고 누군가에게 기여할 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존재를 확인받을 때 행복을 느끼니까 말이다. 이러한 윗 어른들의 기여에, 그리고 그 깊은 사랑에 참 감사한 요즘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그리고 그 아이의 아이까지 맡아 돌보는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께 감사하단 말 전하고 싶다.
(논문 원문 정보 : Brent et al., Ecological Knowledge, Leadership,
and the Evolution of Menopause in KillerWhales, Current Biolog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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