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라. 


[리뷰] 

어제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김정운 교수가 쓴 <남자의 물건>이란 책을 봤다. 요즘 스파노자 ‘에티카’랑 피터 센게 '제5경영' 같은 무거운 책만 보다 보니, 다소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집어들었고, 빨리 읽었다. 1부와 2부가 나뉘어 있는 책인데, 솔직히 1부는 별로 임팩트는 없었다. 이미 ‘노는 만큼 성공한다’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비롯한 책과 다양한 강연에서 전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김정운 교수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겐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2부 남자들과의 인터뷰는 꽤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이어령의 책상, 안성기의 스케치북, 문재인의 바둑판 등 한명 한명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물건에 대한 애착도 느껴보는 경험은 꽤나 즐거웠다. 나에게도 물어보았다. 내가 애착을 가진 물건은 무엇인지. 


하나를 꼽을 순 없었다. 3개를 추려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책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건 바로 책상이었다. 우리 집엔 꽤 큰 책상 하나가 있다. 결혼 할 때 아내가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뭐냐고 물었다. 보통 남자들은 축구를 보거나 게임을 하기 위해 TV를 큰걸 원한다고 하는데 나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TV는 필요없다고 말했고, 되려 크기는 내가 더 나서서 줄였다. 그 대신 나는 직접 공방에서 제작한 책상을 사달라고 했다. 그게 내가 원한 조건이었다. 기성 가구점에선 내가 원하는 사이즈는 살 수 없었다. 그렇게 얻게 된 우리 집 책상은 정말 크다. 한 6명이 함께 공부할 수 있을 정도다. 일상이 바쁘다 보니 나도 생각보다 그 책상 앞에 앉아있을 시간은 적다. 하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탁 좋아진다. 아내 입장에선 방을 좁게 만드는 그 책상이밉상이겠지만  :) 두 번째로 수첩이다. 나는 10년전 부터 쓰던 수첩을 아직도 모아둔다. 2-3년 전부턴 그 역할을 에버노트가 거의 대신하기에 수첩에 끄적거리는 양은 확연히 줄었다. 하지만 그 애착은 아직 줄지 않았다. 재작년 이탈리아 놀러 갔을 때, 내가 가장 기뻤던 순간 중의 하나는 피렌체 가죽 공방에서 작고 이쁜 수첩 하나 샀을 때다. 다소 여성스런 취향이라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좋을 걸 어째. 


마지막으론 역시 이다. 나는 책을 사는 것에는 대범하다. 하지만 책을 나누어 주는 것에는 인색하다. 이 인색함이 나이가 들 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올해 안에 책을 대거 나누어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아직은 역시 주저주저한다. 내가 산 책에 대한 애착은 어지간한 편이다. 책을 하나 사서 좋은 문장에 줄을 치고, 가끔 들여다 보는 것.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그게 나다. 한 권의 책 <남자의 물건>을 통해 내가 어디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성찰해 봤으니, 이번 책도 읽은 값은 잘 치른 것 같다. 내가 가진 욕망을 잘 들여다보고, 솔직해 지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 그것은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니다. 연습이 필요하다. 디테일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에.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더 자연스럽게, 더 나답게 살 수 있기에. 이런 작업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나를 아는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옮겨적기] 

2부 인터뷰에서 마음에 드는 몇몇 글을 발취해 보았다.


1. 신영복

한국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불일치의 기원을 신영복은 서구에서 강제로 유입된 ‘근대성’에서 찾는다. 특히 지식인은 바로 이 근대성의 문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형식이 내용을 정확하게 담을 수 있는 ‘탈근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은 ‘주체’ ‘자아’의 구성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구체와 자아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영복은 지적한다. 인간의 상호관계에서는 서로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타자와의 과정을 거치며 상호 이해의 부재, 공감 부재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관계와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주체는 필연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를 겪게 된다. 


“제가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잖아요.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고 이런 거죠. 그래서 감옥에 가서도 처음에는 저 사람의 죄명이 항상 궁금하고, 형기가 얼만지, 가정은 결손가정이었던가, 또 학력은 어느 정도인가 부단히 분석했지요. 그게 아주 근대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하고 긴긴 겨울 밤,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으면서 아, 나도 저 사람과 같은 부모를 만나서 저런 인생 역정을 겪었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겠구나 하는 그런 공감을 갖게 되요. 아마 한 5,6년 걸리지 않았나. 그때쯤 제가 왕따를 면하게 되요. 처음에는 왕따인 줄도 몰랐지. 아주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 잘 도와주고 이러니까 몰랐는데, 나중에 뵈까 다들 내게 일정하게 거리를 뒀더라고.. 그 시점에 내가 아주 흐뭇했던 것은 ‘내가 발전했다!’ 그런 느낌을 가졌어요. 드디어 머리에서 가슴까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을 마쳤다. 그렇게 생각했죠.” 


신영복의 1차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었다. 대상화, 타자화, 분석에서 이해, 공감으로의 변화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더 먼 여행이 또 신영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2차 여행이었다. … 그 변화와 발전은 인간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신영복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충분히 설 수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변화와 발전이란 결국 이 성숙한 인간관계의 내면화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다. 


+ 누군가를 볼 때 그의 삶을 보려고 하는 것. 그 태도가 내재화 되는 것.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런 시야를 갖는 것. 사람을 넘어서서 다른 대상들에게까지 그러한 공감을 유지하는 것. 신영복 선생님도 감옥 안에서 5,6년이 걸린 작업. 나는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내 머리에서 가슴은 어찌나 먼지. 발은 하물며. 


2. 문재인

바둑은 학문의 수준으로 연구되고 또 학습된다. 바둑은 그렇게 단순한 놀이가 아니기 떄문이다. 바둑은 자기 성찰이 포함되는 아주 희한한 놀이다. ‘복기’다. 프로기사는 바둑을 끝낸 후에 반드시 복기를 한다. 철저한 자기 절제, 자기 성찰의 훈련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장이야!’를 외치며 상대방을 굴복시키면 바로 끝나는 장기와는 격이 다르다. 그래서 바둑판에서 ‘한번만 물러 달라’는 것처럼 비도덕적인 발언은 없는 거다. 자기 성찰의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는 복기를 통해 자신의 실수를 정확히 알고, 성찰해야 한다. 지금 정치인 문재인은 ‘복기’ 중이다. …  


“예, 그것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참여정부가 이명박 정부를 낳은 거 아니냐는 거죠. 예. 그에 대한 부채 의식 있어요. 사실 MB정부의 등장은, 말하자면 가치를 부정하는 거였거든요. 뭐 민주주의, 그거 뭐, 덜 중요하다. 도덕성? 그런 것도 뭐, 도덕성이 밥 먹여주냐? 경제 살리기, 이런 거 해서 잘 살게 해주는 게 최고 아니냐. 이제, 이렇게 이런 가치들을 부정하게 만든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있는 거죠. … MB정부 들어와 보니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 소통이나 화합이란 게 얼마나 중요하냐, 또는 도덕성이나 신뢰 같은 게 얼마나 중요하냐. 이런 것들을 이제 국민들이 제대로 인식하게 되는 거죠.” 


“참여정부는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뭐 정치 개혁이랄까, 우리가 내새우는 그런 가치들에 더 집중하고, 그쪽에 올인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민심이 떠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든 거죠. … 조금은 더디더라도, 이거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다, 이거는 너무나 당연하 거다. … 한두 걸음 앞서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해나간 게 아니라, 훨씬 앞장서서 끌고 나갔다는 그런 면도 있을 테고요."


+ 복기. 바둑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프로선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복기할 수 있다고 하니 놀랍다. 놀러워 하면 그들은 패턴으로 외우는 거라서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인생도 생각해보면 낙장불입이다. '한번만 물러달라'고 조를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복기다. 하지만 복기만으론 절대 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되짚어보고 돌아보고 성찰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오로지 실천. 실천. 자신의 과거를 뛰어넘는 실천.


3. 안성기

안성기의 스케치북을 펼치면 바로 첫 페이지에 자화상이 나온다. 겸손한 사람은 절대 자화상을 그리지 못한다. 더군다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화상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범죄자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는 곳에 거울을 설치해놓으면 더 이상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거울 속의 자신의 눈길을 의식해서다. 카지노에 거울이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화상을 그릴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초상화가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다. 종교적 주체를 주로 다뤘던 회화의 주제가 인간 개인의 초상으로 넘어온 것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자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완성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이 그림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철학에서는 이를 ‘자기반성’이라고 한다. 자신이 인식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객체가 되는 자기반성은 논리적 모순이다. 주체가 동시에 객체가 되고, 이 객체는 동시에 또 다른 주체가 되는 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무한 순환의 두려움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 


+ 자화상.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곧 떳떳함이다.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피해서, 이런 모습이 되었다가, 저런 모습이 되었다가.. 결국 내가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는 상황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아마 미쳐버릴 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기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 이질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넌 도대체 누구냐? 


연기를 하다가 여배우와 실제로 애틋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냐고 물었다. 안성기는 단호하게 없다고 했다. 배우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여배우를 보면 그 부모가 먼저 눈에 어른거리고, 그 배우의 가족들이 자꾸 생각나는데 어찌 에로틱한 느낌이 있겠냐고 반문한다.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며 어찌 그녀의 가족들을 먼저 떠올릴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는 내 항의에 그는 진짜 그렇다며 또다시 미안해한다. 


+ 앞서 신영복 선생님의 '공감'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한번 순서를 만들어 보자. 가장 먼저,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의 삶 그 자체를 상상해 본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낳은 부모님을 상상해 본다. 마지막으론 그 사람이 낳을 자녀들, 손자 손녀들까지 상상해 본다.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마주할 때 나는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공감은 상상력 그리고 주의력과도 밀접하다. 그 사람으로 쑥 들어갈 수 있는 것. 머리에서 가슴은 그래서 멀다. 


4. 조영남

“너 그러다 조영남처럼 된다!” 학창 시절, 음악도 좋아하고, 미술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조금 재주를 보이던 내게 어머니는 항상 ‘조영남처럼’된다고 경고하셨다. 그때 ‘조영남처럼’이란 ‘인생이 엄청 꼬인다’와 같은 뜻이었다. … 내 어머니는 그림도 그리고, 책도 쓰고, 노래도 하는, 조영남처럼 재주 많은 사람은 평탄하게 사는 법이 없다고 했다. 내 어머니에게 조영남은 ‘한 우물’이 아닌 ‘여러 우물’을 파다가 망한 대표적 케이스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이도 저도 아닌 ‘크로스오버’ ‘통섭’ ‘융합’과 같은 방식이 먹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내 어머니는 잘 모르셨다. 


조영남은 경계인이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 동물적으로 안다.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1969년 <딜라일라>를 번안해 가수로 데뷔한다. 지금도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르면 그 세계에서 왕따를 당한다. 그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 화가 조영남도 마찬가지다. 남들 다 그리는 방식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 느닷없이 ‘화투’를 그림의 주제로 들고 나와 화가를 자처한다. … 작가로서의 조영남도 철저하게 경계를 오간다. 그가 쓴 책은 열 권이 훨씬 넘는다. 대중가요에 대한 책을 쓴 게 아니다. 1970년대 중반 가수로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학공부하겠다고 미국에 갔다 오더니 기존 신학계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조영남식 신학을 설파한 <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책을 쓴다. 맨날 시뻘건 화투짝을 그리다가는 느닷없이 자신만의 현대미술론을 정리한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란 엄청 두꺼운 책을 낸다. 


조영남은 일단 ‘전문가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자신이 무지한 게 아니고, 그들이 잘못된 거라는 신념이 있다. 무서운 자기 확신이다. 그러니까 신학, 현대미술, 문학의 장르를 마구 건너뛰며 글을 써댈 수 있는 거다. 그 즐거움에 밤을 꼬박 새는 날도 많다. 그의 글쓰기는 죄다 구어체 문장이다. 말하는 투 그대로 글로 쓴다. 현학적인 표현은 거의 없다. 자신이 아는 내용, 느끼는 그대로 글로 옮긴다. 그래서 문장에 관해 가장 많이 고민했던 번역가 이윤기는 조영남을 ‘구어체 글쓰기’의 최고봉으로 치켜세운다. 


+ 사실 나는 조영남에 대해서 잘 몰랐다. 이번 글을 통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 걸까? 그 엄청난 자기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럽기도 했다. 다양한 재능과 실력이. 그리고 넘나듦과 몰입도. 하지만 그는 그이고. 나는 나다. 그가 글을 쓰는 것과 내가 글을 쓰는 것 다를 바 없다. 좀 더 나 자신을 낱낱히 드러내야 하겠지만, 내가 아는 내용, 느끼는 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더 커지고 있다. 더 꺼내도 괜찮다.  


5. 이왈종

“전통이라는 게 도대체 뭐에요?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계속 발전시키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고.. 정체된 것은 절대 전통이 될 수 없어요. 난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 때도 절대 밑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냥 생각나는 것을 바로 그려라. 주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도 없다. 시를 읽고 생각나는 대로 그려라. … 그랬다고. 재료도 뭐든지 쓰라고 했지. 그랬더니 팬티나 스타킹을 가지고 한국화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나왔어…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 갈등도 생겼지. 그러나 열려 있지 않으면 발전도 없어요. 난 지금도 그래. 남녀의 체위를 그리면.. 너는 자식도 없냐? 또 그런다고. 그럼 난 이렇게 이야기해요. 넌 밤에 이거 안 하냐? … 예술가가 두려운 게 많고 가리는 게 많으면 예술가가 아니에요. 모든 것에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 예술가는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사람이다. 그냥 생각을 토해내고, 감정을 느끼고, 몸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것. 나는 그런 예술가가 되고 싶다. 그 표현이 음악과 미술은 아닐 것이다. 말과 글, 그리고 실천이 될 것이리라. 


도대체 그런 비난을 뚫고 그토록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기초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용기는 자신에 대한 신념, 즉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매일 자기 얼굴을 그린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자기 얼굴을 꼭 한 번은 그린다. 이런 기초의 끊임없는 반복에서 자기 확신에서 나오고,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나오는 것이다. 


“내 서귀포 생활은 게으름이야. 게으르게 사는 게 중요해요. 게을러야 색 하나를 보더라도 오래 보게 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 그래야 내 마음에 드는 색이 나와. 색 하나를 찍어놓고 몇 년을 볼 수 있어야 내 색깔이 나와. 지금 내 그림에 터키바다색, 나뭇잎 색, 다 그렇게 나온 거야."


+ 게으르게 사는 것. 올해 들어서 그나마 조금씩 터득하고 있는 소중한 가치. 더 게으르게 살고 싶은 욕망. 


6. 박범신

“작가는 빨가벗겨져 시청 앞에 운집한 군중 속으로 내던져지는 존재에요. 그게 두려우면 소설 못 씁니다. 혹시 이게 뭐, 내가 나이든 작가로서 너무 망가지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날 주인공으로 볼까? 이런 거 생각하면서 어떻게 소설을 써요. … 정말로 난 그런 거 상관없어요. 문학이라는 건 허위로 쓰는 거지만, 삶의 본질 속에 내재된 진실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을 수 있지요. 그 소설에서 노인이 보여주는 그 욕망도 대부분 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지요."


박범신은 디테일로 이야기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가 아니다. “형광등의 스타트 전구처럼 … 진저리를 치듯 전신을 부르르’하며 놀라야 진짜 놀라는 거다. 박범신의 소설에는 일관되게 이런 디테일이 있다. 묘사 중심의 문체라는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 박범신은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황혼에 대화한다는 설정으로 교지에 콩트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지도교사가 그를 불러 ‘황혼’이 그냥 ‘황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한다. 이 한마디의 충고로 인해 오늘날까지 디테일한 묘사는 박범신 소설의 특징이 된다. 


+ '황혼'을 '황혼'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 그것이 탁월한 예술가들의 경지. 내가 도달하고픈. 하지만 나에겐 아직 너무 어려운. 그 곳. 필요한 것은 게으름, 자기확신, 그리고 미친 몰입. 이 3가지다. 그냥 이 세가지 단어가 지금 떠오른다. 더 게으르고, 더 확신을 갖고, 더 몰입하자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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