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린 언제 생각을 시작하는가?
정답 : 고통을 겪을 때

내가 믿고 따르는 친구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때 우린 상처를 받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문제를 설정하고,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의 수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직접적으로 느끼는 나의 고통과 함께 (지금 당장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고통!) 진리 찾기는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사유를 산출해야 한다. 오로지 크나큰 고통, 우리를 장작으로 태우는 것 같은 길고도 느린 고통만이, 우리 철학자들을 궁극적인 심연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 니체

‘한번, 책을 읽어볼까?’라는 인위적인 결심 속에서 진짜 진리에 대한 사유는 시작되기 어렵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실제적 문제 속에서 ‘자기 주제’를 갖고 탐구하고 책을 볼 때, 진짜 공부는 시작된다. 

2. 위기의 시대에 생각은 시작되었다. 
인류는 어떻게 지식을 축적시켜 왔을까? 그건 바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절실함 때문에 사유를 진행시켰을까? 당시 유럽사회는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순간, 사유는 시작한다. 

후설도 마찬가지다. 상대주의에 빠진 유럽 학문의 풍토. 이러한 시대에 ‘보편적인 믿음과 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후설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하이데거 또한 ‘허무주의’라는 위기 앞에서 사유했다. 

3. 치료로서 인문학. 
이처럼 인문학의 사유는 애초에 ‘상처’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치료’는 인문학의 인위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문학의 ‘돌아보는 것’은 곧 ‘비판'을 말하고 비판(Critique)의 어원은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의미한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 사태를 직면하고, 치료하는 것. 그것이 비판으로서의 ‘인문학’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이 상처를 만든 잘못된 사태를 고쳐나가려는 실천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치유이자,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만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이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위기의 심연에서 우리는 우리를 치료할 수 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삶의 뼈아픈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고통 속 문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치료의 끝은 무엇일까? 그것은 완쾌가 아니다. 치료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이 이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지, 그 판단 좌표를 제공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힘을 가진다. 그것이 생각의 힘, 인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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