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 범인은 누구인가? 
'서울 성동경찰서는 6일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해)로 최모(35)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4월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언제까지 직업 없이 집에 있을 거냐,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는 어머니 황모(53)씨 말에 격분해 발로 마구 차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최씨는 평소 취업 문제 등으로 어머니와 자주 다퉜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어머니가 쓰러지자 119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으며, 황씨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최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취업과 관련해 스트레스를 주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어머니를 숨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어느 날 보았던 뉴스 기사입니다. 존속살인라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죠. 저 역시 크게 놀랐는데요. 범인은 누가봐도 최모씨입니다. 정황도, 증거도, 범인의 자백까지. 모든 상황이 명백하죠. 하지만 한번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요?"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폭력은 크게 2가지로 표현됩니다.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이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뉩니다.) 무엇보다 폭력이란 말로 인해 우리가 떠올리는 상투적 관념에서 한 걸을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번 천천히 볼까요. 첫 번째, 주관적 폭력입니다.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며, 누구나 손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특히 어릴 적에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한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러한 물리적 폭력이 결코 용인 되어선 안 됩니다만, 그 때문에 사건의 심층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장교는 <게르니카>를 보고, 그림에 드러난 모더니즘적 ‘카오스’에 충격을 받아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요?” 피카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폭력이란 무엇인가, P.37-38)

2. 구조적 폭력이라는 ‘기만' 
두 번째는 객관적 폭력입니다. 특히 이번에 저는 언어 폭력으로 대변되는 상징적 폭력 보다도, 구조적 폭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간략히 상징적 폭력은 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따돌림, 인터넷을 통한 악성 댓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들어가면 개념이 다소 복잡해서 제외합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인데요. 여기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거나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린 쉽게 그것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에 굉장히 비판적이고,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유명한데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라고요.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52) 그는 이처럼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완화책을 마치 해결책처럼 제시하는 것을 ‘기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이를 대의를 위해 내놓은 카네기 같은 사람을 대표적인 ‘기만적 사례'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겐 어떻게 보이나요?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이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구조적 폭력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 기업과 국가들. 겉으론 약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은 행동들 말이죠.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 외에도 지젝은 다양한 ‘폭력’에 대한 사유를 끌어냅니다. 문화적 폭력부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신적 폭력까지. 이 책을 보고 나면 무엇보다, 폭력을 보는 관점이 조금은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IS'의 테러와 폭력이 단순히 광인의 미친 짓, 세계에서 없어져야 할 암적 존재들로 끝났다면.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과 구조는 뭘까?'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용답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에 모든 ‘초점’을 빼앗기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말로 IS가 한창 말썽일 때 그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공부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맥락을 이해합니다. (물론 이해는 하되, 용납을 하진 않습니다.) 그들과 서구 세력간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어서 왜 이렇게 꼬였는지 말이죠. 사실,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군 전쟁, 2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석유임을 간략히 밝힙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나중에 따로 대화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엄마를 살해한 아들. 이 비극적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는 주관적 폭력을 행사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한 그의 어머니도 ‘상징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다들 공감 하시리라 믿지만, 언어를 통한 폭력은 결코 신체를 통한 그것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가해자 이지만, 어쩌면 무언가의 희생자인지도 모릅니다. ‘취업’이라는 구조적 난제, 그리고 사회적 폭력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국가는, 기업은, 그리고 우리들은 이 거대한 책임에서 과연 면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짜 범인은 청년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현대 사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오늘은 10월 29일입니다. "박근혜 하야하라"는 수 많은 시민들에 의해 외쳐졌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 앞에서 우린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소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폭력일까요? 일부 과격해진 시민이 폭력을 저지른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자들이 웃으며 그런 것일까요?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2005년 파리 교외에서 일어났던 약탈과 같은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기만 하면 여전히 급진적 사회 변혁을 믿고 있는 소수의 좌파들에게 묻는다. “이런 짓을 한 건 당신을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게 이거요?” 그러면 우리는 피카소처럼 대답해 줘야 한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이건 당신네들 정치가 가져온 결과잖소!” 

우리나라에선 19세가 넘으면 성인으로 대우 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상,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과 구조적 폭력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젝은 “저항하라!" 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번 사건을 유심히 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웃으며, 손 한번 쓰지 않고 폭력을 저지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는 지는 모른채 말이죠. 그리므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4. 상실의 시대를 견디는 법 
아직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남았습니다. 앞서 ‘저항하라’고 했지만, 지젝은 아이러니 하게도, "행동하라!, 혹은 참여하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이외인데요. 지젝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서둘러 행동하지 말고, 더 공부하고 공부해서 진짜 혁명을 이루라고 말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면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 변화’를 일구어 내라고 촉구합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요. 

이는 저에게 마치 조광조가 아닌 퇴계 이황과 안창호가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 어떠한 변화도 급작스럽게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는 결국 급진적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궁극적 변화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3일 천하'란 말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1979년에, 그리고 1987년에 경험했던 일이죠. 하지만 이황과 안창호는 달랐습니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올곧은 학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서원창설운동’을 벌립니다. 그로 인해 사사한 인재만 300여명에 이릅니다.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도 ‘흥사단’을 조직하며 후임들을 양성해 나갑니다. ‘테러’와 같은 급작스런 방식과 다소 대조적이지만 더 근본적입니다. 

"그대는 바둑 두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판 전체를 망치지 않던가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묘년에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한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대단한 명성을 얻고 나서는 대번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노라고 자부했지요. 임금님도 그가 명성이 높은 것을 좋게 생각하시어, 그를 두텁게 신임하셨고요. 그러니 이것이 바둑으로 치면 수를 잘못 두어 일을 망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황의 '도산에 사는 즐거움’ 중에서) 
 
지젝의 조언은 저에게 ‘균형을 갖추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지나치게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차갑게 외면하지도 않는 것. 그 균형 속에서 ‘대안’을 찾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열심히 공부하던 이는 이제 행동해야 하며, 뜨겁게 행동하던 이는 공부해야 합니다. 뜨거워지고 다시 차가워지면서 우리 모두 단단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회'는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허망하고 비참한 그런 상실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지만,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들풀은, 쓰러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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