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달 리뷰를 남깁니다. 

제가 주기적으로 글을 공유하다보니, 그리고 이런저런 독서모임도 참석하다 보니, 종종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책은 주로 언제 읽나요?”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르나요?” “책은 왜 읽나요?” 등등. 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워낙 좋아하기에 신나게 대답하지만, 지금까지 제 의견을 명확하게 정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책 읽기로 글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독서’를 주제로 선정하자, 제 깊은 곳에 이상한 욕심이 고개를 쳐듭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굳이 ‘잘 써야겠다’는 부담감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는데요. 그래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쓸 수 있었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의 욕심이 저를 자극합니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저를 압박하지 않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한번 써 보겠습니다. 글을 쓰며 독서와 관련한 다양한 책을 인용하게 되었고 딱히 대표할 만한 책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담고 있기에, 기준이 되는 책을 선정했습니다. 바로,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 입니다.

PS : 참고로, 글을 쓰다보니 다소 길어지고 말았네요. 그래서 1부와 2부로 나뉘고자 합니다. 1부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입니다.







1. 당신은 왜 책을 읽나요?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왜 책을 읽나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나요?” 그러면 전 대답합니다. “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읽기 시작했고, 그 계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멋진 순간은 아닙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불안해서 읽었습니다. ‘독서’라는 고상한 말보단 ‘발버둥치기’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렇게 습관이 되었고, 지금은 솔직히 별 이유 없습니다. 그냥 읽습니다. 제가 처음에 책을 읽게 된 계기, 그곳으로 거슬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감 못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남자는 군대에서 살짝 철이 듭니다. 철이 드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지 ‘혼자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동안 뭘 할까요? 처음에는 잡 생각이나 잡담을 합니다. 이런 저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거없는 자신감까지. 그러다 더 시간이 지나면 적막함이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소란스런 생각들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대학생’ ‘아들’ ‘친구'이란 껍질을 벗어버린 저를 말이죠. 그게 2003년이었습니다.

변화는 ‘객관적 자기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고자 아둥바둥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저를 봤습니다. 덜컥 걱정이 들더군요. “전공 공부는 정말 싫은데” “졸업하고 달리 할 것도 없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전 뭐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발버둥’이란 말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네요. 고상한 이유 따윈 없었습니다. 뭐라고 하고자 그렇게 저는 제 주위에 놓인 책들을 주워들었습니다. 월간지 '좋은 생각'부터 자기계발서, 판타지 소설, 종교 서적, 등등. 맥락도 흐름도 없는 파편적인 독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 간 300여권을 읽었습니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물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인간성을 갈고 닦을 수 있겠지만 혼자 조용히 자신과 마주 서는 시간이 자아 형성에는 필요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멍하니 있는 시간도 즐거운 법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긴장을 필요로 한다. 이 적절한 긴장이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독서는 혼자 하는 듯싶지만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쓴 사람과 함께하는 둘만의 시간이다. ... 뛰어난 인물이 공들여 조탁한 문장을 혼자 음미하는 시간. 이런 시간에 얻게 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p.75

그 결과, 제가 얻은 결과물은 초라합니다. 겨우 ‘읽기’에 대한 부담감을 털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순간이 자발적 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적고, 휴가 나와서 볼 때의 기쁨. 그렇게 ‘책에 목 말라 본 느낌’은 아직도 생생 합니다. 책 읽기, 구절 옮겨적기, 생각 끄적거리기. 그렇게 보냈던 2년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소박하면서,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그렇게 '책'에 흠뻑 빠져 본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비교적 늦게 알았지만, 더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은 더더욱 행운이겠죠. 그것은 값진 경험입니다. 그 순간 만큼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것이 자발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첫 번째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는 장거리 달리기'라고 말합니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한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독서는 정직합니다. 그저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장거리 여정에서 '즐거움'은 독서가의 가장 큰 우군입니다.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책을 읽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어떤 어떤 실험에서 아이큐는 높지만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혔더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때 그 사람은 “난 아이큐가 꽤 높은 편인데 이해할 수 없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은 독서를 잘 모르기에 나온 발언이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장거리달리기나 행군과 비슷하다. 특별히 발이 빠를 필요가 없다. 날마다 달리고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가면 대부분 장거리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된다. ... 독서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꾸준히 하는 것’이 힘이 된다.” P.45


2. 경험하면 되지, 굳이 책을 읽어야 하나요?

여기까지 쓰자, 예상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래 좋겠다. 당신이 그럴 수 있었던 건 군대이니 가능한 일이지, 요즘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게 가능 하겠어?" '즐거움'이란 달달한 용어 정도론 설득이 안 된다는 것,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묻습니다. “살아가기도 바쁜 일상에, 굳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요?” 그럼에도 저는 “네”라고 대답합니다. 적어도 독서는 많은 이에게 ‘자아 발견의 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책을 읽던 당시에 저는 우연히 심리와 종교, 인문학과 교육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끌리는 저를 볼 수 있었고, 이후로 몇 년간 제 전공인 ‘공학’을 뒤로 하고 관련 책을 읽는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넓혀 갔던 것이죠. 다방면의 독서가 주는 유익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디에 끌리는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지도 분명해 집니다. 그렇게 나의 강점과 약점, 흥미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굳건히 하지 않으면 쉬이 휩쓸려 버리고 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나를 알아가는 방법으로, 독서를 신뢰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책을 가지고 어떻게 나를 발견한다는 말이야? 니가 ‘경험’을 안 해봐서 그렇지,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최고야.” "... ..." 잠시 말문이 막히지만, 다시 반론해 보겠습니다. '경험과 이론' 이는 지난 번에 언급한 ‘본성과 양육’처럼 아주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서양 철학사를 돌아봐도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로 기나긴 평행선을 달리죠. 경험주의자는 이론가들을 ‘해본 것이 없다고’ 쉽게 얕잡아 봅니다. 그리고 이론가는 경험주의자를 ‘그게 다인줄 안다’며 무식 하다고 비하하죠. 저는 이 논쟁을 아래 책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에 나오는 글입니다.




"몸은 인간에게 가까운 것이어서 겪어서 알게 된 것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중의 하나는 바로 ‘겪어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주제에 관한 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즉 “낙동강 전선에서 압록강 전선까지 모든 전쟁을 겪었느냐’는 반론 말이다. 오히려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고 전체를 이론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태의 실상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몸으로 겪어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 이론 둘 다가 겸비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지식이라 하기 어렵다. ...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 라고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실망 하시겠지만 결국, 답은 ‘둘 다’입니다. 겪어서 아는 것과, 책을 읽어 아는 것. 모두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되려 경험주의자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책을 읽는 이들은 총을 매고 전쟁터로 나아가야 하겠죠. 제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책을 읽을 수록 '호기심'이 많아지고, '경험'에 목 마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삶에 뛰어드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책을 통해 관심사를 넓히고, 행동으로 검증하고, 다시 책을 통해 성찰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선 순환. 그 반복을 통해 ‘나'를 더 알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책을 읽는 두 번째 이유, 바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책은 그런 존재입니다.

"‘독서는 할 필요가 없다.’는 근거로서 책을 읽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이 있으면 체험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체험을 하는 일과 책을 읽는 일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불타오릴 수 있다. 예를 들면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을 읽고 아시아 여행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 책에 이끌려 여행에 나서는 경우는 흔하다. ... 독서가 계기가 되어 체험하는 세계가 확대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체험한 일의 의미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는 공감대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p.97


3. 만약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렇게까지 설명 했음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 읽는 것은 좋아. 인정해. 하지만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별다른 일이 생기는건 아니잖아?" 예전에 저는 이 답을 어렵게 답했지만, 이젠 비교적 쉽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운이 좋게 대통령이 되어도 '탄핵'이란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곧 ‘사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실질적 문맹률(문해력으로 보면 75%에 달합니다. OECD 중 최하위입니다.)은 엄청나게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알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드라마나 예능은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손 안의 스마트 폰은 우리가 전지전능해 졌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든 '검색'하면 다 알 수 있지만, 깊은 '사색'은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를 그나마 볼 수 있었으나, 이젠 거의 드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전 그것이 솔직히 두렵습니다. 홍세화 작가의 책 <생각의 좌표>에 나오는 글을 옮겨 적습니다. 




"네 경로(독서, 토론, 직접견문, 성찰)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작가가 말했듯, 책을 읽지 않아도 현대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듣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책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말은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나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하지만 읽고 글쓰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추상’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머, 톱, 손도끼 등을 보여주며 공통점을 말하라고 하니, 그들은 ‘연장’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대신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톱은 나무를 썰고, 손도끼는 통나무를 가르죠.”

구술문화권 사람들은 자신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도 곤란을 느낍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인격을 기술하는 대신 신상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우츠구르간 출신이죠. 무척 가난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자식도 있어요.” 이러한 ‘인식 능력’의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유’는 문자 문화의 영역이며, 훈련에 의해 단련됩니다. 저는 이 차이가 지금의 우리나라, 그리고 광화문에서 볼 수 있는 세대간 갈등을 설명하는 하나의 근거라고 봅니다. 절대적인 가치 하나만을 쫓은 사고 방식, 그 맹목성을 닮아가지 않으려면 스스로 ‘언어의 한계’를 넓히고 '사고의 주체성'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어야, 결국 ‘주체적인 자아’를 기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세 번째 이유, 단순합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함입니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한 가지 사실을 절대시하게 된다. ... 눈앞의 한 가지 신비에 마음이 빼앗겨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지성이나 교양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대학 시절에 신비주의 단체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그런 단체의 교리를 철저히 믿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절대적인 가치관을 하나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것은 부정하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다. ... 어떤 철학적인 문제에는 강한 면을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음미하는 관용적인 태도를 볼 수 없었고 한 가지 삶의 방식만을 모범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모순되고 복잡한 사실들을 마음속에 공존시키는 것. 독서로 기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의 공존이다. 자아가 한 덩이의 단단한 바위라면 부서지기 쉽다. 복잡성을 공존시키면서 서서히 나선 모양으로 상승해가야 한다. 그래야 강인한 자아를 기를 수 있다.” p.69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책을 왜 읽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에 자문하면서 답해 보았습니다. 설득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저 제 생각을 좀 더 다듬어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지?” 책 읽는 방법으로 다시 써 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분들을 위한 3줄 정리

1.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단, 자발적으로 읽는 경우에.
2. 책을 통한 지식과 경험을 통한 앎은 모두 중요하며, 책은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3.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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