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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노트/와우 스토리 연구소

[독서축제] 3월_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_파커J 파머




핵심 한 줄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작가 소개_파커. J. 파머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교육공동체리더십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강의수련 활동을 벌여온 그를 사람들은 교사의 교사’ 또는 위대한 스승이라 부른다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명으로 선정되었으며지성,감성,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많은 이들을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승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책에서 파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고백과 통찰력으로 인생의 좌절과 성공나약함과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페이지마다 넘치는 특유의 부드러운 유머와 따뜻함으로 진정한 자기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그 길을 안내한다저서로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낯선 사람과 함께하기>,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등이 있으며잡지 <커몬빌> <크리스천 센추리>작가상을 수상했다고등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교육출판연합과 사립학교협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옮겨적기 + 리뷰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Listening to Life
- 소명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P.19
-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21
- 영혼은 고요하게 그들 받아들이며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P.22

+ 이 책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과 잦은 침묵이 찾아왔다. 워낙 관심있는 분야이고, 좋아하는 작가라 그런지 읽는 내내 참 행복했다. 소명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소명이란 외부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며 언어라기 보단 비언어에 가깝다. 소명은 재촉해선 알 수 없다. 고요히, 영혼을 신뢰하는 상황 속에서만 말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미세한 신호를 캐치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고속도로처럼 내 머릿 속에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그 신호를 민감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고요함 그리고 깨어있음’이다. 생각은 고요하게, 그러면서도 정신은 깨어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소명은 말한다. 

-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온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P.18

+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참 어렵다. 특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나라에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부모의 욕심’ 혹은 ‘사회의 강요’로 인해 엉뚱한 꿈을 따르기 쉽다. 나 역시 전파통신 전공 졸업 후, 그 길로 나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당연한 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 길이 나에겐 의미가 없었고, 나는 마음의 신호를 들으려고 애썼다. 그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아주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나의 손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존재로 이 땅에 온 것이다. P.30

+ 이미 갖추어져 있음. 이 명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선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아들 재원이를 키우면서 파커 파머 손녀 이야기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재원이를 보면서 느끼는 것도, 그는 자기만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놀 수 있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왔다는 느낌이 든다. ‘난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아빠로서 우리 아이가 무슨 놀이를 하러 왔는지 함께 찾고 싶다. 그리고 이미 가진 본연의 모습으로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격려하고 싶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여정도 지지받고 격려 받으리라. 

- 진정한 소명은 자아와 봉사(섬김)을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대 인류의 의문은 불가피하게도 역시 중요한 문제인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귀결된다. (…) 왜냐하면 관계의 바깥에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자아란 없기 때문이다. P.39

+ 존재론과 관계론이 여기서 나온다. 관계론이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누구와 연결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주를 이룬다. 서양에 비해 동양이 관계론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동양 문명은 애초에 ‘분리된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동양 사상은 어떤 현상 이면에는 언제나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 엉뚱한 곳을 헤매는 여행을 하고 나서야 자아와 소명의 개념에 눈을 뜬다. 하지만 이 여행은 아무 걱정 없는 ‘패키지 여행상품’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그 옛날의 고난과 어둠, 위험이 가득한 성지 여행이나 순례 여행과 흡사하다.  P.41

+ 마치, 패키지 여행을 갔을 때보다 자유여행을 했을 때 고생도 많지만 기쁨도 큰 것처럼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헤매고 고생하더라도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사는 삶. 

- 나는 워싱턴 시대로 이주해서 교수가 아닌 커뮤니티 조직자가 되었다. (…) 나는 훌륭한 커뮤니티 조직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민감했다. 소명으로의 발돋움은 내게 너무도 힘에 부쳤다. / 내가 도망친 진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학자로 성공하지 못할까봐 두려웠고 대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연구와 저술활동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 나는 언제든 어떤 주제든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 영향받지 않고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 약간의 게으름과 성급함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해 온 다른 사람들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 /나는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발전시키는 재능을 부족하지만 나만의 어떤 것을 조물락거려 만드는 일은 잘 한다. 

+ 내가 위의 글들을 모든 이유는 단순하다. 파커 파머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이 글들이 나에게 너무나 와닿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도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 책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이번 단락에서는 유난히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아니, 지금 파커 파머가 설명하는 게 바로 나잖아! 라는 느낌마저 받았다. 특히 제도권 생활을 벗어나 변두리를 향해 나아가는 점을 비롯해서. 그리고 내가 꿈꾸고 바라는 삶이 파커 파머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란 생각도 많이 했다.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는 삶. 어떤 삶이 나에게 주어질 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런 삶을 닮고 싶다. 

- 인류와 인간 상호관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은 바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보살피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나온다. 사회제도는 종종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려 든다. (…)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회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더 이상 내면에 깊이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방식을 가장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며 그것을 표출하며 살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을 사회 변혁의 파문을 일으킨다. 수백만 명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P.61

+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회변혁가’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과거 ‘내면에만’ 빠져있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본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자신’으로 살려는,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사회적으론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노력도 없었고, 게다가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의 사건에는 눈을 감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나이가 들어선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자주 봤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생긴 의구심은 바로 ‘진정성’이었다. 아무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대단한 일을 사람이긴 하나 행복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인간상에서도 멀어지는 것이고. 파커 파머의 이 글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고. 

3. 길이 닫힐 때 
- 루스의 대답은 솔직했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라네. 그리고 60년이 넘게 살아왔지. 그러나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반면에 내 뒤에서는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다네. 이 역시 삶이 나를 준비된 길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  P.74

+ 삶이 나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이 아닐까? 경험상, 내 뒤에서 길이 닫힌 경험은 무엇이 있을까? 3가지만 떠올려 보자. 첫 번째로 나는 젊은 시절, 출판기획자가 되고자 출판 전문 학교에 입사하려 애썼던 적이 있다.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 길로 나는 출판사와는 멀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에게 맞는 길이었다. 그땐 속상해서 눈물도 났지만. 두 번째로 나에게도 취업을 하러 돌아다니던 시절이 짧게나마 있었다. 그 당시 몇몇 대기업에 면접까지 봤지만,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의 내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다행이다. 나는 다행히 몇 번 떨어지고 나선, 그래 이 길이 아니다며 바로 취업을 포기했는데, 그 선택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직전 회사에서 나올 때가 아닐까. 그곳에서 (갑작스러웠지만)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심마니스쿨이 있고, 내가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모든 이유는 적절할 때에 적절한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신뢰가 나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건 아닐까. 앞으로 어디로 날 데리고 갈 지 궁금하기도 하고. 

- 세상에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의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인 경우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본연의 나와 상관없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한동안은 남에게나 나에게 근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한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결국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맞는다. 나 자신과, 남을,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좋은’ 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끼치고 말 것이다. 내가 나의 본성, 관계의 본성이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덤빈다면, 그 순간 나의 등 뒤에서 길이 닫힐 것이다.  P.86

+ 지난 2013년에 처음 심마니스쿨을 만들었을 때, 나는 2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 지 몰랐다. 원래 그렇게 계획적이고 치밀한 편이 아니라, 일단 만들고 나면 ‘심마니스쿨’이라고 하는 것이 알아서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참 무계획적인 계획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교육철학이었다. 아이들의 온전함을 믿고, 그들을 그 자신으로 자랄 수 있게 돕는 ‘내용’과 ‘방법론’을 개발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뜻에 관심있는 어른들과 연대하겠다는 것. 그렇게 심마니스쿨을 만들고, 다른 두 선생님들과 정기적으로 모여서 재미있는 프로젝트에 참여도 하고 개최도 하고 그랬다. 2014년에 했던 가장 큰 실험은 매월 1번 열었던 심톡이었고. 나는 학기 중으로 계속 교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다양한 사업 기회를 따내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얻어 낸 기회가 ‘사회적 기업가 육성 과정’이다. 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창업지원 사업인데, 꽤 큰 금액의 예산을 지원해준다. 다만 몇 가지 자연스러운 제약도 있었다. 이 사업을 신청하게 되면 1년 뒤에는 반드시 법인화를 거쳐야 한다든지 하는. 누군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고민했다. ‘내가 정말 하려고 하는 것이 교육 회사를 만드는 것일까?’라는 고민에서 자유로워 지지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러한 교육 회사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이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고해졌고. 나는 아직은 그저 '느슨한 네트워크’로 나아가고자 한다. 좀 더 강력한 1인 기업가가 되고, 더 밀접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그리고 힘이 더 모이고, 나 역시 WHY가 분명해졌을 때 필요하다면 기업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성찰이고, 실천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경험과 관계. (돈이라고 씌여진) 하나의 문은 닫혔다. 하지만 나머지 세상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걸어 나가보자. 가볍게 말이다. 

- 영적 여행의 길에서 자주 일어나듯이 우리는 역설의 심장부에 도달한다.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 문이 닫히면 방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것은 곧 그 공간을 제외한 다른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P.98
-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P.99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생에서 막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은 논리가 아니다 그저 믿음일 뿐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믿음이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부딪쳤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너진다. 되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인생에서 2번 정도의 경험이 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은 왜 이딴 식일까. 그 순간 만큼은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왜 이런 식이냐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를 가지고 그러냐고. 이정도면 양심껏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거냐고. 되지도 않는 불평과 화를 쏟아낸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그럼에도 내가 그나마(?)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이러한 사건에도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거란 믿음. 그래도 죽진 않았으니 뭐가 되도 될 것이란 믿음. 말도 안 되지만 그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 말이다. 그렇게 작은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고 숨만 붙어있으면 되더라. 시간은 지나가고, 나는 결국 살아있더라.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성숙해졌다고 말하더라. 인간은 합리화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뭐, 일정 사실이기도 하고. 그 경험이 없었담 그 경험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경험의 폭 만큼 이해의 폭도 넓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상태이다. 우울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 버린다. (..) 사람과 사람 사이를, 머리와 감정 사이를, 또 자기가 보는 자기 이미지와 남들이 보는 자기 모습 사이이의 관계를 끊어 놓는다. P.114

+ 나는 우울증을 겪어 본 적은 없다. 다만 곁에서 본 적은 있다. 3년 전쯤, 우리 할머니가 노인 우울증에 걸리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사실 때는 몸은 안 좋으셨지만 우울증은 없으셨다. 참고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평생 앙숙같은 관계셔서, 나는 두 분이서 기분 좋아하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워낙 오래 전에 결혼해서 사시느라 이혼을 안 한 것이지, 요즘 같았음 바로 이혼했을 성격 차이셨다. 그래서 두 분은 틈만 나면 싸우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싸움’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나자, 할머니는 ‘싸움 할 대상’이 사라져 버려서인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마셨다. 처음에는 오히려 속 편하다는 식으로 말씀 하셨는대도 말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를 확인한다. 그래서 ‘사람 인’과 ‘사이 간’은 ‘인간’이라는 말로 묶인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할머니는 되려 할아버지와 다투실 때 자신을 확인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고립됨과 단절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더 많이, 더 깊이 주위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인식해주자. 연결되었음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삶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위안자들처럼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저 불쌍한 사람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재차 확인하려고 든다. P.115

+ 이 인간의 뿌리깊은 ‘구별짓기’! 그저 함께 공감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느 새 우리의 에고는 고개를 쳐들고, ‘나 여기있소!’라고 외친다. 특히 남자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언을 하려고 하는데, 진짜 그러지 말지어다. 그저 충분히 들어줄 지어다. 함께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함께 올라올 수 있다. 함께 내려가지 못하면 둘은 떨어지고, 그럼 여지없이 싸움이 나더라. 왜냐, 같은 공간에 없으니 ‘분리’ 되었다고 느끼거든. 잊지말자. 

- 당신은 우울증을 당신을 망가뜨리려는 적의 손아쉬로 보는 것 같군요. 그러지 말고 당신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친구의 손길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 P.120

+역경은 우리의 친구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니까. 

-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게 된 데는 최소한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지성인으로 생각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머리속에서 살도록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신을 체험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 더 열중했다. 셋째는 높아진 나의 에고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왜곡된 도덕률 떄문이다. P.121

+ 나는 위의 문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분리의 이유 4가지와 그 해결책. 
1) 가슴과 머리의 분리 : 생각하기 보단 느껴라. 순간을 살아라. 
2) 경험과 개념의 분리 : 신은 언어 밖의 존재다. 침묵하고, 받아들여라. 
3) 진아와 에고의 분리 : 내가 꾸미고 있는 것을 말하라. 거짓을 고백하라.
4) self1와 self2의 분리 : ‘해야 한다’에서 ‘하고 싶다’로. 내면의 욕구를 들어라. 

- 이제 나는 나 자신이 약함과 강함, 약점과 재능,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이제 나는 온전해진다는 것이 그 중 어느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임을 안다. (..) 전체를 받아들이는 인생은 살아가기에 더 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생 전체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P.129

+ 온전함으로 가는 길은 선택이다.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반쪽 인생을 살게 된다. 가게 된다면, 분명 역경을 겪는다. 하지만 더 큰 평화가 찾아온다. 충분한 흔들림을 통해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선한 길보다 온전한 길은 훨씬 더 어렵다. 온전한 길에선 내 안의 선한과 악함을 동시에 봐야 하기 때문이다.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개념에 종종 거부감을 나타낸다. 자신을 리더로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지나친 자기 확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피일 수도 있다. (…) 단지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역시 이 땅에 살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P.135
-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떄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 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리더로 만드는 진실이다.  P.140

+ 리더십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내 공감한 내용이다. 나 역시 리더십에 대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았을 때 거부감 혹은 부담감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 안에 태어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인정한다면, 리더십 또한 모두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마다 영향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영향력 그 자체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기에. 

- 왜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걸까? 왜냐하면 그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드리우는 그늘의 궁극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억압하는 리더가 되고 만다. 하지만 애니 딜라드의 말대로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의 괴물들을 타고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중요한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지점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장이며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또한 조각난 인간 삶의 표면 아래 공유되는 의식의 공동체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온전함’으로 이끌 수 있다.  P.144

+ 이 부분에서 내가 좋아하는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 비유가 나온다. 여기서의 영웅이란, 뭔가 외부로 대단한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기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란 적을 자신에게서 발견한 사람이 더 가깝다. 그 괴물을 물리치고, 더 밑으로 내려가 근원적인 사랑과 연결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을 ‘각자의 여정’으로 이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영웅이며, 내가 지향하는 인간상이자, 내가 밟아가고 싶은 여정이다. 

- 우리가 리더로서 내적 생활을 다루는 데 자주 실패하면 너무 많은 개인과 단체를 어둠 속에 방치하게 된다. (…) 서로 도와서 우리 내면의 삶을 탐험해야 한다. 그런 도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내면 활동’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 그러한 활동에는 일기 쓰기, 책읽기, 명상과 기도처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두번쨰로 내면 활동은 공동체를 통해서 도움 받을 수 있다. (…)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비결은, 관계를 맺되 그 안에서 서로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는 역설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되, 그 방식은 영혼의 고독을 존중해야 한다. (…) 세 번째로, 우리는 서로에게 두려움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P.164

+ 내적 생활을 다루는 법으로 혼자, 함께 하는 방법이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두려움은 홀로 있을 때 극대화 되지만, 함께 할 때 넘어설 수 있다. 마치 아이가 엄마가 함께 있는 공간에선 세상에 대한 탐험을 지속하지만, 엄마가 없어진 상황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삶을 탐험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부모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재원이를 키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들이려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애착 형성이 잘 되어야 ‘세상에의 탐험’이 가능하고, 사회성이 계발된다고 한다. 꼭 그런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시절은 한번 밖에 없기에, 그리고 나중에 ‘내가 왜 일하느라 아이 한번 더 안아주지 못했을까’ 후회하기 싫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0

6.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계절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의 법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 알의 씨앗은 끊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삶의 단계를 진행시킨다. 계절의 순환은 우리에게 그 여행에 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와 같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주위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시인 릴케는 우리 삶 전체가 ‘질문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P.170

+ 본질적인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질문을 사는 것. 꼭 질문을 풀어내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다.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답없는 질문일 지라도. 

- 계절은 인생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현명한 비유이다. (…) 우리의 인생이 끝없는 계절의 순환과 같다는 개념은 투쟁과 기쁨, 손실과 이득, 어둠과 빛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다. (…)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생이 순환이라는 비유에는 어려움과 함께 안락함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는 게 좋다. 그 이미지에 비추어, 세상에는 우리만 홀로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광대한 존재의 공동체에 참가하는 일원으로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인도에 따르면 이 위대하고 은혜로운 진리의 공동체에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울 수 있다.  P.175

- 가을. 자연은 가을에 어떤 일을 하는가? 자연은 새봄에 다시 자라날 씨앗을 뿌린다. 그것도 놀랄 만큼 풍부하게 뿌려댄다. (..) 죽음과 씨 뿌리기라는 가을의 역설을 탐험하면서, 나는 비유의 위력을 느낀다. (…)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역설 속에서 상반되는 둘은 각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 우리는 어둠 없는 빛을 원하며 가을과 겨울의 고난 없이 봄, 여름의 영광을 원한다. 그런 파우스트적인 거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 (…) 가을은 새 생명의 전조로서 매일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P.178

- 겨울. 겨울은 아주 힘겨운 계절이다. (…) 하지만 겨울의 광포함에도 가을의 쇠락이 그랬던 것처럼 놀라운 선물이 따라온다. 하나의 선물은 아름다움이다. (…) 또 하나의 선물은 모든 살이 있는 것에는 겨울잠과 깊은 휴식이 꼭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 겨울은 눈앞의 풍경을 깨끗히 치워 준다. 혹독하긴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서로를 더 분명히 볼 수 있는 기회, 우리 존재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P.182

- 봄. 봄이 도면 그 계절적 화려함에 나는 낭만적 감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아픈 진실 하나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봄은 그 아름다움을 갖추기 전에 진흙과 오물에 지나지 않는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내 인생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나는 진흙탕을 지나는 것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더 큰 생명이 다가올 거라는 작은 조짐도 믿기 힘들었으며 그 결과가 확실할 때 까지는 희망을 품기도 힘들었다. 봄은 내게 가능성을 지닌 초록 줄기를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가르친다. p.185

- 가을의 풍족한 씨 뿌리기에서부터 엄청난 봄의 선물공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한결같은 교훈을 일러 준다. 즉, 우리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그것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아낌없이 써 버리라는 것이다. (…) ‘최단코스’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결실을 맺기도 힘들고, 우리 인생에서 봄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힘들 것이다. 언제부터 ‘꿀벌이 다니는 길’을 최단코스라는 잘못된 뜻으로 쓰기 시작했을까? 봄에 꿀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잘 보라. 벌들은 꽃과 자신의 운명을 희롱하며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분명 벌들은 실리적이며 생산적이다. 하지만 그 일을 동시에 스스로 즐기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p.189

- 여름. 여름은 한마디로 풍요 그 자체다. (…) 인간 세상에서 풍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요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식을 가지고, 공동으로 저장한 것들을 자축하고 함께 나눌 때 찾아온다. (…) 진정한 풍요는 든든하게 쌓아놓고 음식이나, 형금, 권력, 애정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 찾아 온다. (…) "물론 우리는 커뮤니티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그게 단 하나의 훌륭한 생물학이죠.” (…) 여기 여름철의 진리가 있다.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창조이다. 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p.193 

+ 이 전체적인 계절에 대한 비유는 정말 멋졌다. 파커 파머가 보는 관점에서 삶은 역설이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라 생각되는 겨울은 오히려 자신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쇠락하는 순간이라 생각하는 가을은 오히려 가장 많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 화려한 봄은 그 아름다운 이면의 추함. 풍요로운 여름은 그 속에서 ‘공동체’에의 성찰을 잊지 말자는 것까지. 정말 완벽했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단편적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일회일비 하지 말고, 그저 묵묵하게 가을에는 씨를 뿌리고, 겨울에는 견뎌내고 자신을 직면하고, 봄에는 들뜨지 않되 희망의 신호를 잡아내고, 여름에는 풍요로움에 취하지 않되 공동체에 다시 나누어주는 삶. 파커 파머는 그런 삶을 말하고자 하고 있고, 내가 가장 공명하는 형태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좌절이다. 너무나 닮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록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같이 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