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의 일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나왔을 때다. 영화에선 최민식이 잔혹한 사이코패스로 나온다. 

일반인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명의 소설에선 그의 성장 배경이 등장한다. 

학대받고 자랐던 어린 시절, 그와 비슷한 부모 밑에서 길러졌던 것이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사이코패스가 어디 있겠는가, 

그 또한 피해자인건 사실이다.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그 역시 사랑받지 못한 한 인간일 뿐이다.




나는 그런 배경에 더 관심이 많았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못할 캐릭터에 대해서도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추석이었나, 무궁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는 길이었다. 옆 자리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상담 관련 책을 보고 계셨다. 

당시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차라 용기내어 말을 건냈다. 어떻게 하면 상담을 할 수 있냐고. 다행히 친절히 대답해 주셨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앞서 말한 '금자씨'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그 앞선 배경을 말하며,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다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되려 그를 이해해줘야 하는게 아니냐고 생각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때 그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돌아보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분별을 가져다준 말이었다. 짧지만 강력했다.


"이해는 가지만 용납은 안 되요."


그리곤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배경도 이해하고, 존재론적으로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용납은 다른 이야기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겐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며, 그 행동은 사회적으로 결코 용인되어선 안 된다고 하셨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강간이나 폭력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려주시며) 그리고 그 말은 애매한 기준을 가진 내가 '번쩍' 정신을 차리게 도왔다.


박근혜를 보면서 많은 어른들이 이렇게 말한다. 

'불쌍해서 어떻하누'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누'

 '부모 둘 여의고 저렇게 살아가는데 우리가 이해해줘야지' '여자로서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내 머릿 속을 스치는 말도 이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용납은 안 되요."


이해는 간다. 내가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상황에 몰렸다면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 

한 존재로써, 충분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용납되어선 안 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선 안 된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을 맺고 있고, 남을 해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시민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책임을 저야 한다. 그게 시민의 책임이자, 의무다.


이후 삶을 살아가면서 '이해는 가지만 용납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굳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더라도,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을 본다. 

권력을 가질 수록 그렇게 변해가는 이들도 많이 봤다. 리더들, 사업가들. 유명 강사들, 성직자들.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래서 '분별'은 중요하다. 제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 둘 다가 아닐까.


"인간으로써 그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그들을 용납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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