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의 대화 _요한 페터 에커만



#대작을 쓰지 말라 

그는 내가 이번 여름에 시를 쓰지 않았는지 물으면서 말을 꺼냈다. 나는 시를 몇 편 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도록 하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재능과 탁월한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작 앞에서는 고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네. …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현재는 언제나 현재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네. 시인의 마음속에 날마다 솟아오르는 사상이나 느낌은 그 모두가 표현되기를 원하고 또 표현되어야 하네. 그러나 보다 큰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모든 사상을 등지고 생활 자체의 안락함까지 잃어 버리는 걸세. … 시인이 날마다 현재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신선한 기분으로 다룬다면 무언가 좋은 걸 만들 수 있고, 때로는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모든 걸 잃지는 않는다네. ...

언젠가 목표로 데려갈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하는 걸세. … 당분간은 작은 작품들만 만들어야 하네. 그리고 자네에게 날마다 주어지는 것을 모두 곧바로 받아들이도록 하게. …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 (이하 중략)"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 그의 말의 진실성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이제 괴테의 말을 통해서 몇 년이나 더 현명해지고 진보한 듯한 느낌이며, 진정한 대가를 만날 때의 행복을 마음속 깊이 깨닫는다. 그 이로움은 산술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p.56-62

#나의생각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라." 괴테의 그 말은 젊은 에커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젊을 때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일면적인데, 대작은 다면성을 요구하고 있지. 그러니 실패할 수 밖에.” 대작을 쓰지 말하야 하는 것에 대한 이렇게 완벽한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왜 글을 쓸 때 주저하는지, 그 이유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면적으로 쓰고 싶은 게다.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어느 정도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게다. 나에겐 빌어먹을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조금 있다. 하지만 인정하진 못했다. 지금의 일천한 실력으론 아직까진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이제 인정한다.   

나는 괴테를 잘 모른다. 고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를 쓴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그 책이 괴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에티카는 괴테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파우스트는 범신론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는 스피노자를 이렇게 칭했다.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본격적으론 이번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잠깐 조사를 해 보았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왜 늙은 괴테가 젊은 에커만에게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라고 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괴테 역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좌우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작은 공국 바이마르의 국정을 10년 동안 (원치 않게) 맡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써먹을 수는 없다.” 

그 이후 괴테는 도망치듯 떠나고, 오랜 친구들과도 멀어진다. 이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전환점을 만들고, 실러를 비롯한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얻는다. 괴테의 진짜 삶은 환갑부터 시작된다. 환갑을 맞이한 1809년부터 사망 때 까지 20년간 그의 창작력을 절정에 달한다. 소설 <파우스트>를 비롯한 기행문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시집 <서동시집>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또 이해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괴테의 말은 분명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자, 그렇다면 에커만과 괴테는 뒤로 하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에게 내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긴 글을 쓰지 말자. 짧게, 일상을 기록하자. 그저 내 생각을 담은 글 하나만이라도 꾸준히 쓰자. 한 가지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쓰도록 노력하자. 다면적 관점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자. 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어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지는 말자. 그저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하자. 그 의지를 표현하자. 삶과 말 그리고 글이 일치되도록 하자.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 말한다. 오늘 현재를 표현하자.  


  1. 창실 2015.07.28 00:15 신고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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