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최근, 제 근황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겐 이미 알렸던 소식이지만, 블로그에 방문해 주시는 분들에겐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네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3월 7일을 기준으로 전 다시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2013년 2월 15일에 예전 회사를 나왔으니, 벌써 3년이 넘는 기간을 심마니스쿨이란 이름으로, 프리랜서로, 거의 혼자 활동했던 것 같네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했지만,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참 고맙고 또 감사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 저도 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옥을 피해서 전쟁터로 도망쳐 온 것인가?" 제가 회사를 간다고 했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랜서로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결국 견디지 못하고 3년만에 직장 생활로 돌아왔을까.’ 라는 시선은 아주 보편적이고, 실제로 그런 사례도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음. 아니구나. 일부는 진실이 맞습니다. 경제적 안정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지난 3년 간의 생활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전 그 소중한 기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났거나, 뭐 능력이 뛰어나서?" 전혀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 시간은 천국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기적처럼 수 많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3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지만, 저를 도와준 수 많은 인연들이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인연과 인연의 꼬리가 이어지고, 만남과 배움이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회도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저는 평생 쓸 운을 지난 3년 동안 다 써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경제적 보람도 있었습니다. 조직에, 회사에,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혼자 그리고 아내와 아기까지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이룬 것이 없던 저에게 작은 성취였습니다. 대단한 목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3년간 꾸준히 수입이 증가해서, 가장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프리랜서 3년 차가 되었고, 작년 말과 올해 초를 건너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내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답은 바로 ‘안정된 삶’이었습니다. 물론 프리랜서가 안정될리는 만무하죠. 실제로 매달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끊이지 않던 3년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패턴’이 보이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작년에 했던 것처럼 올해도 살아가게 되겠구나. 그러한 예측은 쉽게 할 수 있었고, 제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 '예측 가능함'입니다.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철이 없어서 그런지 좀 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숨겨진 욕망입니다. 저는 안정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했던 "질서는 무질서에서 나온다."는 말도 그래서 좋아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저의 성향이 '역설적으로' 회사 생활을 선택하게 한 주요 변수가 되었습니다. 성장에의 욕구. 그리고 나의 욕망에만 충실하지 말고, 사회에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더 들어보고자 하는 욕구. 그 두 가지 바램이 섞여서 이렇게 놓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른 아침 규칙적으로 울리는 알림도 낯설고, 지옥철이라 불리는 녹색 2호선 라인도 두렵습니다. 모두 고개를 숙인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도 아직은 생경하네요. 삼성역 계단으로 보이는 수 많은 직장인들의 발걸음들, 그 무거운 발걸음들이 이젠 내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 놓여진 것입니다. 앞으로 이 블로그는 내가 얼마나 ‘잘'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기 검열을 하는 과정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남들처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라고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잠시 내려놓고 함께 하는 활동이기에, 그 만큼의 중요성과 가치를 담아서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업무를 시작할 시간이네요. 이 글을 읽는 모두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수업후기 #자소서 캠프 #행동과 성찰 


오늘 용마중학교 자기소개서 캠프가 있었다. 자소서 완성을 위해 '스스로 자원한' 학생들 23명이 모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매번 느끼지만, '원해서 모인' 아이들과 하면 분위기는 좋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최지은 코치님과 함께 진행한 수업이었는데 코치님이 주로 글의 표현을, 나는 아이들의 글감을 위주로 코칭했다.


앞부분, 간단한 강의와 문답을 마치고 1:1 코칭이 이어졌다. 한명 한명 아이들이 나에게 와서 묻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 그런 하소연을 듣다보니 나의 대학교 4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평생을 글과 상관없이, 게다가 특별한 경험도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내가, 어찌 자소서를 쓸 수 있었을까. 빈 종이를 보며 좌절하던 내가 떠올랐다. 영혼없이 쓰는 자소서가 왜 그리도 원망스러운지. 그리고 자책도 많이 했다.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기에 자소서에 쓸 말이 이리도 없냐고 말이다. 이미 엎퍼버린 물, 뒤늦은 후회였지만.


그런 장면이 잠시 지나가던 찰나, 한 아이가 대화 중 울기 시작한다. 휴지를 건내주거 잠시 기다렸다. 천천히 물었다. 지금 어떤 감정이 올라왔냐고. 그 아이는 답답하다고 했다. 지금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다고. 이게 어찌 그 아이의 잘못일까. 어쩌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하지 않는 우리 어른들의 잘못인 것을.


코칭이 끝날 때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니, 실은 어린시절의 나에게 던지는 미련같은 조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우리 모두 앞으로 자소서는 계속 부딪치게 될 거라고.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 어쩌면 끝도 없을 거라고. 그때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나 힘드냐고.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언제든 써낼 수 있는 '근육'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딱 두 가지만 해보자고 했다. 첫 번째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무거울 필요는 없다. 그저 가볍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고 행동하기.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좋아하는' 것을 하기. 그렇게 가볍게.


두 번째는 '그 경험을 기록하고, 느낌을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찰이다. 우린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배운다는 말을 전하며,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걸 잘 갈무리 하지 않으면, 성찰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천천히 세밀하게 나의 경험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기에.


이 두 가지 활동은 어쩌면 자기인식의 필수 키워드가 아닐까. 행동하고, 성찰하고. 그러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바로잡고 새로운 행동을 거듭하는 것. 그 선순환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행동이 성찰보다 부족하면 공허해지고, 성찰이 행동보다 부족하면 맹목적이 되기에.


이 각박하고, 여유가 없는 요즘 시절에 얼마나 이 한가로운 이야기가 귓가로 들어갔을까 싶지만은,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나니 내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끄덕거리며 뭔가를 적어나가는 모습도 나에겐 고마웠다. 그렇게 오늘 경험을 갈무리하며 집에 가는 길이다. 어라, 글을 쓴 덕분에 한 정거장을 지나쳤구나. 다시 돌아가는 사이에 글이 완성되고 말았다. 덕분이다.


PS :

글을 다 쓰고나자, 예전에 교육평론가 이범쌤의 이 영상이 떠올라서 함께 첨부한다. 

요즘 효자의 기준은,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 참 많이도 공감하게 된다.  




8월 심톡 : 내 삶의  아웃 리뷰

"내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고 있을까?"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돌보지 못했던 감정들은 언젠가 나의 삶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랜 시간. 잊혀지지 않는 그 때가 있다면 그 때 감정을 다시 돌봐주세요." _김00


"그 때 감정은 단순 했던 것 같은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여러감정들이 있었네요." _조00


"무언가 일이 벌어질 때 기쁨이는 숨어있었던 것 같아요."_강00


"지금부터 그 때 미처 돌봐주지 못한 우리 아이에 대한 감정을 기쁨이로 채워줘야 겠어요."_김00


"소심이,까칠이,버럭이,기쁨이,슬픔이 모두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모두 다 소중한 감정이예요."_최00



1장. 양심이 없다는 상상


한번 상상해보세요. 어느 날 문득, 당신에게 양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죄의식이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낯선 사람을 비롯해 친구, 심지어 가족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조차 없습니다. 

어떤 이기적인 짓을 해도,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평생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심리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는 능력까지 생겼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상상해 보세요. 어쩌면 당신은 돈과 권력을 갈망하고, IQ는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성공을 위해선 필요하지만 양심 때문에 포기하고 마는 일들도 감쪽같이 해치웁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사람이 되었다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상상이 되시나요? 아마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만 양심이 없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거리낄 것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당신은 이러한 사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은 양심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교정 불가능한 성격 손상’은 인구의 4%가 갖고 있으며 이를 가리켜 <소시오패스 Sociopath>라고 부릅니다. 4%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숫자일까요? 25명 중에 1명이며, 보통 50명 기준으로 한 반에서 2명이 소시오패스입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나요?

 
게다가 더 위험한 것은 우리나라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이러한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권장하는 문화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소시오패스는 그것을 방조하는 사회와 문화에 의해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하우스오브카드 - 주인공 부부가 소시오패스로 나오는 대표적 미드입니다.>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은 유혹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 필요한 이상의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고, 갖가지 위험을 무릅씁니다. 특히 주위 사람들을 자신이 만든 위험한 모험에 동참시키는 것에 능하며, 병리적 거짓말과 기만, 그리고 기생적 친구관계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위험을 무릅쓰지만, 책임을 지는 자리에선 항상 벗어나 있습니다. 거짓말과 책임회피에 능하기 때문이죠. 또한 이들은 사람들과 유대를 맺으려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도구나 소유물로 여길 뿐입니다.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관계를 형성하지만, 도구의 의미를 상실한 대상에게는 가차없는 행동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소시오패스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그들이 선악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구별이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 4%가 나머지 96%의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는 기준은 어쩌면 지능이나 인종, 성별보다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장애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그저 폭력적인 사이코패스쯤으로 생각합니다. 일반 (착한) 사람들에게 그들은 별나거나, 예술적이거나, 너무 승부욕이 강하거나, 게으르거나, 멍청하거나, 늘 악동 같을 뿐이며 그렇게 가볍게 여긴 탓에 그들은 쉽게 먹이가 됩니다. 어떤 의미에든 ‘소시오패스’라는 단어를 아는 자는 소수이며, 최근에야 조금씩 부각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사회적 인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위험성에 비해서.


 


 <공감 능력 향상을 위한 디자인씽킹 워크샵 - 강의 자료 중 일부입니다.>

 


앞으로 저는 양심과 공감 능력의 중요성을 공유하고자, 양심과 공감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인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에 대한 글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선 그것이 없어진 상태를 상상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죠. :)

 

그리고 이어서 이타성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쓰는 글은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공감의 시대>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공감의 뿌리> <공감의 힘> 그리고 <포커스>를 참고로 했습니다. 아직 제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글을 옮겨 적고, 제가 임의대로 편집하고 연결짓는 수준이라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심의 완전한 부재,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2장. 맹자의 사단과 공감 능력


안녕하세요? 책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양심이 없다는 상상>이란 주제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핵심은 이 질문이었죠.  "어느 날 문득, 당신에게 양심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번 시간에는 양심과 공감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좀 더 형성하고자, 쉬운 예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일단 지식채널 E <기원전 4세기>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정리해 놓은 걸 옮겨왔습니다. 

 

 

 

 

어떤 부분이 인상깊으셨나요?

저에겐 이 문장이 가장 와닿았습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백성의 배고픔과 가난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다."

 

만약 중국의 왕이나 우리나라의 왕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왕과 권력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모든 사람이 이러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이루게 될까요?

지금의 모습과 같을까요? 

 

맹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惻隱之心 仁之端也(측은지심 인지단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羞惡之心 義之端也(수오지심 의지단야 )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辭讓之心 禮之端也(사양지심 예지단야)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是非之心 智之端也(시비지심 지지단야)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이는 맹자가 가진 인성론으로서 '사단설' 또는 '성선설'로 불립니다. 

맹자는 이에 근거해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는데요, 이러한 정의에 근거해서 왕도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의 인성을 이야기할 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예시입니다.

 

그 옛날 기원전 4세기에 맹자를 비롯한 성인들은 벌써 <인,의,예,지>를 말하면서 사랑, 정의, 예절, 지혜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놀랍지 않나요? 이 4가지를 통칭하는 말은 <양심>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그 마음이죠.

 

저는 그 4가지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 바로 <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상황에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대상을 보면 공감적 고통이나 죄책감 등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데요. 이는 양심이 있는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정서입니다. <인>의 핵심은 결국 공감입니다. 

공감이란, 자아를 가진 인간이 타자가 되어보려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죠. 


이러한 공감 능력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학자들이 내놓은 바가 있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공감은 타자의 역할을 취하여 보고 대안적인 조망을 취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Mead, 1934)

공감은 타인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들을 이해하려는 자기 인식적인 시도이다. (Wispe,191) 

공감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목격한 결과로서 경험하는 염려,자비,온정 등 타인 지향적인 느낌들이다. (DonBatson)

공감은 자신의 처지보다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 더 알맞은 정서적 반응이다.(Hofman,1982) 

공감이라는 용어는 희랍어의 empatheia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타인의 감정적 체험을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Astin,1967) 

공감은 지각된 다른 사람의 체험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Stotland,1978) 

어떤가요? 모든 정의가 각자 다르듯, 공감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한 곳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네 맞습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앎과 지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서양을 떠나서 말이죠. 


이러한 공감 능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와 관련해서 좋은 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 선생님인 안광복 선생님이 과거에 인터뷰 중에 하신 말씀이 공감되어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사회는 세단계로 발전한다고 봅니다. 가장 밑바닥은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회, 그 위 단계가 이성과 합리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죠. 마지막 세 번째는 공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라고 봐요. 우리 사회는 이제 폭력에서 벗어나서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까지는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이성이 과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제가 봤을 때는 이것은 말로 하는 검투사 시합일 뿐이거든요. 승자와 패자가 있고 패자는 다시 원한을 품고 갈등이 반복됩니다. 정말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공감의 사회,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봐요. 우리사회는 이해의 사회에서 공감의 사회로 나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에 100% 동의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해의 사회에서 공감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까지 세대 간, 지역 간, 남녀 간에 다양한 갈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공감 받고, 더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공감의 시대는, 분명히 올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저희 심마니스쿨은 이러한 공감의 시대를 준비하는 교육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교육 철학과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누구나 함께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힘을 모아주세욧!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온전한 공감 능력과 양심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PS: 나름대로 야심차게 시작했던 공감 교육 시리즈의 글이다. 호기롭게 두 번째 글까지 쓰고 더 이상 완성하지 못했었다. 2014년의 내 공부 주제가 바로 '공감'이었고, 그게 맞게 꽤 많은 책을 본 것에 비해선 좋은 결과를 남기진 못했었다. 이 시리즈라도 더 완성했더라면 어땠을까. 란 생각도 지금 다시 쓰면서 하고 있다. 당시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1. '공감이 없다는 상상을 해보면서 공감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기. 2. '공감 능력의 대표적 예시'를 제시하면서, 희망을 제시하기. 3.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공감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사례들 4. 우린 앞으로 어떻게 공감 교육을 해야하는지 대안들 5. 심마니스쿨이 어떻게 공감 교육을 해나갈 것인지 그 계획들. 이런 식으로 쓰고자 했으나 막상 성공하지 못했다. 공감에 대해선 지금도 깊은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위의 시리즈는 모두 완성하고 싶단 생각을 한다. 카프카가 말했다. 서두르는 것은 죄라고. 너무 느긋하지도,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말고 나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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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책 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이 카테고리는 '소소한 칼럼'이라는 이름의 '글방'입니다. 
제가 그리고 저희가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적고 의견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부담없이 봐주세요 :)

이번 글은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란 주제로 조금씩 끄적거린 내용인데요, 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었습니다. 호흡이 긴 글이니, 중간에 지루해질 수 있단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재미있게 적고 싶어도 저란 사람이 그게 참 안 되네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어느 날 하와이의 전통 치유법에 대한 책, <호오포노포노, 평화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읽던 중 <삼나무 이야기>라는 이야기라는 짧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글이 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단 느낌이 들어서 옮겨적었습니다. 우선 다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짧습니다. 


"삼나무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사과나무와 오렌지 나무, 아름다운 장미들이 
함께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사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했지만, 한 그루의 나무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 불쌍한 나무에게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과나무가 말했다.
"네가 필요한 것은 집중이다. 진정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아름다운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건 정말 쉬운 일이야"

장미 덤불이 주장했다. 
"그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어. 장미를 피우는 게 더 쉽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를 봐!"

절망한 나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두 시도해보았지만 다른 나무들처럼 될 수 없었다. 
매 순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깊은 좌절뿐이었다.

하루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알려진 올빼미 한 마리가 정원으로 날아왔다. 
올빼미는 나무가 절망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야. 지구 위에 있는 많은 인간들과 같은 문제일 뿐이지. 
내가 해결 방법을 알려줄게.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려고 네 인생을 희생하지 마. 
너 자신이 되는 거야. 너 자신을 알면 돼. 그러기 위해서는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렇게 말하고 올빼미는 사라졌다.
 
"내면의 목소리? 나 자신이 되라고? 나 자신을 알라고?" 
절망한 나무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는 귀를 닫고 가슴을 열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넌 사과는 결코 만들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사과나무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넌 봄에 꽃을 피우지도 못할 거야. 왜냐하면 장미 나무도 아니기 때문이야. 
너는 삼나무야. 너의 운명은 크고 당당하게 자라나는 거야. 
너는 새들에게 쉴 곳을 주고 여행자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시골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너에게는 임무가 있어! 그 임무를 따르면 돼!'
 
나무는 그렇게 스스로 강한 확신을 얻었고, 곧이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는 곧 공간을 채우고 모든 이들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정원은 그제서야 비로소 완전히 행복해졌다.

 
다 읽어 보셨나요?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린 자연스래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삼나무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춰 버리는가. 
얼마나 많은 장미 덤불들이 가시만 돋아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 치여 '자기 자신'과 분리된 삶을 살고, 진실에서 멀어집니다. 가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나와서 나와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만, 우린 마치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나의 재능을 억압하고, 아니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듭니다. 그래서 분리된 삶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참고로 앞으로의 내용은 파커.J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에 나오는 글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맡은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득을 얻으려 한다. 
갈등, 도전,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숨기고 정체성을 감춘다. 
꼭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한다.

이러한 분리됨은 혼자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산됩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건성건성' 가르치면 그것은 곧 학생들의 문제가 됩니다. 
정치인들이 단지 '혀'로만 말하면 그것은 곧 시민들의 문제가 됩니다. 문제는 확대되고, 다시 반복됩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이 싫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현실이.. 그래서 전 온전함이란 단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온전함이란, 완벽함을 뜻하는게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원래의 조건에 일치하고, 손상되지 않고, 섞인 것이 없는 진정한 상태'의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선함보다 온전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선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존 미들턴 머리(John Middleton Murry)


우리는 왜 이렇게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믿으며 우리는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다고 교육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면과 갑옷을 벗고' 살아가는 게 더 안전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학생들과 공유하는 교사가 벽 뒤에서 정보와 지식을 날려보내는 교사보다 더 효과적이고,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리더가 인사고과표로 이끄는 관리자보다 직원들을 더 열심히 일하게 하죠.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깨어있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부인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인하면 할 수록 우리는 술, 약물, 일, 쇼핑, 대중매체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평생동안 거짓된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습니다. 

질문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깨어있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홀로됨은 자아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냥 두면 자아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커뮤니티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직적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이 선택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결코 서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면의 두려움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홀로됨과 커뮤니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려면 '이해'가 필요합니다.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뜻하며, '커뮤니티'는 반드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음을 뜻합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이 공간은 어떤 공간일까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선 기대와 욕구를 채우지 않고, 각자의 능력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채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고치고자 하는 충동을 자제하고 흔들림 없이 서로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속도와 깊이로 서로 배워야 할 것을 배우도록 지원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꿈꾸는 학교의 모습도 이런 모습입니다. <홀로 함께하기>란 단어가 그려지나요?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는 교육의 핵심은 온전함을 되찾는 것, 그리하여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깨끗한 거울' 즉,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곡된 나의 모습만 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공간엔 지시와 판단은 없습니다. 기다림과 질문, 깊은 신뢰가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꿈꾸며, 사람들과 함께 이뤄가고자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를 위한 교육과 교실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이 글을 쓴 것이 작년 4월이다. 꽤 옛날에 썼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 정답이겠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꼭 그 시간의 양에 비례하진 않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읽어보았다. 뭐 지금도 이 생각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나는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을 회복하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대한 나름의 논리가 담긴 글이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뭐?"라는 자연스런 질문이 떠오르는 글이란 느낌이고 말이다. 하하하. 이어서 2탄도 옮겨본다. 


안녕하세요? 책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최근 세월호 사건 때문에 많은 분들이 큰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고 계신데요. 저 역시 한 명의 어른으로서 크나큰 책임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일진 모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저말고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이 쉽게 잊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번 달에는 이런 저런 사건들과 소소한 가정사 때문에 글 쓰는게 조금 늦어졌는데요, 그나마 4월 마지막 날이나마 올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쓴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1)'에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의 핵심은 온전함을 되찾는 것, 그리하여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깨끗한 거울' 즉,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혼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왜곡된 나의 모습만 볼 뿐이며,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이 공간엔 지시와 판단은 없다. 기다림과 질문, 깊은 신뢰가 존재할 뿐이며, 이 공간에서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배우고 가르친다.  
저희는 이러한 공간의 모습을 언제나 상상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이뤄가고자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를 위한 교육자와 교실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교육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그건 바로 '온전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교육은 온전한 어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온전한 어른이란, 아마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줄 알며, 학생들과 깊이 공감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일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인군자나 니체가 말한 '초인'과 같은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해지려는 분투보다는 겸손을 향한 여정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꼭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

 

개인적으로 저는 2년 전에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 인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아이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지만, 인정하고 나니 제가 할 일은 분명해 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르치지 않고 배움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온전한 교육의 시작은 '가르침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배움은 배우는 사람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게 아니라, 배울 준비가 되었을 때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게다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우린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학생들에겐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건 바로 '경험의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 아마 아이들은 즐거운 경험, 몰입하는 경험, 이야기는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운이 좋다면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나의 '의문 혹은 질문'을 가지고 가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도 재미있었다! 근데 음.. 아까 그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궁금한데?"

 

자기만의 경험을 하고, 질문을 가졌을 때 학생들은 이제 '배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배울 준비가 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위의 모든 관계'입니다. 주위에 있는 책, 인터넷, 사람 심지어 길가에 핀 꽃을 통해서도 배우기 시작합니다. 모든 장소는 배움의 공간이 됩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그 마음을 잃지 않도록 옆에서 견지하고, 관계하며, 가끔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 됩니다. 물론 스스로도 이미 하나의 질문을 품고 살고 있어야 하지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교육의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이 일어나기 위해선 어떤 교실의 모습이 필요할까요? 그건 아마 이러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바로 스웨덴의 '교실없는 학교, 비트라'입니다. 딱딱한 교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멋지지 않나요? 

이러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 깊이 '공감'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며, 진실된 '나눔'을 통해 서로를 성장시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기분 좋은 상상은 '이러한 교실에선 어떤 수업이 경험되어져야 할까?' 입니다. 

이러한 공간에서 우린 또 국어, 영어, 수학을 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 학생들의 공감, 표현, 나눔 능력을 일깨워줄 수 있는 수업 커리큘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과 수업은 주제별 학습을 통해 흥미에 따라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메인 수업 3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철학 수업 : 철학은 당연한 것에 대해서 '의심할 때'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아마 그래서 철학 수업은 깊이 있는 독서, 글쓰기 그리고 토론을 통해 생각을 표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나누고, 친구의 나눔을 통해 자신을 보고, 나아가 자기인식능력과 공감 능력까지 기르게 됩니다. 이러한 철학 수업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이나 유대인들의 떠드는 도서관 '예시바'와 같은 모습을 닮아야 할 겁니다.


Q.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 독서, 토론, 글쓰기, 코칭 등

 

2. 예술, 디자인 수업 : 진정한 예술은 '100% 자기 표현'을 가능하게 하며, 진정한 디자인은 '100% 인간 중심'으로 설계됩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편이나 불만에 깊이 공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시간도 또한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힘이 예술과 디자인 교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또 자신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우리 모두가 꼭 누려야 할 권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술, 디자인 수업은 영국의 서머힐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Q.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가? A. 예술(춤, 노래, 그림, 연극), 디자인 씽킹 등


3. (게임을 활용한) 프로젝트 수업 : 게임은 지금까지 개발된 가장 효과적인 '몰입 환경'입니다. 게임에는 스토리가 있고,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는 이 '매직 서클' 속에서 주인공이 되며, 유능해지는 경험(Level Up)을 합니다. 게다가 레벨에 맞는 퀘스트로 인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요. 이 교실에선 이처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며, 현실 세계를 탐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 학생들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닌 함께 협업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어려운 퀘스트도 쉽게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프로젝트 수업은 독일의 헬레네 랑에와 같은 사례를 참고하고 싶습니다.  


Q.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탐험하고 싶은가? A. 프로젝트 수업, 게임, 소셜 디자인, 사회적 기업가정신 등 


지금까지 사람, 장소, 그리고 커리큘럼에 대해서 간단히 적어 보았습니다. 혹시 이러한 학교가 머릿 속에 그려지시나요? :) 아직은 터무니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저희는 이러한 신념을 갖고 조금씩 조금씩 현실화시켜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결국, 이 학교에선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그걸 한 단어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결국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더욱 진실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것이며, 나아가 기꺼이 창조하고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학교를 <심마니스쿨>은 지향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념을 함께 공유하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견을 주시고,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작은 행동이 큰 기적을 낳는다고 합니다. 작은 행동이지만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교육시킬 수 있다. 지혜로운 글을 읽고 사색하면서..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한 발짝 물러나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과정에서.. 

타인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면서, 시간을 들여 마음을 정화시키고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양심을 훈련시킬 수 있다." 

 

스티븐 코비



심마니스쿨 연혁 (2013.06 ~ 2015. 08.18 현재)


2013. 6월 서울시 청년창업 1000프로젝트 선정'


2013. 7월 오산 대호초등학교, 운산초등학교 독서토론 수업 (디베이트포올 협약)  
 

2013. 7월-8월 세상을 바꾸는 어린이 창업캠프 기획 및 진행 (창업진흥원 / 중소기업진흥원 주최)
 

2013. 9월 ‘우리 아이가 질문을 시작했어요’ 호기심 탐험대 워크샵 (1회) 
 

2013. 10월-12월 강북 청년창업센터 ‘스타트업을 위한 디자인씽킹’ 강의  
 

2014. 2월 온전함을 회복하는 어른들의 대화, 심톡 시작 (매월 1회 진행)
 

2014. 2월 ‘공감, 상상, 실천, 나눔’의 디자인씽킹 워크샵 (한국과학창의재단 / 창의인성 현장포럼)
 

2014. 3월-7월 삼성 크리에이티브 멤버십 유스반 멘토 (강정욱 대표) / 키즈반 보조 멘토 (김해리 선생님)
 

2014. 3월-12월 초중등 대안학교 하나인학교 <해적 진로스쿨> 수업
 

2014. 3월-4월 오산 대호초등학교 독서토론 수업 (3학년 - 6학년)
 

2014. 6월-8월 시흥 연성중학교 <해적 진로캠프> 기획 및 운영
 

2014. 6월 일산 마을문화실험실 상상끼리 <질문의 힘> 강의 
 

2014. 6월 사회적기업 리더과정 1기 수료 (사회적기업 진흥원 / 중앙대학교 / MYSC)
 

2014. 7월 ‘교사를 위한 디자인씽킹 워크샵’ (공간 민들레)
 

2014. 7월-8월 대학생 취업 아카데미 <고정관점 깨뜨리기> 강의 (상명대, 충남대 등)
 

2014. 9월 2014 소셜벤처 경진대회 출마 


2014. 9월-11월 성남 검단 초등학교 독서토론 수업 (3학년 - 6학년)


2014. 9월-12월 공간민들레 디자인씽킹 프로젝트 수업 진행 (불만제로 프로젝트)


2014. 12월 다 함께 즐기는 공감, 표현, 나눔의 심파티 SimParty!


2015. 3월-6월 서울 용마중학교, 당산서중학교 디자인씽킹 수업 <우리는 모두 영체인지메이커!>


2015. 3월-11월 성남 검단 초등학교 독서토론 심화 수업 (3학년 - 4학년)


2015. 3월-12월 정읍 칠보초등학교 창의인성 수업 (3학년 - 6학년)


2015. 6월 사회과, 미술과 디자인씽킹 교사연수 워크샵  


2015. 7월 서울 대방중 동작미술영재원 디자인씽킹 워크샵 (중학교 1-2학년)


2015. 7월 서울 당산서중 예스 리더 캠프 (자기소개서 작성 및 코칭)


2015. 7월 - 10월 시흥시 국제교류단 <세계를 담은 스쿨> 프로젝트 기획 및 진행 


2015. 8월 정읍 칠보초등학교 여름 캠프 <Let's play, make, dream> 


2015. 8월 용인 동막초 독서토론 교사연수 워크샵  

 

PS: 이렇게 나열하듯 연혁을 적는게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있다. 좋은 점은 그래도 약간의 뿌듯함과 성취감? 아, 생각보다 이룬 것도 많구나.라는 깨달음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안 좋은 점이 더 많다. 우선, 교육을 많이 한다는 것과 좋은 교육을 한다는 것은 연관성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개조식으로 무언가를 했다 저걸 했다는 것만 보여주면, 상대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 자랑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적어야 한다. 이런 이런 이야기가 있었고,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이 글을 보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위의 사례를 하나 하나를 누를 때마다 링크로 연결되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타낼 수 있게 될 때, 그때서야 이런 식의 연혁은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네, 심마니스쿨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책 읽는 심마니, 강정욱입니다. :)

드디어 1년의 잠복기를 지나 심마니스쿨에 대한 첫 포스팅을 하려고 하니 조금 떨리네요 ㅋㅋ

최소한 매주 1회의 포스팅을 통해 앞으로 알차게 꾸며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포스팅은, 우선 심마니스쿨에 대한 소개입니다! 저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심마니가 산삼을 캐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온전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위에 보이는 산삼의 가격은 얼마일까요? 한 뿌리가 적게는 100만원에서 비싼 것은 천만원까지도 나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값진 산삼을 캐는 사람들은 이 산삼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다룰까요?

네, 맞습니다.  한 뿌리라도 손상되지 않게 조심 조심 다룹니다. 게다가 경건한 마음까지 갖습니다.
왜냐하면 산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에게 '선물'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심마니가 아닌, 그 가치를 몰라보는 누군가가 산삼을 캔다면, 아무리 값비싼 산삼이라도 그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린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산삼을 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믿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요. 아마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가능성'을 그대로 지켜주고 발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희도 아직 그 답을 모릅니다. 하지만 발견하고자 합니다. 미래 세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정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질문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합니다. 



그래서, 저희의 이름은 '아이들의 온전함을 믿는 사람들, 심마니스쿨'입니다.
현재, 강정욱 선생님, 황정선 선생님, 김해리 선생님,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러한 신념을 갖고 계시다면 저희와 함께 꿈꿔 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생각을 더 자주 나누고 교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2014년 2월에 처음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며 썼던 글이다. 오랜만에 보니깐 약간, 오글 오글 거리지만, 그 당시의 느낌을 살리고자 그대로 옮겼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은 변치 않다. 그리고 심마니가 산삼을 캐는 것처럼 교육을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직도 탐험해나가고 있는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여러가지 방법도 있고, 내용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심마니스쿨의 '심'이 나는 좋다. 마음 심, 찾을 심, 깊을 심. 다양하게 해석되는 이 녀석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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