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의미

- 나는 종종 평생학습관을 간다.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과 '자극'이 된다. 지난 겨울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머물 예정으로 마포구 평생학습관을 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책과 인터넷 강의 그리고 문제집과 싸우고 있었다. 나도 차분히 앉아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은 낯설게.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아,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 이게 왠말인가. 공부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니. 하지만 나는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그때 받은 느낌은 뭐랄까.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때 공부하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평생학습관에 모인 사람들 열 중의 아홉은 모두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예비 선생님, 민법을 공부하는 사법고시 준비생, 문제집을 푸는 고등학생, 토익을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은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명한 목적'와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날 책들을 들척이는 몇몇 할아버지들이 보일 뿐.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번 귀기울여 보자.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학교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 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노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 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 교회 간다고 영혼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고. 학교 간다고 지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면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일리히는 그것을 콕 찍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학교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단의 왕국’을 조심하라고. 우리는 ‘목적의 왕국’을 만들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눈에 보이는 제도화가 될 때 우린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번 평생학습관에서 이반 일리히가 말하는 '가치의 제도화'가 낳는 폐혜를 보았던 것이다. '학습과 배움'이라는 가치가 '학교와 시험'이라는 제도로 치환되면서 어쩌면 우리는 본래의 '학습과 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모두가 학습하고 있지만 학습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는, 배움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슬픈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한 단편이었다. 

핵심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곳인가, 인간을 타율화 시키는 곳인가? 


옮겨적기
- 교육기회의 평등화란 사실 바람직한 것이고 동시에 실현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이를 강제적 학교화와 동일시함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 권리헌장 1조는 “국가는 교육의 확립에 관한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로 규정돼야 한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적 의무는 허용될 수 없다. (…)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시민을 보호해야만 비로서 헌법상 학교의 비국가화가 심리적으로 유효하게 된다. P. 39
+ 우리는 학력상의 어떤 이유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그 반대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 대부분의 기능은 반복훈련에 의해 습득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 그러나 기능을 탐구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교육은 반복훈련에 의존할 수 없다. 교육이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런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반복훈련에 반대되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가 축적해온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교육은 의존한다. (…)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정의한 문제를 둘러싸고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이고 탐구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같은 말이나 문제에 대해 동시에 고민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51
+ 교육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교과서에? 칠판에? 교사에? 인터넷에? 교육은 공동체 사이에 존재한다. 교육은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정당, 교회, 노동조합, 클럽, 마을센터는 이미 그들의 교육활동을 조직하고, 그것은 학교로 활동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미리 짜인 강의, 세미나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에 의한 사람들의 연결은 당연히 교사중심적이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한 형태로 책, 영화 등의 제목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경우, 특수한 언어와 용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문제나 사실을 서술하는 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저자에 따르면 되고, 이는 그 출발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즉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 몇이 선택한 ‘고전 읽기’와 달리, 두 사람의 동료는 그 어떤 책이라도 더욱 깊은 분석을 위해 선택할 수 있다. 54
+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순수한 형태로 학습 모임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당연히 학습자 중심 학습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학습이 잘 일어나는 배경도 바로 그것이다. '자발성' '같은 주제' 그리고 '다양한 참가자' 이렇게 한다면 어찌 배움이 재미없을 수가 있을까?

- 시카고에 사는 나의 흑인 친구는 참된 교육을 하는 사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의 상상력이 ‘완전히 학교화된 것’이라고 훌륭하게 정의했다. 61
+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학교 밖에서 배운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 없이, 가끔은 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배운다. 가장 비극적인 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전혀 학교에 ‘가지’ 않음에도 학교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 밖에서 배운다. 우리는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고, 놀고, 저주하고, 정치하고, 일하는 것을 배운다. 72-73

+ 나는 이 정도로 급진적인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존재한다. 필요한 배움도 있고. 중요한 것은 '지나친 학교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이 나는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학교 자체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기에. 

- 학교는 초중고라는 연속되는 게임에서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 학위는 언제나 그 소비자의 이력에 불변의 가격표로 남는다. 학위를 가진 대학교 졸업생은 그들 머리에 가격표를 달고 다니는 세계에만 적합하고, 그것에 의해 그들 사회에서 기대수준을 정의하는 권력을 부여받는다. 각국에서 대학교 졸업자의 소비량이 다른 사람들의 표준을 결정한다. 즉, 직업 유무와 관계없이 문명화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대학교 졸업자의 생활방식을 동경하게 된다. 이처럼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82-83

- 학교는 또한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 (…) 학교는 우리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 우리는 학교에서, 가치 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있다. 88
+ 대학교는 직장이나 가정의 소비 표준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도 재미있는 통찰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학교의 서열화가 모든 사회의 서열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리고 학교는 '기성질서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 자'들을 선택한다. 사회는 더욱 굳건해지고, 빈곤층은 악순환에 빠져든다. 학교의 역할은 '배움'이 아닌,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회가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한 담론은 이미 저 뒤로 밀려나버린지 오래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세 가지 목적을 가져야 한다. 첫째, 공부하기를 원하는 모두에게 그 나이에 관계없이 필요하나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그로부터 배우고자 원하는 사람을 찾게 해주어야 한다. 셋째, 공중에게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도전을 알릴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 공부하는 사람은 강제적 교육과정에 복종하도록 강요되거나, 자격증이나 졸업장 소유에 의해 차별되도록 강요돼서도 안 된다. (…) 훌륭한 교육제도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따라서 완벽하게 교육적인 자유로운 언론, 자유로운 집회, 자유로운 보도를 가능하게 하는 현대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150-152
+ 상당히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공부하기를 원하는 누구가 공부할 수 있고, 그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자유롭게 알려질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일 것이다. MOOC나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학습모임들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비주류에 불과하다. 이것이 기존 교육체제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널리 증명될 수 있다면 '교육 개혁'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하다. 

- 최악의 학교 수업은 학생을 한 방에 모아놓고 수학과 사회 및 철자를 똑같은 순서로 가르치는 것이다. 최선의 학교 수업은 학생 각자에게 제한된 과정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여하튼 동료 집단이 교사의 목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바람직한 교육 제도는 각자에게 그가 동료를 찾는 활동을 특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에게 그들의 가정을 떠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178
+ 칸 아카데미가 생각난다. 예전에 적었었는데. 어디더라. 심마니스쿨 블로그였나. 
링크 걸어둡니다. 책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여기서부턴, 일리히의 주장에 대한 옮긴이의 생각들입니다. 

- 공부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걷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가용이나 병원에 의해 타율화됐듯이 우리의 모든 고유한 능력이 타율화돼 사회 자체를 자율적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 역사로 보면 그런 신앙의 자율화로 부터 모든 타율화가 시작됐다. 

일리히의 주장은 사실 간단하다. 기독교를 믿는 서양인으로서 그는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예수는 어떤 학교를 나온 소위 전문가가 아니었다. 전문지식과 권력, 위신, 지위, 부, 여유 등을 가진 속세의 속물적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 흉내를 내며 예수를 떠드는 신부나 목사, 그리고 성당과 교회는 웃기는 속물이니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 그것들이 없어지면 민중은 스스로 신을 믿고, 공부하고, 치유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회복해 그런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220
+ 생각해보면, 나도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최근 파커 파머를 통해 '퀘이커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아마 이 퀘이커교의 교리가 지금 말하는 이반 일리히의 생각과 비슷해보인다. 퀘이커교는 실제로 목사의 존재가 없다. 단지 침묵 속에서 직접 신과 대면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직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선 가장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볼 생각이다. 

- 사회의 ‘학교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다. 첫째,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계급구조를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고유한 ‘공부’ ‘배움’을 학교라는 형태의 조직에 의하여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졸업장-학위-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 이상이 아니다. 곧 학교는 계층화라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있다. 둘째, 학교화는 ‘배움’이라는 것을 소비과정의 결과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 셋째, 학교화는 교사가 없는 배움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넷째, 학교화는 지적인 민감성을 비롯한 인간의 고유한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 226
+ 학교가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니, 너무 슬픈 말이지만 상당히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 교실을 들어가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다. 그곳이 생동감이 가득한 '배움'의 현장인지, 생기가 사라져 오로지 처절함 만이 난무하는 '생존'의 현장인지 다녀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 우리는 사실 학교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있으며,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전거나 대중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 있고, 교회에 가지 않아도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범죄인을 교도소에 보내지 않고도 사회갱생을 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오다가 별안간 모든 것이 철저히 제도에 의존하는 세계에 살게 됐다. 바로 일제 이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학교교육 때문이었다. 234
+ 사실 이건 굉장히 놀라운 통찰인데, 나에게만 그런가? 

- 일리히는 평생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학교는 교육 장애물이고, 병원은 건강 장애물이며, 근대회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극대화하고, 국가 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을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 에리히 프롬은 일리히 사상을 근원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그의 근원적 비판이 항상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더욱 큰 활기와 기쁨을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천부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에서 나오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민주주적의 이념이다. (…)

일리히가 평생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이리라.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반면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희망이 아니라 기대하는 존재로 인간보다 재물을 사랑하고 제도에 기대하는 존재다. 그들은 과학, 기계, 전자계산기, 컴퓨터에 의존한다. 일리히가 희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 양식을 극복하고 진실한 인간의 욕구와 본성에 더욱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246
+ 근원적 휴머니즘. 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제도와 시스템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은 나약하고 두려운 존재로 가정한다. 그에 맞춰서 통제와 처벌은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려 한다. 나는 저항하고 싶다. 내가 지향으로 하는 인간상도 이반 일리히, 에리히 프롬과 같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이러한 존중과 배려 안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일리히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가장 근원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여 현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도발하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가 비판한 현실은 바로 발전의 종교를 섬기다가 본래의 자율성을 잃고 타율화된 인간의 세상이었다. 260
+ 르네상스적 인간! 근원을 고민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비판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 
오로지 인간 본래의 자율성 회복을 지향하고 타율화된 인간을 지양한 인간! 멋지다.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 

- 일리히에 따르면 산업의 과잉성장은 자율성이 제도를 수용하고 결국은 제도에 의존하게 하는, 곧 타율성이 승리하는 편제를 만든다. (…) 그는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에 자율, 공동적 도구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제창했다. (…) 그가 단순히 학교나, 병원이나, 차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의 여러 제도가 도구 수단을 지나치게 발전, 확대시켰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힘이었던 자율성이 마비 당하고 타인에 대한 의존이 증대되면, 필요를 충족시키는 대량소비가 지구의 유한성을 파국으로 몰아넣도록 소모시키기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자율적 공생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학’ 숭배를 비신화화하고 일상언어를 회복하며, 나아가 법적조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세 가지 차원의 도구를 고찰한다. 272

“건강, 공부, 위엄, 독립, 창조라고 하는 가치는 그런 가치의 실현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 제도 활동과 같은 것으로 오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제도화’다. 이러한 것에 의해 학교는 모든 사회를 두 영역으로 구별한다. 곧 특정 시간대, 특정 방법, 특정 조치와 배려, 그리고 특정 전문 직업은 학술적이거나 교육적이라고 간주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276
+ 마지막 문장을 되세기자. 이러한 제도적 배려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고갈 당하게 된다. 마치,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우리의 '기억들(휴대전화 번호, 간단한 일정 등)'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휴대폰을 처음 사용했을 때만 해도, 주위 왠만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다 외우고 다녔는데, 이젠 내 번호도 잃어버릴 지경이다. 이는 뿐만 기계만이 아니다. 일리히가 말했듯, 제도적 배려 역시 인간을 타율화시킨다. 

- 존 홀트, 교육이 아니라 /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정의란 없다. ‘교육이 아니라’ 라는 제목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특수한 장소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하면서 행해지도록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는 주변 세계와의 교류에 의해 그 전보다 사물을 알고 현명하게 되며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능력이나 기능도 몸에 익혀 자각적으로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인생에는 큰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떄문이다. 즉 나는 매우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살아가고 일하며 놀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단절은 없다. 그 전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정의에 알맞은 말을 하나 고르기란 불가능하다. 349

+ 나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다. 교육이란 특수한 장소에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 누군가가 설계한 과정이 아니다. 차라리 호기심 그리고 삶에 가깝다. 배우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배울 수 없는 곳은 없으며,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다. 배움이란 철저히 삶과 관계한다. 삶을 말하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나 역시 이러한 배움을 토대로 학생들과 삶으로 만나고 싶다. 내 삶을 먼저 꺼내고, 그들의 삶을 꺼내어 내고 싶다. 그렇게 제도화 된 배움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역동적인 배움터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지난 번에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다큐를 보면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짜 교육이 무엇이고, 배움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정리해봤습니다. 사교육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한번 알아봅시다 :)



1. 학원의 마케팅 전략


- "너 고1이지? 너 성적은 어때?" "옆집애들은 이거 다 하고 있습니다." 
공부 앞에선 학생도 학부모도 다 약자다. 그래서 '불안감' 때문에 흔들리게 된다. 

-  레벨 테스트, 겁주기, 부풀리기는 학원의 전통적 마케팅 전략이다. 3년간 미국에서 다녔고, 지금도 외국인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대치동 학원의 유명한 레벨 테스트를 봤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90점 만점에 54점이 나왔고 하루에 단어를 700-800개를 외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울대를 갈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학원 마케팅의 실체다. 

- 좋은 학원을 찾고, 정보를 수집하고, 결과가 안 나오면 학원을 옮기는 것이 '자기주도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자기주도력'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 사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고 문제를 아무리 많이 풀어도 '내 머리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절대 2등급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 본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2. 사교육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



- 사교육을 강조한 비디오를 보고, 분명히 머리로는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교육비를 늘리겠다는 모순된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해 사교육의 효과를 강조하는 비디오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이성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굉장히 불안감과 경쟁의식에 부추겨지게 된다. 그것이 학원마케팅의 기본이다.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 불안감'이다. 

3. 메타인지의 중요성


-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지식과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지식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 기억력, 연산능력, 이해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 바로, '메타인지' 능력이다. 알고 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실제 능력과 그것에 대해 내가 아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 격차를 자주 경험해보지 않으면 '메타인지'능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 사교육 현장에서는 내가 얼마만큼 모르는지 체크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알고있다는 느낌만으로 계속 공부할 뿐이다. 그 간격이 좁아지지 않는다. 선행학습은 남들이 안 배운 것을 먼저 배운다는 쾌감을 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4. 공부 시간의 비밀



- 서울대 학생과 보통 학생의 평균 공부 시간은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곳에 있다.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보라. 이 차이가 '자기주도 학습능력'을 결정한다. 이것을 해보지 않은 학생은 자신을 모니터링 하는 경험이 없어서 계속 불안해지고 학원에 의존하게 된다. 


결론 : 우리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사교육 시장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공부를 잘 하게 하는 것은 '혼자 공부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은 그것을 흐릿하게 하고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선 '전략적 공부기술' 과 '최고의 공부'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공부가 무엇인지'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


추천 책 : 전략적 공부기술 / 최고의 공부





돈 댑스콧의 책, 매크로 위키노믹스 '상아탑의 미래' 부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위키노믹스, 디지털 네이티브'로 유명한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교육은 협업학습과 협업지식 으로 바뀔 것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학습하고, 적응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라구요


실제로 대학교 4년이 지나면 우리가 배운 지식은 모두 쓸모없어 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 우리에겐 '외우는 능력'이 아닌 '배우는 능력'이 훨씬 중요해진 시점입니다. 이 글을 통해 미래 교육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1. 대학의 미래

- 대학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미국에서만 아직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 규모가 7140억에 이를 정도로 대학 등록금이 다른 서비스보다 훨씬 가파른 오름새를 보이고 있어 대학 교육에 과연 그만큼 돈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는 건지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학생들 사이에선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A학점을 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는 곧 최고의 인재들이 기본적인 교육 모델을 배척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 대학의 변화는 그저 좋은 생각에 그쳐선 안 된다. 대학의 문을 개방하고 모든 사람에게 무료 수업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기존의 과를 없애고 문제에 초점을 맞춘 학업과정을 신설하라는 요구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 보다 근본적 2가지 관점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구시대적인 산업시대 교육 모델을 버리고 그 자리를 협업학습이라고 불리는 신모델로 채워야 한다. 둘째, 고등교육에 사용되는 콘텐츠를 생성하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대학과 교수들은 세계적 수준의 학습자료 개방 플랫폼 발전에 기여해서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대학이 이렇게 문을 활짝 열고 협업학습과 협업지식의 산물을 받아들이면 생존의 기회뿐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글로벌 경제에서 번성할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 





2. 교육 모델의 변화 : 협업 학습

- 지금의 교육 모델에서 교육이란 학생들이 콘텐츠를 수용하고 시험 때 그 내용을 떠올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즉, 수동적인 청중을 상대로 일방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학생들을 고려하면 '방송형 학습' 모델은 확실히 시대착오적이다. 지금은 졸업 후 가만히 있어도 뒤처지지 않는 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다. 4학년이 도면 첫 해에 배운 내용의 절반이 더 이상 쓸모없는 것으로 변한다. 


- 지금은 평생 학습하고, 사고하고, 연구하고, 정보를 찾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전후 사정과 연결하여 상황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연구내용을 문제해결에 접목하고, 협업하고, 의사소통하는 역량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 노동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학습하고, 적응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 존 실리 브라운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학습에 대한 사회적 관점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인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참여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이 강의실을 떠나서 배운 내용을 논의하고 내면화할 때 진정한 학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룹 단위의 문제해결, 집단적인 의미 파악 등이 이루어질 때 학습 결과나 전반적 이해도가 개선된다. 


- 교육에서 학생의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소규모 학습 그룹을 형성하거나 자신에게 맞는 학습 그룹에 참여하는 능력'이다. 협업학습 활동에 참여하면 학생들이 학습에 더 큰 관심을 갖고 더 큰 책임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웹 WEB'은 이러한 협업학습을 위한 강력한 환경을 제공한다. 상호적인 컴퓨터 기반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교수가 강의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이고 학생들과 협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 초중고 교과과정에서도 '강의'대신 좀 더 협업적인 지식 '구성' 접근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노트북과 '태양의 분점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노트북은 학생들과 교사와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교육자들이 교육방식을 대량생산에서 대량맞춤으로 수정하면서 학생들의 학습 결과가 개선되고 있다. 세로운 세대의 학생들에 맞춘 교육 모델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에 관한 수치스러운 사실 한 가지는 무언가를 가르치려 할 때마다 

학생에게서 발견이 주는 기쁨과 이득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곳은 강남역 '알라딘 중고책방'이다. 그곳은 나의 영원한 페이브릿 플레이스! ㅋㅋ

개인적으로 나와 교육적 가치를 가장 크게 공유하는 학교는 영국의 '서머힐 학교'와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인데, 그곳의 철학을 공유하면서도 미국의 교육학자 듀이의 'Learning by Doing'의 학습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일본의 대안 학교라는 소개에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책에 나오는 키노쿠니 학교는 이미 일본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소개가 되었던 학교다. 학년도 시험도 성적표도, 심지어 '선생님'도 없는 학교, 학교의 통념을 깨면서 새로운 교육 모델을 보여주는 학교라고 한다.  나 역시 내가 만들고 싶은 '교육 철학'과 '가치'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나도 조만간 나의 교육적 철학과 질문, 그리고 커리큘럼을 구성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다. 

여러분도 책의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시길! 정리한 내용 나눕니다. ^^ 




1부. 자유학교의 일상


- 우리 학교에는 학년이 없다. 그 대신 '프로젝트'라 부르는 반이 있다. 

- 프로젝트와 주요 활동 : 어린이 마을 공무점 / 농장 / 탐험클럽 / 여행사 / 출판사 / 전자공작소 / 짚신반..등

- 자유학교는 아이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는 학교다. 때문에 서로 의논하는 일이 많다. 다시 말해 자유학교란 회의가 많은 학교인 셈이다. 

- 중요한 원칙 "자기 일은 자기가, 자기들 일은 자기들이 결정한다." 정보는 교사들도 알려준다. 그러나 결정은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고민해서 결정했으면 한다. 


2부. 자유학교의 구상


1. 자유학교란 무엇인가.

- 자유학교에 대한 비판

1) 교육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답 : 전통적인 교육은 특정 가치관을 '전달'하지만, 자유주의 교육은 스스로 가치관을 '창조'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학습할 환경과 조건을 마련한다. 더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2) 자유주의 교사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 

답 : 사실 자유주의 교육을 실천할 수록 전통 교육가보다 더 열심히 사회에 관여한다. 어떤 비판보다 중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실증적으로 유효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자유학교란?

아이가 기존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이나 사물을 보는 방식을 구축하도록 돕는 학교다. 어른들의 직접 통제를 되도록 줄이고, 아이 자신의 결정, 선택, 실험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학교다. 


- 자유로운 아이란?

자유롭지 못한 아이는 내면에 불안이나 자기증오를 지닌 아이, 지식의 양은 많아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 그리고 어른에게 도덕을 강요 당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나 배려심은 부족한 아이다. 

반대로 자유로운 아이란 감정적으로 해방되서 스스로 생각하며, 공동생활에서 민주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아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학교는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운 아이를 기르는 일을 목표로 삼는 학교다. 

 




2. 지금 왜 자유학교가 필요한가

-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에게 이상적인 모습을 강요받는다. 아이의 내면에는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더 커지고, 또 다른 아이에게 감정을 투영하게 된다. 

- 아이들 마음에 이 같은 좌절감, 자기부정, 죄의식을 없애고 자존감을 높이지 않는 한 왕따와 같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 마음 속 '사실은 이렇게 되고 싶다.'는 바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대로의 너는 안 돼"라는 말 대신, 

"지금의 네가 좋다"는 메시지다. 


- 기존 학교의 문제

1)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기 보단 교사가 미리 준비한 내용을 똑같이 배운다. 교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2) 개성이나 개인차는 거의 무시된다. 성적에 따라 서열화되고, 평가된다. 

3) 체험의 요소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 추상적 내용을 전달한다. 아이들의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 교사의 관리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획일적 학습 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존중하고, 지식의 전달보다는 구체적인 생활이나 창조를 매개로 한 학습을 중요시하는 학교는 없을까? 무엇보다, 아이들의 즐거움과 성장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학교는 없을까?


3. 자유학교의 모델


1) 서머힐 학교

* 서머힐의 원칙 

- 출결 자유의 수업 : 수업은 있지만 수업에 출석할지는 학생 스스로 결정

- 학생 자치 : 교칙을 만들거나, 갈등을 처리하는 일은 전교회의에서 결정

- 권위주의의 부정 : 학생들이 교사를 이름으로 부름, 모든 교직원의 기본 월급이 동일함.

- 창작활동의 중시 : 공작, 미술 같은 예술활동이 교과학습보다 더 중요함.


2) 킬크하니티 하우스학교

- 듀이의 '행함으로써 배운다. learning by doing'이 학습의 중심이 위치함.

- 공작, 미술, 농업, 도예, 낙농, 그리고 학교 건물 짓기, 작곡 하기, 에세이를 출간하기..등 모든 것이 학습


3) 라이징힐학교

- 구체적인 문제에 근거한 학습, 토론, 작업을 중요시함.

- 학습 장소를 지역사회의 여러 문제에 눈을 돌리게 하고, 학습에 대한 흥미를 환기시킴.

 "만약 또다시 학교를 맡게 된다면 어떤 점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겠습니까?"

 "당연히 교사 선임이죠. 내 생각에 찬동해주는 교사를 뽑겠습니다. 라이징힐에선 그럴 수가 없었어요"


4) 크롱라라학교

- 놀이와 몸 쓰는 작업을 중요시함. "놀이는 그 자체가 배움입니다. 노는 가운데 지식뿐 아니라 학문적, 사회적, 감정적, 정신적인 공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자유학교의 기본원칙


- 자기결정 :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들 내면에서의 성장을 신뢰함.

- 개성존중 : 개별학습이나 모둠학습을 유연하게 편성해 활동을 다양화함.

- 체험학습 : 실제 활동을 교육의 중심에 놓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태도, 능력을 기름. 


1) 자기결정

- 자기주도 학습능력 :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도 주체적으로 꿋꿋이 살아갈 능력과 태도

- 서머힐의 철학 :  '자유로운 아이'라는 이상을 걸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근본 원칙으로 함. 그리고 이를 위해선 감정(무의식)의 해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김. 이를 위해서는 권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 이러한 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가설과 판단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함.

- 교사의 간접적 지도력 :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아이들을 직접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여러가지 활동이나 환경이다."

- 실패할 권리 : 중요한 것은 실패할 권리를 존중하고 자기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2) 개성존중

- 개성화의 원칙 + 모둠학습 = "다양성이 보장된 개성화"

- '자기에게 필요한 시간'은 아이들 각각에 따라 다름, 유연한 학습계획과 융통성 있는 시간 배분 필요. 

- 개성화 교육이란, 아이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도록 거들어주는 일. 즉,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


3) 체험학습

- 듀이 : '행함으로써 배운다'는 것은 그저 몸을 쓰거나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음. 

'문제 인식 - 관찰 - 가설 설정 - 가설 수정 - 행동에 의한 검증'이라는 순서를 밟는 과학적인 체험임.

- 이러한 체험학습 & 활동이 교육적 경험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진짜' 활동일 필요가 있음.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모방이어서는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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