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당신은 나를 아는가? 



이제서야, 실존주의 작품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2013년이었나,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라는 도발적 번역 논쟁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검색해서 찾아보았더니 그 논쟁은 어느정도 정리된 모양이더라. (결국 해석의 자유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얼마 전 구매한 이북으로 읽었는데, 내가 가진 버전은 문예출판사의 것이다. 문장이 워낙 짧고, 문체도 독특해서 다른 번역본이 어떨지도 궁금하다. 기회가 되면 보기로 하자. 

충격적이고 꽤나 잘 알려진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선 이렇게 써 있었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읽자마자 흥미진진했다. 좀 더 찾아보니 알베르 카뮈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을 읽으며 '역시나 첫 문장 (리드)을 뽑아내는 감각이 남다르구나.' 그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첫 문장의 역할이 다음 문장을 읽게 하는 것이라면, 본 소설에선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게 책을 단숨에 읽고 난 뒤, 나는 얼마간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짧은 이야기가 엄청나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품고 있었다. 사이코패스에서 예수까지.. 우린 ‘뫼르소'라는 한 인간의 이미지에서 온갖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중 나에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잘 알까?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나?” 

이 소설은 철저히 뫼르소의 내면 세계를 서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우린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실제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온갖 상상과 억측으로 나의 행동을 해석하지만, 그것은 진실일까? 아니,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간극 때문에 중간 중간 재미있게 읽는 대목들이 유난히 많다. 무엇보다 나로썬, 뫼르소의 솔직함에 감탄할 지경이다. 

“여자는 그냥 울고 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 몹시 이상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p.25

“우리들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상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기에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p.43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p.51

언듯보면, “아니,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있나..?"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냉담한 모습이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나중에 살인을 묻는 재판장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배심원 여러분, 이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 날에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희극 영화를 보면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p.186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 대부분은 ‘답정너’가 아닐까?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그런 우리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도 있어야 하기에. (특히나 중차대한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기에) 다시 말해, 살인을 하기 위해선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 파렴치한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린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결국, 뫼르소는 ‘살인자’로 "판정" 되었다. 부모가 죽고 난 뒤에 보여야 하는 '의례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던지자. 우린 얼마나 많은 ‘보편적 기준과 도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가두는가? 우린 정말 진실이 궁금한 것일까? 하다 못해 변호사가 이렇게 일갈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p.190

<이방인>이 발간된 1942년으로 가 보자. 당시 파리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 이었다. 기존 가치가 모두 무너지던 시대.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을까?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엄청나게 흥행 했는지도 모른다.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 ‘부조리 문학’이란 간단하다.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렇담, 지금 2016년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42년의 파리와 비슷해보이지 않는가?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요즘 청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의미없다.” 이 말은 뫼르소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재미있는 연결이었다.

“사랑은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기에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떤 생활이든 다 그게 그거며, 또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조금도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p.87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p.88

“그 순간 나는 권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쏘아도 좋고 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p.116

결론을 짓자. 지금의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뫼르소의 어머니는 죽었고, 뫼르소도 그랬다. 그리고 나도 죽고, 당신도 죽는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p.242)는 그의 말처럼 죽음은 어떤 동 떨어진 세계의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린 진정한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이방인인 그에겐 모든 것이 낯설게 보인다. 기존 세계의 질서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한번 의심해보자. 마치 영원할 것 처럼 살아가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나의 믿음들을. 우리가 가진 그 모든 신념들을 낯설게 바라보자. 그 순간, 우리는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 내 앞의 필터를 치우고, 그 순간의 자유함을 맛볼 때, 우린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그제서야 내 앞에 놓인 사람을 진짜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어떤 신념이나 제도로 판단하지 않고, 구속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 시작은 살아있다는 확실한 자각이 아닐까? 뫼르소의 마지막 절규가 우리에게 와서 꽃히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내게는 있어.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을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p.238


지난 5-6월 리뷰에 이어서 이번에는 올해 7-8월에 읽은 책 리뷰다. 리뷰를 쓰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책 뿐만 아니라 책을 읽을 때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는 점이다. 올해 여름은 참 힘들었고, 뜨거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추운 한 겨울에 리뷰를 쓰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읽은 책에는 그 책을 읽은 밤의 달빛이 섞여 있다." 그래, 책을 읽는다는 건 그런거다.  

7월 
철학을 권하다_줄스 에반스
깊은 인생_구본형
메논_플라톤
성격의 재발견_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 
퀴즈쇼_김영하

8월 
철학의 위안_알랭 드 보통
함석헌 평전_김성수 
옥수수와 나_김영하
친밀함_매튜 켈리
생산적 책읽기 50_안상헌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_권용선




2015년 7월 
38. 철학을 권하다_줄스 에반스
올해 7월의 책은 바로, <철학을 권하다>이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책과 느낌이 비슷하다. 실제로 줄스 에반스도 함께 인생학교를 만든 사람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철학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을 사랑하는 기술’ 이기에 굉장히 몰입해서 읽었다. 사실, 나도 조금만 더 내공이 쌓이면 로컬 ‘인생학교’ 버전의 심마니스쿨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이 책에는 참고로 내가 재미있게 들었던 프로그램인 ‘랜드마크 포럼’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서 더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생각에 아주 동의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순 있을거라 본다. 8월에 읽은 <철학의 위안>과 그 궤를 함께하는 책으로, 두 권 모두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비슷하면서 다른, 그런 책이다. 



참고로,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나요?'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땅, 부, 명성, 철학은 이 셋 중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이를 뒤집어보자. 철학은 이 셋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삶의 소유물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자각하게 한다. 철학자들은 '진짜 문제'와 '가짜 문제'를 구별하는 사람들이며, 진짜 철학자들일 수록 그 분별력의 수준이 높다. 그 힘을 갖고 싶다면, 삶의 본질에 닿아 살아가고 싶다면 당신도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도, 줄스 에반스처럼, 당신께 '철학을 권한다'. 


39. 깊은 인생_구본형
내가 존경하는 구본형 선생님의 책이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나는 선생님께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간접적으론 이렇게 책이나 글로.. 직접적으론 선생님의 제자분들을 만나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분, 그리고 그 삶의 향기에 많은 이들을 도취시키신 분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 책은 아주 얇다. 하지만 이야기의 깊이는 그리 얇지 않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를 원하는, 탁월함을 꿈꾸는 모든 분들께 권하고 싶은 한 권의 동화책이다. 아랫 부분은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들이다. 한번 읽어보라. 
 
"내가 사하라 사막을 여행할 때였다. 천지가 모래였다. 그때 거대한 케러벤들이 수백 마리의 낙타 떼 위에 짐을 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일시에 내 여행의 모든 목적이 충족되는 듯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가 10여 킬로나 길게 이어져 나타나는 낙타 떼와 캐러밴은 더 이상 볼거리가 되지 못했다. 경이로움은 평범함으로 바뀌었다. 시시해졌다. 그때 사막의 아름다운 모래 굴곡 사이로 황금빛 사자 한 마리가 보였다. 사자는 조용히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 마리로 족했다. 나는 지칠 줄 모르고 그 사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름다운 석양이 찾아왔고, 그 사자는 꼬리를 가볍게 칠렁이며 지는 해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우린 언제 황금빛 사자가 되는가? 우리의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위대함의 씨앗은 어느 때 발아하게 되는가? 언제 우리는 그 시점을 계기로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가?"

"나는 간디나 체 게바라처럼 크고 빛나는 별은 아니다. 나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빛나야 할 운명을 가진 별’이다. 사람은 모두 별이다. 자신의 내면에 커다란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장막으로 빛이 가려진 별들. 이 평범한 별들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냄으로써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움별, 그 별이 바로 나임에 틀림없다."

"방황을 할 때는 당장 그날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되,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묻지 말아야 한다. 미리 생각해둔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다음 세 가지는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하나는 굶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40. 메논_플라톤
사실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기 보단, 손에 잡혀서 읽은 것이 맞다.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듯, 지금 쓰는 언어가 아닌지라 이해 하긴 어려웠지만,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진실인가?”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되묻는다. 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도, 당신도, 모두 그렇다. 


41. 성격의 재발견_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 
이 책의 미덕은 ‘방대한 조사’와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지난 달,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이 다소 ‘읽기 쉽게’ 쓰기 위해서 몇몇 소중한 맥락을 생략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읽기는 다소 어렵지만’ 앞서 빼먹은 맥락을 지혜롭게 잘 배치하고 있다. 게다가 엄청난 조사에 근거했기 때문에 직업과의 연관성이나, 전공과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나의 성격유형과 지금 내가 일하는 방식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도 신기했다. 만약, 내가 원래 전공대로 엔지니어링으로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나의 강점이나 성격유형은 전혀 살릴 기회가 없었을까? 아님 그 안에서 나름의 살 길을 찾아서 지금처럼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리뷰가 있다. 링크는 여기 


42. 퀴즈쇼_김영하
이 책을 읽었을 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는 한 여름, 나에게 휴식을 선물하고자 고른 책이 바로 김영하의 <퀴즈쇼>다. 나는 평소에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다른 읽을 책들이 많은 편이기에. 하지만 여름이나 겨울에는 한 두권 꼭 챙겨 읽는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에는 왠지 소설에 손이 갔었다. 나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김영하 작가의 책은 오랫동안 읽고 싶었지만, 막상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천상 소설가다. 란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탁월한 작가의 말솜씨였다. 특히 이 부분! 대단히 공감되었던 구절이다. 리뷰를 쓰다가 중단했는데, 어서 마무리 해야겠다. 

그 순간 나는 길거리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아니다. 바로 그 정신, ‘그깟 사만원 때문에’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정신 때문에 나는 세상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다른 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만원 때문에 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사기를 치고 또 누군가는 그 사만원 때문에 해도 뜨기 전에 가게에 나와 알바를 족치는데, 오직 나만이, 이 한심한 이민수만이 ‘그깟 사만원 때문에’ 라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방값 이십구만원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천원짜리 컵라면에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먹는 주제에 말이다. (p.112)


2015년 8월
43. 철학의 위안_알랭 드 보통
8월에는 정말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유난히 행복했던 달이다. 이 책도 그 책들에 포함된다. 앞서 철학을 권하다와 비슷한 맥락이라, 올해 8월의 책에는 선정되지 못했지만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기엔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난 이 책들을 통해 나의 관심사를 알 수 있었다. 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정으로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한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을 다루고 싶고, 정말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그게 나의 관심사다. 함께 하고 싶은 분들은 누구든 함께해요. ㅋㅋ :) 


44. 함석헌 평전_김성수 
함석헌 선생님은 내 마음의 스승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시대가 가진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바로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어른다운 어른'이라고 불릴 만한 함석헌 선생님의 삶을 따라가면서, 나 역시 그러한 뜻과 의지를 닮고 싶었고, 퀘이커 교에 대한 이해도 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 분의 삶을 따라 자신의 삶도 바친 저자 ‘김성수’ 선생님의 삶도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나는 과연 무엇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을까?  


45. 옥수수와 나_김영하
지난 번 퀴즈쇼에 이어서, 소설 책이 끌리기에 이어서 본 책이다. 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는데, 모두 읽은 건 아니고 김영하 작가를 비롯한 몇몇 단편만 읽었다. 그리 인상 깊진 않았다. 기억에 남는 건 슬라보예 지젝 뿐이다. 


46. 친밀함_매튜 켈리
올해 8월의 책을 선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바로 이 책과 뒤에 나올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책 때문이다. 두 권 모두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기에, 결국 모두 선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나만의 기준인데 뭐 어떠랴. 이 책은 지금 절판이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주위에 워낙 많이 썰을 풀고 다녀서, 중고 서적으로 구한 분들이 꽤 있다. 읽고 나선 모두 하나 같이 말한다. ‘진짜 좋은 책이다’라고! 당신에게도 추천합니다. :)


하지만 정 구할 수 없다면, 참고하시길. 


47. 생산적 책읽기 50_안상헌
그야 말로 가볍게 읽은 책이다. 독서에 입문하는 사람들 대상으론 괜찮을지 모르나 나에겐 잘 맞지는 않았다. 중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책읽기는 완전한 책읽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무작정 책만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독서에 실패를 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어도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책을 읽어도 효과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책읽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책을 읽은 후 결과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런 문장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도 있다. 왜냐, 나는 그 생각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나는 생산적 책읽기 그 자체가 필요하다곤 인정하지만, 그것이 책읽기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되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일수록, 아주 비생산적, 비효율적 책읽기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깟 책 좀 결과 없이 보면 어떠랴! 그것으로 나의 지친 마음을 달랠 수만 있다면, 친구들과의 대화 꺼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난 생각한다. 
 

48.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_권용선
친밀함과 더불어 올해 8월의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를 알게 되었고, 그 다음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이어서 읽게 되었다. 굳이 벤야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쉽게 접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 아주 높게 평가하는 책이다. 인간 벤야민에 대한 호기심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던 책이자, 엄청나게 많은 문장을 초서했던 기억이 생생한 책이다. 어서 블로그에 옮겨 놓아야 하는데 말이지. ㅠ 



"그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그가 그 무엇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들에 대한 빛나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되지 않았던 그의 선택, 혹은 탁월한 위치 감각에 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장소 혹은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지식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끊임없이 위치 이동하고 시선의 위치를 바꾸며 글쓰기의 패턴을 교정하면서 매번 다른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류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 문장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들뢰즈가 말했던 ‘노마즈’의 삶.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 아닐까. 나 또한 끊임없이 이동하고, 시선을 바꾸고, 매번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하게했던 책이다. 읽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리뷰

이 책은 ‘일’에 대한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무엇보다 진로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씩 봐도 좋을 것 같다. 일처럼 많은 변화를 겪는, 겪고 있는 개념이 또 있을까? 과거에 일은 평생 직장이란 말로 대표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직장’까진 아니지만, ‘평생 직업’ 정도론 생각되었다. 하나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먹고 산다는 말, 나도 엄청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어떤가? ‘평생 직업’이란 말도 의미없게 들린다. 직장 정도 수준이 아니라 직업 그 자체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얼마나 빠른 세상인가. 나 역시 지금은 ‘유목민’에 가깝다. 2013년과 2014년 그리고 올해, 내가 머물렀던 공간은 단 한 곳도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과 기대를 언제나 함께 품고 있다. 내년엔 어디서 머물 것인가? 아니 당장 다음 달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기도 하고. 두려움과 기대는 동전의 양면이니까. 

나를 돌이켜 보면, 장래 직업을 생각해본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지? 란 의문도 생긴다. 내성적이었던, 그래서 친구들 앞에 나가서 말해본 적도 없던 나에게 누군가가 ‘넌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라고 했다고 치자.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비슷하게라도 이야기 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건 책읽기 정도 밖에 없다. 하지만 강의를 하거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주로 하는 지금의 모습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는 줄은 당연히 상상도 못했고 말이다. (허긴 지금 내 직업이 뭔지 나도 아직 모른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현재다. 지금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고, 어떤 영역을 더 배워가고 있는지. 순간 순간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방향성이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한다. 굳이 과거에 내가 하고 싶었던 직업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얽매이지 말자. 

앞으로 진로를 찾는 이에게 나는 이것 하나만 강조하고 싶다. 어떤 일을 하든, 무슨 직종에 있든, 어디에 있든 당신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그리고 ‘커넥터 - 연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본문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성취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서, 공감할 수 있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서가 아니라 소유를 늘리는 데서 말이다. 이제 돈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해서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젠 혼자만의 시간엔 무언가를 뚝딱뚝딱 생산하고, 주위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더 커다란 것을 추진하고, 또 헤어지고 하면서 살아가는 시대라는 사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경험을 밥으로 삼아 인생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 그러한 사실들만 기억해도 미래를 준비할 때 도움을 받지 않을까. 중간은 없다. 노예가 되거나, 주인이 되거나. 이 뿐이다. 마치 조르바처럼.   

그래도 흔들린다면, 찰스 핸디의 이 말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는 인간이 경험한 이래 최초로 인생을 일에 맞추는 대신, 인생에 맞춘 일을 창출할 기회가 생겼다. … 이 기회를 놓친다면 미치고 말 것이다."




목차 정리 

1. 시작하며 - 성취감이 아니면 죽음을!
- 지금 하는 그 일, 행복한가? 돈과 의미 사이의 저울질
- 직업과 자아를 최대한 일치시켜 당신이 일하는 삶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는 지침서

2. 천직을 찾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 천직 찾기의 어려움
- 너무 많은 선택지
- 너무 이른 나이
- 비과학적 선택 기준
Q. 진로를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는 세 가지 이유는? / 직업을 바꾸는데 따르는 커다란 세 가지 두려움은? / 현실에서 당신을 가로 막는 가장 힘든 도전은?

3.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하는가?-  천직 찾기의 기준 
1) 돈 - 쾌락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라. 
2) 지위 -  지위가 아니라 존경을 얻어라.
3) 의미 - 수익과 사회적 기여를 동시에. 
4) 열정 그리고
5) 재능 - 연속적 스페셜리스트가 되라. 

4. 여러 개의 자아를 상상하라. - 상상 속 천직 찾는 법
1) 선택지도 만들기  
2) 상상의 직업 나열하기 
3) 나만의 구직광고 만들기 

5.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고민하라. - 현실 속 실험 프로젝트 
1) 근본적 안식기 갖기 - 미래 직업을 위한 휴가
2) 가지치기 프로젝트 -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배우면서 정말 열정이 생기는지 확인하는 것
3) 대화 리서치 -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꿈꾸는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

6. 당신의 일은 속박인가, 자유인가. - 일 하면서 자유를 느끼는 법 
- 스스로 직업 만들기 
- 노동윤리는 잊고 게을러지기
- 소박한 삶 추구하기
- 일과 가정의 균형 맞추기 

7. 마치며 - 찾는 게 아니라 키워가는 것 How to grow a vocation
- 천직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 당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라내라 




가슴에 남은 글귀

27
‘천직’에 대한 열망은 철저히 현대에 등장한 발명품이다. 1755년에 출판된 새뮤얼 존슨의 사전에 ‘성취fullfilment’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는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대부분 실질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바빴다. 먹고사는,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 말이다. 그런 마당에 재능을 십분 활용하고 행복을 만끽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직업인지 따질 여유가 있었을까? 직업을 행복이나 자아성취의 길로 인도하는 모험으로 여기게 된 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심적 자유가 생기기 시작한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 모두 두둑한 월금과 안정성이라는 구시대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근사한 직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주택 대출금을 갚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존재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 더욱 시급하기 때문이다. 

30
직업에 대한 불안에 일조하는 것은 ‘평생직장’ 개념의 실종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20대 초반에 입사하면 그곳에서 은최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이제 그런 직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최근에는 ‘평생직업’이라는 개념조차 20세기의 유몰로 사라져가는 추세다. 직업의 평균 지속기간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는 계속 선택을 하며 살 수밖에 없다. 유목민처럼 이 직업 저 직업 떠돌며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직업 선택은 더 이상 여드름투성이 10대 청소년과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초반의 애송이 시절에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하며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평생의 딜레마가 됐다. 

54
<선택의 심리학>의 슈워츠에 따르면 선택의 역설은 첫째, 너무 많은 선택권은 자유가 아닌 무기력을 초래한다. … 둘째, 설령 무기력 상태를 극복하고 결정을 내린다 해도 선택지가 적은 경우보다 결과에 대한 만족감이 떨어진다. 역설의 주요 원인은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라며 이미 내린 결정을 후회하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0
안타깝게도 미래의 관심사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일생 동안 당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의미 있는 직업’이 무엇인지, 고등학생 때나 20대 초반부터 알고 있었는가? 그때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시기가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죠. 고작 열여섯 살에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한다니.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그 나이에 무슨 수로 알겠어요? 열여섯 살의 나와 마흔다섯의 나는 분명히 다르잖아요. 가치관과 견해, 동기가 같을 수 없는데 말이죠."

65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 이 두 가지 후회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와 저지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어느 쪽이 그나마 덜 아플까? 최근에 나온 심리연구 결과에 따르면 후자가 정신건강에 더 해롭다고 한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만큼 강력한 후회는 없다. 하지 않은 선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 속에서 커져가고, 점점 커진 후회는 인생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해보고 후회하는 일은 결과를 경험했으니 빨리 잊고 쉽게 단념할 수 있지만, ‘만약 그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이제 와서 어쩌지도 못하고 평생 마음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다. 철학자.A.C.그레일링도 비슷한 결론을 제시했다. “세상에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는 것이다.” 

82
‘직업’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다섯 가지

1) 돈을 버는 것 
2)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 
3)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4) 열정을 따르는 것 
5) 재능을 활용하는 것

이 다섯 가지는 일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의미인 동시에, 거꾸로 말하면 당신을 특정한 직업으로 이끄는 동기부여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측면인 ‘돈과 지위’는 ‘외재적 동기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 즉 기여, 열정, 재능은 일의 가치를 그 자체로 평가하는 ‘내재적 동기요인’에 해당한다. 직업을 정할 때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어떤 동기를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아야 할까? … 여기에는 정해진 답도 없고 옮고 그름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우선순위다. 자신의 우선순위를 알면 어떤 직업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므로,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85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돈에 대한 욕망이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돈벌이 자체를 경멸하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들을 비난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늘날의 돈은 지칠 줄 모르는 프로테우스처럼 인간의 변화무쌍한 소원과 다양한 욕구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따라서 사람들이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 인간에게 돈은 추상적인 행복이다."

87
심리치료사 수 거하트는 저서 <이기적인 사회>에서 이 주제에 관해 현명하게 논했다. “우리는 TV와 인터넷이 보여주는 소비행태에 맞추려고 분투하고, 그 탓에 늘 불만족에 사로잡혀 있다. 재화와 용역을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은 중독성이 있다. 아무리 넘치도록 가져도 그것을 제어할 경고 시스템이나 내재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욕망이다. 우리는 계속 더 원한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싶어 한다. … 우리는 상대적으로 더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신적인 풍요는 가지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정서적인 안전’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성취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서, 공감할 수 있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서가 아니라 소유를 늘리는 데서 말이다. 이제 돈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해서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100
어떤 직업을 택하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다. 첫 번째는 행동의 영향력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서 좌절감이 온다. 수년간 학자로서, 그리고 개발 컨설턴트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과 인권에 관한 글을 써온 나도 절감하는 문제다. 내 손끝에서 나오는 글들이 정말 그들의 생활을 좀 더 낫게 만들어주는 걸까? 내가 사는 옥스포드에서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한 영향력도 그다지 대단하지 못해서 또 다른 좌절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이런 일을 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다.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고소득을 포기해야 할까? … 최근 사회적 기업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등장했으니, 신념을 실천하는 내적인 보상과 돈을 버는 외적인 보상을 전부 손에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104
더바디샵의 아니타 로딕은 말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기업공개와 주식상장을 한 것이다.” 기업을 공개한 후, 대개의 기업이 그렇듯이 주주와 투자자들, 경영진에 대한 의무가 더바디샵의 도덕관을 좀먹기 시작했다. … 로딕이 1990년대 후반에 떠밀리다시피 CEO 자리에서 물러난 후, 더바디샵은 윤리적 경영이라는 가치관을 잃어버렸다. 현재는 로레알 그룹에 속한 채 예전의 가치관은 입도 벙긋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110
일과 놀이를 일치시키는 것은 위험하긴 해도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 평론가 팻 케인이 말했듯, 우리는 ‘자신의 세상에서 자기 자신과 열정, 열의를 가장 중요시하는 놀이 윤리’를 만들고 그에 따라 살아갈 필요가 있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도 이미 100여 년 전에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진정한 삶의 고수는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 몸과 머리, 공부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중 뭐가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탁월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게 완성할 뿐, 그것이 일인지 놀이인지는 타인의 판단에 맡긴다. 그 자신은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다."

114
일찌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가 만들어낸 신조어 ‘포트폴리오 노동자’의 본보기였다. 포트폴리오 노동자란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 포트폴리오를 개발해서 각각 파트타임으로, 그것도 가능하면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다. 일주일에 사흘은 개발 경제학자로, 나머지는 웨딩 사진작가나 온라인 서점 경영자로 일하는 것이다. 몸과 머리를 골고루 쓰고 싶다면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와 발레 교사로 시간을 나눠 일할 수도 있다. 핸디는 이것이 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실업률을 낮춰주는 현명한 생존전략이라 보았다. 

120
선택지도 만들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10분 동안 지금까지 당신이 거쳐온 직업을 지도로 그려보자. … 이제 그림을 보면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답해보자. 

1) 당신이 그린 선택지도에서 볼 때, 당신은 지금까지의 워킹 라이프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가? 2년 이상 똑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든가, 스스로 주도적으로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어쩌다 시작하게 됐다는 등 반복되는 패턴이 보일 것이다. 

2) 돈, 사회적 지위, 존중, 기여, 열정, 재능 중 당신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중요한 순서대로 순위를 매겨보자.

기여, 열정, 재능, 존중, 돈, 사회적 지위
(나의 경우, 철저하게 내재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게 나의 강점이자, 엄청난 단점이기도 하다.) 

3) 앞의 동기 중에서 미래의 직업 선택에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싶은 두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기여와 열정이다. 나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면 의미와 즐거움. 
나는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할때 나는 즐겁다.  

121
상상의 직업 나열하기. 다음의 과제를 통해 직업에 대한 당신의 모호한 생각을 좀 더 구체적인 직업 선택지로 발전시킬 수 있다. 

1) 5개의 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각각의 별에서 1년 동안 머무르면서 무엇이든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다섯 가지 직업을 생각해보자. 

내가 생각한 것 : 철학자 / 연극, 혹은 뮤지컬 배우 / 인류학자 / 코치 / 조용한 도서관 관장 

2) 이 다섯 가지 직업은 이전 과제에서 답한, 미래의 직업 선택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두 가지 동기 요소에 부합하는가? 

YES


138-140
“서른 번째 생일 때까지 1년 동안 30가지 직업에 도전해보기로 했어요. 제게 맞는 직업을 찾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쏟아붓기로 한 거죠. 요즘 저는 음악 행사의 프로그램 기획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요. 나머지 시간에는 평소 제가 동경해온 직업이나, 흥미를 가진 직업에 대해 조사하죠.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한 달만이라도 함께 일할 수 없는지 물어보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해요. 지금까지 페션 사진작가, 숙박업소 리뷰작가, 광고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고양이 호텔 사장, 유럽의회 의원, 재활용 센터 소장, 유스호스텔 메니저 같은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그들과 함꼐 일하며 그 직업을 체험해봤어요.” 그녀는 그래서 원하는 직업을 찾았을까? 아직은 아니라고 했다. 대신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할 때마다 기준을 만들었어요.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등등 제 나름의 조건이랄까, 요구사항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일을 해보니 제가 생각한 조건과 일치하고는 직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시도인지 알게 됐어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거였죠. 어떻게 보면 남자친구 사귀는 것과 비슷해요. 전 미혼이었을 때 마음속으로 남자친구의 조건을 목록으로 만들어놓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정작 그 기준에 일치하는 남자들에게서는 아무런 끌림도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해당사항이 몇 가지 안 되는 남자가 나타나 제 마음을 사로잡아버렸죠. 직업을 찾을 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어느 광고회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알게 된 사실이에요. 광고회사에서 일한다는 게, 솔직히 제 이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조건이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일에 푹 빠져버렸어요. 이리저리 생가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될수록 많은 직업과 사귀어보는 게 방법인지도 몰라요. 진정으로 푹 빠질 수 있는 직업을 만날 때까지 말이죠.” 로라는 30개 직업에 도전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고민하라’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이 교훈은 진로를 변경하는 문제에 관한 지난 30년의 모든 연구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직업 진로를 바꿀 때는 기존의 접근방식과 정반대로 다가가야 한다.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우려는 자세는 인생에 대체로 유익하지만, 직업 선택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보다는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고민하라’는 철학으로 바꿔야 한다. 지금은 안락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기거나 직업센터에서 파일을 뒤적거릴 때가 아니다. 먼저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행동하고 고민하는 좀 더 휴쾌하고 실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책만 읽고 목수가 될 수 없듯이, 실제 행동을 취하지 않고는 직업을 바꿀 수 없다. 

147
우리가 사회적 관계와 동료집단의 구조 안에서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만약 당신이 변호사이고 다른 변호사들이나 관련 전문직 종사자들과 주로 어울린다면 당신의 이상과 야망도 그들과의 교류에 좌우될 것이다. 높은 연봉이나 좋은 집, 호화스러운 휴가를 당연히 누려야 하고, 일주일에 무려 60시간씩 일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회적 환경은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세계관이라 부른, 선호도와 믿음 체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마음의 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관이 크게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사람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인생관이 비슷하고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당신은 양봉업자나 주술을 이용한 치료사 등과 교류한 적이 잇는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교류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흔들어놓는 게 아니라 더욱 강화한다. … 내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세계관은 꿈을 펼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마음의 장애물이다. …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료집단을 바꿔 자신과 전혀 다른 직업과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보는 것이다. 정말로 변호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면 변호사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는 편이 현명하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말이다. 

166
경제학자 E.F.슈마허는 <굿 워크>에서 서구사회에 널리 퍼진 '자유에의 갈망’을 시적으로 묘사한다. 

나는 끝없는 경쟁에 내 삶을 바치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닌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느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막연히 ‘자유롭고 싶어’라는 바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자유에는 당신도 알겠지만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딜레마는 다음 세 가지다. 

1) 안정적인 월급쟁이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스스로 일을 만드는 자영업을 할 것인가?
2) ‘직업적 성취’나 근면한 노동윤리를 내팽개치고 적당히 게으르게 살며 ‘삶의 성취감’을 추구할 것인가?
3) 일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바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171
20세기의 대표적인 아나키즘 연구가 콜린 워드에 따르면 자유에 대한 갈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는 저서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에서 사람들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는 어째서 집에만 돌아오면 기쁘게 삽을 들고 정원을 가꾸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가 집에 돌아와 즐거운 마음으로 정원에서 땅을 가꾸는 이유는 그곳에서는 공장 주인이나 매니저, 상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매일 똑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단조로움과 속박에서 자유로우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일할지 결정할 자유가 있다.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임진다.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기 때문에 일한다.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보스’가 되고 싶어한다. 세상에는 자기만의 적은 땅이나 가게, 사업을 남몰래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 가능성이 낮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낙관적이지 않은데도 그들은 꿈을 접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자율성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75-176
최근의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시장이 요구하면 누구든 소모품처럼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절감했다. …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자영업으로 진로를 바꾼 사람들은 대부분 피오나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막중한 책임이 따르고 불안하고 좌절도 느끼지만, 결코 예전의 월급쟁이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자유를 맛본 그들이기에 되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아울러 피오나는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창출하는,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자기고용 방식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딱 맞는 맞춤 직업을 갖고 싶어 하는 열망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다운 삶과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르네상스의 이상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에 의해 더욱 장려되었다. 

“우리에게는 인간이 경험한 이래 최초로 인생을 일에 맞추는 대신, 인생에 맞춘 일을 창출할 기회가 생겼다. … 이 기회를 놓친다면 미치고 말 것이다."
 
179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는 “인간의 본질은 새로운 경험에 있다.”고 말하며,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안전과 순응, 보신주의에 길들어서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정된 미래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험정신에 가장 해로운 것이다.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180-181
IT 애널리스트 제임스 램은 이렇게 단정한다. “모든 노동은 자발적인 노예화 형태를 띤다.” 
누구나 마음속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담아둔 채 억지로 일어나서 일터로 향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힘들게 하면서 사는 것일까?

1) 먹고살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현대 노동에 나타나는 파우스트적 거래다. 

2) 사회학자들은 17세기 유럽에서 등장한 이데올로기, 즉 열심히 일하면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개신교의 노동윤리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3) 오늘날 소리 소문 없이 유행하는 ‘일중독’ 때문일 수도 있다. … 일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을 완벽하게 마쳤다는 만족감이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자르진 않겠지’하는 안심 등 긍정적인 점에 이끌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집착하게 된다. 

183
버트런드 러셀은 일찍이 일을 줄여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은 노동이 행해지고 있으며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엄청난 폐해를 끼치고 있다.”는 주장으로 학계를 놀라게 했다. 

“누구든 4시간 이상 강제로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과학실험에, 화가는 그림 그리기에 마음껏 빠져들 수 있다. 결과물이 얼마나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굶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신경쇠약이나 피로, 소화불량이 지배하던 정신과 육체에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이 자리할 것이다."

187-188, 191
줄어든 수입을 즐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탈산업시대에 빠르게 펴져나가는 신조인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물리주의와 소비주의에 반대하고 의미 있는 존재를 추구했던 이들의 전통을 따른다.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30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직접 오두막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생활비를 줄였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연을 관찰하면서 쓴 <윌든>에서 그는 “인간의 부유함은 그가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는 것들의 수에 비례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소박한 삶을 살려면 ‘예술은 불필요함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피카소의 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달간의 모든 지출항목을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으로 구분해 자세히 기록하고 다음 달부터 ‘원하는 것’의 지출을 반으로 줄이려고 해보자. 삶의 질이 크게 떨어졌는가, 아니면 놀랄 만큼 큰 자유를 손에 넣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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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의 생애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녀의 직업은 천직의 모든 특성을 갖추었다. 일은 그녀에게 의미의 기본요소를 빠짐없이 충족시켜 주었다. 지적 재능을 활용하고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좇을 수 있었으며 방사능 치료가 암에 활용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세상이 진보하는 데 기여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 그녀의 목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직업 진로 때문에 침울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 ‘어떻게 하면 천직을 찾을 수 있는가?’의 답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의 생애는 ‘천직은 찾는 것이 아니라 키워나가는 것’이라는 답을 선사한다. 

흔히 사람들은 천진이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찾게 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자리에 누워 있다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퍼뜩 알게 된다고 말이다. ‘중국 요리책을 써라!’라는 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거처럼. … 신택을 받는 것과도 비슷한 이런 발상은 그럴듯하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에게서 책임감을 앗아갈 뿐이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삶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는 기적 같은 통찰의 순간을 거쳐서 방사능 물질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 그 목표는 쉬지 않고 과학 연구를 하는 동안 서서히 그녀의 삶으로 들어왔다. … 대부분 천직은 이렇게 나타난다. 간혹 폭발적인 깨달음의 순간으로 천직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확고해진다.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나의 목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올해 읽은 책 리뷰를 마무리 짓는 것이다. 손을 놓으려고 하면 다시 잡게 되는 목표다. 아무리 명색이 블로그인데 독서 리뷰까지 미뤄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하지만 하지 못할 핑계는 많이 생각난다. 바쁘단 핑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핑계, 독서 축제 해야 한다는 핑계, 아직 못한 일이 많다는 핑계.. 모든 핑계를 넘어서서 지금 당장 블로그 리뷰를 쓰자. 그래야 나의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 서두르자! 

5월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불안_알랭 드 보통
생태요괴전_우석훈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남자의 물건_김정운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6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2015년 5월 
25. 인생학교 -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_로먼 크르즈나릭
올해 인생학교 책을 꽤 봤다. 아주 양질의, 권할 만한 책이란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 정리가 잘 되어있다. 좋은 책이다. 아래의 글이 이 책의 지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삶의 고수는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 몸과 머리, 공부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중 뭐가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탁월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게 완성할 뿐, 그것이 일인지 놀이인지는 타인의 판단에 맡긴다. 그 자신은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다."

나 역시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살기로 마음 먹은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사람, 자신만의 천직을 찾으려는 사람,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분명 초서까지 마쳤는데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구나. 오늘 중으로 올려야겠다. 
 

26. 불안_알랭 드 보통
2015년 가장 많이 본 작가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 나에겐 알랭 드 보통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 이 사람의 책을 읽지 않았지?”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비슷한 작가다. 인생학교를 왜 만들었는지도 공감이 가고, 또 그가 기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기에. 불안이란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불안에 대해서 예전에 TED강의가 있었다. 나도 한번 포스팅 한적이 있고. 


그 내용을 면밀하게 담은 책이다. 각박한 현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워낙 에티카를 재미있게 읽어서 순위는 밀렸지만, 그래도 5월 최고의 책 중의 하나다. 


27. 생태요괴전_우석훈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팟케스트 <나는 딴따라다>에서 우석훈과 선대인씨가 말하는 걸 인상깊게 들었었다. 공감도 많이 했고.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 씨의 책이라기에, 또 가볍게 읽고 싶었던 책이 필요했기에 빌려 봤다. 솔직히 약간 짜맞춘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신자본주의로 인한 부작용들을 요괴로 설정하고,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아이디어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주제는 흥미로웠다.

나는 희안한 습관이 하나 있다. 좋은 책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빌려본 책은 가급적 초서를 하는 편이다. 왜냐면, 앞으로 그 책을 볼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초서를 했다. 초서 말미에 내가 이런 글을 적었더라. 옮겨본다.  

"그냥 내 생각. 교육도 마찬가지. 대학이나 외국의 유명한 프로그램 다 좋다. 하지만 그것에 의존한다면 결국 생태계는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생산자는 따로 존재하고, 우린 교육을 소비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희망은 로컬이다. 우리가 만든 교육을 우리가 소비하는 것.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보는 것. 조금 어설퍼도, 조금 낯설어도, 조금 불편해도 그래도 이용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꼭 필요한 자세라고 본다. 모두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고, 또 듣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이 학교가 되는 것 말이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노예다. 우리를 왕으로 떠받드려는 사람들일 수록, 기업일 수록 경계하라. 그렇게 왕이라는 기분에 취할 수록 나는 더욱 더 그들에게 예속된다. 노예가 된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내고, 그들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지배한다. 고객이라는 말에는 너는 그저 나에게 돈이나 내고 기분이나 좋아해라. 라는 말이 들어있다. 그러니 깨어있자. 우리 모두"
 

28. 에티카, 자유의 긍정의 철학_이수영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충분히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물론 No다. 하지만, 에티카에 감명받고 마음이 움직이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100% Yes!라고 외친다. 올해 나에게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해도 이 책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흠뻑 빠졌던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다. 올해 5월의 책으로 선정했다. 

나는 지나친 고전 만능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전을 일단 읽기 시작해라. 이해를 못해도 그냥 읽어내려가라. 그래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천재 그거 해봐야 뭐 좋을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이다. 내가 몰랐던 것을 인식하고,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힘이 독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티카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언저리를 살펴본 느낌이고, 그것만으로도 올해는 만족스럽다. 고전에 너무 목맬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읽을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읽게 되니 말이다. 

이 책을 필두로,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일단 니체를 좀 더 읽었고, 들뢰즈에 대한 책도 몇권 샀다. 철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삶에 대한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싶단 생각은 아주 커졌다. 스피노자가 꿈꾼 세상.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나도 그것을 함께 꿈꾼다. 나와 함께 할 사람들도 어서 이 책을 읽어보시길! 


29. 강점에 집중하라_마커스 버킹엄
강점 혁명에 이어서 읽은 책. 뭘뭘 하라! 라는 식의 책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강점 카드를 적기엔 좋은 책이었다. 강점 혁명과 셋트로 보면 괜찮을 책이나, 한권만 권한다면 역시 강점 혁명이다. 링크는 여기


30. 남자의 물건_김정운
이 책은 다행히도! 블로그에 올렸었다. 김정운 교수님의 책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재미가 있다.
그분 삶을 존경하기도 하고. 링크는 여기로


31. 딜리셔스 샌드위치_유병률
이 책은 누군가의 페북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려서 찾았다가, 한참을 보고 다시 꼽아 두었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글쓰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이 있다면 글을 써야겠구나! 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 이 책도 옮겨적었었다. 글을 쓰며 그래도 이때는 내가 꽤 부지런했었다는 사실을 재 확인한다. 링크는 여기로




2015년 6월 
32.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_이진우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했던 책이다. 꽤 길게 써 보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여기로 링크
이 당시 나는 스피노자에서 자연스럽게 니체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고, 일단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책을 골랐다. 알고보니 이진우 교수님은 한국니체학회 회장이시더라. 니체가 있었던 지역을 방문하면서 적은 에세이다. 내가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니체의 삶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사실 일반 분들께 니체 입문서로는 이후에 읽었던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더 권하고 싶다. 


33. 피터드러커 자서전_피터드러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자 상상 속 멘토, 피터 드러커 옹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다. 하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개인적으론 드러커옹의 책으론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2009년에 경영에 대해서 한참 관심이 많았을 때가 있었는데 요즘엔 인문학 책들을 더 읽다보니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이 책은 길게 리뷰했었다. 링크는 여기 
 

34. 30분에 읽는 니체_로이 잭슨
이 책은 핸드북이다. 니체에 대한 글을 쓸 때 참고한 책. 짦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다. 


35. 포트폴리오 인생_찰스 핸디



올해 6월의 책!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을 한번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찰스 핸디의 선택이 역시 옳았음을 재확인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 독립적 프리에이전트를 꿈꾸는 사람들, 1인 기업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책 역시 이미 블로그에 써 두었었다. 링크는 여기로. 


36. 작가수업_도러시아 브랜디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책. 작가수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 요즘은 결론이 명쾌한 책이 좋다.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고. 결론은 이것이다. 글을 쓰는 자가 작가다.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일단 써라. 쓰다 보면 된다. 핑계 만들지 말라. 


37.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_폴 D 티저
나는 지금까지 에니어그렘을 위주로 공부해왔다. 그러다 보니, MBTI는 비교적 소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와우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첫 시작이 이 책이다. 아주 쉬운 책이고, 누구나 MBTI를 배울 수 있게 써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에니어그램과 같은 이유이다. 
이 책의 잘못은 아니고, 절대 기질이나 성격은 책을 통해서는 온전히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배웠다. 처음에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고 생각한 MBTI를 온전히 이해한건 10월이 넘어서니까. 책으론 한계가 있다. 


38.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사사키 아타루
아. 이 책도 강렬하다. 이번 달에 읽은 책 중에서 3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 그가 말하는 어조도 특이하고,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다. 앞서 작가수업과 딜리셔스 샌드위치가 읽고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이라면, 이 책을 되려 읽고 나면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아니, 사실은 책이 아니다. 위대한 인간의 정신을 미친듯 읽고 싶어진다. 니체가 그랬고, 사사키가 그랬듯.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어디러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명령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따르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의 정보를, 즉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명령은 자기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확실한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지도 없이 이국의 숲을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시달리게 합니다. …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짦은 리뷰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그저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중 이런 멋진 문장을 만났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었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목적을 가지지 말라고? 누군가는 이 말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영어단어가 바로 For (~을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재미를 위해서, 혹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노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미있을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이 아닌 과정 추구.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반작용도 만만찮다. 모든 것엔 음과 양이 있듯) 독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과를 위해선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목적을 가진 독서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가까운 활동이지, 순수한 독서활동이라 할 수는 없다. 삶에는 일도 필요하지만, 순수 독서도 필요하기에.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글을 읽는다고 모두 독서를 하는 건 아니란 것이다. 


다음 부분도 의미있는 문장이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의 경우에도, 충분히 윤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 윤리성은 내 안의 타자, 즉 양심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아무리 종교를 가지고 있고, 열심히 믿는다 하더라도 타자성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면 윤리는 얻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종교적이면서 집단 이기주의적인 희안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타자'를 인식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성찰 그리고 독서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홀로 찬찬히 읽어 나가는 독서 활동과 성찰 활동은 그것을 가능캐 한다.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만 해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것들에 공감하고 반응하기 시작하기에.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문장을 꼽아보자.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모든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이렇게 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한번 읽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고. 나의 경우에도 중요한 책은 3번 정도 읽는다. 처음에 줄을 치면서 읽고, 두 번째는 인상 깊은 문장을 옮겨적으면서 다시 읽는다. 그때 놀라는 일도 많다. 이런 문장이 있었어? 라고. 마지막은 내가 옮겨적은 문장을 다시 읽으며 느낀 점을 적거나 리뷰를 적는다. 그렇게 3번은 읽어야 조금은 책이 나에게 들어온다는 걸 느낀다. 내가 읽는 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갈 수록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진짜 독서의 참맛이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책 조금 많이 읽는다고 우쭐했던 내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 



가슴에 남는 글귀 

p.28
프랑스의 교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자신의 독서론 ‘소설처럼’에서 ‘책을 읽다’라는 동사가 ‘꿈꾸다’ ‘사랑하다’와 함께 명령어로 바꿀 수 없는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사랑하라’ ‘꿈꾸라’하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것이 명령자의 뜻대로 실행될 수 없듯이, 읽기 싫은 사람에게 ‘읽어라’하고 명령해보았자 그저 읽는 척하거나 이내 수면제 대용으로 활용해버릴 뿐이다. 그래서 페나크는 책 읽기를 보다 친근한 일로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독자의 10가지 권리를 제창하고 있다. 

첫째, 읽지 않을 권리. (나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장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하든 읽고 싶지 않을 때는 안 읽는다.)
둘째, 건너뛰어서 읽을 권리. (새로 발간된 전공 서적을 읽을 때 내가 잘 쓰는 수법이다.)
셋째,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다.)
넷째, 연거푸 읽을 권리 (내가 좋아하는 로크카의 시집은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이제는 거의 다 외운다.)
다섯째, 손에 집히는 대로 읽을 권리 (이현세의 만화를 읽다가 갑자기 막스 베버를 읽은들 어떠랴.)
여섯째, 작중 인물과 자신을 혼동할 권리.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 햄릿이 되고 또 가끔 홍길동이 되기도 한다.)
일곱째, 읽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권리. (침대에서 읽고, 기차간에서 읽고, 수영장에서도 읽는다.) 
여덟째,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읽을 권리 (내 특기다)
아홉째, 소리 내어 읽을 권리. (흥이 겹거나 감동했을 때는 저절로 소리가 난다.)
열 번째,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책 읽기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즐거움을 혼자만의 비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p.50-51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거냐?” 이 질문은 ‘효용’이라는 관점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질문이다. 물론 책 읽기는 실용적 동기를 가진 사람에게도 쓸모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 무언인가를 배워서 응용하기 위해 책을 찾는 사람들이 독서 인구의 가장 큰 축을 이룬다. 이 책 읽기는 ‘공부’로서의 책 읽기이므로 누구에게도 박해받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궁극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또는 아내에게 핀잔 받는 책 읽기야말로 책 읽는 자에게 지고의 쾌락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4만 권이 넘는 자신의 책을 밀라노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는 말한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그가 권하는 ‘목적 없는 독서’야말로 문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다. 이런 책 읽기는 시험에도 취업에도 농사일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되면 어떤가? 그 무엇보다도 책 읽기는 쾌락으로 충만해 있지 않은가. ...

...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는 진정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을까?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거듭한 사람일수록 나중에 세상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지는 사람이 된다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깨달아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많이 한 사람일수로 목적 있는 책 읽기만 주로 한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고 더 따뜻한 것을 나는 보았다. 


p.60
책을 읽을 때는 사람이 주인이다. 읽으려는 의도와 읽는 속도, 그만두는 행위를 사람이 스스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매체는 사람보다 더 힘이 세고, 사람보다 더 빨라서 사람을 종종 압도한다. 물론 편하기는 하다. 영상의 속도에 감정을 맞춰두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일을 남의 의도에 내맡기기 쉽다. 책 읽는 일이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스스로 책을 고르고, 책장을 연다. 또 스스로 활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 때로 앞장으로 되돌아가려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또는 읽다가 팍 덮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린다. 이 모두 사람이 스스로 하는 일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일보다 귀찮고 힘이 드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래서 그만큼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p.64-7
어떻게 하면 이 ‘끔찍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서간집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는 그 해답의 작은 단서가 비친다. 로마교구의 마르티니 추기경이 던진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코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사람은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 육체의 확장인 다른 사람의 말, 사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량학살, 식인 풍습, 타자의 육체에 대한 모욕을 인정하는 문화가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 것일까요? 그 문화들은 ‘타자’의 개념을 단지 부족 공동체에만 국한시키고, ‘야만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병사들조차 이교도들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를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들을 타자에게서도 존중해야 할 필요성, 이것은 바로 천년에 걸친 인류 성장의 결실입니다."
/ 움베르트 에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 

…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상은 나치 학살자들이 ‘타자’의 범위를 자기 민족으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생긴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영상미디어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전쟁과 살인의 물화를 거부하는 일, 미디어 이벤트가 된 전쟁과 테러의 와중에도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는 일,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읽는 일이다.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만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특별한 혜택이다. ... 책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인간 유형을 만나게 해준다. 우리는 책 속에서 허락도 약속도 없이 여러 유형의 인간들과 마음대로 만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책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선에 우리를 세워준다. 


p.85
종이책은 ‘무한 에너지’를 가진 매체다. 충전시키지 않아도 되고, 콘센트에 꽂지 않아도 볼 수 있다. ... 또 책은 개인매체다. 혼자서 사용하고, 혼자서 통제하고, 혼자서 즐기는 매체다. ... 책은 내용에 제한이 없다. 즉 어떤 콘텐츠도 다 담을 수 있다. 이런 콘텐츠의 ‘다양성’이 매체로서 책이 가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의 하나다. 


p.88

이 모든 장점을 다 합쳐도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책만이 가진, 책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책이 ‘사람이 주인인 매체’라는 데 있다. 즉, 책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통제해야만 하는 매체다. 책을 읽는 일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행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행위와는 달리 ‘읽는 의지’가 필요하다.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려는 인간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만큼 쉽지 않다. ... 책 읽기가 고통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책이 독자에게 자신을 해독할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을 온전히 읽으려면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문장 전후의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 그러나 책 읽기에 따라오는 이런 고통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모든 쾌락은 고통의 시간 뒤에 온다. ... 깊은 쾌락일수록 깊은 고통을 요구한다. 


p.94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위정자가 독재자였고, 누가 민주적인 통치자였는지 한 칼에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손쉬운 독재자 판별법이 있다. 책을 불태운 자가 바로 독재자다. 네로, 진시황,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불사르는 자가 빼앗고 없애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상력, 꿈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또한 ‘남과 다른 생각’이며, 남의 말이나 남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다. 그렇다. 책을 읽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 귀찮고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더욱, 인간으로 태어난 지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책 읽기는 때로 어렵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  


p.122
다시 읽기를 주창하는 사람 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씨가 있다. 그는 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오래전에 갔던 산사를 다시 찾아가는 일과 같다. 전에는 안 보이던 빛바랜 단청이며 뒤뜰의 부도탑이 어느덧 눈에 들어온다. 몇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왜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같은 절을 여러 번 방문하면, 무엇보다도 절집 전체의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뒷산과 대웅전 처마 끝이 맞닿은 풍광이 가슴에 천천히 안겨오게 된다. 책도 이와 같다. 오래 사귄 책은 오래된 절과도 같다.


p.134
내용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책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추억만 읽으면 된다. 가끔 어딘가에서 책을 읽었던 그 행위 자체가 한 권의 책이 된다. 프루스트는 말했다. “자신이 읽은 책에는 그 책을 읽은 밤의 달빛이 섞여 있다.” 


p.146
그렇다고 고전이 필요없다는 건 아니다. 고전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큰 울림을 남긴 책이다. 사람들이 되풀이해서 읽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그 내용과 명성이 오랜 시간 전해지면서 비로소 전설이 된 책이 고전이다. 그러나 책 읽는 사람 각자에게 의미 있는 ‘고전’이 있을 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고전’은 없다. 저명한 학자나 권위자가 정한 고전 목록에 체크를 해가면서 한 권 한 권 억지로 읽는, 마치 방학 숙제와 같은 책 읽기에서 좀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p.164-6
아무도 내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책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매달리는가?”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을 바라보듯이, 책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책 읽기보다 더 즐거운 일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 오래도록 책을 읽고 있는 까닭도 책 읽기가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정치학자인 최장집 선생이 자신의 일과가 “전공 책을 읽는 시간과 비전공 책을 읽는 시간으로 나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 얼마 전 일본 문학의 두 거장인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의 ‘필담’을 읽다가 거기에 나오는 쓰지 구니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있다. 다음의 문장 중에서 ‘문학’이라는 말을 ‘책’으로 바꾸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될 듯싶다. 

“문학이란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놀아야 한다’고 해서 ‘놀이’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하나의 ‘놀이’와 같습니다.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어떤 ‘놀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관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행복’ 그 자체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무관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마냥 즐거운가. 그렇지만은 않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하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동시에 경험한다. 책을 읽는 자는 완전한 단독자로서 세계와 맞닥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읽는 일은 구원인 동시에 좌절이다.  


  1. 조아하자 2015.11.30 21:29 신고

    책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 맞는말인듯... 책을 포함해서 문화유산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라는 말도 맞는거같아요... 최근에는 IS가 문화유산을 불태워서 말많았죠.

올해 읽은 책에 대한 짧은 리뷰다. 지금 9월인데 이제 4월까지 완료했다. 다른 포스팅보다 많이 미뤄져서, 올해 안에 완성할 수 있을려나 모르겠다. 앞으론 이것보다 글은 더 짧게, 핵심만 추려서 빨리 써야겠다. 그래도 돌아보니, 3월과 4월에 그나마 책을 많이 읽었더라. 

3월
삶에 내게 말을 걸어올 때_파커 j 파머
보이지 않는 고릴라_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디자인씽킹 강의노트_리팅이 외 지음
어떻게 자기답게 사는가_연지원
거대한 사기극_이원석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드러커를 읽는다면_이와사키 나쓰미

4월
인생학교 -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_존 폴 플린토프
고민하는 힘_강상중
도산에 사는 즐거움_이황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_파커 j 파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_피에르 바야르
호모 코뮤니타스_고미숙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_마커스 버킹엄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_엄윤숙, 한정주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_요시다 타로



2015년 3월 
10.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_파커 j 파머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분, 파커 파머다. 이 책도 초서를 하고, 리뷰를 적었었다. 링크는 여기로. 나에게 정말 영향을 많이 미친 책이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파커 파머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가진 철학과 사상과 내가 가진 생각들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 계기로 퀘이커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함석헌 선생님으로 유명한 퀘이커 교는 아직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꼭 한국 모임에 나가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만큼 나에겐 큰 영향을 미친 책! 올해 3월의 책!

11. 보이지 않는 고릴라_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내가 강의 때 자주 사용하는 영상이 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그것인데, 내가 그걸 좋아하는 이유는 ‘맹점’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맹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도 모르는 그 영역.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것. 무조건적 믿음을 멀리하고, 좀 더 회의하고 탐구하는 것. 그것의 중요함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우리가 얼마나 착각하는 존재인지 알게 하는 책이다. 착각에 대한 사례가 많고 풍부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술술 잘 넘어가진 않았던 책. 

12. 디자인씽킹 강의노트_리팅이 외 지음

이맘때쯤 디자인씽킹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참고 삼아서 본 책이다. 나는 대부분의 책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런 스타일의 책은 그리 높이 평가하진 않는다. 이 책을 높이 사지 않는 이유를 보다보면, 내가 책을 고르는 이유를 알듯 하다. 1. 저자들의 경험이 일천하다. 이 책을 쓴 저자들이 정말 디자인씽킹의 대가들인지, 그런 생각이 들진 않았다. 물론 대가들만 책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을 선호한다. 개인적 선호이지만, 하여튼 깊이를 추구하는 편이다. 2. 깊이가 없으면 실용적이어야 함에도, 비교적 덜 실용적이었다. 정말 이 책을 보고 디자인씽킹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3. 사례와 분석이 부족하다. 깊이도, 실용도 떨어진다면 ‘성실함’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방대한 자료 조사를 비롯한 사례들. 예를 들면, 디자인씽킹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분석이라든지.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주관적이었다. 그냥 디자인씽킹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귀결되었다. 결론적으론, 비판적 사유가 부족한 책이 아닐까. 란 생각을 했던 책이다. 미덕도 있다. 디자인씽킹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는 점. 그 점을 제외하곤 아쉬운 점이 훨씬 컸다. 추천하지 않는 책. 

13. 어떻게 자기답게 사는가_연지원

이 책은 출간 된 책은 아니다. 와우스토리연구소 내부에서 보는 책으로, 출간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연지원 선생님의 가장 큰 장점으론, 균형감각을 들 수 있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당히 지혜로운 관점에서 자기다운 삶의 길을 제시한다. 5개의 지침이 나오는데, 함께 생각해 볼만 하다. 1) 자신만의 길이 가라. 2) 몰입과 성찰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3) 점진적으로 준비하여 과정을 즐겨라. 4) 두려움에 맞서 시행착오를 경영하라. 5) 완벽을 찾지 말고 현재를 잡아라.  

14. 거대한 사기극_이원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책이다. <긍정의 배신>이란 책을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 책의 한국 버전이라 할만 하다. 그는 자기계발을 자위행위나 마약과도 같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자조(스스로를 돕는) 사회가 아니라 공조(서로를 돕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은 다소 뻔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비판하는 자세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 역시 시크릿, 리얼리티 트렌서핑을 비롯한 꽤 많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공감한 바가 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한 책은 읽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그러한 맹목적 믿음에 대항하기 위해서 요즘들어 역사와 철학책을 보는 것이 아닐까. 요즘 나는 건강한 회의주의자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15.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드러커를 읽는다면_이와사키 나쓰미

그랬구나. 이 책을 읽었었다. 내가 이맘 때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이틀 정도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어려운 책은 보기 싫고, 가볍게 읽고 싶어서 고른 책이다. 솔직히 말해, 아플 때 봤던 책이라 별 느낌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피터드러커 옹의 말씀을 이렇게 소설책으로 보니 그저 반갑고 고마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스토리로 연결해서 대가들의 메지시를 전한 시도는 아주 좋았다. 내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고. 




2015년 4월
16. 인생학교 -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_존 폴 플린토프

이 책도 블로그에 올렸었다. 링크는 여기. 이 책은 알랭드보통으로 대표되는 ‘인생학교’ 시리즈의 일부이다. 특히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이 있다.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군인들은 그들을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 된 것은 어떠한 엄청난 정치적 결단이 아니었다. 그 원인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대한 사건들로 세상은 굴러가지 않는다. 행동하는 사람들의 힘, 그것이 세상을 움직인다. “희망이란 소파에 앉아서 당첨되기만을 꿈꾸며 손에 꽉 쥐고 있는 복권이 아니다. 희망이란 문을 깨부수는 도끼이다. 희망은 행동을 필요로 한다." 
 
17. 고민하는 힘_강상중


꽤 오래 전에 유명했던 책이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읽었다. 아직 기억 남는 것은 ‘근대성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다.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우리 모두가 고립됨을 넘어서길 원한다. 고립됨을 넘어서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한다. 그것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깨닫는 것, 그것이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와 비슷한 맥락을 읽었다. 그리고 아직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아’를 비롯한 근대적 시각이구나. 철학과 인문학은 그 너머를 제시하지만, 그것이 물질화되어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까지는 아직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올해 5월의 책!

18. 도산에 사는 즐거움_이황

와우스토리 연구소에서 함께 읽었던 책. 링크는 여기. 그렇다. 4월은 안동 여행으로 기억되는 달이다. 연구소 10기 연구원들 (와우광땡)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고, 그 여행을 앞두고 읽은 책이 이 <도산에 사는 즐거움>이다. 이 책을 읽고 한 가지 느낌 점. 사유의 깊이는 옛날 사람들을 따라가기 어렵구나 라는 것이다. 언듯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분명 예전보다 공부할 환경이나 조건은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번에 안동을 가면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호젓한 풍경 속에서 옛 선비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 느끼고, 생각했을까. 게다가 그 시대는 스마트 폰도 없지 않은가? 옛 선비들의 생각에 더욱 접근하고 싶었고, 개인적으로 지금은 서양 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40세가 넘어선 동양철학을 위주로 공부하고 싶단 기존 생각을 더욱 두터이 했다. 

19.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_파커 j 파머

이 책은 여기서 왈가 왈부 하기 보단 그냥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절판이라는 점. ㅠㅜ 파커 파머의 관련 도서들을 대신 읽으며 누군가 다시 재출간하기를 기원하는 수 밖에는 없다. 올해 5월의 책으로 하고 싶지만, 지난 달과 저자가 겹치기에 패스. 내 마음 속 최고의 책 5에 언제나 들어간다. 링크는 여기

20.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_피에르 바야르

아, 책을 꼭 읽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알게 한 책.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작의 자유를 얻는 것, 전체적 시야를 잃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꼭 책을 섬세하게 읽는 것과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기존의 내가  아무리 그래도 책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선 읽고 해야지! 라는 생각에 강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선 분명 그러한 시각에서 자유로워졌다. 특히 책을 지나치게 주의해서 읽는 행위는 되려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매우 동의하는 바다.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이라면 한번 꼭 읽어볼 만한 좋을 책. 

21. 호모 코뮤니타스_고미숙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링크는 여기로 이 책도 결국 결론은 ‘공동체, 커뮤니티’였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은 달랐다. 바로 ‘돈’이란 주제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고미숙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느끼는 점이 있다. 책을 잘 읽히게 쓰신다는 점. 나도 이런 식으로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고전들을 엮어 나가며 생각을 펼쳐나가고 싶다. 이 책의 결론을 적어본다면 이렇다. "돈은 수단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돈은 우리의 관계를 위한, 공부를 위한, 삶을 위한 수단이 될 때 빛난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공동체는 돈을 축적해선 안 된다. 서로 안에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때서야 돈이 우리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공감. 공감. 

22.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_마커스 버킹엄

분명 과거에 읽었던 책이지만, 그때는 테스트만 했지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이번에 함께 공부하면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강점을 잘 인식하게 하는 ‘언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선, 강점 세계의 바이블과 같은 책이다. 하지만 하나의 한계도 있는데, 이러한 강점 발견 작업은 단순히 책에서 주어진 테스트 도구나 독서만으론 어렵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번에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비교, 대조해 가면서 파악했고, 덕분에 더 명확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었다. 파커 파머의 말이 맞다. 혼자서 자기객관화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겐 ‘타자’란 거울이 필요하다. 이 책은 함께 해야 그 값어치를 발휘하는 책이다. 링크는 여기

23.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_엄윤숙, 한정주

4월에 안동에 여행다녀 오면서 봤던 책이다. 왠지 어울리는 책이었다. 과거에 한번 봤던 책이지만, 이런 책은 종종 가볍게 봐주면 좋다. 자세와 태도를 가지런하게 만들기에 옛 사람들의 말씀처럼 좋은 것이 없다. 

24.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_요시다 타로


쿠바의 아바나에 대한 이야기다.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쿠바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득세했던 시기에, 쿠바는 조용히, 하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시농업을 시작하는데, 그 과정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쿠바 사례는 그들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얼마 전 쿠바의 경제제재가 미국에 의해서 풀렸단 뉴스를 들었다. 과거 이런 사실을 몰랐다면 단순히 ‘잘 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되려 걱정되었다. 앞으로 그들은 앞으로 ‘식량, 에너지 독립’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읽게 된 계기

고미숙 선생님의 인문학 3종 세트가 있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여기서 호모 쿵푸스는 예전에 글을 남긴 적이 있고, (링크) 이번 기회에 호모 코뮤니타스를 읽었다. 사실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고미숙 선생님이 쓰시는 글에 가깝다. 내가 지향하는 학습 공동체도 <수유 + 너머>와 비슷하고. 하나의 주제가 있고, 그와 관련해서 많은 분들의 책을 공부하고, 인용구를 추려내고, 거기에 나만의 실천 방식을 덧붙이는 것. 그러한 편집력과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책들이 고미숙 선생님의 인문학 시리즈가 아닌가 한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좋은 발자취가 되어주시는 고마운 선생님이다. 이 책을 읽은 건 지난 4월인데, 이런 저런 바쁜 일정들 때문에 지금에서야 올리게 된다. 생각을 충분히 담고 싶은데 그럴 여유도 별로 없다. 일단 초서와 간단한 리뷰를 위주로 올려본다. 혹시, 커뮤니티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일독해 보셨음 좋겠다. 





옮겨적기

p.7
코뮤니타스란 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뜻이다. 화폐는 탄생 이래 늘 공동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폐가 공동체적 삶의 다양성을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코뮤니타스를 특별히 “화폐에 대항하는 공동체”라고 명명하였다. 화폐의 ‘식성’에 맞서 삶의 창조성을 지켜 내고자 한 것이다. 
+ 돈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코뮤니타스 즉, 공동체가 등장해서 참 재미있는 접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사실상 공동체적 삶의 다양성을 '화폐'가 먹어 치웠다는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그렇다면 '화폐'에 대항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그렇다. 공동체다. 내가 공동체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4
돈은 제도나 구조의 문제일 뿐이고, 나는 그 제도에 대해 비난과 냉소를 퍼부으면 그만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저 돈에 ‘미친’ 속물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맞다. 하지만 그건 하나하나만 주장이다. 그건 마치 ‘눈 먼’ 사람들 옆에서 자신의 ‘지독한 난시’를 정상이라고 우겨 대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적이 지닌 온갖 결함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나의 옳음이 입증된다면 그때 증명되는 건 정당성이 아니라 나의 초라함과 비겁함일 뿐이다. 니체가 말한 ‘약자 혹은 노예’의 도덕이 이런 것이리라. 
+ 돈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먹힌다. 무조건적인 비난이나 무조건적인 찬사는 옳지 않다. 우리에겐 건강한 회의주의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p.32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중세의 아퀴나스까지 “돈을 돈을 낳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이자, 상인과 고리대업자들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였다. “돈이 돈을 낳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며, 시간이 흐른 뒤 이자를 받는 것은 “신에게 속한 시간을 도둑질한 것”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서유럽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전도되었다. 비난받는 것은 게으른 화폐, 불임의 화폐들이다. 가치 증식하는 화폐, 부를 생산하는 화폐, 이자를 낳는 화폐야 말로 최고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최근에 도달한 화폐의 이미지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283쪽>
+ 올해 2015년 상반기 가장 핫 했던 책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아닐까.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결국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사람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우세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의 소득불평등 구조' 안에서 발생한 필연적 자식이란 뜻이다.  

p.58
요컨대, 우리 시대의 사회적 관계는 쇼핑과 회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뭔가 관계를 맺으려면 이 회로를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친구란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연애야말로 화폐권력의 주요 타깃이니까. 각종 ‘데이’며 이벤트에서 일상적 데이트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기승전결을 주제하는 건 어디까지나 화폐다.
+ 지금 일본에선 남자들의 1/3인가, 1/4인가가 결혼을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다. 그들의 경쟁자가 또래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경쟁자는 나이 많은 부자 아저씨들이다. 이렇게 세대 갈등은 증폭된다. 화폐가 동 시대의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p.65
“누구에게나 들리는 환청이 있다. ‘화폐의 노예’가 돼라. 그러면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19쪽>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증여란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서비스, 여자, 어린이, 춤, 축제 등”을 함께 주도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시 부족들 사이의 증여와 답례 형식을 취하는 교환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사회총체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경제적 필요 떄문이 아니라 공동체 사이의 유대 강화, 공동체적 질서 유지를 위해 교환한다는 것이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174쪽> 말하자면, 교환보다는 증여가 더 주도적인 배치인 것. 하지만 이 배치가 전도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 사이에 치명적인 거리가 생겨난다.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는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폐가 탄생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은 분리된다. 결국 돈은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절대 가치가 되고, 인간 적 가치의 다양함은 사라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런 사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현대사회의 이런 고립와 소외는 '관계의 속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지역사회 기반이었을 때,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모두 '장기적 관계'였다.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과제였다. 그것이 산업사회를 넘어오면서 회사가 생기면서, 도시가 생기면서, 장기적 관계들은 소멸되었다. 한번 보고 안 볼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건도 그렇고, 심지어 이웃도 그렇다. 오래 볼 사람이 아니니 굳이 잘 해줄 필요가 없다. 그러한 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이익이다. 그렇게 우린 돈과 물건을 '간편하게 교환하기 시작'했고, 장기적 관계의 이점들 (친밀함, 우정, 호혜성, 유대, 공동체적 질서, 집단 양심 등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원시부족에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를 만나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장기적 관계가 주를 이루는 사회에선 '교환'이 '증여'를 압도할 수가 없게 된다.

p.67
일반화된 교환은 동일화 논리이다. 원시 사회가 무엇보다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동일화 논리이다. 타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신을 자신으로 구성해 주는 것,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고유성, 스스로를 자율적 ‘우리’로 생각하는 능력 등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만인 사이의 교환은 원시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동일화는 죽음을 향한 운동인 반면, 원시 사회의 존재는 삶의 긍정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279쪽>

화폐는 그와 같은 속성을 극단화 한다. 돈이 돈을 낳는 것. 생식하는 화폐, 그것이 곧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특히 금융자본은 이런 화폐의 ‘속성’을 최고의 형태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미다스 왕의 오래된 예언까지 실현하고야 말았다. 금융자본은 한마디로 버블경제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었던 돈과 인간, 돈과 살림 사이의 최소한의 연관관계도 해채해 버렸다. (…) 이 자본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순환계를 파괴하고 잠식해 버린다. 
+ 돈의 양면성을 보자. 돈의 가장 큰 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편의성'이 아닐까? . 물건을 물물교환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만, 돈을 이용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젠 카드를 이용하지 않는가? 현금마저도 필요없어진 세상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자. 앞서 말했지만, 돈은 다양한 가치를 일렬로 줄을 세워버린다. 1000원치의 물과 1000만원의 다이아 중에 무엇이 가치있는가? 그걸 돈으로 따질 수 있는가? 하지만 돈은 그것의 순위를 메겨버린다. 그리고 돈은 돈의 가치를 대변하는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우린 카지노에 가면 돈을 칩으로 교환하는데, 마치 칩이 돈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거기선 5달러가 한나의 칩에 불과하고, 그런 식으로 세뇌당하다 보면 어느새 10개 정도의 칩은 아무렇지 않게 베팅하는 나를 볼 수 있다. 또한 돈을 통한 거래는 마치 '정당한 거래'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이정도 서비스에 이정도 돈을 지불했다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서비스 뒤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즉, 인간, 그리고 관계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차양막이 바로 돈이다. 그것이 돈의 이면이 아닐까? 

p.89
“돈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하루에 30키로미터를 걷고 나면 분명 지치고 피곤하고 배가 고플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끼니를 해결할 식당과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을 테고, 다음 날 다시 일어나 두 발로 걷기 시작할 테죠. 그렇게 하는 데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은 겸손해지는 법. 그리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비노바 바베, 버리고 행복하라 13쪽>
+ 돈의 편의성이 낳는 이면에는 '오만'도 있구나. 내가 돈이 없으면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지만, 내가 돈이 있으면 그 도움을 사려는 마음밖에 생기지 않겠구나. 그리고 세상을 이렇게 보겠지 '역시 돈이 있어야 이렇게 대접받고 살지' 그런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p.96
이들은 (임꺽정과 친구들)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먹고 마시고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을 하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만난다. 그들에겐 세상을 구하겠다는 이념이나 명분 같은 건 일체 없다. 대신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자존심,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그 어떤 권력과 제도, 관습 앞에서도 머리 숙이지 않겠다는 원초적 자존심, 오직 그것이었다. 중앙경제를 뒤흔들고, 당대 만중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하고 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집은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모든 가치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기를 부여잡으며 몸부림치기보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술들을 터득해야 하지 않을까. 
+ 어떤 권력에도, 어떤 돈에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세.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자리를 결정한다. 돈이나 권력이 그 자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p.121
브리콜라주란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에 나오는 말로 원주민들의 ‘손재주’를 뜻한다. 브리콜뢰르, 곧 장인들의 작업장에는 별 연관도 없는 재료들과 기구가 널려 있다. 하지만,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장인들은 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들에게 제멋대로 배열된 재료와 도구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다스의 손이 모든 걸 ‘화폐화’해 버린다면, 브리콜라주는 그 반대다. 최소한의 화폐로 다양한 삶을 연출해 낸다. 
+ 이번 칠보초 여름 캠프에서 새롭게 시도했던 것이 '팅커링 게임 만들기'이다. 사실상 디자인씽킹 중, '프로토타이핑'에 방점을 찍은 것인데, 아이들에게 제한적인 도구들만 주고, 게임을 만들어보게 했다. 나는 그걸 아래에 나오는 브리콜라주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게임과 놀이를 사고 소비하는 데 익숙한 아이들이, 스스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에서 진행했는데, 역시 우리 아이들은 이미 훌륭한 크리에이터였다. 처음에는 각자 하나씩 만들어보고, 나중에는 팀별 게임까지 만들었다. 우리가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는 길은 단순하다. 사지 않고, 직접 만들고 표현하면 된다. 브리콜라주의 마법은, 그 거친 창조성과 다양성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성의 회복이 달려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p.136
쉽게 말하면,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무언가를 탐구해 가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한 것이다. 어떻게? 다름 아닌 책을 통해서다. 책은 내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었다. 공부와 우정과 밥은 하나라는 것을. 솔직히 그 당시엔 공동체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 하지만, 내 욕망의 기저에는 ‘사람과 공부’라는 키워드가 뚜렷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 그래서 알게 되었다. 재산이 많은 것과 풍요롭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가난한 삶, 이것이 쇼핑과 부동산이 붙들려 있는 우리 시대 중산층의 풍경이다. 
+ 돈을 벌지만 가난하다. 왜냐, 가난은 돈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 달려있다. 

p.138-9
“경제학자들은 한 가지 유형의 일자리, 즉 봉급 근로자 유형만을 염두해 두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어떤 경제학자도 자립형 노동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 젊은이가 고용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한마디로 역겨움을 느낀다. … 우리 인간의 삶이란 고귀한 것이어서 취업시장에 나가기 위해, 또는 인생을 고용주를 위해 바치느라 커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유누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325쪽>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평생 동안 한 직장에서 쳇바퀴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 아닌가. 그리스 시대에도 노예는 임노동자, 자유인은 아무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 했다. … 애초 이걸 전제로 해서 인생 전체의 사이클을 짜는 게 옳지 않을까. … 처음에는 누구나 어긋난다. 돈을 따르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따르자니 돈이 울고. 여기서 중요한 건 무게중심이다. 존재의 무게중심! 미국의 유명한 대체의학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창의적이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돈과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 돈은 우리가 생명에너지와 바꾸고 있는 물질이다. 따라서 … 당신의 일을 생명에너지로 환산할 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계산해 본다. 고된 노동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 값비산 휴가와 빈번한 병치레를 요구한다면 결국 당신은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422-423쪽>
+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란 무엇인가? 자유인이다. 스스로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이다. 하지만 세상은 자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하기 위해서. 노동은 당연히 '직장에 다녀야 할 수 있는 것'이란 미신을 심었다. 그리고 우린 그 미신을 진실로 믿고 산다. 먹고 사는 길은 오로지 일자리 만드는 것 밖에 없다고 믿고 산다. 다른 삶을 그려볼 여유도 이미 사치라고 여긴다. 이게 메트릭스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p.144
“가까운 장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생 두서너 개씩의 직종을 바꿔 가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이 혼자 독립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보다 빈번해 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273쪽>

p.149-151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이라는 작은 저서에서 고대세계에서는 어디에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조건 등에 대해 정면으로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목적으로서의 부 자체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조건에서 좋은 인간 - 가장 좋은 시민, 친구, 부모, 아이 - 을 창조할 수 있을까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부가 어떻게 인간 창조에 기여할까(혹은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가난하면 사람은 타인의 일을 생각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풍요로우면 호화로움에 빠지게 되어버린다라는 식의, 이 시기 중국 전국시대, 초기 인더스 문명 등등 지구상의 다른 문명에서 끊임없이 논의 되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인간이 될까였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인터뷰>

어떻게 쓰는 것이 증여인가? 인간 혹은 삶을 창조하는데 써야 한다. 그럼 창조란 무엇인가? 내용이 뭐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한 말로 ‘인복’이라고 한다. 사람이 오면 더불어서 많은 것이 함께 온다. 밥과 공부,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활동, 기타 등등. 현대인은 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러니 평생 죽어라고 벌어도 항상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인복으로 해결한다면? 돈을 버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이 모인다.”<대학> … 그렇다면 노후 대책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투잡을 뛰고 각종 보험을 드느니 그 돈으로 사람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써야 하지 않을가? 이게 훨씬 더 경제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조이자 증여에 해당한다. 
+ 돈은 자기 자신의 복제가 아닌, 인간 그리고 삶을 창조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창조의 핵심은 연결성이다. 그러니 단순하다. 돈은 사람들에게 써야 한다.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소비는 옳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 하거나, 미래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소비는 틀렸다. 세상에 옳고 틀린 것은 물론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강조'하기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썼다. 

p.159
1.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한다. 
2. 재물에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색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3. 말솜씨가 뛰어나야 한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160쪽>

p.161
양자론적으로 보면 증여는 생명의 원리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선물에 대해 답례를 하지 않으면 영력의 유동이 정지해 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도 배포 큰 선물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마치 답례를 의무처럼 여겼다.” 증여의 사이클이 깨지면 “전 부족 아니 전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다는 식의 일종의 우주적인 책임감”<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64쪽>이 충만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명인은 한마디로 ‘우주적 미아’다. 오로지 착취와 스톡으로만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 그 결과, 경제는 무한증식을 향해 달려가지만, 존재는 붕괴 직전이다.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 우주에서 단 하나의 존재만 자신의 무한증식을 향해 달려간다. 바로 '암'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 우리 지구는 암을 키우고 있는가? 면역력을 키우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참 간단한데, 현실을 보면 참 어렵다 이 말이지.  

p.168-9
화폐가 탈영토화하여 선물로 변이되는 관계, 다양한 능력들이 순환하면서 새로운 화폐로 탄생되는 배치, 그것이 일상화되는 시공간이 바로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다. … 왜 다들 살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공동체를 기획하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공동체를 주로 정치적,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관성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우선은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공동체는 특별한 이념적 조직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결의체는 더더욱 아니다. 잘먹고 잘살기 위한 궁리, 화폐에 무릎 꿇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갈 궁리, 무엇보다 고독과 소외의 ‘외딴방’에서 탈주하여 즐겁고 유쾌하게 살기 위한 궁리 등등. 이런 궁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결론이 공동체다. … 한국인 10명 가운데 7명이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증의 원인은 간단하다. 소통이 단절된 탓이다. 공동체란 별 게 아니라, 바로 이 소통의 현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 공동체란 소통의 현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 다른 것들보다 이게 잴 재미있으니까. 난 그렇게 사는거다. 게다가, 이것 말고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p.173
“생명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며, 우주의 조건은 한 존재가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이 자리를 내줌으로써 그 새로운 존재들로 하여금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조한경, 저주의 몫. 239쪽>

“원조를 주는 쪽도 그렇고 받는 쪽도 그렇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 액수이다. 원조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원조를 주는 쪽에도 받는 쪽에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얼마?”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44쪽>

p.177
공동체는 축적을 지향해선 안 된다.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중요한 건 돈을 통해 삶이 구성되는 것이지, 축적, 증식하여 조직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조직은 번창하는데 구성원들은 피로와 무력감에 시달린다면? 그건 실패다. 구성원들의 멤버십과 능력의 향상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요한 건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면 사막이나 심지어 화성에 가서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없고 조직만 비대해지면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 비노바 바베는 평생을 공동체 운동을 했으면서도 늘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창했다. “큰 규모로 일을 하기 위해서 시작된 집단은 그 자체의 조직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직을 가지고는 결코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조직은 틀이며, 그것은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조직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도식에 따라서 일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직에는 정신의 자유가 없다.” <비노바 바베, 265쪽> 그렇다. 중요한 건 삶이고 자유인 것이지 조직 자체가 결코 아니다. 조직을 위해 공동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들이 잘살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네트워킹을 하다 보니 공동체가 된 것뿐이다. 이점을 결코 혼동해선 안 된다. 
+ 공동체의 속성을 잘 말하고 있다. 공동체의 특징은 '흘러가는 것'이지, '쌓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왜 욕을 먹는가? 자신 목숨의 담보를 위해 사내 유보금을 몇조를 쌓아가고만 있을 뿐 그것을 재투자하거나 사회적 책임에 쓰는 것을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사회와 떨어지는 순간 '암 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된다. 기업이 공동체가 되는 방법은 단순하다. 흘러가게 해야 한다. 지역사회로, 구성원들에게, 고객들에게 다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우리 각자의 인생이지, 조직, 기업, 국가,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삶이 잘 보존되도록 하는 사회는 결코 무너질래야 무너질 수도 없다. 제발 다른 가치들에 본질적 가치를 전도시켜선 안 된다. 


p.186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 해도 글쓰기다. 누구든 글쓰기를 해야 비로소 지식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글쓰기는 귀동 공동체의 ‘농사짓기’에 견줄 수 있다. 농사가 땅을 일궈서 먹고사는 노동이라면, 글쓰기는 ‘마음의 대지’를 일구는 노동이다. 농부들이 곡식을 수확하여 세상에 유통시키는 것처럼 지식인들도 글과 책을 통해 ‘마음의 양식’을 널리 순환시켜야 한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늘 아래 머리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법, 지식인에게 그 길은 오직 글쓰기뿐이다.
+ 갑자기 글쓰기로 맥락이 건너 뛰지만, 동의한다.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나였다. 본질은 순환임에도 그렇지 못했다. 나 자신도 하나의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p.195-6
바타유는 말한다. “우리는 부와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 없이 준다.” <저주의 몫, 69쪽> 모든 성장의 근원인 태양빛이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잉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아무 대가 없니 주는 존재에 의해 살아가는 한, 모든 존재는 우주적으로 빚을 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갚아야 한다.
+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태어나는 것에 나의 의지도, 나의 노력도 없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다. 부모의 헌신적인 기다림과 아픔이 없었다면, 그리고 태어난 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다. 요즘 특히 재원이 육아를 하면서 많이 느낀다. 그러니 그 어떤 존재도 홀로 떨어진 섬은 없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미 받았으면, 분명 갚을 것도 있다. 

p.198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다른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총은 무서워하며, 게다가 호랑이는 다른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비굴하게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버리고 행복하라, 36쪽> 이런 논리를 경제적으로 응용해 본다면, 첫째는 돈에 대한 두려움, 부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아무리 엄청난 부와 재물 앞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 그 다음엔 내가 부자여도, 아무리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가 부자가 되었는데, 그 부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멀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무외시가 아니다. 내가 그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누구도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p.200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재충전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빈 그릇이 되는 것이며, 한쪽 손을 들고 축복을 받은 후에 다른 손을 열어서 그것을 통해 그 축복이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298쪽>

p.202 
현대인들에겐 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사이의 구별도 참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신성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식의 구별도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그런 표상을 극대화시켰을 터이다.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를 신성시하는, 그래서 오직 소유만 남고 사람은 증발되어 버린 체제라면, 사회주의 체제는 역으로 ‘사회적 소유’만을 강조하다 사회도, 개인도 불행에 빠진 체제다. 자본주의와는 정반대로 소유에 대한 욕망을 단일하게 묶어 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면에서 자본에 종속된 체제였던 셈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대립시키는 한, 아무 대책이 없다. 오히려 그 경계를 무화시켜 버려야 한다.
+ 사회적 소유와 공적 소유의 변증법. 그 경계의 지혜는 무엇일까?  

p.203
“사실상 우리는 생황을 공동체 생활과 개인 생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 둘을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될 것이다. 개인의 행동들은 사회적인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사회적인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개개인과 사회를 갈라놓는 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먹는 것이나 잠을 자는 것까지도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의무로 간주한다. …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 건강하게 잘 자는 것,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나의 사회적 의무의 부분들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회에 바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의 사적인 일에 쓸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는다.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나의 모든 행동들은 내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체험이다. <비노바 바베,406쪽>
+ 이 정도 레벨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 자신을 확장시켜야 할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의 변증법이 해결이 될 듯 하다. 그렇지 않은가? 이쯤에서 켄 윌버의 무경계와 의식의 스펙트럼이 떠오른다. 

p.208
흥미로운 건 사주에 재물운이 많으면 부자가 될 거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재물은 많은데 그 재물을 감당할 명줄이 약한 경우는 재물을 좇다가 화를 입게 된다. 다시 말해 늘상 재물과 연루되긴 하는데, 그로 인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래서 부자가 되려면 일단 존재의 무게중심이 튼실해야 한다. … 허영만의 <꼴>에도 나오다시피, 격이 낮은 자가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수명이 짧아진다. 그 경우, 차라리 가난하면 오래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존재의 축을 바로잡는 훈련이나 공부가 없이 돈을 함부로 버는 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부자가 되려면 '격'이 높아야 한다. 격이 낮은 자는 액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역시 '수신'이다. 수신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만 부리다가 망하는 사례는 주위에서 많이 봤다. 나는 그러지 말자. 

p.216
비노바 바베의 입을 빌려 말하면, “진정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의 곁에서 스스로 배울 뿐이다. 태양은 누구에게도 자기 빛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의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갈 뿐” <버리고 행복하라, 31쪽>인 것처럼, 지식과 정보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 사방에 정보가 넘쳐 있고, 지식인도 넘쳐난다. 그렇다면 도처에서 배움과 가르침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지식과 대중, 공부와 일상이 나누어진 시대도 드물다. … 그래서 더더욱 교육과 화폐의 결탁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이 견고한 결합을 어떻게 해체시킬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217-8
내가 지금껏 본 것 가운데 최고로 멋진 모델 하나를 소개한다. 이 세계에선 학생이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을 찾아 천하를 떠돈다. 그리고 대학이 따로 어디에 이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만나는 그 현장이 곧 대학이다. 그러므로 대학 또한 움직인다. 방랑하는 교사, 움직이는 대학 - 이거야말로 ‘호모 코뮤니타스’의 향연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라. 벽촌의 사람들도 낯설고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이 방랑하는 ‘산니야시(성자)’의 전통이다. … 산니야시는 한 해의 대부분을 돌아다니다가, 비가 오는 우기 넉 달 동안은 한곳에 머문다. 그래서 산니야시가 머무는 마을에서는 그의 지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친다. 산니야시는 걸어다니는 대학이며, 돌아다니는 학교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학생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가르침을 베푼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신선하고 충분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지식을 얻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아이에게 젖을 빨리면서 기쁨을 느낀다. 만일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돈을 요구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 우리는 이렇게 방랑하는 교사의 전통을 다시 세워야 한다. … 모든 가정은 학교가 되어야 하며, 모든 들판은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 모든 방랑하는 산니야시는 대학교가 되어야 한다. 학생은 배우기를 원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다. 모든 마을에는 하루에 한두 시간씩 가르침을 베풀고 나머지 시간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체제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교육의 완벽한 틀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된다. <버리고, 행복하라 72-73쪽>
+ 정말 멋진 모델이다. 고 함석헌 선생님께서 과거에 매주 1번 성경공부를 하시고, 주 1-2회 강연을 하시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농사를 비롯한 밭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닐까. 나도 지식을 나누고 교류하는 모임을 열고 싶은데, 계속 돈을 생각하느라 늦었구나. 란 생각도 했다. 지식을 얻고 나누는데 돈은 생각하지 말자. 돈과 지식을 교환의 대사고 삼지 말자. 그저 증여하자. 지식을 순환하게 하자. 그것이 나에겐 먼저다. 

p.219
“지난 반 세기 동안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인간이 달에까지 갈 정도로 세상이 변했지만, 어째서 기근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91쪽> 이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이 질문은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찾았다. 그라민 은행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원조나 구호물자가 아니었다. 생존에 필요한 생산도구를 구입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들에게 절대로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 … “우리는 다른 은행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그 반대로 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에선 가난한 사람들, 그것도 천대받는 여성들에게만 돈을 빌려 준다. … 담보나 보증 같은 건 필요없다. 서류도 필요없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다. 반드시 ‘밴드’를 구성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갖은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기 때문에, 융자를 받더라도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또 실천력도 생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149쪽> 돈을 꾸려면 친구를 만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돈을 융자해주고, 또 이 융자를 통해서 우리가 거두고 있는 성공이 바로 회원들의 손에 쥐어진 구겨진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열설적이게도 돈을 매개로, 돈으로써 이루어진 우리의 소액융자는 사실상 돈과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소액융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액융자란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적 자산을 일깨우는 수단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 337쪽>
+ 소액융자의 정의 자체가 다르구만. 그가 보는 융자란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일 뿐이다. 돈이 핵심이 아니다, 관계가 핵심이고 유누스는 그것을 알고 있다. 누구와는 다르다. 

p.245

내가 만나 본 Y는 번듯하고 성실하고 시원시원해 보였다. … 그는 늘 풍족하게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젊을 때 돈을 바짝 벌고 싶다고 했다. … 단 한 번도 가난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서 훗날 자기의 자식에게 그 삶을 물려주는 게 인생 최고의 가치이고 행복이었던 거다. 번듯하고 정의로운 까닭에 위험에 처한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 하지만, 세상의 아픔, 세상의 수많은 빈자들의 아픔에 공명할 만큼 정의롭지는 못한 Y는 자신이 젊을 때 바짝 많이 벌어 놓고 싶다는 그 돈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머리도 좋지만, 한 가장의 눈물이고, 한 학생의 학비이고, 한 가족의 생활비이기도 할 그 돈이 그의 젊음의 커리어를 빛내 줄 연봉이 되리라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 가난을 모르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그의 미래의 직업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다. 그는 그 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 인지하지 못한 잘못이 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이다. 게다가 인지하면서 저지르는 잘못은 분명히 나의 것이고, 책임 또한 나의 것이다. 아니, 되려 책임은 2배가 된다. 무지에 의한 책임보다 알면서 저지르는 책임이 더 큰 이유는, 바로 그는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죄'를 한번 더 저지르기 때문이다.


  1. 조아하자 2015.08.08 15:26 신고

    프리랜서 해서 먹고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건 현실이니 이런 책에 있는 이야기를 너무 믿고 프리랜서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그런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재취업했는데 이전 직장 급여의 50%도 못받거든요.

    • 네 공감합니다. 이런 책에 있는 이야기만 믿고 뛰어드는 건, 안 될 일이지요. 책은 지식을 주고, 자신의 가능성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으로 도움을 받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책이 현실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건 인생의 경험으로 배워야 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사실, 저도 프리랜서를 하고 있지만, 그 양면성은 잘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지요. 사실, 프리랜서는 몇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해보면, 일단 '시간의 자유함' (사실상 자유는 아니지만, 비교적 자신이 하고 싶은, 원하는 일을, 우선순위를 스스로 짜서 움직인다는 점에선 자유하지요.) 그리고 '가치나 강점 살리기'가 떠오르네요. 저의 경우, 원래 공대 출신이지만 지금은 아이들 교육을 주로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일이 저에겐 가치관(교육)와 강점(코칭과 강의) 살리기에 더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엔지니어링 분야에 있었다면 이런 만족감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공통되는 키워드는 '내적 만족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강한 양은 강한 음을 부르듯, 반대되는 측면도 있지요. 많은 경우 결국 '돈'인데요, 저 역시 갑자기 수업이 없을 때도 꽤 있고, 또 언제나 불안하다는 측면에선 정말 쉽게 권하지 못할 일이긴 합니다. 게다가 말씀하신대로 프리랜서 하다가 재취업하는 경우, 더 좋은 대우를 받기도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전 현실적인 경제적 안정감이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람에겐 쉽게 프리랜서를 권하진 않습니다. 차라리 직장생활로 안정적인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좋지요. 비행기로 치면 연착륙하는 거지요. 저의 경우 다소 급작스런 프리랜서 생활을 하게 된 경우(급착륙)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생활을 몇년간 유지하고, 버티면서 배운 것 하나는 있습니다. 이게 삶이구나. 삶을 진하게 산다는 건 이런거구나. 뭐랄까요. 삶의 생생함이라고 할까요. 공부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역량을 쌓고, 갑작스런 목돈도 쥐어보고, 돈을 떼이기도 해보고, 큰 프로젝트도 했다가, 망해도 보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전 분명 직장생활 보단 좀 더 삶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경험들 속에서 반응하는 저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그리하여 저를 더 많이 알 수 있었던건 덤이구요. 어쩌면 저는 그 덤 때문에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렇게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직 저도 풋내기라 미래가 어떻게 될진 잘 모르겠네요. 결국 선택과 책임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조용한 블로그에 오셔서 가끔 댓글 달아주심에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심에)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읽은 10개의 장면 & 내가 만든 10개의 질문 

1.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concept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 개념, 임신, 그것은 세계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이며, 창조에는 잉태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품고 있는가? 


2. 
저에게는 니체의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또는 보답 없는 것을, 무명을, 음지를 말이지요. 

: 나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누구의 말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가? 


3.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 저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 때문에 입에 붙어 거의 원문 그대로 술술 나옵니다.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 한창 이런 때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읽은 것은. ...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몇 번을 읽어도 그런 것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혁명을 낳는가?   


5.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성서의 일부분을 일부러 여백이 많은 종이에 베껴 쓰게 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메모를 해가며 되풀이해서 읽기까지 했습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습니다. ...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6.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루터는 가톨릭교외에서 파견된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 논쟁을 벌입니다. ... 루터는 “얀 후스가 옳다” “교회도 잘못을 저지른다.”라는 치명적인 말을 해버립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면 말이지요. 그리하여 루터는 대이단임을 선고받습니다. ...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대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살아가는가? 양심인가? 권력인가? 또 다른 무엇인가? 


7.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권 중 한권입니다. 즉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그들은 승부에 져서 훗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걸까요? ...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0.1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 고전이란 무엇인가? 고전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8. 
아주 옛날부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도사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는 공부하여 출세하려는, 귀족계급보다는 하층계급 사람들이 말이지요.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군자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만의 아름다운 상식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귀족이면 무학이고 난폭해도 된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고귀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의 고귀함은 핏줄만이 보증합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가 되어도 로베르토 미셀스라는 독일 귀족이 “학문이야말로 혁명의 선구이자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바로 말 그대로 입니다. 이 말에 여실히 드러난 대로, 책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늘 혁명의 힘이 거처하는 곳이었습니다. 

: 혁명을 꿈꾸는 자는 누구이며, 거부하는 자는 누구인가? 혁명의 힘은 어디에 거처하고 있는가?


9.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 표현은 왜 하는가? 표현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 무엇을 읽어야 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10.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 니체가 말한 ‘번혁을 초래한 인간’은 누구인가? 당신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의 한 줄 요약
읽어라. 미쳐라. 그리고 혁명하라.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읽게 된 계기

우연히, 페북에서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보게 되었다. 읽으려고 봤더니, 절판이더라. 그래서 중고책방에 간 김에 찾아서 읽게 되었고, 내용이 그리 많지 않길래 그냥 그 자리에서 초서까지 끝내고 나왔다. 물론 책은 사서 봐야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보기도 한다. 특히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고, 굳이 재독할 필요가 없는 책들은 이렇게 잠깐 보거나, 빌려서 보고 초서해서 반납하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를 폄하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공감할 부분은 대단히 많았고, 쓸데없이 어려운 문체가 아니라 쉽게 술술 읽혔던 좋은 책이다. 게다가 나 역시 요즘 들어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달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생각에 많은 도움을 얻은 책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문화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생각하고 글을 쓰라. 이제 글쓰기는 필수다."


딜리셔스 샌드위치 / 유병률 


옮겨적기 

1.
문화경쟁력 갖추기

‘샌드위치 한국’이 ‘딜리셔스 한국’이 되려면, 관건은 문화경쟁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성장력을 높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마지막 보루는 생산성이라고 했습니다. 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노동과 자본 투입량이 같아도 산출량이 크다면 생산성이 높은 것입니다. … 문화적 언어로 소통되는 문화제국에서 생산성은 얼마나 유연한 문화 환경과 콘텐츠를 가졌느냐에 의해 좌우됩니다. 

+ 창조 경제의 핵심은 '문화'다. 중동에, 남미에 일하러 가는 것이 만사가 아니다. 높은 문화의 힘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청년들에게 일단 뭐가 되었은 '일하고 보라'는 메시지도 나는 싫어한다. 청년들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가치인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 문화적 관점이 필요하다. 일단 채워놓고 보자는 식의 '수량 위주의' 일자리 정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러한 근본적 해결책이 제시되지 못하면 결국 우리나라도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 
자기만의 연구실을 가져라

꼭 찾아내야 할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입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연구실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 그리고 미치도록 파고들 수 있는 자기만의 여유로운 밥벌이를 찾아보십시오. … 이미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자기 위치를 더 탄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든 홀로서기 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늘 연구하는 제가 필요합니다. 연구는 교수나 과학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 일에 대한 이 정의가 참 좋았다. '미치도록 파고들 수 있는 자기만의 여유로운 밥벌이' 이 단어를 보자. <미치도록 파고든다>는 말은 일에 대한 '몰입'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여유있는 밥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일에 매몰되지 않는 것. 즉, 적당한 '성찰'이 동반되는 일을 말한다. 즉, 몰입과 성찰을 동반하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한 가지만 있어선 안 된다. 몰입 없는 성찰은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성찰 없는 몰입은 '방향성'에 한계를 가진다. 우리에겐 둘 다 필요하다. 그러한 '새로운 창조'를 위해선 분명 자기만의 연구실이 필요한 법이리라.

3. 
하버드는 왜 글쓰기 교육에 올인하는가

하버드대학이 가장 신경쓰는 분야는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도 안 시켜준다. 그 이유는 바로 세계적 리더 양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 글쓰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렇게 철저히 글쓰기교육을 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대학원 리처드 라이트 교수는 <하버드 수재 1,600명의 공부법>에서 “하버드생들이 4년 동안 가장 신경쓰는 분야가 바로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대학생활은 물론 직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라고 강조한다. … 생명공학에 대한 글쓰기 가이드를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글쓰기는 다른 과학자들은 물론 대중과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과학적 발견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실험노트를 작성하고, 연구제안서를 쓰고, 연구논문 형태로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 모두가 과학적 사고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 나는 외국 대학에 대한 부러움이 별로 없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한 가지 부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글쓰기'에 대한 훈련이 그것이다. 미국도 그렇겠지만, 특히 옥스포드 대학의 경우 글쓰기와 토론 훈련을 엄청나게 시키는 것으로 안다. 그렇게 사고하는 훈련은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대학 시절에 가장 등한시 한 것이 이런 공부이고, 뒤늦게나마 시작하려는 것도 결국 '살아가면서 한번은 넘어가야 하는 숙제'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다. 왜 미리 시작하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4.
익스포스(하버드대 논증적 글쓰기 프로그램)의 목적

하버드는 익스포스(논증적 글쓰기 과정)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글쓰기와 사고력은 뗄 수가 없다. 훌륭한 사고력은 훌륭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 한 회계학 교수는 자기의 중급회계학 수업에서 비즈니스와 관련없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페이퍼를 쓰라는 숙제를 낸다. … 2007년 하버드대 낸시 소머스 교수는 국내 한 주간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하버드는 사회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익스포스를 진행하고 있다.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단순한 학습효과를 뛰어넘어, 능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지닌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을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생각을 탄생시키는 논리적 글쓰기 능력은 학문적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분야에 꼭 필요한 과제다.” 정리하면,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뿐 아니라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렇게 모질게 글쓰기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 글쓰기와 사고력은 서로가 서로를 형성한다. 높은 사고력(내용)도 높은 글쓰기 능력(형식)이 없다면 담길 수 없고, 높은 글쓰기 능력도 사고력이 없으면 담을 내용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형성한다.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 말에 비해서 글이 가지는 한 가지 강점이 더 있다. 말은 휘발성이 강하지만, 글을 어쨌든 세상에 자취가 남는다. 내가 쓴 글이 나를 지탱시킬 때가 많다. 게다가 블로그에 쓴 글은 더욱 그렇다. 일단 이렇게 살겠다고 말했고, 글로 썼다. 그 글을 많은 사람들이 봤다. 나도 흔들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내가 쓴 글을 나침반으로 삼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글이 가지는 '자취'가 내가 흔들릴 때 삶의 '지도'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5. 
리더 교육과 글쓰기

인재양성이나 리더교육을 위해 왜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할까?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보다 합리적인 사고의 정리를 위해 글쓰기보다 더 유효한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글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글로써 보다 명료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다 선명한 ‘소통’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위로 납작 짓눌리지 않고 세대구분 없이 원활하게 ‘소통’하고, 자기 삶의 키를 스스로 쥐고 살아가며,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 리더가 되려면 이렇듯 글쓰기능력이 필수적이다. 

+ 소통을 하기에도 글이 더 낫다. 누군가 21세기는 이미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이 있다던데, 나는 반대한다. 되려 21세기는 '텍스트'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스마트 폰에 최적화된 것은 바로 '글'이다. 우리는 언제나 쓰거나, 읽는다. 주로 이용하는 페북도, 뉴스도, 카톡도 결국 글이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텍스트들이 인터넷을 범람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결국 이미지도, 영상도 아닌, 글이다. 해석할 여지를 가장 많이 남겨둔다는 점에서도, 앞으로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컨텐츠는 바로 '글'이 될 것이다. 

6.
과학자과 글쓰기

과학자들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연구도 더 잘한다고 합니다. 1996년 노벨상을 받은 피터 도허티 호주 멜버른대 교수는 2005년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과학을 연구하려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과학자가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연구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생각도 명확하게 한다. 그래서 연구를 잘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과학자 정재승씨를 보면 분명 그런 것 같다. 

7. 
배움을 위한 글쓰기

지금의 글쓰기는 자기가 알지 못한 것을 찾아보게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취재는 작가나 기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일기를 쓰는 게 아닌 이상, 글 쓰는 사람은 인터넷이든 보고서든 신문이든 책이든 뒤져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관심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생각과 이질적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줍니다. 오히려 독서보다 글쓰기를 하면서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이 진짜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뭘 읽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뭘 썼는지는 기억하지 않습니까? 

+  이건 내가 글을 쓰면서 정말 경험하는 것이다. 일단 글을 쓰기 위해선,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물론 레퍼런스가 필요없는, 평소 일상의 성찰글이나 일기를 쓰는 것에는 다른 공부가 필요없다. 하지만, 주제가 있는 글쓰기를 하기 위해선, 그 주제와 관련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봐야 하고, 또 신뢰를 쌓기 위해서 다른 책도, 강의도 봐야 한다. 그렇게 글을 쓰면 공부가 많이 된다. 그건 정말 이다. 최근 그런 글쓰기를 실험해 보고자, 니체에 대한 글을 길게 한번 쓴 적이 있는데, 짦은 기간이었음에도 꽤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링크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8. 
안 쓰면 안 된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글을 잘 쓰자’는 것이 아니라, ‘안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메신서’ 하듯 글쓰기를 친숙한 도구로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통로가 블로그가 됐든, 미니홈피가 됐든, 카페가 됐든, 언론사 시민기자를 하든, 책을 쓰든, 글을 쓸 물리적 능력이 되는 모든 국민이 자기만의 ‘지식발전소’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일상적인 도구로 활용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정신능력의 두 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글쓰기라는 도구를 갖지 못했거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정신능력의 절반밖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얘기겠죠. 

+ 지식을 공유하는 통로는 다양하다. 나의 경우 주로 페이스북과 블로그다. 페북에는 일상적 글을 짦은 글을 올리고, 블로그에는 일기를 모아서 올리거나, 책을 읽고 공부한 내용을 올리거나, 칼럼 형태로 쓰거나 한다. 물론 사람들은 별로 오지 않는 작은 블로그이지만, 그래도 나만의 <지식 발전소>를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에겐 의미있는 공간이다. 가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교류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그들이 어떤 통로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로가 없으면 소통도, 교류도, 창조도 없다. 

9.
발상과 표현기법

커트 행크스는 <발상과 표현기법>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디어는 단지 생각일 뿐, 생각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점이 창의적인 사고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다. 그래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창의적인 생각을 고정시켜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재빨리 언어나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종이 위에 구체화시켜 놓아야 한다. 창의적인 생각은 완성된 상태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창조에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이디어를 흘러나오게 한 뒤 종이 위에 일단 고정시켜놓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토머스 에디슨 등 위대한 창조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생각을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 창조의 핵심은 표현이다. 표현되어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의 생각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이 꼭 다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도 '표현된 아이디어' 덕분에 생각을 공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뭔가를 꺼내고 표현해야, 나도 보고, 다른 사람도 본다. 내가 되었든, 남이 되었든 그 아이디어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위해선 일단 꺼내야 한다. 습작이라도 좋다. 아이디어는 그 자체 만으로도 대접받을 필요가 있다. 

10. 
쓰기 시작할 때, 쓰고 났을 때

사람들은 첫 한두 줄을 읽고는 재미가 없거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으면 더 이상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 처음 한 두 줄만 읽고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가장 머리 쥐어뜨는 대목이 바로 리드입니다. 한 시간 기사를 쓰면 20여 분은 처음 한두 문장에 할애하지요. 리드만 완성되면 기사의 절반 이상을 쓴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입니다. 

<생각의 탄생>에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글쓰기의 본질은 종이 위에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골라내고 버리는 데 있다.” 그러면서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위에를 비롯한 많은 작가는 편집자에게 원고가 지나치게 길어져서 유감이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양이 절반으로 줄었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소개합니다. 결국 짚어봐야 할 것은 ‘뭐 빠진 게 없나’가 아니라 ‘빼도 상관없는 단락이 없나’라는 얘기다.

+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는 나의 경우에는, 이런 기자들이 참 부럽다. 기자들은 태생부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게 할까?"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그런 흡입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 그런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일단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하지만 때가 되면 나도 품어야 할 질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선 어떤 글을 써야 할까?'라는 질문. 나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다. 


연결 고리


  1. 조아하자 2015.07.08 21:45 신고

    솔직히 저는 원하는 일 하라는 메시지에 반대해요. 제가 그 원하는 일 찾아서 했다가 인생 말아먹었거든요 ㅡㅡ 지금은 재취업해서 다시 일하고 있는데 이전보다 훨씬 못한 급여에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어요. 현실이란건 쉬운게 아니에요. 특히 그 원하는 일이 남을 돕는 일이라면 훨씬 더 어렵지요. 나 자신이 자립하지도 못하는데 남의 자립을 이야기하는 것, 솔직히 웃기잖아요? 저도 남을 돕는답시고 제가 원하는 일 찾아 나섰다가 언젠가 제 자신을 돌아보니 그 일로 제 자신이 자립할만한 돈도 못버는데 남의 자립을 이야기하고 있더라구요~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멘토들의 메시지가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착취 전략이라고 말하는데 이 주장에 어느정도 동의해요. 돈 상관 안하고 정말 좋아서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갑의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악한 마음을 먹고 착취하기도 쉽지요. 오죽하면 열정페이같은 신조어가 생겼겠어요...

    • 댓글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원하는 일을 하는 것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사이에서 괴리는 정말 아는 사람만 알죠. 언듯 보기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실제론 어마어마하지요. 남을 돕는답시고 원하는 일 찾아 나섰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도 저를 포함해 주위에서도 종종 보는 일입니다. 화영님도 고생 많이 하셨군요.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요. ㅠㅜ 다만, 전 "원하는 일을 하라"는 메시지 전부를 비판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그 메시지에는 '전제'가 있고, 그 전제를 잘 염두해 둔다면, 그리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전제에는 일단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떠오르는 데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로는. (지금까지 원치않은 일만 해 왔다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인식해보고, 한번 도전해보라. 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 보다는 한번 정도는 물길을 다른 쪽으로 열어보는 것. 그 정도는 삶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양성 측면에서도, 환기의 측면에서두요. 두번째로는 원하는 일을 하라, (단,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있지요. 그저 믿음 만으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명확한 현실인식은 원하는 일을 하고 살려는 이상주의자들 일수록 필수라고 봅니다. 자기객관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무작정 뛰쳐나오는 경우도 많이 보는데, 그런 경우는 저 역시 말리는 편입니다. 위험하지요. 마지막으로는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 라깡이 말했듯, 우린 자신의 욕망을 잘 인지하지 못하지요. 타인의 욕망,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욕망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시간이 지나면 방향성은 흐지부지해지고, 결국 '허무함, 혹은 원망'만 남지요. 내가 겨우 이거 할려고 그랬나? 라는 후회와 함께요. 저는 이러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마음에 두고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심성 없이 무작정 도전하라, 원하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책임감 없는 멘토들은 저도 싫어합니다. 열정페이도 그런 맥락에서 마찬가지구요. 그러고 보니, 저는 맹목적 이상주의자도, 맹목적 현실주의자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네요. 글을 쓰면서 저의 몇 가지가 인식된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지난 번 도입 글에 이어서, 이제는 각각 책에 대한 한줄 리뷰다.
우선 1월과 2월에 읽은 책들이다. 바로 스타트


2015년 1월 
1. 어떻게 살 것인가_유시민 

+ 나는 유시민이란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한참 유명해지고, 활동 할 당시의 나는 정치에 전혀 무관심이었으니까. 하다못해 100분 토론에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꽤 좋아하는 사람이다. 올해 초, 유시민이란 사람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자 해서 산 책이 <나의 한국현대사>였고, 빌려서 본 책이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 대해선 초서를 한 적이 있다.링크입니다.어떻게 살 것인가, 핵심은 이것이었다.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자.”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이다. 

2. 블리스, 내 삶의 신화를 찾아서_조지프 캠벨

+ 내가 진행하는 독창적인 수업 중에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가 있다. 사실 작년에 매달 심톡을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워크샵을 디자인하고, 또 진행해보는 경험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 만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기존에 있던 것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이 <자신찾>에 애정이 생겼다. 이 책은 이 워크샵을 하루짜리 워크샵으로 확장시키고자 해서 들여다 본 책이다. 조지프 캠벨이 새롭게 만든 책은 아니고, 그가 했던 말을 잘 편집해서 ‘주제’에 맞게 배열한 책이다. 하지만 꽤 재미있게 편집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세계관과 잘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 올해 1월의 책!

3. 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_이희석

+ 올해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 바로, 와우 스토리 연구소의 10기 연구원이 되는 것이다. <와우랩>이란 이희석 선생님을 필두로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커뮤니티다. '마음을 나눈 사람들의 자기실현 학습 커뮤니티’ 굳이 비교하자면, 구본형 변화연구소의 연구원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희석 선생님도 구본형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했고, 느낌도 비슷하다. 원래 나는 구본형 선생님께 한번 배워보고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 작고하시면서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와우랩과 인연이 닿아서 올해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 독서축제란 이름으로 숙제를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이 첫 책이다. 나의 합류는 다소 늦게 이루어져서 이번 책은 리뷰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분실하는 바람에 꼼꼼히 리뷰도 못 하지만, 읽는 동안은 ‘독서법’에 대한 좋은 개론서라고 느껴졌다. 

4.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_짐 로허

+ 앞서 설명한 <와우랩> 2번째 책이다. 이 책의 초서와 리뷰는 여기. 링크입니다. 일반적인 자기계발 서적과 비교했을 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특히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에너지다'라는 점에서 아주 공감했다. 충분한 ‘감정적, 신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있어야, 짦은 시간에도 몰입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 수 없다는 점. 공감한다. 마지막 장에서 언급된 목표, 현실, 행동도 유익했다. 목표는 나의 내적 가치와 자기 이익을 뛰어넘는 것. 현실 인식은 진실과 대면하고, 자기 기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행동은 지속적인 의식의 활용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 이 책에선 리츄얼의 중요성을 많이 언급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제대로 된 리츄얼이 없단 생각도 한다. 아직 일상을 가지런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시 한번 재독하고 싶다. 

5. 유태인의 공부_정현모

+ 2015년 1월은 아내의 출산이 임박한 때이자, 특히 1월 22일엔 우리 재원이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1월 중순 이후에는 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실 우린 자연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달 먼저 태어나는 사람에 결국 종합병원에서 낳아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교대역 <메디플라워>라는 곳에서 상담도 받고, 교육도 듣고 있었다. 자연출산으론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갔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다. 출산을 앞둔 분들에게 내가 많이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고. 여기서 대기하면서 읽었던 책이 <유태인의 공부>다. 마음에 드는 몇 문장이 있었다. 하지만 구입해서, 아주 몰입해서 볼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란 정도의 책이었다. 


2015년 2월
6. 희망의 인문학_얼 쇼리스

+ 2월도 갑작스런 1월 출산의 여파 때문에 많은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은 정말 의미있게 읽었다. 바로 <희망의 인문학>이다. 너무 좋게 읽어서 리뷰를 남긴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구나. 그때 쯤 정신없어서 그런가보다. 핵심은 인문학이 ‘(물질적, 정신적)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얼 쇼리스는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어찌보면 이 책은 오랜 나의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 앞에 있는 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결국 인문학이란 회의하고, 탐구하여 기존의 ‘나의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정의지만,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인문학이란 나의 공간을 뛰어넘어 ‘타자의 공간’에 합류하는 것이다.라고. 얼 쇼리스는 이를 정치적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얼 쇼리스도 동의하는 건,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찰적 사고란, 나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린 나를 이해할 수도, 서로를 이해할 수도, 사회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린 괴태의 말마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멸한다. 즉, 타자의 공간에 합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찰’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연결고리를 배웠다. 고마운 책이다. 올해 2월의 책!

7. 인생수업_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

+ 와우랩 3번째 책.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었다. 한때 열풍이 불었던 책이고, 나는 이상하게도 베스트셀러를 잘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책도 대충 봤던 거 같긴 한데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할 때는 잘 안 보다가, 시간이 지나서 뒤늦게 읽고 좋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사실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당시 내 관심사를 굳이 바꿔서까지 읽고 싶지는 않은 것일 뿐. 그랬던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 였고, 이번 <인생수업>도 그런 책이다. 읽고 나니, 참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뷰는 과거에 적었다. 링크입니다.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앞서 <어떻게 살 것인가>와 비슷하다.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8.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_진 리들로프

+ 2월에 한참 육아에 관심이 많을 때 봤던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바로 ‘안고 다녀라’라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예콰이족의 경우, 아이를 항상 안고 다닌다. 그렇게 언제나 아이를 안고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 그럴 경우 자라서도 우리가 걱정하는 응석받이가 되기보단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라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육아법이라고 말하는 책이 이 책이다. 물론, 소수 민족의 육아법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사회와 너무나 다른 맥락에 있기 때문에 이것만이 육아의 진리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분명 우리 사회는 주 양육자와 아이의 밀착을 너무나 관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100% 밀착이 너무나 힘든 건 알지만, 이런 책들로 인해 적어도 20-30%에서 40-50%까지라도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건 의미있는 책이 아닐까? 

9. 올바른 생계수단에 대하여_크리슈나무르티

크리슈나무르티의 엄청난 책이다. 인도의 성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높게 치는 사람이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오쇼 라즈니쉬를 비롯한 많은 성자들은 가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뿐만 아니라 드물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별의 교단 해체를 선언한,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권력을 뒤고 하고, ‘진리는 네 안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 분이 썼던 글을 옮겨 적은게 있는데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다. 조만간 올려야 겠다. 하나의 문답만 올려보도록 하겠다. 크리슈나무르티의 핵심적 사상을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기에. 

Q. 어쨌거나 문제는 제가 어떻게 보통의 평균적인 평범한 사람은 안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A. 내가 한마디 더 하자면 이렇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어떻게”라고 말하지 말아라. 어떻게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와서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보호막이나 어떤 체계가 누군가를 끌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너는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고, 네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네 고유한 행위와 고유의 사고력을, 그리하여 네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라고 묻는다는 것은 네가 중고품 인간으로 되었다는 뜻이거든. 그것은 시야의 전체적인 감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본질적인 정직성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남아 있는 길을, 그리하여 지금의 이 모습을 넘어서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거지.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라고 묻지 말아요. 

물론 이것은 심리적인 영역에서 하는 말이다. 자동차를 조립한다거나 컴퓨터를 만드는 문제등에서는 반드시 “어떻게” 라고 물어봐야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서라도 배워야만 해. 그러나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문제에서, 그 원천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행위들을 알아채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라보고,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그 본성을, 그 근원을 관찰하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는 것이 없어야만 한단 말이다. 관찰하고 바라보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인간은 책으로부터라거나 또는 어떤 심리학자로부터라거나, 혹은 복잡하고 교활하며 박식한 학자나 교수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배우는 점이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이게 정말로 어렵단다, 얘야. 이게 너를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을지도 몰라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지, 소위 유혹이라고 불리는 것들 말이다. 생물학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하는 따위들 말이지. 그리고도 네 자신은 사회의 잔인성으로 하여 생매장이 될 지도 몰라요. 당연히 네 스스로 홀로 우뚝 서야 하지만, 그것은 강제나 의도나 또는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와 내면의 거짓들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에요. 감정이나 희망이나 하는 것들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네가 거짓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알아채기 시작할 것이고, 지성이 생겨나겠지. 네가 네 스스로에게 빛이 되어야만 하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이지.

1983년 5월 30일
브록우드 파크

크리슈나무르티가 자기 자신에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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