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책읽기 습관이 바뀐 것이 있다. 바로 ‘E-BOOK’이다. 
리디북스를 사용한지는 꽤 되었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진 못했었다. 
아직 사놓고 못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고, 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부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읽는 맛이나 책장을 넘기는 맛은 좀 떨어지지만, 여러모로 편의성이나 비용면에서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티를 안내고 책을 볼 수가 있다. 

평일에는 내 시간이 많다. 출퇴근을 하면서 주로 업무와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다. 그땐 거의 종이책을 본다. 
하지만, 주말에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다. 에버랜드를 간다거나, 쇼핑몰을 간다거나 할 때, 너무 티 나게 책을 읽으면 아내가 눈치를 줬다. ㅋㅋ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지, 충실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일견 동의했다. 그래서 이젠 스마트폰으로 책을 본다. 
잠깐씩 슬쩍슬쩍 보긴 이게 좋다. 특히 주말엔 어려운 책 보단, 가급적 쉬운 책을 보고자 하는데. 그래서 이북은 더 부담이 없다. 

지난 주말에는 생각보다 자투리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책 한권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기록해 놓은 글인데, 게으른 탓에 지금에서야 올린다. 
읽은 책은 ‘서민적 글쓰기’라는 글쓰기 책이다. 솔직히 털어 놓자면, 대단히 사고 싶어했던 책은 아니다. 
그저 리디북스에서 이벤트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쓱 사버린 책이다. 리디북스가 그런 식으로 뽐뿌질을 참 잘한다. 
오늘만 특가! 50% 할인! 그런 식의 마케팅 문구에 쉽게 낚이곤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샀다. 

한 가지 이성적 이유가 있다면, 서민 작가의 칼럼을 꽤 재미있게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유머러스하고, 촌철살인적 글쓰기 실력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읽은 지 5분만에 바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10년간 이어진 글쓰기 지옥훈련 덕분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노트와 볼펜을 가지고 다니며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적었다. 
서른 살에 첫 소설책을 내긴 하지만, 서른이 될 때까지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글을 잘 쓸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라고. 

주위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왜 중간에 포기 하냐면, 그 정도의 이유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글쓰기의 꿈을 접는다. 한 달 정도는 의욕적으로 글을 써도, 몇 년씩 그 열정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왜일까? 글쓰기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던 나와 달리, 그들에게는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한다. 여자친구는 사귀다 헤어지면 끝이지만, 글쓰기 실력은 한번 갖춰 놓으면 평생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서문에서, 서민적 글쓰기)

그렇다. 그는 ‘절실했다.’ 왜냐면 그것은 그의 표현하고자 하는, 인정받고자 하는 ‘자아의 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가장 공감되었다. 그 외의 부분은 솔직히 아주 훌륭한 ‘글쓰기 책’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일단 쓰고 보는 작가의 정신과 자세는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서민 작가처럼, 나도 그렇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지났다. 
누구보다 조용히 살아왔던 나는 20대 중반이 넘어서 조금씩 ‘내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은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2009년만 해도, 나는 그저 생각만 가득하고, 행동할지 모르는, 게다가 말까지 더듬는 쫄보였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나는 꽤 나를 표현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하다. 말보다 글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갈망이 강해진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 
나는 정말 글을 잘 쓰고 싶은걸까? 그렇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 시기에, 이 책은 나에게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자는 마음이 들게 한다. 적절한 시기에 가볍게 글을 읽었다. 
일주일에 2개의 글을 쓰기로, 조용히 마음 먹는다. 


67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요약하는 능력,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훈련은 … 교양인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231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체가 화려한다’가 아니라, 글에 ‘자기 생각을 담고 있는가’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좋은 글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233

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만든 사람은 비록 아이라 하더라도 주변 상황(회유나 조종)에 흔들리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쓰는 리뷰입니다.

지난 번에 '왜 책을 읽는가?'라는 주제로 써 본적이 있는데요. 이번 주제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주제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방법과 습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책을 읽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다시 말해, 독서법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대단치는 않습니다. 그저  '조금 더 잘 읽기 위한' 저만의 고민과 노력을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댓글도 남겨 주시고, 자극도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책 선정이 어려웠습니다. 워낙 다양한 곳에서 글을 빌려왔기에 마땅한 책은 없지만, 책을 읽는 법과 관련해서 고민하시는 분들께 하나의 책을 추천 드립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지식 경영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독서 태도와 방법을 정리한 책,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입니다.    




1. 책을 읽기 전에 : 일단 사고, 가지고 다니기 

자문해 봅니다. "내 독서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 시기'는 언제일까?" 지난 번 글에서 말씀 드렸던 '군대 시절'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시기는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입니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제 인생에서 별 도움이 안 되었나 봅니다. ;;) 당시 저는 전공이 아닌,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제 지식과 경험에 금새 좌절합니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1년에 100권.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책을 읽었습니다. 기존까지는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읽는 '취미 독서'를 했다면, 그 시점부턴 목적이 분명한 '전략 독서'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평소 읽지 않던 경제 경영, 마케팅, 사회학, 미래학 등의 서적을 접합니다. 무엇보다도, 제 독서 생활에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 하게 됩니다. 책을 한권 한권 구입하게 된 것이죠. 


"이제부터는 평생을 살면서 5~6번은 직업을 바꿔야 한다. 대학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독서밖에는 살아나갈 길이 없다. 취미독서가 아니라 기획독서다. 지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전략독서를 해야 한다. 지식의 지평을 넓혀가야 언젠가 나도 모르게 뛰어들게 된다."  (최재천)

책을 왜 구입해야 할까요? 무언가를 산다는 것은 그 만큼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경험에 의하면, 책을 사지 않고 좋은 독서가가 되는 길은 요원합니다. 책을 구입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첫 번째, 좋은 책을 고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책을 선택할 때는 ‘기준’이 없습니다. 뭐가 좋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차곡차곡 힘들게 모든 내 돈, 치킨을 사먹을 수도 있는 그 돈을 가지고 책을 사다보면 알게 됩니다. "이 책을 산건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어!" 빌려 읽으며 단순히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것과 피같은 내 돈이 나가는 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선구안은 그렇게 길러집니다.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선, 그만큼의 투자도 필요한 법이죠.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말라. 책이 많이 비싸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값은 싼 편이다.  책 한 권에 들어있는 정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입수하려고 한다면 그 몇 십 배, 몇 백 배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다치바나 다카시의 작업실


책을 사면 얻는 두 번째, 보고 싶을 때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책, 나의 지평을 넓혀주는 책, 깊은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책. 이런 책들은 한번 읽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저 역시 무작정 많이 읽던 시기를 지나, 요즘에는 '좋은 책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단 것을 느끼고 있는데요. 책을 사지 않으면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 돈을 아껴서라도 책을 사시길 권합니다. 물론, 이왕 구입할 거라면 리브로에서 :) 

"혹시 예전에 읽었던 책이 문득 생각나서 다시 한번 읽어본 경험이 있는가? 그것은 지적생활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어떤 책이 읽고 싶어졌을 때 그 책이 곁에 없어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귀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다는 거은 둥뇌에 그 책이 담고 있는 지식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몸이 어떤 영양소를 필요로 해서 음식을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 읽은 책이라도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기 쉽상이다. 하지만 좋은 책은 희미하게라도 기억에 남아 있으면서 가끔식 생각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찾아 읽은 책들은 나의 지적생산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귀한 보물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책은 반드시 나만의 장서로 소장하며 반복해서 읽는 것이 좋다." (지적생활의 발견) 

그 다음 질문이 이어집니다. “좋은 책을 사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주 쉽습니다. “책을 가지고 다니면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이라, 고사성어를 하나 가지고 오겠습니다. 예전에 오나라에 여몽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무공을 세워서 장군이 되었으나, 학식이 부족하여 손권이 책을 권합니다. 그러나 여몽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었고, 손권은 후한 광무제의 예를 들며 “손에 책을 들고 다녀라. 그럼 책을 읽게 될 거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수불석권'이란 고사가 등장합니다.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독서 습관의 두 번째는 책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투리 시간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늘부터 난 달라지겠어!’하고 무리하게 책을 읽다가 이틀만에 포기하는 것보다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저 내 몸에서 책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워 졌다고 느낄 때, 한자 한자 읽어 나가면 됩니다. 그것이 책을 펴기 전 가져야 할 습관입니다. 정리하면, ‘책을 가치있게 여기고, 먼저 친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 책을 펼치고 나서 : 펜을 들고, 핵심 구조를 그리기  

앞서 '책 구입'의 중요성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사지 않습니다. 뉴스를 찾아보니, 작년 한 가구가 책을 사는데 한달 평균 1만 5천원을 썼다고 합니다. 요즘 책 한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입니다. 문제는 매년 ‘역대 최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비슷한 가격대의  '치킨’ 보다 대접받지 못하는 사실에 의문이 남습니다. 어쩌면 아직 책이 주는 가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을 지으려는 사람은 먼저 독서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예를 들어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석자의 흙을 파서 축축한 기운을 만나게 되면또 더 파서 여섯 자 깊이에 이르러 그 탁한 물을 퍼낸다또 파서 아홉 자의 샘물에 이르러서야 달고 맑은 물을 길어낸다마침내 물을 끌어올려 천천히 음미해 보면그 자연의 맛이 그저 물이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또다시 배불리 마셔 그 정기가 오장육부와 피부에 젖어듬을 느낀다그런 뒤에 이를 펴서 글로 짓는다이는 마치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짓고희생을 삶고고기를 익히며또 이것으로 옷을 빨고땅에 물을 주어 어디든지 쓰지 못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고작 석 자 아래의 젖은 흙을 가져다가 부엌 아궁이의 부서진 모서리나 바르면서 우물을 판 보람으로 여기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p.29 다산 선생의 지식경영법)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위백규는 독서의 정수를 맑은 물에 비유합니다. 책에서 가치있는 지식을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은, 이를 어느 곳에서나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대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슬슬 읽어내며 얻은 탁한 물을 보고, 쓸모 없다고 단정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책의 정수를 진정 맛보기 위해선,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잘' 읽어야 합니다. 그냥이 아니라, 좀 더 능동적으로, ‘질문을 품고’  읽는 것이 독서의 시작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준비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광펜'입니다. 저에게 형광펜은 곧 '질문'입니다. 처음 형광펜을 들았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아찔한 기억인데, 저는 정말 제가 바보인줄 알았습니다. 한 3개월 정도 펜을 들고 멍하니 책을 보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중요한 문장에 줄을 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행위가 처음엔 엄청나게 어려웠습니다. 책을 읽고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지 않다면, 아직 책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잘 읽는다는 것은 숙련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게 하면 책 읽는 능력이 겉으로 드러난다. 즉 밑줄 그은 곳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내용을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핵심이 아닌 부분에만 밑줄이 쳐져 있다면 독서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 (P.38 독서력)

"밑줄을 긋는 일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책 속의 내용과 연결시키는 행동이다. 단지 책을 읽기만 하면 아무 변화가 없기에 독서는 수동적인 행위가 되기 쉽다. 어디에 밑줄을 그을지 생각하면서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독서는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실제로 밑줄을 그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판단이 거기에 들어가고 남기 때문이다. ... 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책 속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문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단 한 줄도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이 없다면 그 책은 자신과 인연이 없는 것이다."  (P.147 독서력)

여러분은 책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나요? 저에겐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핵심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입니다. 책의 핵심을 간파하기 위해선, 일단 그 구조를 추려내는 힘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해보고 싶은 분들께 권하는 활동이 있습니다. 바로 '구조도 그리기'입니다. 특히 소설이나 에세이 보다는 경제 경영 서적이나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 도움이 됩니다. 단순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한장으로 표현한다면?"란 질문에 답하면 됩니다. 핵심 요소를 추리고, 관계도를 그리는 활동입니다. 쉽지 않지만,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저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매주 1권씩 책을 읽고 결과물을 남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을 익힐 수 있습니다. 당시 훈련했던 것이 지금도 새로운 기획을 하거나, 과정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당시에 몇 가지 예시를 찾아보았는데요. 아주 유치하고 지저분하긴 한데, 몇 장 남아있네요. 부끄럽지만, 그냥 공유합니다. 

서비스 디자인 교과서 / 전략적 공부기술


노는 만큼 성공한다 (김정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줄을 긋고, 구조도를 그려보자.’ 그렇게 읽은 책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필요 시 언제든 꺼내쓸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가치를 느끼면 책을 사는데 돈이 아깝지 않게 됩니다. 독서가가 되는 길에 접어든 것이죠. 

능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을 던지며 읽어 내려가라” 


3. 책을 덮고 해야 할일 : 함께 읽고, 글을 쓰기 

처음 책을 읽을 때, 분명한 목표는 도움이 됩니다. '책을 좀 읽은 것 같은’ 느낌보다는 ‘실제로 읽은 기록’을 믿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죠. 대부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니까요. 앞서 말했듯 제 첫 목표는 1년에 100권 읽기였습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개인적으로 독서 습관을 만드는 초기에는 질적 독서 보단, 양적 독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어려운 책을 힘겹게 보는 것보단, 관심있는 책을 즐겁게 쭉 읽어나가는 것이 습관을 만드는 데 많이 도움 되었습니다.

간혹 “책 읽을 시간이 어디있어요?”라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건 관점이 좀 다릅니다. 시간은 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나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위해서 시간을 만드는 것’이 맞습니다. 저 역시 평소엔 시간이 없어서 주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합니다. 집에서 회사까지 보통 1시간이 걸리는데, 그렇게 하루 2시간씩 읽을 수 있습니다. 보통 1시간에 50-60페이지 정도 읽게 되는데요. 일주일에 이론상 500-600페이지가 가능합니다. 주말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일주일에 1권은 가능하더군요. 결혼한 지금은 어렵지만, 주말에 시간이 있는 분들은 카페에 가보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책 읽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이 없는 사람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추천하는 것은 ‘함께 읽기’ 그리고 ‘글쓰기’입니다. 독서 모임에 참가해 보신 분들이 계신가요? 책을 읽고 함께 생각을 교류하는 활동은 독서를 습관화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저 역시 2010년부터 크고 작은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서로 좋은 책을 권할 수 있어서 좋고, 또 관계 그 자체가 기분좋은 자극이 됩니다. 저희 회사 독서 모임에 참여한지도 10개월 가까이 되는데요. 개인적으론 정말 즐겁고 의미있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의 궁극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최근 인기 많았던 책이죠. ‘대통령의 글쓰기’를 보면, 역대 대통령도 독후 글쓰기를 강조합니다. 

“김대통령은 독서의 완결이란 읽은 책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라고 했다. 노 대통령 역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과 영감을 정책에 반영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책으로 집대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대통령의 글쓰기) 

책을 정리하기 전엔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이건 중요합니다. 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잘쓴 글과 못쓴 글은 없습니다. 안쓴 글과 쓴글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저도 일단 씁니다. 그렇게 조금씩 쓴 글을 블로그나 커뮤니티를 통해서 공유하는 것도 좋습니다. 응원도 되고, 또 자극도 되거든요. 정리하자면 '함께 읽고, 나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 정도가 되겠네요. 

지금까지 2부에 걸쳐서 독서 방법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눠봤습니다. 지금까지 읽다보면 분명 어떤 분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소설책이나, 인문학 책을 읽는데, 그렇게 굳이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읽어야 하나요? 그냥 즐겁게 읽으면 안 되나요? 저는 답변 드립니다. ‘그 또한 완벽한 독서입니다.'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는 말한다. “배우기 위해, 즐거워지고 싶어서,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연설을 하기 위해, 회상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아무런 목적 없이 독서를 해야 한다. 현재를 읽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 독서하라.”

이런 독서는 중요합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지혜는 균형에 있죠. 지금까지 그렇게만 책을 읽어왔던 분들껜 '전략적 독서'도 쓱 권해봅니다. 반대로 늘 효율성에 입각한 독서를 한 분들껜 '목적 없이 읽기 좋은' 소설이나 인문학 책을 권합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나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 그것이 제가 책을 읽어나가는 방식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분들을 위한 3줄 정리

1. 책 읽기의 시작은 책을 사고, 일단 들고 다녀보는 것입니다. 장기적으론, 그것이 좋습니다.
2. 책을 읽을 땐, 펜을 들고 핵심 구조를 그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좀 더 능동적 자세를 취해보는 것이죠.
3. 책을 덮고 나선, 함께 토론하고 글을 써보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를 통해 자극받는 것이죠 :)




WHY
“겨울에는 인문학을 읽어야 하니까 :)” 

INSIGHT
“길버트나 윌러스 둘 중 누가 그들 사이에 놓인 간극을 메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월러스가 취한 니체적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한 행동 주체이다. … 이와 반대로 길버트는 루터의 후기 견해를 따른다. 길버트에 따르면, 우리는 신의 신성한 의지를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일 뿐이다. … 이 둘 사이에 또 어떤 것이 있을까?” (p.104)

“계몽주의에서는 독립을 위해 애쓰는 모든 삶의 방식이 칭송을 받는다. 자율적 존재로서 스스로 만든 법만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자기 충족성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천국의 기쁨을 물리친다는 것은 곧 죄의 본질에 다름 아니었다.” (p.227)

기독교가 길을 잃은 것은 그 기본적 방향성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방향 전환 때문이라는 비판이 이 속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가 자신만이 참된 신앙이라 고집할수록, 그리고 전체적이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진리라고 주장할수록, 그것은 더욱 고립에 빠질 것이고 공동체 정신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초월적이고 신성한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여기 지상에 이미 주어져 있는 공동체적 행동과 다양한 선들은 포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설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구분하는 기예는 어떻게 계발할 수 있을까?” “광적인 지도자의 전체주의적인 선동에 휩쓸려본 경험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의 위험하고 황폐한 결과를 경험할 때만, 따를 만한 지도자와 배척해야 할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p.372-373)

REVIEW (라기 보단 정리). 
고대 그리스는 ‘만신전’이 존재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하나의 원리는 없었다. 그저 각기의 탁월함을 추구했을 뿐.
중세에 들어서, 우주적 위계 질서가 잡힌다. 그리고 모든 의미는 신에게서 나온다. 다른 어떤 가치도 신 앞에선 무가치하다. 
데카르트는 의미의 재설정자다. 모든 행위의 주체는 ‘자아’가 된다. 호메로스가 말했던 ‘경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답은 무엇일까? 

모비딕의 다신주의, 이는 다양한 의미와 진리로 구성되는 세계다.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 그것을 이 책은 제안한다. 


안녕하세요?
이번 달 리뷰를 남깁니다. 

제가 주기적으로 글을 공유하다보니, 그리고 이런저런 독서모임도 참석하다 보니, 종종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책은 주로 언제 읽나요?”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르나요?” “책은 왜 읽나요?” 등등. 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워낙 좋아하기에 신나게 대답하지만, 지금까지 제 의견을 명확하게 정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책 읽기로 글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독서’를 주제로 선정하자, 제 깊은 곳에 이상한 욕심이 고개를 쳐듭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굳이 ‘잘 써야겠다’는 부담감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는데요. 그래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쓸 수 있었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의 욕심이 저를 자극합니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저를 압박하지 않도록,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한번 써 보겠습니다. 글을 쓰며 독서와 관련한 다양한 책을 인용하게 되었고 딱히 대표할 만한 책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담고 있기에, 기준이 되는 책을 선정했습니다. 바로,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 입니다.

PS : 참고로, 글을 쓰다보니 다소 길어지고 말았네요. 그래서 1부와 2부로 나뉘고자 합니다. 1부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입니다.







1. 당신은 왜 책을 읽나요?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왜 책을 읽나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나요?” 그러면 전 대답합니다. “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읽기 시작했고, 그 계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멋진 순간은 아닙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불안해서 읽었습니다. ‘독서’라는 고상한 말보단 ‘발버둥치기’가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렇게 습관이 되었고, 지금은 솔직히 별 이유 없습니다. 그냥 읽습니다. 제가 처음에 책을 읽게 된 계기, 그곳으로 거슬러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감 못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남자는 군대에서 살짝 철이 듭니다. 철이 드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지 ‘혼자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동안 뭘 할까요? 처음에는 잡 생각이나 잡담을 합니다. 이런 저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거없는 자신감까지. 그러다 더 시간이 지나면 적막함이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소란스런 생각들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대학생’ ‘아들’ ‘친구'이란 껍질을 벗어버린 저를 말이죠. 그게 2003년이었습니다.

변화는 ‘객관적 자기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고자 아둥바둥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저를 봤습니다. 덜컥 걱정이 들더군요. “전공 공부는 정말 싫은데” “졸업하고 달리 할 것도 없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전 뭐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발버둥’이란 말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네요. 고상한 이유 따윈 없었습니다. 뭐라고 하고자 그렇게 저는 제 주위에 놓인 책들을 주워들었습니다. 월간지 '좋은 생각'부터 자기계발서, 판타지 소설, 종교 서적, 등등. 맥락도 흐름도 없는 파편적인 독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 간 300여권을 읽었습니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물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인간성을 갈고 닦을 수 있겠지만 혼자 조용히 자신과 마주 서는 시간이 자아 형성에는 필요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멍하니 있는 시간도 즐거운 법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긴장을 필요로 한다. 이 적절한 긴장이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독서는 혼자 하는 듯싶지만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쓴 사람과 함께하는 둘만의 시간이다. ... 뛰어난 인물이 공들여 조탁한 문장을 혼자 음미하는 시간. 이런 시간에 얻게 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p.75

그 결과, 제가 얻은 결과물은 초라합니다. 겨우 ‘읽기’에 대한 부담감을 털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순간이 자발적 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적고, 휴가 나와서 볼 때의 기쁨. 그렇게 ‘책에 목 말라 본 느낌’은 아직도 생생 합니다. 책 읽기, 구절 옮겨적기, 생각 끄적거리기. 그렇게 보냈던 2년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소박하면서,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그렇게 '책'에 흠뻑 빠져 본 경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비교적 늦게 알았지만, 더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은 더더욱 행운이겠죠. 그것은 값진 경험입니다. 그 순간 만큼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것이 자발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첫 번째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는 장거리 달리기'라고 말합니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한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독서는 정직합니다. 그저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장거리 여정에서 '즐거움'은 독서가의 가장 큰 우군입니다.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책을 읽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어떤 어떤 실험에서 아이큐는 높지만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혔더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때 그 사람은 “난 아이큐가 꽤 높은 편인데 이해할 수 없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은 독서를 잘 모르기에 나온 발언이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된 독서량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장거리달리기나 행군과 비슷하다. 특별히 발이 빠를 필요가 없다. 날마다 달리고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가면 대부분 장거리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된다. ... 독서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꾸준히 하는 것’이 힘이 된다.” P.45


2. 경험하면 되지, 굳이 책을 읽어야 하나요?

여기까지 쓰자, 예상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래 좋겠다. 당신이 그럴 수 있었던 건 군대이니 가능한 일이지, 요즘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게 가능 하겠어?" '즐거움'이란 달달한 용어 정도론 설득이 안 된다는 것,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묻습니다. “살아가기도 바쁜 일상에, 굳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요?” 그럼에도 저는 “네”라고 대답합니다. 적어도 독서는 많은 이에게 ‘자아 발견의 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책을 읽던 당시에 저는 우연히 심리와 종교, 인문학과 교육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끌리는 저를 볼 수 있었고, 이후로 몇 년간 제 전공인 ‘공학’을 뒤로 하고 관련 책을 읽는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넓혀 갔던 것이죠. 다방면의 독서가 주는 유익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디에 끌리는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지도 분명해 집니다. 그렇게 나의 강점과 약점, 흥미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굳건히 하지 않으면 쉬이 휩쓸려 버리고 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나를 알아가는 방법으로, 독서를 신뢰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책을 가지고 어떻게 나를 발견한다는 말이야? 니가 ‘경험’을 안 해봐서 그렇지,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최고야.” "... ..." 잠시 말문이 막히지만, 다시 반론해 보겠습니다. '경험과 이론' 이는 지난 번에 언급한 ‘본성과 양육’처럼 아주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서양 철학사를 돌아봐도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로 기나긴 평행선을 달리죠. 경험주의자는 이론가들을 ‘해본 것이 없다고’ 쉽게 얕잡아 봅니다. 그리고 이론가는 경험주의자를 ‘그게 다인줄 안다’며 무식 하다고 비하하죠. 저는 이 논쟁을 아래 책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에 나오는 글입니다.




"몸은 인간에게 가까운 것이어서 겪어서 알게 된 것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중의 하나는 바로 ‘겪어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주제에 관한 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즉 “낙동강 전선에서 압록강 전선까지 모든 전쟁을 겪었느냐’는 반론 말이다. 오히려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고 전체를 이론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태의 실상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몸으로 겪어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 이론 둘 다가 겸비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지식이라 하기 어렵다. ...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 라고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실망 하시겠지만 결국, 답은 ‘둘 다’입니다. 겪어서 아는 것과, 책을 읽어 아는 것. 모두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되려 경험주의자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책을 읽는 이들은 총을 매고 전쟁터로 나아가야 하겠죠. 제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책을 읽을 수록 '호기심'이 많아지고, '경험'에 목 마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삶에 뛰어드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책을 통해 관심사를 넓히고, 행동으로 검증하고, 다시 책을 통해 성찰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선 순환. 그 반복을 통해 ‘나'를 더 알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책을 읽는 두 번째 이유, 바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책은 그런 존재입니다.

"‘독서는 할 필요가 없다.’는 근거로서 책을 읽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이 있으면 체험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체험을 하는 일과 책을 읽는 일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불타오릴 수 있다. 예를 들면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을 읽고 아시아 여행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 책에 이끌려 여행에 나서는 경우는 흔하다. ... 독서가 계기가 되어 체험하는 세계가 확대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체험한 일의 의미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는 공감대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p.97


3. 만약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렇게까지 설명 했음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 읽는 것은 좋아. 인정해. 하지만 읽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별다른 일이 생기는건 아니잖아?" 예전에 저는 이 답을 어렵게 답했지만, 이젠 비교적 쉽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운이 좋게 대통령이 되어도 '탄핵'이란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곧 ‘사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실질적 문맹률(문해력으로 보면 75%에 달합니다. OECD 중 최하위입니다.)은 엄청나게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알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드라마나 예능은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손 안의 스마트 폰은 우리가 전지전능해 졌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든 '검색'하면 다 알 수 있지만, 깊은 '사색'은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를 그나마 볼 수 있었으나, 이젠 거의 드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전 그것이 솔직히 두렵습니다. 홍세화 작가의 책 <생각의 좌표>에 나오는 글을 옮겨 적습니다. 




"네 경로(독서, 토론, 직접견문, 성찰)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작가가 말했듯, 책을 읽지 않아도 현대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듣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책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말은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나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하지만 읽고 글쓰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추상’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머, 톱, 손도끼 등을 보여주며 공통점을 말하라고 하니, 그들은 ‘연장’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대신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톱은 나무를 썰고, 손도끼는 통나무를 가르죠.”

구술문화권 사람들은 자신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도 곤란을 느낍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인격을 기술하는 대신 신상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우츠구르간 출신이죠. 무척 가난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자식도 있어요.” 이러한 ‘인식 능력’의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유’는 문자 문화의 영역이며, 훈련에 의해 단련됩니다. 저는 이 차이가 지금의 우리나라, 그리고 광화문에서 볼 수 있는 세대간 갈등을 설명하는 하나의 근거라고 봅니다. 절대적인 가치 하나만을 쫓은 사고 방식, 그 맹목성을 닮아가지 않으려면 스스로 ‘언어의 한계’를 넓히고 '사고의 주체성'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어야, 결국 ‘주체적인 자아’를 기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세 번째 이유, 단순합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함입니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한 가지 사실을 절대시하게 된다. ... 눈앞의 한 가지 신비에 마음이 빼앗겨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지성이나 교양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대학 시절에 신비주의 단체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그런 단체의 교리를 철저히 믿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절대적인 가치관을 하나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것은 부정하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다. ... 어떤 철학적인 문제에는 강한 면을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음미하는 관용적인 태도를 볼 수 없었고 한 가지 삶의 방식만을 모범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모순되고 복잡한 사실들을 마음속에 공존시키는 것. 독서로 기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의 공존이다. 자아가 한 덩이의 단단한 바위라면 부서지기 쉽다. 복잡성을 공존시키면서 서서히 나선 모양으로 상승해가야 한다. 그래야 강인한 자아를 기를 수 있다.” p.69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책을 왜 읽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에 자문하면서 답해 보았습니다. 설득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저 제 생각을 좀 더 다듬어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지?” 책 읽는 방법으로 다시 써 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분들을 위한 3줄 정리

1.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단, 자발적으로 읽는 경우에.
2. 책을 통한 지식과 경험을 통한 앎은 모두 중요하며, 책은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3.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생각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 에버 노트엔 묵은지처럼 오래된 글이 꽤 있다. 

분명 책을 읽을 땐 신나게 옮겨 적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활용되지 못한 글들. 이들은 분명히 나에게 들어와 감화를 일으켰음 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기엔 실패했다. 그리고 내 게으름을 분명하게 직시하게 해 주는 내 소중한 거울이다. 오랜만에 그 중 하나를 들춰보았다. 

오늘 다룰 책은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란 긴 제목의 책이다. 무려 1년 반 전에 읽은 책이고, 저자는 권용선 작가다. 아주 유명한 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도 당시에 읽었을 때의 흥분과 감동이 남아있다. 적어도 나에겐 의미있는 책이 분명한데, 무엇보다 벤야민이란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이 가장 감사하다. 이 책을 대략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발터 벤야민’은 이동하는 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벤야민이 위대한 것은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이 아니다. 그의 존재 방식,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마드’로서 존재했던 균형 감각, 거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떄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 닮고 싶은 것도 거기에 있다. 나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싶다. 방향성은 있지만, 예상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으면 한다. 그것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인, ‘노마드’라고 부른다. 

"그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그가 그 무엇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들에 대한 빛나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되지 않았던 그의 선택, 혹은 탁월한 위치 감각에 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장소 혹은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지식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고 시선의 위치를 바꾸며 글쓰기의 패턴을 교정하면서 매번 다른 것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류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P. 20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방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되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움직여 다녔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고 그곳에 안주하는 정착민의 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성격은 오히려 척박한 불모의 땅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유목민의 것에 가깝다. 유목민은 벤야민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괴적 성격’을 지닌 자이다." P. 26


2. 벤야민의 비평이란, ‘그들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의 비평은 일반적인 개념과 다르다. 그는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보는 것’을 비평이라 여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라고 하는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서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의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는 ‘노마드’의 것. 그 독특한 정체성이 비평의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그의 어떤 경험이 그러한 철학을 낳게 했을까. 더욱 궁금해진다. 

"벤야민이 되고자 했던 ‘비평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격의 비평가들처럼 작품을 해설하고 평가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벤야민은 비평적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 혹은 연구자들을 통해 무엇인가 그들 안에 있는 고유한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개념의 형태로, 또 때로는 방법적 틀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새로운 글쓰기를 발명했고, 자기 당대에는 없는 새로운 직업을 창안하고자 했던 것이다. ... 그는 대중적인 동의나 학문적 권위를 획득하는 일에 일관되게 무심했고, 비평가라는 제도적 칭호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오히려 ‘비평’이라는 개념을 그 자신이 철처히 실천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드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36-39


3. 중요한 것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 
과거에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기’ 벤야민은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해낸다. "문학적 몽타주. 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 줄 뿐. 가치 있는 것만 발취하거나 재기발랄한 표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같은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누더기와 쓰레기를 목록별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으로 그것들이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해줄 생각이다. 즉 그것들을 재인용하는 것이다.” 파편들을 새롭게 연결함으로써, 매번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마셜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란 사실을 벤야민은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 

"벤야민은 개념적인 언어로 사물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이미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념적 층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것을 위해 ‘인용부호 없는 인용술’이 동원된다. 벤야민은 그것을 ‘문학적 몽타주’라고 불렀다. 

벤야민의 문학적 몽타주는 언어로 만들어진 문장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공간에 재배열 되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때 각각의 파편들은 자기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장소에서 이웃한 것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전혀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각각의 파편들이 하나의 별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그들 사이에 관계의 선분이 그어질 때마다 매번 하나의 별자리가 만들어지도록 문장들을 배열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이 시도했던 문학적 몽타주 혹은 문학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조성법이다.” P.83

4.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변화’는 언제 시작될까?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불만’을 가지지 않는 자는 변화할 수도 없다.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재앙이다. 고민할 것도, 더 나아질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안전한 삶. 그것이야 말로 가장 불안한 삶이 아닐까. 벤야민은 이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라 부른다.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니체의 언어로 표현하면 ‘말세인의 삶!’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떤 것인가. 불편과 부당, 폭력이 만연하는 세계? 혹은 차별과 빈곤과 착취로 얼룩진 세계? 물론 이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는 세련된 판타스마고리아의 세계에서 배짱 좋게 잠자는 일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권태와 무위’ 속에서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조장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사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조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는 상태를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 그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출구는 그때 만들어진다.” P.167
 

5. 노동자는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는가?  
자본주의은 노동자와 결과물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모두 ‘생산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자는 결코 ‘집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은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다. 그들은 멈춰있는 자들이며, 고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벤야민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기화하는 ‘허의의식’을 갖는 것,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 자기 노동이 노동자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실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자기소외는 필연적이다. 부르주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허의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노동을 자본의 도구로 만들고, 노동의 결과물인 상품으로부터 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구매하는 소비자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착취를 전면화한다. ... 부르주아 계급의 심리적 토대는 그의 전 시간을 자본가로서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감독하고 생산물을 판매하는 데 바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이 고도화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곧, 부르주아의 계급적 정체성은 그가 지닌 재화(화폐)를 소비할 때가 아니라, 자본가로서 잉여적인 것을 생산하고 축적할 때 만들어진다는 점을 그는 맑스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벤야민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생산하는 자로서 ‘노동자’가 어떻게 ‘소비자’로서 훈련받게 되는지이며,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오랜만에 보는 글이라 두서가 없다. 당시에 인상깊은 글을 남겼기에, 다시 쓰려니 말문이 막힌다. 역시, 바로 바로 쓰는 것이 최고다. 그 순간 느낀 생생한 깨달음은 쉬이 날아가는 법이다. 어쨌든 앞서 나의 글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지향하는 바를 3가지 정도만 정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 : 멈춰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것
-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도, 지금 상태에 머무는 것도 모두 여기에 해당이 된다. 이를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가 누구인지,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집요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움직이려면 지금의 내가 멈춰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에. 변화는 지금 이 모습을 참을 수 없을 때 일어나기에. 
 
두 번째 : 말하기 보단, 보여주는 것. 
-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개념어는 사어다’라고.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도 예전엔 그것을 몰았지만, 지금은 절감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관찰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다시 태어나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차근차근 노력하는 수 밖에. 

세 번째 : 소비하기 보단, 생산하는 것. 
- 근대는 사회가 ‘생산자’를 '소비자’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대부분은 그것에 쉽게 길들여졌지만, 몇몇 지식인들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건해졌다. 이제 사람은 너무나 쉽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일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직장인들은 주말이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주중엔 온라인 쇼핑을 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을 만들었다. 벤야민은 이를 두려워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이것이 두렵다. ‘내 이름을 거는 것'은 그래서 무섭지만, 중요하다. 살이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불만족한 상태를,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자기만의 균형 감각을,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벤야민은 싸웠다. 나도 그렇게 싸우고 싶다.








#1. 독서의 영향이란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P.28-29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같은 문장에 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 사람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비열한 인간은 라신을 읽는다 해도 비열한 인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반대로 선한 사람이 나쁜 책을 읽는다 해서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독서의 나쁜 영향은 그것이 주는 좋은 영향력만큼이나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그러할 테지만 세상은 유익한 것만을 사랑한다. 이런 세상에서 책은 생존하기 위한 길을 걸어왔고, 그래서 문학 또한 도덕적이 되거나 비도적적이 되어야 했다. 


-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경험에 의하면, 한 두 번의 독서로 대단한 인생 반전을 노리는 사람일수록 진짜 독서가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독서가는 커녕, 단지 책을 통해 자신의 성공과 영리를 추구할 뿐이다. 아마추어 독서가인 나의 기준에서, 진짜 독서가는 책을 통한 변화에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읽어나갈 뿐이다. 독서가들에게 독서는 마치 삼시새끼와 같다. 아무리 좋은 밥이라도 한 두끼의 밥이 우리의 건강을 변화시키지 못하듯, 책도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더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심지어 ‘꾸준한 독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한다. 그저 아주 살짝 더 온전한, 인간다운 인간,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운이 나쁘면 이것도 요원하다. 그게 내가 책을 읽으며 얻는 답이다. 오랫동안 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난 여전히 몇년 전에 감동 했던 문장에 새삼스레 또 놀라고, 줄 쳤던 곳에 또 줄치고, 그렇게 위로받는다. 언제나 철이 들까. 언제나 좀 더 나아질까. “수 많은 책 들아, 지금까지 너희는 뭐 했니?” 라고 ‘근무 태만’을 묻고 싶을 지경이다. 밥값이 아니라 책값도 못하는 것들. 그럼에도 또 책을 산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내 모습에 대한 놀라운 자각이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배움이다. 쉽게 기적을 꿈꿔선 안 된다. 


#2.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P.30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거시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문제는 책이 도구로 전락하면서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 입장에서 볼 때 책은 본래 주제에서 멀어진다. 독자는 독자대로 자신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는 모욕을 느낀다. 


- 나는 세상의 책을 두 종류로 나눈다. ‘팔리기 위한 책’과 ‘읽기 위한 책’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전자의 책은 ‘수단’이고 후자의 책은 ‘목적’이다. 팔리기 위한 책의 목적은 ‘사람들 손에 쥐어지는 것’이고, ‘읽기 위한 책’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뭐 그래 봐야 밥 한끼 밖에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책은 '뇌의 소중한 밥이자, 반찬이며, 국이다’ 그 목적을 잃어버린 책들은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 아직 책 한 권 써보지 못한 입장에서, 책을 쓰는 저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의 나에게 말할겸 한 마디 하고 싶다. "니가 나중에 무슨 책을 어떻게 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나무에 대한 예의는 지키자. 이 자식아."

종종 그런 책을 본다. 책의 내용이나 메시지보다 책이 되어버린 나무가 생각나는 책. 사람에게 잘못된 정보는 주는 책, 대중을 속이기 위한 책, 자기 변명을 위해 존재하는 책. 책을 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영달을 꽤하는 책. 책보다 나무가 먼저 생각나게 하지는 말자. 그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어느새 나는 ‘책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나의 목적은 ‘글을 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치약을 짜듯 나의 뇌를 쭉 짜면 글이 쏟아지는 그런 사람. 홀로 독방에 갇히더라도, 혼자 글을 쓰고 그걸 읽으며 자족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나의 목표다. 별거 아닌거 같은데 참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책을 하나 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3. 이기심에서 책을 읽지만, 우린 결국 이타심을 얻게 된다. 

P.39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다. 애당초 책을 읽을 때 이타심 같은 것은 원한 적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 

- 이것이 바로 책의 습격이다. 내가 갈구하는 것. 나는 피해자고, 책은 가해자다. 문제는 피해자는 가해자의 일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어디서 얻어 맞을지 알 수 있을까? 그렇기에 언제나 나는 기습 당한다. 예를 들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을 때 그랬다.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책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아프가니스탄’ 한 가운데 놓여졌다. 그들의 삶이 들어왔고, 없었던 관심이 생겼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얻었다. 물론, 영화도 그림도 이 역할을 한다.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 바로 ‘타자 되어보기’다. 하지만 책 처럼 충실한 자는 없다. 상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그래서 ‘타인’이 되어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이타심을 원하지 않더라도 얻게 되는 것이 독서이며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4. 책은 평화롭게 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P.42 
책이 경전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책은 신앙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며, 작가 또한 신이 아니다. 우리는 작가를 사랑할 수도 있고, 난도질을 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은 자들이라도 평화롭게 쉬도록 놓아두는 것에 반대한다. 평화 속에서 영면하도록 내버려진 작가는 이 세상과의 인영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 위대한 책은 걸레가 되어야 한다. 유명한 책일수록 더 많이 읽혀지고, 난도질 당하고, 잘리고, 죽는다. 그리고 부활한다. 새로운 컨텐츠로.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비판하지 않는 책도 있다. 그런 책은 그렇게 멀쩡하게 죽는다. 책은 난도질 당해 살아나거나, 멀쩡하게 죽거나. 이 두 가지 결말을 기다리며 태어난다. 책도 이럴진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마찬가지 아닐까. 세상과,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우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의외로 쉽다.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싸울 일도, 다툴 일도 없다.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 나는 두렵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받은 대로, ‘눈에 띄지마’ ‘중간만 하면 된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어느새 그렇게 살기가 싫어졌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툰다. 하지만, 멀쩡하게 죽기는 싫다. 난도질 당해 살아남고 싶다.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다. 


#5.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

P.91
왜 책을 읽는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둠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문학의 일부이다. … 우리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결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기 위해 책을 읽는다. 

- 마지막 질문.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처음에는 뭐라도 해야 할거 같아서 읽었고, 그것은 어느새 즐거움이 되어 버렸다. 운동도 모르고, 술과 담배도 모르는 나는 인생에서 즐거움이 별로 없다. 그 중 하나가 책이다. 그런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가끔 ‘커다른 기쁨’도 데리고 온다. 언제 기쁠까? 하나는 ‘발견’이다. 하나의 책을 보고, 그와 연결된 다른 책을 볼 때의 즐거움. 혹은 어떤 책을 보고 그와 전혀 상관없는 책을 보면서 예전의 책이 이어지는 느낌들. 그렇게 책과 책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관성을 '발견'할 때 나는 커다란 기쁨을 맛본다. 두 번째는 ‘깊이’다. 나 혼자선 도달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생각과 성찰에 닿을 때, 그때 경험하는 전율이 있다. 대부분 책의 인도로 따라 가다 보면 얻게 되는 부산물 들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본다. 그 외엔 달리 딱히 할 일도 없고, 이보다 즐거운 일도 없기에. 





#6. 무언가를 가르치는 책들에 대한 혐오

P.94 
나는 문학을 향한 지독히 편파적인 애정 때문인지 무언가를 가르치는 책들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는 책들은 문학을 타락시키는 것만 같다. 나는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한다. 

-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사실,이 말을 이해하기 까지 꽤 걸린 것 같다.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은 ‘가르치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큰지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가르침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책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기억 남는 예시가 있다. 우연히 정유정의 ‘종의 기원’과 조정래의 ‘들풀도 꽃이다’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종의 기원을 읽을 때, 그 이야기는 나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내 삶을 반추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라고 되돌아볼 수 있었고, 내 주위 사람들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조정래 작가의 책을 볼 때는 뭔가 ‘탁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계속 화자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래야 한다고. 아니, 저래야 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욕심. 그 욕심이 빤히 보이는 책. 아무리 그 메시지가 의미있더라도, 그 욕심 때문에 진의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피곤했고 책을 덮었다.  


#7. 독서는 선이 아니다.

P.100 
독서는 선이 아니다. 어린이에게는 물론 어른한테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자마자 독서에 대한 마음이 싹 사라진다. 

- 내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은 것은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위인전이 있었다. 남들 다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평범한 위인전이었다. 다 합쳐서 60권 정도가 되었을까. 나는 그 위인전에 관한 한 대단한 편식가 였는데, 내 마음에 든 편만 골라보기에 바빴다. 10명도 안 되는 위인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나머지 위인들엔 손도 대지 않았다. 굳이 왜 안 읽었냐고 하면, 이름도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은 위인들을 뭐하러 읽어야 하냐. 그런 생각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편애했던 2명이 있다. 바로, 김유신과 이순신이다. 남자라면, 역시 장군이지. 어럼픗 기억나는 어느 주말이다. 내가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 이순신 이거 5번도 넘게 읽었어!"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이고 잘했다고 칭찬했다. 별거 아닌 기억이다. 하지만, 나는 기뻤다. 엄마는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에게 그 어떤 책도 읽으라고 권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때 엄마가 화를 내며, "왜 그것만 읽어! 너 자꾸 편식할래! 남은 책은 다 버릴꺼야?"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책을 읽지 않을꺼란 극단적 결과까지는 아니어도, 지금보다 덜 흥미로워 했을 것은 분명하다. 책은 놀이와 같다. 철저히 초대 받아야 한다. 거절할 자유도 그의 것이어야 한다. 선택할 수 없을 때, 독서라는 놀이는 노동이 되고 의무가 된다. 독서는 결코 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놔 두라고' 권한다. 혹은 먼저 읽던가. 독서를 권하는 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많은 경우에, 그건 그저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마치 누가 나보고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르는 순간, 식욕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 


#8. 어쩌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P.216 
책을 읽으며 열정의 도가니에 빠지는 것은 종종 작가가 되기 위한 징후다. 읽고, 또 읽고, 자꾸 읽으면 거의 자동으로 쓰는 단계에 이른다. 어쩌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먼저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일종의 모방작이란 말인가? 책 읽는 사람이 없는 사회에서는 글 쓰는 사람도 없다. 

- 몇년 전에 우연히 인상깊게 본 동화책이 있다. <책 먹는 여우>라는 책인데, 그 여우는 책을 읽고 나면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꿀꺽 먹어 버린다. 서점에서도 먹고, 도서관에서도 먹고. 결국 그러다가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힌다. 형벌은 독서 금지. 어떻게 했을까? 여우는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고, 직접 글을 쓴다. 결국 자신이 쓴 글이 가장 맛있다는게 결론이다. 나는 아직 동의하진 못하겠다. 내가 쓴 글보다 다른 훌륭한 작가들의 글이 더 좋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 글도 좋아지고 있다. 언젠간, 적어도 나에겐, 가장 맛있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또 노력한다. 


#9.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의 운명

P.217 /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 … 명심할 것은 타인의 책이 내 책의 막힌 곳을 뚫어주었다면, 나 역시 내 책의 막힌 곳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내가 이러려고 글을 쓰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때때로 자괴감에 빠진다. "이 글이 어떤 가치를,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럴 때 되짚어가며 읽어야 할 문장이다. 맥락을 좀 바꿔보자.  "타인의 책이 내 인생의 막힌 곳을 뚫어주었다면, 내 책도 다른 이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받았으면, 다시 돌려주는 것.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세상에 놓여졌고, 무언가를 소비하고 파괴하면서 나를 유지시켰다. 그랬다면, 나 역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장 정당한 사유, 사색 

P.255 
사색이야 말로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독서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피리 부는 사람 앞에 놓인 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반대로, 사색을 제외하고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는 없다. 또한 깊은 독서는 그 자체로 사색을 이끌어 낸다. 평소의 나의 생각으론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독서는 도달하게 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경험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에 나를 닿게 한다. 그렇제 나의 지평은 넓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사색과 독서를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어떤 자극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깊이 향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작위적 연결'은 그때 발생한다.  



  1. 조아하자 2017.01.15 22:52 신고

    사실 저도 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변화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 최악의 제 자신에서 최악을 조금 벗어난 제 자신으로 변한 것 정도? 책읽기 전에 저는 뭔가 잘못되면 제 자신을 자해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책읽으면서 이거 하나는 고쳐졌거든요.





젊을 때 나 역시 그랬고, 
많은 이들이 아직 그러하고 있다. 
진정성을 부르짓는 자들이 많다. 
나만이, 우리만이 오로지 진정하단다.


진정한 나를 찾아 시골로 어디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니지만, 
치근차근 읽어나길 만한 인문 교양 책이다. 
개인과 사회, 미디어 등 전방위적으로 
배울 만한 점이 많다.


특히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Make America great again
이 구호에 반응했던 시민이 많은 까닭이다.


그것은 얼마나 거대한 사기인가. 
IS가 외치는 이슬람 고전사회로의 회기와 뭐가 다른가.


사람들이 지금 무엇에 불안해하고
어디에 취하고 있는지. 
지금의 세상을 읽어내기에 좋은 책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진정성은 이미 또 하나의 지위경쟁이자,
탁월한 비즈니스 도구가 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안녕하세요? :)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 범인은 누구인가? 
'서울 성동경찰서는 6일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해)로 최모(35)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4월26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동구의 자택에서 "언제까지 직업 없이 집에 있을 거냐,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는 어머니 황모(53)씨 말에 격분해 발로 마구 차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최씨는 평소 취업 문제 등으로 어머니와 자주 다퉜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어머니가 쓰러지자 119에 전화를 걸어 신고했으며, 황씨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최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취업과 관련해 스트레스를 주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어머니를 숨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 어느 날 보았던 뉴스 기사입니다. 존속살인라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죠. 저 역시 크게 놀랐는데요. 범인은 누가봐도 최모씨입니다. 정황도, 증거도, 범인의 자백까지. 모든 상황이 명백하죠. 하지만 한번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요?"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폭력은 크게 2가지로 표현됩니다.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이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뉩니다.) 무엇보다 폭력이란 말로 인해 우리가 떠올리는 상투적 관념에서 한 걸을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번 천천히 볼까요. 첫 번째, 주관적 폭력입니다.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며, 누구나 손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특히 어릴 적에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한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일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러한 물리적 폭력이 결코 용인 되어선 안 됩니다만, 그 때문에 사건의 심층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장교는 <게르니카>를 보고, 그림에 드러난 모더니즘적 ‘카오스’에 충격을 받아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요?” 피카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폭력이란 무엇인가, P.37-38)

2. 구조적 폭력이라는 ‘기만' 
두 번째는 객관적 폭력입니다. 특히 이번에 저는 언어 폭력으로 대변되는 상징적 폭력 보다도, 구조적 폭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간략히 상징적 폭력은 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따돌림, 인터넷을 통한 악성 댓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더 들어가면 개념이 다소 복잡해서 제외합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인데요. 여기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거나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린 쉽게 그것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에 굉장히 비판적이고,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유명한데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라고요.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52) 그는 이처럼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완화책을 마치 해결책처럼 제시하는 것을 ‘기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이를 대의를 위해 내놓은 카네기 같은 사람을 대표적인 ‘기만적 사례'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겐 어떻게 보이나요?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이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구조적 폭력을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 기업과 국가들. 겉으론 약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은 행동들 말이죠.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 외에도 지젝은 다양한 ‘폭력’에 대한 사유를 끌어냅니다. 문화적 폭력부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신적 폭력까지. 이 책을 보고 나면 무엇보다, 폭력을 보는 관점이 조금은 넓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IS'의 테러와 폭력이 단순히 광인의 미친 짓, 세계에서 없어져야 할 암적 존재들로 끝났다면.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과 구조는 뭘까?'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용답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에 모든 ‘초점’을 빼앗기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말로 IS가 한창 말썽일 때 그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공부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맥락을 이해합니다. (물론 이해는 하되, 용납을 하진 않습니다.) 그들과 서구 세력간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어서 왜 이렇게 꼬였는지 말이죠. 사실,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군 전쟁, 2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석유임을 간략히 밝힙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나중에 따로 대화나누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취업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엄마를 살해한 아들. 이 비극적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는 주관적 폭력을 행사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럴 거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한 그의 어머니도 ‘상징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다들 공감 하시리라 믿지만, 언어를 통한 폭력은 결코 신체를 통한 그것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가해자 이지만, 어쩌면 무언가의 희생자인지도 모릅니다. ‘취업’이라는 구조적 난제, 그리고 사회적 폭력 앞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국가는, 기업은, 그리고 우리들은 이 거대한 책임에서 과연 면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짜 범인은 청년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현대 사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오늘은 10월 29일입니다. "박근혜 하야하라"는 수 많은 시민들에 의해 외쳐졌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 앞에서 우린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고,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소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폭력일까요? 일부 과격해진 시민이 폭력을 저지른 것일까요? 아니면 권력자들이 웃으며 그런 것일까요?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2005년 파리 교외에서 일어났던 약탈과 같은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기만 하면 여전히 급진적 사회 변혁을 믿고 있는 소수의 좌파들에게 묻는다. “이런 짓을 한 건 당신을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게 이거요?” 그러면 우리는 피카소처럼 대답해 줘야 한다.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 이건 당신네들 정치가 가져온 결과잖소!” 

우리나라에선 19세가 넘으면 성인으로 대우 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상,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변화과 구조적 폭력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젝은 “저항하라!" 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번 사건을 유심히 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웃으며, 손 한번 쓰지 않고 폭력을 저지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는 지는 모른채 말이죠. 그리므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4. 상실의 시대를 견디는 법 
아직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남았습니다. 앞서 ‘저항하라’고 했지만, 지젝은 아이러니 하게도, "행동하라!, 혹은 참여하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이외인데요. 지젝은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서둘러 행동하지 말고, 더 공부하고 공부해서 진짜 혁명을 이루라고 말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면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적 변화’를 일구어 내라고 촉구합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요. 

이는 저에게 마치 조광조가 아닌 퇴계 이황과 안창호가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 어떠한 변화도 급작스럽게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는 결국 급진적 혁명을 이루어냈지만, 궁극적 변화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3일 천하'란 말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1979년에, 그리고 1987년에 경험했던 일이죠. 하지만 이황과 안창호는 달랐습니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올곧은 학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서원창설운동’을 벌립니다. 그로 인해 사사한 인재만 300여명에 이릅니다.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도 ‘흥사단’을 조직하며 후임들을 양성해 나갑니다. ‘테러’와 같은 급작스런 방식과 다소 대조적이지만 더 근본적입니다. 

"그대는 바둑 두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판 전체를 망치지 않던가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묘년에 앞장서서 개혁을 주장한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대단한 명성을 얻고 나서는 대번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노라고 자부했지요. 임금님도 그가 명성이 높은 것을 좋게 생각하시어, 그를 두텁게 신임하셨고요. 그러니 이것이 바둑으로 치면 수를 잘못 두어 일을 망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황의 '도산에 사는 즐거움’ 중에서) 
 
지젝의 조언은 저에게 ‘균형을 갖추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지나치게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차갑게 외면하지도 않는 것. 그 균형 속에서 ‘대안’을 찾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열심히 공부하던 이는 이제 행동해야 하며, 뜨겁게 행동하던 이는 공부해야 합니다. 뜨거워지고 다시 차가워지면서 우리 모두 단단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회'는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허망하고 비참한 그런 상실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지만,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들풀은, 쓰러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한번 만나는 것으로 왠지 아쉽다. 시간을 두고, 또 만나고 싶어진다. 책도 마찬가지다. 한번 읽고 나서, 뭔가 아쉬운 그런 책들이 있다. 나에겐 희망의 인문학이 그런 책이다. 나에게 '성찰과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소중한 책이다. 오늘 아침, 작년 1월에 읽었던 '희망의 인문학'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잠시 옮겨보았다.


"오늘날의 24번 구역과 내 아버지가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의 24번 구역 사이에 드러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빈곤으로 고통받느냐 하는 것이다. 대공황 시기 24번 구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빈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빈곤하다고 생각할 때, 슬픔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

이제 24번 구역의 어느 누구도 절대비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어디를 보고 있든, 어떻게 생각하든, 누구를 위해 기도하든 상관없이 쉼터의 거주자들이 바라보는 건 타인의 두툼한 지갑에서 넘쳐나는 부일 뿐이다. … 이제 24번 구역에서는 어떠한 정치활동도 일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경제가 지배 규칙이 된 것이다.

세계는 경주 만큼이나 상대적이며, 상대적인 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 이것은 인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존중에 대한 모욕이다. 게임의 끄트머리에서 중산층이 승자와 맺는 동맹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 이들을 빈민으로 규정해버리면, 24번 구역에 시기심이 등장한다. 그 시기심에서 소외, 증오, 그리고 분노가 피어오른다." p. 57-58


결론은 이것이다. 불평등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존재할 때 발생하며, 그 속에서 폭력의 씨앗(소외, 증오, 분노)은 무럭무럭 탄생한다. 우리가 사회의 암덩어리라 생각하는 IS나 일베도 그러한 현상의 일부일 따름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키케로는 주장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며, 사적 삶이 아니라 공적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의 일치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적절하게 중용을 지킬 수 있으며, 정치를 통해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P.71


내가 내리는 이 책의 짦은 결론은 이렇다.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함께 대화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라' 인문학이라는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의 형태가 처음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적 세계’에서 인문학을 따로 떼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인문학과 도시국가는 자신의 존립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다.(p.27)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고대 폴리스에선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현자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폴리스에스 진정한 삶이란 정치적인 삶이었으며, 다른 것은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었다. 개인적 삶에 매몰된 사람들은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시민의 대상에서 배재됐다. 폴리스의 경이로움은 대화 속에, 그리고 언제나 공적인 삶, 행동하는 삶 속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함께 대화하고, 행동해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자연스럽게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문득 그립다.



이방인, 당신은 나를 아는가? 



이제서야, 실존주의 작품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2013년이었나,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라는 도발적 번역 논쟁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검색해서 찾아보았더니 그 논쟁은 어느정도 정리된 모양이더라. (결국 해석의 자유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얼마 전 구매한 이북으로 읽었는데, 내가 가진 버전은 문예출판사의 것이다. 문장이 워낙 짧고, 문체도 독특해서 다른 번역본이 어떨지도 궁금하다. 기회가 되면 보기로 하자. 

충격적이고 꽤나 잘 알려진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선 이렇게 써 있었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읽자마자 흥미진진했다. 좀 더 찾아보니 알베르 카뮈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을 읽으며 '역시나 첫 문장 (리드)을 뽑아내는 감각이 남다르구나.' 그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첫 문장의 역할이 다음 문장을 읽게 하는 것이라면, 본 소설에선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게 책을 단숨에 읽고 난 뒤, 나는 얼마간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짧은 이야기가 엄청나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품고 있었다. 사이코패스에서 예수까지.. 우린 ‘뫼르소'라는 한 인간의 이미지에서 온갖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중 나에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잘 알까?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나?” 

이 소설은 철저히 뫼르소의 내면 세계를 서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우린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실제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온갖 상상과 억측으로 나의 행동을 해석하지만, 그것은 진실일까? 아니,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간극 때문에 중간 중간 재미있게 읽는 대목들이 유난히 많다. 무엇보다 나로썬, 뫼르소의 솔직함에 감탄할 지경이다. 

“여자는 그냥 울고 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 몹시 이상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p.25

“우리들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상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기에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p.43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p.51

언듯보면, “아니,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있나..?"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냉담한 모습이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나중에 살인을 묻는 재판장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배심원 여러분, 이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 날에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희극 영화를 보면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p.186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 대부분은 ‘답정너’가 아닐까?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그런 우리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도 있어야 하기에. (특히나 중차대한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기에) 다시 말해, 살인을 하기 위해선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 파렴치한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린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결국, 뫼르소는 ‘살인자’로 "판정" 되었다. 부모가 죽고 난 뒤에 보여야 하는 '의례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을 던지자. 우린 얼마나 많은 ‘보편적 기준과 도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가두는가? 우린 정말 진실이 궁금한 것일까? 하다 못해 변호사가 이렇게 일갈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p.190

<이방인>이 발간된 1942년으로 가 보자. 당시 파리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 이었다. 기존 가치가 모두 무너지던 시대.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을까?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엄청나게 흥행 했는지도 모른다.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 ‘부조리 문학’이란 간단하다.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렇담, 지금 2016년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42년의 파리와 비슷해보이지 않는가?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요즘 청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의미없다.” 이 말은 뫼르소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재미있는 연결이었다.

“사랑은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기에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떤 생활이든 다 그게 그거며, 또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조금도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p.87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p.88

“그 순간 나는 권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쏘아도 좋고 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p.116

결론을 짓자. 지금의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뫼르소의 어머니는 죽었고, 뫼르소도 그랬다. 그리고 나도 죽고, 당신도 죽는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p.242)는 그의 말처럼 죽음은 어떤 동 떨어진 세계의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린 진정한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이방인인 그에겐 모든 것이 낯설게 보인다. 기존 세계의 질서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한번 의심해보자. 마치 영원할 것 처럼 살아가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나의 믿음들을. 우리가 가진 그 모든 신념들을 낯설게 바라보자. 그 순간, 우리는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 내 앞의 필터를 치우고, 그 순간의 자유함을 맛볼 때, 우린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그제서야 내 앞에 놓인 사람을 진짜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어떤 신념이나 제도로 판단하지 않고, 구속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 시작은 살아있다는 확실한 자각이 아닐까? 뫼르소의 마지막 절규가 우리에게 와서 꽃히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내게는 있어.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을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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