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당신은 우주비행사다. 당신의 완벽한 하루를 설명하라.


위잉 위잉. 우주정거장 회전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오늘은 우주 비행 364일째. 드디어 내일이면 지구로 돌아가는 날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지퍼를 내리고 수면실에서 나왔다.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다들 매미처럼 이리 저리 매달려 자고 있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한편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짠하다. 한 모금 물을 마시고 나와 사령실로 들어갔다. 언제나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역시, 지구다. 태양계 셋째 행성이자, 인류의 고향 그리고 모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지구는 푸른 베일을 감싼 신부와도 같다.”고 했고, 유진 서넌이란 우주인은 “지구는 우주의 오아시스다.”라고 했다고 하던데, 나에게 지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파랗게 흔들리는 동공’처럼 보인다. 아무렇지 않은듯 침착하게 자전하고 있으나, 실은 고민 중인 느낌이다. "이 놈의 인류를 어떻게 해야할까"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예쁘게 보였을 것이다. 다른 생명들과는 달리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자신의 자원을 제법 활용할 줄도 아는 모습이 기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인류는 자신이 지구에 발을 닿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지구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몇 차례에 거친 세계대전을 끝으로, 사실 지구는 마음이 돌아선지 오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내일 다시 돌아갈 유일한 곳도 결국 지구다. 도망갈 곳도, 물러설 수도 없다. 자신의 ‘어머니’를 되살려야 하는 주체도 결국 돌아와야 하는 탕아, 인간이란 사실은 변치 않는다. 돌아가서 ‘지구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생각을 갈무리 하고, 아침을 먹었다. 마지막 우주식이라고 생각하니 그 지겹던 음식들도 꿀맛처럼 느껴진다. 2시간 근육 운동을 하고, 주어진 업무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대부분 후임에 대한 인수인계다. 저녁이 되자, 동료들이 나를 위한 깜짝 파티를 해줬다. 지난 1년의 생활을 압축된 영상으로 보니, 기분이 뭐랄까… 짧은 시간에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한 느낌이다. 처음 우주에 도착했을 때의 긴장. 처음으로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을 바라봤을 때의 환희. 원치 않는 사고로 동료를 지구로 돌려보냈을 때의 분노. 일년 가까이 가족을 보지 못하는 슬픔 그리고 기나긴 외로움. 그간 겪었던 온갖 감정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애써 준 동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우주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 새로운 가능성에 온 몸이 떨린다. 지퍼를 열고 수면실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구나. 완벽한 하루의 조건은 바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 그것을 우주에서의 하루, 마지막에 조용히 깨닫는다. 


“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제임스 라벨.  




Q.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화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이 질문은 그저 상상이 아니다. 놀랍게도 ‘실제 상황’에 가깝다. 글을 쓰고,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른쪽이다. 그곳에는 우리 집의 유일한 식물이 하나 있다. 2014년이었나, 집들이 선물로 받은 식물인데 이 험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열심히 살아준 고마운 친구다. 나와 아내, 재원이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파리를 보니 이미 노랗게 물든 흔적이 보인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여지껏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다. 그나마 아내가 가끔 물을 주는데, 이번에는 물 주는 시기가 조금 지났나 보다. 화초를 노트북 옆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곤 자세히 봤다. 같은 방에 있었던 세월은 이미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렇게 '들여다 본 적'은 처음이다. 우선, 참 예쁘다. 이 식물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분명 ‘혈통(?)’이 좋은 녀석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파리의 생김새도 단단하고, 무엇보다 줄기 색깔이 옅은 녹색인데, 꽤나 고풍스럽다. 이미 아래 쪽 이파리는 갈라지고 바래져서 생명을 잃어버린 부분도 있다. 자신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갈 때, 이 녀석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녀석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마치 어린왕자가 된 기분이다. 음.. 잠시 고민한 결과, 이름은 바로 ‘금순이’로 정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굳세다’이다. 가만히 보니, 줄기의 단단함과 이파리의 푸르스름함이 어울려서 참으로 ‘굳세다’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곤 곧 이어 연상되는 제목이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이게 뭐길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걸까? 검색 했더니 유명한 노래이자, 드라마, 영화 제목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ㅋㅋㅋ 어쩐지 익숙하더라. 그렇게 이 ‘식물’은 오늘에서야 ‘금순이’가 되었다. 금순이가 살아야 할 이유를 3가지로 말해주고 싶다. 첫 번째 이유. “금순아,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너는 분명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서 있었겠지, 그 동안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나에게 좀 더 신경쓸 기회를 줘. 잘할께.” 두 번째 이유. “금순아, 넌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식물이야. 우리가 비록 여러가지 식물을 키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네 친구들을 만들어 줄 자신은 없지만, 너 하나 만큼은 책임지고 싶다. 우리 집 유일한 식물이라는 자긍심을 가져줘.” 그리고 마지막 이유. “금순아, 아마 마지막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거야. 너는 나에 의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붙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자기 자신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를 가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지. ‘그 이유’을 스스로 지켜갈 수 있도록 꼭 살아줘, 내가 도와줄께.” 이상, 글을 마쳤다. 나는 이제 금순이 밥 먹이러 가야겠다. :)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



땡. 1초가 지났다. 방금 1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언뜻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리고, 검지와 중지, 그리고 약지를 약간씩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이런 저런 글씨가 쓰여지고 있다. 그 순간, 땡. 다시 일초가 지났다. 그 사이 내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심장은 쿵쾅 쿵쾅 뛰면서 온 몸에 피를 보냈을 것이고, 폐는 열심히 숨 쉬며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와 장은 소화를 시키고 있겠지. 뇌.. 그래, 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땡. 뇌는 ‘1초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이리저리 연결하면서 언어를 찾고, 연결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땡. 땡을 치는 이 순간에도 일초는 계속 흐른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초를 기다렸다. 나는 1초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 1초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개념일까? 만약 내가 1초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이라고 치자. 지금 나와 시간 개념이 같을까? 완전히 다를까? 1초라는 시간의 단락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약속’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 시간의 개념이 떠올랐다. 그리스에선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2개 있다고 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그야 말로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와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말하지만, 카이로스는 일순간이나 인간과 주관적 시간을 나타낸다. 1초를 그저 흘러가게 둔다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를 살게 된다. 하지만, 그 1초를 관념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순간, 나는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게 되고, 그 시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 즉 크로노스를 관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렇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니다. 내 앞에 놓여진 1초. 그것을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1초를 반기자. 기다리자. 그리고 맞이하자. 깨어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루 하루를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그 하루가 과연, 그저 24시간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독서 #책읽기 #가을 


현대인들에겐 책 볼 시간이 없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책 볼 시간이 도저히 없다. 내가 유일하게 책을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하철'뿐이다. 지하철 이외의 장소에서 책을 본 기억은 나름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하던 시기뿐이다. 2012년을 기점으론, 앉아서 책을 읽은 적은 손에 꼽는다. 앉으면 보통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책을 읽기 위해 나는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일단 강의장소가 멀면 멀수록 보통은 주저하지만, 난 마다하지 않는다. (되려 속으론 반긴다.) 비효율적인 동선을 많이 만들수록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기에. 작년엔 그 정도가 심해서 매주 오산, 일산, 남양주, 시흥, 성남을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다. 올해 들어서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이동시간이 만만찮은 곳들이 여전히 많다.


그렇게 시간을 확보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강의 준비는 끝이 없는 거라서, 이동 내내 강의 준비를 하면 책을 볼 순 없게 된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에 이어 두번째 조건, '정신적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나는 이동 중엔 내가 강의 하러 간다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 강의 준비 시간과 책 보는 시간은 철저히 구분하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없기에.


마지막, 사실 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 발터 벤야민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강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 기쁨이 참으로 커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탁월한 비유다. 그 문구를 나에게 가지고 오면 이렇게 된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일까, 책을 보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일까. 문득,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게. 어느새 성큼 다가온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 공부하는 이유

얼마 전에 피터 드러커의 <피터 드러커 자서전>이란 책을 봤다. 그 중간에 폴라니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만난 가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가문이었고,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 칼 폴라니다. 그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옮겨보면 이렇다. 


네 사람 모두 나를 쳐다보며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말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를의 아내인 일로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피난민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카를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 p.286 


이 얼마나 재미있는 생각인가? 그리고 얼마나 드문 생각인가? 그들은 논리적인 사람들이며, 이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고, 그저 꿈을 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삶을 바쳤다. 형제들의 다양한 실험이 나오며, 그 중 하나의 실험이 칼 폴라니가 쓴 <위대한 전환>이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에선 위대한 전환이 위대한 변환으로 변역되었다.) 내용을 잠깐 보자.


"<위대한 변환>에서 폴라니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국 사회와 경제를 바꾼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 카를에게 <위대한 변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와 그가 개발한 사회의 이론적인 통합 모델이었다. 시장만이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또한 가장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 그는 초기 경제학에 대한 이해와 원시적인 경제제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문화인류학과 경제선사학에서 카를 폴라니는 권위자가 됐다." p.305

 

나 역시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이 꾸준한 편이다. 이번 기회에 칼 폴라니에 대해서 간략하게 나마 공부해보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가 생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몇 군데에서 영상을 보면서 간략히 내용을 옮겨적었다. 참고 하실 분들은 보시길. 


칼 폴라니 - 거대한 전환



1.
폴라니의 명제는 단순하다. 19세기에는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으로만 조직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세상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파시즘, 공산주의 혁명, 대공황,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2.
인간의 모든 활동을 시장에만 맡겨서 인간의 만물을 다 상품으로 만들자. 그렇다면 가격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것이 ‘자기조정시장'이다. 하지만 이것이 달성되기 위해선 사람, 자연, 화폐가 모두 똑같이 상품으로 거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거의 상품으로 다뤄지고, 자연도 그렇게 거래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저항과 혼란을 낳는가. 사람과 자연을 계속 상품으로 만들게 되면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람으로서, 자연으로서 모습을 보호해달라고 '자기보호 운동'을 만들어낸다. 한쪽에선 상품화 시키고, 한쪽에선 그것에 반대하는 모순된 두 개의 운동이 나타난다. 그것을 폴라니는 ‘이중운동’이라 칭한다. 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제국주의, 세계대전, 대공황이다. 

3.
자기보호 운동과 막시즘은 다르다. 계급투쟁은 폴라니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개별 계급의 투쟁과 싸움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성패는 사회 전체가 거기에 호응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이 사회자기보호 운동은 이념과 계급을 초월해서 벌어진다. 예를 들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저항이다. "돈도 다 좋은데, 사람 먹는 것 가지고 그럴 수 있는가?" 라는 것. 이것까지 상품화 해선 안 된다는 것. 

4. 
모든 것을 상품화하자라는 개념은 19세기보다 지금 훨씬 강력하다. 사실 1940년대부터 70년대 까지의 수정 자본주의에선 국가의 규제, 노동조합, 사회복지도 있었기 때문에 이땐 칼 폴라니의 책은 별 의미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부터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인간 만사를 모두 상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부턴 다시 이 <거대한 전환>이 각광 받기 시작한다.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5.
책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 관한 내용. 폴라니는 원시경제, 고대경제, 근대경제 이렇게 3개의 시대 구분을 한다. 원시경제는 원시 시대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선물교환을 하는 국가가 없는 시대다. 이후 조직국가가 나타나면 초기 시장형태가 나타난다. 그것을 고대경제라고 하고 역사적으론 4,5천년 정도의 기간을 커버한다. 200-300년 전에 조직국가를 넘어서 사람들끼리 자기조정 시장을 만드는 경제가 나타난다. 그것을 근대경제라 부른다. 

6. 
다호메이 왕국의 고대경제는 무엇인가? 이 국가는 굉장히 강력한 중앙계획을 시행했다. 이 나라 안에는 자유로운 마을 시장도 있었고, 또 유럽 국가들과 활발한 대외 무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맨 아래 경제공동체들은 자급자족을 원리로 살아가고, 다른 공동체와의 선물교환, 상호성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조직국가는 이들로부터 조세를 수탈하고, 그것을 재분배한다. 남는 물자로 군대를 만들고, 외국과 원거리 무역도 한다. 아래 자급자족 구조와 위의 조직국가 구조가 겹쳐진 모습이다. 

7. 

1950년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고 시절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 시장에 맡기는 것이 우월하다고 했고, 공산주의는 모든 걸 중앙계획으로 조직하는 것이 우월하다고 한다. 자유시장과 중앙계획이 이념적으로 정면 충돌하는 것. 폴라니는 양 극단을 다 반대했다. 인간이 수행하는 경제활동과 조직도 무수히 다양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과 강력한 중앙계획이 잘 통합되어 존재하는 경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다호메이 왕국>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다원적 발전 모델이란, 시장 혹은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 국가, 시민사회, 생태적 문제 모두가 어우러지는 경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괴테와의 대화 _요한 페터 에커만



#대작을 쓰지 말라 

그는 내가 이번 여름에 시를 쓰지 않았는지 물으면서 말을 꺼냈다. 나는 시를 몇 편 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도록 하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재능과 탁월한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작 앞에서는 고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네. …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현재는 언제나 현재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네. 시인의 마음속에 날마다 솟아오르는 사상이나 느낌은 그 모두가 표현되기를 원하고 또 표현되어야 하네. 그러나 보다 큰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모든 사상을 등지고 생활 자체의 안락함까지 잃어 버리는 걸세. … 시인이 날마다 현재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신선한 기분으로 다룬다면 무언가 좋은 걸 만들 수 있고, 때로는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모든 걸 잃지는 않는다네. ...

언젠가 목표로 데려갈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하는 걸세. … 당분간은 작은 작품들만 만들어야 하네. 그리고 자네에게 날마다 주어지는 것을 모두 곧바로 받아들이도록 하게. …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 (이하 중략)"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 그의 말의 진실성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이제 괴테의 말을 통해서 몇 년이나 더 현명해지고 진보한 듯한 느낌이며, 진정한 대가를 만날 때의 행복을 마음속 깊이 깨닫는다. 그 이로움은 산술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p.56-62

#나의생각

"대작을 쓰는 것을 피하라." 괴테의 그 말은 젊은 에커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젊을 때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일면적인데, 대작은 다면성을 요구하고 있지. 그러니 실패할 수 밖에.” 대작을 쓰지 말하야 하는 것에 대한 이렇게 완벽한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왜 글을 쓸 때 주저하는지, 그 이유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면적으로 쓰고 싶은 게다.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어느 정도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게다. 나에겐 빌어먹을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조금 있다. 하지만 인정하진 못했다. 지금의 일천한 실력으론 아직까진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이제 인정한다.   

나는 괴테를 잘 모른다. 고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를 쓴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그 책이 괴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에티카는 괴테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파우스트는 범신론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는 스피노자를 이렇게 칭했다.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본격적으론 이번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잠깐 조사를 해 보았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왜 늙은 괴테가 젊은 에커만에게 “결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좌우되서는 안 되며, 자네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하네.”라고 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괴테 역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좌우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작은 공국 바이마르의 국정을 10년 동안 (원치 않게) 맡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써먹을 수는 없다.” 

그 이후 괴테는 도망치듯 떠나고, 오랜 친구들과도 멀어진다. 이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전환점을 만들고, 실러를 비롯한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얻는다. 괴테의 진짜 삶은 환갑부터 시작된다. 환갑을 맞이한 1809년부터 사망 때 까지 20년간 그의 창작력을 절정에 달한다. 소설 <파우스트>를 비롯한 기행문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시집 <서동시집>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또 이해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던가!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것만 착실히 했더라면 백 권의 책이라도 썼을 텐데 말이야.” 괴테의 말은 분명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자, 그렇다면 에커만과 괴테는 뒤로 하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에게 내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긴 글을 쓰지 말자. 짧게, 일상을 기록하자. 그저 내 생각을 담은 글 하나만이라도 꾸준히 쓰자. 한 가지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쓰도록 노력하자. 다면적 관점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자. 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어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지는 말자. 그저 "모든 발걸음이 바로 목표가 되고 또 발걸음 그 자체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하자. 그 의지를 표현하자. 삶과 말 그리고 글이 일치되도록 하자.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 말한다. 오늘 현재를 표현하자.  


  1. 창실 2015.07.28 00:15 신고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가네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정상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이다. 오늘 아침에 한 서울시 광고를 봤다. 서울시 새로운 별명을 지어주세요. 그러면서 한 예시로 <파괴의 군주, 비글>이 나와있었다. 강아지를 키운 적은 없지만 비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재미있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상인 비글은 어떤 존재인가? 다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고뭉치. 말썽쟁이. 악마견. 파괴자. 등등 실제로 집안을 다 부숴버린다. 주인 입장에선 난감하다. 태도를 바꿔야 할 강아지다.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비글은 정상이다. 비글을 그저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할 뿐이다. 다만 자신이 있어야 할 적합한 곳이 놓여진 것이 아니다. 비글에게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 비글을 검색해 봤더니 이렇게 나온다. '비글은 사냥에 아주 적합한 견종으로 그들은 단호하고 날카로운 사냥꾼이다.' 그렇다. 비글에겐 아파트가 자신의 적합한 장소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공간만 충분히 확보된다면 비글은 파괴의 군주란 오명을 벗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어서 떠오른 이야기다. 영국에서 한 여자아이가 너무 산만했다고 한다. 병원에 대려가면 다들 ADHD라고, 문제가 있다고만 했다. 특수학교에 보내거나 약으로 처방해야 한다고. 부모는 낙심했다. 지친 부모는 마지막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이 아이는 타고난 댄서입니다.'


그렇다. 그 아이가 놓여야 할 곳은 교실이 아니었다. 춤을 추는 곳이었다. 아이는 너무도 춤을 추고 싶어 몸이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는 댄스 전문 학교로 보내어졌고 그녀는 영국왕립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되고 이후 <오페라의 유령>을 디렉트한 세계 발레계의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선과 악의 기준은 선이라고. 선과 악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렇기에 선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폭력의 기준이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마찬가지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도 정상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비정상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 그것은 폭력이다. 그건 마치 자신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상과 비정상의 딱지를 붙이는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정말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해야 나는 더욱 나답게, 더 적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맞지 않은 공간에서 우리와 맞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우리와 맞지 않은 목표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비글이라면 사냥을 하러 가라. 당신이 댄서라면 춤을 추라.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서 누구와 함께 머물러야 하는가!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서 하나의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보다가, 열을 받았고, 혼자 주절주절 대다가 글을 한번 써보기로 했다. 

링크는 여기.

스마트폰을 이용한 교육부의 '학생자살 방지대책' 3가지... 가능할까?

3월 13일, 교육부는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주재한 2015년 제2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학생자살 예방대책'을 확정했다. 키워드는 스마트 폰과 아파트 옥상이었고, 대책의 핵심은 자살의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고, 자살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1. 학생의 스마트폰 감시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는 "학생 스마트폰의 카카오톡, 문자메시지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스마트폰 인터넷 검색에서 자살과 관련된 단어가 포착되면 부모에게 알려주는 서비스를 실시"하기로 했다. 또한 학생 스마트폰에서 자살 관련 애플리케이션과 사이트 접속을 막는 소프트웨어를 보급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과 부모 모두 정부가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깔아야만 한다.

2. 한 달 앞당긴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는 매년 "초등학교 1·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특성검사를 거쳐 관심군 학생에 대한 면담조사 방식"으로 시행되는 검사다. 교육부는 원래 5월에 진행되던 이 검사를 4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3. 아파트 옥상 통제

교육부는 "지난해 발생한 학생 자살 사건 사례에서 투신이 65.9%로 가장 많았고, 장소는 아파트 옥상이 33%를 차지했다"며 학교, 아파트 옥상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법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화재와 같은 응급상황에만 문이 개방되는 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의 이러한 발표에 선생님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옥상을 폐쇄하고 자살징후를 감지해줄 앱을 설치하는 방법은 궁극적 해법이 될 수 없다. 자살에 복합적 요인이 내재해 있는 만큼, 요인별로 대처 방안도 달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은 "SNS를 검색해 통제하는 방식은 또 다른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고 현상에만 집착한 근시안적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말하자면,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한다고 학생자살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자, 지금부터 하나하나씩 생각해 보자. 


1. 학생의 스마트폰 감시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자살과 관련된 키워드를 검색하면 부모에게 알려진다. 그리고 자살관련 어플 혹은 사이트 접근을 막는 어플을 의무적으로 깔아야 한다. 우선, 이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을 통제하려 할 때 우린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안정감을 느끼는가, 스트레스를 느끼는가? 청소년들은 왜 자살하려고 하는걸까?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들여다보자. 인간이 자살을 생각할 때는 몇 가지 상황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까운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없어 ‘자존감’이 낮을 때. 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심신이 취약한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학생은 자살을 검색하면 부모가 알게 되고, 문제아가 된다. 부모는 자녀를 바라볼 때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시작하고, 부모와 자녀 그리고 학교 사이의 불신은 더욱 증가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더욱 더 친밀해질 수 있을까? 

또한, 사이트 접근을 막는 어플을 깐다고 가정해보자. 자신가 무언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자율성’은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정도 어플을 무시하는 방법이 설마 없을까? 분명히 나온다. 그것도 더 은밀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그레샴의 법칙,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시스템 사고 측면에서 보면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해결책이다. 위의 조치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또 다른 (더 깊은 차원의) 문제점만 만들 뿐. 

2. 한 달 더 앞당긴 학생정서, 행동특성 검사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관심 학생들은 5월이 지나서가 아니라 4월부터 집중 감시를 받게 된다.
달라지는 건 비교 당하고, 스트레스 받는 기간이 더 많아진다는 것. 끝. 

3. 아파트 옥상 통제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학생들 입장에서 보자. 옥상이 잠겨있다. 마포대교로 가면 된다. 
주민들 입장에서 보자. 화재가 났는데, 옥상이 잠겨있다. 갈 곳이 없다. 단순한 화재가 인재에 의한 대규모 사건으로 확장된다. 뒤늦게 안전대책이 생긴다. 아파트 옥상 통제가 풀린다. 끝.  

4. 나의 결론은 이렇다. 자살은 시간 지연 효과다. 어린 시절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어떤 이가 자살을 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없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여건은 봉쇄할 수 없다. 자살은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없다.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들 개개인의 자존감과 사회성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의 자존감과 사회성은 언제 형성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의 말로는 1-3세 사이에 자존감이, 3-7세 사이에 사회성이 대부분 결정된다고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사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학생들의 정서 상태는 대부분 결정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일탈은 단순히 1-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릴 적부터 충분한 정서적 안정감과 사회적 경험이 필요하며, 그것은 그들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간이다. 이 구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세상에 대한 안정감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이르러 그러한 ‘불안감’을 세상에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그것을 표출하지 않고 억누르는 것도 또한 새로운 문제의 가능성이다. 누가 그랬든,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제발 이처럼 손 쉬운 ‘감시와 처벌'를 버리고, 길고 어려운 길이지만 ‘구조와 시스템’을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 다양한 접근이 있겠지만 나는 ‘사회성과 자아상’을 기르는 결정적 구간, 육아에 대해서 좀 더 주의깊게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이 구간은 비용이 아니다. 뿌리를 만드는 귀중한 시간이며, 건강한 뿌리 없이 좋은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자살은 어린 시절에 뿌린 씨앗이 시간 지연 효과에 의해서 청소년 시기에 결과를 맺는 것이다. 그 씨앗은 이미 1-7세 사이에 심어지고 있다. 헌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엄마, 아빠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가? 없다. 맞벌이 하느라, 야근하느라. 어린이집은 어떤가? 터무니 없이 적은 임금과 CCTV로 감시 받는 덕분에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아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여유는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미셀 푸코는 “우리는 스며들어 있으나 익명성을 띠는 감시를 통해서 힘이 행사되고 있는 훈육적 사회 속에 살고 있다.”고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감시와 처벌의 사회에서 훈욕당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감시를 자율로, 처벌을 애정과 믿음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최대한 빠른 시기에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야 그 이후에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우리 주위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도. 우리가 가진 관심에는 총량이 있다. 쓸데없는 미디어나 언론에 관심을 뺏기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지키고 철학을 닦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고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만의 관점을 넣어보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이 글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보다는 좀 더 사회 문제에 개입하고 싶기에.  





지난 토요일, 지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올해 목표를 세우기 위해 박영준 코치님이 진행하는 Design 2015 워크숍에 참여했다. 사람을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배운다고 하는데, 역시 그랬다. 하루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2014년을 배울 수 있었고, 2015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코치님께 미리 감사를. 워크북에 정리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그냥 없었던 일이 될 수 있기에, 블로그에 다시 정리해보기로 했다. 

1) 긍정경험 / 작년 한 해 나에게 있어 내 삶을 풍요롭게 한 경험은 무엇인가? 
- 아내와의 출산 준비 및 태교했던 시간들.
- 심톡을 매월 지속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들.
- 질문 디자인 연구소를 만나고 코치님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 
- 삼성크리에이티브 멤버십, 하나인 학교, 공간 민들레를 비롯한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고 수업했던 것
- 다양한 사람들과 1:1로 대화 나눴던 시간들 모두.
- 신혼 여행 이후 첫 외국 여행 (방콕, 파타야)

2) 의사결정 / 작년 나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했는가?
- 심톡을 열어보기로 (2014년 1월)
- 각종 대회에 참가해 보기로 (동그라미 재단 및 소셜벤처 경연대회 등)
- 게임을 시작하기로 & 그만하기로 왔다 갔다 (하스스톤)
- 메디플라워에서 자연출산을 하기로 (2014년 11월)

3) 삶의 균형 / 내 삶에서 더 좋은 디자인이 필요한 삶의 영역은?
일, 관계, 재정, 즐거움, 건강, 학습 중에서 나는 진짜 역량을 갖추는 것 <학습>이 우선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일 할 수 있고, 재정, 즐거움이 뒤따라 온다. 

4) 실패경험 / 작년 내가 저지른 실수와 아쉬움은 무엇인가?
- 심톡, 작은 것에 만족하고 큰 게임을 하지 않았다.
- 탁월함, 처음 마음가짐에 비해서 탁월한 강의나 코칭을 하기 위한 준비가 부족했다. 
- 공명되지 않는 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으나) 생존을 위해 공명이 안 되는 일도 다 받아서 했다. 
- 친구 관계, 사람들을 그리 챙기지 못했다. 
- 심마니스쿨,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꾸준함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저 내 기분에 따라서 했다. 
- 몰입 경험, 무언가에 몰두하는 경험이 많이 사라졌다. 가장 아쉽다. 
- 글쓰기, 작년에 꾸준히 하기로 했으나 막판에 되어서 시간이 나서야 좀 되었다. 

5) 삶의 균형 /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집중해야 할 주요 역할은 무엇인가?
버팀목이 되는 남편, 가능성을 일깨우는 코치, 멋진 아들, 미래의 스테디셀러 작가, 스타트업 대표
커뮤니티 빌더, 열정적 강사, 도와줄 준비가 된 친구 중에서, 내가 앞으로 1년 동안 집중하려고 하는 역할은 바로. <스타트업 대표>다. 지난 2년 동안 가장 집중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집중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한다. 

6) 인생교훈 / 작년 내가 배운 삶의 교훈은?
- 지금 내 모습 그대로 가정과 회사의 모습과 닮아있다. 
- 중요한 것을 하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삶을 채운다. 
- 시작하면 어떻게든 배운다. 
-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사람 하나하나를 귀이 여겨야 한다. 
- 기록은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 
- 관계는 아웃소싱 되지 않는다. 반드시 직접 만나야 한다. 

7) 지침질문 / 앞으로 흔들릴 때마다 내 자신에게 던질 질문은?
- 나는 어떤 모습의 조직과 가정을 그리는가? 이를 위해 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 나는 무엇 때문에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않는가?
- 내가 그것을 시작하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8) 핵심가치 / 2015년, 나는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살 것인가?
- 진정성 / 끈기 / 실천 / 공동체 / 배움 / 가족 
-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짐승같은 성실함!

9) 도전목표 / 2015년, 도전하고 싶은 목표 / 프로젝트는?
- 나는 올해 1년에 100개의 포스팅을 한다. 카운트 시작하기 
- 나는 부모를 위한 자연출산 및 육아일기를 남긴다. (최소 한달에 1회)
- 나는 청소년용 ‘건강한 자아관 및 세계관’을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 나는 성인용 ‘자아의 신화 및 리더십’을 일깨우는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 나는 사업용 ‘보드게임 혹은 놀이판’을 만들고 제작한다. 
- 나는 아내와의 깊은 대화를 위한 산택을 주 2회 한다. 
- 나는 깊은 학습과 토론을 위한 커뮤니티 (심북스)를 빌딩하고, 그 학습 구조를 만든다. 
- 나는 올해 내가 수업하는 학생들을 잘 관찰하고, 매주 변화에 민감해진다. 
- 나는 몰입을 분석하기 위한 게임 이외에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2014년을 반성하고, 2015년을 계획하면서 나에게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안 되겠다.’라는 것. 위기감이 찾아왔다. 2013년은 처음 시작하는 단계라서 일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할까,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강의에도 최대한의 노력이 투여되었다. 물론 결과는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하지만 2014년의 나는 이 생활에 조금 익숙해져서 인지, 생각보다 일도 수월하고, 강의를 함에도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다. 긴장감과 함께 내가 가진 진정성도 줄어든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리고 분명 책을 보는 양은 비슷한데, 과거에 책 한권을 보면서 느꼈던 그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이 많이 줄어들었다. 내 안에서 적색 신호가 켜졌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고 싶다. "2015년, 무엇을 이룰까?" 보다는 "2015년, 나는 즐거움을 맛볼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 오고 싶다. 올해는 정말 깊은 학습의 즐거움과 일을 통한 행복을 경험하고 싶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읽는가? 균형있는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서,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아는 것의 빙산의 일각이길 원하기에, 그리고 내가 읽는 것을 삶으로 가져와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읽는다. 그래서 나는 올해 읽는 책을 줄일 생각이다. 매년 100권씩 읽어오는 목표가 어느새 나를 목표지향적인 독서를 하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제 50권으로 줄이되, 더 몰두해서, 더 깊이있게 읽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결국 나는 말이 아닌 존재와 글로 전하고 싶다. 말하는 삶에서 쓰는 삶으로, 그리고 진짜 삶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블로그에 더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함께 경험하고 나눌 것이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개선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이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다시 나에게 묻자. “나는 어떤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가?” 올해 나는 읽는 즐거움, 쓰는 즐거움, 사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즐거움인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 아직 보지 못했을, 혹은 이미 만났을 벗들의 삶을 더 듣고 보고 싶다. 그리고 깊게 그들과 만나고 연결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이 생각이 아닌 내 손과 발로 존재하게 되길. 2015년 12월 31일에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또 왜 이렇게 살지 못했나 후회하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영어학원과 헬스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미국에서 비만은 심각한 문제다. 1억 2,500만 명 이상이 과체중이며, 6,000만 명 이상이 비만이다.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어떠하든 과체중이 심각한 건강상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저명한 강사들이 내놓은 견해와는 달리, 비만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으리란 걸 알고 있다.


 비만이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처럼 비만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걸까? 비만은 문제가 아니고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비만이 문제라기보다 해결책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식은 성적인 학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방어기제다. 내가 면담한 소녀가 비만이 된 까닭은 그렇게 돼야 그 남자가 그만두게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체중을 줄어도록 강요하자 소녀의 무의식은 다른 해결책을 찾아냈고 그것이 바로 피부병이다.


 비만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도피'다. 미국인은 무모한 스트레스를 자청하는 데 선수다. 초능력을 발휘하는 엄마가 되어야 하고, 회사의 승진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며, 연애소설에 나옴직한 멋진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끔찍한 몫이다. 실제로 이러한 욕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든 과제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도피한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기 보다 비만을 탓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 컬쳐 코드 중에서


 위의 문장을 다시 보라. '비만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다.' 이 문장은 굉장히 중요한 문장이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 해결에 집중하다가 정적 중요한 것을 간혹 잊어버린다. 나의 경우, 2009년의 나는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이 내가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찾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문제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코칭이니 자기계발이니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 시간이 지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것을 찾기를 최대한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자기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언제나 자신을 속이고 핑계를 댄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사실은 이것을 하지 않을 이유를 계속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내 삶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고, 그 핑계로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아주 적절한 핑계였다. 이후 시간이 지나 먹고 살 돈이 떨어지면서, 나는 결국 원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절박했기 때문에 주저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역설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아니, 사실 이제는 그게 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결론은 이것이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생각처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 문제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더 큰 위안을 받는다. 어쩌면 미국은 테러가 세계에서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테러범'을 탓하고 공격하는 것이 '군비를 줄이고 전체 산업구조를 바꾸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은 끝나지가 않는다. 비만이 피부병으로 바뀐 것처럼, 미국의 적은 탈레반에서 시리아로 옮겨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학원이 영어학원이고, 헬스장이다. 어떤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사람들은 그 문제를 영원히 갖고 있을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핑계'댈 곳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다만 무엇을 '핑계'대고 있는지 찾아보라. 내 삶에서 무엇이 사라지면 내가 행복할거라 생각하는지 적어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 문장은 진정으로 '진실'인가? 그리고 한번 더 질문하라. 나는 중요한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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