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더십 고전 of 고전


워렌 베니스의 '리더'를 지난 달에 읽었다. 꽤 인상깊게 읽었기에, 뭔가 남기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책도 곱씹어보거나, 삶에 적용해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정한 이번 글의 주제는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리더십 구루, 워렌 베니스가 생각한 리더십의 개념은 흥미롭다. 

그는 리더십을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색다르게 정의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따로 필요한 것이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이것보다 쉬운 일은 없는 것 같다. 


P. 55

본질적으로 리더가 되는 것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과 같다.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워렌 베니스는 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했을까? 

왜냐하면, 진짜 자신이 되기 위해선 몇 가지 관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책에 쓰여있지는 않지만, 통과가 필요한 3가지 관문을 나름대로 정의해 보고자 한다.   


1) 첫 번째. 솔직함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리더의 첫번째 자질은 바로 ‘솔직함'이다. 

그리고 솔직함의 문화를 장려하고 키우는 것이 리더가 해야 할 일이라고 못 박는다. 

P. 26

리더의 역할은 회사 내에 공정함, 솔직함의 문화를 장려하고 키우는 것이다.

“모든 비즈니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항상 있다. 그런 사람은 해고되기 마련이다.” 


나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솔직함'이란,

자신의 양심이나 내면, 혹은 ‘신'과의 관계에 근거하여,

더 이상 '모른척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위배되는 중요한 특성이다. 


인간에겐 자신의 목숨과 관계를 보전하고 영위하고자 하는 하는 자연스러운 본성이 있다. 

무언가 불합리하게 보이더라도 ‘나'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이나 큰 영향이 오지 않을 때, 우린 쉽게 눈과 귀를 감는다.

그래서 우린 무의식적으로 수 많은 상황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한다.'


분명히, 간디 이전의 수 많은 인도인들이 기차에서 차별을 받았지만 그들은 모른 척 했다. 

분명히, 로자 파크스 이전에 수 많은 흑인들이 버스에서 차별과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은 모른 척 했다.

이처럼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리는가? 아니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다. 


현대자동차의 박병일 명장만이, 현대차의 리콜 은폐와 기술 결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MBC의 김민석 PD만이 MBC의 왜곡된 언론 보도와 불공정한 인사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결정적 순간에서 자신만의 '신념'과 '솔직함’을 고수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를 위해선, '자기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신념이나 믿음이 있어야 하기 떄문이다.

P. 29 

조직 상부에 진실을 말하는 부하 직원은 용기를 필요로 하고, 그리고 이런 솔직한 행동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댓가를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리더는 지금까지의 상황과 주위 사람들의 기만을 견딜 수 없을 때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다.

첫 시작은 바로 '솔직함'이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이러한 솔직한 자기 표현에 근거한다. 그때 바로, 행동이 시작된다. 


김장겸은 물러나라!


2) 두 번째 과제, 시련과 성찰

안타깝게도, 모난 돌은 정을 맞고, 행동하는 자는 시련에 빠지기 마련이다.  

솔직한 사람은 호된 시련을 겪는다. 그 담금질 속에서 저항하는 자의 리더십은 성숙된다.


P. 33

호된 시련은, 리더가 되기 위한 한 가지 본질적 요소다. 시련을 겪으면서 리더십에 본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리더는 이런 호된 시련에서 교훈적인 것을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그리고 향상된 리더십 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단순히 시련을 통과하면, 누구나 리더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 있다. 바로, '성찰' 능력이다. 그 힘이 있어야 시련을 '배움'으로 만들 수 있다.  

리더십은 그때 숙련된다. 시련을 통해 '자신만의 배움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은 그렇게 길러진다. 그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 133

에이브러햄 잘레즈닉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리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한번 태어난 리더와 두번 태어난 리더. 한번 태어난 리더가 가정과 가족에서 독립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쉽다. 

두번 태어난 리더는 일반적으로 성장하면서 고민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심지어는 소외감을 느끼며,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내면세계를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신념과 아이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진정으로 독립성을 확보한다. 


자신의 신념과 시련을 근거해, 독립성을 보장받게 되면 그는 한 사람으로 당당히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굳건함을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는 진정으로 이끄는 자, '리더'가 된다. 


P. 239

어떤 리더도 리더가 되기 위해 계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계획을 세운다. 

그 표현이 가치있는 것일 때, 그들은 리더가 된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좋았다. 


3) 마지막 과제, 비전 제시

하지만, 리더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 남았다. 그 요건은 바로 '타인'에 관한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리더는 이제, '다른 이의 목소리'도 찾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의미의 생성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는 인간의 아주 오래된 능력이다.  


P. 44 (사피엔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작년과 올해, 엄청난 화제가 된 책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지혁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그 시점으로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어쩌면 협력은 '다른 이들과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공유하는 이가 아마 그 시대의 '리더'였을 것이다. 


P. 49 (사피엔스)

허구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신화', 우리는 그것을 집단의 '미션과 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핸드메이드 화장품 브랜드 Rush의 미션은 '사람과 환경과 동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이러한 '그들의 신화'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서 회사라는 모습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서 동물 실험 반대 캠페인을 하고, 자발적으로 봉사 하는 모습은 고대 사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러쉬의 동물 실험 반대 운동


자신의 내적 신념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 리더에게 주어진 마지막 테스트가 아닐까. 

이를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리더십의 주요 목적은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인간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가 필요하다. 

리더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가치관, 책임, 그리고 신념이 없는 리더십은 비인간적이고 해로움을 줄 뿐이다. 


글을 정리해보자. 

    1. 리더들은 정직하다.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의미한다. 

    2. 리더들은 행동하기 때문에 시련을 겪는다. 그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리더로 거듭난다.  

    3. 리더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의미, 즉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다. 그 결과, 공동체를 일궈낸다. 


나는 이러한 리더의 전형을 알고 있다. 바로, 혹성 탈출 시리즈의 '시저’다. (ㅎㅎㅎ)

그는 1편 '진화의 시작'에서, 인간을 향해 ’No!' 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했고

그러한 뜻에 동조하는 이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이뤘다.


2편 '반격의 서막'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시련에 빠졌고,

결국 공포와 두려움으로 지배하려는 코바의 위협도 이겨냈다.


마지막 3편 '종의 전쟁’에서, 그는 리더의 딜레마에 빠지지만, 슬기롭게 극복해 낸다. 

혼자서 극복해내는 것이 아니다. 현명하고 용감한 주위 동료들의 도움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한다.

진정한 리더는 결국, 자신을 넘어서 타인을 리더로 만들어낸다.


내가 아는 최고의 리더, 시저


시저가 영화 속에서 부딪친 시련과 딜레마들. 

생존과 비전, 단기와 장기, 실익과 가치. 개인과 집단. 복수와 용서.

리더는 결코 한 두 번의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통해 선택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리더는 하나의 '지위'나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자 '결단' 그리고 '상태'에 가깝다.


리더는 그저 지금 이 순간, 행동하는 것이고, 바로 오늘 되는 것이다. 

그저 매 순간 솔직해 지고, 시련을 겪고, 비전을 제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오늘, ‘나'라는 리더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2017년 5월 9일,
대선개표 방송을 보며. 


1. 내 고향, 대구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오랜시간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내 고향은 보수의 심장 ‘대구'인데, 거짓말 안하고 어린 시절 선거는 그냥 1번을 찍는건 줄 알았다. 기억을 되돌아봐도 선거를 하면 언제나 예외없이 1번이 당선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할머니나 아버지께 물어보면, 전라도도 1번 안 찍으니 우리도 2번 안 찍어줄 거란 논리를 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어차피 정치인은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너는 별로 신경쓸 필요 없다"는 말도 기억난다. 그러한 말들이 당연히 납득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더 깊이 생각해 볼 마음도 없었다. 파랗고 빨갛게 대비되는 지역구도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저 ‘원래 그런 것’이었다. 

1997년 대선. 지금은 신화가 된 ‘피닉제’의 활약 덕분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되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뭔가 큰 흐름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가졌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찰은 1도 없었다. 그후, 2001년에 대학을 들어갔고 나에게도 투표권이 생겼다. 이듬해 2002년. 나에겐 월드컵 4강과 삼성 라이온즈의 역전 우승으로 기억되는 해였고, 누군가에겐 효순이 미선이 사건과 노무현의 당선으로 기억되는 해다.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추모 시위에 참석하고, 투표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위에도, 투표에도 나가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 까지도 ‘어차피 정치인은 다 똑같아’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이회창이 누군지, 노무현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내가 투표한다고 뭐가 바뀌는지, 그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채 그 중요한 순간에 나는 눈을 감았다.       

2. 정치인은 다 똑같아
그렇게 진보정권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땐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미처 몰랐다. 마치 젊은이들이 젊음의 진가를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자유와 권리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인지 알았다. 그렇게 찾아온 2007년 대선. 이명박이 압도적인 지지로 집권 했던 때. 나는 외국에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투표를 하지 못했지만, 투표를 했더라도 별 도리는 없었을 것 같다. “잘 살아보겠다”는 원초적 열망이 온 국민의 눈을 가렸던 때니까. 외국에서 머물던 2008년, 인터넷을 통해 광우병 시위를 보면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짐작을 했고, 한국에 돌아오니 ‘4대강’은 마구 파해쳐지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012년까지,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평화’는 우리를 잠들게 하지만, ‘역경'은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2009년을 기점으로, 개인적인 삶에도 폭풍같은 변화가 밀어 닥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내 삶과 직면했고 뛰어들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하나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었고, 스터디를 했다. 그렇게 조금씩 깨어났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2011년 4월에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의 <나는 꼼수다>가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분야 팟케스트가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방송을 들으며, 책을 보며, 대화를 하며 정치에 가졌던 나의 오랜 ‘믿음과 기억’들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정치인은 다 똑같아”라는 말은 여러모로 ‘나쁜' 말이었다. 정치인이 똑같다고 하는 순간, 우린 ‘판단’과 ‘책임'을 멈추게 된다. 마치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수준으로 돌아간다. 뭘 먹든 어차피 똑같다. 먹고나면 다 배부르니까. 그러니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 배가 부르게 되는지, 앞으로 점점 더 먹을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맛은 어떤지 고민했어야 했다. 이명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정치인은 각기 다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3. 최순실 게이트
2012년 대선. 나는 소신껏 투표를 했지만, 결국 ‘보수의 응집’을 이길 수 없었다. 당시에는 분노했지만, 지금은 ‘사필귀정’이란 말이 떠오른다. 힘든 시기였지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이 지경이 되어도 홍준표 득표가 20% 넘게 나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건국이래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 된 최순실 게이트는 2016년 여름부터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의 ‘태블릿 PC’ 보도를 기점으로 이슈는 폭발 했고, 잠재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노도 연달아 터졌다. 수 차례의 시위를 거쳤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찰나 같기도 하고, 머나먼 시간을 지나왔다는 느낌도 든다.

나는 게을렀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적은, ‘게으른 자’다.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자. 내 판단을 위탁 하려는 자. 그게 바로, '과거의 나’였다. 내가 그랬듯, 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어차피 정치인은 똑같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라는 말로 선택과 판단을 멈춘다. 생각을 멈춘 자는 행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겨울, 정도를 넘어선 불의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도 각성하게 만들었고, 이는 집단 참여와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 사람들은 광장으로 쏟아졌다. 나라가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 자식에게 좀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젊은 세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의 의도는 제 각각 다를수도 있지만, 결국 그들이 가진 공통의 목적은 분명했다. ‘민주주의의 수호’다. 박근혜와 최순실, 그들은 나라의 근간, 헌법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탄핵은 인용되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4.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
지금 시간은 밤 11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확정되었다. 이제 우린 승리한 것일까? 민주주의는 수호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한 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광장에 나온 시민의 행동의 결과이며, 충분히 박수받을만 하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누구일까? 박근혜와 최순실과 같은 부패한 권력자들일까? 맞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시민의 각성을 이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의 우군’이기도 하다. 그렇담, 진정한 적은 누구일까? 상상해보자.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국가를 잘 통치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민으로서 정치 참여의 의무를 뒤로 한 채, 그저 ‘뛰어난 사람이 다스려 주길 바라는’ 사회 체제는 강화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민은 잠들고, 권력은 강화 되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건 ‘유능한 독재자’라고 생각한다. 박근혜는 독재를 하려했으나 다행히도 무능했다. 그리고 유능한 독재자를 만드는 것도 결국, '게으른 시민'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에게 주권은 필요 없다. 참정권 따위 무슨 소용이 있나? 실제로 카이저가 선정을 배풀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전권을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정치 제도는 시민의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한데, 그것이 이루어진 이상 답답한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어린 시절 읽었지만, 아직까지 깊이 인상깊게 남아있는 말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진짜 적은 ‘시민들이 정치를 잊을 정도’의 치정을 펼치는 독재자다.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시민의 각성과 노력에 의해서 일구어졌을 때 의미가 있다. 지금 물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이 각성이, 이 힘듦이, 이 과정이 민주주의 그 자체다. 쉬운 길은 없다. "저는 투표를 했으니. 이제 대통령님, 세상을 바꿔주세요.”라고 말하지 말자. 판단을 위탁하지 말자. 쉬운 길을 걸어가지 말자. 기대지 말자.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역경이 없이도, 스스로 깨어있고자 노력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야 한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앞으로의 세상이다. 

뭐, 그래도 오늘은 기쁜 날이다. 
행동하고 투표한 우리는 모두 행복할 자격이 있다.

함께 즐기자. 내일을 기다려 보자 :) 




Q. 당신은 우주비행사다. 당신의 완벽한 하루를 설명하라.


위잉 위잉. 우주정거장 회전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오늘은 우주 비행 364일째. 드디어 내일이면 지구로 돌아가는 날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지퍼를 내리고 수면실에서 나왔다.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난 모양이다. 다들 매미처럼 이리 저리 매달려 자고 있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한편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짠하다. 한 모금 물을 마시고 나와 사령실로 들어갔다. 언제나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역시, 지구다. 태양계 셋째 행성이자, 인류의 고향 그리고 모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지구는 푸른 베일을 감싼 신부와도 같다.”고 했고, 유진 서넌이란 우주인은 “지구는 우주의 오아시스다.”라고 했다고 하던데, 나에게 지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파랗게 흔들리는 동공’처럼 보인다. 아무렇지 않은듯 침착하게 자전하고 있으나, 실은 고민 중인 느낌이다. "이 놈의 인류를 어떻게 해야할까"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예쁘게 보였을 것이다. 다른 생명들과는 달리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자신의 자원을 제법 활용할 줄도 아는 모습이 기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인류는 자신이 지구에 발을 닿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지구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몇 차례에 거친 세계대전을 끝으로, 사실 지구는 마음이 돌아선지 오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내일 다시 돌아갈 유일한 곳도 결국 지구다. 도망갈 곳도, 물러설 수도 없다. 자신의 ‘어머니’를 되살려야 하는 주체도 결국 돌아와야 하는 탕아, 인간이란 사실은 변치 않는다. 돌아가서 ‘지구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생각을 갈무리 하고, 아침을 먹었다. 마지막 우주식이라고 생각하니 그 지겹던 음식들도 꿀맛처럼 느껴진다. 2시간 근육 운동을 하고, 주어진 업무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대부분 후임에 대한 인수인계다. 저녁이 되자, 동료들이 나를 위한 깜짝 파티를 해줬다. 지난 1년의 생활을 압축된 영상으로 보니, 기분이 뭐랄까… 짧은 시간에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한 느낌이다. 처음 우주에 도착했을 때의 긴장. 처음으로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을 바라봤을 때의 환희. 원치 않는 사고로 동료를 지구로 돌려보냈을 때의 분노. 일년 가까이 가족을 보지 못하는 슬픔 그리고 기나긴 외로움. 그간 겪었던 온갖 감정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애써 준 동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우주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 새로운 가능성에 온 몸이 떨린다. 지퍼를 열고 수면실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구나. 완벽한 하루의 조건은 바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 그것을 우주에서의 하루, 마지막에 조용히 깨닫는다. 


“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제임스 라벨.  


이 글은 브런치 매거진에 동시에 연재되었습니다. 좀 더 제대로 보시고 싶은 분들은 링크를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옮겨 왔더니 이상해서 글만 올립니다. :)  










지금부터 쓰는 이 글은 내가 꼭 쓰고 싶었던 주제다. 첫 구상을 2013년에 했으니,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3년 정도 하게 되면, 최초에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지 까먹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반성한다. 그저 쓰면 되는 것을 미뤘던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보태고 싶다.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이 글의 모티브는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란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책은 하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야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사실 마야 제국은 그리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마야제국의 인구가 1,500만 명을 상회했으며 인구 밀도는 오늘날의 시카고와 같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내부 시스템도 잘 갖춰진 하나의 국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기 750년부터 850년 사이에 돌연 자취를 감춘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 문명 붕괴의 진정한 원인

레베카 코스타의 결론은 이것이다. 마야인들이 직면했던 문제의 복잡함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는 것. 그렇게 가속화된 만성적 문제가 오랜 시간 번영한 마야 문명을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이다. "어떤 사회가 더 이상 문제의 해결책을 ‘사고’할 수 없게 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인식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사회가 일단 이 인식 한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종국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해당 문명을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바로 붕괴의 진정한 원인이다.” (p.35) 저자에 따르면 사회가 이렇게 위기에 처하기 위해선 몇 번의 징후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정체 상태다. 더 크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지만, 기존에 해결하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미친 짓’이 연상된다. 이것은 미친 짓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은 어떤가?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동 아닌가? 기존에 해보지 않은 행동 그 자체가 너무 두렵고 무서운 까닭에, 우린 ‘익숙한 것’만 반복하면서 자신을 위안한다. 마치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새로운 시도를 겁내면서, 자신에게 익숙한 토익과 스팩에 매달리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해 왔던 행동이 공부이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징후는 이것이다. "상황이 더욱 절망적으로 악화되면 두 번째 징후가 나타난다. 즉,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다. … 몸은 점점 지치고 그에 따라 두려움이 고개를 들지만 어떤 데이터, 정보, 사실로도 우리의 믿음을 꺽지는 못한다.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p.40) 믿음이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 이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며,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을 습득할 수 없을 때 사실 대신 믿음을 택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고, 이 책 <지금 경계선에서>에서는 '입증되지 않은 관념'을 뜻한다. 그리고 지식은 믿음과 반대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로, 지식은 어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은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믿음이 이러한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사람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 믿음을 흔들려는 모든 이는 바로 적이 된다. 맹목적 믿음은 언제나 그런 외부와의 갈등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어떤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십자군과 나치 그리고 IS에서 그 공통점을 확인한다.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어. 

사실, 어느 정도의 믿음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하루의 시작에서 끝까지,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아마 인간은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린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 ‘믿기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있고,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면 차가 멈출 거라고 ‘믿기 때문에’ 무사히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도 있다. 그건 바로, 믿음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그렇다고 여기면 되기에 믿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믿음보다 획득하기 훨씬 어렵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식을 얻는 데는 추상, 탐구, 학습, 추론, 분석, 종합, 의사결정, 판단과 같은 복잡한 인식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모방, 응용, 해석, 검토 등도 필요하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하면 지식 습득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p.42) 단순한 결론이지만, 당시 책을 읽던 나에겐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을 탐구하는 쪽보단 믿음을 따르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구나. 물길로 치면, 저항(바위나 나무)이 적은 쪽으로 더 많은 물이 흐르는 법이고, 개념으로 말하자면 ‘확증편향’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 쉬운 말로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자명한 사실. 왜? 그게 쉬우니까. 




2) 우리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수 있을까? 

마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비에 의존해서 물을 공급받는 상태였고, 그것이 꽤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수량이 지속해서 감소세를 보였음에도 마야 시민들은 그 상황을 직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를 회피한 결과, 그들은 거대한 ‘의식과 재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파국을 맞이한다. 마크 스티븐슨 기자는 “고고학자들, 인간제물의 증거를 발굴하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제물이 된 사람들은 심장이 도려내어지거나, 목이 잘리거나, 온몸에 화살이 맞거나, 돌에 맞거나, 무거운 것에 눌려 으스러지거나, 피부가 벗겨지거나, 산채로 묻히거나, 신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던져지면서 죽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아이들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45) 이렇게 마야인들은 이성과 믿음 사이의 균형을 잃고, 입증되지 않은 맹목적 의식에서 모든 답을 구하고자 했다. 마야 제국이 멸망한 외부적 원인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부적 원인은 단순하다. ‘이성과 믿음’, 그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문명도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일방적으로 휩쓸리는 법은 없다. 모든 건 함께 이루어지는 법이다.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소장이나 하버드대학 교수인 야니어 바얌은 그의 저서 ‘메이크 싱즈 워크’를 통해 복잡성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림짐작으로 볼 때, 유기체가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유기체의 복잡성이 환경(모든 규모의 환경)의 복잡성과 대등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2016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디에 와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당연히 살아남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불행하게도 세계의 석학들은 그렇게 진단하지 않는다. 이미 그 경고는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인터뷰를 모아서 편집한 책 <문명, 그 길을 묻다>에는 제레미 다이아몬드 (총,균,쇠 / 지금까지의 세계 저자)의 확신에 찬 의견이 담겨있다. 그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 ‘1000년 이내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인자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스티븐 호킹은 틀렸어요.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1000년의 시간이 남이 있지 않아요. 단지 50년 뿐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새존을 위한 문제를 풀든지, 아니면 완전히 망치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 이 별을 망쳐놓고 다른 별을 찾겠다고요? 이것은 답이 아닙니다. … 지금 우리별을 망가뜨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p.21)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자원은 50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곤 “그 어떤 결정일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 가장 마지막에 남이 있을 그 아이를 생각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p.48)고 말했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분명 경계에 서 있다.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그저 주저앉고 말 것이냐? 지금은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다. 눈과 귀를 열어야 할 시간이다. 호흡해야 할 시간이다. 멈춤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마지막 물고기를 잡고서야 돈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는 인디언 속담을 기억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 모두가 말이다.




3) 믿음과 지식의 균형, 그 시작은 무엇일까?

혹시, 위에서 언급 된 담론이 너무 커 보이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나의 삶으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실은, 한 문명의 흥망성쇠와 한 인간의 삶은 닮았다. 여기서 돌이켜봐야 할 것은 우리네 삶이다. 다시 말해,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인생의 암흑기’를. 어린 시절 이리저리 읽었던 독서는 차치하고,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시기는 바로 ‘입대 이후’다. 많은 남자들에게 군대는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다. 나에게도 그랬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낯섬과 여유’가 아닐까. 일상에서 떨어진 낯선 공간과 2년이란 시간이 주는 여유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운이 좋게도, 난 책상 앞에서 근무하는 보직을 맡았다. 책을 접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병과 일병 때, 나는 마음대로 책을 읽었다. 어쩌면 가장 자유롭게 생각하고, 책을 읽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독서량에 스스로 뿌듯했고, 목표도 세우고, 일기도 썼다. 문명으로 비유하자면, 고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철학의 특징은 ‘하나의 사상’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레토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세상의 근본 물질'에 대해서 탐구했고,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성찰했다. 정해진 것이 없었기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기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줄줄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고대 이후, 중세가 찾아온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된 시대. 그리고 중세 시대에 들어서, 앞서 말한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건 우연히, 어쩌면 필연적으로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상병이 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타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었고, 이어서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과 ‘지구별 여행자’를 읽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영적인 어떤 것’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구나! 그리고 그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난, 전역 이후론 뭔 뜻인지도 모른 채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뉴에이지 계열의 ‘람타’ 그리고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경허 선사의 일대기) 그런 책들을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보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와 생각에 내 모든 일상에 가득 찼다. 그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깨달음’이었다. 나는 깨닫고 싶었다. 하나의 진리를 꿰뚫고 싶었다. 실은, 깨달음이란 방편으로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보는 편이 무방 하리라. 

나는 2005년에서 2008년을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정의한다. 굳이 문명으로 표현하자면, ‘중세 시대’다. 물론, 전적으로 어두운 것은 아니다. 즐거운 경험도 많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에니어그램’이나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운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분명 “치우쳐 있었다"는 것이다. 내 안의 다양한 자아가 꽃 피어나도록 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자아만 활발히 작동한 시기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의 종류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뉴에이지 책, 종교 경전, 그리고 깨달음에 관한 책만 읽었었다. 게다가 그 권수도 많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믿음과 지식’의 균형을 찾고자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까? 사실 거기엔 ‘하나의 믿음에 경도되어 자신의 삶을 망친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깨달음을 쫓아 자신의 삶을 버리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고, 위험해 보였다. 내 삶을 위해 시작한 공부가 어느새 '삶을 배신하기 위해’ 쓰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언어다. "니체는 당시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기술하면서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고 보았다. …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27)

시간이 지나, 2009년에 이르러서 난 전공을 포기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지만, 아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1년의 100권을 목표로 책을 읽었고, 빌려보지 않고 모두 구입했다. 스터디를 하고, 수업을 듣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균형’을 찾아갔던 것 같다. 아직 멀었지만, 균형 감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다시 질문하자.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 질문을 품고 함께 공부하러 가자”고. 그렇게 질문을 품는 것이 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맹목론자도, 어느 곳에도 답은 없다고 확신하는 불가지론자도 나는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오로지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말하고 생각하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나 혼자 할 수는 없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그들을 빌려 사유하고, 소개하고, 연결짓고 싶다. 한 달에 1번, 기쁘게 쓰고 싶다. 이제 시작이다. 즐겁게 봐 주시길. :) 

“독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Q.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화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이 질문은 그저 상상이 아니다. 놀랍게도 ‘실제 상황’에 가깝다. 글을 쓰고,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른쪽이다. 그곳에는 우리 집의 유일한 식물이 하나 있다. 2014년이었나, 집들이 선물로 받은 식물인데 이 험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열심히 살아준 고마운 친구다. 나와 아내, 재원이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파리를 보니 이미 노랗게 물든 흔적이 보인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여지껏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다. 그나마 아내가 가끔 물을 주는데, 이번에는 물 주는 시기가 조금 지났나 보다. 화초를 노트북 옆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곤 자세히 봤다. 같은 방에 있었던 세월은 이미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렇게 '들여다 본 적'은 처음이다. 우선, 참 예쁘다. 이 식물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분명 ‘혈통(?)’이 좋은 녀석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파리의 생김새도 단단하고, 무엇보다 줄기 색깔이 옅은 녹색인데, 꽤나 고풍스럽다. 이미 아래 쪽 이파리는 갈라지고 바래져서 생명을 잃어버린 부분도 있다. 자신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갈 때, 이 녀석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녀석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마치 어린왕자가 된 기분이다. 음.. 잠시 고민한 결과, 이름은 바로 ‘금순이’로 정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굳세다’이다. 가만히 보니, 줄기의 단단함과 이파리의 푸르스름함이 어울려서 참으로 ‘굳세다’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곤 곧 이어 연상되는 제목이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이게 뭐길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걸까? 검색 했더니 유명한 노래이자, 드라마, 영화 제목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ㅋㅋㅋ 어쩐지 익숙하더라. 그렇게 이 ‘식물’은 오늘에서야 ‘금순이’가 되었다. 금순이가 살아야 할 이유를 3가지로 말해주고 싶다. 첫 번째 이유. “금순아,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너는 분명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서 있었겠지, 그 동안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나에게 좀 더 신경쓸 기회를 줘. 잘할께.” 두 번째 이유. “금순아, 넌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식물이야. 우리가 비록 여러가지 식물을 키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네 친구들을 만들어 줄 자신은 없지만, 너 하나 만큼은 책임지고 싶다. 우리 집 유일한 식물이라는 자긍심을 가져줘.” 그리고 마지막 이유. “금순아, 아마 마지막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거야. 너는 나에 의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붙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자기 자신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를 가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지. ‘그 이유’을 스스로 지켜갈 수 있도록 꼭 살아줘, 내가 도와줄께.” 이상, 글을 마쳤다. 나는 이제 금순이 밥 먹이러 가야겠다. :)  


1초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



땡. 1초가 지났다. 방금 1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언뜻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리고, 검지와 중지, 그리고 약지를 약간씩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이런 저런 글씨가 쓰여지고 있다. 그 순간, 땡. 다시 일초가 지났다. 그 사이 내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심장은 쿵쾅 쿵쾅 뛰면서 온 몸에 피를 보냈을 것이고, 폐는 열심히 숨 쉬며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와 장은 소화를 시키고 있겠지. 뇌.. 그래, 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땡. 뇌는 ‘1초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이리저리 연결하면서 언어를 찾고, 연결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땡. 땡을 치는 이 순간에도 일초는 계속 흐른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초를 기다렸다. 나는 1초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 1초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개념일까? 만약 내가 1초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이라고 치자. 지금 나와 시간 개념이 같을까? 완전히 다를까? 1초라는 시간의 단락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약속’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 시간의 개념이 떠올랐다. 그리스에선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2개 있다고 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그야 말로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와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말하지만, 카이로스는 일순간이나 인간과 주관적 시간을 나타낸다. 1초를 그저 흘러가게 둔다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를 살게 된다. 하지만, 그 1초를 관념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순간, 나는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게 되고, 그 시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 즉 크로노스를 관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렇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니다. 내 앞에 놓여진 1초. 그것을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1초를 반기자. 기다리자. 그리고 맞이하자. 깨어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루 하루를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그 하루가 과연, 그저 24시간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독서 #책읽기 #가을 


현대인들에겐 책 볼 시간이 없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책 볼 시간이 도저히 없다. 내가 유일하게 책을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하철'뿐이다. 지하철 이외의 장소에서 책을 본 기억은 나름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하던 시기뿐이다. 2012년을 기점으론, 앉아서 책을 읽은 적은 손에 꼽는다. 앉으면 보통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책을 읽기 위해 나는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일단 강의장소가 멀면 멀수록 보통은 주저하지만, 난 마다하지 않는다. (되려 속으론 반긴다.) 비효율적인 동선을 많이 만들수록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기에. 작년엔 그 정도가 심해서 매주 오산, 일산, 남양주, 시흥, 성남을 왔다 갔다 했던 적도 있다. 올해 들어서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이동시간이 만만찮은 곳들이 여전히 많다.


그렇게 시간을 확보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강의 준비는 끝이 없는 거라서, 이동 내내 강의 준비를 하면 책을 볼 순 없게 된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에 이어 두번째 조건, '정신적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나는 이동 중엔 내가 강의 하러 간다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 강의 준비 시간과 책 보는 시간은 철저히 구분하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없기에.


마지막, 사실 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 발터 벤야민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강의하러 가는 길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 기쁨이 참으로 커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탁월한 비유다. 그 문구를 나에게 가지고 오면 이렇게 된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일까, 책을 보기 위해 먹고 사는 것일까. 문득,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게. 어느새 성큼 다가온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있는 이유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 김현 

인문학 강의를 들을 때 봤던 글인데, 최근 책 <싸우는 인문학>을 보다가 다시 접했다. 이 글은 나에게 꽤나 큰 울림을 주었다. 문학과 인문학의 유용적 무용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 글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비평가에 의해서 무용한 것이 되려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윗 글에서도 특히 나는 이 두 가지 글자에 꽃혀버렸다. ‘억 to the 압'. 사전적 의미로 '억압’이란,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의 주제가 ‘친밀함’이었다면, 요즘은 이 억압이란 개념이 나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요근래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펼쳐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이 글을 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무엇에 억압 당하고 있을까? 질문을 한번 품어보자. 

앞서 나온 사례를 통해 억압을 한번 들여다보자.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 필요한 말이라, 차라리 지금은 유용함은 무용함을 억압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들은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들은 노래부르는 베짱이를 억압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느냐고, 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베짱이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무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억누른다. 그렇게 베짱이는 ‘유용함’으로 억압당한다. 이러한 예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다. 대학생들은 이제 1학년 부터 ‘유용한’ 스팩을 쌓느라 ‘무용한’ 다양한 경험들을 뒷전으로 미룬지 오래고, 고등학생들은 ‘유용한’ 국영수 공부를 하느라 ‘무용한’ 미술 및 음악, 체육 활동을 억압당하고 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다를까?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유용함의 바다’이고 우린 그곳에서 사는 ‘물고기'다. 유용해 보이지 않는 활동을 무시하다 못해 조소하고 심지어는 타박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렇게 우리네 물고기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유용함의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에 억압 당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억압하는지도 모른채. 

신문 기사의 폭력성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생각해보자, '핵심은 곁가지를 억압한다.’고. 신문 기사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자의 역할은 사건의 주제가 되는 헤드 라인을 가급적 ‘간결하게’ 다듬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곁가지들은 필연적으로 잘려나가게 된다. ‘핵심만 논하는 것’ 그것은 바쁜 우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필연적 일상이 되었다. 즉, 핵심과 본론이 곧 미덕이 된 사회다. 언듯보면, 이것은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억압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 제목을 보자.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 아마 대부분은 시선을 0.1초 정도 머물다가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기사로 쓱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실은 이 기사의 사건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지 보이는가? 알랭 드 보통의 <푸르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오는 예시인데, 참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곁가지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모두 품고 있지만, ‘사건의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모두 잘려나간다. 그와 동시에 비극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사라진다. 결국 우린 삶의 본질 중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랭 드 보통의 책 48쪽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주의깊게 읽어보자. “이른바 신문을 읽는다고 불리는 혐오스럽고도 관능적인 행위.”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 덕분에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벌어진 모든 불운과 격변,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가와 배우의 냉정함 등등은, 심지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일종의 아침 대접으로 변모되며, 아울러 우리는 카페오레 몇 모금을 마시도록 권유받는 것이다.” ...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5만 명의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잊고, 신문을 한편에 던져버리고, 일사의 지루함에 대한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나는 이것이 매일 아침 뉴스로부터 우리가 받는 ‘억압’이라 생각한다. 글자수 40자 제한의 트위터나 페북도 실은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억압받는 삶의 풍부한 곁가지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성실함은 당연한 미덕인가
우리기 흔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실함과 게으름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성실함은 게으름을 억압한다. 며칠 전 페북에서 웃긴 자료를 보았다. 한 남자가 말한다.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각자 생각해보라. 그리곤 남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ㅋㅋ 관중들은 박수치며 환호한다. 알아 봤더니 이 남자는 러셀 포스터, 수면 주기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경학자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보시라. ‘수면’에 대한 좋은 강연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해당 발언은 16:45초 쯤에 있다. (링크는 여기 http://on.ted.com/Foster) 나 역시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성실한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으른 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말 그대로 '게으른 사람들'로 본다. 딱 한번 필터를 쒸울 뿐이지만 그 타격은 크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그렇게 ‘반대편 사람에 의해서’ 손 쉽게 억압받는다.  




이 비슷한 맥락에서 ‘목표’는 ‘방황’을 억압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 부터 우린 어른들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몇번이나 듣는다. 넌 꿈이 뭐니? 넌 나중에 하고 싶은게 뭐니? 올해 목표는 뭐니?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나에게 관심있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던지는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만들어낸 어릴 적 나의 꿈은 ‘과학자’다. 그러면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ㅋㅋㅋ 이처럼 '꿈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꿈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억압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나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며, 왜 목표를 적지 않냐고. 왜. 왜. 도대체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나 역시 이러한 오류를 많이 저질렀다. 아니,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대 중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던 나의 당시 꿈은 ‘20대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멘토링을 해주겠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미친 생각임에 틀림없지만, 그 당시 나에겐 하나의 ‘비전’ 이었다. 그리곤 외치고 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그 말이 ‘방황 혹은 목표 없음’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겐 얼마나 억압적이었을까. 평생 죄를 갚으며 살기에도 모자란 죄를 지었다.

모든 구분은, 그 자체로 억압이 된다.
그렇다. 어쩌면 모든 구분은 억압일지도 모르겠다. 선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점이 되며, 그와 동시에 악을 억압한다. 전문가는 스스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기준이 된다. 그리곤 자연스래 비전문가를 억압한다. 이게 어떤 장면인지 연상되지 않으면 상상해보라.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그 주제에 관해서’ 함께 존중 받으며 활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상상되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아직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한 편이다. 전문가는 그 존재로서 비전문가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연스래 발언권을 뺏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까닭은 위의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명히 기준 짓는 사람일수록, 그 기준으로부터 타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되려 어려운 법이기에. (게다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돈을 많이 쓰면 썼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최근 철학자 들뢰즈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이런 개념이 있더라. 들뢰즈는 '분리'를 '층화'라 칭했다. 그는 말한다. 층화된 사회일수록 고착화된 사회라고. 계층끼리 대화가 안 되는 그런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반면 탈층화된 사회는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관계를 맺어가며 훨씬 더 역동적 삶을 창출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일까?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and (그리고)’의 관계를 맺는 것을 꿈꾼다. 사물들이 하나의 중심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새로운 ‘and 그리고’ 그리고 ‘between 사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이 형식의 사유를 들뢰즈는 ‘리좀’이라고 불렀다. 리좀이란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통해 자유롭게 관계 맺으면서, 장 전체을 만들어가는 사고를 말한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강의를 듣는데 난 너무 즐거웠다. 그래. 내가 원하는 사회가 바로 이러한 ‘탈층화 된’ 사회임에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전문가란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사회. 물론 꿈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생각해 보면, 대학 동문회나 향우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로써 자연스러워 진다. 사실 어릴 적 부터 그런 집단에 대한 이상한 반감이 있었는데, 그 반감의 이유를 이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억압에 대한 마지막 성찰, 깨달음.

정리해보자. ‘분리'은 억압을 만들고, 억압은 '인간 소외'를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린 분리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로 부터 소외된다. 관계는 그렇게 단절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는 파편처럼 살아간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끼리. 선함은 선함끼리. 유용함은 유용함끼리.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준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 반대편의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그 이유로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의 생동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시키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성 및 깨달음’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20대 중반부터 이 ‘영성 및 깨달음’이란 테마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나는 강렬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출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젠 정반대의 물음을 던진다. ‘깨달음’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을까? 

실은 이 질문을 품고 산책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깨달음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하다. Oneness, 즉 개체가 분리를 넘어 하나됨을 인식하는 것, 깨달음은 이 상태를 말한다. 이는 평화로운, 비이원적인 상태를 의미하며 자아(에고)로 부터 자유로워진, 언어를 넘어선 영역을 가리킨다. 나의 미천한 지식이 이 모든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으론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레 무엇을 억압할까? 나는 보았다. ‘깨달음’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수 많은 구분이 생겨나는 모습을. 영성이나 의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고, 구별하고, 선을 긋는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앞서 말한 ‘탈층화’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비판하려는 것은 ‘깨달음의 추구’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일련의 ‘무의식적 억압’이다. 우리를 둘러싼 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수 많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했고, 억압했고, 무시했던 적이 있고 말이다. 이러한 예시가 아디야 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인 집단에서 매우 흔히 일어난다. 나는 옳다. 깨어났으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깨어났으니까. 에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꿰뚫기가 가장 힘든 에고는 바로 실재를 잠시라도 보았던 에고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남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깊숙이 미혹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지나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디야 샨티의 말처럼 우리에겐 결국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 새로운 눈을 갖는 훈련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과 대면하는 것이다. ‘옳다고 주장하고, 구분하고, 억압하는’ 내 모습과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이다.  

결론, 자명한 것을 의심해보자는 것 
깨달음이란, 결국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알아차림이다. 무엇에 대한 알아차림일까? ‘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도입, '유용함과 무용함'에 대한 분리를 너무도 지혜롭게 정리한 글이기에 빌린다. 이 지혜로운 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모든 분리는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앞서 말한, 무용함과 유용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분리해서 읽을 수는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분리하려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결론을 쉽게 풀어보자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것, 자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일 수록 더욱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일수록 그것은 되려 상대를 강하게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들 옳다고 느껴지는 개념 마저도, 예를 들어 ‘깊이 있는 삶’ ‘친밀한 관계’ 심지어 ‘타인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삶’ 마저도, 억압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게 억압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특히 가까운 아내와 가족들)에게 내 가치를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그 축적된 억압들은 내가 앞으로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나의 업이다. 나는 이러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무엇을 억압하는가. 아니, 당신은 무엇을 자명하다고 믿는가.  




최근 재미있는 강연을 들었고, 인상깊은 책을 읽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강연과 책 그리고 개인적 경험이 연결되었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재미있게 본 강연은 바로 TED <당신이 중독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잘못되었습니다>이다. 요한 하리란 작가의 강연이고, 내용이 너무 좋아서 전문을 대략적으로 옮겨 적어 보았다. 링크는 여기로. 내용이 길지만, 핵심만 정리하면 이렇다. 기존에 우린 중독의 원인을 ‘약물’ 그 자체에 둔다. 하지만 중독의 원인은 그것이 아니다. ‘소외’가 중독의 진짜 원인이다. 감옥에 갇힌 쥐들은 헤로인에 쉽게 중독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행복하게 놀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쥐 공원’에서 노는 쥐들은 그것을 쉽게 섭취하지 않는다. 마약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포르투칼 역시 중독자들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을 역으로 사회와 재결합하는데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마약 비율이 현격하게 줄었다. 마약을 합법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은 ‘쥐 감옥’에 가까운가, ‘쥐 공원’에 가까운가? 우리가 아무리 다양한 SNS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루 종일 심심할 틈도 없더라도, 따스한 온정을 나누는 경험이 없다면, 깊은 친밀감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인간 관계’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완벽한 쥐 공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의 쥐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TED 강의 중 이런 말이 나온다. "피터 코헨 교수는 ‘중독’이라 불러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교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에 억눌려 교류를 할 수 없을 때, 우린 안도감을 찾기 위한 어떤 것을 갈구하게 된다. 도박, 성인물, 코카인, 대마초, 게임 등. 그게 우리의 본능이다. 뭔가와 결속하려는 것. 그렇게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이 말에 참 많이도 공감하게 된다. 강의의 결론은 마지막 문장이다. “중독의 반댓말은 단지 ‘많은 정신’이 아니다.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관계’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니었다. 최근 몇 년의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과거의 나는 굉장히 관계 맺기에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 때는 그 정도가 심해서, 친한 친구 1-2명을 제외하곤 제대로 관계도 맺지 못했었다. 막 왕따당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영향력은 전혀 갖지 못한, 정말 그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관계를 맺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마냥 귀찮았다. 그래서 되려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거나, 혼자서 책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20대를 지나면서 그런 폐쇄적인 성향은 다소 나아졌으나, 그것도 역시 ‘비교적’이었다. 게다가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2년 동안은 영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에 빠져서 사회적 관계를 고립시켰던 때도 있었다. 자취방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한 달 가까이를 보낸 적도 있었고, 게임이나, TV프로그램, 성인물과 같은 것에 중독 된 것도 사실이다. 가족과도, 친구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관계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지금 생각하면 그리 건강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최대의 암흑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중독’에 빠진 것이 아니라, ‘관계’로 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 ‘친밀함'로부터의 소외는 결국 그에 마땅한 대안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고, 그 대상은 앞서 말했던 그런 ‘구하기 쉬운 것들’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튜 캘리의 <친밀함>이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친밀한 인간관계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거울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고립되어 혼자 있으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우리를 꺼내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다.” (P.26-27)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의 문제점은 이러한 나에게 거울이 되는 ‘친밀한’ 사람들이 적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직언’을 들을 수도 없었고, 내 확신을 스스로 의심할 성찰 능력도 더군다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방에서 온갖 종류의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방에서 나오는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허긴, 아직 내 그림자의 일부는 아직 그 방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튜 켈리의 <친밀함>은 정말 좋은 책이다.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 삶을 더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고, 더 나은 내가 되도록 기여하는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나라의 좋은 책들은 대부분 절판되기 마련이고, 이 책도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없으리라. 이 책은 ‘인생’은 곧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옮겨본다. "인생이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 어떤 사람과 진실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당신 자아의 모든 면을 보여주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가면을 벗고, 숨겨둔 무기를 내려놓은 채 겸손하게 우리의 삶으로 이들을 안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장점과 단점, 허물, 결점, 약점, 재능, 능력, 성취 그리고 잠재력은 또 무엇인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인 까닭이다.” (p.19) 친밀함이란, 자신을 성숙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표현이다. 

그렇담, 친밀함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엔 양면성이 있듯, 친밀함도 그러하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선 한 가지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건 무엇일까? 바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두려움’이 아닐까? 매큐 켈리에 따르면, 이 두려움에서 엄청난 기만이 생겨난다. 이 기만 때문에 우린 타인과 관계 맺고, 진실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 고난 속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까닭에 어떤 이는 술의 힘을, 누군가는 쇼핑의 힘은, 혹자은 약물의 힘을 빌린다. 매튜 켈리의 말은 이어진다. “모든 중독은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허전함을 채우려고 할 때 생겨난다. ... 중독은 우리들을 자기중심적인 환상세계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는다. 중독은 우리들의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에 확신을 심어준다.” (p. 31-32) 이렇게 소외와 중독은 ‘우리의 거울 - 타자’를 지운다. 오로지 ‘에고’만을 살찌게 할 뿐이다. 

중요하니 반복하자. 중독의 반댓말은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친밀함’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결코 친밀함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상의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드러내야 한다. 가장 먼저 누구에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즉, 타인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친밀해져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자신과 함께할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답변은 이렇다. "오직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고독하고 고요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다.” (p.24)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되려 우린 ‘홀로 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홀로 됨'은 ‘외로움’와 비슷한 양태를 가지지만, 본질적으론 완전히 다르다. ‘외로움’이란 '(원치 않지만) 홀로 되어 버린 것'이며, '홀로 됨’이란 ‘(나의 선택에 의해) 홀로 있는 것’이다. 자발적 고독은 결코 고독이 아니다. 그건은 나 자신과 친밀함을 쌓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다. 깊은 자기인식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대화 역시도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홀로 됨’이 필요하다. 그나마 내가 조금씩 철이 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유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 이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생각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나누기 시작하면서, 다시 말해 더 깊은 수준의 대화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홀로됨과 커뮤니티의 '지혜로운 변증법'을 이루어야 한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희퍼는 <함께 삶>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홀로될 수 없는 이에게는 커뮤니티를 경계하게 하자.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는 홀로됨을 경계하게 하자." 이 경고를 지침으로 삼는다면,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심톡을 하는 이유는 이런 욕구와 갈망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외로웠던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처음 심톡을 열 때 이런 욕구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이러한 결과를 무의식적으로 그리면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친밀함을 위해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첫 시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친밀함이란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기억하기 쉽게 한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가 분별력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p.21) 그리고 내가 파커.j.파머를 위시로한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것도, 사회적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에 관심이 있는 것도, 계속해서 학습조직을 꿈꾸는 것도 모든 것은 이 ‘관계’라는 숙제를 풀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는 것은 참 유익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드러내게 되고, 그 과정에 내가 몰랐던 나의 내적 동인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뒷걸음 치다가 뭐라도 걸린 격이다.  

정리해보자. 당신이 만약,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면 주위를 돌아보자. 아니, 스스로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없더라도, 공허하고, 사는 것이 헛헛하다면 자신을 돌아보자. 당신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들과 얼마나 ‘자주’ 만남을 갖는가? 그리고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한번 떠올려보자. 설사 당신이 놓인 곳이 혼자뿐인 ‘감옥’이라도, 이제 우린 서로의 힘으로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 손을 내밀면, 생각보다 우리 주위엔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첫 번째, 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철학자 헤카토가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어떤 진전을 이루었는지 그대가 물었지? 난 이제 막 나 자신의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네’ 그 글에 감동한 세네카가 말했다. "그 말이야말로 내개는 진정 위대한 은총이었다.” 친밀함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내 생각이 어떠한지, 내 느낌과 욕구는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이다. 그 내면의 시간이 없이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 없이는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무엇일까?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 바로 가족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얼마 전 여름 휴가였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랑 함께 놀고 있었고, 나와 아내는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나는 ‘연결됨’을 경험했다. 그리고 인식했다. "가족은 세상과 내가 이어지는 가장 강한 연결선이구나”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우린 수 없이 넘어지고 싶어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뿌리, 가족이 주는 힘으로 말이다. ‘깊은 관계’에의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가족부터 만나보자. 그리고 가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자. 더 나은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기여하자. 그렇게 친밀함의 원을 조금씩 확장시켜 보자. 우리 사회를 감옥이 아닌, 정말 멋진 ‘테마 파크'로 만들어 보자. '중독과 소외'라는 현대 사회의 이 고질적 문제는 이 작은 실천으로 점차 해결될 수 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러하길.  


  1. 지은 2015.08.22 10:49

    공감백배! 멋진고백에 감사해요 코치님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다
일주일에 걸쳐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고 있다. 아니, 만나고 있다. 내가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올해 초에 박찬국 교수가 쓴 <초인수업>을 하나 읽었을 뿐, 그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철학책 역시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 VS 철학>을 비롯한 철학사 중심으로 봤을 뿐,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책은 역시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접했다. 물론 그 어렵다는 에티카를 바로 읽은 것은 아니다. 먼저 이수영 선생님이 쓴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을 만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읽기의 짜릿함’. 그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느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에티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책 중에 가장 완벽한 책이다”라고 찬탄했다. 매우 논리정연하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훔치는 그런 매혹적인 책이었다. 읽으면서도 읽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운, 그런 책이었다. 에티카를 덮을 때쯤, 다시 니체가 떠올랐다. 니체는 <에티카>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나에게 선구자가 있었다네. 그것도 얼마나 놀라운 선구자인가! 나는 스피노자를 거의 모르고 있었지. … 그의 전체적인 경향 - 즉 인식을 가장 강력한 감정으로 만드는 것 - 이 나와 같을 뿐 아니라,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네. … 그는 의지와 자유, 목적론, 도덕적 명법, 비이기적인 것, 그리고 악 등을 부인했어. 설령 차이가 많다고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주로 시대와 문화, 그리고 학문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야. 한 마디로 산마루에 올라 혼자라는 느낌이 이제 적어도 둘이라는 느낌이 되었네."

그들은 3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마주했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그는 <에티카>로 스피노자의 저벅저벅한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도 그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었다. 나도 그 옆에서 발걸음을 따라 걷고 싶었다. 니체는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공감했던 것인지, 내가 공감했던 것과 무엇이 비슷한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니체로 넘어가는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 스피노자는 뒤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를 더 탐색하고 싶었다. 그가 주는 즐거움은 너무 크기에, 한번에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니체와 괴테, 들뢰즈를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많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방향, 현재로썬 ‘그들의 철학'을 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니체를 만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강의 준비와 강의 시간을 빼곤 나머지 시간에 나는 니체를 만나고 있다. 우선 이진우 교수가 쓴 기행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를 읽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이문회우에서 주최하는 김동국 선생님의 특강<신의 죽음, 예수의 죽음>도 찾아 들었다. 20차시 정도의 정기 수업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엊그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조금 읽었고 발췌독했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봤던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를 한번 더 복습했다. 암튼 이 정도 니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중간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 마주했던 책과 강의에 나의 의견은 많이 빚지고 있고, 아직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설하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먹기만 해서 변비에 걸렸으니까.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은 너무 많이 하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그들은 대식증과 이따금씩 생기는 복통을 동시에 갖고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야위어간다.” 아마, 올해 들어서 니체에 자연스래 관심이 가게 된 것도 배설에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어떤 두려움도 없이 표현하는 것. 나에게 잠재된 창조적 자아를 깨우는 것. 그 시작은 니체에의 탐구다.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니체로 넘어가기로 하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데 나는 왜, 하필 철학책을 읽는가?
내가 책을 읽은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나는 그저 충동적으로 책을 읽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읽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치지어린 애송이 독서가에 불과했다. 일년에 몇권을 읽었느니 그런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요즘 들어서야 나는 내가 왜 책을 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보는 이유는 결국 ‘삶을 잘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답을 한다. 왜냐면 삶은 결국 반응이고, 그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가진 세계관, 고정된 인식의 틀>이라고. 나의 세계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아들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의 경험이 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의미부여가 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삶은 크게 일어난 일과 해석으로 나뉜다. 우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흔히 접하는 예로 컵에 물이 반정도 차 있을 때 누군가는 ‘반밖에 남지 않았네’ 라고 해석하고, 누군가는 ‘반이나 남았네’라고 해석한다는 것. 그 해석을 통해 우린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삶이 펼쳐진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월요일 아침, 바쁜 출근 길에서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매우 기분이 더럽다.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라 회사에 가기 싫은데 말이다. 성격이 급한 누군가는 욱해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을 가정하자. 극단적인 예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 똑같은 욕을 들었다고 치자. 우린 어떻게 반응하는가? 월요일 아침과 같은 반응일까? 아닐 것이다. 그저 허허 웃고 지나갈 것이다. 무엇이 바뀐 것인가? 상황에 바뀐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훨씬 더 너그러워진 인식 속에선 그 정도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해석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내가 가진 관점, 세계관, 인식의 틀’이며, 그 세계관을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책은 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선 ‘내가 가진 세계관’을 잘 정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로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그들이 가진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이란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결코 교과서로는 습득되지 않는다. 인식이란 것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방법들이 지금으로썬 독서 토론이나 디자인씽킹, 프로젝트 학습이다. 다양한 생각과 체험을 통해 삶에 유익한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앞으론 철학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싶기에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도 하고. 암튼, 나는 철학자들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던지는 자들이다.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해석 체계를 버리고, 내가 던져주는 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써 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특히 철학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읽기의 혁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읽고 나면, 새로운 눈을 갖게 되고, 한번 눈을 뜬 자는 다시 감을 수 없다.

철학자들도 다른 철학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경험한다. 탐구하고, 숙고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눈을 발견한다. 1865년 10월 어느날,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의 노력은 내 자신에게 맞는 삶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행복하게 은둔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읽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상상해보라. 어느 날 나는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내겐 전혀 낯선 이 책을 집어 들고는 몇 쪽을 넘겨보았다. 나는 어떤 마귀가 ‘이 책을 들고 집에 사라’고 나의 귀에 속삭였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책을 좀처럼 서둘러 사지 않는 나의 습관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집에 와서 막 획득한 보물을 갖고 소파의 귀퉁이에 몸을 던지고는 저 에너지 넘치고 암울한 수호신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읽기의 혁명성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서 한권 소개한다. 일본의 니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 굉장히 재미있지 않은가?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하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은 무엇인가?
니체는 이런 사람이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한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된 사람. 34세에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알프스 산맥을 방황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을 개척한 사람. 44세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었던 사람. 이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의 짧은 약력이다. 나는 니체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짧게나마 내가 느낀 니체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에게 니체는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의 삶은 예민 그 자체였다. 강신주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상처에 둔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아파했다. 수 많은 여성들 그리고 트라우마 속에서 자랐고, 평생 아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인생의 절반을 심각한 두통에 시달린다. 어릴 적 너무 많은 책을 보고, 눈이 나빠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쨌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니체의 위대한 면이 나온다. 그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한다.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위버멘쉬, 초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쓰고, 생각하고, 또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언제나 아파했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 아픈 것들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아마 그들로부터 자신의 맨살을 봤던게 아닐까? 그가 죽기 얼마 전, 마차에서 매 맞는 말을 부둥켜 앉고 오열한 장면은 그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러한 니체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 나는 ‘힘에의 의지’를 꼽는다.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엔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얼마 전에 다시 보았는데, 이진경 선생님이 쓴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도 권력에의 의지라고 나오더라. 이진우 교수도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한다.) 이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와도 비슷한 개념인데,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모습으로 있고자 한다는 것. 즉,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심지어 약자도 권력을 추구한다. 그들은 강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삼는다. 모든 생명은 그러하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니체는 이렇게 ‘힘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언제 강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책을 볼 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받을 때, 가족들과 함께 연결된 느낌을 가질 때. 그럴 때 강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 활동을 반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힘에의 의지’다. 내가 매월 심톡을 개최하는 것도 단순하다. 그 활동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나의 기쁨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권력 욕구도 없는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혹시 주말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기를 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권력을 추구하는 자다. 왜냐면, 누구에세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자유롭게 쓰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자 권력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말을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얼마나 주말을 간절히 바라는가? 그렇기에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자명하게 들린다. 



니체 전집 / 책세상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가?
이 시점에서, 니체가 기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설명 된다. 니체가 보는 기독교의 논리는 이러하다. “지금 고생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목사였다. 그리고 니체 역시 그에 순응하면서 자랐지만, 결국 맹목적 믿음에 저항한다. “네가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믿어라. 네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한다면, 탐구해라.” 마음의 평화는 니체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진리의 사도이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의 내세가 현세의 ‘힘에의 의지’를 거스른다고 보았다. 이처럼 니체는 ‘믿음’이란 개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그리스도교는 오직 예수 한명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제들의 종교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의 말에 나 역시 일견 동의한다. 어쩌면 기독교의 숨겨진 메시지는 그의 말대로 ‘사랑’이 아니라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재작년에 로마의 카타콤을 들린 적이 있다. 그곳은 어둡고, 답답하고, 음침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간 수 많은 초기 기독교도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에게 분명 ‘사랑’이 남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곳은 ‘복수심’이 자라기 좋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이렇게 지내지만, 내세에선, 하늘나라에선 ‘두고보자’는 복수심.”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부폐한 한국 교회나 사이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목도한다. 길거리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물론, 참다운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니다. 참다운 종교는 언제나 죄와 벌이 아닌, 현재를 이야기 하니까.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보상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죄>, 즉 신과 인간 사이를 멀게 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 -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네 안에’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은 예수를 치켜세워 ‘신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어버렸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았던 대로, 그가 가르친 대로 죽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뜻에 맞게 살았고, 행동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그걸로 이미 완전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힘에 의지’에 따라 살았다. 그 완전한 존재를 불완전하게 만들고 의지한게 어쩌면 사도 바울을 위시로한 사재단이 아닐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니체는 목 놓아 외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그래야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사람들이 다시 ‘힘에의 의지’를 되찾지 않을까? 내세를 위해 지금을 무기력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해서.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니체의 이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게 한다.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소멸. 뒤를 이어 찾아온 허무주의의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신이 죽은 시대다. 종교적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내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돈’을 이야기한다. 벤야민이 얘기했듯, 자본주의라는 ‘세속화(secularization)’된 종교가 우리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린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앞서 말했던 기독교가 ‘내세’를 이야기한다면,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는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둘 다 본질은 같다. 종교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못 살게 하고, 자본주의는 퇴직 이후를 걱정하게 하느라 지금을 못 살게 한다. 그래서 이 ‘의미의 소멸’ 앞에서 우린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허무주의가 문 앞에서 서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로마 카타콤 내묘실



이러한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앞서 논리를 정리해보자. 니체는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그와 반대되는, 되려 힘을 억압하는 논리를 폈으며, 니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안전한 믿음을 부수고, 불안한 진리를 찾아서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신은, 진리는 없다는 것. 이러한 불안한 의미의 소멸이 가져오는 허무주의 앞에서 니체는 어떤 대안을 내놓았을까? 그는 기나 긴 사유 끝에 ‘영원회귀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그건 1881년 8월, 그에게 찾아온 번뜩임이었다. 질파플라나 호수가 가져온 선물. “이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력을 이야기하련다.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 즉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적 정식은 1881년 8월의 것이다. 그것을 종이 한 장에 휘갈겨 쓰고, “인간과 시간의 6천 피트 지면”이라고 서명했다. 그날 나는 질파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주글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때 이 생각이 떠올랐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지금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고 소리친다. 그저 지금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너는 지금 강해지고 있는가? 너의 '힘에의 의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래서 강신주 선생님을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정오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묻는다. 그는 진리를 부정한게 아니라, 진리의 자명성을 부정한다. 그는 오로지 회의하고 순간에 산다.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나는 지금 이 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열렬히 맞이할 수 있는가?" 나에겐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딱 5분만 있다가’ 아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아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어떤 일이든 그 순간 해 버린다. 성격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언제나 느릿느릿. 해야 할 일도 ‘딱 5분만 있다가’ 한다. 그런데 막상 ‘5분 있다가’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순간 순간에 살지 못한다. 시간의 찰나성을 언제나 간과하는 것이다. 나에게 마치 영원한 시간이 허락될 것 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곤 언제나 후회한다. 지금의 이 삶을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무엇을 고쳐 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내 자세를 고쳐잡게 만는다. 나에게 힘을 뺏는 것들을 멈춘다. 나는 또 한번 다짐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무분별한 욕망에 선을 긋고, 진정으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다. 그렇게 자유로울 때 나는 이 삶을 다시 영원히 반복하고픈 욕망에 빠진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삶의 예술가
우리의 삶, 모든 생성과 죽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은 ‘목표’를 쫓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할 수 있을까?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단이다. 하지만, 만약 목표가 없다면 무엇인가? 니체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최종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문을 뒤집어 보자. 삶은 어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목표다. 이 답에서 나는 시지프스를 떠올렸다. 당신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는가? 그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굴리지만 그 바위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을까? 신의 노여움으로 영원히 돌을 굴리는 형벌에 처했지만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멈춘다는 것은 신께 굴복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신에게 반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거창한 목표 따윈 없다. 그저 내 앞에 놓여진 돌을 굴릴 뿐이다. 순수하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롭다는 것은 양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처럼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상의 지루함은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형벌과도 같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감내한다. 인생을 살만하다고 느끼기 위해선, 일상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일상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형벌이다. 최대한 피하고 싶은, 굴리기 싫은 돌이 되버린다. 내가 그런 편이다. 일상은 내 삶에서 어느 새 뒤처지기 마련이더라. 나에게 권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등 우리에게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이 일상을 이제 목적으로 바라보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 마치 처음 설거지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경이감이 어느새 익숙함이 되어버리지 않게 스스로를 경계하자.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허용된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그렇게 살자.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하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자, 니체가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제 드디어, 니체의 초인, 위버멘쉬가 등장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이제 니체는 쉴세 없이 몰아친다. 위버멘쉬에겐 사람이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들은 별이다. 니체는 이렇게 통탄한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인간말종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빡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 말종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 그 자가 인간 말종(말세인)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경멸할 수도 없다. 어떤 일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 그 역동성. 이제야 그의 ‘정오의 사상’이 환히 빛을 발한다. 


낙타와 어린아이


당신은 어떤 혼돈을 품고 있는가?
이제 마지막 장이다. 니체는 이제 인간말종(말세인)에서 초인이 되는 길을 제시한다. 한번 따라가보자.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엇은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 짐깨나 지는 정신는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첫번째, 그 시작은 낙타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현실에 안주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안에서 낙타를 본다. ‘5분만 있다가’라고 말하는,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합리화하는, 타협하는, 수동적인, 그런 낙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낙타가 산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낙타는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섬겨온 신, 그리고 주인을 죽인다. 낙타가 ‘해야한다’를 의미한다면, 사자는 ‘하고싶다’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 사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자에게서 주체성, 혁명을 본다. 나도 내 안에 사자를 들여다 본다. 전공을 거스르는, 양심에 따르는, 주위 사람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사자를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 사자도 산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사자는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 그리고 진지하다.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인가? 망각이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다. 그는 어떤 ‘목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한 ‘자기원인!’ 그 어떤 목적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순간’에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도 내 안에 어린아이를 본다. 하지만 아직 잠들어 있다. 가끔 깨어나서 뭐라고 하지만, 금세 잠에 빠진다. 

'니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제 이 질문은 헛되다. 되물어보자. 니체가 던지는 새로운 눈을 장착해보자. '나는 니체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가?' 우린 별자리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별자리에 그려진 수 많은 그림은 이제 지워졌다. 스스로 별자리를 그리고, 이름 붙여야 하는 시대를 우린 건너고 있다. 그 어떤 정해진 답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말했듯, 오로지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의미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즉,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기억하자. 세상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 말. 그 말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 이제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두번째 목소리는 바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말 조차 허무하다는 말이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제 그 텅빈 하늘에서 당신는 어떤 별을 탄생시킬 것인가? 당신의 혼돈은 당신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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