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연초에 소설을 읽는 습관이 있다. 유래나 이유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추측건대 새해가 되면, 지난 1년간 수고한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게다가 겨울이다. 어느 때 보다 소설과 잘 어울리는 계절. 

그렇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장편으로. 

작년 2016년에는 ‘은하영웅전설’을 골랐다. 삼국지와 함께, 내 중학교 추억을 다시 떠올릴 만한 책. 20년을 지나 다시 읽으니, 느낌이 참 달랐다

시에는 ‘전략과 전술’을 중심으로 읽었다면, 지금은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심이 모아졌다. 

나의 우상이자, 동맹군 최고의 지장, 양 웬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멋있더라.


올해는 어떤 책을 볼까, 잠시 망설였다. 그렇게 고른 책이 ‘눈물을 마시는 새’다. 은영전과는 달리, 이 책은 처음 읽는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15년 만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드래곤 라자 이후에 이영도 작가의 책도 처음이다. 

공부를 대단히 한 것도 아닌데, 당시에는 왜 읽지 않았을까. 요즘은 정말 그렇다. 그 시절에 공부 안 한건 별 상관없지만,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은 정말 후회된다.

마음만 먹으면 정말 원없이 읽어볼 수 있었을 텐데.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에이. 후회하면 뭐하나. 지금부터라도 많이 읽는 수 밖에. 판타지 소설이라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설레었다.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까. 잘 모르겠지만, 가볍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 



첫 번째 인상깊은 부분은 이영도 작가 특유의 수려한 ‘문장’이다. 기억에 남는 몇 개의 표현을 옮겨보고 싶다.

소설과 거리가 먼, 누구보다 매마른 정서를 가진 나로선, 이런 표현들이 그저 좋았다. 

판타지 본연의 역할, 나를 저 먼곳으로 옮겨놓는 것, 에 충실한 문장들. 그 때문에 소설 읽기 그 자체가 즐거웠다. 


“서녘으로 지는 해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 빛을 뿌릴 때, 숲이 일몰의 애가를 부르기 시작할 때, 숲의 머릿결 사이로 새어드는 주홍빛 광선들이 질감을 가진 피륙처럼 허공을 미끄러질 때, 딱정벌레를 쓰다듬던 도깨비가 문득 돌아보며 익살맞은 미소를 지을 때, 케이건은 내일이라는 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키보렌의 어둠은, 딱딱한 너무 등걸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슬로 몸을 씻고 음습한 초향 속에서 태양을 향해 소리 없이 호곡하는 그 어둠은, 신록으로 자신을 뒤덮은 대지가 완강히 햇살을 거부한 채 터무니없이 긴 시간 동안 키워온 밤의 사생아였다."


두 번째 인상깊은 것. 그것은 바로 ‘리더’에 대한 고찰이다. 그렇지 않아도, 리더십에 대해서 관심이 많던 차라 더욱 그렇게 보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눈마새’에서 가장 유명한 질문이 등장한다. (지금부턴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한다.)


“네 마리 형재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 

“눈물을 마시는 새요.” …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이해가 되는가?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문장이다. 눈물과 피. 그리고 물과 독약. 아직은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명확하게 말한다. 

여기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왕’이라고. 그래서 왕은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는다. 

그리고 왕이 사람들이 눈물을 다 마셔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물 없는 비정한 자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기선 각자의 해석이 필요하다. 나는 여기서 나의 해석을 던지고 싶다. 리더의 본질. 


리더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헌신'이다. 그 말인즉슨, 자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결국,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는, 리더가 아니다. 새치 혀로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려는 자는, 리더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리더는 ‘부자연스러운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그래서 희귀하며, 가치있으며, 목숨이 위태롭다. 그런 각오가 있는 자만이,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오는 북부의 왕, ‘사모 페이’는 그런 점에서 진정한 왕이다. 

신을 잃어버린 두억시니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륜 페이를 살리려 하는 그녀는 

종족과, 성별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하여 진정한 왕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결국 리더십은 능력이나 권력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욕망을 품고,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 리더는 탄생한다. 

그렇기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리더는 선택하는 것이고, 또한 바쳐지는 것이다. 왕관의 무게는 아무나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인상깊은 것은, ‘신과 인간’의 차이점이다. 

인간과 신은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은 믿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것은 동서고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시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진실이다. 우린 단 한번도 ‘진실의 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오해하고, 자신의 기준에 끼워맞춘다. 심지어 ‘신과 자연’ 마저도. 

하지만 신은 다르다. ‘모든 것’을 인정한다. 말 그대로, ‘가능성 그 자체’이다. 결코 한 두 가지 만을 취사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과 인간의 차이점이다. 여기서 도깨비의 신, 시우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우쇠가 라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흥! 죽을 필요가 있어서 죽는 인간도 있느냐?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 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인정한다는 것이다. 윷가락 네 개는 한꺼번에 던져져야 한다. 

그 중에서 배를 보이는 것, 혹은 등을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윷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이다. 

페로그라쥬 사람들과 악타그라쥬 사람들이 분노한다면, 그 놈들은 놀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얼간이들에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인간에겐 ‘죽음’이지만, ‘신’에겐 ‘생성’이다. 삶을 일부만 긍정하는 것과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 그 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수준의 ‘강’이 놓여져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게 뭐야. 세상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인생이 뭐 이래.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언제나 생명과 파괴는 동시에 일어난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진 방식이다. 


“인정하지 않겠다고?"

“예."

“우리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너희들을 먹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었지"

“먹는다고요?"

“그래. 먹는 것. 그게 너희야. 그게 생명이지. 모든 동물들이, 식물들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먹는다. 

먹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지. 우리가 만든 것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이 벌이는 모든 짓거리의 경계엔 큰 글씨로 뚜렷하게 적혀 있지. ‘일단, 먹고 나서.’” 


인정하기 싫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하고, 고결한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에 ‘먹고 나서’가 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신과 동물, 그 사이에 놓인 무엇이다. 인생에는, 자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가진 슬픔에, 기쁨에, 놀라움에, 권태에, 사랑에, 증오에, 평화에,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혼란의 도가니였고, 또한 평화 그 자체였다. 가장 고결한 것과 가장 비참한 것은 언제나 함께 한다. 

문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의 장막에 가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변화란, 있는 그대로를 이해할 때, 삶의 전체를 인정할 때, 세상에 뛰어들 때, 일어나는 법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구경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인정하고, 세상에 참여하라. 

그리고,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라. 행동하라. 그것이 이 소설이 나에게 주는 교훈이다. 





추신.

이 책을 보다 보면,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인생’이 떠오른다. 

마치, 이영도의 입과 손을 빌려, 캠벨이 말하는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이 있기에, 잠깐 옮긴다.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이 부서져야만 한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이 살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1. 2021 2021.01.23 03:44

    네마리의 새에 대한 제 생각으로는 각각 네종족을 상징한다 생각되네요.
    물은 레콘을 피는 도깨비를 독은 인간을 눈물은 나가를 상징한다 생각합니다.
    레콘은 물을 두려워하지만 다른 세 종족은 두려워하지않으며 피는 오직 도깨비들만이 두려워하는 액체고 독은 오직 인간이 인간에게만 사용하는 것이며 나가의 눈물은 다른 세종족과는 다르다고하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왕을 상징한다는것은 나가가 왕이 된다는것을 뜻한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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