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서의 영향이란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P.28-29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같은 문장에 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 사람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비열한 인간은 라신을 읽는다 해도 비열한 인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반대로 선한 사람이 나쁜 책을 읽는다 해서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독서의 나쁜 영향은 그것이 주는 좋은 영향력만큼이나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그러할 테지만 세상은 유익한 것만을 사랑한다. 이런 세상에서 책은 생존하기 위한 길을 걸어왔고, 그래서 문학 또한 도덕적이 되거나 비도적적이 되어야 했다. 


-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경험에 의하면, 한 두 번의 독서로 대단한 인생 반전을 노리는 사람일수록 진짜 독서가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독서가는 커녕, 단지 책을 통해 자신의 성공과 영리를 추구할 뿐이다. 아마추어 독서가인 나의 기준에서, 진짜 독서가는 책을 통한 변화에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읽어나갈 뿐이다. 독서가들에게 독서는 마치 삼시새끼와 같다. 아무리 좋은 밥이라도 한 두끼의 밥이 우리의 건강을 변화시키지 못하듯, 책도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더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심지어 ‘꾸준한 독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한다. 그저 아주 살짝 더 온전한, 인간다운 인간,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운이 나쁘면 이것도 요원하다. 그게 내가 책을 읽으며 얻는 답이다. 오랫동안 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난 여전히 몇년 전에 감동 했던 문장에 새삼스레 또 놀라고, 줄 쳤던 곳에 또 줄치고, 그렇게 위로받는다. 언제나 철이 들까. 언제나 좀 더 나아질까. “수 많은 책 들아, 지금까지 너희는 뭐 했니?” 라고 ‘근무 태만’을 묻고 싶을 지경이다. 밥값이 아니라 책값도 못하는 것들. 그럼에도 또 책을 산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내 모습에 대한 놀라운 자각이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배움이다. 쉽게 기적을 꿈꿔선 안 된다. 


#2.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P.30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거시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문제는 책이 도구로 전락하면서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가 입장에서 볼 때 책은 본래 주제에서 멀어진다. 독자는 독자대로 자신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는 모욕을 느낀다. 


- 나는 세상의 책을 두 종류로 나눈다. ‘팔리기 위한 책’과 ‘읽기 위한 책’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전자의 책은 ‘수단’이고 후자의 책은 ‘목적’이다. 팔리기 위한 책의 목적은 ‘사람들 손에 쥐어지는 것’이고, ‘읽기 위한 책’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뭐 그래 봐야 밥 한끼 밖에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책은 '뇌의 소중한 밥이자, 반찬이며, 국이다’ 그 목적을 잃어버린 책들은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 아직 책 한 권 써보지 못한 입장에서, 책을 쓰는 저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의 나에게 말할겸 한 마디 하고 싶다. "니가 나중에 무슨 책을 어떻게 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나무에 대한 예의는 지키자. 이 자식아."

종종 그런 책을 본다. 책의 내용이나 메시지보다 책이 되어버린 나무가 생각나는 책. 사람에게 잘못된 정보는 주는 책, 대중을 속이기 위한 책, 자기 변명을 위해 존재하는 책. 책을 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영달을 꽤하는 책. 책보다 나무가 먼저 생각나게 하지는 말자. 그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어느새 나는 ‘책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나의 목적은 ‘글을 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치약을 짜듯 나의 뇌를 쭉 짜면 글이 쏟아지는 그런 사람. 홀로 독방에 갇히더라도, 혼자 글을 쓰고 그걸 읽으며 자족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나의 목표다. 별거 아닌거 같은데 참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책을 하나 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3. 이기심에서 책을 읽지만, 우린 결국 이타심을 얻게 된다. 

P.39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다. 애당초 책을 읽을 때 이타심 같은 것은 원한 적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 

- 이것이 바로 책의 습격이다. 내가 갈구하는 것. 나는 피해자고, 책은 가해자다. 문제는 피해자는 가해자의 일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어디서 얻어 맞을지 알 수 있을까? 그렇기에 언제나 나는 기습 당한다. 예를 들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을 때 그랬다.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책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아프가니스탄’ 한 가운데 놓여졌다. 그들의 삶이 들어왔고, 없었던 관심이 생겼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얻었다. 물론, 영화도 그림도 이 역할을 한다.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 바로 ‘타자 되어보기’다. 하지만 책 처럼 충실한 자는 없다. 상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그래서 ‘타인’이 되어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이타심을 원하지 않더라도 얻게 되는 것이 독서이며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4. 책은 평화롭게 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P.42 
책이 경전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책은 신앙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며, 작가 또한 신이 아니다. 우리는 작가를 사랑할 수도 있고, 난도질을 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은 자들이라도 평화롭게 쉬도록 놓아두는 것에 반대한다. 평화 속에서 영면하도록 내버려진 작가는 이 세상과의 인영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 위대한 책은 걸레가 되어야 한다. 유명한 책일수록 더 많이 읽혀지고, 난도질 당하고, 잘리고, 죽는다. 그리고 부활한다. 새로운 컨텐츠로.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비판하지 않는 책도 있다. 그런 책은 그렇게 멀쩡하게 죽는다. 책은 난도질 당해 살아나거나, 멀쩡하게 죽거나. 이 두 가지 결말을 기다리며 태어난다. 책도 이럴진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마찬가지 아닐까. 세상과,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우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의외로 쉽다.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싸울 일도, 다툴 일도 없다.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 나는 두렵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받은 대로, ‘눈에 띄지마’ ‘중간만 하면 된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어느새 그렇게 살기가 싫어졌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툰다. 하지만, 멀쩡하게 죽기는 싫다. 난도질 당해 살아남고 싶다.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다. 


#5.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

P.91
왜 책을 읽는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둠은 인식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문학의 일부이다. … 우리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결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기 위해 책을 읽는다. 

- 마지막 질문.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처음에는 뭐라도 해야 할거 같아서 읽었고, 그것은 어느새 즐거움이 되어 버렸다. 운동도 모르고, 술과 담배도 모르는 나는 인생에서 즐거움이 별로 없다. 그 중 하나가 책이다. 그런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가끔 ‘커다른 기쁨’도 데리고 온다. 언제 기쁠까? 하나는 ‘발견’이다. 하나의 책을 보고, 그와 연결된 다른 책을 볼 때의 즐거움. 혹은 어떤 책을 보고 그와 전혀 상관없는 책을 보면서 예전의 책이 이어지는 느낌들. 그렇게 책과 책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관성을 '발견'할 때 나는 커다란 기쁨을 맛본다. 두 번째는 ‘깊이’다. 나 혼자선 도달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생각과 성찰에 닿을 때, 그때 경험하는 전율이 있다. 대부분 책의 인도로 따라 가다 보면 얻게 되는 부산물 들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본다. 그 외엔 달리 딱히 할 일도 없고, 이보다 즐거운 일도 없기에. 





#6. 무언가를 가르치는 책들에 대한 혐오

P.94 
나는 문학을 향한 지독히 편파적인 애정 때문인지 무언가를 가르치는 책들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는 책들은 문학을 타락시키는 것만 같다. 나는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한다. 

-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사실,이 말을 이해하기 까지 꽤 걸린 것 같다.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은 ‘가르치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큰지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가르침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책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기억 남는 예시가 있다. 우연히 정유정의 ‘종의 기원’과 조정래의 ‘들풀도 꽃이다’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종의 기원을 읽을 때, 그 이야기는 나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내 삶을 반추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라고 되돌아볼 수 있었고, 내 주위 사람들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조정래 작가의 책을 볼 때는 뭔가 ‘탁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계속 화자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래야 한다고. 아니, 저래야 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욕심. 그 욕심이 빤히 보이는 책. 아무리 그 메시지가 의미있더라도, 그 욕심 때문에 진의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피곤했고 책을 덮었다.  


#7. 독서는 선이 아니다.

P.100 
독서는 선이 아니다. 어린이에게는 물론 어른한테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자마자 독서에 대한 마음이 싹 사라진다. 

- 내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은 것은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위인전이 있었다. 남들 다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평범한 위인전이었다. 다 합쳐서 60권 정도가 되었을까. 나는 그 위인전에 관한 한 대단한 편식가 였는데, 내 마음에 든 편만 골라보기에 바빴다. 10명도 안 되는 위인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나머지 위인들엔 손도 대지 않았다. 굳이 왜 안 읽었냐고 하면, 이름도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은 위인들을 뭐하러 읽어야 하냐. 그런 생각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편애했던 2명이 있다. 바로, 김유신과 이순신이다. 남자라면, 역시 장군이지. 어럼픗 기억나는 어느 주말이다. 내가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 이순신 이거 5번도 넘게 읽었어!"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이고 잘했다고 칭찬했다. 별거 아닌 기억이다. 하지만, 나는 기뻤다. 엄마는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에게 그 어떤 책도 읽으라고 권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때 엄마가 화를 내며, "왜 그것만 읽어! 너 자꾸 편식할래! 남은 책은 다 버릴꺼야?"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책을 읽지 않을꺼란 극단적 결과까지는 아니어도, 지금보다 덜 흥미로워 했을 것은 분명하다. 책은 놀이와 같다. 철저히 초대 받아야 한다. 거절할 자유도 그의 것이어야 한다. 선택할 수 없을 때, 독서라는 놀이는 노동이 되고 의무가 된다. 독서는 결코 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놔 두라고' 권한다. 혹은 먼저 읽던가. 독서를 권하는 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많은 경우에, 그건 그저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마치 누가 나보고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르는 순간, 식욕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 


#8. 어쩌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P.216 
책을 읽으며 열정의 도가니에 빠지는 것은 종종 작가가 되기 위한 징후다. 읽고, 또 읽고, 자꾸 읽으면 거의 자동으로 쓰는 단계에 이른다. 어쩌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을까? 먼저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일종의 모방작이란 말인가? 책 읽는 사람이 없는 사회에서는 글 쓰는 사람도 없다. 

- 몇년 전에 우연히 인상깊게 본 동화책이 있다. <책 먹는 여우>라는 책인데, 그 여우는 책을 읽고 나면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꿀꺽 먹어 버린다. 서점에서도 먹고, 도서관에서도 먹고. 결국 그러다가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힌다. 형벌은 독서 금지. 어떻게 했을까? 여우는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고, 직접 글을 쓴다. 결국 자신이 쓴 글이 가장 맛있다는게 결론이다. 나는 아직 동의하진 못하겠다. 내가 쓴 글보다 다른 훌륭한 작가들의 글이 더 좋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 글도 좋아지고 있다. 언젠간, 적어도 나에겐, 가장 맛있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또 노력한다. 


#9.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의 운명

P.217 /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 … 명심할 것은 타인의 책이 내 책의 막힌 곳을 뚫어주었다면, 나 역시 내 책의 막힌 곳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내가 이러려고 글을 쓰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때때로 자괴감에 빠진다. "이 글이 어떤 가치를,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럴 때 되짚어가며 읽어야 할 문장이다. 맥락을 좀 바꿔보자.  "타인의 책이 내 인생의 막힌 곳을 뚫어주었다면, 내 책도 다른 이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받았으면, 다시 돌려주는 것.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세상에 놓여졌고, 무언가를 소비하고 파괴하면서 나를 유지시켰다. 그랬다면, 나 역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장 정당한 사유, 사색 

P.255 
사색이야 말로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독서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피리 부는 사람 앞에 놓인 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반대로, 사색을 제외하고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는 없다. 또한 깊은 독서는 그 자체로 사색을 이끌어 낸다. 평소의 나의 생각으론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독서는 도달하게 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경험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에 나를 닿게 한다. 그렇제 나의 지평은 넓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사색과 독서를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어떤 자극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깊이 향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작위적 연결'은 그때 발생한다.  



  1. 조아하자 2017.01.15 22:52 신고

    사실 저도 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변화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 최악의 제 자신에서 최악을 조금 벗어난 제 자신으로 변한 것 정도? 책읽기 전에 저는 뭔가 잘못되면 제 자신을 자해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책읽으면서 이거 하나는 고쳐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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